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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적강해/주일설교

은혜와 평강 (벧후 1:1-2)

by 이서영 목사 2015. 7. 17.

은혜와 평강 (벧후 1:1-2)

 

  성도는 인사 하나를 해도 기독교식으로 인사해야 합니다. 거기엔 구원의 깊은 뜻이 담겨있기 때문입니다. 진심으로 구원의 아름다운 길을 함께 가기를 원하는 심정으로 인사하기 때문입니다. 천국 시민으로서 서로 사랑하고 서로 환영하는 의미에서 인사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 모두 다함께 생명의 길인 천국 길을 아름답게 동행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인사하는 것입니다.

 

  초대 교회 당시의 기독교식 문안 인사는 대체로 “은혜와 평강이 함께 있기를 바랍니다”입니다. 그런데 본문에 나오는 사도 베드로의 인사법을 보면 그 당시 문안 인사법보다 좀 더 독특한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무엇이 독특할까요? 사도 베드로는 “은혜와 평강이 더욱 많기를 바랍니다”라고 문안했습니다. 그 당시 인사법보다 독특한 것은 ‘더욱 많기를’이라는 문장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정확한지는 잘 모르겠지만 “안녕하세요”를 다른 나라의 인사말로 해보겠습니다. 프랑스는 “봉주르”, 네덜란드는 “할로”, 러시아는? “즈드라스트부이쩨”, 독일은 “굿덴 탁”, 이탈리아는 “본 조르노”, 스페인은 “올라”, 멕시코는? 멕시코가 스페인어를 사용하고 있다는 것에 힌트가 있습니다. 스페인과 같은 “올라”입니다.

 

  뉴질랜드에 사는 원주민 마오리족의 인사법은 ‘홍이(hongi)’입니다. 악수를 하고 손을 잡은 채로 ‘키오라(Kia Ora)’라고 하면서 자신의 코와 상대방의 코를 두 번 맞댑니다. 코를 살짝 대는 부족도 있고 살짝 누르는 부족도 있습니다. 그런데 세 번 맞대면 안 됩니다. 그것은 결혼하자는 뜻이 되기 때문입니다. 코를 맞대는 이유는 “함께 생명의 숨을 쉰다”는 뜻입니다.

 

  인사를 통해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서로 상대방에게 코로 생명의 숨을 불어 넣어주는 것입니다. 인사법이 우리와 다르지만 서로의 만남을 기쁘게 여기고 다른 사람에게 생명을 나누어주는 인사법은 우리 성도들에게 있어서도 매우 소중한 인사법인 것 같습니다. 우리도 서로 인사해볼까요? 물론 마오리족처럼 똑같이 코를 맞댈 필요는 없습니다. 그런 뜻이 담긴 인사를 나누시면 됩니다. 

 

  이렇게 생명이 담긴 인사법이 매우 소중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귀한 인사법이 있습니다. 이 인사법은 국제적인 신사숙녀가 해야 하는 인사법이 아니라 하늘에 속한 천국의 신사숙녀가 해야 하는 인사법입니다. 그것은 생명을 주는 인사법인데 “은혜와 평강이 더욱 많으시길 바랍니다”라는 천국식 인사법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을 통해 크게 깨달으시고 생명의 인사를 서로 나누시길 바랍니다.

 

  우리가 생명의 인사를 나누려면 첫 번째로 이 편지의 ‘수신자’가 누구인지를 잘 알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천국식 인사법으로 생명의 인사를 나눌 수 있는 수신자는 누구를 말할까요? 본문 1절을 보면 “우리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우리와 함께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라고 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생명의 인사를 나누기 위해서 첫 번째로 생각해봐야 할 주제는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받은 자들’입니다.

