한눈에 보는 야고보서 (재개정판) 3장 형제들아 말실수하지 말라
3장 개요
✙✙✙ 3장 구절
야고보서 3장에서 대표적인 구절을 선정한다면 형제들에게 말실수하지 말라고 언급하고 있는 1절과 2절입니다.
3:1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 알고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 3:2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
✙✙✙ 3장 주제
야고보서를 행함의 관점에서 볼 수 있습니다. 말씀을 행하는 형제가 되라는(1:22) 것입니다.
그렇게 행할 때 믿음이 온전해지고(2:22)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게 된다는(1:25)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 행함이 없으면 아무런 유익이 없고 그러한 믿음으로는 자기를 구원하지 못한다는(2:14) 것입니다.
야고보서는 형제들에게 이러한 행함을 강조하면서 행함을 위하여 행함에 대한 다섯 가지의 실천과제를 제시해주고 있습니다.
이 가운데 3장은 말실수하지 말라는 실천과제를 제시해주고 있습니다. 말이 많아서 말실수하는 형제가 되지 말라고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3장은 이러한 흐름이 있으므로 이와 관련된 주제를 도출해 본다면 형제들아 말실수하지 말라가 됩니다.
✙✙✙ 3장 구조
야고보서 3장은 형제들에게 말실수하지 말라는 것에 대한 것을 언급해주고 있습니다.
야고보서 2장은 경제생활에 대한 것이고 3장은 언어생활에 대한 것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말조심하라는 것인데 선생과 말의 재갈과 배의 키와 불을 예로 들면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시기와 다툼의 여부는 땅 위의 것이냐 위로부터 난 지혜냐에 따라 달라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하므로 3장에서는 말실수하지 말라는 관점에서 풀어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3장은 모두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1-12절은 말에 실수가 없는 형제가 되라, 13-18절은 위로부터 난 지혜로 행하라 입니다.
첫 번째 부분인 1-12절은 말에 실수가 없는 형제가 되라는 것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1-4절에서는 말에 실수가 없도록 하라는 것을 선생과 말들의 입에 재갈 물리는 것과 배의 작은 키를 비유로 들면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5-8절은 재갈과 키의 역할을 하는 것은 혀라는 것입니다. 혀를 불로 비유하면서 모든 짐승과 생물들은 길들일 수 있는데 혀는 그렇게 하지 못하므로 혀는 악이고 죽이는 독이 가득하다는 것입니다.
9-12절은 한 입에서 찬송과 저주가 나온다는 것입니다. 샘을 예로 들면서 무화과나무와 포도나무를 예로 들고 있습니다. 짠 물이 단 물을 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부분인 13-18절은 위로부터 난 지혜로 행하는 것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13-14절은 지혜와 총명이 있는 형제가 되려면 선행하고 시기하거나 다투지 말고 거짓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15-16절은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는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라 땅과 정욕과 귀신의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17-18절은 위로부터 난 지혜는 성결하고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견과 거짓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지혜를 가진 자들은 화평하게 하는 자들로 말싸움하지 않고 화평으로 의의 열매를 거두게 된다는 것입니다.
3장 개관
단락 | 단락별 개요 |
1-12 | 말에 실수가 없는 형제가 되라 |
13-18 | 위로부터 난 지혜로 행하라 |
3:1-12 말에 실수가 없는 형제가 되라
야고보서의 주제는 행하라는 것이고, 3장의 주제는 말실수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가운데 1-12절 단락은 말에 실수가 없는 형제가 되라는 것입니다.
이 가운데 1-4절에서는 말에 실수가 없도록 하라는 것을 선생과 말들의 입에 재갈 물리는 것과 배의 작은 키를 비유로 들면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5-8절은 재갈과 키의 역할을 하는 것은 혀라는 것입니다. 혀를 불로 비유하면서 모든 짐승과 생물들은 길들일 수 있는데 혀는 그렇게 하지 못하므로 혀는 악이고 죽이는 독이 가득하다는 것입니다.
9-12절은 한 입에서 찬송과 저주가 나온다는 것입니다. 샘을 예로 들면서 무화과나무와 포도나무를 예로 들고 있습니다. 짠 물이 단 물을 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 3:1-4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
1-4절에서는 말에 실수가 없도록 하라고 언급해주고 있습니다.
그러한 것을 선생과 말들의 입에 재갈 물리는 것과 배의 작은 키를 비유로 들면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말조심하여 말에 실수가 없는 형제가 되면 능히 온몸도 굴레 씌우는 온전한 형제가 된다는 것입니다.
3:1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 알고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
야고보는 새로운 주제를 제시하면서 이를 강조하기 위하여 3장을 시작하면서 먼저 내 형제들아라고 하면서 권면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주제는 말에 실수가 없도록 하라는 것인데 그러한 것을 1절에서는 선생에 비유하여 언급하고 있습니다.
