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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적자료/기독칼럼

유다서가 보여주는 지도력 개발의 원리 - 예화자료

by 이서영 목사 2015. 7. 17.

유다서가 보여주는 지도력 개발의 원리 - 예화자료

(이서영)

 

 

1. 영적 지도자의 정체성(1절)

 

(1) 부르심을 받은 자

 

여호수아는 위대한 지도자 모세의 발걸음을 따르는 데서 성가신 책임을 주저하지 않고 받아들임으로써 그의 지도자적 자질을 나타냈다. 여호수아는 모세보다 자신의 부적당함을 변명할 더 큰 이유가 있었지만, 모세가 자기의 부적당함을 변명한 것과 같은 죄를 반복하지 않았다. 대신에, 그는 일에 대해서 신속하게 책임을 인정했고 자기 자신을 그 일에 드렸다. 엘리야가 죽음을 보지 않고 승천할 때, 엘리사는 자기 주인에 의해 맡겨진 선지자의 직분에 대한 책임을 주저하지 않고 떠맡았다. 그는 떨어진 겉옷으로 주어진 권위를 받아들였고 지도자가 되었다. 각각의 경우에서 결정적인 요인은 거룩한 부르심에 대한 확신이었다. 확실한 소명이 인정되면, 아무도 하나님께서 맡기시는 책임을 주저할 필요가 없다.

 

(2) 사랑을 받는 자

 

성경을 보며 하나님께서 말도 안 되는 것을 요구하셨을 때, 그 말씀에 반응을 보였던 사람들을 보고 "믿음의 사람, 순종의 사람'이라고 표현하셨음을 발견했습니다. 하나님은 노아에게 말도 안 되는 일, 즉 방주를 지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아브라함에게는 언어도 다르고 문화도 다른 곳으로 이주하라고 명령하시고, 아들을 제물로 바치라고 하셨습니다. 요셉을 형제들이 팔아버리게 내버려두시고, 감옥에 넣어두시기도 하셨습니다. 모세를 40년씩이나 미디안 광야에서 살아가게 하셨습니다. 엘리사는 나아만 장군에게 요단강에서 일곱 번 목욕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죽은 나사로를 향해 일어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제자들에게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천명을 먹이시겠다고 하셨던 것들 모두 말이 안 되는 일이었습니다.

 

한 사람의 죽음과 흘린 피가 어떻게 인류를 구할 수 있었을까요? 이는 우리의 눈으로 보면 말이 안 됩니다. 우리의 생각이나 경험 그리고 환경으로 볼 때 답이 나오지 않는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사랑과 은혜 베푸심의 눈으로 보면 모든 것이 가능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이 세상에 오신 뜻과 목적을 아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사야 53장에 기록된 말씀대로 버림당하고, 찢기고, 피흘리고, 죽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인간이 당해야 하는 모든 고통을 안고 죽어갔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자신의 죄로 인함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죽음은 우리 모두의 죄에 대한 댓가였습니다. 그것들은 하나님의 세계에서만 말이 되고 가능합니다.

 

바울은 유대인을 위한 일을 하고, 유대인을 위해 설교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이방인을 위한 사도로 부르셨습니다. 요나에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처녀인 마리아는 아이를 낳게 될 것이라 전해 듣고 계집종이라며 순종하였습니다. 원수를 어떻게 사랑하라는 말입니까? 어떻게 나를 핍박하고 짓밟는 사람을 사랑하고 축복하라는 말입니까?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이고 사랑이고 율법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이 말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어떻게 2000년 전에 있었던 예수님의 죽음이 나의 죄를 사할 수 있단 말입니까? 말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말이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부활하셨습니다. 모든 권세를 이기시고….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이고 은혜이며 위대함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에게 있어서 기적도 아니고 특별한 일도 아닙니다. 우리를 향한 사랑일 뿐입니다.

 

(3) 지키심을 받는 자

 

(가) 지도자를 지켜주시는 하나님

 

지도자에 대한 교훈은 명백하다. 하나님께서 임명하신 위치에 있는 사람은 질투하는 적수들에 의해 도전받을 때 자기 자신이 변호하려고 애쓸 필요가 없다. 하늘에 계신 감독자의 손에 있으면 안전하며, 미리암에게 하신 주님의 책망은 풍성한 확신을 그에게 줄 수 있을 것이다. "너희가 어찌하여 내 종 모세를 비방하기를 두려워 아니하느냐"(민 12:8).

 

하나님께서는 자기가 부르시고 임명하신 지도자들에게 애정을 쏟으신다. 하나님은 그들을 영예롭게 하시고, 보호하시고, 그들을 변호하시며, 그들의 권리를 옹호하기 위해 모든 부족한 것을 그들에게서 제거하신다.

 

(나) 고흐를 지켜주신 하나님

 

우리에게 알려진 화가 고흐(Vincent Willem van Gogh, 1853-1890)의 할아버지(고흐와 같은 이름인 Vincent van Gogh, 1811년 라이덴대학에서 신학), 아버지(Thedorus, 1822-1885)와 고흐의 신학 준비 공부를 지도했던 이모부(Johannes Paulus Stricker) 등은 우리가 칼빈주의로 알고 있는 개혁신앙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알마니안주의(Arminianism) 영향을 받은 흐로닝언(Groningen) 학파에 속했다고 합니다.

 

흐로닝언 신학은 1804년부터 1839년까지 위트레히트대학의 신학자 반 호이스데(Van Heusde)의 제자들에게서 비롯된 것이었는데, 그 학파는 네덜란드의 중요한 교회 회의였던 도르트회의에서 결정한 칼빈주의 5대 교리를 거부했습니다. 그들은 '칼빈주의'를 외세의 침투로 여기고 거부했던 것이지요. 그들은 교리 그 자체보다는 경건한 감정과 실제적인 도덕을 중시했다고 합니다. 흐로닝언 학파의 주장에 의하면, 그리스도가 세상에 온 것은 십자가에 못 박히는 죽음으로 구원을 행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인간에게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르라고 가르쳐서 모든 인류를 하나님과의 합일로 인도하기 위해서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19세기 후반으로 가면서 화란(네덜란드) 신학계에서는 흐로닝언 신학이 밀려나고 모더니즘이 부상하기 시작했는데, 그 때 위트레히트의 오프주메르(Opzoomer) 교수는 초자연적인 것을 부정하고 성경 전체를 비판적으로 연구해야 하며 그리스도는 인간이었다고 단언했는데, 고흐의 이모부 스트리커(Striker)는 흐로닝언 학파에서 오프주메르 쪽으로 기울었다고 합니다. 그는 성경을 철저하게 비판적인 태도로 연구하면서 자연법칙에 위배되는 기적을 부인했습니다. 그 이모부가 고흐에게 종교 사상 일반에 대하여 해설해 주었던 이야기나. 스트리커의 딸이었던 케이(Kee)를 고흐가 짝사랑했던 것은 알려진 사실이죠.

 

그런데, 반 고흐는 1874년에서 1876년 사이에 '복음주의로 회심'했던 것으로 보인다고 합니다. 그가 빠리에서 보낸 편지들에는 "존 번연의 천로역정, 토마스 아 켐피스('그리스도를 본 받아'의 저자), 그리고 성경 번역본, 내겐 다른 것은 필요없다"는 말과 함께, 한때 무척 좋아했던 세속적인 문학작품을 모두 멀리하겠다고 다짐한 내용도 있다고 합니다. 그 이후 고흐는 복음주의자 찰스 스펄전의 책을 읽었으며, 부흥집회 등에도 참석하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무디의 부흥회에 참석하여 설교를 듣지 못하여 아쉽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 '데오도루스'는 고흐가 복음주의로 전환한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복음주의 신앙을 받아들였던 최초의 종교적 전환점 이후로 고흐는 목회자가 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 즈음에 그가 생애 처음으로 설교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고 합니다. "설교단에 서니 마치 캄캄한 지하 동굴에서 빠져나와 기분 좋은 한낮의 빛 가운데 들어오는 느낌이었다. 영광스럽게도 이제부터 나는 어디를 가든지 복음을 전하려 한다 ··· 1876년 이일워스에서 고흐가 한 설교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고 합니다." "이 땅에서 우리는 순례자이고 이방인입니다. 우리는 먼 곳에서 왔으며 먼 곳으로 가려 합니다. 삶이라는 여행길은 따스한 어머니품 안에서 출발하여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 팔에 안길 때까지 이어집니다. 지상의 만물은 변화하며, 영원한 도시는 이곳에 없습니다." 물론 고흐는 결국은 목회자가 아닌 화가의 길을 걸어갔죠.

 

2. 영적 지도자의 조건(2절)

 

(1) 사명에 헌신하는 자(긍휼)

 

청년시절 브라질에서 신학대학교를 졸업한 나는 한국에서 고려신학대학원을 53회로 졸업하고 KMTI 선교훈련을 수료한 후, 포어권 선교의 비전을 안고 아내와 함께 2000년 2월 16일 브라질 선교사로 파송을 받았다. 포어권 선교란 포르투갈어를 공용어로 사용하는 8개국과 7개 지역 대상으로 하는 선교이다. 특히 다양한 문화를 접한 브라질인들을 양육하여 여러 포우권 나라에 파송한다면 언어의 훈련이 없이도 바로 사역할 수 있는 강점이 있다. 브라질교회가 '포어권 나라의 복음의 통로'가 되기를 기도한다.

 

포어권 선교의 비전을 가지게 된 것은 신대원 재학 중 선교학회의 임원으로 세계선교대회 자원봉사자로 섬기게 되었을 때, 마지막 날 소명의 밤 시간에 "너가 가지고 있는 것을 나에게 달라"는 음성이 내면에서 들렸으며 가지고 있는 것이 브라질에서 힘겹게 익힌 포르투갈어와 브라질 신학생 친구들, 두 달에 걸쳐 체험한 브라질 남부와 북부 여행 그리고 브라질에서 겪은 다양한 경험인 것을 깨닫게 되었다. 비록 적은 것이지만 주님이 원하신다면 보리떡 5개와 물고기 2마리를 주님께 드린 아이의 심정으로 드렸다. 선교사의 길을 약속하는 마음으로 선교현장에서 사역하시는 선교사님들 앞에 나가서 기도하는 순간 '포어권 선교'라는 말이 나의 마음을 잡았다.

 

 

(2) 화평케 하는 자(평강)

 

화평하게 하는 자가 조직을 화평한 분위기를 만드는 참된 리더가 될 수 있다. “야곱이 이룩한 성공은 형 에서의 출현으로 의미를 잃었다. 형과의 관계를 회복하기 전에는 아무 것도 그의 마음의 불안을 해소해주지 못했다. 야곱은 그의 가족과 가축들, 그리고 종들을 얍복강 건너편으로 보내고 그는 홀로 얍복강가에서 하나님께 기도하기 시작했다. 그는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형 에서와 화해해야겠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야곱은 20년 전의 죄를 용서함 받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야 하겠다는 일념으로 밤새도록 천사와 씨름하여 마침내 축복을 받고야 말았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형을 만나니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 같았다>(창 33:10 하반절)고 했다. 형 에서와의 화해를 성경은 이렇게 말했다. <자기는 그들 앞에서 나아가되 몸을 일곱 번 땅에 굽히며 그의 형 에서에게 가까이 가니 에서가 달려와서 그를 맞이하여 안고 목을 어긋맞추어 그와 입 맞추고 서로 우니라>(창 33:3-4).

 

산상수훈에는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마 5:9)라고 했다. <화평케 하는 자>란 <피스메이커, Peacemaker>를 말한다. 화평은 화평을 기다리는 것만 가지고 안 된다. 화평은 화평을 사랑하는 것만 가지고 안 된다. 화평은 화평을 실천하고 내가 화평을 만드는 자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3) 사랑하는 자(사랑)

 

(가) 애미 윌슨 카마이클 선교사의 사랑

 

“애미 윌슨 카마이클은 1867년 아일랜드에서 태어나 1951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평생 인도에서 사역한 여선교사입니다. 그녀는 인도의 남부인 도나푸어지역에서 고아원을 세워 55년간 사역했습니다. 그녀는 어릴 때 갈색 눈보다 파란색 눈을 가지고 싶어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 그렇게 기도 드렸는데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자 실망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나중에 인도에서 사역하면서 인도인들이 모두 갈색 눈이어서 만약 자신이 파란색 눈을 가졌다면 훨씬 힘들었을 것이라고 회고합니다.

