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 기도하라 (약 5:13-16)
오늘날 현대에 있어서 신속하게 시공간에 제한 받지 않고 서로 이야기할 수 있는 기회가 많이 제공되고 있습니다. 컴퓨터와 핸드폰의 발달로 더욱 가속도가 붙고 있습니다. 특히 스마트 폰(Smart Phone)으로 더 빠른 속도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이 스마트폰의 대중화로 트위터도 함께 대중화되고 있습니다. 스마트 폰의 특징인 시간과 공간의 제한 없이 어디서든 인터넷에 접속할 수 있다는 점, 그리고 즉각적으로 반응을 보이고 참여할 수 있다는 점 덕분에 트위터의 이용률이 더욱 높아지고 있습니다. 이 트위터로 지역에 제한 없이 전 세계 이용자와 짧은 글로 대화를 주고 받거나 친구를 맺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트위터란 무엇일까요? 트위터는 미국 샌 프란시스코 지역의 벤처 기업인 오데오 사(Odeo, Inc.)의 에반 윌리엄스(Evan Williams)와 노아 글래스(Noah Glass)가 개발하고 창업하였습니다. “트윗(tweet)”이란 말은 작은 새가 지저귀는 소리를 나타내는 영어 단어입니다. 단문 메시지 서비스(SMS), 인스턴트 메신저, 전자 우편(e-mail) 등을 통해 “트윗(tweet)”를 전송할 수 있습니다. 트위트란 글 한 편에 해당하는 단위이며, 140 글자가 한도입니다. 미국의 SMS는 160 글자로 한정되어 있는데, 여기서 나머지 20 글자는 사용자 아이디가 입력될 공백인 셈입니다.
이렇게 전송된 트위트는 사용자의 프로필 페이지에 표시되며, 또한 다른 사용자들에게도 전달됩니다. 트위터는 사용자 수가 많으며, 실시간 대화와 비슷한 방식으로 이야기가 오가는 특징이 있기 때문에, 누군가가 시작한 이야기가 급속히 유포되어 세계적인 이슈가 되는 일도 일어납니다. 미국의 첫 흑인 대통령이 된 버락 오바마가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하는 데 트위터를 이용한 홍보 효과를 톡톡히 본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Daum ‘위키 백과 사전’ 참고).
우리는 스마폰도 트위터도 아직까지 잘 사용하고 있지는 않지만 트위터에 올라온 글을 보겠습니다. 황성주 박사의 트위터입니다. “부모가 서로 사랑하고 그 사랑이 자녀에게 흘러 넘치는 경우에, 그 자녀에게 심각한 정서장애가 있는 것을 단 한 번도 본적이 없다. -저스틴 그린- ” 황박사의 트위터에 보면 이런 글도 있습니다. “부모가 서로에게 미소 짓는다면 그 자녀들이 먼저 부모에게, 나중에는 세상에 미소를 보내게 될 것이다. -데이비드 굿맨- ”
트위터를 하나 더 볼까요? 유선비의 트위터입니다. “人生何處不相逢 (인생하처불상봉) ‘인생 살다보면 어느 곳에서든지 서로 만나지 않으랴? 원수와 원한을 맺지 말고 평소 은혜와 덕을 베풀자’라는 『경행록』의 말인데.. 이기 이기 마 쉽냐 이거죠.” 서로 사랑하고 서로 잘 해보자는 것은 어느 누구나의 소망입니다. 그런데 생각만큼 잘 안 되니까 문제입니다. 서로 사랑하지 않아 겪는 고통을 느껴보셨습니까? 우리는 때때로 그런 아픔을 겪으면서 살고 있습니다. “이기 이기 마 쉽냐 이거죠”라고 말한 유선비의 트위터처럼 서로 사랑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쉽게 서로 사랑을 잘 한다면 굳이 성경에서 그렇게 강조를 많이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잘 안되니까 하나님께서 서로 사랑하고 서로 잘 해보라고 수없이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쉽지 않은 일을 잘 해낼 때 그리스도인의 능력이 나타나고 하나님께 큰 영광이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권면만 하지 않으시고 서로 사랑하고 서로 잘 되는 비결을 자세히 가르쳐주셨습니다. 이것에 따라 우리가 행동에 옮기기만 하면 서로 사랑하게 되고 서로 잘 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서로’를 중요하게 여기십니다. ‘서로(each other; one another)’라는 단어를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면, 부사로 ‘관계를 이루는 둘 이상의 대상 사이에서, 각각 그 상대에 대하여’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서로 친하게 지내다. 서로 가깝게 지내다. 그 둘은 서로 사랑한다’라는 예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Daum ‘국어 사전’ 참고).
