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과 재림의 복 (계 22:12-21)
예수님을 믿고 나면 많은 큰 복을 받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영생을 받고 사랑하는 주님과 함께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행복하게 천국에서 영원히 사는 것이 가장 큰 복입니다. 그리고 이 땅에 사는 동안 신앙생활을 잘하고 가정이 잘 되고 하는 일이 잘 되고 건강하면 복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것을 복으로 여기고 복을 받으려고 합니다. 이것은 분명히 복이 맞습니다. 우리는 이 복을 많이 받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복을 많이 받으시길 바랍니다.
그런데 우리가 좀 더 생각해봐야할 복도 있습니다. 우리는 복이라고 생각하면 먼저 천국에 가는 복을 떠올립니다. 그것은 잘 기억합니다. 그러나 지옥이 복이란 것은 생각하지 않습니다. 밤이 있으면 낮이 얼마나 좋은지 알 수 있습니다. 어두운 세상에 살다보면 밝고 깨끗한 세상이 얼마나 좋은지 깨닫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지옥을 생각해보면 천국이 얼마나 귀하고 좋은지 깊이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지옥에 가지 않는 것이 얼마나 크고 좋은 복인지 깊이 깨달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잘 먹고 잘 사는 것만이 복이 아닙니다. 복음은 천국만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은 천국과 지옥과 재림과 심판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윌리엄 핸드릭슨은 복음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복음은 매우 중요한 대목, 즉 심판을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는 영광스러운 날, 주의 모든 자녀들에게 놀라운 기쁨이 되는 그 날에 대한 대목이 없이는 완전할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재림이 없고 심판이 없고 지옥이 없다면 천국은 영원토록 없을 것입니다. 천국이 천국이 되려면 죄와 악이 없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죄와 악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재림과 심판과 지옥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없다면 천국이 될 수 없기에 복음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대구 동신교회 담임이자 전 총신대교수인 권성수 목사는 복음의 범위를 이렇게 정의합니다. “바울이 전한 복음은 은혜의 복음이지만 만인에 대한 심판을 포함하는 복음입니다.” 우리는 이제 새로운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천국만 복음이 아니라 재림과 심판과 지옥도 복음인 것을 잘 알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이 복음이 되고 복이 되는 것은 지옥 때문에 우리가 얼마나 놀라운 큰 복을 받고 있는지를 잘 깨달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를 보면 부자는 지옥에서 나사로는 천국에서 서로 보고 있었습니다. 나사로는 천국에서 지옥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곳인가를 보고, 부자는 지옥에서 천국이 얼마나 좋은 곳인가를 서로 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서로 볼 수만 있었지 서로 오고 갈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지옥에 있는 사람은 천국에 가지 못해 더 큰 고통을 느낍니다. 그런데 천국에 있는 사람은 지옥에 가지 않은 것이 얼마나 큰 복인지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지 않고 지옥에 가는 사람은 엄청난 화를 당하지만 예수님을 믿는 성도는 지옥에 가지 않으니까 어마어마한 복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에 계신 모든 분들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예수님을 믿어 이 복을 놓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본문과 본문의 앞을 자세히 들여다볼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속히’ 오신다는 말씀입니다. 7절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12절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20절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그리고 또 살펴볼 말씀이 있습니다. 6절 “그의 종들에게 반드시 속히 되어질 일을 보이시려고” 1:1절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주목해야 할 단어는 ‘속히’입니다. 이 말씀을 처음과 마지막에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즉시 들이닥친다는 의미일까요? 그렇다면 이 말씀을 기록한지 벌써 2천년이 지났는데도 아직도 예수님은 오시지 않으셨으니 너무 더딘 오시는 것은 아닐까요? 속히 될 일을 보이시고 속히 오시겠다는 말씀은 “너무 늦기 전에 지금 즉시” 기록된 이 말씀을 믿으라는 뜻입니다. 이것이 더 큰 의미일 것입니다.