 

  편지를 받는 수신자들을 소개하고 있는데 어떤 사람들에게 편지한다고 했지요? 믿음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처럼 성경을 보면 믿음을 가진 성도들을 향하고 있습니다. 66권 성경책 가운데 극히 일부 성경책만 모든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습니다. 창세기가 그렇습니다. 창세기는 모든 인류를 대상으로 썼습니다. 오바댜도 에돔 족속을 대상으로 썼습니다. 나훔 역시 니느웨 사람들을 대상으로 썼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도 결국은 믿음을 가진 하나님의 백성들을 대상으로 쓴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책은 하나님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람들을 향해 쓴 책이 아니라 믿음을 가진 성도들을 향해 쓴 책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수신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도 베드로가 보낸 편지의 수신자에 해당하는 사람들은 모든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천국식 인사법으로 서로 생명의 인사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은 믿음을 가진 성도라는 것입니다.  이 성경책이 우리 손 안에 있고 우리가 보고 듣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하고 귀한 일인지 모릅니.

 

  그런데 성경책이 믿음을 가진 성도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는 그것이 사실일까요? 성경책이 수신자를 언급하고 있기에 믿을 수 있습니다. 이 사실을 믿지 못하시겠다면 오늘 예배를 마친 후에 교회 밖에 나가셔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은혜와 평강이 더욱 많기를 바랍니다”라고 인사해보십시오. 진심으로 그렇게 되기를 원해서 드린 인사이지만 그렇게 좋은 소리를 듣지 못할 것입니다. 오히려 “무슨 엉뚱한 소리를 하십니까?”라고 의아해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좋은 천국식 인사를 해도 아무리 좋은 복음이라고 해도 듣는 사람은 믿음을 가진 성도라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전도한다고 해서 다 듣지 않습니다. 전도도 안 믿는 사람을 향해 전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모든 사람들에게 빠짐없이 복음을 전해야합니다. 하지만 결국은 그 가운데 하나님의 백성이 듣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전도할 때 낙심하지 말고 외쳐야 합니다. 분명한 사실은 그 가운데 듣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고린도에 있을 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행 18:9,10). “두려워하지 말며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어떤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일 년 육 개월을 머물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볼 때 성경책은 결국 믿음을 가진 성도들을 위한 책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누구나 보고 들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책을 가지고 있고, 성경책을 보고 있고, 이렇게 주일에 설교 말씀을 잘 듣고 있다는 이 자체가 하나님으로부터 이미 큰 복을 받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에 모인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편지를 받고 있는 수신자가 되셔서 은혜와 평강이 더욱 더 넘치시고 다른 사람에게도 생명의 인사로 나누어주시길 바랍니다.

    

  우리가 생명의 인사를 나누려면 두 번째로 이 편지의 ‘수신자의 상태’가 어떤 상태에 놓여 있는지를 잘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생명의 인사를 나누기 위해서 두 번째로 생각해봐야 할 주제는 ‘은혜와 평강’입니다. 수신자의 상태가 어떤 상태에 놓여 있는 수신자인지 구체적으로 알아보면 그 의미를 더 잘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을 잘 알아야 은혜와 평강이 더 많아지기 때문입니다. 1절을 다시 보면 “우리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우리와 함께 받은 자들에게”라고 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수신자들의 상태는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가지게 된 상태라는 것입니다.

 

   ‘동일하게 보배로운’이란 단어는 형용사 ‘이소티모스’인데 ‘동등한 가치의, 동일한 종류의’라는 뜻입니다. 동일하게 분배받은 동일한 종류의 믿음을 말합니다. 이 편지의 수신자인 믿음을 가진 성도들은 이와 같이 차별 없이 누구나 동일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마태복음 20장을 보면 천국은 마치 포도원 주인이 품꾼을 불러 들여보내는 것과 같다는 비유가 나옵니다. 포도원 주인은 이른 아침에 온 사람이나 오후 늦게 온 사람들이나 동일한 삯을 주었습니다. 아침 일찍 와서 하루 종일 일한 사람이나 오후 늦게 와서 한 시간만 일한 사람이나 똑같이 한 데나리온씩을 주었습니다. 그렇게 하여도 잘못한 것이 하나도 없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품삯을 약속할 때 한 데나리온씩을 약속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천국에 들어가는 사람들도 이와 같습니다. 동일한 종류의 믿음을 동등하게 받고 들어갑니다. 이 믿음은 쌓아놓은 실적에 따라 받는 서로 다른 종류의 상급을 받는 믿음을 말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동일한 믿음은 생명을 구원하는 천국의 자격을 주는 믿음입니다. 예수님의 의를 힘입어 동등하게 천국에 들어가게 되는 믿음입니다. 시험을 쳐서 일등으로 합격한 사람이나 턱걸이로 합격한 사람이나 합격은 똑같은 합격입니다. 똑같은 자격이 주어집니다. 천국에 들어가는 자격에 있어서도 이와 같습니다. 이 동일하고 보배로운 믿음은 결코 다르지 않고 동등한 종류와 동등한 가치를 가지고 있는 믿음입니다.