그러면 성경에서는 ‘서로’를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을까요? 오늘 본문을 비롯해서 신약성경에 나오는 ‘서로’는 원어로 ‘알렐론’입니다. 뜻은 ‘서로, 상호간의’인데 ‘각각, 서로, 피차’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알렐론은 상호 대명사로 속격 복수입니다. 신약 성경에서 약 100회나 사용되었습니다.
속격 복수인 것은 두 사람 이상이 속해 있는 상호간의 상태를 말합니다. 다시 말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을 가지고 같은 행동을 하고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마음과 뜻이 잘 통하는 상태로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래서 성경을 보면 좋지 않은 행동을 할 때도 ‘서로’라고 했으며, 좋은 일을 할 때도 ‘서로’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나쁜 일에 있어서가 아니라 선한 일을 행함에 있어서 서로 함께 하라고 가르쳐줍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서로 다투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나쁜 일에 서로 같은 행동을 하지 않기를 바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서로 다투지 말고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갈라디아서 5:15절입니다. “만일 서로 물고(깨물다, 상처를 주다) 먹으면 피차(알렐론, 서로) 멸망할까 조심하라.” 5:26절에도 권면하고 있습니다.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노엽게 하거나 서로 투기하지(시기나 질투) 말지니라.” 서로 다투면 서로 손해를 보기 때문에 이런 것을 금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어부지리(漁夫之利)’는 무슨 말일까요? 서로 다투는 틈에서 엉뚱한 제삼자가 이익을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중국 조나라 때 소대라는 사람이 역수(易水)라는 강을 건너다가 황새가 입을 벌리고 있는 큰 조개를 쪼아 먹으려 하자, 조개가 황새의 부리를 꽉 물어 버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꼼짝 못하게 된 둘이 서로 승강이를 하고 있는데, 때마침 그곳을 지나가던 어부가 이것을 보고 둘 다 잡아갔다는 고사에서 유래하였습니다(Daum ‘초등 학습 사전’ 참고). 우리가 서로 다투면 누가 이익을 볼까요? 우리가 서로 싸울수록 교회에 안 다니는 사람, 기독교를 비난하고 비판하는 사람, 특히 마귀가 제일 이익을 많이 보고 좋아합니다.
‘우리들이 싸울 것은(새 350장)’이란 찬송가 1절을 불러보겠습니다. “우리들이 싸울 것은 혈기 아니요 우리들이 싸울 것은 육체 아니요. 마귀 권세 맞서 싸워 깨쳐버리고 죽을 영혼 살릴 것일세. 한 마음으로 힘써 나가세 한 마음으로 힘써 싸우세. 악한 마귀 군사들과 힘써 싸워서 승전가를 울리기까지.” 그러므로 우리 서로가 원수 마귀의 시험에 놀아나지 않고 한 마음으로 힘써 맞서 승리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승리의 비결을 말씀해주셨습니다. 그런데 갈라디아서 5:15, 26절처럼 서로 다투고 시기질투하면 서로 물고 물리다가 함께 망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서로 다투면 서로 손해를 보고 결국 기독교를 비난하고 비판하는 사람과 마귀만 이익을 보게 되니까 그런 행동을 그만두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살지 말고 에베소서 4:32처럼 살라고 하셨습니다.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이때 ‘서로’는 재귀대명사로 2인칭 남성 복수입니다. 하나님께서 ‘너희 자신들을’ 용서하시고 구원해주신 것처럼 너희도 서로 용서하고 서로 불쌍하게 여겨주고 친절하게 대해주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능력은 무엇인가를 대단히 많이 갖추면 능력이 있다고 할 수 있을까요? 그것도 필요한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그것과 함께 갖추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대단히 거부이며(창 13:2, ‘아브라함이 가축과 은과 금이 풍부하였더라’) 부족의 족장으로 여러 가지를 잘 갖추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것만 가지고는 믿음이 좋다고 하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뿐인 아들 이삭을 바친 순종 때문에 믿음이 좋다고 할 수 있을까요? 그것도 맞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의 성격에 비추어 말씀드리면, 다투지 않고 손해가 나도 사랑한 것입니다.
