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힘을 얻으리니 (사 40:25-31)
“세상의 모든 일은 힘의 산물(産物)이다. 힘이 적으면 작게 이루고, 힘이 크면 크게 이루고, 만일 힘이 도무지 없으면 일은 하나도 이룰 수가 없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자기 목적을 달성하려는 자는 먼저 그 힘을 길러야 한다.” 이 글은 주요한이 편집한『안도산전서(安島山全書)』라는 책에 나오는 글인데, 도산 안창호가 ‘청년에게 부치는 글’에 있는 것입니다.
안창호에 대해 백과사전을 찾아보면 이렇게 소개합니다. “일제 강점기 당시 독립운동 방법을 놓고 무력투쟁론, 민족개조론, 외교독립론으로 나뉠 때 민족개조론을 주창하였으며, 민족개조론의 대표적 인물이었습니다. 그에 의하면 스스로 힘과 실력을 키우고 그 실력을 기반으로 할 때만이 스스로 자립할 수 있다고 봤던 것입니다. 웅변술에 뛰어났으며, 여러 청년들을 감화시켜 독립운동에 투신하게 했습니다.
그가 실력 양성과 인재 육성을 부르짖자 급진파는 당장 싸울 인력이 필요한데 무슨 말이냐며 반대하였으나, 안창호는 나라의 독립을 위해서는 우선 인재를 육성할 필요가 있다며 인재육성과 실력양성을 강조하였습니다. 그가 보기에 한국이 문명개화의 부강한 나라가 되는데 가장 필요한 것은 실력을 갖춘 인재를 키우는 것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안창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 중에 인물이 없는 것은 인물이 되려고 마음먹고 힘쓰는 사람이 없는 까닭이다. 인물이 없다고 한탄하는 그 자신이 왜 인물이 될 공부를 하지 아니하는가?”(Daum 위키백과사전)
안창호는 힘이 있어야 하는데 그 힘은 ‘실력을 갖춘 인재를 키우는데 있다’라고 강조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천연자원이 부족하고 인구밀도가 높은 나라가 이렇게 세계적인 나라가 된 힘은 높은 교육열에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힘써 배워서 실력을 키워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 성도는 여기서 머물면 안 됩니다. 우리는 세상의 학문보다 더 귀하고 더 중요한 것도 배워야 합니다. 그것을 배워야 우리는 진정한 실력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천지를 창조하시고 역사하시는 창조주 하나님, 나의 생명이 되시는 구원자 하나님을 배우고 아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잘 배우고 잘 알아서 진정으로 실력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라는 복음송을 함께 부르겠습니다. 1절.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주는 나의 반석이시며 나의 요새시라. 주는 나를 건지시는 나의 주 나의 하나님, 나의 피할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라.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구원의 뿔이시오 나의 산성이라.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그는 나의 여호와 나의 구세주.”
2절. “나의 생명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님을 찬양합니다. 주는 나의 사랑이시며 나의 의지시라. 주는 나를 이끄시어 주의 길 인도하시며, 나의 생의 목자 되시니 내가 따르리라.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생명의 면류관으로 내게 씌우소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그는 나의 여호와 나의 구세주.”
무엇이 진정한 나의 힘이 되어줄까요? 나의 힘은 오직 하나님이신 줄로 믿으십니까? 그러므로 나를 창조하시고 나에게 생명을 주시고 나를 구원해주시는 하나님을 나의 힘으로 삼으시기를 바랍니다. 26절을 보겠습니다. “너희는 눈을 높이 들어 누가 이 모든 것을 창조하였나 보라 주께서는 수효대로 만상을 이끌어 내시고 그들의 모든 이름을 부르시나니 그의 권세가 크고 그의 능력이 강하므로 하나도 빠짐이 없느니라.” 아멘.
