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눈에 보는 요한복음 (재개정판) 17장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기도를 드리심
마무리를 잘해야 하는데 인생을 어떻게 마무리하려고 하십니까? 13-17장은 예수님께서 붙잡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는 사명의 완수를 앞두고 마무리하시는 것에 관한 말씀인데 그 가운데 17장은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기도드리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17장 개요
✙✙✙ 17장 구절
요한복음 17장에서 대표적인 구절을 선정한다면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기도드리시는 1절입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이르시되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 17장 주제
요한복음 13-17장을 전체적으로 본다면 예수님께서 붙잡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는 사명의 완수를 앞두고 마무리하시는 관점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 가운데 17장은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고별기도를 드리시는 관점에서 이러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17장은 예수님께서 사명의 완수를 앞두고 마무리하시면서 아버지를 향해 마무리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께서 강화의 말씀을 모두 마치시고 기도드리시는 장면을 배경으로 삼고 있는 17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아버지께로 떠나가시기 전에 마지막으로 자신과 제자들과 성도들을 위해 아버지께 간절히 부르짖어 기도드리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17장을 보면 이러한 흐름이 있으므로 이와 관련된 주제를 도출해 본다면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기도를 드리심이 됩니다.
✙✙✙ 17장 구조
17장에서는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고별기도를 드리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것을 세 부분으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습니다. 전반부는 1-8절인데 자신과 아버지의 영화로움에 대해 기도드리시는 장면이고, 중반부는 9-19절인데 제자들이 세상에서 보전되기를 위해 기도드리시는 장면이고, 후반부는 20-26절인데 자신을 믿는 성도들이 하나가 되도록 기도드리시는 장면입니다.
17장 가운데 처음과 중간과 나중에 나오는 말씀을 살펴보면 그러한 세 가지 유형의 기도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처음에 나오는 1절에서는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이르시되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라고 하셨으며, 중간에 나오는 9절에서는 “내가 그들을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그들은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라고 하셨으며, 나중에 나오는 20절에서는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그들의 말로 말미암아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라고 하신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17장은 예수님께서 자신을 위해 기도드리시는 장면과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위해 기도드리시는 장면과 예수님께서 성도들을 위해 기도드리시는 장면으로 살펴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것을 통해 17장은 제자들에게 고별강화를 모두 마치시고 사명의 완수를 앞두고 마무리하시면서 마지막으로 아버지께 간절히 기도드리신 고별기도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기도의 내용을 보면 예수님께서 아버지와 아들의 영화를 위하고 영생을 주시려고 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제자들이 세상에서 보전되도록 하시고 진리로 거룩하게 하시는 것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성도들이 하나가 되도록 하시고 세상으로 아버지와 아들에 대한 것을 알게 하시는 것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기도를 드리신 것은 세상에서 살아가는 제자들과 성도들이 예수님의 기쁨으로 기뻐하는 가운데 하나가 되고 진리로 거룩하게 살아가고 진리를 전파하고 가르치도록 해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명을 완수하시고 떠나가시기 전에 마지막으로 이러한 고별기도를 드리시므로 위로해주시고 해결책을 마련해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께로 떠나가신 이후의 대책을 제자들과 성도들에게 마련해주신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17장에서는 예수님께서 하늘을 우러러 보시면서 아버지께 고별기도를 드리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고별강화를(13-16장) 모두 마치시고는 사명을 완수하실 때가 이른 것을 아시고 아버지께 마지막으로 기도드리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아버지께 기도드리시면서(1) 세 가지의 기도를 드리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 자신과(1-8) 예수님의 제자들과(9-19)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에(20-26) 대한 기도입니다.
이러한 기도의 내용을 보면 예수님 자신의 영광을 위하면서(1, 4, 5)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게 하시고(1, 4, 5) 자신에게 주신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려고 하시려는(2, 3)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제자들이 하나가 되고(11) 아버지의 이름으로 세상에서 보전되고(11, 12) 기쁨을 충만하게 가지게 하고(13) 세상에 속한 삶을 살지 않고 진리로 거룩하게 살고(14, 16-19) 악에 빠지지 않도록 보전하시려는(15) 것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성도들이 하나가 되고(21, 22, 23) 아버지께서 보내신 것과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고(23) 예수님의 영광을 보게 하고(24) 아버지의 이름을 알게 하시려는(26) 것도 볼 수 있습니다.