소유가 적을 때는 아브라함과 조카 롯은 사이좋게 지냈습니다. 그러나 양과 소와 종들이 많아지자 함께 살기가 어려워졌습니다. 더 나아가 서로 다투게 되었습니다(창 13:5-7). 그러자 아브라함은 다투지 말자고 했습니다(8절, ‘아브람이 롯에게 이르되 우리는 한 친족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하지 말자’). 이때 아브라함이 양보하고 손해를 자청했습니다. 기름지고 좋은 땅을 조카가 먼저 선택하도록 했습니다(9절). 이러한 것이 그리스도인의 능력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이런 사랑의 마음을 가진 능력의 그리스도인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서로 사랑하는 가운데 연합하는 것을 좋아하십니다. 성막을 지을 때도 그냥 짓지 않았습니다. 출애굽기 26:3절을 보면 “그 휘장 다섯 폭을 서로 연결하며 다른 다섯 폭도 서로 연결하고”라고 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출애굽기 26:17절을 보면 “각 판에 두 촉씩 내어 서로 연결하게 하되 너는 성막 널판을 다 그와 같이 하라”고 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성전 재료가 의미하는 것을 보면 서로 연결하여 서로 연합하는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성전 안에 있는 속죄소의 모습을 말하고 있는 에스겔 1:9절을 보면 “날개는 다 서로 연하였으며 갈 때에는 돌이키지 아니하고 일제히 앞으로 곧게 행하며”라고 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속죄소 위의 천사들도 서로 연결하여 일제히 앞으로 곧게 나아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서로 하나가 되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원하고 계십니다. 이렇게 서로 하나가 될 때 같은 방향으로 잘 나아갈 수 있게 됩니다.
이스라엘이 한때 남과 북으로 분열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결국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고국 땅에 들어갈 때 하나가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에스겔 37:16-17절에 말씀하셨습니다. “인자야 너는 막대기 하나를 가져다가 그 위에 유다와 그 짝 이스라엘 자손이라 쓰고 또 다른 막대기 하나를 가지고 그 위에 에브라임의 막대기 곧 요셉과 그 짝 이스라엘 온 족속이라 쓰고, 그 막대기들을 서로 합하여 하나가 되게 하라 네 손에서 둘이 하나가 되리라.”
하나님께서는 서로 하나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가 되지 못하면 미워하십니다. 스가랴 8:17절에 하나님의 마음을 나타내 보여주셨습니다. “마음에 서로 해하기를 도모(생각, 계획, 계산, 판단)하지 말며 거짓 맹세를 좋아하지 말라 이 모든 일은 내가 미워하는 것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일을 계속 행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심판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야고보서 5:9절에 말씀하셨습니다. “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하리라 보라 심판주가 문 밖에 서 계시니라.” 서로 원망이 섞인 탄식을 하면 하나님께서 문 입구에 대기해 있다가 곧바로 문을 열고 들어와 판결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살 맛나는 세상을 위해 소금처럼 살라고 하셨습니다. 마가복음 9:50절에 “소금은 좋은 것이로되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이를 짜게 하리요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고 하셨습니다. ‘알렐론’의 문법적인 특징이 무엇이라고 했지요? 상호대명사로 속격 복수라고 했습니다. 서로에게 속할 정도로 마음과 뜻이 잘 통하는 상태가 되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일과 선한 일에 서로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고 화목해야 살 맛이 나기에 당부하신 것입니다. 소금이 없으면 음식을 먹기 곤란합니다. 그러므로 소금처럼 살 맛을 내는 화목한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꼭 하고 싶었던 말씀은 무엇일까요? 그 가운데 중요한 말씀은 무엇일까요? 예수님은 우리에게 중요한 계명을 주시고 당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3:34절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그렇다면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는데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면 되겠어요? 어떻게 하는 것이 사랑하는 것이 될까요? 오늘 본문을 보면 “서로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서로 기도할 때 서로 더 잘 사랑하게 되고 서로 더 잘 되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무슨 일이든 서로 기도해주라고 한 것입니다. 야고보서 5:16절을 합독하겠습니다. “그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백하며 병이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 기도는 이처럼 매우 강력한 사랑입니다. 왜일까요? 기도가 굉장한 능력을 가졌는데 그 능력을 상대방에게 시공간을 초월해서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신디 제이 콥스 목사와 김하중 전 통일부장관의 대담내용입니다. 제이콥스 목사가 김 전 장관에게 말했습니다. “어머니께 감사하십시오.” 김 전 장관이 대답했습니다. “15년 전에 돌아가셨는데요.” 