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성경적강해/주일설교

명절에 찾아오신 왕 (요 12:12-15)

by 이서영 목사 2015. 7. 17.

명절에 찾아오신 왕 (요 12:12-15)

 

  최대의 명절인 설날이 되면 세배 돈, 때때옷, 떡국이 생각난다. 그리고 국회의원, 지자체 단체장, 시군구의원 등이 시장에 찾아가는 장면이 생각난다. 물론 인사도 겸해서 찾아가지만 명절에 돌아다보는 것은 설날을 잘 보내라는 뜻이 있어서다. 그저께는 이명박 대통령이 동대문 시장을 찾아간 것이 뉴스로 소개 되었다. 이렇게 설날 명절에 찾아가는 이유는 위로해주고 힘을 주기 위해서다. 서민들의 민생문제도 해결해주기 위해서이다.

 

  이스라엘의 참 왕이신 예수님께서도 이스라엘의 최대의 명절인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셨다. 그러나 통치자의 모습으로 가지 않으시고 서민의 모습으로 가셨다. 호화롭고 근엄한 말을 타지 않으시고 초라한 행색의 어린 나귀 새끼를 타고 가셨다. 이 모든 것은 백성들의 삶을 함께 나누고 백성들의 아픔을 함께 하기 위해서이다. 낮은 자리에서 죄 짐과 생활고의 짐과 질병의 짐과 생업의 짐과 인간관계의 짐을 지시기 위해서이다. 예수님은 이처럼 진실로 의로우시고 참으로 좋으신 왕이시다. 억압하거나 착취하거나 멸망시키는 분이 아니라 선하게 통치하시는 분이시다.     

 

  그런데 지금 우리의 왕은 누구냐? 이 질문은 매우 소중한 질문이다. 누가 왕이 되느냐에 따라 우리의 삶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물론 육적인 나라의 대통령은 이명박 대통령이다. 그러나 나를 통치하고 있는 영적인 왕은 누구냐? 나의 마음과 행동을 결정하는 그것이 바로 지금 나의 왕이다. 그러므로 사람마다 왕이 다를 수 있다. 사람마다 특별히 아끼고, 특별히 좋아하고, 특별히 무언가에 빠져 있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자신의 왕이다. 그 왕이 참된 왕이신 예수님을 뒷자리로 물러나게 만든다.

 

  예수님 당시에도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예수님께서 왕이 되는 것을 좋아하지 않은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정치적인 문제를 해결해주고, 경제적인 문제를 해결해주는 해결사 노릇을 해주는 왕을 원했다. 그래서 그들은 그들의 진정한 왕이신 예수님을 배척하고 온갖 조롱을 퍼부었다. 더 나아가 그들은 총독인 빌라도에게 예수님을 처형하도록 요청했다.

 

  예수님께서 빌라도 총독 앞에 서자 빌라도가 물었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그러자 예수님께서 “네 말이 옳도다”라고 대답하셨다(마 27:11). 그러자 빌라도는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였노라”고 했다. 그러면서 “명절인 유월절에 한 사람을 풀어주는 전례가 있으니 내가 유대인의 왕인 예수를 놓아주기를 원하느냐”라고 하였다. 그러자 사람들은 소리를 질러 “이 사람이 아니라 바라바를 풀어 달라”고 하였다. 바라바는 어떤 사람이냐? 강도이다.

 

  이에 빌라도가 예수님을 데려다가 채찍질하였다. 군인들도 가시나무로 관을 만들어 머리에 씌우고 채찍질하고 앞에서 무릎을 꿇고 “유대인의 왕이여”라고 희롱하면서 침을 뱉고 갈대로 머리를 치고 손으로 때렸다(요 18:38-19:3; 마 27:29-30). 그들은 또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머리 위에 “유대인의 왕 예수”라는 죄패를 붙였다(마 27:37).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도 함께 희롱하였다.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리하면 우리가 믿겠노라”(마 27:41-42).          