17장에서 다른 곳보다 많이 사용하고 있는 용어를 살펴보면 아버지께서 “주신” 것과 관련된 용어인데 무려 10구절이나(2, 4, 6, 7, 8, 9, 11, 12, 22, 24) 됩니다. 사람에 대해(2, 6, 9, 24) 일에 대해(4) 주신 것에 대해(7) 말씀에 대해(8) 아버지의 이름에 대해(11, 12) 영광에 대해(22, 24) 사용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울러 아버지의 “것”과 관련된 용어도 매우 많이 등장합니다. 아버지의 것에 대해 3구절(6, 9, 10) 사용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것은 하나님 아버지의 주권에 대한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아버지의 것을 아들에게 주셨다는 것이며 아들이신 예수님께서는 그러하신 아버지로부터 모든 것을 받게 되셨다는 것도 알 수 있게 됩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주권에 대해 철저하게 인식하고 계셨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아들을 보내주셨고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모든 것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와 같으신 아버지의 뜻에 따라 사명을 감당하시고 아버지께로 가게 되셨으며 가시기 전에 아버지께 고별기도를 드리신 것입니다. 철저하게 아버지 중심으로 행하셨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요한복음 가운데 17장에서만 사용된 “영화”(1, 1, 4, 5, 5)라는 용어도 볼 수 있으며 “영광”(10, 22, 24)이라는 용어도 볼 수 있습니다.
이 용어가 많이 사용되었다는 것은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용어에 담긴 의미가 중요한 것은 십자가와 연관되어 있기(12:23, 32, 13:31) 때문입니다.
아버지께로 가는 길은 탄탄대로와 같은 꽃길이 아니라 험난한 십자가의 길밖에 없지만 결과적으로는 그 길이 영광의 길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으므로 십자가는 아버지께로 가는 유일한 관문인 것입니다.
이처럼 십자가 없는 영화와 영광은 존재할 수 없으므로 예수님께서 비록 십자가에 대한 것을 직접 언급하시지는 않으셨지만 십자가를 지시는 것을 앞두고 드리신 고별기도라는 측면에서 보면 영화롭게 하는 것은 다름 아닌 십자가를 지게 되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십자가를 통해 주어지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화목제물이 되시므로(엡 2:16, 골 1:22) 하나가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궁극적인 목적으로도 볼 수 있는데 하나님과 하나가 되고 서로 간에 하나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천국에서 다투고 분열되는 일이 있겠습니까? 있을 수 없습니다. 그렇게 된다면 이미 더 이상 천국이 아닙니다. 지옥일 뿐입니다. 천국은 하나가 되는 곳입니다. 이와 같으므로 17장에서 예수님께서 이러한 “하나가”(11, 21, 22, 23) 되는 것에 대해 여러 차례 언급하시면서 기도드리신 것입니다.
하나가 되는 것이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세상과는 하나가 되지 않고 구별되어야 하기에 이를 위해 기도드리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세상에 살고 있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고 아버지의 말씀인 “진리로 거룩하게”(17) 구별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하여 보전하게 되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14-19).
그러한 세상에서 아버지를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고(4)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고(6)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보내신 것을 믿게 하고(21) 사랑하신 것을 알게 하는 것을(23)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기도를 드리신 또 하나의 목적은 요한복음의 기록목적에서(20:31) 볼 수 있듯이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게”(2) 하시려는 것입니다.
17장 개관
단락 | 단락별 개요 | |
1-8 | 예수님께서 자신에 대한 기도를 드리심 | |
9-19 | 예수님께서 제자들에 대한 기도를 드리심 | |
20-26 | 예수님께서 성도들에 대한 기도를 드리심 |
17:1-8 예수님께서 자신에 대한 기도를 드리심
● 17:1-5 예수님께서 영화를 위해 기도드리심
1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이르시되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2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4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5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17장에서 세 가지 유형의 기도를 볼 수 있는데 예수님께서 자신을 위해서는 “아들을 영화롭게 하게 하사”(1), 제자들을 위해서는 “그들을 위하여”(9), 성도들을 위해서는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20)라고 하신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17장 가운데 1-8절은 17장 전반부에 해당되는 말씀인데 예수님께서 자신에 대해 아버지께 기도드리시는 장면입니다.
