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눈에 보는 야고보서 (재개정판) 5장 형제들아 원망하지 말라
5장 개요
✙✙✙ 5장 구절
야고보서 5장에서 대표적인 구절을 선정한다면 형제들에게 원망하지 말라고 언급하고 있는 9절입니다.
5:9 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하리라 보라 심판주가 문밖에 서 계시니라
✙✙✙ 5장 주제
야고보서를 행함의 관점에서 볼 수 있습니다. 말씀을 행하는 형제가 되라는(1:22) 것입니다.
그렇게 행할 때 믿음이 온전해지고(2:22)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게 된다는(1:25)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 행함이 없으면 아무런 유익이 없고 그러한 믿음으로는 자기를 구원하지 못한다는(2:14) 것입니다.
야고보서는 형제들에게 이러한 행함을 강조하면서 행함을 위하여 행함에 대한 다섯 가지의 실천과제를 제시해주고 있습니다.
이 가운데 5장은 원망하지 말라는 실천과제를 제시해주고 있습니다. 심판을 면하기 위하여 길이 참는 가운데 원망하는 형제가 되지 말라고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5장은 이러한 흐름이 있으므로 이와 관련된 주제를 도출해 본다면 형제들아 원망하지 말라가 됩니다.
✙✙✙ 5장 구조
야고보서 5장은 형제들에게 원망하지 말라는 것에 대한 것을 언급해주고 있습니다.
5장을 시작하면서 원망하지 않는 사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부한 형제들이 삯을 주지 않아도 추수한 품꾼들이 원망하지 않고 대항하지 아니하였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강림하실 때까지 길이 참아야 하는데 급한 마음에 서로 원망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맹세도 잘못하면 원망을 듣게 되고 죄를 짓게 되어 심판받게 되므로 이를 면하기 위해 맹세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원망하지 않고 죄를 서로 고백하고 용서하면서 서로 기도하면 병이 낫게 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미혹되어 진리에서 떠난 자를 원망하지 않고 돌아서게 하면 영혼을 사망에서 구원하게 되는 것도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러하므로 5장에서는 원망하지 말라는 관점에서 풀어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5장은 모두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1-12절은 원망하지 말고 길이 참으라, 13-20절은 죄를 서로 고백하며 기도하라 입니다.
첫 번째 부분인 1-12절은 종말론적인 신앙생활에 대한 것을 언급해주고 있습니다.
종말의 때를 사는 동안 원망하지 말고 원망들을 일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강림하심을 기다리면서 길이 참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참지 못하고 맹세를 함부로 하지도 말아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1-6절은 부한 형제들에 대한 언급입니다. 말세의 경제생활과 관련된 것입니다.
품꾼을 울리는 식으로 재물을 쌓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재물은 쌓는다고 해서 쌓이는 것이 아니라 말세에 당할 화를 쌓고 있다는 것입니다.
부한 형제들이 이렇게 하여도 원망하지 않는 의인인 추수한 품꾼은 대항하지 아니하였다는 것입니다.
7-12절은 말세에 닥치는 심판을 받지 않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형제들이라고 네 번씩이나 거듭 말하고 있는 것은 형제들 간에 즉각 다투지 말고 오래 참아서 원망하지 말고(9) 화목하게 지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7-8절은 농부, 9절은 원망, 10-11절은 선지자들과 욥, 12절은 맹세를 소재로 들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것을 통해 주님께서 강림하실 때까지 길이 참아야 하고(7-8) 심판을 면해야 하고(9) 결말을 볼 수 있어야 하고(10-11) 정죄 받는 것을 면할 수 있어야 한다는(12) 것입니다.
두 번째 부분인 13-20절은 치료에 대한 것입니다. 박해상황 아래에서 행복과 건강을 유지하는 힘은 치료라는 것입니다.
13-18절은 몸의 병을 치료해주라는 것입니다. 몸의 병은 육적인 병인데 말과 돈과 신체 등이 약해져서 생긴 병입니다. 이러한 병은 기도와 기름과 몸에 쓸 것과 따뜻한 위로와 같은 것으로 치료해주어야 합니다.
19-20절은 영혼의 병을 치료해주라는 것입니다. 영혼의 병은 영적인 병인데 진리에서 벗어나서 생긴 병입니다. 기도와 진리의 말씀과 같은 것으로 치료해주어야 합니다. 원망하지 않고 용서하면 치료를 더 잘 받게 되어 있습니다(9, 16).
이러한 치료의 힘은 기도입니다. 기도의 중요성을 보게 됩니다. 기도하여 몸의 건강을 회복하고(13-18), 돌아서게 하여 영혼의 건강을 회복하라는 것입니다(19-20).
이러한 것을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진다고 하였으므로(딤전 4:5) 말씀과 기도로 행하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마지막 단락인 13-20절은 형제 사랑의 생활 가운데 치료에 대한 것을 다루고 있습니다.
기도로 병든 형제의 병든 몸을 치료하고(13-18) 돌이키게 하여 미혹된 형제의 병든 영혼을 치료해주는 것을(19-20) 언급해주고 있습니다.
약해져서 몸이 병든 형제와 미혹되어 영혼이 병든 형제를 치료해주는 것을 언급해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야고보서의 결국은 언어와 경제로 서로 죽이느냐 서로 살리느냐 하는 것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러한 것과 함께 마지막으로 5장에서 언급하고 있는 건강과 관련된 것은 분량 면에서 작은 것처럼 보이나 실생활에서는 건강의 비중은 매우 큽니다.
이러한 언어나 경제나 건강은 강조점이나 표현 방식만 다를 뿐 추구하는 것은 결국은 행복한 삶이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언어와 경제와 건강은 모두 중요합니다.
이러한 것을 회복하고 유지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과 말씀에 대한 신앙을 회복하고 그러는 가운데 언어생활과 경제생활과 건강생활을 회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게 되면 의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화평의 열매를 맺게 된다는 것입니다. 다섯 가지 하지 말라는 것을 실천하게 됩니다.
말과 돈을 해결하게 되고 먹고 사는 것을 해결하게 되고 화목하게 사는 것을 해결하게 되어 화평하게 지내게 됩니다.
이러한 것을 5장 마지막 단락에 이르러 전체를 병이라는 것으로 묶어 다시 반복하여 다루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다섯 가지의 금지 유형인 속임, 차별, 말실수, 비방, 원망으로 말미암아 약해지면 병이 들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든 것이 귀결된 것입니다. 하지 말라고 한 것을 하게 되면 그러한 것이 모여서 병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하므로 여기에 대한 처방을 마지막 부분에 제시해주고 있습니다. 오래 참음과 기도와 기름과 용서와 진리의 말씀으로 그러한 과제를 해결하라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몸의 병과 영혼의 병을 치료하여 건강하게 살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치료를 받은 형제들이 되라는 것입니다.
5장 개관
단락 | 단락별 개요 |
1-12 | 원망하지 말고 길이 참으라 |
13-20 | 죄를 서로 고백하며 기도하라 |
5:1-12 원망하지 말고 길이 참으라
야고보서의 주제는 행하라는 것이고, 5장의 주제는 원망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가운데 1-12절 단락은 원망하지 말고 길이 참으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1-12절은 종말론적인 신앙생활에 대한 것을 언급해주고 있습니다.
종말의 때를 사는 동안 원망하지 말고 원망들을 일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강림하심을 기다리면서 길이 참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참지 못하고 맹세를 함부로 하지도 말아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1-6절은 부한 형제들에 대한 언급입니다. 말세의 경제생활과 관련된 것입니다.
품꾼을 울리는 식으로 재물을 쌓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재물은 쌓는다고 해서 쌓이는 것이 아니라 말세에 당할 화를 쌓고 있다는 것입니다.
부한 형제들이 이렇게 하여도 원망하지 않는 의인인 추수한 품꾼은 대항하지 아니하였다는 것입니다.
7-12절은 말세에 닥치는 심판을 받지 않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을 무려 네 번에 걸쳐 형제들아라고 하면서 매우 강력하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형제들이라고 거듭 말하고 있는 것은 형제들 간에 즉각 다투지 말고 오래 참아서 원망하지 말고(9) 화목하게 지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호칭을 기준으로 네 가지 유형의 권면으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7-8절은 농부, 9절은 원망, 10-11절은 선지자들과 욥, 12절은 맹세를 소재로 들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것을 통해 주님께서 강림하실 때까지 길이 참아야 하고(7-8) 심판을 면해야 하고(9) 결말을 볼 수 있어야 하고(10-11) 정죄 받는 것을 면할 수 있어야 한다는(12) 것입니다.
● 5:1-6 말세에 재물을 쌓았도다
1-6절은 부한 형제들에 대한 언급입니다. 말세의 경제생활과 관련된 것입니다.
품꾼을 울리는 식으로 재물을 쌓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재물은 쌓는다고 해서 쌓이는 것이 아니라 말세에 당할 화를 쌓고 있다는 것입니다.
부한 형제들이 이렇게 하여도 원망하지 않는 의인인 추수한 품꾼은 대항하지 아니하였다는 것입니다.
1절에서는 부한 형제들에게 닥쳐오는 고생으로 말미암아 울고 통곡하라고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2절은 비참한 것들에 대한 것인데 많던 재물은 썩어버렸고 화려한 옷은 좀먹어버렸다는 것입니다.
3절은 금과 은은 녹이 슬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동안 쌓아둔 그 많던 재물이 알고 보니 말세에 재물을 쌓아둔 것이라는 것입니다.
4절은 추수한 품꾼들에게 주지 아니한 삯에 대한 것입니다.
5절은 흥청망청 살아가는 것이 재미도 있고 사람답게 사는 것처럼 보였지만 오히려 진노를 쌓게 하여 마지막 심판의 날인 살육의 날에 비참하게 살육을 당하도록 만든다는 것입니다.
6절은 추수한 품꾼에 대한 것입니다. 부한 형제들이 선한 품꾼인 의인을 정죄하고 죽였으나 그들이 대항하지 아니하였다는 것입니다.
5장을 시작하면서 1-6절에 부한 형제들을 언급하고 있는 것은 재물을 쌓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나누어주라는 것입니다.
나누어주지 않으면 결국에는 모두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이러하므로 재물을 경제적으로 약한 형제의 치료제로 사용하라는 것입니다.