 

애미의 아버지는 그녀가 18세가 되던 해에 돌아가셨는데 벨파스트에서 웰컴복음교회를 설립하신 분입니다. 여기서 그녀는 주일학교 사역을 시작했는데 점점 부흥하여 나중에는 500명을 수용할 건물이 필요할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 때 한 광고에 500파운드면 철골구조로 500명을 수용할 건물을 지을 수 있다는 것을 보았고 마침 한 여성이 500파운드를 헌금하여 ‘웰컴 홀’의 시초가 된 것입니다.

 

그 후 1889년 애미는 맨체스터에 있는 방앗간 소녀들을 돌보게 됩니다. 그 후에 선교사가 되는데 사실 그녀는 선교사역에 적합하지 않을 정도로 건강이 매우 약했습니다. 하지만 1887년 케직 사경회에서 그녀는 중국 내륙 선교회를 창시한 허드슨 테일러로부터 선교사에 대한 설교를 듣고 선교사로 헌신합니다. 먼저 중국 내륙 선교회에 지원하여 런던에서 훈련을 받았지만 건강이 악화되어 출발이 지연되다가 나중에 교회선교회에 들어가게 됩니다. 처음에 그녀는 17개월간 일본을 여행했지만 스리랑카에서 잠시 섬긴 후 인도에 가서 평생을 보내기로 헌신합니다. 그녀를 파송한 단체는 영국교회의 제나나선교회였습니다.

 

당시 힌두교 성전에는 어린 소녀들이 제물로 드려졌으며 사제들이 돈을 벌기 위해 강제로 매춘을 강요했습니다. 애미는 바로 이 어린 소녀들을 구하는 일을 하여 많은 소녀들이 그녀의 사랑에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 후 애미는 도나푸어 협회를 설립하여 천여 명의 어린이들이 새로운 미래를 찾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애미는 인도의 문화를 존중하여 인도식 옷을 입고 자신의 피부도 진한 커피로 염색을 했으며 한 어린이를 구하기 위해 먼 거리도 마다하지 않고 힘든 여행을 감수했습니다. 한 인도 여성이 자신도 선교사가 되고 싶다고 말하면서 선교사의 삶이란 무엇인가가라고 질문했을 때 애미는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선교사의 삶은 단지 죽는 기회입니다.’

 

애미는 여러 시와 책을 저술하였습니다. 1932년 그녀는 심각한 부상을 입게 되어 여생을 힘들게 보내다 1951년 83세로 세상을 떠날 때, 비석을 세우지 말고 어린이들이 그저 ‘암마’(Amma: 타밀어로 엄마)라고만 새기게 하면서 ‘사랑하지 않고 줄 수는 있지만 주지 않고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그녀의 영향으로 나중에 우리가 잘 아는 짐 엘리엇과 그녀의 부인 엘리사벳 엘리엇도 선교에 헌신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나) 링컨 대통령과 스탠턴 장관

 

스탠턴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링컨을 얕잡아 보고 무례한 언어와 행동으로 링컨을 골탕 먹였다. 그는 사람들에게 링컨의 외모와 허름한 옷차림을 조롱하며 이렇게 독설을 퍼부었다.

 

“여러분, 우리는 고릴라를 만나기 위해 아프리카에 갈 필요가 없습니다. 일리노이 주 스프링필드에 가면 링컨이라는 고릴라를 만날 수 있습니다.”

 

 

세월이 흘러, 대통령이 된 링컨은 내각을 구성하면서 가장 중요한 국방부 장관 자리에 바로 스탠턴을 임명했다. 참모들은 이런 링컨의 결정에 모두들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스탠턴은 링컨이 대통령에 당선 된 후에도 ‘링컨이 대통령에 당선 된 것은 국가적인 재난’이라고 하면서 그를 공격했기 때문이었다. 참모들이 볼 때 스탠턴은 ‘링컨의 원수’였다. 더군다나 그는 공화당 사람도 아니었고, 확고한 민주당 사람이었다.

 

모든 참모들은 스탠턴의 임명을 재고해 달라고 링컨에게 건의했다.

“대통령 각하, 지난날 스탠턴이 한 행동을 벌써 잊으셨습니까? 그는 아직도 당신을 비난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그런 사람을 이런 중요한 자리에 앉힐 수 있습니까?”

 

링컨은 참모들의 말을 듣고 나서 이렇게 대답했다.

“그 사람이 나를 수백 번 무시한들 어떻습니까? 그는 사명감이 투철한 사람으로 국방부 장관을 할 충분한 자질이 있습니다. 그는 지금의 난국(남북전쟁)을 훌륭하게 극복할 수 있는 소신과 추진력을 갖춘 사람입니다. 그가 이 난국을 해결해 줄 수 있다면 나는 아무래도 상관이 없습니다.”

“그래도 스탠턴은 당신을 비난하고 모욕한 당신의 원수가 아닙니까? 원수를 없애 버려야지요!”

 

링컨은 빙그레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원수는 우리의 마음속에서 없애 버려야지요! 그러나 그것은 ‘원수를 죽여서 없애라’는 말이 아니라 ‘원수를 사랑으로 녹여 친구로 만들라’는 말입니다. 예수님도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이제 그 사람은 나의 적이 아닙니다. 나는 적이 없어져서 좋고, 그처럼 능력 있는 사람의 도움을 받게 되어 좋고, 일석이조 아닙니까?”

 

결국 스탠턴은 링컨과 힘을 합쳐 국난을 극복하고 많은 일을 해냈다. 그는 국방부 장관으로 재임하는 동안 최선을 다해 일했다. 링컨이 암살자의 총에 맞아 숨을 거두었을 때 스탠턴은 링컨을 부둥켜 안고 통곡하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여기, 가장 위대한 사람이 누워 있습니다.”

 

스탠턴은 링컨을 헐뜯었던 사람이었지만 나중에는 링컨을 가장 위대한 인물로 존경하는 사람이 되었다. 링컨은 자기를 미워했던 원수까지도 용서하고 사랑함으로써 진정한 승리자가 되었던 것이다.

 

3. 영적 지도자가 갖추어야 할 내적 자질들

 

(1) 믿음

 

(가)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 믿음

 

“하나님을 놓으면서까지 움켜쥘 가치가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나) 벌새와 알바트로스새

 

벌새(hummming bird)는 아주 작은 새다. 얼마나 작은지 몸길이가 6㎝밖에 되지 않는다. 정말 힘들게 사는 새다. 꽃에 있는 꿀을 따먹기 위해서는 정지 상태를 유지해야 하는데, 이를 위해 1초에 50-70회 정도 날갯짓을 한다고 한다. 이는 디지털 카메라로 잡아도 날개가 잘 보이지 않을 정도라고, 그렇게 힘들게 살아서인지 벌새의 평균 수명은 4년밖에 되지 않는다.

 

한편, 알바트로스(albatross)라는 새가 있다. 이 새는 지구상에서 가장 큰 새다. 몸길이가 90㎝이고 날개를 펴면 무려 3.5m나 된다. 모든 새 중에서 가장 높이, 가장 멀리, 오래 난다. 이 새의 평균 수명은 40-50년인데, 어떤 새는 80년 이상 살기도 한다.

 

어떻게 이 새가 이렇게 오래 날고 오래 살 수 있는지 조류학자들이 연구했다고 한다. 학자들은 이 새가 날아다니는 방식에서 답을 찾았는데, 소위 말하는 역동적 활상과 활강이라는 비행원리 때문으로 밝혀졌다. 다른 새들과 달리 알바트로스는 폭풍을 좋아한다. 거칠게 몰아치는 폭풍을 뚫고 폭풍의 꼭대기까지 올라간다. 그리고 이어지는 잔바람을 타고 멀리 계속 날아간다고 한다. 이 새는 나는데 필요한 힘의 98퍼센트를 하늘의 바람에서 얻으며 나머지 2퍼센트만 자신의 힘을 이용한다고 한다. 그래서 누가 이 새의 별명을 '신천옹(信天翁)'이라고 지어줬다. 하늘을 믿는 늙은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참 멋진 이름인 것 같다.

 

벌새처럼 제자리에 머물기 위해서 수없이 날갯짓을 하며 생존을 위해 힘들게 버둥거리며 사는 것이 크리스천의 삶일까? 그때그때의 상황에 따라 얄팍하게 머리 굴리면서 사는 것이 믿음의 삶일까? 우리는 벌새가 아니라 알바트로스처럼 멀리, 높이 그리고 오래 나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2) 겸손

 

한 번은 링컨과 스탠턴이 맥클레런 장군의 야전 사령부를 방문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맥클레런 장군이 아직 전투 현장에서 돌아오지 않아, 몇 시간 동안을 사령관실에서 기다리게 되었다. 드디어 맥클레런 장군이 돌아왔지만, 그는 링컨 대통령과 스탠턴 국방부 장관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한마디 말도 없이 2층 자기 숙소로 올라가 버렸다. 링컨과 스탠턴은 장군이 곧 내려올 것으로 생각하고 그를 기다렸다. 그러나 한참이 지난 후에도 맥클레런 장군은 얼굴도 내밀지 않았다. 얼마 후에 부관이 나타나더니 이렇게 말했다.

“장군께서는 너무 피곤하셔서 잠자리에 드셨습니다.”

 

스탠턴은 일개 장군이 감히 직속 상관인 자신과 대통령을 무시했다고 생각하니 분노가 머리 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대통령 각하, 저렇게 무례한 놈은 제 생전에 처음입니다. 저런 놈은 당장에 직위를 박탈해 버려야 합니다.”

 

링컨은 잠시 침묵하더니 조용히 스탠턴에게 말했다.

“아닙니다. 맥클레런 장군은 우리가 이 전쟁에서 이기는 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사람입니다. 장군 때문에 전쟁이 조금이라도 빨리 끝날 수 있다면 나는 기꺼이 그의 말고삐를 잡아 주고, 그의 군화라도 닦아 줄 수 있습니다.”

 

(3) 절제(자제력)

 

(가) 링컨 대통령과 스탠턴 장관의 일화

 

국방부 장관 스탠턴과 육군 사령관 번사이드는 서로 사이가 좋지 않아 늘 서로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한번은 스탠턴이 몹시 화가 나서 링컨을 찾아왔다. 그는 링컨의 집무실에 들어서자마자 흥분해서 번 사이드 사령관을 비난하기 시작했다. 번 사이드 사령관이 여러 명의 장군들이 모여 있는 자리에서 자기를 헐뜯고 공개적으로 비판했다는 것이었다. 스탠턴은 링컨에게 번 사이드 사령관에 대한 험담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링컨은 그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다가 한마디 건넸다.

 

“그래서 당신은 번 사이드 사령관을 어떻게 할 작정입니까?”

“당장 혼내 주어야지요! 나를 모욕하고 음해하려는 놈을 가만히 놔둘 수는 없습니다!”

“그럼 지금 당장 편지를 한 장 쓰도록 하세요. 당신이 내게 말한 모든 내용을 하나도 빠뜨리지 말고 다 쓰세요!”

 

스탠턴은 집으로 돌아가자마자 가장 신랄하고 보복적인 어휘를 사용해서 번 사이드 사령관에게 모욕적인 편지를 썼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자기가 쓴 편지를 링컨에게 가지고 갔다. 링컨은 편지를 다 읽어 본 후 그에게 물었다.

“이제 이 편지를 어떻게 할 생각이오?”

“어떻게 하다니요? 당장 그에게 보내야지요!”