지옥에 간 사람들의 공통점이 무엇일까요?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에 나오는 부자를 보면 후회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어야 했는데, 죄 짓지 말아야 했는데, 회개해야 했는데.’ 기회를 놓치고 후회하는 것이 지옥에 간 사람들의 공통점입니다. 우주로켓을 발사할 때 카운트 다운합니다. “3, 2, 1, 0, 발사” 그때 우주비행사가 급하게 말했습니다. “아, 잠깐만 멈춰주세요, 깜빡 잊고 집에 중요한 수첩을 두고 왔어요.” 어림도 없습니다. 이미 발사되어 눈 깜짝할 사이에 벌써 수십 킬로미터 상공으로 치솟아 버렸습니다. 그러므로 너무 늦기 전에 살아있을 때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다음에 믿을께요.” “내일 믿을께요.” 아닙니다. 로켓이 발사하면 끝이듯이 우리 인생도 죽으면 예수님을 믿을 기회가 사라집니다. 그러므로 너무 늦기 전에 지금 즉시! 지금 즉시입니다!
나로호에 대한 것을 다음의 ‘위키 백과’를 통해 알아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나로호(羅老號, NARO) 혹은 KSLV-I(Korea Space Launch Vehicle-I)는 대한민국 최초의 우주발사체이며, 나로호는 나로우주센터가 위치한 지역인 외나로도를 따서 나로라 이름을 지었습니다. 나로호가 2009년 8월 19일 오후 5시로 발사가 시도되었으나, 발사 7분 56초를 남기고 고압탱크 압력측정 소프트웨어 결함으로 인하여 자동으로 발사 중지 명령이 내려졌습니다. 이 때문에 발사가 연기되어 2009년 8월 25일 오후 5시 재발사하였습니다.
하지만 페어링 분리실패로 발사이륙 9분 뒤 고도 306㎞에서 과학기술위성 2호와 분리됐어야 했지만, 고도 340㎞ 상공에서 분리된 것으로 나타나 예상한 고도보다 약 36km정도 더 올라가서 분리되었습니다. 나로호 발사는 성공적이었으나 과학기술위성 2호 발사는 실패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2010년 6월 10일 오후 5시 1분 2차 발사를 하였습니다. 초당 7.9㎞(제1우주속도) 속도로 날아갔습니다. 그러나 이륙 137.19초 고도 70km 지점 페어링 분리가 확인이 안 되었고 통신이 두절 되었습니다. 정부는 러시아에서 개발한 나로호 1단이 연소되는 구간에서 폭발한 것으로 보고 나로호 공동개발 계약에 따른 나로호 3차 발사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이런 가정을 해 볼 수 있습니다. 나로호가 발사되는 순간 내장된 컴퓨터가 페어링 분리장치가 고장이 난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본부로 송신했습니다. “페어링 장치가 잘못됨. 다시 송환바람.” 그러나 이미 발사되었기에 붙잡을 수 없습니다. 알고도 속수무책입니다. 그러므로 발사하기 전에 고쳐야 합니다. 최초 1차 발사 때 결함을 발견하고 자동으로 발사중지 명령을 내려서 발사를 중단한 것처럼 우리 인생도 죽기 전에 지옥 가기 전에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후회하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다음에 믿지요.” 자기 자신이 죽을 날짜를 잘 알고 있습니까? 아무도 모릅니다. 언제 내 인생이 끝날지 모르는데 다음을 어떻게 보장할 수 있습니까? 태어나는 순서는 있어도 죽는 순서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미루지 마시고 지금 즉시 예수님을 믿고 영접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은 성경책 마지막에 기록된 말씀입니다. 본문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예수님께서 다시 오신다는 것입니다. 복은 천국에 가는 복과 지옥에 가지 않는 복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또 다른 복이 하나 더 있습니다. 재림의 복입니다. 7절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12절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20절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예수님께서 다시 오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다시 오실까요?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천국에 들어가는 복과 지옥에 들어가지 않는 복을 누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재림하셔서 심판해주실 때 완벽한 천국이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천국도 지옥도 재림도 그 무엇도 복이 될 수 없습니다. 모두가 화가 됩니다. 그 좋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해 화가 되고 재림 때 심판을 받으니까 화가 되고 그리하여 마침내 영원히 지옥에 살아야 하니 화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 성도는 다시 오시는 예수님을 두려움이 아니라 기쁜 마음으로 기다리는 복을 받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는 날은 천국과 지옥의 갈림길 앞에서 천국으로 가게 되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그 날에 진정으로 영원한 복을 받습니다. 살아도 천국, 죽어도 천국이 됩니다. 이처럼 예수님을 믿는 성도에게 있어서 재림은 복이 됩니다.