 

  그들은 예수님보다 자신의 눈앞의 이익을 해결해줄 왕을 원했던 것이다. 예수님께서 은화 열 므나의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그런데 그 백성이 그를 미워하여 사자를 뒤로 보내어 이르되 우리는 이 사람이 우리의 왕됨을 원하지 아니하나이다 하였더라.” 예수님은 왕을 배척한 그들이 어떻게 되는지에 대해 말씀하셨다. “그리고 내가 왕됨을 원하지 아니하던 저 원수들을 이리로 끌어다가 내 앞에서 죽이라 하였느니라.” 그러므로 왕은 매우 중요하다. 어떤 왕이 나의 왕이 되느냐에 따라 나의 일생과, 나의 영원한 생명과, 나의 삶이 크게 좌우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육적인 왕이든 영적인 왕이든 왕은 매우 중요하기에 왕을 잘 세워야 한다.

 

  이디 아민은 우간다의 대통령이었다. 1971년 1월 25일 우간다가 독립할 당시 수상이었고 쿠데타를 일으켜 사회주의 독재체제를 수립하였던 ‘밀턴 오보테’ 종신 대통령이 싱가포르에서 열린 콘퍼런스에 참여하고 있는 동안 이디 아민이 무혈 쿠테타로 정권을 잡았다. 영국과 이스라엘은 아민 정권을 바로 인정했다. 그러나 쿠데타 며칠 후에 우간다의 지식인, 장교, 법관들이 한 사람씩 사라지기 시작했다. 오보테를 지지했던 마을들은 폐허가 되었고, 주민들은 살해당했다. 이러한 국가폭력으로 이디 아민은 잔인한 아프리카의 폭군으로 이름을 날리게 되었다.

 

  그가 권력에 있던 8년간, 10만에서 50만에 이르는 희생자가 있었을 것으로 인권단체는 추정하고 있다. 아랍권의 국가들과 경제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아민은 이스라엘의 적임을 자처했다. 그는 나치의 유대인 학살을 미화하고, 유대인들을 추방했다. 1972년 아프리카화 캠페인의 일환으로 아시아인들을 내쫓고, 외국인 소유의 기업들을 국영화하였다. 그로 인해 우간다는 중산층과 상류층을 잃게 되었다. 1976년에는 자신을 종신대통령으로 선언했다. 그런 그가 1978년 군 내부의 반역음모를 무마하기 위해, 탄자니아 침공을 명령했다. 그러나 1979년 4월 11일 탄자니아 군과 망명 우간다인들의 반격으로 수도 캄팔라가  점령당했다. 아민은 리비아로 도망치고, 나중엔 이라크로 향했다. 결국 사우디아라비아를 마지막 망명지로 택하였다(다음 ‘위키 백과사전’ 참고).

 

  우간다 국민들은 이디 아민을 향해 야자나무가지를 흔들면서 열광했다. 그러나 그것은 잠시뿐, 이디 아민은 폭군의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선량한 사람들이 수십만 희생당했고 나라는 침몰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나라의 왕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 수 있다. 어떤 왕이냐에 따라 나라의 운명이 바뀐다. 그러므로 왕은 정말 중요하다. 나라뿐만 아니다. 나의 생명도, 나의 풍요로운 삶도 연관되어 있다. 그러므로 어떤 왕이 세워지느냐가 참으로 중요하다. 나라도, 나에게도 왕은 중요한 존재이기 때문에 왕을 잘 모셔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한 편은 예수님을 조롱하고 배척하고 처형하도록 했다. 그러나 다른 한 편은 열광적으로 종려나무가지를 흔들면서 환호했다. 그들의 운명은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느냐 모시지 않느냐에 따라 갈라지게 되었다. 이때 종려나무가지는 대추야자나무를 말한다. 우간다 국민들은 야자나무가지를 흔들면서 이디 아민을 전폭적으로 환영하다가 속았다. 그러나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면 절대로 속지 않는다. 예수님은 참된 왕이시기 때문이다.

 

  13절 합독.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호산나? “구원하소서!”라는 뜻이다. 그런데 아무나 붙들고 구원해달라고 하지 않는다. 구원해 줄 수 있는 사람에게 부탁한다. 그렇다면 누가 구원해줄 수 있나? 온 우주만물을 다스리시는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만이 오직 구원하실 수 있다. 로마서 5장 21절을 보면 진정한 왕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려준다.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한 것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라.” 죄가 왕이 되면 영원히 죽는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왕이 되시면 영원히 살게 된다.

