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눈에 보는 요한복음 (재개정판) 21장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사명을 주심
죽은 사람이 다시 부활해서 성령님을 부어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님은 성령님을 부어주시고 사명을 주셨습니다. 18-21장은 예수님께서 붙잡혀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시는 사명을 완수하시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그 가운데 21장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사명주시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21장 개요
✙✙✙ 21장 구절
요한복음 21장에서 대표적인 구절을 선정한다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일은 이러하다는 1절입니다.
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 호수에서 또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으니 나타내신 일은 이러하니라.
✙✙✙ 21장 주제
요한복음 18-21장을 전체적으로 본다면 예수님께서 붙잡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는 사명을 완수하시고 세상을 떠나 다시 아버지께로 가게 되시는 관점에서 볼 수 있습니다.
21장은 예수님의 그러한 사명 가운데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사명주시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21장을 보면 이러한 흐름이 있으므로 이와 관련된 주제를 도출해 본다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사명을 주심이 됩니다.
✙✙✙ 20장 구조
21장에서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사명주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것을 두 부분으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습니다. 전반부는 1-14절인데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디베랴 호수에서 제자들에게 세 번째로 나타나신 장면이고, 후반부는 15-25절인데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양에 대한 사명과 나를 따르라는 사명을 주시고 요한에게는 머물게 해주신 장면입니다.
이처럼 21장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세 번째 나타나시는 장면과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사명을 주시는 장면으로 살펴볼 수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세 번째 나타나시는 장면에서는 숯불에 생선과 빵을 구어 놓으시고 제자들에게 “와서 조반을 먹으라”(12)고 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사명을 주시는 장면에서는 베드로에게 “내 어린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15, 16, 17)고 하시면서 “나를 따르라”(19)고 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와 함께 요한을 향해서는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22)라고 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육신의 양식을 먹여주시는 가운데 영혼의 양식도 먹여야 한다는 것을 알게 하신 것입니다. 아울러 각자에게 주어진 사명이 있으므로 그러한 사명에 따라 예수님을 따르도록 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21장에서는 예수님께서 사명을 완수하시는 과정 가운데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사명주시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고별강화하시고(13-16장) 아버지께 고별기도를 드리신(17장) 다음에 붙잡혀 심문을 받으시고(18장)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돌아가시고(19장) 부활하시고 나타나신(20장) 이후에 다시 나타나셔서 사명주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장면 가운데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시는 장면에서는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고(6) 하시고 아침을 먹으라고(12) 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제자들에게 사명주시는 장면에서는 시몬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하시면서 양을 먹이고 돌보라고 하시고(15, 16, 17) 나를 따르라고(19) 하셨으며 사도 요한과 관련해서는 네게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22, 23) 하시면서 나를 따르라고(22) 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두 장면을 보면 먹는 것과 관련된 장면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생선과 빵을 가져다가 숯불에 구워서 아침을 먹게 해주시는 것과 어린 양과 양을 먹이게 해주시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것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영육 간에 필요한 양식을 모두 먹여주는 일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육신의 양식도 먹이고 영혼의 양식인 말씀도 먹여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21장에서 보다 고유하게 사용하고 있는 용어를 살펴보면 세 번씩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15, 16, 17) 하시면서 세 번에 걸쳐 내 어린 양을 먹이고 내 양을 치고 내 양을 먹이라고 하신(15, 16, 17) 말씀을 볼 수 있습니다.
이와 함께 “네게 무슨 상관이냐”(22, 23)와 “나를 따르라”(19, 22)는 말씀도 볼 수 있습니다. 각자에게 주어진 사명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그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따르면 된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으므로 베드로와 요한 이외의 다른 제자들에게 주신 직접적인 사명을 발견할 수 없지만 각자에게 맞는 사명을 주셨을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는 것입니다.