여기에 나오는 ‘만상(萬象)’이란 단어는 무슨 뜻일까요? 삼라만상? 오만상? 아닙니다. 성경 원어인 히브리어로 ‘차바’인데 ‘전쟁, 군대, 무리’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공동번역 성경에서는 ‘군대’로 번역하였습니다. 이 단어는 때론 태양과 달을 비롯한 ‘천체(NIV, starry host)’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표준새번역 성경에서는 ‘천체’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만상이란 단어를 통해 이사야 선지자는 무엇을 전해주려고 했을까요? 그것은 이 단어가 “군사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전 우주에 대한 하나님의 통치를”(바이블렉스 7.0) 가리킨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개미떼처럼 수많은 군대를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도록 지휘하듯이 하늘의 수많은 별들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운행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의 위대하신 권능을 드러내고자 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그 권세가 크시고 그 능력이 강하십니다. 그러므로 해와 달과 별들을 한 개도 빠짐없이 부르시고 이끌어 내십니다. 여러분, 별이 몇 개인지 아세요? 우리 눈으로 볼 수 있는 별은 약 4천 개라고 합니다. 이것도 다 헤아리지 못하는데 천체 망원경을 통해 보면 지구의 모래 숫자보다 더 많은 별이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 별을 일일이 셀 수가 있겠습니까? 더 나아가 별의 이름을 하나하나 부를 수 있겠습니까? 금성, 목성, 토성, 명왕성, 천왕성, 등·······, 더 이상 막혀서 부를 수 없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부르려고 해도 현재 과학으로는 이름조차도 알 수 없는 별들이 온 우주에 가득 차 있기에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별의 이름을 아시고 일일이 세시고 그 이름을 부르십니다.
이러한 큰 권능을 가지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너는 듣지 못하였느냐?”(28절)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 잘 알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이렇게 놀라우신 하나님이 바로 나의 하나님이 되십니다. 이 사실은 천지를 창조하시고 운행하시는 사실보다 더욱 더 놀라운 일입니다. 창조만 하시고 가만히 계시면 나와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창조한 사실에만 놀라워할 뿐입니다. 그러나 창조주 하나님께서 바로 나의 하나님이 되어주시기에 더 놀라운 일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하나님이 아니시라 나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나의 하나님이 되시기에 놀라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영원히 살아계시고 역사하시는 창조주 하나님께서 나의 하나님이신 것을 잘 알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렇다면 창조주 하나님께서 나와 어떤 관련이 있을까요? 31절을 보면 “새 힘을 얻으리니”라고 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나에게 새 힘을 주시기에 관련이 있습니다. 나의 하나님께서 나에게 새 힘을 주십니다. 내가 피곤하면 나에게 능력을 주십니다. 내가 무능하면 나에게 힘을 더해주십니다. 29절을 합독하겠습니다.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 아멘. 창조주이신 나의 하나님께서 내가 피곤할 때 능력을 주시고 내가 무능할 때는 힘을 더해주십니다. 그래서 독수리가 날개를 치면서 날아올라가는 것처럼 내가 힘차게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달려도 피곤하지 않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31절).
이처럼 하나님께서 주시는 힘은 피곤하지 않게 하고 독수리처럼 힘차게 살아가게 합니다. 그러나 천지를 창조하시고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운행하시는 권능의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여기지 않는 사람은 정반대가 됩니다. 아무리 나이가 어린 청소년(30절, ‘소년’)이라고 해도 피곤해 합니다. 힘이 센 청년(30절, ‘장정’)이라도 비틀거리고(30절, ‘넘어지며’) 힘없이 “픽픽” 쓰러집니다. 아모스 2장 14절을 보면, “빨리 달음박질하는 자도 도망할 수 없으며 강한 자도 자기 힘을 낼 수 없으며 용사도 자기 목숨을 구할 수 없으며”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힘이 아닌 육체적으로 기른 힘을 가지고는 부족하다는 말입니다.
시편 33편 16절에도 이것을 분명하게 확증합니다. “많은 군대로 구원 얻은 왕이 없으며 용사가 힘이 세어도 스스로 구원하지 못하는도다.” 이때 아모스서와 시편에서 나오는 ‘힘’이란 단어는 히브리어로 ‘코아흐’입니다. 오늘 본문 31절에 나오는 ‘힘’도 ‘코아흐’입니다. 똑같은 단어이지만 그 결과는 정반대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힘은 피곤하지도 않게 하고 독수리가 날개치고 올라가는 것처럼 새 힘을 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똑같은 단어이면서도 아모스서와 시편에서는 아무리 많은 군대가 있어도 맥을 추지 못하고 힘 있는 용사가 되어도 자기를 구원하지 못한다고 했을까요? 그것은 힘이 어디서 생기느냐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힘은 창조의 능력을 발휘합니다. 그러나 인간 편에서 기른 힘은 한계가 있고 약하다는 것입니다.