5:1 들으라 부한 자들아 너희에게 임할 고생으로 말미암아 울고 통곡하라
1절에서는 부한 형제들에게 닥쳐오는 고생으로 말미암아 울고 통곡하라고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을 잘 준비해두어서 편안하게 고생하지 않고 기쁘게 살 수 있을 것 같은 부한 형제들에게 오히려 크게 슬퍼하라고 하였습니다.
특별히 들어야 하는 대상은 부유한 형제들이라는 것입니다.
부한 형제들에게 주의를 집중시켜서 들려주고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 임할(ἐπερχομέναις, 에페르코메나이스)은 ἐπέρχομαι(에페르코마이: 오다, 가다, 접근하다, -에 닥치다)의 동분사 여격입니다. “-에게 닥치는”이라는 뜻입니다.
⚫ 고생으로(ταλαιπωρίαις, 탈라이포리아이스)는 복수 여격이므로 “힘든 일들로, 고난들로, 곤고들로, 비참함들로”라는 뜻입니다.
⚫ 통곡하라(ὀλολύζοντες, 올롤뤼존테스)는 ὀλολύζω(올롤뤼조: 크게 소리치다, 울부짖다)의 동분사이므로 “울부짖으면서”라는 뜻입니다.
돌이켜서 가난한 형제들을 돌보아주지 않고 자신만 위한다면 자신을 지켜주고 자신에게 행복을 가져다줄 것으로 생각했던 것들이 오히려 자신을 비참하게 만들고 울게 만드는 것이 되어 버린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부한 형제들이 지금 넉넉하게 가지고 있다고 자신만만해하지 말고 앞으로 닥쳐오는 여러 가지 비참한 것들로 말미암아 오히려 지금 울부짖으면서 울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5:2 너희 재물은 썩었고 너희 옷은 좀먹었으며
앞서 1절에서 언급한 부한 형제들에게 닥치는 비참한 것들에 대한 것입니다. 많던 재물은 썩어버렸고 화려한 옷은 좀먹어버렸다는 것입니다.
⚫ 재물은(πλοῦτος, 플루토스)은 “부유함은, 부는”을 뜻합니다.
⚫ 썩었고(σέσηπεν, 세세펜)는 σήπω(세포: 썩다, 소멸하다)의 동사 직설법 완료형입니다.
든든하게 지탱해주던 부유함이 썩어서 소멸하게 되었고 넘쳐나는 옷들은 좀먹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부유함과 옷과 같은 눈에 보이는 재물은 결국에는 모두 사라지고 만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보면 소유를 많이 하고 있는 부한 형제들에게 그만큼 더 큰 비참함이 닥치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5:3 너희 금과 은은 녹이 슬었으니 이 녹이 너희에게 증거가 되며 불 같이 너희 살을 먹으리라 너희가 말세에 재물을 쌓았도다
3절에서도 2절에 이어서 부한 형제들에게 닥치는 비참한 것들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금과 은은 녹이 슬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녹이 증거가 되고 불과 같이 살을 먹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하므로 그동안 쌓아둔 그 많던 재물이 알고 보니 말세에 재물을 쌓아둔 것이라는 것입니다.
⚫ 말(ἐσχάταις, 에스카타이스)은 “극도의, 맨끝의, 마지막의, 가장 가치 없는, 가장 작은”의 뜻입니다.
⚫ 세(ἡμέραις, 헤메라이스)는 “날”의 뜻입니다.
⚫ 재물을 쌓았도다(ἐθησαυρίσατε, 에데사우리사테)는 θησαυρίζω(데사우리조: 쌓아두다, 모으다, 저장하다, 비축하다)의 동사 직설법 과거형 2인칭 복수입니다. “너희들은 쌓아두었다”라는 뜻입니다.
부한 형제들이 아무리 많은 재물을 땅에 쌓아두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자신을 위하는 것이 아니라 결국에는 마지막 심판의 날에 자신을 심판받게 하는 증거물들이 되어 버린다는 것입니다.
이익을 보려고 열심히 쌓아둔 재물이 오히려 자신에게 해를 끼치는 재물이 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보면 사는 동안에 재물인 줄 알고 부지런히 쌓고 있던 그 재물은 재물이 아니라 심판이었고 심판을 쌓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하므로 예수님의 가르치심대로 땅에 쌓아둔 보물은 좀먹고 녹슬고 도둑이 훔쳐 가므로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고 하늘에 쌓아두어야 합니다(마 6:19-20).
이러한 하늘의 보물을 야고보서에서 찾아보면 고아와 과부를 돌보고(1:27),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 형제에게 쓸 것을 주고(2:15-16), 추수한 품꾼에게 삯을 제대로 주어야(5:4) 한다는 것입니다.
5:4 보라 너희 밭에서 추수한 품꾼에게 주지 아니한 삯이 소리 지르며 그 추수한 자의 우는 소리가 만군의 주의 귀에 들렸느니라
4절도 부한 형제들에게 닥치는 비참함에 대한 것입니다. 이번에는 추수한 품꾼들에게 주지 아니한 삯에 대한 것입니다.
⚫ 주지 아니한(ἀπεστερημένος, 아페스테레메노스)은 ἀποστερέω(아포스테레오: 약탈하다, 사취하다, 빼앗다)의 동분사 완료 수동태입니다. “약탈당한”의 의미입니다.
일꾼들에게 삯을 제대로 주지 않고 약탈한 것은 그대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약탈당한 삯이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해 소리 지르면서 하소연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 우는 소리가(βοαὶ, 보아이)는 복수이므로 “부르짖음들이, 외침들이”의 뜻입니다.
⚫ 들렸느니라(εἰσεληλύθασιν, 에이셀렐뤼다신)는 εἰσέρχομαι(에이세르코마이: 들어오다, 들어가다)의 동사 직설법 완료 복수형입니다.
약탈당한 일꾼들이 억울해서 한이 맺혀서 외치는 소리들이 허공에 사라지고 마는 것이 아니라 만군의 하나님께서 들으신다는 것입니다.
경제적으로 압제당하는 형제들의 부르짖음이 하나님께 올려진다는 것입니다.
이러하므로 가난한 형제를 차별하거나 외면하지 말고 그들이 필요로 하는 쓸 것을 주고 근로자의 삯을 약탈하지 말고 제때에 제대로 지불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궁핍한 자가 부르짖을 때 건져주시고 도움이 없는 가난한 자도 건져주시고(시 72:12), 가난한 자의 부르짖음을 잊지 아니하십니다(시 9:12).
귀를 막고 가난한 자가 부르짖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면 자기가 부르짖을 때도 들을 자가 없다고 하였습니다(잠 21:13).
그리고 이익을 얻으려고 가난한 자를 학대하는 자는 가난하여질 뿐이라고 하였습니다(잠 22:16).
이익을 보려는 형제들이 일한 삯을 약탈하여 쌓아놓은 것 같았지만 그것이 도리어 비참하게 만드는 화를 쌓는 결과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하므로 예수님의 가르치심에서도 가난한 형제들에 대한 가르치심을 볼 수 있습니다.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막 10:20-21).
사도 바울도 가난한 자들을 돌보는 일을 본래부터 힘써 행하여 왔다고 하였습니다(갈 2:10).
이러한 것을 보면 가난한 형제와 경제적으로 힘든 형제와 억압을 당하는 형제의 부르짖음을 외면하지 않고 사랑으로 지혜롭게 도울 수 있도록 힘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입에서 삯을 돌려달라고 하는 더이상 외치는 소리가 나오지 않도록 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하므로 선한 권력의 행사가 필요하고 부한 형제들의 나눔과 베품과 섬김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5:5 너희가 땅에서 사치하고 방종하여 살륙의 날에 너희 마음을 살찌게 하였도다
5절에서도 마찬가지로 부한 형제들에게 닥치는 비참한 것들에 대한 것입니다.
⚫ 사치하고(ἐτρυφήσατε, 에트뤼페사테)는 τρυφάω(트뤼파오: 사치스럽게 살다, 마시고 흥청거리다)의 동사 직설법 과거형 2인칭 복수입니다. “너희들은 사치스럽게 살았다”라는 뜻입니다.
⚫ 방종하여(ἐσπαταλήσατε, 에스파탈레사테)는 σπαταλάω(스파탈라오: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다, 방탕한 생활을 하다)의 동사 직설법 과거형 2인칭 복수입니다. “너희들은 방탕한 생활을 하였다”라는 뜻입니다.
흥청망청 살아가는 것이 재미도 있고 사람답게 사는 것처럼 보였지만 결국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주위에 힘들고 어렵게 사는 형제들은 차별하고 도움의 손길을 외면하면서 혼자 호의호식하면서 방탕하게 산 결말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은 오히려 진노를 쌓게 하여 마지막 심판의 날인 살육의 날에 비참하게 살육을 당하도록 만든다는 것입니다.
⚫ 살찌게 하였도다(ἐθρέψατε, 에드렢사테)는 τρέφω(트레포: 기르다, 먹이다, 양육하다)의 동사 직설법 과거형 2인칭 복수입니다. “너희들은 길렀다”라는 뜻입니다.
이러한 것은 심판을 자초하게 하는 마음을 길렀다는 것입니다.
선한 마음을 길렀으면 좋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사치하고 방탕한 마음을 길렀기에 살육의 날에 그만한 대가를 치르게 만든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보면 마지막 날에 엄정한 심판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것을 3절에서는 말세라고 하였고 5절에서는 살륙의 날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것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끝을 보면서 살아갈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최후의 날에 어떤 심판을 받게 되고 어떤 상급을 받게 되는지 평소에 결산해보는 것이 좋다는 것입니다.
5:6 너희는 의인을 정죄하고 죽였으나 그는 너희에게 대항하지 아니하였느니라
6절은 추수한 품꾼에 대한 것입니다. 부한 형제들이 선한 품꾼인 의인을 정죄하고 죽였으나 그들이 대항하지 아니하였다는 것입니다.
⚫ 정죄하고(κατεδικάσατε, 카테디카사테)는 καταδικάζω(카타디카조: 정죄하다, 형을 선고하다)의 동사 직설법 과거 2인칭 복수입니다. “너희들은 정죄하였다”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에서 가난한 형제를 택하시고 믿음에 부요하게 하셨으나 부한 형제는 억압하고 법정으로 끌고 가는 것입니다(2:5-6).
그러나 이렇게 부한 형제들이 정죄하고 죽인 것은 의로운 형제들을 죽인 것이 아니라 살육의 날에 자기 자신을 죽이는 것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의인은 의롭다고 칭함을 받은 칭의인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의로운 일을 하는 형제라는 뜻입니다.