21장 개관
단락 | 단락별 개요 | |
1-14 |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세 번째 나타나심 | |
15-25 |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사명을 주심 |
21:1-14 제자들에게 세 번째 나타나심
● 21:1-14 제자들에게 세 번째 나타나심
1 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 호수에서 또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으니 나타내신 일은 이러하니라 2 시몬 베드로와 디두모라 하는 도마와 갈릴리 가나 사람 나다나엘과 세베대의 아들들과 또 다른 제자 둘이 함께 있더니 3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니 그들이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그 날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더니 4 날이 새어갈 때에 예수께서 바닷가에 서셨으나 제자들이 예수이신 줄 알지 못하는지라 5 예수께서 이르시되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대답하되 없나이다 6 이르시되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잡으리라 하시니 이에 던졌더니 물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 7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베드로에게 이르되 주님이시라 하니 시몬 베드로가 벗고 있다가 주님이라 하는 말을 듣고 겉옷을 두른 후에 바다로 뛰어 내리더라 8 다른 제자들은 육지에서 거리가 불과 한 오십 칸쯤 되므로 작은 배를 타고 물고기 든 그물을 끌고 와서 9 육지에 올라보니 숯불이 있는데 그 위에 생선이 놓였고 떡도 있더라 10 예수께서 이르시되 지금 잡은 생선을 좀 가져오라 하시니 11 시몬 베드로가 올라가서 그물을 육지에 끌어 올리니 가득히 찬 큰 물고기가 백쉰세 마리라 이같이 많으나 그물이 찢어지지 아니하였더라 12 예수께서 이르시되 와서 조반을 먹으라 하시니 제자들이 주님이신 줄 아는 고로 당신이 누구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 13 예수께서 가셔서 떡을 가져다가 그들에게 주시고 생선도 그와 같이 하시니라 14 이것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이라.
1-14절은 21장 가운데 전반부에 해당되는 말씀인데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세 번째 나타나시는 장면입니다.
이 장면에서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디베랴 호수에서 제자들에게 세 번째로 나타나셔서 숯불에 구운 생선과 빵으로 조반을 차려주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제자들이 물고기를 잡으러 갔지만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는데 예수님께서 그물을 던지라고 하는 쪽에 던지니 그물이 가득 찰 정도로 잡게 되었습니다. 그러하신 예수님을 처음에는 알지 못했는데 이후에 알게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신 후에 디베랴 호수에서 세 번째로 나타나신 일은 이러합니다.
시몬 베드로와 디두모라 하는 도마와 갈릴리 가나 사람 나다나엘과 세베대의 아들들과 또 다른 제자 둘이 함께 있었습니다.
시몬 베드로가 그들에게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간다고 하였습니다. 그들이 우리도 당신과 함께 가겠다고 하였습니다.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그 날 밤에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습니다.
제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예수님께서 계시지 아니하므로 무엇을 해야 할지를 모르고 있다가 이전 상태로 돌아가 물고기를 잡으러 간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사명을 잘 깨달아야 하는데 아직까지 사명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였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이와 같으므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세 번째 나타나셔서 마지막으로 음식을 나누시면서 사명을 주셨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날이 샐 때에 예수님께서 바닷가에 서셨는데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예수님이신 것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제자들의 눈이 그 순간에는 가려진 상태였던 같습니다. 눈을 떠도 코앞에 계신 예수님을 볼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런 상태에 놓여있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5)라고 하시자 그들이 “없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잡으리라”(6)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그들이 던졌더니 물고기가 많아 더 이상 그물을 들 수 없었습니다.
본 단락에는 물고기에 대한 용어가 많이 등장하는데 혼돈하지 않도록 이러한 것을 정리해 둘 필요가 있습니다.
“물고기를 잡으러”(3)의 원어원형은 “ἁλιεύω(할리유오)”로 “고기를 잡다”라는 뜻인데 물고기를 잡는 것을 의미합니다.
“고기”(5)의 원어원형은 “προσφάγιον(프로스파기온)”인데 “(빵)과 함께 먹는 어떤 것”이라는 뜻으로 삶거나 구운 물고기를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고 하셨을 때 그러한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물고기”(6, 8, 11)의 원어원형은 “ἰχθύς(이크뒤스)”로 일반적으로 말하는 “물고기”를 의미합니다.
“생선”(9, 10, 13)의 원어원형은 “ὀψάριον(옵사리온)”인데 “(빵에 곁들여 먹는) 식용 물고기”를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베드로에게 “주님이시다”라고 하자 시몬 베드로가 벗고 있다가 “주님이시다”라는 말을 듣고는 겉옷을 두른 후에 바다로 뛰어들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제자들은 육지에서 멀지 않은 약 “오십 칸”(8)(원어로는 “πηχῶν διακοσίων(페콘 디아코시온)”인데 “규빗 200”을 뜻합니다. 200규빗이 된다는 것인데 1규빗을 약 45㎝로 보면 200규빗×45㎝=약 9,000㎝이므로 약 90m가 됩니다)이 되므로 작은 배를 타고 물고기 든 그물을 끌고 왔습니다. 육지에 올라오니 숯불에 생선과 떡이 놓여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지금 잡은 생선을 좀 가져오라”(10)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시몬 베드로가 올라가서 그물을 육지로 끌어당기니 가득한 큰 물고기가 153마리였습니다. 그렇게 많으나 그물이 찢어지지 아니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행하면 물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그물에 가득하게 찰 정도로 잡게 된다는 것입니다.
