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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적강해/주일설교

약한 것을 택하시는 하나님 (고전 1:26-31)

by 이서영 목사 2015. 7. 17.

약한 것을 택하시는 하나님 (고전 1:26-31)

 

  수수께끼를 한 개 내겠습니다. 젖소와 강아지가 싸우면 누가 이길까요? 강아지가 이깁니다. 왜지요? 강아지가 소에게 말합니다. “너 졌소.” “나 강하지.” 세상은 약육강식(弱肉强食)입니다. 약한 자가 강한 자에게 먹힌다는 원리입니다. 영어로는 “the law of the jungle”인데 정글의 법칙입니다. 강한 자만이 살아남는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그런 식으로 돌아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약한 자가 강한 자를 이깁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이 마음대로 주무르는 나라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통치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기에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나라는 약한 자가 강한 자를 이길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존재는 한없이 강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얼마나 강하실까요? 한 가지만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친 백성인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시킬 때 모세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출애굽기 6장 1절입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제 내가 바로에게 하는 일을 네가 보리라 강한 손으로 말미암아 바로가 그들을 보내리라 강한 손으로 말미암아 바로가 그들을 그의 땅에서 쫓아내리라.” 하나님의 능력은 그 당시 세계에서 최고로 강력한 애굽나라의 바로 왕도 굴복시킬 정도로 강하셨습니다. 얼마나 다급했으면 쫓아낼 정도로 내보냈겠습니까?

 

  이렇게 하나님은 강하신 분이시기에 강한 자를 좋아하실 것 같지만 아닙니다. 하나님은 한없이 약하기도 하신 분이십니다. 온 우주만물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매우 강력한 능력을 가지신 하나님이시지만 스스로 약해지셨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약함을 나타내주셨습니다. 고린도후서 13장 4절에서 말씀해주십니다.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 계시니 우리도 그 안에서 약하나 너희에게 대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와 함께 살리라.” 아멘.

 

  우리는 지금 예수님께서 수난을 받으신 수난절 기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얼마나 큰 수난을 받으셨는지, 예수님께서 무엇 때문에 그 큰 수난을 당하셨는지 깊이 깨닫는 기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스스로 약해지셔서 십자가에서 꼼짝하지 않으시고 죽으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정말로 약하기 때문에 죽으셨습니까?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십자가에 박힌 못을 쑥쑥 뽑아버리고 십자가를 번쩍 들어서 산산조각내실 수도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스스로 약해지시고 죽으신 것은 순전히 우리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우리의 모든 죄와 허물과 연약함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시기에 십자가를 끝까지 포기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왜 십자가를 바들바들 떨면서도 굳세게 붙잡으셨을까요? 그 이유는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마치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나는 너를 사랑한다. 내가 너를 위해 이 십자가를 결코 놓지 않고 꼭 붙잡고 있다.”

 

  예수님은 이처럼 자청하여 약해지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여전히 강하신 분이십니다. 능력의 하나님이십니다. 결코 약하신 분이 아니십니다. 다만 우리를 위해 약해지신 것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크고 위대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돌아가신 예수님을 그대로 버려두지 않으셨습니다. 약한 채로 그냥 내버려두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다시 살려내시고 죽은 자들의 첫 열매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연약한 우리의 문제도 해결해주셨습니다. 그의 능력으로 우리를 거듭나게 해주셨고 마지막 날에는 다시 살아나게 해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강하시지만 약자의 편에서 일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강한 자만을 위하지 않으시고 약한 자를 선택하시고 돌보십니다. 본문 1장 27절과 28절을 모두 함께 읽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아멘.

 

  하나님께서 강자는 오히려 낮추시고 약자를 택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약한 자를 들어 사용하십니다. 우리는 기드온 용사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기드온이 진정 용사였을까요? 아닙니다. 그는 약체였습니다. 기드온은 약해빠진 겁쟁이였습니다. 사사기 6장 11절과 12절을 보면 기드온이 적군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밀을 포도주 틀에서 몰래 타작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 그에게 하나님의 사자가 나타나서 말했습니다. “큰 용사여” 어처구니가 없는 말입니다. 숨어서 타작하는 겁쟁이를 보고 큰 용사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기드온은 천사가 말해도 믿지 않았습니다. 15절에 대답한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오 주여 내가 무엇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리이까 보소서 나의 집은 므낫세 중에 극히 약하고 나는 내 아버지 집에서 가장 작은 자니이다.” 그런 기드온이 왜 큰 용사가 될 수 있었습니까? 천사가 12절에 한 말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큰 용사여”라고 부른 다음에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라고 했습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겁쟁이 기드온이 큰 용사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약한 자를 택하시는 하나님께서 함께 해주셨기 때문입니다.  