4-6절에서 그러한 형제를 찾아보면 추수를 성실하게 한 형제이고 삯을 주지 않아도 하나님께는 부르짖어도 부한 형제들에게는 대항하지 아니한 형제를 가리킵니다.
힘이 없어 대항하지 아니하였다는 것보다는 구제하는 수단을 동원하지 않고 대항하지 아니하였다는 것입니다.
부한 형제를 원망하지 않고 용서하였다는 것입니다. 용서하는 의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의인을 부한 형제들은 무시하고 추수한 삯을 주지 아니하고 오히려 정죄하고 죽였다는 것입니다.
● 5:7-12 주님께서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앞서 1-6절에 부한 형제를 예로 들어 결말에 대한 것을 언급한 것처럼 7-12절도 말세와 관련된 것입니다.
말세에 닥치는 심판을 받지 않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을 무려 네 번에 걸쳐 형제들아라고 하면서 매우 강력하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야고보서에서 이처럼 집중해서 호칭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없습니다. 야고보서의 막바지에 다다르면서 요긴하다고 여기는 것을 매우 강조하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형제들이라고 거듭 말하고 있는 것은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너희들은 형제들간이라는 것을 일깨워주고 있는 것입니다.
형제들 간에 즉각 다투지 말고 오래 참아서 원망하지 말고(9) 화목하게 지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호칭을 기준으로 네 가지 유형의 권면으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7-8절은 농부, 9절은 원망, 10-11절은 선지자들과 욥, 12절은 맹세를 소재로 들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것을 통해 주님께서 강림하실 때까지 길이 참아야 하고(7-8) 심판을 면해야 하고(9) 결말을 볼 수 있어야 하고(10-11) 정죄 받는 것을 면할 수 있어야 한다는(12) 것입니다.
5:7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께서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7절에서는 말세와 관련하여 주님의 강림하심에 대한 것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반드시 강림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날까지 어떤 일을 겪더라도 길이 참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을 7절에서는 주께서 강림하시기까지라고 하였으며 8절에서는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것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주님께서 반드시 오신다는 것입니다(계 22:7, 12, 20). 그리고 오셔서 반드시 심판하신다는 것입니다.
다시 오셔서 영벌과 영생의 심판(마 25:46)과 상급의 심판(계 22:12)을 해주십니다.
이렇게 최종 결산해주시는 주님의 강림하심은 앞으로 남아 있는 인류의 역사에 있어서 가장 위대하고 가장 중요합니다.
주님께서 강림하시는 그날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하늘이 떠나갈 듯이 찬송하게 될 것입니다.
이러하므로 주님의 강림하심에 대한 기대감과 긴장감을 가지고 오래 참으면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오래 참는 것입니다(고전 13:4). 그러므로 오래 참는 인내가 중요합니다. 그러한 인내가 필요한 것입니다(히 10:35-37).
이러하므로 야고보서를 시작하면서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1:3),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1:4),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1:12)라고 하였고,
마치면서 길이 참으라(5:7), 길이 참아(5:7), 길이 참고(5:8), 고난과 오래 참음의 본으로 삼으라(5:10),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5:11)라고 한 것입니다.
7-12절 단락을 시작하면서 형제들아라고 하는 이러한 호칭은 이번 단락에 무려 네 번씩이나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 가운데 7절은 주님께서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는 것을 농부를 예로 들고 있습니다.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 길이 참으라(Μακροθυμήσατε, 마크로뒤메사테)는 μακροθυμέω(마크로뒤메오: 오래 참다, 인내하다)의 동사 명령법 2인칭 복수입니다. “너희들은 오래 참으라”는 뜻입니다.
형제들에게 권면하면서 주님께서 강림하실 때까지 오래 참으라고 한 것입니다.
⚫ 바라고(ἐκδέχεται, 에크데케타이)는 현재형으로 원어원형은 ἐκδέχομαι(에크데코마이)인데 “기대하다, 기다리다”라는 뜻입니다.
⚫ 길이 참아(μακροθυμῶν, 마크로뒤몬)는 μακροθυμέω(마크로뒤메오: 오래 참다, 인내하다)의 동분사 현재 능동태입니다.
농부가 농사에 필요한 이른 비와 늦은 비가 올 때까지 그동안에 오래 참아서 추수하게 되는 귀한 열매를 기대하면서 기다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오래 참는 것이 중요하고 그렇게 오래 참아야 결실을 보게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처럼 주님의 강림하심도 마찬가지로 주님께서 강림하셔서 결산해주시기까지 오래 참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강림하심이 가깝다고 하였습니다. 심판해주시는 심판주가 되시고(5:9) 행한 대로 상으로 갚아주시는 보상주가 되시는(계 22:12) 주님께서 오실 때가 가깝다는 것입니다.
밑도 끝도 없이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마침내 종말에 오셔서 결산해주시고 그리고 현세적으로도 결산해주시는 주님이신 것을 믿고 오래 참는 가운데 현실을 이기면서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5:8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건하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
8절에서는 오래 참아 결실을 보게 된 농부처럼 흔들리지 말고 그렇게 오래 참으라는 것입니다.
주위의 형제와 상황에 쉽게 흔들리지 말고 마음을 강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야 하는 이유는 주님의 강림하심이 가까이 왔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 길이 참고(μακροθυμήσατε, 마크로뒤메사테)는 μακροθυμέω(마크로뒤메오: 오래 참다, 인내하다)의 동사 명령법 2인칭 복수입니다.
길이 참고는 앞서 언급한 7절의 길이 참으라, 길이 참아와 8절의 길이 참고는 모두 동일한 어원으로 오래 참으라는 것입니다. 오래 참는 것을 매우 강조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 굳건하게 하라(στηρίξατε, 스테맄사테)는 στηρίζω(스테리조: 지지하다, 고정시키다, 강하게 하다, 확고하게 하다, 견고하게 하다)의 동사 명령법 2인칭 복수입니다. “너희들은 견고하게 하라”는 의미입니다.
흔들리는 것을 기준으로 삼고 살아가게 되면 흔들리는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믿음의 주요 온전하게 해주시고 결코 흔들리지 아니하시고 신실하신 주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면서 바라보면서(히 12:2) 강림하셔서 모든 것을 갚아주시는 것을 소망하면서 살면 됩니다.
예수님과 흔들리는 바다 물결 가운데 어느 것을 더 크게 보고 어느 것에 더 집중하느냐에 따라 풍랑 속에서 괴롭게 살아가느냐 예수님 안에서 평안을 누리면서 사느냐가 결정됩니다(마 8:23-27, 14:22-33).
이러하므로 온전하신 예수님을 바라보게 된다면 흔들리는 사람과 환경에 흔들려서 휩싸이거나 시험에 들지 않고 굳건하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박해상황 아래에서는 이러한 견고한 믿음이 더욱더 필요합니다. 형제들이 무너지지 않고 견고하게 설 수 있기 때문입니다.
5:9 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하리라 보라 심판주가 문밖에 서 계시니라
9절에서도 결말에 관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심판에 대한 것인데 원망을 심판하므로 서로 원망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도 형제들아라고 호칭하고 나서 언급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형제들이라고 한 것은 형제들 간이므로 형제들 간에 서로 원망하거나 다투지 말고 화목하라는 것입니다
9절에서 언급하고 있는 심판은 말세에 있을 심판을 의미하기도 하고 개인의 종말과 현세 속에서의 결말에 대한 심판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것을 앞서 8절에서 언급한 오래 참고 견고하게 하라는 것과 주님의 강림하심이 가깝다는 의미와 연관해서 보면 흔들리지 않고 견고하게 한다는 것은 어떤 사람과 환경에서도 원망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지 않고 흔들려서 원망하게 된다면 가까이에 오셔서 함께 계시는 심판주이신 주님의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도 행복하고 견고한 형제간의 사랑을 유지하기 위해 매우 중요하므로 형제들아라고 하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 원망하(στενάζετε, 스테나제테)는 στενάζω(스테나조: 한숨 쉬다, 탄식하다, 신음하다)의 동사 직설법 2인칭 복수입니다. “너희들은 탄식한다”라는 뜻입니다.
⚫ 원어성경에 있는 κατ’(카트)는 κατά(카타: -으로, -때문에, -을 따라, -에 대하여)의 속격이므로 “-에 대항하여, -에 대적하여”라는 뜻이 됩니다.
원망하지는 다른 형제를 보고 한숨을 쉬거나 탄식하면서 탓을 하거나 원망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님의 심판을 받지 아니하려면 서로 대적하여 탄식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른 형제의 탓을 하거나 다른 형제에 대한 원망불평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말라는 것을 보라고 하면서 곧바로 이어서 실감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 문(θυρῶν, 뒤론)은 속격 복수이므로 “문들의”라는 뜻입니다.
⚫ 서 계시니라(ἕστηκεν, 헤스테켄)는 ἵστημι(히스테미: 서다, 세우다, 멈추다)의 동사 직설법 완료형입니다.
문들이라고 하는 것은 원망하는 입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원망을 많이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만큼 심판을 더 많이 받게 됩니다.
이미 심판하시는 주님께서 원망하는 입 앞에 가깝게 서 계시기에 원망을 하기만 하면 언제든지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원망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원망은 서로를 해치게 되고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는데 지장을 주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도 너희들의 관용을 모든 사람들에게 알게 하라고 하였고 주께서 가까우시다고 하였습니다(빌 4:5).
이러하므로 서로의 행복을 위하여 서로 원망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서로 용서해주고 서로 축복해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종말의 신앙은 결산을 염두에 두고 살아가는 신앙생활인데 9절처럼 서로 원망하지 말면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서로 원망하지 않는다는 것은 서로 용서하라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서로 미워하고 서로 다투면 서로 원망이 터져 나오지만 서로 용서하면 서로 원망하지 않게 되기 때문입니다.
5:10 형제들아 주의 이름으로 말한 선지자들을 고난과 오래 참음의 본으로 삼으라
10-11절도 결말에 대한 것입니다. 오래 참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본으로 선지자들과 욥을 예로 들고 있습니다.
이러한 권면이 시작하기에 앞서 여기에서도 형제들아라고 하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말한 선지자들을 고난과 오래 참음의 본보기로 삼으라는 것입니다.
⚫ 삼으라(λάβετε, 라베테)는 λαμβάνω(람바노: 취하다, 받다)의 동사 명령법 2인칭 복수입니다. “너희들은 취하라”는 뜻입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말한 선지자들을 고난을 견딤과 오래 참음의 본보기로 취하라는 것입니다.