⚫ 선생이(διδάσκαλοι, 디다스칼로이)는 “교사들이”라는 뜻입니다.
선생이라고 언급한 것은 직업상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이렇게 말을 많이 해야 하는 선생이므로 말을 많이 하다 보면 실수할 수 있습니다.
때로는 말만 하고 행함이 뒤따르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마치 2장 15-16절에서 언급한 것처럼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 형제에게 말만 하고 몸에 쓸 것을 주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더 큰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이러하므로 더 큰 심판을 받을 것을 알고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그러한 것을 우려하여 가르쳐주셨습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말하는 것은 행하고 지키되 그들의 행위는 본받지 말라고 하셨는데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 아니한다는 것입니다(마 23:3).
이와 같으므로 행하면서 가르치는 자가 천국에서 크다고 일컬음을 받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마 5:19).
이처럼 말로만 한다거나 말할 때 실수할 수 있으므로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을 많이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라는 것입니다(1:19).
3:2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
2절은 우리 모두가 말에 실수가 많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능히 온몸도 굴레 씌우는 온전한 형제라는 것입니다.
⚫ 앞에 나오는 실수가(πταίομεν, 프타이오멘)는 πταίω(프타이오: 비틀거리다, 걸려 넘어지다, 실수하다, 범죄하다)의 동사 직설법 현재 능동태 복수입니다.
⚫ 뒤에 나오는 실수가(πταίει, 프타이에이)와 2장 10절의 범하면(πταίσῃ, 프타이세)과 동일한 어원입니다.
이러한 것을 원어성경에 있는 γὰρ(가르: 참으로, 사실은, 왜냐하면, 그러면)도 감안해서 보면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 실수가 많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 굴레 씌우리라(χαλιναγωγῆσαι, 칼리나고게사이)는 χαλιναγωγέω(칼리나고게오: 굴레나 재갈 물리다, 제어하다)의 동부정사 과거 능동태입니다.
이러한 것을 보면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형제라면 그 형제는 온몸도 굴레 씌울 수 있는 온전한 형제라는 것입니다.
급한 마음에 말을 마구 쏟아내지 않고 자기 자신을 잘 통제하고 말을 절제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형제는 말조심을 잘해서 말실수를 잘하지 않는 형제라는 것입니다.
3:3 우리가 말들의 입에 재갈 물리는 것은 우리에게 순종하게 하려고 그 온 몸을 제어하는 것이라
3절은 2절에 언급한 온전한 형제에 대한 비유로 말들의 입에 재갈 물리는 것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앞서 자신의 온몸을 굴레 씌우고 말에 실수를 잘하지 않는 형제를 온전한 형제라고 하였습니다.
그러한 형제에 대한 상황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말들이 우리에게 순종하게 하려고 말들의 입에 재갈 물리고 그 온몸을 제어하는 것과 같다는 것을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 순종하게(πείθεσθαι, 페이데스다이)는 πειθώ(페이도: 납득시키다, 확신시키다, 설득하다, 복종하다)의 동부정사 현재 수동태입니다.
⚫ 두 개의 직설법 동사인 물리는(βάλλομεν, 발로멘)과 제어하는 것이라(μετάγομεν, 메타고멘)가 뜻하는 것은 재갈을 물려서 이끌어 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말이 우리에게 복종하게 하려고 한다면 말의 입에 재갈을 물리고 끌고 가면 된다는 것입니다.
말이 우리에게 복종하게 되기를 위한다면 말의 입에 재갈을 물리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말의 온몸을 끌고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말의 입에 재갈을 물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핵심이라는 것입니다.
말의 입에 재갈을 물리면 말의 온몸이 꼼짝하지 못하게 되고 복종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3:4 또 배를 보라 그렇게 크고 광풍에 밀려 가는 것들을 지극히 작은 키로써 사공의 뜻대로 운행하나니
앞서 3절에 언급한 말의 입에 물린 작은 재갈이 커다란 말의 온몸을 제어하듯이 4절에서는 커다란 배를 작은 키가 제어한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 지극히 작은(ἐλαχίστου, 엘라키스투)는 ἐλάχιστος(엘라키스토스: 가장 작은, 가장 적은)의 형용사 최상급 속격 단수입니다.
⚫ 운행하나니(μετάγεται, 메타게타이)는 μετάγω(메타고: 옮기다, 인도하다, 이끌어 가다)의 동사 직설법 현재 수동태 단수입니다.
3절의 제어하는 것이라(μετάγομεν, 메타고멘)와 똑같은 어원입니다.
지극히 작은 키로 그 커다란 배를 광풍 속에서도 이끌어 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 뜻(βούλεται, 불레타이)은 동사 직설법 현재형으로 원어원형은 βούλομαι(불로마이)인데 “바라다, 원하다, 갈망하다”라는 뜻입니다.