 

  기드온이 용사가 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그런 약한 기드온을 선택하셨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약하다고 생각한 기드온을 향해 하나님께서 보다 분명한 약속을 해주셨습니다. 16절입니다.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하리니 네가 미디안 사람치기를 한 사람을 치듯 하리라.” 그러자 약체인 기드온이 그의 군사 300명과 함께 사람들이 메뚜기 떼처럼 많고 낙타의 수가 해변의 모래같이 많은 미디안과 아말렉과 동방의 모든 연합군 십이만 명을 죽이고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도망치던 남은 만 오천 명 가량의 뒤도 따라가서 세바와 살문나 왕을 사로잡고 온 진영을 격파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연약한 기드온을 사용해주시고 이스라엘 민족을 지켜주셨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왜 선택해주셨을까요? 세계적으로 강하고 똑똑한 민족이기 때문일까요? 아닙니다. 신명기 7장 7절은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기 때문이 아니니라 너희는 오히려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 하나님께서 택하신 이유가 강하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가장 적고 약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약한 자를 들어 사용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은 그때나 지금이나 조그마한 나라입니다. 사방팔방으로 이스라엘과는 위험천만한 나라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작은 나라요 벼랑 끝의 나라입니다. 황량한 사막과 산악이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민족이 되자 결코 작거나 약하지 않은 나라가 된 것입니다. 오늘날까지 세계의 정치, 경제, 과학 등의 중요한 분야에서 이스라엘 민족을 앞서는 민족은 없습니다. 세상의 눈으로 보면 작고 약해보였지만 영적으로는 엄청나게 크고 강한 민족이요 영적 용사인 민족이었던 것입니다.   

 

  우리나라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50년 전만 하더라도 대한민국을 주목한 나라가 어디에 있었습니까? 6·25 전쟁이 일어난 가난한 나라라는 정도만 알고 있어도 많이 알고 있는 정도였습니다. 그러던 나라가 지금은 세계 20위 안에 드는 선진국으로 바뀌었고 더 나아가 전 세계적인 한류 열풍이 불고 있습니다. 우리의 형편도 이스라엘과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지하자원이 열악한 나라입니다. 세계에서 유일한 분단국가로 전쟁의 위험이 언제든지 있어왔습니다. 세상의 눈으로 볼 때 대한민국은 보잘 것 없었던 나라였습니다. 그런데 약한 것을 택하시고 들어 사용하시는 하나님께서 대한민국과 함께 하시자 놀라운 힘을 발휘하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처지나 형편이 어렵고 힘드십니까? 모든 것이 약해보이십니까? 절망적인 상황에 놓여있습니까? 그러나 실망하지 맙시다. 우리에게도 희망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약함은 오히려 하나님께서 일하시기 좋은 때가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자칭 의인이나 자칭 강자는 오히려 물리치십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을 스스로 낮추고 부족하다고 여기는 약자에게는 찾아오셔서 역사해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모든 연약함을 잘 아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해주시고 크게 들어 사용해주실 줄로 믿습니다.

     

  이런 수수께끼가 있습니다. “병든 자여, 다 내게로 오라.” 이 말은 누가 했을까요? 예수님이십니까? 아닙니다. 수수께끼입니다. 엿장수입니다. 그런데 수수께끼가 아니라 실제로 병든 사람을 오라고 하신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우리가 연약할수록 더욱 귀히 여겨주십니다(새찬송가 563장 3절). 마가복음 2장 17절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아멘. 예수님은 건강하고 강한 사람이 아니라 병들고 약한 사람에게 찾아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약함은 약함이 아닙니다. 그리고 양육강식의 법칙이 통하지도 않습니다. 정글의 법칙도 적용되지 않습니다. 우리의 약함이 오히려 강함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약할수록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에게 더 많이 역사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약함을 통해 하나님의 능력이 더욱 더 크게 드러나게 됩니다. 고린도후서 12장 9절에서 사도 바울이 그런 고백을 하였습니다.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의 능력은 약한데서 온전하여진다”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약함 때문에 근심하고 걱정하십니까? 외모나 배운 것이나 가진 것이나 건강으로 보나 나이로 보나 약하기 때문에 실의에 빠져 있습니까?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십니까? 그러나 우리는 결코 약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면 우리의 약함은 오히려 강함이 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4장 7절에 고백하였습니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약할 때 강함 되시네”라는 복음송이 있습니다. 함께 불러 보겠습니다. “1절 : 약할 때 강함 되시네, 나의 보배가 되신 주, 주 나의 모든 것, 주안에 있는 보물을 나는 포기할 수 없네, 주 나의 모든 것, 예수 어린양 존귀한 이름, 예수 어린양 존귀한 이름.” “2절 : 십자가 죄 사하셨네, 주님의 이름 찬양해, 주 나의 모든 것, 쓰러진 나를 세우고 나의 빈잔을 채우네, 주 나의 모든 것, 예수 어린양 존귀한 이름, 예수 어린양 존귀한 이름.”