이렇게 자신에 대해 기도드리시면서 가장 먼저 드리신 기도제목은 영화에 대한 것입니다. 본 단락에서 이러한 장면을 볼 수 있는데 아들과 아버지의 영화를 위해 기도드리시는(1, 4, 5) 장면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고별강화의 말씀을(13-16장) 마치시고는 하늘을 우러러 보시고 아버지께 고별기도를 드리셨습니다.
이러한 순서를 보면 사명의 완수를 앞두고 중요한 마무리는 기도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기도문을 주시고(마 6:9) 기도 외에는 이런 것이 나갈 수 없다고 하시고(막 9:29) 새벽에 기도하시고(막 1:35) 따로 기도드리시고(마 14:23) 사역을 행하실 때 기도하시는 등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1절을 보면 때가 이르렀으므로 아들을 “영화롭게” 하셔서 아들로 말미암아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해달라고 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1절의 원어에 있는 “ἵνα(히나: ~하기 위하여)”를 감안하고 당신을 아버지로 해서 직역해보면 “아들이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기 위하여 아버지의 아들을 영화롭게 하소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본 단락은 이렇게 아버지와 아들의 영화를 위해 기도드리시는 것을 볼 수 있는데 4절에서도 아버지께서 하라고 주신 일을 완성하여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5절에서도 창세 전에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아들을 영화롭게 해 달라고 반복해서 기도드리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것을 보면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기 위하여 아들을 영화롭게 해 달라고 하신 것을 볼 수 있는데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무슨 일을 하셔서 영화롭게 하신다는 것입니까?
본 단락에서 찾아보면 그것은 영생입니다. 4절에 나오는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은 바로 앞에 나오는 2-3절의 “영생”인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2) 하신 일을 아들께서 “이루어”(4) 이를 통해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셨다는(4)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뜻대로 십자가에서 죽으시므로 영생을 주게 되시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통해 영화롭게 된다는 것을(12:23, 32, 13:31) 알 수 있습니다.
앞서 살펴본 “창세 전”(5)에 가시셨던 영화는 영원부터 영원까지 고유하게 가지고 계시는 영화로움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한 영화로써 지금 영화롭게 해 달라고 하신 것입니다. 창세 전의 영화는 십자가를 통해 주어지는 영화와는 또 다른 고유한 영화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때가 이르렀사오니”(1)라고 하신 것처럼 아직 그러한 일이 일어나지 않았는데 어떻게 “내가 이루어”(4)라고 과거형을 사용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미래에 일어날 일도 마치 이미 이루어진 것처럼 과거형을 사용하신 것입니다. 미래에 일어날 일이지만 분명하게 일어날 수밖에 없고 그 시점에서 보게 되면 이미 일어난 일이라는 것입니다. 확신하시고 강조하신 어법으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돌아가신 이후에 기도드리시는 장면이 아니라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기도드리시는 장면이기에 이러한 기도를 드리게 되신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든 것의 의미는 아버지와 아들께서 영화롭게 되신다는 것입니다. 아들께서 십자가를 통해 영생을 주게 되고 그 결과 영화롭게 되신다는 것입니다.
아울러 이 일을 통해 아들을 보내주신 아버지께서도 함께 영화롭게 되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을 이루게 되어 있으므로 창세 전에 아들께서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 지금 아버지와 함께 아들을 영화롭게 해 달라고 하시는 것을(5)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영화롭게 되는 것은 십자가의 관문을 통과할 때 영화롭게 된다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통해 아버지께로 가게 되시고 영화롭게 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바꾸어 살펴본다면 이와 같은 영화를 위해 십자가를 잘 지게 해달라고 기도드리시는 장면으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생각만 해도 괴로워서 벗어나고 싶지만 이것 때문에 오셨다는 기도와(요 12:27) 얼마나 힘든지 잔을 지나가게 해 달라고 하실 정도이시지만 아버지의 원대로 해 달라고 하신 기도와(마 26:39, 42, 막 14:36, 눅 22:42) 동일한 맥락으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으므로 이러한 기도와 죽으심을 통해 영생이 주어진 것을 알고 영생을 귀하게 여겨야 하는 것입니다.