프란시스 쉐퍼는 재림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로마서 2:16절의 말씀은(‘나의 복음에 이른 바와 같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그날이라’) 우리에게 언젠가는 역사적인 심판의 날이 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일깨워줍니다. 바울은 이러한 메시지가 관념적인 것으로 남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바울은 역사의 어느 날, 시간과 공간 속에서 하나님이 심판을 위해 강림하시는 날이 있으리라는 구체적이고 피할 수 없는 사실을 전합니다.”
스펄전 목사도 심판에 대해 말했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은밀한 부분을 심판하시지 않으신다면, 하나님께서 의롭게 심판하시지 못할 것입니다.” 은밀한 것을 모르고 심판한다면 그 심판은 정당하지도 올바르지도 정확하지도 않는 심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은밀한 것까지도 심판하셔서 의로운 것입니다. 예수님은 일곱 교회를 향해 “내가 아노니”(2:1-3:22)라고 하셨습니다. 알고 계신다는 것에 많은 위로와 평안을 누리게 됩니다. 억울한 일을 당하고 있는 것과 힘든 일을 겪고 있는 것과 여러 가지 나의 모든 생각과 말과 마음과 행동의 모든 것을 아시고 계시니 안심이 됩니다. 사람들은 잘 알아주지 못하나 주님은 모든 것을 알아주시니까 얼마나 감사합니까? 모든 것을 선하게 갚아주시고 공정하게 갚아주시니 얼마나 의롭습니까? 공정하게 심사하시고 정확하게 심사하시고 은밀한 것까지도 심사해주시니 그분의 지혜와 권능이 얼마나 크십니까?
지금 세계 곳곳에서 재림의 징조들이 많이 보입니다. 그러나 정확한 시간이나 날짜는 모릅니다. 다만 이전에 없었던 큰 재앙들이 자주 일어나고 있기에 재림이 과거보다 더 가깝게 다가왔다는 추측이 가능합니다. 종말이 되면 어떤 현상이 일어날까요? 전염병, 전쟁, 지진 등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이것은 시작에 불과하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막 13:8). 최근 몇 년 사이에 전 세계적으로 큰 지진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인도네시아, 아이티, 중국, 칠레, 뉴질랜드, 심지어 일본에서도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조용하던 우리나라도 지진이 일어나고 우리가 살고 있는 부산에서도 지진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인간은 연구하고 개발하면 무엇이든 잘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지진 하나 제대로 다룰 줄 모릅니다. 그래서 쓰나미가 다 쓸어가도 보고만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발만 동동 구를뿐 속수무책입니다. 지진이 나서 도시 전체를 불태워버려도, 심지어 원전 폭발이 일어나도 공포 속에 벌벌 떨기만 할뿐 손을 쓸수 없습니다. 트위터도 대재앙 앞에서는 무용지물입니다. 도와 달라고 해도 도울 수 없는 상태요, 더군다나 쑥대밭이 되어버리고 이미 죽어버린 사람에게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렇게 자랑하던 첨단 과학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엄청난 피해 앞에서 우리는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습니다. 슬퍼하며 괴로워하고 안타까워할 뿐입니다. 볼 때마다 너무 애석하고 위로의 기도를 하게 됩니다. 우리가 사는 지구에 더 이상 이런 재앙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인간의 문제는 하나님처럼 되려고 바벨탑을 쌓는 교만의 문제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대자연을 다스릴 수 없습니다. 오히려 인간이 만든 구조물 때문에 깔려서 다치거나 죽기까지 합니다. 평소 잘 타고 다니던 자동차, 살고 있던 집, 전기로 사용하던 원전 등이 오히려 지진 앞에서는 흉기로 돌변합니다. 이것이 인간의 한계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결정권과 통치권을 가지신 살아계신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분 앞에 납작 엎드려야 합니다. 그런데 종말의 현상은 자연재해만이 아닙니다. 사람의 성품과 행동 역시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종말 현상이 두드러지고 있습니다(딤후 3:1). 동성애도 전 세계에 합법화되고 우리나라마저 합법화시키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종말의 현상 속에서 우리는 너무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재림이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에게는 복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스펄전 목사는 이렇게 설교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것입니다. 심판이 임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드러날 것입니다. 이 사실이 전파되지 않은 곳에는, 제가 담대히 말하건대, 복음이 전파되지 않은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는 데에는 사람들이 그들의 죄 가운데서 계속 행하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경고를 받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제가 사람들로 단잠이 들도록 엉터리 낙원에 가두어 놓아야겠습니까? 제가 부드럽게 설교함으로 그들이 저주받도록 도와주는 자가 되어야 하겠습니까? 저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렇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바울의 복음이 진실한 것이 확실한 만큼 심판도 반드시 임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예수님을 믿어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면하시기를 바랍니다.