말씀대로 행하시고 말씀대로 이루시는 그러하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면 말씀하신 대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이 있은 후에 예수님께서 “와서 조반을 먹으라”(12)고 하시자 제자들이 주님이신 것을 알기에 “당신은 누구입니까?”라고 아무도 감히 묻는 자가 없었습니다.
“묻는”(12)의 원어원형은 “ἐξετάζω(엑세타조)”인데 “조사하다, 찾아보다, 묻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묻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세밀하게 조사하고 심문하듯이 묻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물을 필요가 없을 정도로 주님이신 것이 확실하다는 것입니다.
처음엔 알지 못했다가(4) 이제는 분명하게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주님이시다”라고 하고(7) 153마리의 기적을 보게 되자(11) 더 이상 물을 필요가 없게 되었을 것입니다.
“조반을 먹어라”(12)와 “조반을 먹은”(15)의 원어원형은 “ἀριστάω(아리스타오)”인데 “조반을 먹다, 식사하다”라는 뜻입니다. 이곳에서는 아침에 처음 먹는 식사를 의미하므로 아침식사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아침을 먹으라고 하신 예수님께서 가셔서 빵을 집어 그들에게 주시고 생선도 그와 같이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처럼 제자들과 마지막으로 음식을 나누시면서 세족식처럼 제자들을 섬기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어떠한 분이십니까?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시고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시고(마 12:20) 무거운 짐 진 자들을 쉬게 해주시는(마 11:28) 예수님이십니다.
그러하신 예수님께서 사명조차도 잃어버린 것처럼 보이는 제자들에게 야단치시거나 내버려두지 아니하시고 숯불로 따뜻하고 맛있는 아침을 만들어주셔서 쉬게 해주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것은 예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14)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인데 본 단락에서는 제자들에게 아침을 정성을 다해 차려주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21:15-25 제자들에게 사명을 주심
● 21:15-23 예수님께서 사명을 주심
15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16 또 두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양을 치라 하시고 17 세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 18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19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20 베드로가 돌이켜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따르는 것을 보니 그는 만찬석에서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주님 주님을 파는 자가 누구오니이까 묻던 자더라 21 이에 베드로가 그를 보고 예수께 여짜오되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사옵나이까 22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더라 23 이 말씀이 형제들에게 나가서 그 제자는 죽지 아니하겠다 하였으나 예수의 말씀은 그가 죽지 않겠다 하신 것이 아니라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하신 것이러라.
15-25절은 21장 가운데 후반부에 해당되는 말씀인데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사명을 주시는 장면입니다.
이러한 장면을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아침을 차려주신 이후에 제자들에게 사명을 주시는 장면과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이 많으므로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두기에 부족할 줄 안다고 하는 장면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이 가운데 15-23절의 장면에서는 예수님께서 각자에게 맞는 사명을 제자들에게 주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한 사명을 시몬 베드로에게 주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모두 세 장면인데 첫 번째 장면인 15절입니다.
그들이 아침을 먹은 후에 예수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주님, 그러합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것을 주님께서 아십니다”라고 하자 예수님께서 “내 어린 양을 먹이라”고 하셨습니다.
두 번째 장면인 16절입니다. 예수님께서 두 번째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역시 “주님, 그러합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것을 주님께서 아십니다”라고 하자 예수님께서 “내 양을 치라”고 하셨습니다.
세 번째 장면인 17절입니다. 예수님께서 세 번째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면서 “주님, 모든 것을 아시므로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것을 주님께서 아십니다”라고 하자 예수님께서 “내 양을 먹이라”고 하셨습니다.
세 번의 질문과 대답을 볼 수 있는데 원어로 보면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과 베드로가 한 말이 약간 다른 것을 볼 수 있고 세 번째 질문에 들어가면서 약간의 변화가 일어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첫 번째와 두 번째 질문하신 “사랑하느냐”(15, 16)와 베드로가 각각 대답한 “사랑하는”(15, 16)의 원어에 차이가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전자의 원어원형은 “ἀγαπάω(아가파오)”인데 “사랑하다”라는 뜻으로 아가페의 사랑을 의미합니다.
후자의 원어원형은 “φιλέω(필레오)”인데 “좋아하다, 사랑하다”라는 뜻으로 우애와 같은 인간적인 친밀감에서 나오는 사랑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가페(ἀγάπη)의 사랑을 하느냐고 질문하셨고 베드로는 필로스(φίλος)의 사랑을 한다고 대답한 것입니다.