아울러 십자가를 통해 영화가 주어진다는 것을 알고 사명자로서 져야하는 자기 십자가를(마 10:38, 16:24) 힘들고 어려운 일을 만나더라도 기도드리는 가운데 잘 감당해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영생은 무엇입니까? 본 단락에서 의미하고 있는 영생은 예수님께서 3절에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라고 하신 것과 같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영화의 관점에서 보면 영생은 아버지와 아들께서 주시는 것이므로 그러하신 아버지와 아들을 아는 것이 영생이라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주관하시고 보내시는 유일하신 참 하나님 아버지와 그 아버지께서 보내신 그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조금은 복잡해보이지만 아버지와 아들을 알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아버지 없이 아들이 없고 아들 없이 아버지가 없지 않습니까? 이처럼 아버지와 아들은 떨어질 수 없는 관계입니다.
이와 같으므로 아버지와 아들에 관한 것을(요 5:24, 20:31, 요일 5:20) 모두 잘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순서는 아버지가 먼저이신 것을 알아야 합니다. 유일하신 참 하나님을 알고 아버지께서 보내신 자이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은 아버지를 위해 사시고(6:38, 4:34) 철저하게 아버지를 중심으로 사신 것을(5:19, 30) 중요하게 다루고 있는데 17장에서 찾아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아들이신 예수님께서는 주권자로서 보내주시고(17:3 등) 아들과 함께 영생과 말씀을 비롯해 모든 사람과 모든 것을 주시는 것을(17:2, 3, 6, 8 등) 볼 수 있습니다.
“아버지여”(17:1)라고 하면서 시작하시고 이후 아버지에 대해 말씀하시고(17:1 등) 아버지와 함께 사셨습니다(17:21, 23). 또한 아버지의 영광을 나타내시려고 하셨는데 아버지께서 하라고 하신 일을 하셔서 오신 목적대로 영화롭게 하셨습니다(17:4).
그리고 아버지를 알게 하셨고 지금도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통해 알게 해주고 계십니다(17:26).
이와 같으므로 아들이신 예수님을 알되 아버지를 우선적으로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전도할 때와 같이 초기 단계에서는 예수님을 우선적으로 전하고 있습니다. 전도할 때 하나님 아버지를 믿고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고 복잡하게 말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믿고 난 이후에는 하나씩 더 알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들을 보내신 아버지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점점 더 자라나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신 하나님 아버지까지 더 잘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과 함께 예수님께서 드린 본 단락의 영생에 대한 기도를 보면(2-3) 마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20:31)고 한 요한복음의 기록목적을 보는 듯합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아버지께서 보내신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므로 생명을 얻게 하시려는 목적이 이루어지도록 아들께서 십자가를 지게 되시고 그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사람이 영생을 얻게 되고 그리하여 아버지와 아들께서는 영화롭게 되신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 17:6-8 예수님께서 주신 것에 대해 기도드리심
6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 그들은 아버지의 것이었는데 내게 주셨으며 그들은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었나이다 7 지금 그들은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것이 다 아버지로부터 온 것인 줄 알았나이다 8 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말씀들을 그들에게 주었사오며 그들은 이것을 받고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나온 줄을 참으로 아오며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도 믿었사옵나이다.
6-8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아버지께서 주신 것에 대해 기도드리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주신 것에 대해 살펴보면 이미 앞 단락의 2절에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사람에게”라고 하신 것을 볼 수 있으며 그들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기 위하여 아들에게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다고 하신 것을(2) 볼 수 있습니다.
3절에 예수님께서 영생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 아버지와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하셨는데 바로 이러하신 아버지를 알아야 한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아버지께서는 모든 주권을 가지고 모든 것을 주시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특별히 아들에게 모든 것을 주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와 같으므로 그러하신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주시기도(롬 8:32) 하시는 것입니다.
본 단락에서 주신 것과 관련된 말씀을 보면 6절에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그들은 아버지의 것이었는데 내게 주셨으며”라고 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2절처럼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사람이라는 표현을 볼 수 있는데 6절에서는 특별히 “세상 중에서” 주신 사람들이라고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세상에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사람들에게 아들께서 “영생을”(2) 주시고 “아버지의 이름을”(6) 나타내셨다는 것입니다.
이어서 기도드리시기를 그들은 “아버지의 것”(6)이었는데 아들에게 주셨으며 그들은 “아버지의 말씀을”(6) 지키었다고 하신 것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그들이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것이 다 아버지로부터 온 것인 줄”(7) 알았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8절을 보면 그들이 아들께서 “아버지께로부터 나온 줄”을 알고 아버지께서 아들을 “보내신 줄”도 믿었다고 하신 것도 볼 수 있습니다.