⚫ 원어성경을 보면 ὅπου(호푸: -하는 곳, 곳에, 어디든지, -하는 어디든지)를 볼 수 있습니다.
아무리 배가 크고 광풍이 몰아닥쳐서 떠밀려 가도 지극히 작은 키만 있으면 키잡이가 그 키를 빠르게 움직여서 배를 원하는 곳으로 어디든 똑바로 가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 역시 말을 제어하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재갈이 하듯이 배를 제어하는데 핵심적인 역할도 키가 한다는 것입니다.
지극히 작은 키이지만 그러한 키가 커다란 배를 원하는 방향대로 움직이게 하고 원하는 목적지로 가게 해주는 것입니다.
● 3:5-8 혀는 불과 악과 독이니라
5-8절은 재갈과 키의 역할을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밝혀주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한 것은 혀라는 것입니다. 혀를 불로 비유하면서 혀도 작지만 온몸을 더럽히고 삶까지도 불사른다는 것입니다.
모든 짐승과 생물들은 길들일 수 있는데 혀는 그렇게 하지 못하므로 혀는 악이고 죽이는 독이 가득하다는 것입니다.
3:5 이와 같이 혀도 작은 지체로되 큰 것을 자랑하도다 보라 얼마나 작은 불이 얼마나 많은 나무를 태우는가
혀도 말의 재갈이나 배의 키처럼 작은 지체이나 큰 것을 자랑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한 것을 불을 비유로 들고 있습니다. 작은 불이 많은 나무를 태우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 지체(μέλος, 멜로스)는 “지체, 몸의 일부, 부분”의 뜻입니다.
혀는 작은 지체이나 그렇지만 큰 것을 자랑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불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작은 불이 얼마나 많은 나무를 태우는가라고 하였습니다.
⚫ 얼마나 작은(ἡλίκον, 헬리콘)은 ἡλίκος(헬리코스: 얼마나 큰, 얼마나 작은)의 의문형용사 주격 단수입니다.
⚫ 얼마나 많은(ἡλίκην, 헬리켄)은 ἡλίκος(헬리코스: 얼마나 큰, 얼마나 작은)의 의문형용사 대격 단수입니다.
이러한 것을 보면 아주 작은 불이 매우 넓은 큰 숲에 불을 붙여서 태워버린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작은 불이 큰 숲에 불을 붙여서 모두 태우는 것처럼 작은 혀도 그렇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혀가 매우 작은 것처럼 보여도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큰 것을 자랑한다고 할 정도로 엄청난 파괴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3:6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삶의 수레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
6절은 혀에 대한 것을 구체적으로 밝혀주고 있습니다. 혀의 의의와 혀가 행하는 일과 그러한 혀의 최후에 대한 것입니다.
혀는 불이고 불의의 세계이며 그러한 혀는 온몸을 더럽히고 삶의 수레바퀴를 불사른다는 것입니다. 그러던 그 혀가 마지막에는 지옥 불에 불타게 된다는 것입니다.
⚫ 원어성경에 있는 καθίσταται(카디스타타이)는 καθίστημι(카디스테미: 가지고 들어오다, 임명하다, 지명하다, 어떤 사람을 어떤 것이 되게 하다, 그를 어떤 위치나 상태에 두다, 어떤 곳에 두다, 어떤 것이 되다)의 동사 직설법 현재 수동태입니다.
⚫ 불사르나니(φλογίζουσα, 플로기주사)는 φλογίζω(플로기조: 불을 붙이다, 불태우다)의 동분사 현재 능동태입니다.
⚫ 그 사르는 것이(φλογιζομένη, 플로기조메네)는 φλογίζω(플로기조: 불을 붙이다, 불태우다)의 동분사 현재 수동태입니다.
두 용어가 모두 동일한 어원을(φλογίζω, 플로기조) 가지고 있으며 능동태와 수동태의 차이가 있습니다.
지체 안에 두어진 혀는 불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불태워버립니다. 그러다가 결국은 그 혀 자체도 결국은 지옥 불에 태워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혀는 불이자 불의의 세계이므로 온몸을 더럽히고 삶을 불태운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불태우기를 좋아하던 혀의 최후도 지옥 불에 태워지고 만다는 것입니다.
3:7 여러 종류의 짐승과 새와 벌레와 바다의 생물은 다 사람이 길들일 수 있고 길들여 왔거니와
7-8절은 혀를 길들이는 것에 대해 밝혀주고 있습니다. 먼저 7절에서는 사람이 길들일 수 있다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 길들일 수 있고(δαμάζεται, 다마제타이)는 δαμάζω(다마조: 길들이다, 제어하다, 복종시키다)의 동사 직설법 현재 수동태입니다.
⚫ 길들여 왔거니와(δεδάμασται, 데다마스타이)는 δαμάζω(다마조: 길들이다, 제어하다, 복종시키다)의 동사 직설법 완료 수동태입니다.