 

  그 예수님은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시다. 주의 이름으로? 예수님은 합법적인 왕이라는 뜻이다. 합법적인 왕을 헬라어로는 ‘바실류스’이다. 그런데 같은 왕이라도 ‘튀란노스’는 왕좌를 찬탈한 왕을 말한다. 이디 아민이나 밀턴 오보테처럼 쿠데타로 불법적으로 집권한 왕을 말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주의 이름으로 오신 왕이시다. 쿠데타로 잡지 않고 정상적으로 합법적으로 왕이 되신 분이시다. 쿠데타로 찬탈한 이디 아민이나 밀턴 오보테는 집권한 다음에 스스로 종신 대통령으로 자처하였다. 그러나 악하게 통치했고 오래 가지도 못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진정 우리의 종신 왕이시다. 선한 왕으로서 영원히 우리의 생애를 선하게 통치해주신다.

 

  마태복음 2장 2절을 보면 동방박사가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러 온 것을 볼 수 있다.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냐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하니.” 예수님은 진정한 우리의 왕이신 것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예수님께서도 마태복음 16장 28절에서 말씀하셨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아멘. 예수님은 합법적인 왕으로 합법적인 왕권을 가지고 계신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왕으로서 왕권만 가지고 계시지는 않는다. 왕이신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을 이끌어주시고 계신다. 뿐만 아니라 그 나라의 백성인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책임져주신다. 15절 합독. “두려워하지 말라 보라 너의 왕이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신다.” “너의 왕이.” ‘너’는 원어로는 ‘쉬’라고 하는데 2인칭 단수이다. 영어로는 ‘your’이다. ‘너의’ 왕이라는 것이다. 나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왕이 아니라 나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왕이시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나의 생애를 책임져주시고 나의 온갖 짐을 져주시고 구원해주시는 왕이시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나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왕이 아니시라 나와 함께 하셔서 나를 구원해주시는 참 좋으신 왕이신 것이다.

 

  그런데 불법적으로 쳐들어가서 정복하고 스스로 왕이 된 사탄 마귀가 있다. 사탄 마귀는 이디 아민이 쿠데타로 점령한 것처럼 우리 자신을 불법적으로 점령했다. 이 폭군은 우리를 점령하고는 점점 죽이고 멸망시키고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를 구해주셔서 우리에게 생명과 자유를 주시고, 더 풍요로운 삶을 주셨다. 요한복음 10장 10절.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아멘.

 

  빌라도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하기 전에 심문했다. “네가 왕이 아니냐?” 그럴 때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태어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려 함이로다.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음성을 듣느니라”(요 18:37). 예수님께서 진정한 왕이신 것을 분명하게 밝히신 것이다. 요한계시록 17장 14절에도 예수님께서 왕이신 것을 말씀하고 있다. “그들이 어린 양과 더불어 싸우려니와 어린 양은 만주의 주시오 만왕의 왕이시므로 그들을 이기실 터이요 또 그와 함께 있는 자들 곧 부르심을 받고 택하심을 받은 진실한 자들도 이기리로다.” 왕이신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실 때 우리도 함께 승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누가 우리의 왕이 되면 좋겠나? 불법으로 왕이 된 폭군이냐? 아니면 합법적인 왕이냐? 누가 왕이 되느냐에 따라 우리의 일생과 영생이 크게 좌우된다. 그러므로 이 설날 명절에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풍요로운 삶을 위해 찾아오시는 합법적인 예수님을 우리의 왕으로 모셔야 할 것이다. 우리를 사망에서 구원해주시고 억눌린 삶에서 구원해주시는 예수님을 우리의 왕으로 모시고 살아가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이 크게 외친 것처럼 우리도 크게 외치길 바란다. “호산나, 나를 구원하소서!”,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예수님, 나의 왕이 되신 것을 찬송하나이다!” 아멘. 

 

 

[2011 참좋은제자들교회 https://cafe.daum.net/truegooddisciples/IPZB/54 담임목사 이서영]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