 

그러자 링컨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런 편지는 보내는 것이 아닙니다. 그 편지를 저 난로 불 속에 집어 넣으세요. 나도 화가 날 때면 편지를 써서 난로 불 속에 종종 집어 넣습니다. 마음이 평안할 때 편지를 쓰면 그 편지는 좋은 편지가 되지만, 그렇지 않은 편지는 오히려 상대를 아프게 하고 나에게 손해를 안겨 줍니다. 감정적으로 쓴 편지는 불에 태우고 다시 써야 합니다.”

 

스탠턴은 결국 난로 불 속으로 자기가 쓴 편지를 던져 버리고 말았다. 난로 불 속에 편지를 던져 놓고 난 후 그는 마음이 평안하고 훨씬 홀가분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나) 리더가 가져야 할 절제력

 

대개 “리더는 다른 사람을 잘 이끌어가는 사람, 또는 다른 사람에게 영향력을 주는 사람, 다른 사람이 잘 따르는 사람”으로 알고 있다. 그 말은 맞는 말이다. 그러나 알고 보면 그렇지 않다. “다른 사람”이라는 말이 그러하다. 리더(leader)는 다른 사람을 리드(lead)하는 사람이기도 하지만 먼저 “자기 자신”을 잘 리드하는 사람일 것이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라고 하였다. 자기 자신을 다스리는 자가 세상을 다스릴 수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16장 24절에 말씀하셨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자기 자신이 자기 십자가 위에 박혀서 자아가 꺾인 자라야 예수님을 따를 수 있는 예수님의 참 제자가 될 수 있고 다른 사람의 리더가 될 수 있으며 비로소 제자를 삼을 수 있게 된다. 이렇게 자신을 잘 제어하고 관리하여 자신을 리드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보다 효과적으로 리드할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참된 리더는 자기 자신에게 재갈을 물려 자아를 먼저 잘 제어하여 리드하는 자이다.

 

그러나 여기에 너무 함몰하는 것은 좋지 않다. 완벽하게 자기 자신을 제어할 수 있어야 리더가 될 수 있다면 아무도 리더가 될 수 없을 것이다. 우리 주님께서도 우리가 비록 부족하고 연약하지만 우리를 들어 사용해주신다. 그러므로 자신의 성숙을 위해 끊임없이 다듬어나가는 일은 중단하지 말아야 하지만 자기 자신에 대해 너무 좌절하는 것은 좋지 않다. 그러면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기 자신을 제어하면서 리드한다는 그러한 절제된 자세로 리더로서의 역할을 수행해야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든다.

 

마귀는 아주 그럴듯한 지혜로운 속임의 가르침으로 주저앉힌다. 자기 자신의 환경과 조건에 빠져들게 만들어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게 한다. 그러므로 “부족하지만 제가 하려고 하오니. 제가 여기 있나이다. 사용해주옵소서.”라고 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창조 당시에 무질서한 것을 보시고 또한 깊은 흑암을 보시고 실망만하고 손쓰지 않으셨다면 어떻게 되었겠나? 그것을 바라보면 낙심 좌절하게 된다. 그러므로 “잘 해보겠습니다. 부족하지만 열심히 하겠습니다.”라는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자세도 중요하다.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상한 마음과 겸손이 필요하지만 지나치면 오히려 불신앙적인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자신과 환경을 초월해나가면서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과 사명을 믿고 나아가야 하는데 사명 수행이 늦추어진다. 그러므로 겸손과 절제에 대한 세심한 분별력이 필요하다.

 

(4) 인내

 

상대방 선수가 가로막지 않는 경기는 없습니다. 축구나 농구나 핸드볼을 할 때 상대방 선수가 기술과 키와 힘으로 골인시키지 못하도록 계속 막아섭니다. 그냥 가서 골인시키도록 놓아두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선수들이 경기를 아예 포기해버립니까? 상대방 선수가 막아선다고 포기하면 한 골도 넣지 못합니다. 그래서 선수들이 힘써 부딪치면서 나아갑니다. 상대방이 너무 세다고 주저앉아 있지도 않습니다. 상대방을 제치고 슛을 날립니다. 골키퍼가 막고 있어도 슛을 날립니다.

 

배구도 상대방 선수들이 편안하게 마음껏 공격하도록 가만두지 않습니다. 블로킹을 해서 막아냅니다. 그러나 막는다고 해서 스파이크를 포기하지는 않습니다. 블로킹의 벽을 뚫고 내리칩니다. 야구도 투수를 비롯해서 모든 선수들이 막아내려고 안간힘을 씁니다. 아무리 그렇게 막더라도 힘써 치고 달립니다. 유도도 레슬링도 씨름도 상대방이 막는다고 포기하지 않습니다. 함께 붙잡고 딩굴면서 싸웁니다.

 

인생살이나 신앙생활을 함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장애물은 계속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인생길이나 신앙에 있어서 가로막는 장애물이 있다고 해서 포기하면 안 됩니다. 붙잡고 씨름해야 합니다. 철벽과 같은 장애물이 있어도 골리앗 같은 장애물이 버티고 있어도 계속 부딪치면서 도전해야 합니다.

 

상대방 선수가 없는 경기는 없습니다. 사격도 양궁도 가만히 혼자 쏘지 않습니다. 상대방 선수가 모두 있습니다. 그래서 선수들끼리 심리전이 대단합니다. 기가 살기도 하고 죽기도 합니다. 체조도 수영도 마찬가지입니다. 육상이나 싸이클이나 다른 모든 종목도 마찬가지입니다. 상대방 선수가 없는 경기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아무리 상대방 선수가 있더라도 마음을 가다듬고 도전하는 정신이 중요합니다.

 

상대방 선수가 없이 편안한 조건 속에 경기를 치르는 종목은 없습니다. 태권도나 권투는 맞아가면서도 끝까지 경기합니다. 이처럼 경기할 때 좋은 환경과 조건 속에서 상대방 선수도 없이 편안하게 경기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까다로운 상대방 선수를 만나기가 일쑤입니다. 그렇다고 시작도 하기 전에 포기하는 일은 없습니다. 이기든 지든 부딪칩니다. 결과는 맡기고 그동안 힘써 갈고 닦은 기량과 힘을 다 쏟아붓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 인생살이나 신앙생활도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상황이나 장애물이나 역경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젖먹던 힘을 다하고 최선을 다해 끝까지 힘써 도전해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리는 메달 색깔이 아니라 성실하게 끝까지 힘써 뛰어준 선수에게 박수갈채를 뜨겁게 쳐줍니다. 이와 같이 그렇게 살아가는 우리를 향해서도 주위의 사람들이 박수갈채를 보내면서 격려해줄 것입니다. 또한 주님께서도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라고 칭찬해주실 것입니다.

 

(5) 분별력(통찰력, 판단력)

 

(가) 할머니의 영적 분별력

 

우리는 지식의 은사도 있어야 하지만 지혜의 은사도 필요하다. 학위도 필요하지만 영적 분별력은 더 필요하다. 할머니의 이야기를 통해 하늘의 지혜를 배워보고 각 자의 자리에서 어떤 형편에 있든지 리더의 역할을 할 수 있다.

 

“우리가 보기에는 할머니의 모든 인생과 상황 속에서 변변한 것 하나 없었지만, 깊은 신앙의 위대한 평안을 비밀로 간직하신 분이었다. 아내는 할머니와 약속한 대로 성경을 읽기 시작했고 교회에 다니더니 세례를 받았다.

 

내가 박사학위를 마치고 삼성전자에 다닐 때였다. 그리고 부산대학교에 초빙되어 교수로 왔다. 할머니께서는 우리가 부산에 온 게 너무 기쁘다고 하시며 우리 집에 찾아오셨다. 아내와 많은 이야기를 했다.

 

아내가 크리스천이 되자 할머니께서는 비로소 간증을 털어 놓으셨다. 할머니의 젊었을 때 너무 몸이 허약하셨다고 한다. 집에 누워만 계셨고, 동네사람들이 다 죽는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성질은 잘 삐치고, 고약했다고 하셨다. 어느 날 잠에서 깨어 보니, 사람들이 죽었다고 장례식 준비를 하고 있었다고 했다. 나이 29세에 죽었다가 살아나신 분이다. 그 3일간의 생과 사의 경계에서 하나님께서 땅이 둘둘 말려가는 세상 끝 날을 다 보여 주시고 세상의 모든 이치를 계시해 주셨다고 했다.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보여 주신 것들을 전하자 사람들은 귀신을 받은 무당으로 알고 집 앞에 대나무를 꽂았다고 한다. 할머니께서 아무리 사람들에게 “그런 게 아니다. 내가 본 것은 귀신의 세계가 아니라 해도 못 알아 듣고….” 바로 건강을 조금 회복하신 할머니는 교회로 가셨다.

 

놀라운 것은 우리가 만났을 때 할머니는 놀라울 정도로 건강한 골격과 체력, 그리고 온유한 성품을 가지셨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은 타고 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만난 후 완전한 새 몸과 마음을 입으신 것이었다.

 

그 몇 년 후 할머니의 딸이 예수를 믿는 상태에서 천국으로 갔다. 병상에서 “어무이, 지는 못 일어날 것 같심니더”라고 이야기할 때 “니가 천국 갈 수 있겠나?”라고, 질문하셨고 딸은 “예수님 덕분에 가는 거 아입니꺼”라고 대답했다. 딸이 먼저 갔는데도 기쁨이 넘쳤다고 했다. 깊은 심령의 평안 가운데 장례를 치르셨다.

 

시장에서 과일장수를 하셔서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속담을 듣고 ‘지성이면 감이 천 개’라고 알았다고 하시며 웃으셨다. 이렇게 세상적 지식은 무식한데 인생의 지혜는 남다르셨다. 손자가 신학대학에 입학했는데 등록금이 없었을 때, 시장에서 장사하는 다른 부자집에 등록금을 빌려 달라고 했고, 오직 할머니의 신용으로 아무 보증도 없이 등록금을 빌렸다고 했다. 정직과 신뢰가 모든 시장 사람들 사이에 인정되었던 할머니.

 

우리가 부산에서 살면서 아내는 할머니의 딱한 사정을 알게 되었다. 둘째 따님이 쫄딱 망해서, 그 손주들을 힘들게 키우고 계신 것을 알게 되었다. 아내는 두 처제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우리 가정이 돈을 좀 보태어 할머니께 도움을 드렸다. 우리 집에 1년 계시면서 우리에게 해 주신 할머니의 사랑과 헌신으로 우리는 그 분의 영적인 자녀가 되었고, 부모를 봉양하듯 지난 20년을 도와 드렸다.”

 

(나) 리더의 통찰력

 

 

이런 말을 우리는 흔히 듣는다. “리더(leader)는 리더(reader)이다.” 양서를 다독하는 자가 리더가 될 수 있다. 맞는 말이지만 알고 보면 그 이상의 의미를 유추해 볼 수 있다. 리더(reader)는 단순히 문자적으로 책을 많이 읽는 자가 아니다. 무엇을 읽느냐가 중요하다. 책 가운데서 통찰력을 읽어야 한다. 더 중요한 것은 저자의 생각과 마음까지 읽어내야 한다.

 

그리고 읽는다는 것은 책뿐만 아니다. 다른 사람의 마음도 읽어줄 수 있어야 한다. 세상도 읽을 수 있어야 한다. 더군다나 성경책을 잘 읽을 줄 알아야 한다. 단순히 독서 수준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기도와 성령님의 감화 감동하심 가운데 올바른 통찰력을 가지고 읽어야 한다. 그리하여 내가 성경책을 읽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읽혀야 한다. 성령님의 인도하심으로 성경책이 나를 읽어나가도록 해야 한다.

 

요한복음 14장 26절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요한복음 15장 26절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 요한복음 16장 13절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이렇게 진리의 성령님께서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해주시고 우리에게 진리를 가르쳐주실 때 비로소 진리가 진리답게 보이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성경책을 읽고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읽고 세상을 읽을 수 있을 때, 더 나아가 하나님의 마음을 읽고 하나님의 생각과 뜻을 읽을 수 있을 때 모든 것을 바르게 읽고 바르게 대처해나갈 수 있는 분별력과 통찰력을 가진 참된 리더가 되리라고 본다.