사람에 의하여 모든 것이 길들여져 왔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모든 것을 길들일 수 있었고 또한 길들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3:8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
말은 입에 재갈을 물려 제어하고 배는 키를 달아 제어하고 모든 생물은 사람이 길들일 수 있으나 혀는 길들일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혀는 제어하지 못하고 길들일 수 없으므로 쉬지 아니하는 악이고 죽이는 독이 가득하다고 하였습니다.
⚫ 없나니(οὐδεὶς, 우데이스)는 “하나도 아닌, 아무도 아닌, 어떤 것도 아닌”의 뜻입니다.
⚫ 쉬지 아니하는(ἀκατάστατον, 아카타스타톤)은 ἀκατάστατος(아카타스타토스: 불안정한, 변덕스러운)의 형용사 주격 단수입니다.
이러한 것을 보면 혀를 길들일 수 있었던 형제는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혀는 어떤 혀인지 계속해서 밝혀주고 있습니다.
8절에서는 가만히 있지 않은 상태를 의미합니다. 불안정하게 혀가 가만히 있지 못하고 계속 말한다는 것입니다. 좋은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악한 말을 그렇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보면 쉬지 않고 악한 말을 하는 것이 혀라는 것이고 죽음을 가져오는 치명적인 독이 가득한 것이 혀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혀는 악한 말을 쏟아내고 다른 형제를 해치고 상처를 주는 치명적인 독이 가득 차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혀로 말을 잘못하게 되면 모든 혀가 자백하게 되어 있고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하게 됩니다(롬 14:11-12).
선악 간에 그 몸으로 행한 모든 언행심사를 선악 간에 남김없이 모두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전 12:14, 고후 5:10).
예수님께서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한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자기가 한 말로 정죄함을 받게 되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마 12:36-37).
그러한 것을 야고보서에서 살펴보면 성내면서 하는 말(1:19), 차별하는 말(2:3), 주지는 않고 하는 말(2:16), 저주하는 말(3:9), 다투고 싸우는 말(4:2), 정욕으로 잘못 구하는 말(4:3), 형제를 비방하는 말(4:11), 허탄한 자랑을 하는 말(4:16), 원망하는 말(5:9), 잘못 맹세하는 말(5:12)에 대한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죄는 자백하면 깨끗하게 사라지게 되지만 회개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살아 있어서(요일 1:7-10, 행 3:19, 롬 2:5) 직고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말을 한 것을 철저하게 회개하고 그러한 말을 하지 않도록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 3:9-12 한 입에서 찬송과 저주가 나오는도다
9-12절은 입에 대한 것인데 한 입에서 찬송과 저주가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샘이 한 구멍으로 단 물과 쓴 물이 나오고 무화과나무가 감람 열매를 맺고 포도나무가 무화과를 맺을 수 있느냐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반문하면서 결론을 내렸는데 짠 물이 단 물을 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3:9 이것으로 우리가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 또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나니
혀로 주와 아버지를 찬송하고 그 혀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형제들을 저주한다는 것입니다.
⚫ 주 아버지를(τὸν κύριον καὶ πατέρα, 톤 퀴리온 카이 파테라)은 “주와 아버지를”이라는 뜻입니다.
⚫ 지음을 받은(γεγονότας, 게고노타스)은 γίνομαι(기노마이: 생겨나다, 일어나다, 되다, 만들어지다)의 동분사 완료 능동태 대격 복수입니다.
그것으로, 즉 혀로 우리가 주와 아버지를 찬송한다는 것입니다.
또 그것으로, 즉 혀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진 형제들을 저주한다는 것입니다.
동일한 혀로 주와 아버지를 찬송하기도 하고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심을 받은 형제들을 저주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3:10 한 입에서 찬송과 저주가 나오는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여기에서도 내 형제들아라고 하면서 강력하게 권면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문장을 시작하면서가 아니라 문장 중간에 나오는 경우는 야고보서에 이곳이 유일합니다. 그만큼 강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심각한 상황이 된 것은 한 입에서 찬송과 저주가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것이 마땅하지 않다고 하는 것입니다.
⚫ 한(αὐτοῦ, 아우투)은 αὐτός(아우토스: 자신, 바로 그, 그는, 그녀는, 그것)의 속격 단수이므로 “자신의”라는 뜻입니다.
⚫ 마땅하지(χρή, 크레)는 “-할 필요가 있다, -하는 것이 필요하다, -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하는 것이 당연하다”의 뜻입니다.
자신의 입에서 찬송과 저주가 나온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입은 두 개가 아니라 하나이므로 한 입에서 나온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동일한 하나의 입에서 찬송과 저주가 나오므로 내 형제들아라고 하면서 이러한 것이 마땅하지 않다고 하는 것입니다.