본문에서 주목해야 할 또 다른 말씀은 17절에 나오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는 말씀입니다. 특별히 ‘값없이’라는 말씀에 주목해야 합니다. 이 말씀을 살펴보기 전에 먼저 12절부터 보겠습니다.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 예수님께서 갚아줄 상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이때 ‘상’은 ‘품삯, 임금’을 의미합니다. 행한 것에 따라 보상과 형벌이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기준으로 어떻게 갚아주십니까? 14절을 보면 성 안에 들어가는 사람을 볼 수 있고, 15절을 보면 성 밖에 있는 사람을 볼 수 있습니다. 자기 두루마리를 빠는 사람은 성 안으로, 개들과 점술가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사람은 성 밖에 있습니다. 사람이 행한 대로 보상과 형벌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성도의 상태는 어떻습니까? 어디에 해당될까요? 죄를 짓지 않을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두루마리를 빤다는 것은 회개를 한다는 것인데(계 19:8, 깨끗한 세마포 옷은 성도의 옳은 행실을 말합니다) 살면서 지은 죄를 빠짐없이 회개할 수 있습니까? 잘못한 것을 알고 있는 죄도 회개 안할 때가 있습니다. 자기 감정을 못이기는 경우입니다. 때론 까맣게 모르고 있는 죄도 많습니다. 성령님께서 양심에 분별력을 비춰주지 않으시면 죄가 죄인줄도 모르고 반복해서 죄를 짓고 회개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성안에 들어갈 사람이 아무도 없어 보입니다. 성 밖에 있는 사람들처럼 불순종하면 성 안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완벽하게 순종할 수 있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순종을 통해 들어가기가 어렵습니다.
성도들은 성 안에 들어가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성 밖에 있는 것은 신앙과 불신앙의 차이, 생명책에 기록된 차이입니다(20:12-15). 예수 그리스도를 기준으로 각자 다른 곳에 있게 된 것입니다. 제임스 몽고메리 보이스는 이런 상태를 다음과 같이 묘사했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태어날 때부터 두 번째 운명, 즉 하나님도 없고 소망도 없이 비참하게 멸망할 운명에 처합니다(참조 엡 2:12). 그러나 예수님은 전혀 다른 운명이 가능하도록 만들기 위해서 죽으셨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우리가 죄에 대해서 형벌을 대신 받으시고 우리 대신 죽으신 속죄의 길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종국입니다.”
3월 9일부터 사순절이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고난을 받으신 이유가 무엇인가요? 두루마리를 빤다는 것은 회개를 뜻하기도 하지만 더 큰 진정한 의미는 예수님을 통해 죄책이 제거된 것을 말합니다. 윌리엄 핸드릭슨은『요한계시록 성경주석』에서 이 사실을 잘 해석해주고 있습니다. “이 옷으로 말하면 이 땅에 있는 어떤 세제일지라도 무용합니다. 그 어떤 것으로도 옷을 깨끗게 해낼 수 없습니다. 예레미야 2:22절의 매우 놀랍고도 아름다운 구절을 읽어 봅시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네가 잿물로 스스로 씻으며 네가 많은 비누를 쓸지라도 네 죄악이 내 앞에 그대로 있으리니.’ 그런데 하나님께서 한 처방을 마련하셨습니다. 두루마리를 빤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깨끗케 하는 샘에 의지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 예수님께서 17절을 보면 우리를 향해 “오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이사야 55장 1-3절에 예언된 말씀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혼인잔치에 오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예복을 입으라고 하십니다. 유월절 어린 양이신 예수님의 피로 씻은 옷(계 7:14)을 입으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그 옷을 입혀주셨습니다. 이 모든 것은 주 예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값없이’라는 말씀이 특별한 것입니다. 우리가 치른 것 아니라 예수님께서 치렀기 때문입니다. 스펄전은 “오라”는 예수님의 초청에 응답하라고 이렇게 설교했습니다. “그러므로 오, 죄인들이여, 오늘, 예수님께로 달려가십시오. 오, 여러분 성도들이여, 대속의 희생이란 진홍 지붕 밑으로 여러분의 몸을 다시 숨기십시오.”