 

4. 영적 지도자의 특징(12-13절)

 

(1) 통합성: 연합과 소통능력, 교제(대화)

 

경험을 의식적으로 인식하는 과정을 매우 강조하고 있다. 그리하여 인식의 변화를 통해 행동에 있어서 교정이 일어나는 것으로 보고 있다. 의식개혁을 통한 행동의 긍정적인 수정이 가능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영혼과 몸을 가진 전인격체이기에 인식의 변화로 이끌어내기에는 부족하다. 삶과 삶에 대한 가치와 지성과 영성과 감성을 가지고 있어서 모든 분야에 충족이 되어야 한다. 취약한 부분이 감성적인 분야로 보인다. 감성은 저속하게 취급받아야 할 영역이 아니다. 이를 무시할 때 역설적으로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 감정에 의해 행동에 옮기기 때문이다.

 

기분이 나쁘면 올바르고 좋고 귀한 것이라 해도 내팽개쳐버리게 만드는 것이 감정이다. 감정을 건드려 놓고는 소기의 성과를 달성할 수 없다. 그러나 반대로 감정이 좋아지게 만들면 모든 것이 좋아 보이게 한다. 그러므로 감정을 잘 다룰 수 있어야 한다. 그런 면에서 성찰과 인식뿐만 아니라 전인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이에 대한 참고자료로써 설교의 전달력을 높이는 방법을 제시하고자 한다. 이것은 설교의 전달력뿐만 아니라 일상 삶과 교육과 상담 등에 있어서도 적용될 수 있는 원리이다. “첫 번째 뇌를 통과하라.”는 것이다.

 

수년 동안 설교자들이 사실들을 이해하고 설교를 준비하거나 이야기를 조직하고, 무엇을 전할지 계획하는 일에 많은 시간을 보내면서도, 그것을 어떻게 전할지에 대해서는 거의 생각지 않았다. 누군가 당신에게 말하고 가르치는 것을 들을 때마다, 그것이 통과해야만 당신의 마음에 이르는 관문이 있다. 당신의 이성적인 마음의 집을 지키라고 세워 둔 문지기다. 이 문지기는 정보가 지성으로 들어가도록 허락할 것인지 아닌지 전령을 재빨리 평가하는 일을 한다. 이 문지기를 우리는 첫 번째 뇌(the first brain)라 부른다.

 

가장 훌륭한 전령은 어떻게 통제자의 친구가 되는지를 아는 사람인데, 이 문지기는 메시지가 효과적이고 설득력 있게 통과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첫 번째 뇌와 친해지는’ 방법을 알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에 관해서라면, 어떤 사람도 귀에서 사람의 가슴으로 메시지를 취할 수 없다는 점을 알고 있다. 하나님만이 그렇게 하실 수 있다. 그러나 메시지를 청중의 귀에 전달하는 것은 설교자들의 몫이다. 우리가 문지기를 통과하는 것을 배우기 전에는 청중이 우리의 말을 결코 듣지 않을 것이다.

 

사실상 우리는 뇌 속에 또 하나의 뇌를 가지고 있다. 분석적인 사고를 하는 뇌인 대뇌 피질을 우리 뇌의 전부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대뇌 피질인 그 모든 바깥 뇌 안쪽에 자리한 것이 우리가 ‘첫 번째 뇌’라고 부르는 것인데, 이것은 뇌간과 대뇌연계로 구성되어 있다. 더 이상 과학적인 세부사항으로 들어가지는 않겠다. 다만 사고하는 뇌에 의해 정보가 분석되기 전에 우리의 모든 감각정보-특별히 보고 듣는 자극물-가 첫 번 째 뇌에 입력된다는 것만 말해 두자.

 

대부분의 사람들이 말할 때, 자기의 목표인 뇌의 이성적인 부분에 대해서만 생각한다. 성경공부 교사들이 생각하는 바는, 만일 멤버들이 사실들을 뇌에 쌓아 놓으면 그것을 이해할 것이고, 그들의 삶은 변하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설교자들이 가정하는 바는, 만일 청중이 설교를 주의 깊게 잘 듣는다면 그들이 확신을 갖게 되고 헌신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뇌의 이성적인 부분-사실들을 이해하고 데이터를 평가하고 결단하는 인지적인 부분-이 중요하지 않거나 혹은 단순하다는 생각은 잠시라도 하지 말라. 반대로, 이 부분은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가장 놀라운 선물들 중 하나이다. 그러나 뇌의 이성적인 부분에 도달하기 위해 우리의 메시지는 먼저 감정적인 부분인 첫 번째 뇌를 통과해야 할 것이다.

 

효과적인 전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언어는 신뢰의 언어이다. 효과적인 전달을 위해, 우리는 청중과의 정서적인 접근을 해야 한다. ․․․ 아주 솔직하게 말해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가 완전히 이성적이고 신중한 사람이 아니라는 점에 대해서 인정하기를 꺼려한다. 우리는 자신이 절대 감정에 흔들리지 않는다는 착각을 하고 산다. 특히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결정들에는 더욱 그러하다고 착각을 한다. 판매원들이 오랫동안 경험한 바로는, 사람들이 감정에 따라 물건을 사고 그것을 그럴듯한 변명으로 정당화한다고 한다.

 

만일 당신이 한 사람의 지성에 도달하기 원한다면, 우선 그의 가슴과 정서와 첫 번째 뇌를 거쳐야 한다. 당신이 산상수훈에서 가르치고 있는 원칙에 대해 멤버들을 흥분시킬 성경 연구반을 원하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믿음직하고 재미있게 보여야 하고, 정서적으로 연대가 되어야 한다. 만일 우리가 원기왕성하고 열정적이고 믿을 만하다면, 그것들이 이성적인 부분에 연결되기 전에 청중의 첫 번째 뇌에 의해 더 많은 영향력과 에너지가 우리의 말 속에 실제로 주어질 것이다.

 

청중은 복음(the evangel)을 듣기 전에 복음 전도자(the evangelist)에게 정서적인 감응을 받아야 한다. 비록 하나님이 사람의 가슴에 감동을 주기 위해 다양한 수단들을 이용하실 수 있고 또 이용하시지만, 복음을 전하는 사람에게 정서적으로 감응되는 것은 그분이 주로 사용하시는 수단이다. 직관적으로든 아니면 계획적으로든 큰 차이점이 있다면, 위대한 전달자들은 ‘첫 번째 뇌와 친근하게’ 되는 방법을 터득했던 사람이라는 점이다. 그들은 자기 청중 속에 있는 통제자와 친하게 지내는 방법을 터득한 사람이며, 그래서 청중이 그들의 말에 진정으로 집중할 수 있도록 감정을 넘어서는 방법을 알고 있다.

 

 

(2) 이타성: 책임성, 착취(이용)

 

참된 지도자는 그 자신의 안락과 특권보다는 다른 사람의 복지를 우선적으로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자신들의 문제와 어려움과 걱정으로 가득 찬 자기 밑에 있는 자들에게 연민과 관심을 나타내야 한다. 지도자의 또 다른 책임은 징계하는 것이다. 이런 책임은 무거운 짐이며 달갑지도 않은 것이다. 어떤 교회나 종교 단체에서 특별히 믿음과 윤리와 그리스도인의 행위의 건전함에 관해서 거룩한 수준이 유지되려면, 경건하고 충실한 훈련이 필요하다. 교회와 선교의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성취는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어려운 위험에 직면해서도 용감하게 대처한 몇몇 지도자들의 성과였다.

 

(3) 신뢰성: (약속이행, 기만)

 

두 달 전쯤 오랜 만에 교보문고에 갔다. 이런저런 책을 보는 중에 한 권의 책이 눈에 들어왔다. 린 업쇼(Lynn Upshaw)라는 마케팅 컨설턴트가 쓴 『TRUTH』(정직이 전략이다)라는 책이었다. 이 책이 내 눈에 들어온 이유는 나 역시 사람이 살아가는 데 있어 정직한 것만큼 신뢰를 주는 것이 없으며, 결국 그 신뢰가 성공의 비결이 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 책 역시 겉표지 아래에 다음과 같은 글이 기록되어져 있었다. '부정직한 기업은 망하고, 정직한 기업이 성공한다.' 즉 성공하는 기업이 되기 위해서는 정직한 기업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정직이 소비자들에게 신뢰를 주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린은 이 책 안에서 정직한 기업이 되어야 하는 이유들을 설명하고 있다. 그 가운데 3가지만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정직해야 고객이 떠나지 않기 때문이다. 둘째, 정직이야말로 경쟁에서 이길 유일한 무기이기 때문이다. 셋째, 정직은 스스로 홍보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16세기의 소설가이자 시인이었던 세르반테스는 '정직함이 가장 좋은 정책이다'(Honest is the best policy)라는 격언을 말했는지도 모르겠다. 정직... 누구나 정직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안다. 또한 정직하게 살기를 원한다. 하지만 어떤 때에는 정직하고 싶지 않을 유혹이 올 때가 있다.

 

"어떤 임금이 거짓이 없는 신하를 자기 딸 공주와 결혼시키고 싶었다. 그래서 하루는 신하들에게 삶은 씨앗을 나누어주면서 잘 키워 아름다운 꽃을 만들어 오라고 했다. 신하들은 각기 받은 씨앗을 화분에다 심고 꽃이 나오기를 기다렸으나 삶은 씨앗의 싹이 나올리가 없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신하들이 다른 씨앗을 심어 예쁜 꽃이 핀 화분을 들고 왔다. 오직 한 신하만 빈 화분을 가지고 왔다. 임금은 모르는 척하며 그 신하에게 물었다. '어찌하여 빈 화분을 가지고 왔는가?' 그러자 신하가 이렇게 대답했다. '왕께서 주신 씨앗을 화분에 심고 정성을 들여 관리를 했지만 싹이 나지 않아 그냥 빈 화분만을 가지고 왔습니다.' 그러자 임금은 아름다운 꽃이 핀 화분을 가지고 온 신하들을 꾸중하고, 빈 화분을 가지고 온 신하에게는 정직함을 칭찬하며 자기 딸 공주와 결혼을 하게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몇 해 전에 있었던 실화다. 그는 한국에서 교사를 하다가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이민을 가서 마땅하게 할 일이 없어서 세탁소를 운영하게 되었는데, 교사로 근무하던 한국 생활에 비해 세탁소 운영하는 자신의 모습이 너무 한심하기도 하고 자존심도 상했다. 하지만 '이것도 하나님이 내게 주신 축복이라' 여기며 즐거운 마음으로 일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맡겨진 세탁물 안주머니에서 2천 700백 달러의 큰 현금이 나온 것이 아닌가? 그러나 세탁소 주인은 '이것도 하나님이 내게 주시는 시험이라'고 생각하고 따로 잘 보관해 두었다. 그리고 세탁물 주인이 찾으러 왔을 때 '왜 이런 것으로 나를 시험합니까?'라고 농담을 하며 세탁물과 함께 현금을 돌려주었다. 그때, '그렇지 않아도 돈을 어디에 두었는지 찾다 찾다 못찾고 실망하고 있던 참이었는데...,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남기고 세탁물 주인은 세탁물과 현금을 가지고 돌아갔다. 그리고 얼마 후 이 부인이 다시 세탁소에 찾아와 '내가 세탁 공장을 운영하려고 하는 데 운영을 맡아주면 좋겠습니다'라고 제안을 했다. 그 부인은 미국 유수의 항공사 부사장의 부인으로 정직한 세탁소 주인이라면 자신의 작은 세탁 공장을 맡겨도 운영을 잘해 주리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여러가지 조건을 들은 뒤 그 정직한 세탁소 주인은 세탁공장 운영을 맡기로 하고 17명의 직원과 함께 시작해서 700여 명의 직원을 고용한 대형 세탁 공장 사장이 되었다고 한다.