동일한 하나의 입으로 찬송과 저주를 하게 되는 이러한 것은 당연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3:11 샘이 한 구멍으로 어찌 단 물과 쓴 물을 내겠느냐
10절에서 한 입을 언급하였듯이 이번에는 한 구멍을 비유로 들고 있습니다. 샘이 한 구멍으로 어떻게 단 물과 쓴 물을 낼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여기에서도 10절처럼 한(αὐτῆς, 아우테스)은 αὐτός(아우토스: 자신, 바로 그, 그는, 그녀는, 그것)의 속격 단수이므로 “자신의”라는 뜻입니다.
⚫ 어찌…느냐(μήτι, 메티)는 “조금이라도 -인지 어떤지, 혹시라도 -인지 어떤지”의 뜻입니다.
동일한 하나의 샘에서 조금이라도 단 물과 쓴 물이 나올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3:12 내 형제들아 어찌 무화과나무가 감람 열매를, 포도나무가 무화과를 맺겠느냐 이와 같이 짠 물이 단 물을 내지 못하느니라
그동안 언급한 한 입과 한 구멍에 이어서 나무에 대한 비유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짠 물이 단 물을 내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것을 강조하기 위하여 내 형제들아라고 10절에 곧이어 또다시 호칭하였습니다.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무화과나무가 감람 열매들을 맺을 수 없고 포도나무가 무화과들을 맺을 수 없지 않느냐라는 것입니다.
⚫ 어찌···느냐(μὴ, 메)는 “아니, -하지 않도록”의 뜻입니다.
맺을 수 없지 않느냐라는 것입니다. 나무와 그 나무에 일치하지 않는 열매를 맺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비유에서도 그러한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7장 16-18절입니다.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이러하므로 야고보는 이와 같이 짠 물이 단 물을 내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 내지(ποιῆσαι, 포이에사이)는 ποιέω(포이에오: 만들다, 창조하다, 행하다)의 동부정사 과거 능동태입니다.
짠 물이 단 물을 만들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짠 물이 단 물로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9-12절을 요약해 보면 동일한 입에서 동일한 말이 나오고 동일한 구멍에서 동일한 물이 나오고 동일한 나무에서 동일한 열매가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야고보가 9절에서 언급한 것처럼 동일한 혀로 찬송과 저주를 한다고 하였습니다.
한 입에서 찬송과 저주가 나오지 않는 것이 정상인데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것을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가입니다. 찬송만 하고 선하고 좋은 말만 하려면 어떻게 하면 되는가입니다.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 완벽은 없습니다, 완성을 위해 달리고 고치려고 애쓰고 힘쓰는 것입니다.
엘리사가 성읍의 사람들이 물이 나빠서 열매를 맺지 못한다고 하자 소금을 던져 물을 고쳐준 적이 있었습니다(왕하 2:19-22).
그리고 모세가 마라의 쓴 물에 나무를 던지자 단 물로 바뀐 적도 있었습니다(출 15:25).
이러한 것은 쓴 것을 단 것으로 바꾸어주시는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그러하신 예수님께서 오시면 짠 물이 단 물을 내지 못하는 것을 변화시켜서 단 물을 낼 수 있도록 해주십니다.
쓴 물을 삼키면서 쓴 맛나는 인생을 살던 형제가 단 물을 마시면서 단 맛나는 인생을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하신 예수님께서 오셔서 변화시켜주시면 쓴 혀가 단 혀로 바꾸어져서 찬송과 축복의 말을 하는 혀가 됩니다.
그리하면 예쁘게 말하는 혀가 되어 말로 말미암아 상처를 받고 깨진 관계가 회복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바뀌기 전의 혀는 불과 악과 독이고 때로는 저주하기도 합니다.
이러하므로 말실수하지 않기 위하여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여야 합니다.
또한 말을 많이 하지 않아야 하고 악한 말과 상처주는 말도 하지 않도록 혀를 제어하기 위하여 혀에 재갈을 물려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이 바뀌면 죽은 관계가 다시 살아나게 되므로 말이 바뀌어야 합니다.
말이 바뀌어야 깨진 관계가 살아나게 되므로 단 물을 내는 혀로 바꾸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하므로 말투가 중요합니다. 폭언이나 막말 등은 삼가야 합니다. 상처를 깊이 받게 되고 관계가 악화되거나 깨지기 때문입니다.
이러하므로 이러한 것을 해결해주시는 하나님께 기도드려서 도우심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야고보서에서의 문맥에서 보면 지혜를 구하여서 지혜를 가져야 합니다.
야고보서는 시작과 마침이 기도입니다. 1장을 시작하면서 5-8절에 기도하여 지혜를 구하라고 하였고 5장을 마치면서 13-18절에 병든 형제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하였습니다.
기도할 때 믿음의 기도를 하고(5:15) 의인의 간구를 하고(5:16) 마치 엘리야처럼 기도하라는(5:17-18) 것입니다.