 

  ‘동일하게 보배로운’이란 단어는 신약성경 가운데 여기서만 사용된 단어를 번역한 것입니다(IVP 성경주석-신약). 이 단어는 ‘동등한 지위’를 말하므로 사도 베드로와 그 당시 수신자들과 지금 우리 모두가 동일하게 똑같은 믿음을 받았습니다. 베드로가 사도라고 해서 더 큰 믿음을 받은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동일하게 ‘보배로우신’ 구세주를 힘입고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 동일하고 보배로운 믿음은 어디서 왔을까요? 우리가 아닌 하나님께로부터 얻어지는 것입니다. 1절에 ‘받은’이란 단어의 동사 원형은 ‘랑카노’입니다. ‘제비를 뽑아 얻다’는 뜻입니다. 제비를 뽑아 얻은 것처럼 얻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래서 이 단어는 은혜라는 개념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즉 어떤 노력이나 공적보다는 선물로 얻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단어가 구약 성경에는 사무엘상 14장 47절에 나옵니다. “사울이 이스라엘 왕위에 나아간 후에 사방에 있는 모든 대적 곧 모압과 암몬 자손과 에돔과 소바의 왕들과 블레셋 사람을 쳤는데 향하는 곳마다 이기었고.” 사울이 왕위에 오른 후에 사방으로 가는 곳곳마다 이겼습니다. 이때 사울이 왕위에 ‘나아간 후에’라는 단어가 본문에 나오는 ‘받은’에 해당되는 단어입니다.

 

  그래서 표준새번역은 “이스라엘을 다스릴 왕권을 얻은 다음부터”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사울이 하나님으로부터 왕권을 은혜로 받은 것을 말합니다. 사울이 어떤 행동을 한 결과로 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임명해주셔서 왕권을 얻은 것을 말합니다. 그럴 때 승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어떻게 해서 믿음을 가지게 되었을까요? 우리의 노력에 의해서 얻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믿음은 우리의 어떤 노력에 의해서 얻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수여해 주셔서 우리가 얻게 된 것입니다.

 

  이 믿음은 전적으로 예수님께서 이루어 놓으신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셔서 우리의 죄와 허물을 용서해주셨습니다. 우리가 우리 각자의 십자가를 지고 죽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대신 십자가를 지시고 피 흘리시고 죽으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것이 얼마나 크고 값진지를 깊이 깨달을 때 더욱 더 풍성한 은혜를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의로 받은 은혜에 대해서 깊이 묵상하셔서 은혜와 평강이 더욱 더 넘치시고 다른 사람에게도 생명의 인사로 나누어주시길 바랍니다. 

 

  그런데 ‘은혜와 평강’이라고 할 때 ‘평강(에이레네)’은 무엇을 말할까요? 이 단어의 뜻은 ‘평화, 복지, 번영’을 의미합니다. 구약성경에서 나오는 히브리어 단어 ‘샬롬’을 번역한 것입니다. 이 단어는 ‘'평화(peace)’라는 좁은 의미로 제한시켜서는 안 됩니다. 단순히 평화만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더 나아가 ‘안녕’과 ‘복지’와 ‘번영’까지 포함시켜서 그 뜻을 묵상해야 합니다.