8절을 시작하면서 원어성경 8절의 이유를 설명하는 “ὅτι(호티: 왜냐하면)”를 감안해서 이러한 8절을 살펴보면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말씀들을”(8) 아들께서 그들에게 주셔서 그들이 받았기 때문에 아들께서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신 것을 참으로 알고 아버지께서 아들을 보내신 것도 믿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말씀들이 능력의 말씀이라는 것을 이러한 것을 통해 알 수 있게 됩니다.
결국은 이렇게 되어 보내신 아버지와 보내심을 받은 아들을 알게 되고 모든 것을 주신 아버지와 모든 것을 받으신 아들을 알게 되므로 영생을 더 풍성하게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17:9-19 예수님께서 제자들에 대한 기도를 드리심
● 17:9-13 아버지의 이름으로 보전하도록 기도드리심
9 내가 그들을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그들은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 10 내 것은 다 아버지의 것이요 아버지의 것은 내 것이온데 내가 그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았나이다 11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그들은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12 내가 그들과 함께 있을 때에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고 지키었나이다 그 중의 하나도 멸망하지 않고 다만 멸망의 자식뿐이오니 이는 성경을 응하게 함이니이다 13 지금 내가 아버지께로 가오니 내가 세상에서 이 말을 하옵는 것은 그들로 내 기쁨을 그들 안에 충만히 가지게 하려 함이니이다.
9-19절은 17장의 중반부 장면인데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위해 기도드리시는 장면입니다.
중보기도자(롬 8:34)로서의 역할을 하시는 예수님께서 먼저 제자들을 위해 기도드리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9절을 보면 “내가 그들을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그들은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라고 하신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9-19절은 예수님께서 아버지께서 주신 제자들을 세상에서 보전하시기 위해 기도드리시는 장면입니다.
이 가운데 9-13절은 제자로 살아가게 된다면 세상으로부터 배척을 받게 되므로 모든 것의 주권자가 되시고 모든 것을 주시는 아버지의 이름으로 보전하여 달라고 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더 이상 세상에 계시지 아니하시지만(11) “아버지의 것”(9)으로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9) 제자들은 세상에 남아 있기에(11) 아들의 것이자 아버지의 것이요 아버지의 것이자 아들의 것인(10) 제자들을 위해 기도를 드리신 것입니다.
그동안 예수님께서 그들을 아버지께서 자신에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12) 보전하고 지켰는데(12) 앞으로 떠난 이후에도 자신에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여(11) 달라고 하셨습니다.
아들께서 “그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았”(10)는데 아버지와 아들과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11) 하기 위하여(ἵνα, 히나) 그들을 이렇게 보전하여 달라는 것입니다.
“보전하사”(11)와 “보전하고”(12)의 원어원형은 “τηρέω(테레오)”인데 “보존하다, 지키다, 보호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여 이렇게 보전하신다고 하셨습니까? 아버지의 이름으로 보전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아버지의 이름은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17장에서 살펴본다면 “것”(6, 9, 10)과 “주신”(2, 4, 6, 7, 8, 9, 11, 12, 22, 24)이라는 말씀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의 주권자가 되시고 모든 것을 주시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러하신 아버지의 이름이시라면 충분하게 보전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이와 같은 “아버지의 이름”이라는 용어를 예수님께서 자신을 위한 기도에서(6) 제자들을 위한 기도에서(11, 12) 성도들을 위한 기도에서(26) 사용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시고(6) 아버지의 이름으로 보전하시고(11, 12) 아버지의 이름을 알게 하시는(26)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모든 것이 아버지께 속해 있다는 것입니다. 아버지께 속해 있던 모든 것을 아들에게 주시고 아들을 통해 그 모든 것을 주신 것입니다.
만약에 하나님 아버지께 속하지 않게 되었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영생복락을 누려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고 오히려 영원형벌을 받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성도들은 그러하신 아들로 말미암아 아버지께 속하게 된 것입니다.
성도들이 세상에 속한 자로 있을 때 어떤 상태였습니까? 순순히 예수님을 받아들이고 예수님께 영광을 돌리는 존재가 아니었지 않습니까? 배척하거나 알지도 못하던 상태로 세상에 있었는데 찾아오신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사랑하기 때문에 오신 것입니다(롬 5:8). 성도들은 그러한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입니다(요일 4:9).
이와 같음에도 불구하고 여기에 속해 있지 않는 사람을 볼 수 있는데 그러한 사람을 12절 가운데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멸망의 자식”(12)이라고 언급하신 사람입니다.