 

아주 일상적인 이야기이다. 하지만 이 이야기들은 보이지 않는 '정직의 힘과 복'을 보여주는 아주 특별한 이야기들이다. 왜냐하면 남을 속일 수 있는 그 유혹을 이긴 아름다운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정직이 가치 있는 이유가 무엇인가? 정직이 신뢰를 갖게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정직이 힘(복)을 갖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속임이 없기 때문이다.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정직하고 선량한 일을 행하라 그리하면 네가 복을 받고 그 땅에 들어가서 여호와께서 모든 대적을 네 앞에서 쫓아내시겠다"(신명기 6장 18절).

 

(4) 모범성: 모델

 

1962년, 마리안느 스퇴거라는 이름의 오스트리아 여인이 교회 신문의 광고를 보게 되었습니다. '한국의 소록도에서 한센병 환자들을 돕는 도우미 구함.' 당시 22세로 간호학교의 졸업반이던 그녀는 이 광고를 본 순간 가슴이 설레었습니다. 마치 하나님이 "네가 가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당장 그때까지 이름도 들어 본 적이 없는 한국, 그것도 버림받은 땅 소록도로 향했습니다. 그곳에는 한센병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 중에는 가족에게조차 외면당하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몇 년 후 마거린 피사레크라는 여인이 같은 광고를 보고 소록도로 찾아왔습니다. 이후 두 사람은 헌신적으로 환자들을 섬겼습니다. 환자들조차 쉬엄쉬엄 하라고 말릴 정도였습니다. 약을 꼼꼼히 발라야 한다며 장갑도 끼지 않고 상처를 만졌다고 합니다. 오후에는 직접 죽을 쑤고 과자를 구워서 마을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렇게 환자들을 돌본 지 40여 년이 흘렀습니다. 20대의 꽃다운 얼굴은 주름살 가득한 할머니로 변했습니다.

 

그들은 남이 모르게 베푸는 것이 참된 섬김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자신을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두 사람에 대한 소문이 세상에 널리 퍼지면서 여러 단체에서 상을 주려고 하거나 언론에서 인터뷰하려고 했습니다. 그때 그녀들은 번번이 거절했습니다. 오스트리아 정부에서도 그녀들에게 '최고의 국민상'을 주겠다고 했지만. 그녀들은 "주님께 받은 사랑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라며 정중히 거절했습니다. 할 수 없이 주한 오스트리아 대사가 섬까지 찾아와서야 비로소 상을 줄 수 있었다고 합니다.

 

두 사람은 소록도 병원에서 마련한 환갑잔치마저 기도하러 가야 한다며 피했습니다. 월 10만원씩 나오는 장기 봉사자 식비도 마다했습니다. 병원에서 "식비를 받지 않으면 봉사자 자격을 잃게 됩니다"라고 하며 간신히 손에 쥐어줄 정도였습니다. 두 여인은 이 돈은 물론, 고국에서 보내오는 생활비까지 환자들의 우유와 간식비, 그리고 성한 몸이 되어 떠나는 사람들의 여비로 나눠 주었습니다.

 

이렇게 사랑으로 봉사하던 두 사람은 2005년, '사랑하는 친구, 은인들에게'라는 편지 한 장만 남기고 고국 오스트리아로 돌아갔습니다. 편지에서 그녀들은 나이가 들어 제대로 일을 할 수 없어 부담을 주기 전에 떠나야 할 때라며 부족한 외국인이 큰 사랑을 받았다고 오히려 감사했습니다. 소록도 사람들은 그들을 하나님이 보내주신 천사들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진정한 제자의 모습을 보여준 것입니다.

 

(5) 도덕성: 윤리, 원칙 중심, 법준수

 

한 나라의 국력은 군사력만으로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 물론 군사력이 기본이고 중요하지만 그 위에 경제력이 뒷받침돼야 하고 또한 애국심과 정신력도 중요하다. 이에 덧붙여 국민의 도덕성도 한 나라의 국력을 결정하는 데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중략)

 

진짜 문제는 이번 사건이 과연 한 사람만의 돌출행동이었겠는가 하는 것이다. 어쩌면 한국 사회에 만연한 타락한 접대문화와 성도덕, 특히 고위 공직자들의 부패한 도덕성의 단면이 아닌가 하는 점이다. 더럽고 추잡한 술 문화와 접대문화와 같은 저질스런 도덕성으로는 결코 선진국이 될 수 없다. 그런 것은 경제발전과 정치 민주화의 모든 성과를 까먹을 수 있으며, 심하면 국가의 존립을 위태롭게 할 수도 있다.

 

따라서 우리나라가 계속 발전하고 선진국이 되기 위해서는 국민의 도덕성 향상이 중요하다. 네덜란드가 작지만 한 때 강대국이 된 것은 국민의 뛰어난 도덕성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국민의 정직과 신실성, 근검절약과 근면성은 경제의 효율을 높이고 우수한 경쟁력을 가지게 했다. 그래서 17세기 중반에는 유럽의 최강자가 돼서 전 세계를 누비게 됐다.

 

그 배후에는 물론 개혁교회가 있었다. 하나님의 말씀이 바로 전파되고 교회가 바로 설 때 나라 전체가 발전하고 온 세계 위에 뛰어난 나라가 됐던 것이다. 매주일 전파되는 하나님의 말씀이 네덜란드 국민의 도덕성 향상과 국가 발전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우리나라가 발전하고 강대국이 되게 위해서도 국민의 도덕성이 향상돼야 한다. 경제 발전과 정치 민주화보다 더 중요한 것은 국민의 도덕성 향상이다. 이를 위해서는 먼저 공직자들의 부정부패와 타락한 행동들에 대해 일벌백계로 다스려야 한다. 대통령이 단호한 의지를 가지고 공직자들을 다잡아야 한다. 고위 공직자들에 대해 금주령을 내리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것이다. 성 접대와 뇌물수수와 같은 범죄에 대해서는 중징계로 처벌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사법부가 바로 서는 것도 또한 중요하다.

 

교회는 교회와 국민의 도덕성 회복을 위해 힘써야 한다. 이를 위해 먼저 목회자들이 근신하고 조심해야 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전하고 가르치도록 힘써야 한다. 말씀을 바로 전해야만 성도들의 믿음이 자라고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되며, 그래야만 하나님의 계명을 지켜 행하게 될 것이다. 또한 교회는 사회의 약자들을 위해 구제를 힘쓰고 사랑을 베풀어야 한다. 이 일에 대형교회들이 앞장서 주면 더욱 좋을 것이다.

 

아울러 우리는 나라와 지도자들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대통령을 비롯한 여야 정치인들과 관리들이 바로 서야 나라가 바로 되고 발전할 것이다. 그래서 우리나라가 하나님의 복을 받아 크게 발전해서 온 세계에 복음을 전하고 사랑을 실천하는 나라가 되도록 힘써 기도해야 할 것이다.

 

(6) 방향성: 비전설정, 목적의식

 

(가) 나이와 관계가 없는 비전

 

“꿈은 이루고 나면 성공했기에 끝나는 것이 아니다. 꿈은 꿈의 목록을 작성하고 하나하나 지속적으로 이루어 가는 것이다. 그래서 꿈은 나이에 관계없이 누구나 꿀 수 있고 이룰 수 있다. 그래서 꿈은 크고 거창해야 되는 것이 아니고 내가 간절히 원하고 하고 싶은 것을 목록에 적고 삶의 목표가 되어 한 발짝씩 한 발짝씩 쉼 없이 내딛고 나가기만 하면 이룰 수 있는 것이다.

 

나는 나이가 지긋하신 어른들을 스승으로 모시고 가르침을 받을 때가 가장 즐겁다. 배우는 기쁨도 크지만 가슴이 뛰는 감동과 함께 젊은 내가 도전을 받고 새로운 꿈을 품고 설레임으로 돌아올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유인즉 여전히 비전을 품고 끊임없이 도전하고 계셨고 풍성한 경험과 노하우를 제자들과 나누시며 사람을 세우시고 세상을 주도적으로 아름답게 변화시키고 계시다는 것이다.

 

이처럼 그리스도인은 할 일이 많기에 나이를 떠나 하나님이 부르실 때까지 끊임없이 꿈을 꾸고 꿈을 이루어 가야만 한다.

 

더 큰 믿음의 사람이 되기 위해서, 더 가진 것을 나누어 주기 위해서, 더 배워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가야 하고 더 복음을 전해야 하고 더 봉사함으로 교회를 화평케 해야 하고, 내가 있는 곳에서 그리스도의 향기가 물씬 발하며 살아야 한다.

 

그래서 그 사람이라면 무엇이든 같이 하고 싶고, 그 사람이라면 될 것이라는 확신에 찬 삶을 살아간다면 우리는 이루어 낸 사람들이다.”

 

(나) 포기하지 않게 하는 비전

 

우리가 맡고 있는 부서의 양들 가운데서 그들을 포기하지 않고 올바르게 이끌어준다면 얼마든지 개천에서 용이 날 수 있다. 부모를 영적 부모로 바꾸어 생각해서 우리도 그런 지도력을 가지고 세워주는 리더가 될 수 있다.

 

“사람들은 이제 개천에서 용이 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후진국 또는 개발도상국가 때에는 모든 사람들이 거의 동일한 선상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자신의 노력여하에 따라 얼마든지 1%로 대변되는 지도자의 반열에 들 수 있지만, 출생과 동시에 자신의 삶의 자리와 시혜적 환경이 결정되어지는 오늘날 개천에서 용이 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이다.

 

굳이 통계를 찾거나 말하지 않아도 우리들은 다 알고 있다. 서울대학에 들어가는 사람들은 대부분 그 부모들이 상류층과 기득권층이라는 것을, 경제계와 정치계 그리고 교육계의 상위 1%는 서울대학을 중심으로 한 SKY출신들이라는 것을. 그래서 이러한 사실들을 아주 예민하게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이제 2류와 3류의 인생에서 1류의 자리로 이동하는 것은 소설과 영화에서나 가능한 하나의 소재일 뿐이지 더 이상 현실에서 이루어지는 사실은 아니라는 것이다.

 

정말 그럴까? 더 이상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일일까? 필자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절대적 수치로, 계량화하거나 통계상으로 볼 때 예전보다는 조금 더 힘들어졌겠지만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나 영역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스포츠계에서 초인적 기록과 스타성을 겸비한 부산 촌놈이며 오릭스의 황태자인 이대호와 신시내티의 파워 트레인인 추신수, 그리고 인천 촌놈으로 다저스의 보배가 된 류현진과 골프계의 전인미답의 영토, 전무후무의 기록이라고 할 수 있는 캘린더 그랜드슬램에 도전하는 ‘기록파괴자’ 박인비, 이들의 공통점은 태생적으로 별로 대단한 조건을 가진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대호는 일찍 부모님을 여의고 재래시장에서 장사하는 할머니 밑에서 자랐다. 추신수는 외삼촌인 야구선수 박정태의 권유와 영향을 받아 야구 선수가 되었다. 둘이 가진 것은 덩치가 급우들에 비해 컸다는 것 빼고는 아무 것도 없었다. 류현진은 인천이 고향이다. 아버지에 대한 자료는 주먹대장이었다는 구설에 오르내릴 정도의 정보밖에 없는 보통사람이다. 프로에 지명될 당시 SK와 롯데와 지명권을 포기하자 어쩔 수 없이 한화에 입단했을 정도의 보통선수였다. 박인비도 크게 주목받는 선수도 아니었다. LPGA에서 슬럼프를 겪었고 돌파구를 찾기 위해 JLPGA로 무대를 바꾸었다. 그리고 다시 미국으로 돌아갔다. 도와주는 스폰서도, 찾는 광고주도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 누구도 쉽게 범접할 수 없는 경지와 스타성을 가졌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개천이 어떤 개천인가에 따라 오늘날도 용이 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아이들이 충분히 뛰어 놀 수 있는 좋은 개천이 있으면 가능하다. 그것을 만들어 주는 자는 다른 사람이 아니라 부족하지만 묵묵히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기성세대 즉 부모들이다. 부모가 꿈과 비전을 포기하지 않으면 그 개천에서 자란 자녀들은 충분히 용이 될 수 있다. 모두를 행복하게 하는 리더가 될 수 있다. 개천에서 용 난다. 개천에서 난 용이 지금도 있다.”