형제들이 박해를 받아 흩어져 있는 상황이므로 외부의 박해를 그렇게 하여 이겨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박해상황 아래에 있는 형제들 내에서 일어나는 원망과 다툼과 같은 것을 그렇게 하여 해결해나가라는 것입니다.
서로 즉각 맞대응하게 되면 서로 심히 다투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서로 마음이 상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결국은 형제들 간에 금이 가게 됩니다.
이러하므로 외부의 박해에 대해서도 그렇게 하여야 하고 박해 상황 아래에 있는 내부의 형제들 간에도 그렇게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5:11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이시니라
11절도 앞서 10절에 언급한 인내에 대한 것입니다. 욥의 인내를 예로 들고 있습니다.
욥의 인내와 결말에 대한 것과 이러한 것을 주신 주님이 어떠하신 분이신지를 밝혀주고 있습니다. 주님은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분이시다는 것입니다.
⚫ 들었고(ἠκούσατε, 에쿠사테)는 ἀκούω(아쿠오: 듣다, 경청하다, 들어서 깨닫다)의 동사 직설법 과거형입니다.
욥은 잘 참아서 복을 더 많이 받게 되었습니다. 여호와께서 욥에게 이전의 모든 소유보다 갑절이나 주셨습니다(욥 42:10).
주님께서 욥에게 주신 이러한 결말을 보았는데 주님은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분이라고 하였습니다.
⚫ 가장 자비하(πολύσπλαγχνός, 폴뤼스플랑크노스)는 형용사 주격으로 “매우 자비로운, 동정심이 많은”의 뜻입니다.
⚫ 긍휼히 여기시는 이(οἰκτίρμων, 오이크티르몬)는 형용사 주격인데 οἰκτείρω(오이크테이로: 불쌍히 여기다, -을 가엾게 여기다)에서 유래하였습니다. “불쌍히 여기시는”의 뜻입니다.
두 용어를 실명사로 본다면 매우 자비로우신 분과 불쌍히 여기시는 분이시다는 뜻이 됩니다.
주님께서 욥에게 행하신 끝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통해 주님께서는 자비를 베풀어주시는 자비의 주님이시고 긍휼을 베풀어주시는 긍휼의 주님이시라는 것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자비를 베풀어주시는 매우 자비하신 분이시고 긍휼을 베풀어주시는 불쌍히 여겨주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결말을 안다는 것은 복입니다. 삶의 결말을 알고 사역의 결말을 알게 된다는 것은 자신의 행함에 따라 어느 정도 예측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신의 결말이 어떻게 될지를 알고 대비하면서 긴장하면서 산다면 좋을 것입니다.
야고보서에 나오는 결말을 살펴보면 시험을 참으면 복이 있게 되고 주님께서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게 됩니다(1:12).
말씀을 행하고(1:22) 실천하게 되면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게 됩니다(1:25). 그 반대로 행함이 없으면 죽은 믿음이 되고(2:17, 26) 유익도 없고 자기를 구원하지도 못하게 됩니다(2:14).
하나님께 복종하고 마귀를 대적하면 마귀가 피하게 되고(4:7), 하나님을 가까이하면 하나님께서 가까이해주시고(4:8), 주님 앞에서 낮추면 주님께서 높여주십니다(4:10).
원망하지 않으면 심판을 면하게 되고(5:9), 믿음의 기도와 의인의 간구는 병든 형제가 고침을 받게 되고(5:15-16), 미혹된 형제를 돌아서게 하면 그의 영혼을 사망에서 구원하게 되고 허다한 죄를 덮게 됩니다(5:19-20).
5:12 내 형제들아 무엇보다도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나 땅으로나 아무 다른 것으로도 맹세하지 말고 오직 너희가 그렇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렇다 하고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라 하여 정죄 받음을 면하라
12절은 맹세에 대한 것입니다. 이 역시 심판에 대한 것입니다. 이러하므로 맹세를 함부로 하지 아니하여 정죄 받음을 면하라는 것입니다.
이번에도 형제들에 대한 호칭을 먼저 하고 있는데 내 형제들아라고 하였습니다.
형제들 앞에 내(μου, 무: 나의)를 추가하여 이전보다 더욱 더 친밀하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아무 다른 것으로도 맹세하지 말고 그렇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렇다하고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라하여서 정죄 받는 것을 면하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도무지 맹세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부터 나느니라고 하셨습니다(마 5:33-37).
헛맹세를 하는 것은 맹세하지 않는 것보다 못하다는 것입니다. 괜히 잘못 맹세하였다가 지키지 못하게 되면 심판받게 되기 때문입니다.
약속을 신실하게 지키시는 하나님이시므로 하나님께 대한 맹세를 함부로 하지 않아야 합니다.
형제 사이에도 지킬 수 없는 맹세를 하지 않아야 합니다. 약속을 저버리는 것이 되고 신뢰가 깨지게 됩니다.
맹세하여야 하는 상황에서 맹세하지 않는다는 것은 현실적으로는 매우 어려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맹세하는 것보다 맹세하지 않는 것이 더 유익을 주기 때문에 맹세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하므로 무엇보다 맹세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정죄 받음을 면하라는 것입니다.
⚫ 무엇(πάντων, 판톤)은 πᾶς(파스: 모든, 온갖, 온갖 종류의, 각각의 모든)의 형용사 속격 복수이므로 “모든 것들의”라는 뜻입니다.
⚫ 보다도(Πρὸ, 프로)는 전치사 속격으로 “-전에, -앞에”라는 뜻입니다.
⚫ 아무(τινὰ, 티나)는 τίς(티스: 어떤 사람, 누구든지, 누군가, 어떤 것)의 대격입니다. “어떤 것으로”라는 뜻입니다.
모든 것들의 앞에 맹세하지 말고 다른 어떤 것으로도 맹세를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어떤 것들 앞에서도 맹세하지 말라고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맹세하지 않고 정죄를 받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이어서 밝혀주고 있습니다.
⚫ 그렇다(ναὶ, 나이)는 “확실, 예, 그렇다”의 뜻입니다.
⚫ 아니라 하여(οὔ, 우)는 “-은 아니다. -아닌”의 뜻입니다.
심판을 당해서 멸망하지 않기 위해서는 그렇다는 것은 그렇다고 하고 아닌 것은 아니라고 하라는 것입니다.
무엇으로도 맹세하지 말고 그렇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렇다 아닌 것은 아니라고 하라는 것입니다.
판단할 수 없고 판단하지 않아야 하므로 예는 예라고 하고 아니오는 아니오라고 하라는 것입니다.
맹세를 남발하지 말라는 것을 베드로의 경우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추후에 심히 통곡하면서 회개하기는 하였으나(마 26:75) 목숨을 걸고 부인하지 않겠다고 하고서는(마 26:35) 인간의 연약함 때문에 상황이 불리해지자 저주하고 맹세하면서 부인하였습니다(마 26:74).
사람이 하는 사람의 맹세는 환경에 따라 영향을 많이 받는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목숨을 걸고 맹세해도 그렇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하므로 맹세를 맹종하지 말아야 합니다. 할 수만 있다면 지키지 못하는 맹세는 하지 않는 것이 좋다는 것입니다.
말세에 원망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맹세를 남발하면 약속을 많이 어기게 되고 결국에는 원망을 많이 듣게 됩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보면 맹세하지 말라는 것은 원망하지 말라는 의미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맹세하지 말라는 것은 사람은 잘 지키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지키고 싶어도 능력이 부족한 것 등의 사유로 지키지 못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맹세하시면서 약속하십니다(아브라함에게: 창 22:16-18, 다윗에게: 시 132:11). 약속을 지키시는 신실하시고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그 맹세를 그대로 지키셨습니다.
이러하므로 하나님께서 하신 맹세는 믿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맹세하실 수 있으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판단 능력이 부족할 뿐만 아니라(4:13-16) 맹세를 잘 지키지도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되면 허위맹세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통해 알 수 있게 되는 것은 하나님은 그만큼 위대하시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약속하신 것은 반드시 지키시므로 약속하신 말씀을 굳게 믿고 그대로 순종해도 된다는 것입니다.
그 무엇보다 그만큼 하나님은 믿을 수 있으신 분이시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믿고 따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하신 하나님께서는 경배와 찬송과 영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신 것입니다.
야고보서의 중요한 주제는 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행하는 자(1:22)와 실천하는 자(1:25)와 행함(2:14, 17, 18, 20, 21, 22, 24, 25, 26, 3:13)에 대한 것을 중요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것을 행하게 되는 원동력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오게 됩니다. 야고보서에서는 그러하신 하나님에 대한 것을 역시 중요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잘 행하려면 믿음이 좋아야 합니다. 믿음이 좋다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좋아야 하고 그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을 믿는 믿음이 좋아야 합니다.
이러하므로 행함만 강조하고 행함에 대한 실천과제만 제시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행하여야 할 실천과제인 말씀과 그러한 말씀을 주시고 그러한 말씀대로 행한 것을 갚아주시는 것을 분명하게 언급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고 의심하거나 업신여긴다면 잘 행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믿음은 분명한 행함이 뒤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더 많이 더 분명하게 믿을수록 더 많이 더 분명하게 행하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하므로 야고보서는 하나님이 어떠하신 분이신지에 대해 매우 중요하게 여기고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구하는 자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을(1:5) 비롯해, 교만한 자는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는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을(4:6) 언급하고 있습니다.
가까이할 때 가까이해주시는 하나님과(4:8) 주님 앞에서 낮추면 높여주시는 주님을(4:10) 언급하고 있기도 합니다.
입법자와 재판관이 되시고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고 멸하기도 하시는 하나님도(4:12) 언급하고 있습니다.
강림하시고(5:7) 심판하시고(5:9)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고(5:11), 병든 자를 일으켜주시는 주님이신(5:15) 것도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외에도 하나님에 대해 많이 언급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4장 12절 주해 참고, 168-169).
이러하신 하나님을 분명하게 믿고 또한 분명하게 믿어질 때 그만큼 말씀을 실행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하신 하나님은 맹세를 지킬 수 있으시므로 마땅히 맹세하실 수 있으십니다. 그러므로 맹세를 지키지 못한 심판도 당연히 있을 수 없습니다. 이와 같으므로 하나님께서 하신 맹세는 믿을 수 있습니다.