 

  “일상적인 헬라어 인사(카이레네, 인사합니다!)가 하나님의 ‘은혜(카리스)’로 말미암는 축복을 구하는 심원한 기독교적 기도로 대체됩니다. 더욱이 관례적인 유대의 인사인 ‘샬롬(평강)’이 더해집니다. 이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옛 언약과 새 언약 둘 다에 약속된 축복을 유업으로 받게 될 것임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IVP 성경주석-신약). 이 은혜와 평강은 순서가 있습니다. “참된 은혜가 없는 곳에는 결코 평강이 있을 수 없습니다. 먼저는 은혜이고 그 다음이 평강입니다. 은혜 없는 평강은 단지 어리석음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잠시 동안 실제적인 평강이 없는 곳일지라도 은혜는 진실로 있을 수 있습니다”(매튜 헨리).

 

  그런데 이 평강 역시 어디서 내려옵니까? 은혜와 평강이 처음 주어질 때 뿐 아니라 그것들이 더 많아지는 것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내려옵니다. 예수님께서 화목제물이 되셨으므로 우리가 은혜와 평강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과의 평화와 안녕과 복지까지도 누리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의를 힘입은 성도들이 본문에 나오는 수신자들의 상태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도 그들과 동일한 수신자인 것을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예수님의 의가 얼마나 큰지를 깊이 깨달으셔서 은혜와 평강이 더욱 더 넘치시고 다른 사람에게도 생명의 인사로 나누어주시길 바랍니다

 

  우리가 생명의 인사를 나누려면 세 번째로 이 편지의 ‘수신자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잘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생명의 인사를 나누기 위해서 세 번째로 생각해봐야 할 주제는 ‘앎으로’입니다. 수신자들이 어떻게 하면 되는지 살펴보면 됩니다. 본문 2절을 합독하겠습니다.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를 앎으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아멘. 아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은혜와 평강이 더욱 많게 되는 방법과 수단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서’입니다. 모든 경건한 삶과 경건의 능력에 영향을 미치며 관계하고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나옵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과 그를 믿는 것은 모든 영적인 도움과 위로를 얻는 통로가 됩니다”(매튜헨리). 본문을 보면 “진정한 은혜와 평강을 어디서 찾을 수 있는지에 대해 덧붙입니다. 그 답은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를 앎으로’ 만입니다”(IVP 성경주석-신약).

 

  사도 베드로는 유독 ‘앎’을 많이 강조했습니다. 3절에도 “우리를 부르신 이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고 했습니다. 20절에는 “먼저 알 것은 성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사사로이 풀이한 사람들이 있었고 다시 되돌아가버리고 명령을 저버린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의 상태를 2장 20절에 “우리 주 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세상의 더러움을 피한 후에”, 21절에는 “의의 도를 안 후에”라고 묘사했습니다.

 

  그러나 너희들은 그렇지 않아야 한다고 3장 17절에 말했습니다. “너희가 이것을 미리 알았은즉”이라고 했는데 무법한 자들의 미혹에 이끌려가지 않고 믿음에서 떨어지지 않기를 권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마지막 3장 18절에 최종적으로 예수님과 예수님의 은혜를 더욱 더 알기를 권하고 마쳤습니다.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이처럼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은 ‘앎으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신자들의 삶을 더 풍성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수신자들이 해야 할 일은 아는 것에 힘써야 합니다.

 

  본문 2절 마지막에 나오는 ‘많을지어다’의 동사 원형은 ‘플레뒤노’입니다. ‘증가하다, 많아지다’라는 뜻인데 수동형입니다.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를 더 알게 되면 은혜와 평강이 더 증가하고 더 많아진다는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가 간구한 것은 그 은혜와 평강이 더 증가하고 더 많아지기를 바란 것입니다. 매튜 헨리가 말했습니다. “우리 자신들을 위해서 혹은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우리가 바랄 수 있는 최상의 축복은 곧 은혜와 평강이며 그것들의 증가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도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님을 더욱 더 잘 알게 되셔서 은혜와 평강이 더욱 더 증가되시고 다른 사람에게도 생명의 인사로 나누어주시길 바랍니다. 서로 인사를 나누어 볼까요? “은혜와 평강이 더욱 많으시길 바랍니다.”

 

 

[2011 참좋은제자들교회 https://cafe.daum.net/truegooddisciples/IPZB/63 담임목사 이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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