 

(다) 방향성: 목적의식

 

 

교회의 건강을 회복하고 모든 성도들을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성장시키기 위해서는 수많은 난제와 영적 전투를 벌여야 한다. 이 영적 전투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주님이 가르쳐주신 목회 본질과 흔들리지 않는 목회 철학이 있어야 한다. 시류에 휩쓸려 유행을 좇기보다는 다소 느리더라도 본질을 붙들고 나아간다면 선한 결과를 낳을 수 있을 것이다.

 

평신도를 보는 관점이 왜곡되다 보니, 목회자들의 리더십도 왜곡되었다. 한국 교회의 리더십은 닫힌 리더십이다(closed-leadership). ‘나는 교인들을 위해(for the laity) 무엇을 할 것인가?’를 생각하는 것이 바로 닫힌 리더십이다. 늘 자기 혼자 일할 생각만 한다. 평신도가 목회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열린 리더십(opened-leadership)이 필요하다. ‘교인들과 함께(with the laity) 무엇을 할 것인가?’를 생각해야 한다. 결국 일할 사람은 평신도이기 때문이다. 교회 안에서나 밖에서나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성취하기 위해서 전선에서 뛰어야 할 사람은 평신도이다. 이때 평신도는 사역의 동역자가 된다. 함께 뛰는 것이다. 이것을 위해 고민하며 몸부림치는 리더십이 열린 리더십이다. 열린 리더십을 가진 목회자는 평신도를 가만히 내버려두지 못한다. 예배나 보고 가는 군중으로 만들지 않는다. 헌금이나 많이 하는 후원자로 만들지 않는다. 평신도들을 반드시 있어야 할 자리에 세우고, 그 자리에 세우기 위해서 훈련한다.

 

(라) 방향성: 비전설정

 

우리는 비전을 어떻게 설정하고 있는가? 옥한흠 목사는 색다른 비전을 설정하고 매진해왔다. 그의 말을 들어보자. 요즘 목회자들은 물량주의에 빠져서 '한 사람 비전'을 잃었다. 약해 보이는 여 성도 한 명을 놓고도 하나님이 저를 붙드시면 엄청난 역사가 일어날 것이라고 믿고 기도하는 비전이 없다. 세상적인 기준으로 사람을 보는 것이다. 돈으로, 학력으로 사람을 판단한다. 이러다보니 성령의 역사는 고사하고 교회 안에 고통스러운 분란과 시기만 가득해지는 것이다. 이렇게 수백 번, 수천 번을 속으면서도 우리는 패러다임을 바꾸지 않았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사람을 보는 패러다임, 이것이 제자훈련의 핵심이다. 하나님의 패러다임은 가장 작은 자에게 주목하는 것이다. 한 사람에게 주목하는 것이다.

 

말은 간단하지만 이것을 목회 현장에 적용하는 것은 정말 쉽지 않은 일이다. 하나님의 나의 목회에 은혜를 주셨다면, 그것은 아마 나의 고집스러움 때문이었을 것이다. 교인이 수천 명, 수만 명이 되고 백 명이 넘는 교역자들 사이에서 헤매야 하는 이 시점에서도 나는 다수를 보지 않고 한 사람을 보는 자세를 견지해 왔다. 그렇기 때문에 제자훈련이 아직도 살아서 이를 통해 하나님이 엄청난 역사를 이루고 계신 것이리라 믿는다. 제자훈련에는 교회가 크던 작던 상관없다. 오직 한 사람이다.

 

나는 교회를 개척했을 때, 9명과 함께 시작했다. 돈이 없으니, 40평짜리 상가를 겨우 얻어 시작하게 되었다. 그 당시만 해도 강남이 허허벌판이라 목회하기에 좋은 장소가 아니었다. 게다가 우리가 개척한 교회가 들어가게 된 자리는 서울대학교 출신의 패기만만한 젊은 목사가 큰 교회의 지원을 받아 교회를 시작했다가 한 달 만에 손들고 다른 곳으로 떠난 곳이었다. 그에게 왜 벌써 떠나느냐고 물었다. “목사님, 여기는 목회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닙니다. 아파트촌과도 너무 거리가 멀고, 버스는 30분에 한 대 다닙니다.” 그러나 그의 말은 내게 들어오지 않았다. 나는 한 사람만 있으면 생명을 걸겠다는 데 생각이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소중히 여기시는 영혼 하나를 놓고 꿈꿀 수만 있다면, 환경과 무관하게 나는 목회자로서 떳떳하게 일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때의 정신을 지금까지 지켜 오고 있다.

 

내가 개척하면서 마음먹었던 것은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교회, 바로 그 교회를 만들자는 것이었다. 어려서 나에게 상처를 주었던 그런 교회가 아니라. 우리 교회에 발을 들여 놓는 사람이라면 이 교회 때문에 내가 행복했다고, 바로 살게 되었다고 고백할 수 있는 그런 교회를 만들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한 사람을 위해 피눈물을 쏟는 희생의 열매로 사역해야지, 세상의 기준으로 사람을 판단하면 안 되겠다고 결심했다. 이것을 실천하기 위해 내가 가장 먼저 행동으로 옮겼던 것은 우리 교회에 장로라는 직함을 가지고 들어오는 사람에게 주목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많은 가족들을 거느리고 들어와도 그 집을 심방하지 않았다. 나는 나와 함께 소그룹에서 제자훈련 받으며 눈물을 쏟고 거듭나는 변화를 체험하여 어린아이와 같은 심정으로 주를 섬기기 원하는 사람에게만 주목했고, 그들을 동역자로 삼았다.

 

개척 1년 후, 나는 정말 형편없는 남자들 11명을 모았다. 그들은 이제 막 예수 믿기 시작한 초신자, 교회를 다니다 완전히 떠났던 사람, 1년에 한 번 교회 가 주면 하나님이 고마워할 거라 생각하는 사람, 반기독교적인 도서를 섭렵한 사람, 요한계시록 1장부터 22장까지 모두 외운 사람 등 교회에서 결코 주목하거나 환영하지 않을만한 사람들이었다. 나는 이들과 함께 제자훈련을 시작했다. 진통도 많고 기쁨도 많은 1년 반이었다. 그리고 정말 많은 은혜를 체험했다. 1년 반이 지나, 제자반을 수료한 이 11명에게 다락방(소그룹) 개척을 시켰다. 부인만 교회에 나오고 아직 안 믿는 남편들의 명단을 뽑아서 이들에게 주었다. 제자훈련의 열매를 평가한 것이다. 나는 2년 동안 이들의 개척을 지켜보았고, 우리는 하나님이 다락방을 통해 역사하시는 놀라운 일들을 부지기수로 목도하게 되었다. 이것이 사랑의 교회의 시작이었으며, 개척 4년 반 만에 이때 제자훈련 받았던 사람들 중 9명을 세워 장로로 장립했다.

 

5. 영적 지도자의 사역의 원동력(20-21절)

 

(1) 하나님의 말씀

 

(가) 하나님의 법

 

“영국이 진정으로 위대한 나라가 되려면 하나님의 법을 따라야 한다. 영국이 황금에 눈이 어두워 노예제도를 고집하면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나) 말씀의 확신에서 나오는 지도력

 

지도력은 하나님의 말씀의 확신에서 나온다. 성경의 권위를 인정할 때 그 성경으로부터 올바른 메시지가 선포되어진다. 성경 해석은 신학자와 목회자의 도움이 필요한 영역이다. 그러므로 이들의 성경에 대한 확신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렇게 할 때 왜곡된 과신을 방지하면서 올바르게 가르치고 전할 수 있을 것이다.

 

“성경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존재하는 것 역시 사실이다. 어떤 본문은 그 의미가 너무 어려워서 제대로 해석하기가 심히 어렵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 역시 너무 과장해서는 안 된다. 성경의 모든 부분이 다 어려운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어려운 본문은 명백하고 쉬운 본문을 통해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많은 노력이 필요하기 때문에 신자들은 성경을 가르치는 교회의 목사나 신학자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문제는 이런 해석적 노력을 통해서 획득된 교회의 가르침이 맞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이다. 여기에서 로마 카톨릭은 교회 자체가 최종적 판단의 기준이라고 주장한다. 반면에 우리는 교회의 가르침이 성경에 비추어 판단 받아야 하며, 따라서 성경이 최고의 권위라고 생각한다.

 

앞에서 말했듯이 ‘오직 성경’은 권위와 관련된 문제라는 것을 지적하였다. 이것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면 ‘오직 성경’을 완전히 잘못 이해하게 된다. 대표적인 예로 어떤 목사들은 “나는 설교 준비할 때 주석은 전혀 읽지 않는다”라고 자랑 삼아서 이야기한다. 성도들이 열심히 신앙서적을 읽으면 “그런 책 볼 시간이 있으면, 성경이라도 한 자 더 읽으세요”라고 말한다. 이런 태도가 ‘오직 성경’에 충실한 신앙생활이라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하지만 오직 성경은 성경만 있으면 되고 다른 책은 별 필요가 없다는 사상이 전혀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열심히 다른 책들을 읽어야 한다. 그리고 그런 책에 나와 있는 내용들이 성경에 나타나 있는 교리들과 일치하고 있는지 여부를 부지런히 살펴야 한다.

 

오직 성경은 특별히 신앙고백서의 관점에서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오직 성경’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결과 교회 안에서 교리 교육이 현저하게 약화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오직 성경’은 신자들에게 성경만 열심히 가르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성경은 내용이 방대하기 때문에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성도들에게 세세한 것을 다 가르치는 것은 불가능하다. 가르친다고 하더라도 체계적으로 정리가 되어 있지 않으면 오히려 혼란만 줄 수도 있다. 이런 문제를 정확하게 파악하였기 때문에, 종교개혁자들은 성경을 깊이 연구하여 가장 분명하고 본질적인 신앙의 교훈들은 신앙고백서에 담아서 체계적으로 정리하였다.

 

비록 이 고백서가 성경과 같이 무오한 절대적 기준은 아니지만 그 내용은 성경의 내용과 본질적으로 같기 때문에 교회 안에서 대단히 존중을 받아야 한다. 오히려 신앙고백서나 교리문답의 안내를 받아 성경을 읽을 필요가 있다. 교리는 성경의 권위를 깎아 내리지 않고 오히려 드높인다. 교리문답이나 신앙고백서의 안내를 통해서 신자들은 보다 쉽게 성경의 핵심적 가르침에 도달 할 수 있다.”

 

 

“교회의 타락은 본질적으로 순수한 말씀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말씀에서 벗어나는 이유는 말씀이 아닌 인간의 전통들이 조금씩 교회 안에 들어오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와 같은 전통들이 들어오는 이유는 교회 지도자들이나 신자들이 그것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종교개혁 이후 로마 카톨릭교회가 참된 교회에서 떠났기 때문에 우리는 카톨릭교회를 너무 적대시할 필요는 없다. 우리가 경계해야 할 실제 대상은 우리 안에 있는 카톨릭적 요소들이다. 그것은 바로 성경을 최고의 권위로 인정하지 않거나 신앙고백을 소홀히 하는 것이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외치면서, 실제적으로는 방언이나 예언이나 치유나 이적들을 성경과 같은 권위에 두는 사고방식은 원리에 있어서 로마 카톨릭적 사고방식과 다를 바가 하나도 없다. 이 점에 있어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1장 1항 마지막 문장을 우리는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자신의 뜻을 계시하셨던 이전 방식들은 이제 중단되었다.’”

 

(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세워지는 리더

 

“그때는 신약성경이 없었지만 우리에게는 있다. 그리고 하나님은 지금도 성경을 통해 말씀하신다. 모든 그리스도인 리더는 세상의 어떤 리더보다 훨씬 가진 것이 많다. 하나님의 진리가 있고, 우리의 교사이신 성령이 계시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리더는 성경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 말씀이 진리임을 믿고, 그 확신에 흔들림이 없어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 말씀의 진리를 자신 있게 당당히 전달할 수 있어야 한다.”