이처럼 기도가 비법입니다. 하나님께 도우심을 구하고 지혜를 구하는 것이 비결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도우심과 지혜로(3:13-18)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말싸움하지 않고 말에 실수가 없는 형제가 되어 혀를 제어하는 온전한 형제가 되라는(3:2)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서 동일한 혀로 찬송과 저주를 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3:13-18절 위로부터 난 지혜로 행하라
야고보서의 주제는 행하라는 것이고, 3장의 주제는 말실수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가운데 13-18절 단락은 위로부터 난 지혜로 행하라는 것입니다.
이 가운데 13-14절은 지혜와 총명이 있는 형제가 되려면 선행하고 시기하거나 다투지 말고 거짓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15-16절은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는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라 땅과 정욕과 귀신의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17-18절은 위로부터 난 지혜는 성결하고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견과 거짓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지혜를 가진 형제들은 화평하게 하는 자들로 말싸움하지 않고 화평으로 의의 열매를 거두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13-18절은 지혜에 대한 단락입니다. 단락을 시작하는 13절에서 결론을 언급하고 단락의 마지막 18절에서 다시 결론을 요약하고 있습니다.
3장 13절에서는 지혜에 대해 언급하였으며, 15절에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닌 지혜, 17절에는 위로부터 난 지혜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다툼을 일으키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닌 땅 위의 지혜가 아니라 화평을 가져다주는 위로부터 난 지혜를 구하라는 것입니다.
야고보서에서 중요하게 다루고 있는 것 가운데 하나가 다투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러 가지 시험 가운데 하나가 다투지 않고 인내를 온전히 이루는 것입니다.
박해로 흩어져서 살고 있는 상황이므로 안정되지 못하고 생활이 척박하고 마음이 각박할 수 있습니다.
이러하므로 자칫하면 다툼이 자주 발생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를 잘 참고 인내하여 서로 다투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위로부터 난 지혜가 부족하게 되면 이렇게 서로 다투게 되므로 하나님께 구하여 위로부터 난 지혜를 얻으라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서로 미워하거나 말싸움하거나 다투지 말고 화평의 열매를 맺어 서로 화평하게 지내라는 것입니다.
● 3:13-14 지혜와 총명이 있는 형제가 누구냐
13-14절은 지혜와 총명이 있는 형제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13절에서는 선행하라는 것이고 14절에서는 시기하거나 다투지 말라는 것이고 거짓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3:13 너희 중에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가 누구냐 그는 선행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온유함으로 그 행함을 보일지니라
13절에서는 지혜와 총명이 있는 형제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 지혜(σοφὸς, 소포스)는 형용사 주격 단수로 “지혜로운, 현명한”의 뜻입니다.
⚫ 총명이 있는(ἐπιστήμων, 에피스테몬)은 형용사 주격 단수로 “이해력이 있는, 유식한, 전문적인”의 뜻입니다.
두 용어 모두 실명사로 본다면 “-한 사람”이라는 의미가 됩니다.
⚫ 보일지니라(δειξάτω, 데잌사토)는 δείκνυμι(데이크뉘미: 보여주다, 설명하다, 증명하다)의 동사 명령법 과거 능동태 3인칭 단수입니다.
너희들 가운데 지혜로운 형제와 이해력이 있는 형제가 누구냐는 의미입니다.
그러한 형제라고 하려면 선행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온유함으로 그 행함을 보이라고 하였습니다.
선한 생활방식에 의하여 지혜의 온유로 자신의 행함들을 증명해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의미하고 있는 지혜는 온유하게 행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하므로 온유를 행하는 선한 생활로 증명해보라는 것입니다.
3:14 그러나 너희 마음 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으면 자랑하지 말라 진리를 거슬러 거짓말하지 말라
14절은 앞의 13절처럼 선한 생활방식인 온유를 실천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 안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다는 것입니다.
⚫ 다툼(ἐριθείαν, 에리데이안)은 “비열한 본성, 이기주의, 이기심”의 뜻입니다.
다툼은 진리의 말씀에는 순종하지 않고 눈앞의 이익에는 눈이 멀어서 당을 짓는 뜻으로 사용되기도 합니다(롬 2:8, 고후 12:20, 갈 5:20).
⚫ 있으(ἔχετε, 에케테)는 ἔχω(에코: 가지다, 소유하다)의 동사 명령법 현재 2인칭 복수입니다.
있으면은 “너희들의 마음 안에 시기와 이기심을 가지고 있으면”이라는 뜻입니다. 이러한 상태에 놓여 있다면 무엇을 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 거슬러(κατὰ, 카타)는 속격이므로 “-에 대항하여, -에 대적하여”라는 뜻이 됩니다.