사사기 16장을 보면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삼손과 들릴라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삼손이 소렉 골짜기에 사는 들릴라라는 여인을 사랑했습니다. 삼손은 블레셋 사람들을 물리쳤기 때문에 블레셋 사람들은 삼손을 없앨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삼손이 들릴라를 사랑하고 있는 것을 보고 찾아가서 말했습니다. “삼손을 꾀어서 무엇으로 말미암아 그 큰 힘이 생기는지, 그리고 우리가 어떻게 하면 능히 그를 결박하여 굴복하게 할 수 있을는지 알아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렇게 하면 우리가 각각 은 천백 개씩을 주겠다”라고 했습니다.
이때부터 들릴라는 삼손을 졸라대기 시작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큰 힘이 생겼어요? 어떻게 하면 당신을 결박하여 굴복시킬 수 있어요? 제게 말해주세요, 네?” 들릴라가 끈질기게 조르니까 말해주었습니다. “마르지 아니한 새 활줄 일곱으로 나를 결박하면 내가 약해져서 다른 사람과 같이 될꺼요.” 블레셋 사람들이 ‘얼씨구나 좋다’라고 하면서 매복해 있다가 삼손을 덮쳤습니다. 그러나 삼손이 불탄 삼실을 끊는 것같이 손쉽게 끊어버렸습니다.
그러자 들릴라가 삼손에게 따졌습니다. “당신이 나를 희롱하려고 나에게 거짓말했지요? 무엇으로 결박할 수 있는지 어서 말해주세요.” 삼손이 말했습니다. “쓰지 아니한 새 밧줄들로 나를 결박하면 될꺼요.” 들릴라가 이 말을 듣고 꽁꽁 묶었으나 역시 실패했습니다. 그러자 들릴라가 또다시 졸라댔습니다. 삼손이 이번에도 말했습니다. “내 머리털 일곱 가닥을 베틀의 날실에 섞어 짜면 될꺼요.” 들릴라가 ‘이번에는 진짜이겠지’ 하면서 그렇게 하자 블레셋 사람들이 또 들이닥쳤습니다. 그러나 또다시 실패했습니다.
이 정도가 되면 들릴라의 속셈을 알아차릴 만한데 삼손은 그만 사랑에 빠져 눈이 멀었습니다. 그러다가 진짜로 눈이 뽑혀 눈이 멀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났을까요? 들릴라가 이번에는 단단히 화가 나서 토라졌습니다. “당신의 마음이 내게 있지 않은 것 같아요. 나를 사랑한다면 어떻게 나를 세 번씩이나 희롱할 수 있어요? 나를 사랑한다면 당신의 큰 힘이 무엇으로 말미암아 생기는지 말해주지 않았겠어요?” 들릴라가 날마다 졸라대므로 삼손이 번민이 되어 죽을 지경에 빠졌습니다.
삼손이 마음이 흔들려서 드디어 자기 마음을 드러냈습니다. “내 머리가 밀리면 내 힘이 내게서 떠나가고 나는 약해져서 다른 사람과 같이 될꺼요.” 그러자 들릴라가 삼손에게 자기 무릎을 베고 잠자게 했습니다. 그리고 머리털을 밀고 시험적으로 괴롭혀보니 힘이 없어진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자 블레셋 사람들이 삼손을 붙잡아 눈을 빼고 끌고 갔습니다. 그리고 옥에서 맷돌을 돌리게 했습니다.
삼손의 힘은 어디에서 나왔습니까? 자기 자신의 힘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육체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이때 사용한 ‘힘’이란 단어도 아모스서와 시편과 본문에서 사용한 단어와 똑같은 ‘코아흐’입니다. 이처럼 힘은 누구에게서 나온 것이냐에 따라 전혀 다릅니다. 인간에게서 나온 힘은 나약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힘을 사용하실 때 천지를 창조하시고 천체를 운행하시는 능력이 나타납니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우리를 구원해주시고 우리에게 힘을 주시는 능력이 나타나게 됩니다.