 

“사람들은 믿을 수 있는 권위를 찾고 있다.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진리를 권위 있게 전하는 사람을 따른다. 사실을 두고 변죽만 울리거나 어려운 이슈라고 피하거나 명확한 사안을 애매하게 얼버무릴 필요가 없다. 진리를 알거든 권위 있게 말하라! 참된 리더십은 그렇게 한다.”

 

“영적 리더의 경우, 절대적인 기준들은 하나님 말씀으로 세워진다. 다른 모든 리더십 원리들을 적용하는 리더는 아마 상당 수준의 실제적 성과를 이룰 수 있다. 그러나 리더로서 당신의 진짜 자질을 시험해줄 원리는 이것이다. 성경의 본질적 진리를 깨닫고 그 절대 권위에 타협을 거부하지 않는 한 누구도 참으로 훌륭한 영적 지도자가 될 수 없다. 확신컨대 이 원리는 목사들과 교회 지도자들뿐만 아니라, 좋은 리더가 되기 원하는 각계각층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적용된다.”

 

(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훈련받은 제자들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한 사람씩 빠지더니, 딱 한 사람 남았다. 내 아내였다. 장년을 대상으로 한 첫 번째 제자훈련을 실패한 것이다. 그러나 나는 제자훈련을 포기하지 않고, 교회가 성장하면서 교인이 백 여 명쯤 모이자 여섯 개 정도의 소그룹이 만들어졌다. 나는 제자훈련 하느라 일주일 내내 정신이 없었다. 서초구에 들어선 다른 교회들에는 벌써 몇 백 명씩 모인다는데, 계속 이런 식으로 목회할 거냐고 묻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나는 그 길만 갔다. 성경이 진리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성도를 온전케 하는 데 투자하면, 그 후에 열매가 맺힐 것이라고 성경이 말씀하는 대로 믿었다. 그대로라면 그 교회는 목사 혼자 뛰는 교회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닮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함께 뛰는 공동체가 되는 것이었다. 지금 몇 명이 모이든 5년 후면 나와 함께 뛸 평신도가 족히 30-50명은 될 것이라 확신했다. 교인 단 백 명이 모여도 50명의 목사가 뛰는 교회와 수백 명이 모여도 한 명의 목사가 뛰는 교회는 비교 대상이 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당장은 좀 느리고, 열매가 안 보여도 결국은 이기는 것이 제자훈련이다.

 

(2) 성령 안에서의 기도

 

(가) 하나님께서 들으시는 기도

 

도슨 트로트맨은 샌디에이고의 산에 올라 미국 50개 주의 지도를 펴놓고 매일 한 주씩 짚어 가며 기도했다. “하나님, 이 주(州)에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벌떼와 같이 일어나게 하옵소서! 그 일을 위하여 종이 쓰임받기 원합니다.” 그는 50개 주의 기도가 끝나자 세계 지도를 펴놓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각 나라마다 매일매일 손을 짚어 가며 기도했다. “하나님, 이 나라에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벌떼와 같이 일어나게 하옵소서! 그 일을 위하여 종이 쓰임받기 원합니다.” 누가 봤으면 미쳤다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하나님이 그의 기도를 들으셨다는 것이다. 네비게이토가 지금 127개국에서 엄청난 사역들을 일으키고 있질 않은가. 선교단체라고는 아무 관심도 없었던 나 같은 사람조차 영향을 받았으니 말이다.

 

한 사람이 말씀에 눈을 뜨고, 성령이 주시는 음성을 들으니 세상이 바뀌었다. 제자로 세워 사역을 시키라는 것이 주님의 방법이요, 주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전략이다. 이 전략을 채택한 것이 파라처치 운동이 승리한 비결이었다. 반면에 에큐메니컬 운동의 패인은 사람을 만들기 전에 참여부터 시킨 것이었다. 감투부터 씌워 준 것이다. 중생을 받은 사람인지, 부르심을 받은 사람인지 검증되지 않은 사람들이 교회 안에서 일하기 시작하니, 시간이 지난 후 결과는 뻔했다. 근본적으로 변화되지 않은 사람은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본색이 드러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아무런 방비 없이 세상에 들어갔을 때, 별 수 없이 동화되고 마는 것이었다.

 

 

(나) 링컨대통령의 기도

 

내 지혜, 내 능력, 내 노력만 가지고는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위해 기도한다. - A. 링컨

 

링컨은 ‘성경의 사람’이었을 뿐만 아니라 ‘기도의 사람’이었다. 어려서부터 어머니의 기도 소리에 친근해 있었던 링컨은 대통령이 되어서도 기도하는 일을 매우 소종하게 생각했다.

 

링컨이 대통령에 당선된 후 워싱턴을 향하여 떠나던 날 아침, 그를 사랑하는 많은 시민들이 기차역으로 마중 나와 그를 환호했다. 링컨은 비가 내리는 이른 아침에 마중 나와 준 고향 사람들의 따뜻한 사랑에 눈시울을 적시며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스프링필드에서 여러분 덕분에 많은 것을 얻었습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도우심 없이는 결코 성공할 수 없습니다. 저는 이 자리를 떠나면서 여러분이 저를 위해 기도해 주실 것을 부탁드립니다. 지금 저는 일찍이 워싱턴 대통령의 어깨 위에 놓였던 짐보다 더 무거운 짐을 지는 마음으로 이곳을 떠납니다. 하나님께서 도와주시면 저는 어떠한 어려움도 이겨낼 수 있다고 믿습니다. 저를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남북 전쟁이 치열하게 계속되던 날, 유명한 인기 배우 제임스 머독이 링컨의 초청으로 백악관에 머물게 되었다.

 

그는 링컨과 저녁 식사를 하고, 전쟁에 대한 여러 이야기들을 들으며 시간을 보내다가 밤이 늦어서야 잠자리에 들게 되었다. 그날 밤 머독은 백악관으로부터 멀지 않은 곳에서 들려오는 포성 소리에 잠을 설쳤다. 그리고 이른 새벽에는 어디선가 들려오는 흐느끼는 신음 소리 때문에 더 이상 누워 있을 수가 없었다.

 

머독은 잠자리에 일어나 들려오는 소리를 따라가 보았다. 그의 발이 머문 곳은 복도 깊숙이 안쪽에 위치한 대통령 집무실이었고, 신음하듯 부르짖는 소리는 바로 링컨의 기도 소리였다.

 

“사랑의 하나님! 저는 부족한 종입니다. 제 힘으로는 할 수 없습니다. 새 힘을 공급해 주시고, 용기를 잃지 않게 도와주시고, 마지막 순간까지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도록 저를 지켜주옵소서. 이 민족을 긍휼히 여겨 주시고 하루 빨리 전쟁이 마무리되어 통일된 나라를 이룰 수 있도록 도와주옵소서. 전쟁에서 죽어가는 젊은이들을 보호하여 주시옵소서!‧‧‧‧‧‧‧”

 

머독은 끝없이 계속되는 링컨의 기도 소리를 듣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겸손히 무릎 꿇고 기도하는 링컨의 모습을 본 그는 링컨을 더욱 존경하게 되었고, 그를 돕는 일에 기꺼이 앞장섰다.

 

링컨은 막사에 머무는 동안에도 홀로 조용히 기도하는 일을 쉬지 않았다. 그가 기도하는 시간이면 천막 막사 입구에는 ‘하얀 손수건’이 내걸렸다. 그러면 비서는 그의 기도가 끝날 때까지 면회를 금지시켰고, 그의 기도가 방해받지 않도록 했다.

 

마침내 링컨은 그의 담대한 기도대로 미합중국의 통일과 노예 해방이라는 열매를 거두게 되었다. 그것은 세상 사람들이 모두 놀랄 만한 위대한 것이었다. 링컨이 이룬 모든 위대한 일들은 겸손한 기도의 무릎에서 출발한 것이었다.

 

(다) 정필도 목사의 기도

 

우리 교회에 그냥 두면 교회의 부흥을 가로막을 것 같은 집사 때문에 힘들었을 때다. 이번에도 하나님 앞에 담판 짓기 위해 특별 기도를 드렸다. 아무도 없는 예배당 안에서 하나님 앞에 부르짖기를 “아버지 하나님! 그 인간을 내쫓아 주시든지 저를 다른 곳으로 보내주시든지 둘 중 하나를 택하십시오. 오늘 밤에 그 인간을 거둬 가시든지 아니면 저를 거둬 가시든지 둘 중에 하나를 택하십시오!”라고 했다. 참으로 무서운 기도였다.

밤새도록 부르짖었다. 그런데 새벽녘에 갑자기 “네가 문제다!”라는 주님의 음성이 크게 들려왔다. “네가 문제다!” 아니 나는 그 인간이 문제라고 생각했는데, 주님은 내가 문제라고 하시니 할 말이 없었다. 그래서 어린아이처럼 울면서 기도했다. “아버지, 용서해 주세요. 저는 제 문제도 모르는 문제 많은 목사입니다. 저를 용서해주세요!”

 

이때 주님은 인자하신 음성으로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너를 붙잡고 일하고 있지 그 집사를 붙잡고 일하는 것이 아니란다. 그 집사는 너에게 맡긴 양일뿐이란다. 부흥이 되고 안 되는 것은 너에게 달렸다. 왜냐하면 나는 너를 붙잡고 일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 음성을 듣는 즉시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다시는 양들을 원망하지 않겠습니다. 교회의 모든 문제는 제 문제인 줄 알겠습니다.”라고 기도드렸다. 그 후부터는 성도들을 원망하지 않았다. 또 성도들을 책망하는 설교를 하지 않았다. 문제 있는 성도를 향해 책망해 봤자 그들은 듣지도 않는다. 엉뚱하게 착한 성도들이 듣고 상처만 받게 된다. 그러므로 이것은 교회 부흥에 유익이 되지 않는 것이다.

 

목회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사람이다. 그러기에 자신을 온전히 비워 양 무리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 채워야 말씀을 제대로 대언할 수 있다. 나는 이 사실을 깨달은 후, 설교의 패러다임 자체를 바꾸게 되었다. 다시는 “누구 들으라.”는 식으로 말씀을 준비하거나 전하지 않았다. 설교를 준비할 때 굳이 교인들 중에 누구를 떠올려야 한다면 목회자인 내가 가장 사랑하는 교인, 가장 사랑스러운 교인을 떠올렸다. 그 교인에게 가장 좋은 꼴을 주고 싶은 마음으로 말씀을 준비했다.

 

그러자 말씀을 받는 모든 교인들의 얼굴에 화색이 감돌았다. 많은 교인들이 “말씀이 자신을 어루만지는 것 같다.”고 고백해 왔다. 목사인 내가 자신들을 너무도 사랑하는 것 같다고, 그 마음이 전해져 오는 것 같다고 말해왔다. 그때 나는 알았다. 목회자가 자신을 비우고 하나님의 온전하신 감동으로 말씀을 전하면 성령께서 각 개인에게 가장 적합한 방식으로 역사하신다는 것을. 회개할 자 회개하게 하고, 치유 받을 자 치유 받게 하며, 위로 받을 자 위로 받게 하신다는 것을. 말씀 선포의 사역이야말로 온전히 나를 성령의 도구로 내어 드려야 하는 사역이다. 내가 아니라 성령이 주인이 되어야 하는 사역이다.

 

설교자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말씀을 전할 때의 마음 밭이다. “설교를 얼마나 잘하느냐?” 보다는 “어떤 마음 상태로 설교를 전하느냐?”가 은혜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인 것이다. 주님은 이 사실을 가르쳐 주시고 싶어서 “네가 문제다!”라고 말씀하셨던 것 같다. 내 감정으로 설교하고 내 기분으로 설교하는 그 안타까운 강단의 현실을 더 이상 두고 보실 수가 없으셔서, 수영로교회 강단을 은혜의 말씀으로 흘러넘치게 하고 싶어서 나를 책망하셨던 것 같다.