이러한 것이 의미하는 것은 진리에 대항하여 의기양양해하거나 거짓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온유하라는 진리의 말씀은 행하지 아니하고 이기심이 앞서서 시기하고 다투기에 진리 앞에서 당당할 수 없고 진리를 행한다고 거짓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러하므로 지혜와 총명이 있는 형제는 온유하게 행동하고 독한 시기와 다툼이 없는 형제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형제는 혀에 재갈을 물려서 말조심하여 말에 실수가 없는 지혜롭고 총명한 형제가 되는 것입니다.
● 3:15-16 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요
15-16절에서는 위로부터 내려오지 아니한 지혜가 무엇인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는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라 땅과 정욕과 귀신의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혼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게 되기 때문에 아래의 것으로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닌 것입니다.
3:15 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요 땅 위의 것이요 정욕의 것이요 귀신의 것이니
온유하게 하는 지혜가 아니라 시기와 다툼을 일으키는 지혜는 잘못된 지혜입니다.
이러한 잘못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오는 참된 지혜가 아니라 위로부터 내려오지 않은 그릇된 지혜인 것입니다.
원어성경 처음에 나오는 οὐκ ἔστιν αὕτη(우크 에스틴 아우테: -은 아니다, 그것은 -이다, 이것)의 의미는 “이것은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이를 감안해서 보면 이러한 지혜는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무엇이 아니냐 하면 위로부터 내려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 땅 위의 것이요(ἐπίγειος, 에피게이오스)는 형용사 주격 단수로 “땅의, 땅에 존재하는, 땅에 속하는”의 뜻입니다.
⚫ 정욕의 것이요(ψυχική, 프쉬키케)는 형용사 주격 단수로 “프쉬케(영혼, 목숨, 생명)의, 영혼에 속하는, 육적인, 천성적인”의 뜻입니다.
위로부터 내려오지 아니한 지혜는 땅 위의 것이고 정욕의 것이고 귀신의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오는 것이 아니라 땅적이고 육적이고 귀신적인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위로부터 내려오지 아니한 지혜는 땅에 속한 것이고 육에 속한 것이고 귀신에 속한 것입니다.
3:16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혼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음이라
위로부터 내려오는 참된 지혜가 아니라 땅과 육과 귀신에 속한 잘못된 지혜는 시기와 다툼을 일으킵니다.
이러한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당연히 혼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게 마련입니다.
⚫ 곳에는(ὅπου, 호푸)은 “-하는 곳, 곳에, 어디든지, -하는 어디든지”의 뜻입니다.
⚫ 이라(γὰρ, 가르)는 “참으로, 사실은, 왜냐하면, 그러면”의 뜻입니다.
⚫ 원어성경을 보면 ἀκαταστασία(아카타스타시아: 혼란) 앞에 ἐκεῖ(에케이: 거기에, 그곳에, 저쪽에)를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것은 위로부터 내려오는 지혜가 아니라 땅과 육과 귀신에게 속한 것이라고 할 수 있는 이유를 밝혀주고 있는 것입니다.
시기와 다툼이 있는 어느 곳이든지 거기에는 혼란과 모든 악한 행위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곳에는 시기와 다툼이 일어나게 되고 그러한 결과로 분쟁하게 되어 혼란을 겪게 되고 모든 악한 행위가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 3:17-18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화평하게 하느니라
17-18절에서는 위로부터 난 지혜가 무엇인지를 말해주면서 의의 열매를 맺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러한 지혜는 성결하고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견과 거짓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지혜를 가지고 있는 지혜로운 형제는 화평하게 하는 형제로 말싸움하지 않고 화평으로 의의 열매를 거두게 되는 것입니다.
3:17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견과 거짓이 없나니
그동안 14-16절에서 위로부터 내려오지 않은 지혜의 속성은 시기와 다툼이라는 것을 밝혀주었습니다.
이에 비해 17절에서는 위로부터 난 지혜가 가지고 있는 속성이 무엇인지를 밝혀주고 있습니다.
⚫ 성결(ἁγνή, 하그네)은 “순결한, 거룩한”의 뜻입니다.
⚫ 원어성경을 보면 πρῶτον(프로톤: 첫째) 다음에 나오는 μὲν(멘: 진실로, 확실히, 반드시, 틀림없이, 참으로)을 볼 수 있습니다.
위로부터 내려오는 지혜는 첫째로 참으로 순결한 지혜라는 것입니다.
첫째는 성결하고 이후로는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화평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음행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은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야고보서는 언어와(1:19-20, 26, 3:2-10, 14, 4:2, 11, 5:9, 12) 재물과(1:9-11, 27, 2:3, 15-16, 4:13-17, 5:1-6) 건강에(5:14-16, 19-20) 대한 것을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앞서 나온 2장 11절에서 간음하지 말라 하신 이가라고 하였고 이후에 나오는 4장 4절에서는 간음한 여인들아라고 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것을 보면 간음에 대한 것을 직접적으로 다루고 있지는 않고 있으나 간접적으로 간음에 대해 경고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 다음에는 화평이라고 하였습니다.