이에 비해 사람은 그렇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맹세를 여러 가지 연약함으로 말미암아 잘 지키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하므로 맹세를 남발하지 말고 위장맹세도 하지 말고 허위맹세도 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예라고 하거나 아니오로 말하라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 잘못 맹세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받게 되는 심판과 형제들에게 잘못 맹세하여 형제들로부터 받게 되는 심판을 면하라는 것입니다.
맹세한 것을 어기면 죄를 짓는 것이 되고 죄를 짓게 되면 심판을 받게 됩니다.
이러하므로 맹세해서 죄를 받게 하는 심판을 줄여야 합니다. 이러한 심판을 줄이려면 죄를 줄이면 됩니다. 그러한 죄를 줄이려면 맹세를 줄이면 됩니다. 그리하면 심판이 줄어들게 되는 것입니다.
5:13-20 죄를 서로 고백하며 기도하라
야고보서의 주제는 행하라는 것이고, 5장의 주제는 원망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가운데 13-20절 단락은 죄를 서로 고백하며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13-20절은 전체적으로 크게 보면 치료에 대한 것입니다. 박해상황 아래에서 행복과 건강을 유지하는 힘은 치료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치료의 힘은 기도입니다. 기도의 중요성을 보게 됩니다. 기도하여 몸의 건강을 회복하고(13-18), 돌아서게 하여 영혼의 건강을 회복하라는 것입니다(19-20).
이러한 것을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진다고 하였으므로(딤전 4:5) 말씀과 기도로 행하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마지막 단락인 13-20절은 형제 사랑의 생활 가운데 치료에 대한 것을 다루고 있습니다. 병든 몸의 치료와 병든 영혼의 치료에 대한 것입니다.
기도로 병든 형제의 병든 몸을 치료하고(13-18) 돌이키게 하여 미혹된 형제의 병든 영혼을 치료해주는 것을(19-20) 언급해주고 있습니다.
약해져서 몸이 병든 형제와 미혹되어 영혼이 병든 형제를 치료해주는 것을 언급해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13-18절은 몸의 병을 치료해주라는 것입니다. 몸의 병은 육적인 병인데 언어와 재물과 신체 등이 약해져서 생긴 병입니다. 이러한 병은 기도와 기름과 몸에 쓸 것과 따뜻한 위로와 같은 것으로 치료해주어야 합니다.
19-20절은 영혼의 병을 치료해주라는 것입니다. 영혼의 병은 영적인 병인데 진리에서 벗어나서 생긴 병입니다. 기도와 진리의 말씀과 같은 것으로 치료해주어야 합니다.
이러한 몸의 병과 영혼의 병은 원망하지 않고 용서하면 치료를 더 잘 받게 되어 있습니다(9, 16).
치료는 원망하지 않을 때 효과가 있습니다. 형제를 향한 원망을 하지 않고 하나님을 향한 원망을 하지 않을 때 병든 몸과 병든 영혼이 치료를 더 잘 받게 되고 회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죄를 서로 고백하면서 서로의 잘못을 서로 용서하고 합심하여 기도할 때 응답이 잘 되고 치료도 잘 된다는 것입니다.
야고보서는 행하라는 것이 주제입니다. 그러므로 5장 12절까지 행함의 실천과제를 제시해왔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부분인 5장 13-20절 단락을 보면 야고보서를 마무리하면서 행함에 대한 실천과제로 기도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행하라고 하고서는 기도하라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것이 의미하는 것은 행하라고 한다고 해서 우리 힘으로 행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역사하심을 힘입어서 행하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보면 성령의 인도에 따라 행하라고 하는 것과(갈 5:16, 18, 25) 같은 원리인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주님의 도우심으로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하므로 야고보서는 행함에 대한 실천과제도 제시하면서 하나님에 대한 소개와 관계 회복과 기도에 대한 것도 제시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하신 하나님께 기도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행하는 것은 옳은 일이고 좋은 일이지만 우리 힘만으로는 역부족이라는 것입니다.
야고보서에서 제시하고 있는 실천과제를 행하기 위하여 기도하라는 것인데 그러한 대표적인 과제로 아픈 형제를 위해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살면서 제일 힘든 것이 아픈 것입니다. 아픈 것이 제일 힘듭니다. 이러하므로 아픈 형제를 돌보라고 한 것입니다.
이때 아프다는 것은 언어와 재물로 말미암아 겪게 되는 고통으로 생기는 병도 포함됩니다.
아픈 것은 단순하게 신체만 아픈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경제적으로 힘들고 지쳐서 아파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14절에서 의미하는 병이 의미하는 것은 힘이 없거나 약해서 생기는 병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15절에서 의미하는 병은 고생해서 지치거나 피곤하거나 힘이 들어서 생긴 병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의미를 보면 병이라고 하는 것은 단순히 신체적인 병이 아니라 총체적인 병을 가리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문맥으로 보면 19-20절에서 언급하고 있는 미혹되어 진리를 떠난 것은 영혼의 병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몸의 치료와 영혼의 치료가 모두 필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몸의 치료를 위해서는 몸에 쓸 것을(1:27, 2:15-16) 주어야 하고 영혼의 치료를 위해서는 진리의 말씀을(1:18, 3:14, 5:19) 주어야 합니다.
몸을 육적인 것으로 보면 육적인 것에 쓸 것을 주어야 하고, 영혼을 영적인 것으로 보면 영적인 것에 쓸 것을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사도들이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고 구제는 일곱 집사들에게 맡긴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행 6:1-4).
빵과 진리의 말씀이 모두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근본적으로 중요한 것은 영혼의 건강이라는 것입니다.
몸을 입고 있는 동안에 건강하게 지내야 합니다. 건강은 몸의 건강과 영혼의 건강을 의미합니다.
몸의 건강은 육적 건강으로, 영혼의 건강은 영적 건강으로 본다면 육적이든 영적이든 모두 건강해야 합니다. 그러한 건강이 필요합니다.
약해서 생긴 병으로는 신체적, 정신적, 경제적, 극심한 스트레스 등의 원인으로 쪼들리고 시달리면 병이 됩니다. 이러한 약한 것을 채워주고 풀어 주면 치료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몸의 병은 육적인 병으로, 영혼의 병은 영적인 병으로 보면 영적인 병은 진리를 벗어나서 생긴 병입니다(5:19-20).
이러한 영적인 병은 진리에서 빗나가서 생긴 병이므로 기도와 진리의 말씀으로 치료하면 되는 것입니다. 진리의 영과 진리의 말씀으로 치료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야고보서를 마치면서 13-20절에 이러한 것을 언급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그러한 것을 확인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야고보서는 행함을 강조하면서 말과 경제생활에 대한 것을 해결해주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부분 가운데 13-16절에서는 육적인 병을 치료해주어서 건강까지 해결해주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은 근본적인 치료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영적인 병도 해결해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육적으로 병든 형제를 고칠 뿐만 아니라 영적으로 병든 형제도 기도와 진리의 말씀으로 고쳐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매우 중요하므로 야고보서 마지막인 19-20절에 영혼의 구원에 대해 언급하고 난 이후에 마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야고보서에서 구원은 모두 다섯 번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번 단락에 나오는 병든 형제를 구원(5:15), 영혼을 사망에서 구원(5:20)과 이와 함께 영혼의 구원(1:21), 자기를 구원(2:14), 하나님께서 구원(4:12)이 있습니다.
몸의 구원과 함께 영혼의 구원도 언급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번 단락만 보면 몸에 대한 구원을 언급하고 마지막으로 영혼에 대한 구원도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것을 보면 영혼의 구원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육적으로 치료를 받아도 죄 사함을 받고 영적인 구원을 얻어야 사망에서 생명을 얻게 됩니다.
육적인 치료로 죽지 않게 되는 경우도 있으나 결국은 영적으로는 영원히 죽게 됩니다.
이러하므로 몸의 구원뿐만 아니라 영혼의 구원이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을 마태복음 8-9장에서 볼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8장은 몸이 치료받게 되는 것을 언급하고 있으며 9장은 이러한 몸의 치료와 함께 죄 사함을 언급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13-20절 단락은 여러 가지로 약한 상태에 놓여 있는 병든 형제를 치료해주라는 것입니다.
몸이 병든 형제와 영혼이 병든 형제를 몸에 쓸 것으로 도와주고 주님의 역사하심과 말씀으로 도와주라는 것입니다.
● 5:13-18 병든 형제를 위하여 기도할지니라
13-18절은 형제들 내의 현실 생활 가운데 언어와 경제와 아울러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건강을 다루고 있습니다.
병든 형제의 치료에 대한 것을 다루고 있는데 기도로 병을 치료해주라는 것입니다.
또한 기름을 바르면서 기도하라고 한 것은 성령의 기름을 의미하기도 하고 기름칠을 하듯이 필요한 것을 공급해주어서 쓸 것을 주면서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몸이 아프면 정말 힘듭니다. 육체적으로도 심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관계적으로도 여러모로 어렵고 답답합니다. 신앙이 약해질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병은 형제들과 가정을 괴롭힙니다.
이러하므로 병은 하루 빨리 치료되어야 합니다. 이와 같으므로 주님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면서 위하여 기도해주고(14) 죄를 서로 고백하면서 병이 낫기를 서로 기도해주라는(16)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의 기도와(15) 의인의 간구는(16) 역사가 일어나서 병든 형제가 치료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기도의 예로 엘리야의 기도를(17-18) 예로 들고 있습니다. 우리와 같은 사람이지만 간절히 기도하니까 비가 오지 않거나 비가 오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5:13 너희 중에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찬송할지니라
13-18절은 병든 형제의 치료에 대한 것입니다.
이 가운데 13절은 기도에 대한 것입니다. 찬송에 대한 것도 있지만 13-18절의 문맥으로 보면 기도에 대한 것입니다.
고난을 당하는 형제가 있다면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즐거워하는 형제가 있다면 찬송하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13절은 기도에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즐거워하는 형제는 찬송하라고 하면서 찬송에 대한 것은 더 이상 언급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고난을 당하는 형제는 기도하라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고난은 박해로부터 오는 고난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한 고난도 기도하여야 합니다.
그러나 곧바로 이어서 나오는 14-16절을 보면 병든 형제에 대한 언급을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문맥과 고난에 대한 어원적인 의미가 “불행을 당하다”라는 의미이므로 언급하고 있는 고난은 병으로부터 오는 고난을 의미합니다.
⚫ 고난 당하는(Κακοπαθεῖ, 카코파데이)은 κακοπαθέω(카코파데오: 불행을 당하다, 재앙이나 고난을 견디다)의 동사 직설법 현재형입니다.