그런데 17절에 나오는 세 번째 질문과 대답을 보면 “사랑하느냐, 사랑하느냐, 사랑하는”의 원어원형은 모두 “φιλέω(필레오)”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눈높이를 낮추셔서 필로스(φίλος)의 사랑으로 대답하는 베드로의 입장을 이해해주신 것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만약 그렇게 해주지 아니하셨다면 베드로는 예수님의 질문에 올바른 대답을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아가페의 사랑에 이르지 못한 베드로의 마음을 이해해주시고 필로스의 사랑을 하느냐고 질문해주신 것입니다.
이와 같으므로 의도에 맞게 올바르게 대답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서로 뜻이 맞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변화를 받은 베드로를 보면 이후에는 아가페의 사랑을 알고 그러한 아가페의 사랑을 하게 된 것을(벧전 1:8, 벧후 3:8, 14, 17)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전에 자신만만해 하던 모습이 자취를 감춘 것도 볼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대답할 때 세 번씩이나 “아시나이다, 아시나이다, 아시오매”(15, 16, 17)라고 하였습니다.
이 용어의 원어원형은 “εἴδω(에이도)”인데 “보다, 알다, 경험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 경험적으로 분명하게 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베드로가 “주님을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습니다”라고까지 하였지만(13:37) 세 번이나 부인하게 된 것과는 다르게 이번에는 세 번 “주님께서 아십니다”라고 겸손하게 대답한 것입니다.
그런데 마지막으로 세 번째 대답할 때 “아시오매”(17)라고 하면서 “아시나이다”(17)라고 하였습니다.
전자의 원어원형은 “εἴδω(에이도)”인데 후자의 원어원형은 “γινώσκω(기노스코)”입니다. “알다, 이해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 지적으로 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만큼 조심스럽게 대답한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원어성경 15절과 16절의 “Ναὶ(나이)”는 “확실히, 예, 그렇다”라고 단언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으므로 주님께서 확실하게 아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첫 번째와 두 번째는 이렇게 “Ναὶ(나이)”를 사용하여 대답하였지만 세 번째는 “Ναὶ(나이)”를 사용하지 않고 오히려 근심하게 되면서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니”라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변화를 통해 볼 수 있는 것은 베드로가 더욱 더 겸손하게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베드로이기에 마치 “선한 목자”(10:11, 14)이신 예수님과 같은 심정으로 목양에 대해 당부하였을(벧전 5:2-3) 것입니다.
이처럼 육체에 꼭 필요한 아침을 차려주신 예수님께서 영혼에 필수적인 영혼의 양식인 생명의 말씀도 먹여주는 매우 중요한 사명을 주신 것이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육체와 영혼에게 모두 필요한 양식으로 어린 양을 먹이고(15) 양을 돌보고(16) 양을 먹이도록(17) 해주신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육체에 필요한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약 오천 명의 무리를 먹이시고(6:9-11) 숯불 생선과 빵을 먹여주시기도 하십니다(6:9-11, 21:12).
더 중요한 것은 영혼의 양식인 생명의 말씀을 주시고(6:68, 63) 그 무엇보다도 예수님께서 친히 자신이 생명의 떡이 되셔서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해주신(6:35, 48, 51, 58)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주시고 베드로가 받은 양에 대한 세 가지 사명을 다른 관점에서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어린 양은 유아와 어린이와 청소년층을 대상으로 하는 사역이고 양은 청장년과 노년층을 대상으로 하는 사역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그러한 것보다는 예수님께서 전파하시고 고치시고 가르치신 세 가지 사역과(마 4:23, 9:35) 연관시켜 볼 수 있습니다.
내 “어린 양(ἀρνίον, 아르니온)”들을 먹이라는 것은 생명이신 예수님을 전파하라는 것이고, 내 “양(πρόβατον, 프로바톤)”들을 치라는 것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섬기고 돌보면서 고치라는 것이고, 내 “양(πρόβατον, 프로바톤)”들을 먹이라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으로 먹이고 양육하라는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양들을 사랑하는 가운데 감당하라는 것으로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사명을 주신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또 하나의 사명을 주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18)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하신 것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지시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하시고 베드로에게 “나를 따르라”(19)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어떠한 죽음으로”(12:33, 18:32) 죽을 것을 보이시고 그러한 말씀을 응하게 하려고 하신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것은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것을 의미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전에 베드로에게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오리라”(13:36)고 말씀하셨습니다.
부활하시고 아버지께로 가시기 전인 이번에는 “나를 따르라”(18:19, 22)고 하신 것입니다.