그러자 제이콥스 목사가 말했습니다. “지금 이렇게 잘 된 것은 모두 어머니께서 살아계실 때 기도드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어머니께 감사드리십시오.” 편집했지만 우리는 이러한 대화를 통해 기도가 시공간을 초월해서 역사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사랑하는 그 사람을 위해서 기도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기도하면 어떤 일이 일어나기에 기도하라고 할까요? 이런 유모어가 있습니다. 다솜이가 말썽을 부려 엄마가 혼을 낸 후 방으로 들어가서 잘못을 반성하고 하나님께 기도드리라고 명령했습니다. 한참 후 다솜이가 방에서 나오며 말했습니다. “엄마, 기도 다 했어요.” “그래, 하나님께 잘못했다고 기도했니?” “아뇨, 엄마가 나의 행동을 더 오래 참을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했어요.” 그러던 다솜이가 이제 자기 전에 기도드리고 있었다. 그런 다솜이를 엄마가 보고 물었다. “다솜아. 오늘 엄마 속상하게 한 거 회개기도 드렸니?” “아뇨, 안 했는데요.” “왜 기도 안 드렸지?” “우리 집안에서 일어난 문제는 밖에 알리지 말고 우리끼리 해결하는 것이 더 나을 것 같아서요.” (황영헌, 『설교 유머』, 국민일보)
우리가 해결하려고 하면 우리 능력만큼만 해결 받습니다. 아니, 우리들 사이에 일어난 속상한 것을 우리 스스로 잘 풀 수 없습니다. 기도할 때 잘 풀리게 됩니다. 이러한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일하면 우리능력 만큼 일하게 되고, 우리가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일하신다.”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은 이렇게 매우 중요합니다. 시편 11:4절을 보면 더 잘 알 수 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그의 성전에 계시고 여호와의 보좌는 하늘에 있음이여 그의 눈이 인생을 통촉하시고 그의 안목이 그들을 감찰하시도다.”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바라보시기 때문에 기도가 중요합니다.
사도행전 9:11절에도 이 사실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주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직가라 하는 거리로 가서 유다의 집에서 다소 사람 사울이라 하는 사람을 찾으라 그가 기도하는 중이니라.” 하나님께서 바울이 기도하는 것을 보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10:4절에서도 증거하고 있습니다. “고넬료가 주목하여 보고 두려워 이르되 주여 무슨 일이니이까 천사가 이르되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되어 기억하신 바가 되었으니.” 기도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다 아시고 기억하신다는 것입니다.
기도의 위력은 무엇인가요? 하나님께서 바라보시고 아시고 응답해주신다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위력 있는 기도를 상대방을 위해 기도하면 상대방이 어떻게 되겠어요? 변화를 받고 잘 됩니다. 원수까지도 변화를 받고 잘 됩니다. 마태복음 5:44절입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가까이에 있는 사람이 원수일수록 하루 빨리 변화를 받고 잘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계속 괴롭습니다. 원수를 향해 한을 품고 잘못되기를 바란다면 그 원수가 가까이에 있는 원수라면 자신이 더욱 고통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원수를 더욱 더 사랑하는 마음으로 더욱 더 기도해주어야 합니다. 구원받고 예수님 안에서 잘 되도록 기도해주어야 합니다.
본문 가운데 야고보서 5:14-16절을 합독하겠습니다.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그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그를 위하여 기도할지니라.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그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받으리라. 그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백하며 병이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
사도행전 12:5절을 보면 “이에 베드로는 옥에 갇혔고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하더라”고 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위하여 기도할 때 베드로 사도는 감옥에서 풀려나는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이처럼 다른 사람을 위하여 기도할 때 그 사람이 묶였던 것에서 풀려납니다. 마귀 권세에서, 온갖 괴로움과 고통 등에서 풀려납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6:18절에도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기도와 간구를 하되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라.”
그러므로 서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서로를 위해 뜨겁게 간절히 기도해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서로 응답이 잘 되어서 이전보다 더 서로 사랑하고 이전보다 더 서로 잘 되시기를 바랍니다.
[2011 참좋은제자들교회 https://cafe.daum.net/truegooddisciples/IPZB/57 담임목사 이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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