이러한 12절 가운데 “다만···뿐이오니”의 원어를 보면 “εἰ μή(에이 메)”인데 “만일 ~아니면, 그러나 제외하고”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와 같으므로 “다만 멸망의 자식뿐이오니”(12)라는 말씀은 멸망의 자식을 제외하고는 하나도 멸망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멸망의”를 원어로 보면 속격인 것을 볼 수 있는데 소속이 “아버지의”(9, 10) 것인 아버지의 자녀가 아니라 사탄의 것인 “멸망의”(12) 자식이라는 것입니다.
제외된 가룟 유다는 앞서 어떤 사람이라고 하였습니까? 6장 70-71절을 보면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 열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너희 중의 한 사람은 마귀니라 하시니, 이 말씀은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를 가리키심이라 그는 열둘 중의 하나로 예수를 팔 자러라”고 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13장 10-11절을 보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 하시니, 이는 자기를 팔 자가 누구인지 아심이라 그러므로 다는 깨끗하지 아니하다 하시니라”고 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13장 26-27절에서도 볼 수 있는데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떡 한 조각을 적셔다 주는 자가 그니라 하시고 곧 한 조각을 적셔서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에게 주시니, 조각을 받은 후 곧 사탄이 그 속에 들어간지라 이에 예수께서 유다에게 이르시되 네가 하는 일을 속히 하라 하시니”라고 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였던 가룟 유다가 보존되지 않고 구원을 잃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본래부터 세상에 소속한 사람이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마귀 사탄의 소속이었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으므로 가룟 유다는 잃어버린 양이 아니었습니다. 본래부터 원수 마귀의 자식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그냥 함께 있었을 뿐인 것입니다.
그러다가 때가 이르자 예수님으로부터 떨어져 나가게 되었고 예수님을 팔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성경에 기록된 대로 되었다는 것입니다.
시편 41편 9절을 보면 “내가 신뢰하여 내 떡을 나눠 먹던 나의 가까운 친구도 나를 대적하여 그의 발꿈치를 들었나이다”라고 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말씀이 응하게 된다는 것을 요한복음 13장 18절을 보면 알 수 있는데 “내가 너희 모두를 가리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나는 내가 택한 자들이 누구인지 앎이라 그러나 내 떡을 먹는 자가 내게 발꿈치를 들었다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는 것이니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제자들 가운데 하나도 멸망하지 않고 아버지의 이름으로 보전하고 지키셨는데(12) 다만 멸망의 자식은 “성경을 응하게”(12) 되었다고 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성경이 말한 대로 응한 것은 맞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성경이 그렇게 만든 것은 아닙니다. 아버지와 아들을 믿지 않고 거부하는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 스스로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 그러한 자들의 말로를 성경에서 알려주고 있는데 그와 같이 된다고 하는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져왔고 앞으로도 계속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가룟 유다는 이러한 성경에 기록된 대로 되었으므로 그러한 가룟 유다를 제외하고는 보존하시고 지키셨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으므로 세상 가운데 그대로 두셨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선택 받지 못하고 아버지의 것이 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런데 성도들은 아버지의 이름으로 보전을 받게 되었으므로 멸망하지 않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서 이러한 기도를 드리신 것은 제자들이 예수님의 기쁨을 그들 안에 충만히 가지게 하려고 하셨다는(13) 것입니다.
지금 아들께서 아버지께로 가게 되셨으므로 세상에 남아있는 제자들이 이러한 기도의 내용을 알게 되면 불안해하거나 두려워하지 않고 기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내 기쁨”(13)은 어떤 기쁨이겠습니까? 예수님의 어떤 기쁨을 의미하겠습니까? 세상에서 배척을 당하시고 세상에서 십자가를 지시면서도 기뻐하실 수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비록 괴롭기는 하지만 기뻐하시므로 십자가를 지실 수 있으셨다는 것입니다(히 12:2).
또한 예수님의 기쁨은 참되고 영원하며 최상의 기쁨인 것입니다. 영원부터 영원까지 본래부터 가지신 기쁨이고(시 16:11) 제자들과 그러한 제자들의 말로 믿는 성도들로 말미암아 받게 되는 영광과 기쁨이기도(빌 4:1, 살전 2:19-20) 한 것입니다.
이와 같으므로 그러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기뻐할 때 진정으로 기뻐할 수 있기에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빌 3:1, 4:4)고 하는 것입니다.