⚫ 화평(εἰρηνική, 에이레니케)은 “평화로운”의 뜻입니다.
위로부터 내려오는 지혜는 평화로운 지혜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언급한 이후에 이어서 지혜의 속성에 대해 계속 언급하고 있습니다.
관용하고, 양순하고,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견이 없고, 거짓이 없다는 것입니다.
⚫ 관용(ἐπιεικής, 에피에이케스)은 “온순한, 온화한, 순한 온유한, 친절한, 참을성 있는, 관용하는”의 뜻입니다.
⚫ 양순(εὐπειθής, 유페이데스)은 “순종 잘하는, 쉽게 순종하는”의 뜻입니다.
⚫ 편견과(ἀδιάκριτος, 아디아크리토스)는 형용사로 “불확실하지 않은, 치우치지 않는”의 뜻입니다.
이러한 것의 의미를 볼 때 위로부터 내려오는 지혜는 첫째로 참으로 순결하고, 그 다음에는 평화롭고, 관용하고, 양순하고,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견이 없고, 거짓이 없다는 것입니다.
3:18 화평하게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
18절에서는 위로부터 난 지혜 가운데 중요하다고 여기는 속성을 반복해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지혜는 첫째로 성결하고 그 다음으로는 화평하다고 하였습니다. 그러한 화평에 대한 것을 다시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야고보서에서 중요하게 다루고 있는 것이 박해상황 아래에서 형제들 안의 언어생활과 경제생활로 다투는 것을 해소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위로부터의 지혜가 필요하고 그러한 지혜 가운데 특별히 화평하게 하는 지혜가 필수적이라는 것입니다.
⚫ 화평하게(εἰρήνην, 에이레넨)는 εἰρήνη(에이레네: 평화, 복지, 번영)의 명사 대격 단수입니다. “평화를”이라는 뜻입니다.
εἰρήνη(에이레네)는 히브리어 שָׁלוֹם(샬롬: 평화, 복지, 번영)의 역어로 단순히 좁은 의미의 평화만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안식, 안전, 건강, 안녕, 평온, 복지, 번영 등을 포함하는 의식주와 활동에 필요한 다양한 조건들이 잘 갖추어진 평강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 하는(ποιοῦσιν, 포이우신)은 ποιέω(포이에오: 만들다, 창조하다, 행하다)의 동분사 현재 능동태 여격 복수입니다.
의의 열매는 평화를 만드는 그러한 형제들에 의하여 화평으로 심어져서 거두게 된다는 것입니다.
⚫ 심어…거두느니라(σπείρεται, 스페이레타이)는 σπείρω(스페이로: 뿌리다)의 동사 직설법 현재 수동태입니다.
이러한 것의 의미는 “평화로 뿌려진다”라는 뜻입니다.
의의 열매는 화평을 만드는 형제들에 의하여 화평이 뿌려지게 되고 그리하여 열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화평을 말로만 하지 않고 실제로 화평을 행하는 형제들에 의하여 화평을 행한 그만큼의 의의 열매가 열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말싸움하지 않고 말실수하지 않고 말조심하여 성내지 않고 다투지 아니하면 그러한 의의 열매가(1:20) 열리게 되고 거두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행함을 강조하는 야고보서를 보면 열매에 대한 언급을 많이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피조물 가운데 첫 열매(1:18), 감람 열매(3:12), 긍휼과 선한 열매(3:17), 의의 열매(3:18), 길이 참음의 열매(5:7), 기도의 열매(5:18)입니다.
이처럼 열매는 행함의 결과물이므로 결과적으로는 행함을 강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행하지 않았는데 열매가 열릴 수 없습니다. 행할 때 행하는 만큼의 열매가 맺히게 됩니다.
행한 만큼 열매가 열리게 된다는 것은 진리의 말씀에 따라 혀에 재갈을 물린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말싸움하지 않고 말조심하여 말실수를 줄이고 폭언하거나 상처주는 말을 하지 않으면 그만큼 화평의 열매를 더 많이 맺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위로부터 내려오지 아니한 땅과 육과 귀신의 것인 그릇된 지혜가 있는 곳에는 시기와 다툼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위로부터 내려오는 참된 지혜는 말싸움하지 않고 화평하게 해줍니다. 말실수하지 않게 하여 서로 시기하거나 서로 다투지 않게 해주는 것입니다.
한눈에 보는 야고보서 (재개정판)
재개정일 2024년 1월 12일
개 정 일 2021년 11월 3일
발 행 일 2021년 8월 13일
지 은 이 이서영
출 판 사 퍼플
출판등록 제300-2012-167호 (2012년 9월 7일)
주 소 서울시 종로구 종로1가 1번지
대표전화 1544-1900
홈페이지 www.kyobobook.co.kr.
ISBN 978-89-24-12015-8
ⓒ 이서영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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