 

(3) 예수 그리스도의 보상

 

하나님 나라의 환영식을 기대하며 - 퇴임하는 목사의 변 -

 

밖으로 한 발짝이라도 나가면 넥타이를 매야 하고, 시간에 얽매여 지긋하게 눌러 있지를 못하고, 어디 갔다 늦게 돌아와도 다음날 새벽을 준비해야 되고, 꼬박꼬박 다가오는 주일 설교를 준비하느라 진땀이 흐르도록 고민해야만 하고, 교인이 긴급하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황급히 찾아가야 하고, 성도들의 슬픈 일, 사업 실패, 시험에 떨어져도 다 나의 슬픔, 나의 아픔이요 걱정이 아니던가!

 

선배들은 은퇴하면 이 모든 멍에에서 벗어나게 되니 즐겁다고 하나 남이 모르는 섭섭함이 어디 한 두가지 뿐이겠는가. 이 모든 것을 체념한 체 무질서하게 살다보면 일 년을 넘기기가 무섭게 무력증에 빠진다는 것이다. 일꾼이 땀을 딱으며 휴식하는 것과, 일이 없어서 어쩔 수 없어 노는 것과는 천양지차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톼임에서 은퇴로 서서히 빠져 들어가게 되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래도 우리에겐 남다른 바람과 꿈이 있고 소망이 있다.

 

 

19세기에 아프리카 선교사로 일평생을 보맨 한 노부부가 퇴임하고 뉴욕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의 선교사역에 잊을 수 없는 수많은 애환들이 있었을 것이다. 선교지가 멀어지면서 주마등처럼 그의 뇌리를 스쳐지나는 동안 어느 듯 뉴욕 항이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런데 항구에 수많은 인파가 몰려 있고, 군악대의 환영곡이 장엄하게 연주되고 있었다. 선교사 노부부는 자신들을 환영해 주는 것으로 착각하고 가슴이 벅차오르면서 감사가 차고 넘쳤는데 알고 보니 유명한 비행사 찰스 오거스터스 린드버그를 환영하는 인파였다.

 

그는 미국 센디에이고에서 제작된 단발비행기 '스피리트 오브 세인트 루이스'(Sprit of St. Louis)호를 타고 1927년 미국 뉴욕에서 이륙해 프랑스 파리까지 33시간 30분 만에 대서양을 무착륙 단독 비행에 성공한 최초의 비행가이다. 성공적으로 비행을 마친 그가 선교사가 탄 배에 함께 타고 귀국하게 된 것이다.

 

한평생을 오직 복음 전파를 위해 아프리카 오지에서 보내고 심신이 피곤에 지쳐 돌아 온 그 선교사 부부를 환영해 주는 이는 한 사람도 없었다. 그곳에 나온 사람들은 모두 다 린드버그의 이름을 부르며 열광적인 환영의 축제를 벌이고 있었다. 선교사 노부부는 당장 오갈 데가 없어 삼류 호텔에 들어갔다. 방에 들어서자마자 통곡하며 하나님께 울부짖었다.

 

"오! 하나님, 우리는 아프리카 오지에 가서 당신의 복음 증거를 위해 일평생을 드리고 돌아왔지만 환영 나온 사람이라곤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겨우 대서양을 횡단한 린드버그를 위해서는 전 뉴욕시민이 환영을 하고 있으니 어찌 이럴 수가 있습니까?"하며 하나님께 투정을 부리며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그러자 노부부의 귓전에 뚜렷한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다. "얘들아, 린드버그는 고향에 돌아왔지만 너희는 아직 고향에 돌아오지 않았잖니? 너희들이 고향에 돌아올 때는 린드버그가 환영받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환영이 준비돼 있단다. 천군천사가 나팔을 불고, 먼저 천국에 와 있는 성도들이 모두 마중을 나갈 것이며, 내가 직접 너희들의 손을 잡고 인도할 것이란다. 그때까지 참아라"는 음성이었다.

 

인생 모두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고향을 찾아 떠나가는 나그네들이다. 성경은 믿는 자의 본향은 천국임을 분명히 일깨워 주고 있다. 나그네 여정에 누구 없이 다 각기 이행해야 할 사명이 있고, 그 사명수행에 대한 결산이 있을 것이다. 지혜로운 사명자는 나그네 같은 이 세상의 부귀, 영화, 명예에 집착해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명에 붙들려 열심히 사역하다 왕의 심판대에 서야 할 것이다.

 

퇴임은 그 임무를 다 마치고 심판대가 아닌 시상대를 기다리며 잠깐 동안의 휴식에 들어간 것이리라. 이제 우리 모두는 설레는 가슴으로 우리를 영접할 하늘 본향의 환영식을 기다릴 뿐이다.

 

6. 영적 지도자가 가져야 할 확신(24절-25절)

 

(1) 궁극적 구원의 확신(최후 승리의 확신)

 

교회가 복음 전파를 위하여 씨를 뿌리는 일꾼을 내보낼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에 수확을 보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어떤 때는 순교자로 죽을 것입니다. 그러나 순교자들의 피는 교회의 씨가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의 뜻은 이렇게도 들립니다. "너희가 씨를 뿌리고 수고하고도 아무런 수확을 거두지 못할 때가 있을 것이다. 거두지 못하고 너희 시대가 지나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결코 두려워하지 말라. 염려하지 말라. 낙심하지 말라. 씨를 뿌리는 것이 헛된 것이 아니며 씨가 쓸모 없게 되는 것이 아니다. 너희가 만일 못 거두면 다른 사람이 반드시 거두게 될 것이다."

 

역사를 통해 보면 사람들이 이상할 정도로 하나님께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마음의 문을 열고 있는 때가 있습니다. 이런 때가 말하자면 주님이 뿌려 놓은 씨, 우리 믿음의 선배들이 뿌려놓은 씨가 자라 추수하게 된 때입니다. 그런데 이때에 교회가 거두어들이는 일에 실패한다면 이 얼마나 큰 비극입니까?

 

그리고 예수님의 이 말씀은 하나의 도전이기도 합니다. 뿌려진 씨를 거두어야겠는데 일꾼이 보이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일할 일꾼을 찾고 계십니다. 누가 대답하겠습니까? 그리스도의 말씀과 그 위대한 역사는 결코 망하지 아니합니다. 비록 우리가 우리의 노력의 결과를 보지 못한다 하더라도 다른 사람들이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삶에는 절망이란 결코 없습니다.

 

(2) 궁극적 성화의 확신(구성원들과 공동체의 변화의 확신)

 

건강한교회연구소(대표 김종윤 목사)와 충주양문교회(담임목사 방영남)는 지난 3월 19일 충주양문교회당에서 '교회 공동체를 세우는 영성'이란 주제로 2012 양문 전국 목회자 세미나를 개최했다. 이에 이 세미나에서 발표된 박영돈 교수(고려신학대학원)의 강의 내용을 요약 정리하였다.

 

"현대 사회에서 필요한 것은 성령 충만한 공동체로서의 교회 회복입니다. 현대인들은 기계 문명이 발달할수록 영적으로 피폐해지는데 반대급부로 사람들은 영성을 추구하게 됩니다. 이에 대한 어떤 학자는 영성의 필요를 채워주는 교회가 부흥하고 성장한다고 합니다."

 

박 교수에 따르면 바울 사도가 그려주고 있는 교회의 청사진은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했던 구약의 성전처럼 새로운 성전인 교회가 하나님의 영으로 가득해서 그 성령의 생명수가 세상으로 계속 흘러감으로 세상을 적시고 만물을 새롭게 해서 만물 안에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하게 하는 것이다. "성령 충만은 교회 공동체와 신자 개인 안에 성령의 임재와 은혜가 가득해서 성령에 의해 주관되고 인도함을 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박 교수에 따르면 하나님이 신자들 안에 거하기 위해 그의 아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희생시킨 것이다. 신자들은 성령 안에 있다. 성령은 신자들을 기다리고 있다. 단지 영적으로 둔해서 감지하지 못할 뿐이다. 어떤 목사는 현대 교회에 어느 날 성령이 아주 떠나버려도 신자들은 그 차이를 느끼지 못하고 지금까지 생활해오던 대로 종교적인 쇼(show)가 진행될 것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교회를 성령 충만한 공동체로 만들기 위해서는 강단에서 성령 충만이 흘러넘쳐야 한다. 성령 충만한 사역자가 되면 교회는 성령 충만한 공동체가 될 수 있다.

 

박 교수는 "목회자들이 주님의 뜻을 좇아 살기보다 나의 욕심을 좇고, 성령 노릇, 왕 노릇하면서 종교적인 야심을 성취하기 위해 성령을 도구화하거나 이용하려고 한다"고 지적하고, "하나님의 열심이 그토록 이루길 원하는 성령의 임재를 거스르지 말자"고 당부하면서 "교회 안에서 충만히 임한 성령의 은혜들이 세상으로 흘러가게 해야 한다"고 힘주어 말한다. 교인들이 주일에 성령 충만해서 가정, 사회, 직장으로 나가 이동 성전의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는 것. 교인들의 에너지를 건물을 짓는데 소진해버리기보다는 성령이 역사하고 임재하는 성령 충만한 무형적인 성전을 짓는 데로 이끌어야 한다.

 

그에 따르면 성령은 말씀의 영, 진리의 영이다. 말씀을 통해서 자신을 드러낸다. 성령이 충만한 증거는 교회 안에 말씀이 풍성이 거하는 것이다. 성령 충만은 곧 말씀 충만이다. 신자들은 말씀을 들어도 눈 하나 깜짝 안 한다. 당장에 기적, 표적을 보면 그 앞에서 고꾸라진다. 그래서 목회자들은 유혹을 느끼며, 말씀 사역으로 변화되지 않는 것을 보면서 영적으로 탈진한다. 이 때문에 복음, 정도를 떠나서 편법을 동원하려는 유혹에 빠지기 쉽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갑니다. 말씀이 하나님 나라의 씨앗입니다. 말씀과 성령의 역사를 통해 공동체와 교인들의 심령 안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됩니다. 말씀으로 성령이 거듭나게 하십니다." 박 교수는 말씀 사역에 있어서 변화, 열매가 나타나지 않아서 지치게 할 수 있는데, 하나님의 말씀은 헛되지 않기에 씨를 뿌리고 기다리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말하였다.

 

박 교수는 "우리 목회의 궁극적인 목표는 교인들을 아름답게 만드는 것이다. 성령 충만하면 아름다운 사람이 되는 것"이라며 "목회자가 먼저 아름다운 사람이 돼야 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복음의 증인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능력을 받아야 하며, 성령으로 충만해야 한다"고 제기한다. 한국 교회가 침체하고 목회 현장이 척박해도 성령의 능력을 받으면 다시 살아난다. 영적으로 어두운 시기가 하나님의 놀라운 부흥의 시기다.

 

그는 "말씀을 통해서 성령의 역사, 능력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기도가 필요하다"고 전제하고, "기도와 말씀을 전하는 것에 전념해야 한다. 기도가 없으면 말씀 사역에 힘이 없다. 기도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말씀 사역에 성령이 함께 하지 않는다"며 "교인들에게도 기도와 말씀 사역을 위해서 부탁해야 한다"고 주문한다.

 

또 "교회의 공동체적 토양은 교제와 섬김이다. 성령 충만한 공동체가 되기 위해서는 친밀한 교제가 이뤄져야 한다"며 "평신도들이 성숙해서 서로를 섬기는 사역자 역할, 성령이 흘러가는 통로 역할, 모든 지체가 은혜의 통로 역할을 하도록 평신도를 활성화 하는 사역을 해야 성령 충만한 교회를 이룰 수 있다"고 말한다.

 

 

(이 자료는 고신대학교 일반대학원 임영효 교수의 "유다서가 보여주는 지도력 개발의 원리" 강의안 형식에 따른 예화자료입니다. 제출자: 이서영 LBI 로고스성경교육원 원장, 참좋은제자들교회 담임목사. 출처를 기록한 각주는 아래의 "예화모음" 파일을 참고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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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로고스성경연구소
글쓴이 : 이서영목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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