이처럼 불행을 당하는 상황이면 기도하라고 하고 기쁜 상황이 되면 찬송하라고 하는 것은 언제나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 변하지 말고 늘 하나님을 향하라는 것과도 같습니다.
하나님과 항상 동행한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가운데 병과 같은 불행을 당하게 되면 그러하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였습니다(살전 5:16-18).
이러한 것을 보면 힘들 때만 기도하고 기쁠 때는 감사 찬송하는 것을 잊어버리고 사는 것이 아니라 기쁠 때도 감사 찬양하고 좋을 때도 잊지 않고 감사 찬송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5:14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그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그를 위하여 기도할지니라
13-18절은 병든 형제의 치료에 대한 것입니다. 기도로 치료해주는 것을 언급해주고 있습니다.
이 가운데 14절은 병든 형제의 치료를 위해 주님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면서 기도해주라고 하였습니다.
⚫ 병든(ἀσθενεῖ, 아스데네이)은 ἀσθενέω(아스데네오: 힘이 없다, 약하다, 병들다)의 동사 직설법 현재형입니다.
신약성경에 나오는 병에 대한 원어의 원형을 보면 여러 가지 의미를 사용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병이 들었다는 것은 신체적인 병만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악하고 약하고 피곤해서 병든 것도 병으로 보고 있습니다.
병(νόσος, 노소스: 병. 마 4:23, 9:35, 10:1, 행 19:12), 병(κακῶς, 카코스: 병든, 심히, 비참하게, 잘못, 악하게. 마 8:16, 9:12, 14:35), 병든(ἄῤῥωστος, 아르로스토스: 약한, 병든. 막 16:18, 고전 11:30), 병든(ἀσθενέω, 아스데네오: 힘이 없다, 약하다, 병들다. 요 11:2, 약 5:14), 병든(κάμνω, 캄노: 수고하다, 지치다, 피곤해지다, 병들다. 약 5:15) 등이 있습니다.
이 가운데 ἀσθενέω(아스데네오)는 “힘이 없다, 약하다, 병들다”라는 의미이므로 신체적인 병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심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그리고 여러 가지 면에서 약해서 생긴 병을 뜻합니다.
이러하므로 형제들 안에 약한 형제가 없고 약한 것이 없도록 약한 형제와 형제들의 약한 것을 고쳐줄 수 있어야 합니다.
14절은 약해져서 병이 생긴 형제에게 주님이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면서 위하여 기도하라고 하였고, 15절은 믿음의 기도로 피곤해져서 병이 생긴 형제를 구원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 기름을(ἐλαίῳ, 엘라이오)은 여격으로 “감람유로”라는 뜻입니다.
감람유는 식용과 연료용과 의료용과 선수용 등으로 다양하게 사용되었습니다.
때로는 적정한 곳에 감람유도 치료제로 사용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영적으로 보면 성령님의 기름부으심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역사하심으로 치료받기도 하고 의료의 도움으로 치료받기도 하라는 것입니다.
또한 이렇게 기름을 바르면서 기도하라는 것은 기름칠을 하듯이 필요한 것을 공급해주어서 잘 돌아가게 하면 낫게 된다는 의미도 있는 것입니다.
힘이 없고 약해서 생긴 병은 육체적으로 못 먹고 못 입고 못 자서 쪼들려서 생기는 병이기도 합니다.
이러하므로 그렇게 병든 형제들에게 쓸 것을 주면서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5장을 시작하면서 1-6절에 부한 형제들을 언급하고 있는 것은 재물을 쌓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나누어주라는 것입니다.
나누어주지 않으면 결국에는 모두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이러하므로 재물을 경제적으로 약한 형제의 치료제로 사용하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잘 요약해주고 있는 성경 말씀을 볼 수 있습니다. 디모데전서 6장 17-19절을 보면 그러한 것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부한 자들에게 명령하여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셔서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라고 하였습니다.
또한 선을 행하고 선한 사업을 많이 하고 나누어주기를 좋아하는 자가 되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 바르며(ἀλείψαντες, 알레잎산테스)는 ἀλείφω(알레이포: 기름 바르다)의 동분사 과거형 복수입니다.
⚫ 기도할지니(προσευξάσθωσαν, 프로슠사스도산)는 προσεύχομαι(프로슈코마이: 기도하다)의 동사 명령법 3인칭 복수입니다. “그들은 기도하라”는 뜻입니다.
이러한 것을 보면 주님의 이름으로 의료의 도움을 받으면서 기도해주라는 것입니다. 의료도 적절하게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의료만 신봉한다거나 의료를 우선한다면 의료가 우상이 되겠지만 주님을 의지하고 기도드리는 가운데 의료의 도움을 받아 치료받는 것은 효과적인 방법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하므로 주님의 이름으로 기름을 발라서 치료하듯이 주님의 이름으로 의료의 도움을 받아 치료받으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의료로 고칠 수 없는 불치병이나 고질병은 더욱 주님의 역사하심으로 나음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병든 형제를 위하여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기도의 중요성을 계속해서 언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기도로 주님의 역사하심이 임하셔서 주님의 이름으로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해주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병을 짊어지셨다고 하였고(마 8:17), 예수님께서 채찍에 맞으심으로 나음을 얻게 되었다고 하였습니다(벧전 2:24).
이렇게 병을 짊어주시고 병을 치료해주시는 예수님의 역사하심으로 그러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치료해주라는 것입니다.
병든 형제를 돌본 여부에 대한 심판은 예수님께서 오셔서 심판하실 때 심판의 대표적인 내용에 해당이 됩니다. 양과 염소의 비유에 나옵니다(마 25:31-46).
그리고 이렇게 기도하라는 것은 사람의 힘으로는 행함의 구원을 해결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권자이시고 전능자이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러하므로 시작하면서 1장에서 지혜를 구하는 기도에 대한 것을 언급하고 마치면서 5장에서 병든 형제의 치료를 위한 기도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5:15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그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받으리라
13-18절은 병든 형제의 치료에 대한 것입니다. 기도로 치료해주는 것을 언급해주고 있습니다.
이 가운데 15절은 믿음의 기도에 대한 것입니다. 믿음의 기도는 주님께서 병든 형제를 일으켜주시고 혹시 죄를 범하였더라도 사하심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 병든(κάμνοντα, 캄논타)은 κάμνω(캄노: 수고하다, 지치다, 피곤해지다, 병들다)의 동분사 현재형입니다. 수고해서 일하다가 지치고 피곤해서 생긴 병이라는 것입니다.
⚫ 구원하리니(σώσεῖ, 소세이)는 σώζώ(소조: 구원하다, 해 받지 않게 하다, 보존하다)의 동사 직설법 미래형입니다.
⚫ 일으키시리라(ἐγερεῖ, 에게레이)는 ἐγείρω(에게이로: 일어서게 하다, 일으켜 세우다, 죽은 자를 일으키다)의 동사 직설법 미래형입니다.
믿음의 기도를 하면 주님께서 병든 형제를 구원해주신다는 것입니다. 즉 병든 형제를 낫게 해주신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이름으로(5:14) 이러한 믿음의 기도를 하면 주님께서(5:15) 일어서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이러하므로 정욕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고 병든 형제를 위하여 믿고 기도하면 응답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하므로 자신의 정욕에 허비하려고 잘못 구하는 것이(4:3) 아니라 병이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해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기도는 믿음으로 구하라는 것입니다.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해주시는 하나님을 믿어야 하고 그러하신 하나님께서 주신다고 약속하신 것을 믿고 구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건강한 형제들이 되려면 그러한 믿음이 필요하고 그러한 믿음의 기도가 필요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너희 믿음대로 되라고 하시면서 낫게 해주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마 8:13, 9:29).
그러한 믿음의 기도는 역사하는 힘이 그만큼 크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실제 예를 17-18절에 엘리야의 기도를 통해 보여주고 있습니다.
⚫ 사하심을 받으리라(ἀφεθήσεται, 아페데세타이)는 ἀφίημι(아피에미: 내보내다, 버려두다, 용서하다)의 동사 직설법 미래 수동태 3인칭 단수입니다. “그는 용서받을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믿음의 기도를 하면 비록 죄를 범하였다고 하더라도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용서를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9장 2-7절을 보면 그러한 사례를 볼 수 있습니다.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데리고 오자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작은 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이후에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고 하시자 일어나서 집으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데리고 온 사람들의 믿음의 행동으로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가 죄 사함도 받게 되고 병도 낫게 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죄를 사해주시는 예수님께서 죄를 사하여주시므로 이러한 죄 사함을 받을 수 있도록 도움을 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믿음의 기도로 도움을 주어서 죄 사함을 받게 해주고 병도 낫게 해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5:16 그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백하며 병이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
13-18절은 병든 형제의 치료에 대한 것입니다. 기도로 치료해주는 것을 언급해주고 있습니다.
이 가운데 16절은 의인의 간구에 대한 것입니다. 죄를 서로 고백하는 의인들이 병이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면 역사하는 힘이 크게 된다는 것입니다.
⚫ 고백하며(ἐξομολογεῖσθε, 엨소몰로게이스데)는 ἐξομολογέω(엨소몰로게오: 약속하다, 고백하다, 시인하다, 찬미하다, 칭찬하다)의 동사 명령법 2인칭 복수입니다. “너희들은 고백하라”는 뜻입니다.
⚫ 병이 낫(ἰαθῆτε, 이아데테)은 ἰάομαι(이아오마이: 치료하다, 고치다, 회복시키다)의 동사 가정법 수동태입니다.
앞서 15절에 언급한 것처럼 죄를 용서받게 되고 병을 치료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 의인의(δικαίου, 디카이우)는 δίκαιος(디카이오스: 의로운)의 속격 단수입니다. 실명사로 본다면 “의로운 사람의”라는 뜻입니다.
⚫ 역사하는(ἐνεργουμένη, 에네르구메네)은 ἐνεργέω(에네르게오: 역사하다, 일하고 있다)의 동분사 현재형입니다.
이렇게 서로 고백한다는 것은 서로 원망하지 않고 서로 용서한다는 것입니다.
치료제는 원망하지 않는 것입니다. 병든 형제의 몸과 영혼의 치료는 원망하지 않는 사랑의 치료제가 병을 낫게 해줍니다. 형제를 사랑하라는 최고의 법(2:8)이 치료의 묘약인 것입니다.
이러한 지혜는 화평하게 해줍니다. 긍휼을 베풀어주고 관용하게 됩니다. 미워하거나 다투지 않고 용서하게 되는 것입니다(3:14-18).