윌리엄 핸드릭슨은『요한계시록 성경주석』에서 이렇게 해석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특히 강조된 것은 ‘값없이’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영광스러운 주권자의 은혜입니다. 이것은 생수가 절대 필요하도록 느끼게 된 모든 사람에게 전달되는 부드럽고 감동을 주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지체하지 맙시다. 속히 그에게 나아갑시다. 나아가서 잡으십시다. 이것은 값이 없습니다. 그가 이미 지불하셨습니다. 우리는 그에게로 가서 마시기만 하면 됩니다.”
여기에 대한 우리의 반응은 어떠해야 할까요? 20절을 보면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이 말은 아람어 인사로 ‘마라나타’입니다. 윌리엄 핸드릭슨은『요한계시록 성경주석』에서 이 말씀을 해석해주고 있습니다. “이들은 끊임없이 ‘오시옵소서’라고 간구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현재명령법이라는 점을 유의합시다. 이것은 우리 주님의 재림의 실제로 일어난 사건 뿐 아니라 이 사건에 앞서 진행 되는 모든 역사의 과정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당신의 재림을 위하여 역사 속에서 당신의 모든 계획을 이루소서’라는 뜻입니다. 모든 수단과 도구를 통하여 당신의 계획이 성취되고 당신의 오심이 속히 이루어지기를 기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는 주님을 만나 뵈옵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원하고 있습니다. 어서 오시기를 원합니다”라고 반응해야 할 것입니다.
아이들에게 전도할 때 그 가운데 부잣집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 아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 집보다 천국이 더 좋아요?” 육신의 복은 하나님을 숨기고 하나님 나라를 숨깁니다. 점점 더 발견하기 어렵게 만듭니다. “속히 오시옵소서”가 아니라 “이제 살만하니까 더디 오시옵소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고통을 당하면 고통을 통해 영의 복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고통이 많은 것은 천국을 기다리게 하기 위한 것이다.” 환난을 당한 후에 비로소 하나님을 발견하게 됩니다. 잘 나갈 때는 안하무인입니다. 하나님도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고통을 받게 되면 변화 받습니다. “하나님은 마른 눈이 아니라 젖은 눈으로만 보인다”는 말이 있습니다. 젖은 눈이라야 비로소 하나님이 보이고 사람이 보입니다. 깨어지고 낮아지니까 잘 보이는 것입니다.
넌센스 퀴즈입니다. “눈물 젖은 빵을 먹지 않은 사람은 인생을 논할 수 없다?” 누가 말했을까요? 풀빵 장수입니다. 괴테(von. Goethe)가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Wilhelm Meisters Lehrjahre)』라는 책에서 말했습니다. “자기의 빵을 눈물 흘리며 먹어보지 않은 사람, 근심으로 가득한 밤에 자기 잠자리에서 울어보지 않은 사람은, 너를 모른다.” 우리는 고통을 통해 변화를 받고 눈물을 통해 비로소 영의 눈이 떠져서 비로소 하나님이 보이게 되고 고통 가운데 있는 옆의 사람이 보이게 됩니다.
어떤 분의 간증입니다.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지난 날에는 육신의 고통 때문에 원망불평하면서 울보로 살았습니다. 그러나 변화되자 역시 울보로 살게 되었습니다. 고통을 통해 영적인 복의 통로를 발견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천국을 바라보게 되었고, 지옥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알게 되었고, 예수님을 기다리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육신의 것 때문에 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해서 울고 감사해서 웁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다시 만나고 천국에 들어가는 복과 지옥에 들어가지 않는 복과 재림하셔서 공정하게 판단해주시고 예수님의 피로 깨끗하게 해주시는 복을 생생하게 실감하게 되면 우리는 울보가 될 것입니다. 아니, 그 때뿐만이 아니라 지금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도 우리는 그 복을 깊이 체험하고 울먹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예수님을 믿고 이 모든 복에 감격해서 펑펑 우는 영적인 울보가 되지 않으시겠습니까?
[2011 참좋은제자들교회 https://cafe.daum.net/truegooddisciples/IPZB/60 담임목사 이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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