또한 세상으로부터 고난을 당하게 되지만 주님께서 주시는 영광과 기쁨을 바라보고 소망 가운데 살아가라고(롬 8:17-18, 벧전 1:8, 4:13, 유 1:24, 계 19:7)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마무리 사역을 하시므로 본 단락에서만 보더라도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11)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11) “지금 내가 아버지께로 가오니”(13)라고 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버지께로 가시면서 기도드려주셔서 제자들에게도 예수님의 기쁨이 충만해지도록 해주신 것입니다.
● 17:14-19 진리로 보전하시도록 기도드리심
14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그들에게 주었사오매 세상이 그들을 미워하였사오니 이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으로 인함이니이다 15 내가 비옵는 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다만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16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사옵나이다 17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18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그들을 세상에 보내었고 19 또 그들을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그들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이다.
17장의 중반부인 9-19절은 예수님께서 아버지께서 주신 제자들을 세상에서 보전하시기 위해 기도드리시는 장면입니다.
이 가운데 14-19절은 세상 가운데서 성숙한 제자도로 거룩하게 살기 위해 아버지의 말씀인 진리로 보전하여 달라고 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말씀을 제자들에게 주시자 세상은 제자들을 “미워하였”(14)다고 하셨습니다.
아버지의 말씀을 제자들에게 주셨을 때는 아들께서 아버지로부터 나오신 것을 알고 아버지께서 아들을 보내신 것도 믿고(8)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기도 하는데(6) 세상은 미워하였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세상이 미워한 이유는 예수님께서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신 것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14)하였기 때문이라고 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다는 말씀을 16절에서도 반복하시는 것을 볼 수 있는데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사옵나이다”라고 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제자들이 아버지께는 속하였지만 세상에는 속하지 아니하였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으므로 세상은 자기 것이 아니므로 사랑하거나 편을 들어주지 아니하고 오히려 싫어하고 미워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기도드리신 것은 이와 같은 세상에서 제자들을 “데려가시기를”(15) 원해서 기도드리신 것이 아니라 다만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15) 위해 기도드리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악에 빠지지 않게”(15)는 악한 영과 악한 사람과 악한 생각과 악한 풍속과 기타 여러 가지 악한 것으로부터라는 의미로 볼 수 있습니다.
주기도문에서도 악에서 구하여 달라고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 벗어나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사는 동안에 악으로부터 보전하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으로 보전할 수 있겠습니까? 앞 단락에서는 아버지의 이름으로 보전하려고 하시는 것을 볼 수 있었고 본 단락에서는 진리로 보전하려고 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세상에 속하지 아니한 제자들이 세상에서 살아가려면 세상의 그 어떤 것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것에 속한 자로서 아버지의 말씀으로 살아가야 보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거룩하신 아버지여”(11)라고 하시면서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17)라고 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진리로 세상과 구별하여 거룩하게 살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진리는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아버지의 말씀이라는 것을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는데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17)라고 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세상 가운데 살아갈 때 아버지의 말씀인 진리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세상에 제자들을 보내셨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그들을 세상에 보내었고”(18)라고 하신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제자들을 세상에 보내서 진리를 전파하고 가르쳐서 성도들을 만들기 위해 파송하신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한 결과가 20절 가운데 보면 알 수 있는데 예수님께서 “그들의 말로 말미암아 나를 믿는 사람들”이라고 하신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17:20-26 예수님께서 성도들에 대한 기도를 드리심
● 17:20-23 성도들이 하나가 되도록 기도드리심
20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그들의 말로 말미암아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 21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22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23 곧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그들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20-26절은 17장의 후반부 장면인데 예수님께서 성도들을 위해 기도드리시는 장면입니다.
이 가운데 20-23절의 장면은 성도들이 하나가 되도록 하기 위해 기도드리시는 장면입니다.