19절의 “가리키심이러라”의 원어원형은 “σημαίνω(세마이노)”인데 명령하는 의미에서 “지시하다”라는 뜻이 있으며 표시나 신호하는 의미에서 “알리다, 나타내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와 같으므로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십자가를 지는 사명을 주셨다는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볼 때 예수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는 목양의 사명과 십자가를 지는 사명을 주신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각자에게 맞는 사명을 제자들에게 주시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그러한 사명을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요한에게도 주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사명을 받은 시몬 베드로가 돌아서서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따르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는 만찬에서 예수님의 품에 기대어 “주님, 주님을 넘겨주는 자가 누구입니까”라고 말했던(13:25) 자였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7, 20)는 누구를 가리키겠습니까? 요한을 가리킵니다.
13장 23절과 19장 26절과 20장 2절에서도 이러한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수의 제자 중 하나 곧 그가 사랑하시는 자가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누웠는지라. 예수께서 자기의 어머니와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서 있는 것을 보시고 자기 어머니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시몬 베드로와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그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되 사람들이 주님을 무덤에서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겠다 하니.”
이러한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던 제자인 요한에게도 예수님께서 사명을 주셨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그를 보고 예수님께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22)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이 형제들에게 나가서 그 제자는 죽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은 그가 죽지 않을 것이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23)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네게 무슨 상관이냐”(22, 23)와 “나를 따르라”(19, 22)는 말씀을 보면 각자에게 주어진 사명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이렇게 각자가 받은 그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따르면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내가 요한을 어떻게 하든지 너는 몰라도 된다는 식으로 말씀하신 것은 요한은 요한대로 요한에게 주신 사명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각자에게 알맞은 사명을 주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받은 사명이 있고 요한이 받은 사명이 있는 것입니다.
요한의 사명은 따로 있습니다. 요한은 요한대로 예수님을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너는 아무 상관하지 말고 너는 너의 사명을 위해 나를 따르라고 하셨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요한에게 주신 사명은 예수님께서 오실 때까지 “머물게”(22, 23) 하신 것입니다. 머물러서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사명대로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데 마지막으로 밧모 섬에서(계 1:9) 예수님으로부터 기록하라는 명령을 받고(계 1:19) 요한계시록을 기록하게 된 것입니다.
이와 같으므로 부활하셔서 나타나신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요한 이외의 다른 제자들에게도 직접적으로 언급한 것을 21장에서 볼 수는 없지만 각자에게 알맞은 사명을 주셨을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는 것입니다.
● 21:24-25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을 선별하여 기록함
24 이 일들을 증언하고 이 일들을 기록한 제자가 이 사람이라 우리는 그의 증언이 참된 줄 아노라 25 예수께서 행하신 일이 이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줄 아노라.
24-25절의 장면은 요한복음의 마지막 장면입니다. 요한복음에 나오는 이것들에 대하여 증언하고 이것들을 기록한 제자가 이 사람이라고 하면서 우리는 그의 증언이 참인 것을 안다고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행하신 다른 많은 것도 있으므로 만일 낱낱이 기록되었다면 이 세상이라도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25)할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마지막 말씀인 25절입니다. “예수께서 행하신 일이 이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줄 아노라.”
24절의 “아노라”는 “εἴδω(에이도)”로 “보다, 알다, 경험하다”라는 뜻입니다. 보고 경험적으로 아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의 증언이 그만큼 참되다는 것입니다.
25절의 “아노라”의 원어원형은 “οἴομαι(오이오마이)”로 “상상하다, 추정하다, 생각하다”라는 뜻입니다.
생각하기에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상상을 해봐도 추정을 해봐도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그 정도로 엄청나게 많다는 것이고 그러한 것을 안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얼마나 많은 분량이기에 세상에 두기에도 부족할 정도라고 하겠습니까?
이러한 것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예수님께서 엄청나게 많은 일들을 행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만큼 많은 수고를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이 일일이 기록되었다면 일평생 동안 성경을 일독하기가 어려울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와 같으므로 꼭 필요한 기록만 남겼을 것입니다. 특별히 어떤 기록입니까? 그것은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이라고 한 20장 31절의 목적에 맞는 기록을 남긴 것입니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이시요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믿고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이 요한복음의 핵심적인 내용이라는 것입니다.
한눈에 보는 요한복음 (재개정판)
재개정일 2024년 1월 12일
개 정 일 2020년 9월 17일
발 행 일 2018년 9월 5일
지 은 이 이서영
출 판 사 퍼플
출판등록 제300-2012-167호 (2012년 9월 7일)
주 소 서울시 종로구 종로1가 1번지
대표전화 1544-1900
홈페이지 www.kyobobook.co.kr.
ISBN 978-89-24-12034-9
ⓒ 이서영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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