이처럼 ‘코아흐’는 ‘힘’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그러나 또 다른 뜻이 한 가지 더 있습니다. 무슨 뜻일까요? 구약 성경에 단 한번 사용되었습니다. 레위기 11장 30절입니다. “도마뱀붙이와 육지 악어와 도마뱀과 사막 도마뱀과 카멜레온이라.” ‘육지 악어’로 번역된 단어가 바로 ‘코아흐’입니다. 이때 사용한 코아흐의 뜻은 ‘작은 파충류’입니다. ‘육지 악어’라고 해서 우리가 알고 있는 커다란 악어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구절에서 말하고 있는 것은 도마뱀의 종류를 말하고 있으므로 육지 악어도 커다란 악어가 아니라 작은 도마뱀의 일종을 말합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해주고 있습니까? 똑같은 힘이라도 인간이 가진 힘은 작은 도마뱀처럼 연약하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실 때는 놀라운 힘이 된다는 말입니다. 삼손이 힘이 있고 대단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힘을 주실 때 삼손이 힘있는 용사가 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남녀노소 모두 해당됩니다. 어리고 젊었다고 해서 힘이 있고 나이가 들었다고 해서 힘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힘이냐 아니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새 힘으로 말미암아 나이와 상관없이 힘 있게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삼손이 아무리 젊고 힘이 있어도 맥을 추지 못한 것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하나님께서 주시는 힘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늙고 힘이 없어도 하나님께서 힘을 주시면 무엇이든 할 수 있습니다. 모세가 몇 세부터 일하기 시작했습니까? 젊고 유능한 이십대에? 아니면 삼십대에? 아니면 사십대에? 모두 아닙니다. 지팡이나 짚고 다니는 다 늙은 80세에 쓰임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나이가 젊다고 패기만만하거나 나이가 많다고 포기하지 맙시다. 젊든지 나이가 많든지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내려주시는 새 힘을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나이가 많아도 “팔팔”하게 쓰임을 받았던 인물이 모세 이외에 또 한 사람이 더 있습니다. 갈렙입니다. 가나안 땅을 분배할 때 여호수아에게 건의했습니다. 여호수아 14장 10절 하반절에서 12절에 나옵니다. “오늘 내가 팔십오 세로되, 모세가 나를 보내던 날과 같이 오늘도 내가 여전히 강건하니 내 힘이 그 때나 지금이나 같아서 싸움에나 출입에 감당할 수 있으니, 그 날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이 산지를 지금 내게 주소서 당신도 그 날에 들으셨거니와 그 곳에는 아낙 사람이 있고 그 성읍들은 크고 견고할지라도 여호와께서 나와 함께 하시면 내가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들을 쫓아내리이다.”
하나님께서 다 늙은 갈렙과 함께 하시므로 힘이(코아흐) 넘쳐서 나이가 팔십 오세가 되어서도 왕성하게 일할 수 있었습니다. 14절에 보면 “헤브론이 그니스 사람 여분네의 아들 갈렙의 기업이 되어 오늘까지 이르렀으니 이는 그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온전히 좇았음이라.” 이렇게 하나님을 앙망하고 온전히 따르는 사람은 나이와 상관없이 쓰임을 받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앞으로 우리 세대는 100세 시대를 대비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건강관리, 직업관리, 학업관리, 실력관리, 체력관리, 재정관리 등을 잘 해야 합니다. 특히 신앙관리를 더욱 더 잘해야 합니다. 열심히 살고 열심히 교회에 다녀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 이런 삶을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어디에서 이런 힘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그 힘은 어디에서 나오겠습니까? 본문 31절이 대답해줍니다.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아멘.
우리가 천지를 창조하시고 천체를 운행하시는 권능의 하나님을 믿고 기대하면 그 하나님께서 우리의 나이와 아무 상관없이 우리에게 새 힘을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하나님을 잘 배우시고 잘 아시고 하나님을 잘 앙망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셔서 그 하나님께서 주시는 새 힘을 얻어 생애관리와 신앙관리를 잘 하시면서 힘차게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2011 참좋은제자들교회 https://cafe.daum.net/truegooddisciples/IPZB/58 담임목사 이서영]
'성경적강해 > 주일설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천국과 지옥과 재림의 복 (계 22:12-21) (0) | 2015.07.17 |
---|---|
기다림의 복 (벧후 3:8-9) (0) | 2015.07.17 |
서로 기도하라 (약 5:13-16) (0) | 2015.07.17 |
행동하는 믿음 (출 9:13-24) (0) | 2015.07.17 |
명절에 찾아오신 왕 (요 12:12-15) (0) | 2015.07.17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