 

  “약함은 하나님의 능력이 역사하는데 필요한 전제조건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약함 속에 강해진다는 법칙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인간의 약함 속에서 역사합니다. 27절의 ‘약한(아스데네스)’이란 형용사는 부정접두사 ‘아’와 ‘스데노스(힘)’에서 유래했습니다. 힘의 반대를 말하는데 ‘힘이 없는, 강하지 않는’ 등의 뜻입니다. 이 단어를 번역한 히브리어로는 창세기 29장 17절에 나옵니다. “레아는 시력이 약하고(라크, 약한)”라고 했습니다. 레아는 곱고 아리따운 라헬보다 외모는 약했지만 영적으로는 유다와 같은 훌륭한 아들을 많이 낳았습니다. 결코 라헬에 비해서 약한 것이 약한 게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 역시 신체적으로 약했습니다. 눈이 좋지 않았고(갈 4:15) 질병도 있었습니다(고후 12:7). 또한 말주변도 뛰어나지 못했습니다. 고린도후서 10장 10절에 사도 바울이 인정했습니다. “그들의 말이 그의 편지들은 무게가 있고 힘이 있으나 그가 몸으로 대할 때는 약하고 그 말도 시원치 않다 하니.” 말도 시원찮은 사도 바울이었지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므로 그 누구보다도 능력 있는 사도가 된 것입니다. 부모님도 어려움에 처하고 약한 자녀에게 더 많은 마음을 쏟고 도와주십니다. 하나님께서도 이처럼 약한 자를 택하시고 돌보십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을 어떻게 평가했을까요? 디모데전서 1장 15절을 보면 죄인 중에 괴수라고 했습니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하나님은 이처럼 약한 자에게 찾아오셔서 강하게 하십니다. 본문 1장 27절과 28절을 다시 한 번 더 읽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약한’ 자를 택하십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어떤 단어를 보면 하나님께서 자신의 친 백성을 특별하게 구별하신 것을 보다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택하사’라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본문에 몇 번 나올까요? 27절에 두 번, 28절에 한 번, 모두 세 번 나옵니다. 택한 사실이 분명하기에 세 번씩이나 강조하신 것입니다. 확실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히브리식 강조법입니다. 우리나라도 이와 비슷한 말이 있습니다. 삼세판입니다. 이기고 지는 것을 확실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삼중으로 강조한 것은 택한 사실이 너무나도 분명하다는 것입니다. 지혜와 강함과 명예는 부끄럽게 하시고 오히려 약하고 천하고 가지지 못한 사람들은 택했다는 것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바로 이렇게 연약한 사람들의 것입니다. 

 

  그리고 ‘택하사(엑셀렉사토)’라는 단어의 문법을 보면 ‘중간태(middle voice)’입니다. 중간태는 헬라어에 나타나는 독특한 특징입니다. 중간태는 주어를 묘사하되 그 동작의 결과에 참여하는 주어로 묘사됩니다. 주어가 결과에 참여하므로 능동태는 동작 자체를 강조하지만 중간태는 동작의 주인공을 강조하고 동작하는 것과 동작하는 주격을 밀접하게 관련시킵니다. 단순히 택한다는 동작을 그려줄 뿐만 아니라 택하시는 하나님을 보여주십니다. 마치 계약서를 체결하는 것과 같습니다. 내가 상대방과 계약하지만 계약한 결과 나도 계약 결과에 영향을 받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택하시기만 하고 끝이 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택한 결과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뗄 수 없는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된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끊어질 수 없는 관계라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 35-39절에서 확증하고 있습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그 무엇도 밀접한 관계가 된 것을 끊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택하실 때 이미 우리를 택해주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택하사’의 문법상 시제를 보면 과거형입니다. “앞으로 택할 것이다”가 아닙니다. “지금 택하고 있다”도 아닙니다. 이미 벌써 택하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생각하시기에 하나님께서 얼마나 앞서서 택해주셨다고 생각하십니까? 시편 71편 6절을 보면 모태에서부터 택해주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내가 모태에서부터 주를 의지하였으며 나의 어머니의 배에서부터 주께서 나를 택하셨사오니 나는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   

 

  놀랍지요?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모태가 아니라 이보다 더 앞서서 택해주셨습니다. 언제쯤일까요? 창세 전입니다. 세상이 창조되기 전에 이미 우리를 택해주셨습니다. 믿기 어려운 사실입니다만 성경은 믿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에베소서 1장 4절입니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아멘. 창세 전에 이미 우리를 택해주셨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택함을 받았다는 사실은 우리의 어떤 선행이나 공로나 노력이 개입할 여지가 전혀 없다는 것이 증명됩니다. 우리의 그 어떤 것 때문에 선택받은 것이 아니라 우리를 선택해주신 하나님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 29절에서 말씀한 바와 같이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택함을 받고 끊을 수 없는 밀접한 관계가 분명하게 되었기에 다윗처럼 “주께서 나를 택하셨사오니 나는 항상 주를 찬송하리로다”라는 고백을 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가 연약할지라도 하나님께서 택해주시고 함께 해주시므로 영적으로 강력해진 영적 용사가 된 것을 믿으시고 영적 용사로 살아가시고 찬송을 드리시길 바랍니다.

 

 

[2011 참좋은제자들교회 https://cafe.daum.net/truegooddisciples/IPZB/61 담임목사 이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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