이러한 용서를 하는 의인이 간구하는 기도는 역사하는 힘이 큽니다. 합심기도의 위력을 보여주게 됩니다.
이러하므로 용서의 기도가 필요합니다. 욥기 42장 10절을 보면 욥이 친구들을 위하여 기도해주었을 때 하나님께서 욥이 처한 곤경에서 돌이켜주시고 욥에게 이전 모든 소유보다 갑절이나 주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것을 보면 야고보서에서 서로 원망하지 말라고(5:9) 언급한 대로 원망하지 않는 기도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합심기도의 위력은 원망하지 않는 기도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기도는 응답이 잘 되는 기도입니다.
서로 용서하고 마음에 원한이 없어야 합심이 잘 되고 그러한 상태에서 기도하니까 응답이 잘 되는 것입니다.
과거에 매이면 미래가 없다고 합니다. 용서가 없으면 미래지향적이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관계가 열리지 않고 묶이게 됩니다. 개인이든 그 무엇이든 마찬가지입니다.
용서하지 않으면 계속 미래의 관계도 계속 풀리지 않고 속상하게 힘들게 살아가게 됩니다. 병이 듭니다.
미래를 개척하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려면 용서로 만들어집니다. 미래는 그렇게 만들어집니다. 용서가 미래를 그렇게 만듭니다.
한을 품는 과거지향적이 아니라 미래 진취적인 자세로 용서하면서 살 때 미래는 활짝 열리게 되고 마음 편안하게 건강하게 살아가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잘못을 용서하면 용서받고 잘못을 용서하지 않으면 용서받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마 6:14-15, 18:35).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게 해주신다고 하셨습니다(마 18:19).
이처럼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용서에 대한 가르치심과 합심기도의 위력에 대한 가르치심을 볼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도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용서해주신 것처럼 서로 불쌍하게 여기고 용서해주라고 하였습니다(엡 4:32, 골 3:13).
이렇게 용서하게 되면 합심기도를 더 잘 드리게 되므로 응답이 더 잘 됩니다. 또한 병이 치료되어 건강이 회복됩니다. 관계가 회복되므로 덩달아 경제까지도 좋아지게 됩니다.
아픈 것은 여러 가지 원인이 있는데 그 가운데 극심한 스트레스가 있습니다. 가까운 형제와 심하게 다투면 불치병으로까지 번질 수 있습니다. 한을 품고 미워하면 병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하므로 다툼을 해결해야 합니다. 관계를 회복해야 합니다. 그러면 서로의 건강을 회복하게 됩니다. 서로의 경제가 회복하게 됩니다.
이러한 비결은 다른 형제의 잘못과 상관없이 용서해줄 때입니다. 이러한 방식은 치료에 탁월한 효과가 있게 됩니다.
이처럼 얼굴이 일그러지느냐 활짝 피느냐 하는 것은 용서에 달려 있으므로 용서하면서 기도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용서하고 합심하여 기도드리게 되면 놀라운 응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5:17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그가 비가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 년 육 개월 동안 땅에서 비가 오지 아니하고
13-18절은 병든 형제의 치료에 대한 것입니다. 기도로 치료해주는 것을 언급해주고 있습니다.
이 가운데 17절은 기도의 예로 엘리야를 들고 있습니다. 엘리야가 기도하니까 삼 년 육 개월 동안 비가 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앞서 15절에 언급한 믿음의 기도의 예가 될 수 있고 16절에 언급한 의인의 간구의 예가 될 수 있습니다.
⚫ 간절히(προσευχῇ, 프로슈케)는 προσευχή(프로슈케: 기도, 기도처)의 명사 여격이므로 “기도로”라는 뜻입니다.
⚫ 기도한즉(προσηύξατο, 프로세윜사토)은 προσεύχομαι(프로슈코마이: 기도하다)의 동사 직설법 과거형 3인칭 단수입니다.
엘리야가 기도로 기도하였다는 것은 그만큼 진지하게 간절히 기도하였다는 것입니다.
5:18 다시 기도하니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맺었느니라
13-18절은 병든 형제의 치료에 대한 것입니다. 기도로 치료해주는 것을 언급해주고 있습니다.
이 가운데 18절은 17절에 이어서 기도의 예로 엘리야를 들고 있습니다.
⚫ 기도하니(προσηύξατο, 프로세윜사토)는 17절의 기도한즉과 동일합니다. προσεύχομαι(프로슈코마이: 기도하다)의 동사 직설법 과거형 3인칭 단수입니다.
⚫ 비를(ὑετὸν, 휘에톤)은 “호우를, 큰비를”이라는 뜻입니다.
⚫ 맺었느니라(ἐβλάστησεν, 에블라스테센)는 βλαστάνω(블라스타노: 움튼다, 싹트다, 산출하다)의 동사 직설법 과거 능동태입니다.
엘리야가 다시 기도하니까 이번에는 하늘이 큰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산출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엘리야는 우리와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었으나 간절히 기도하였더니 그렇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기도는 하나님을 위대하게 하고 기도는 기도자를 위대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원래부터 위대하시나 위대한 기도 응답을 해주시므로 하나님의 위대하심이 나타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도자는 위대한 기도 응답을 받게 되어 위대한 역사가 일어나게 되므로 자신도 모르게 위대한 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다윗이 위대하게 된 것도 그러합니다. 다윗이 여호와께 여쭈어 기도하였으므로(삼하 2:1, 5:19) 여호와께서 위대한 역사를 일으켜주셨고 다윗은 위대한 왕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 5:19-20 미혹된 형제를 돌아서게 할지니라
19-20절은 병든 영혼의 치료에 대한 것입니다. 미혹되어 영혼이 병든 것을 치료해주는 것을 언급해주고 있습니다.
시험에 들어 진리에서 벗어나서 미혹된 형제들을 돌아서게 하여 병든 영혼을 구원하는 것에 대한 것입니다.
이 가운데 19절은 형제들 가운데 미혹되어 진리를 떠난 형제를 누가 돌아서게 하겠느냐는 것입니다.
20절은 죄인을 미혹된 길에서 돌아서게 하면 그의 영혼을 사망에서 구원하게 되고 허다한 죄를 덮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원망하지 말라는 대로 원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서로 원망하지 않아야 돌아서게 할 수 있습니다.
서로 원망하면 서로 돌아서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서로 미워하지 않고 서로 원망하지 않아야 합니다.
마음의 상처와 같은 영혼의 상처를 치료받으려면 서로 원망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리하면 돌아서게 할 수 있습니다.
14-15절처럼 육적으로 병든 형제를 기도와 쓸 것과 용서로 고칠 뿐만 아니라 19-20절처럼 영적으로 병든 형제도 기도와 진리의 말씀으로 고쳐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매우 중요하므로 야고보서 마지막인 19-20절에 영혼의 구원에 대해 언급하고 난 이후에 마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5:19 내 형제들아 너희 중에 미혹되어 진리를 떠난 자를 누가 돌아서게 하면
19-20절은 병든 영혼의 치료에 대한 것입니다. 미혹된 길에서 돌아서게 하여 치료해주는 것을 언급해주고 있습니다.
이 가운데 19절은 형제들 가운데 미혹되어 진리를 떠난 형제를 누가 돌아서게 하겠느냐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내 형제들아라고 또다시 호칭하면서 시작하고 있습니다. 마치면서 강조하고 싶은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 미혹되어(πλανηθῇ, 플라네데)는 πλανάω(플라나오: 길을 잃게 하다, 속이다, 빗나가다, 방황하다)의 동사가정법 수동태입니다. “빗나가게 된다면”이라는 뜻입니다.
⚫ 돌아서게(ἐπιστρέψῃ, 에피스트렢세)는 ἐπιστρέφω(에피스트레포: -으로 돌아가다, -으로 돌아오다, 돌아오게 하다, 돌이키다)의 동사 가정법 능동태입니다.
“형제들 가운데 누군가가 진리에서 벗어나서 길을 잃고 방황하는 경우가 발생하게 되었을 때 누군가가 나서서 그를 돌아오게 한다면”이라는 의미입니다.
시험에 들거나 연약해지거나 이단에 빠지거나 가정환경으로 신앙생활하기에 어려움을 겪게 되는 등으로 말미암아 진리의 말씀에서 벗어나게 되는 경우가 생길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경우에 속수무책으로 바라보거나 시험이 들었다고 비난하거나 탓을 하거나 판단하고 비방하거나 정죄하거나 원망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서로 원망하다 보면 더욱 사이가 나빠지게 되고 시험에 잘 들게 되고 진리에서 떠나서 쉽게 미혹에 빠지게 됩니다.
이러하므로 서로 원망하지 말라는 것은 이처럼 매우 중요한 말씀인 것입니다.
원망하지 말고 오히려 오래 참는 가운데 보다 적극적으로 지혜와 사랑과 말씀과 믿음과 훈계와 돌봄과 관심을 베풀어서 되돌아오도록 해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기도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앞 단락에(13-18) 곧바로 이어서 나오는 문맥에서 본다면 기도로 그렇게 해주어야 합니다.
형제의 노력도 하여야 하나 가장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친히 역사해주시도록 기도를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응답을 받는 기도를 하여야 하는데 역사하는 힘이 큰 믿음의 기도와(15) 의인의 간구로(16) 돌아오게 해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노력을 하여서 되돌아오게 한다면 어떠한 귀한 보상이 주어지게 되는데 20절에 언급한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진리에서 벗어나서 생긴 영혼의 병인 말씀이 빈약해서 생긴 병은 말씀으로 치료해야 합니다.
말씀이 영혼을 소성시킵니다(시 19:7). 말씀이 죄인들을 주님께로 돌아오게 합니다(시 51:13). 진리가 치료제입니다.
이러하므로 진리의 말씀으로(약 1:18), 진리의 영으로(요 14:17) 치료받도록 해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5:20 너희가 알 것은 죄인을 미혹된 길에서 돌아서게 하는 자가 그의 영혼을 사망에서 구원할 것이며 허다한 죄를 덮을 것임이라
19-20절은 병든 영혼의 치료에 대한 것입니다. 미혹된 길에서 돌아서게 하여 치료해주는 것을 언급해주고 있습니다.
이 가운데 20절은 죄인을 미혹된 길에서 돌아서게 하면 그의 영혼을 사망에서 구원하게 되고 허다한 죄를 덮게 된다는 것입니다.
⚫ 미혹된(πλάνης, 플라네스)은 πλάνη(플레네: 방황, 이탈, 미혹, 잘못)의 명사 속격입니다. “방황의, 이탈의, 미혹의, 잘못의”라는 뜻입니다.
⚫ 미혹되어(πλανηθῇ, 플라네데)의 원어원형은 πλανάω(플라나오: 길을 잃게 하다, 속이다, 빗나가다, 방황하다)이고, πλανάω(플라나오)는 πλάνη(플레네: 방황, 이탈, 미혹, 잘못)에서 유래하였습니다.
⚫ 돌아서게 하는(ἐπιστρέψας, 에피스트렢사스)은 ἐπιστρέφω(에피스트레포: -으로 돌아가다, -으로 돌아오다, 돌아오게 하다, 돌이키다)의 동분사 과거형입니다.
⚫ 덮을(καλύψει, 칼륖세이)은 καλύπτω(칼륖토: 덮다, 가리다, 감추다, 숨기다)의 동사 직설법 미래 능동태 3인칭 단수입니다. “그는 덮을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누군가가 미혹의 길로 가게 되었으나 누군가가 거기에서 돌아오게 해준다면 돌아온 그 누군가의 영혼을 사망에서 구원하고 많은 죄를 가릴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이렇게 진리의 말씀으로 돌아오게 하고 신앙생활로 돌아오게 하려면 미워하거나 다투지 않아야 합니다.
속이거나 차별대우하거나 말로 상처를 주거나 비방하거나 원망하지말아야 합니다.
미워하면 꼴이 보기가 싫어서 천국에도 같이 가고 싶지 않다는 우스꽝스러운 이야기가 있습니다.
실제로 계속 미워하게 된다면 진리의 말씀과 신앙생활에서 떠나게 될 수 있습니다.
이러하므로 그렇게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빗나가게 하고 이탈하게 하지 않도록 하여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시험에 들어 빗나갔든 다른 형제가 빗나가게 했든 빗나가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삐뚤어졌다고 탓하지 않고 원망하지도 않아서 돌아서도록 해주어야 합니다.
기도와 진리의 영과 진리의 말씀과 용서와 위로와 쓸 것 등으로 돌아설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영혼의 구원은 오직 예수님의 은혜로 가능한데 어떻게 미혹된 길에서 돌아서게 하는 형제가 영혼을 사망에서 구원하고 허다한 죄를 덮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진리의 말씀을 떠나서 방황하던 것에서 돌아서게 하여 진리가 없는 죽음의 길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해주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진리의 말씀에서 이탈하여 짓게 된 허다한 죄를 회개하고 돌아옴으로써 용서받을 수 있게 하자는 것입니다.
병든 형제를 치료하는 문맥에서 보면 13-18절은 육적으로 병든 형제를 치료해주고 19-20절은 영적으로 병든 형제를 치료해주자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육적으로나 영적으로나 모든 병든 것을 치료하여 회복시켜 주려는 것으로 야고보서의 대미를 장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생의 구원을 얻게 됩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삶의 구원도 얻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영혼을 구원하시는 것처럼 그렇게 직접적으로 구원할 수 있다는 것은 아닙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하실 수 있으십니다.
이러하므로 다투거나 이단과 시험에 빠지는 등으로 진리에서 빗나가서 신앙생활을 떠난 형제들을 되돌아서도록 도움을 준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 회복시켜 주어서 영적으로 죽어 있는 상태의 영혼을 치료받게 해준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진리에서 빗나갔으므로 기도와 전도와 성경공부와 쓸 것과 같은 여러 가지를 통해 진리를 다시 회복시켜 영혼의 구원도 받을 수 있도록 도움을 준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면서 기도하듯이(5:14) 주님의 이름으로 몸에 쓸 것을 주고 화해하고 위로하면서 진리의 말씀과 빵으로 섬기면서 기도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랑이 치료제입니다.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하면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는다고 하였습니다(벧전 4:8).
미움은 다툼을 일으켜도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린다고도 하였습니다(잠언 10:12).
이렇게 사랑하면 용서해주고 영혼을 살리게 되나 그 반대로 형제를 미워하게 되면 살인하는 것이 된다고 하였습니다(요일 3:15). 살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죽이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하므로 상호 간의 사랑이 필요한 것입니다. 서로 원망하지 않고 서로 미워하지 않고 서로 다투지 않고 서로 사랑하여야 하는 것입니다(요일 3:11, 4:7, 11, 12).
그리하면 언어와 재물과 건강에 있어서 형제를 사랑으로 대하게 되어 있습니다. 형제를 사랑하는 최고의 법을(2:8) 실천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과적으로는 사랑의 실현으로 원망이 사라지고 다툼과 미움과 같은 죄들이 사라지고 다른 범죄들도 줄어들게 해주므로 허다한 죄를 덮게 해주는(5:20) 것입니다.
이렇게 야고보서 5장에 이르기까지 형제들에게 언급해 온 것을 보면 말씀을 행하라는 것이고(1:22) 말씀을 실천하라는 것입니다(1:25).
사무엘이 사울 왕에게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제사보다 낫다고 하였습니다(삼상 15:22).
야고보서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도 바로 그런 것입니다. 그러한 것을 가장 빈번하게 일어나는 언어생활과 경제생활과 건강생활을 예로 들어 실천과제를 제시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의 핵심은 말씀을 행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올바른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뭐니 뭐니해도 살려내는 것은 기도하고 말씀을 행하는 것입니다(행 6:4, 딤전 4:4-5).
이러한 행함 가운데 미혹된 길을 따라 어긋나게 가고 있는 형제를 기도와 진리의 말씀과 쓸 것 등으로 도와주어서 돌아서게 해주어야 한다는(5:19-20) 것입니다.
19-20절의 문맥으로 보면 진리는 진리로 치료해주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진리를 떠난 형제는 진리로 돌아서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진리의 말씀으로 낳아주셨으므로(1:18) 진리를 거슬러 거짓말하지 말고(3:14) 진리에서 떠나지(5:19) 말도록 해야 합니다.
이렇게 하면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무궁하도록 빛나리라는 말씀대로(단 12:3) 그렇게 될 것입니다.
앞의 13-18절에서 언급하고 있는 기도와 병든 형제의 치료에 대한 문맥에서 보면 행함의 원동력은 기도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마지막까지 기도를 강조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을 의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도와주셔야 된다는 것이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고 하나님의 역사하심으로 된다는 것입니다.
사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식사 제공하는 일에 봉사하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다고 하면서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집중하겠다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는 가운데 그렇게 할 때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게 되는 것입니다(행 6:1-7).
이러한 사도들처럼 몸에 쓸 것을 주는 가운데 무엇보다도 힘써 도와주어야 할 것은 기도와 진리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미혹된 길로 가게 된 형제들도 이처럼 기도와 말씀으로 돌아오게 해주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야고보서는 행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단순히 구제하고 화평하게 지내는 것에 그치지 않습니다. 마무리하면서 그러한 것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고 있습니다.
기도와 말씀으로 도와주라는 것입니다. 기도해주고 진리의 말씀을 주어라는 것입니다.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기도와 말씀이라는 것을 대미로 장식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모든 것을 아시고(요 16:30, 21:17, 요일 3:20) 사람의 마음을 아시고(행 1:24, 15:8) 살피시는(롬 8:27, 계 2:23) 분이십니다.
그러하신 주님께 대한 믿음을 굳게 가지게 되면 그러하신 주님 앞에서 순종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다면 순종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잘 믿어지지 않으니까 잘 순종하지 못하고 자신을 믿고 자기의 판단과 생각을 믿고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4:11-16).
그러나 말씀을 믿게 되면 순종하게 되게 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믿음이 생기면 행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기도가 들어가게 되면 기도해주게 되고 말씀이 들어가게 되면 말씀에 순종하게 되어 구제도 하고 봉사도 하고 화평하게 되는 것입니다.
야고보서는 이러한 기도와 말씀에 대해 언급하고 한 이후에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대미를 구제와 봉사와 화평과 아울러 기도와 말씀으로 장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 가운데 기도해주고 영혼을 소성시키는(시 19:7) 진리의 말씀을 주면서 몸에 쓸 것을 주고 절제된 말을 하고 병을 치료해주면서 서로 화평하게 지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거룩하고도 매력적인 형제들이 될 때 형제들 내부에서만 건강을 누리고 행복을 누리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한 것은 형제들 외부로도 파급되어나가므로 삶 속에서의 전도도 되고 하나님의 의를 이루게 되고 하나님께 영광도 돌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하므로 기도와 말씀이 살아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도가 살아나고 말씀이 살아나는 형제들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진리에서 떠난 형제가(5:19) 아니라 진리의 말씀으로 낳게 된 형제로서(1:18) 미혹된 길에서 돌아서게 된 형제로서(5:20)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구원을 받은 형제라면 간혹 진리의 말씀에서 일시적으로 빗나가서 방황하는 일은 생길 수 있으나 완전히 벗어나서 구원을 상실하게 되는 일은 없습니다.
이러하므로 형제들에게서 일시적으로 이탈하게 되는 경우가 발생하게 되면 이때 손을 잡아줄 형제가 필요합니다. 잡아주어서 돌아서게 해주어야 합니다.
영혼을 사망에서 구원한다는 것은(5:20) 죽음의 상태, 즉 미혹되어 진리에서 떠난 것을 돌이키게 해준다는 것입니다.
말씀에서 떠나 말씀이 없는 믿음도 마치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과 같다고 한 것처럼(2:17, 26) 죽은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진리의 말씀으로 되돌아오게 하면 진리를 떠난 사망의 상태에서 구원을 얻게 하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영혼을 사랑한다는 것은 기도와 말씀으로 영혼을 치료해준다는 것입니다.
이러하므로 육의 치료와 영혼의 치료를 통해 야고보서의 형제 사랑을 꾸준히 펼쳐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기도하고 복음을 전도하여 영혼을 구원해주고 기도하고 진리의 말씀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 제자로 삼아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한눈에 보는 야고보서 (재개정판)
재개정일 2024년 1월 12일
개 정 일 2021년 11월 3일
발 행 일 2021년 8월 13일
지 은 이 이서영
출 판 사 퍼플
출판등록 제300-2012-167호 (2012년 9월 7일)
주 소 서울시 종로구 종로1가 1번지
대표전화 1544-1900
홈페이지 www.kyobobook.co.kr.
ISBN 978-89-24-12015-8
ⓒ 이서영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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