성도들은 제자들의 말로 말미암아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20) 의미합니다. 제자들의 말로 믿는 그 당시의 성도들뿐만 아니라 그 이후로 현재의 성도들을 포함해 예수님께서 오실 때까지의 모든 성도들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기도의 내용을 보면 예수님께서 성도들이 하나가 되도록 하여 달라고 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세상으로 믿게 하고(21) 세상으로 알게 하려고(23) 하나가 되게 하여 달라고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아들을 보내신 것을 믿게 하기 위하여 성도들이 하나가 되게 하여 달라고 기도드리시고, 아버지께서 아들을 보내신 것과 또 아들을 사랑하신 것 같이 성도들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고 하신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보내신” 주제는 요한복음에서 중요하게 다루고 있는 주제인데 17장에 무려 6구절이나(3, 8, 18, 21, 23, 25) 언급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들을 통해 보내신 아버지를 알아야 되고 보내신 아버지를 통해 아들을 알아야 된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러한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이러하신 아버지와 아들께서는 창세 전부터 사랑으로 맺어진 사이이시고(23, 24, 26) 서로 거하시는 사이이신 것을(21, 23)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도들이 어떻게 하나가 될 수 있겠습니까? 아버지와 아들의 이러한 사랑과 거하심과 같이 성도들도 그러한 사이가 되어 아버지와 아들 안에도 거하게 되어 하나가 되도록(21, 23) 해주시려고 하셨습니다.
또한 이러한 실제적인 하나 됨을 이루기 위해 예수님께서 아들에게 주신 영광을 성도들에게 주신 것입니다.
22절에서 그러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성도들 상호간에는 다툼과 미움이 있어서 쉽게 하나가 되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남녀노소 빈부귀천 동서고금 등의 영육 간에 수많은 갈등들을 해결하려면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영광인 십자가로는 해결할 수 있습니다. 화목제물로 둘이 하나가 되게 해주시는(엡 2:13-14, 16, 골 1:20) 것입니다.
이렇게 아버지와 아들로 말미암아 성도들을 통해 세상으로 알게 하고 믿게 하려고 하신 것은 세상 가운데 아버지와 아들의 영광과 사랑을 나타내는 가운데 세상에 살고 있으면서 아직도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믿도록 하여 더 많은 성도들을 계속해서 얻기 위한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 17:24-26 예수님의 영광을 보도록 기도드리심
24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그들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 25 의로우신 아버지여 세상이 아버지를 알지 못하여도 나는 아버지를 알았사옵고 그들도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 알았사옵나이다 26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그들에게 알게 하였고 또 알게 하리니 이는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그들 안에 있고 나도 그들 안에 있게 하려 함이니이다.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고별기도를 드리신 내용 가운데 마지막으로 기도드리신 것을 보면 예수님의 영광에 대한 기도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처음 시작하실 때 영화로 시작하셔서 마치시면서도 영광으로 끝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영화”(5)와 “영광”(24)의 원어원형은 “δόξα(독사)”로 동일하므로 같은 뜻으로 보면 됩니다.
영광은 창세 전에 가지신 고유한 영광을 가리키기도 하고(5) 십자가로 말미암아 받게 되는 영광도 있고(1, 4, 22) 아버지께서 주신 제자들로 말미암아 받게 되는 영광도 있는 것을(10) 볼 수 있습니다.
본 단락에 나오는 24절의 영광도 창세 전에 가지신 영광으로 볼 수 있습니다. 24절 가운데 보면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이라고 한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영광을 성도들이 보게 하시려고 원하신(24)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영광을 보게 할 수 있겠습니까?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신 사랑이 성도들 안에 있고 아들께서도 성도들 안에 있게 하심으로(26) 영광을 볼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이렇게 하기 위하여(ἵνα, 히나) 아버지의 이름을 성도들에게 알게 하셨고 또한 알게 하시려고 하신다는(26) 것입니다.
이와 같으므로 세상은 아버지를 알지 못하지만 아들은 아버지를 아셨고 성도들도 아버지께서 아들을 보내신 것을 알았다는(25) 것입니다.
요한복음은 세상과 대비하고 세상과 관련하여 언급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곳에서도 세상은 알지 못한다고 하고 있습니다.
아들을 알면 아버지를 알게 되고 아버지를 알게 되면 아들을 알게 됩니다(12:44, 14:7). 모른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당연히 알게 됩니다. 아버지와 아들을 공경하게 되어 있는(5:23) 것입니다.
이와 같으므로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는 자는 적그리스도이고 아버지도 없는 것이 되지만 시인하는 자에게는 아버지도 있는 것입니다(요일 2:22-23).
성령님의 역사로 하나님 아버지를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게 되고(갈 4:6) 구주 예수라고 부르게 되는(고전 12:3)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은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통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시고 성도들도 영광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되기를 “아버지여”(24) “의로우신 아버지여”(25)라고 부르짖으면서 아버지께 간절히 기도드리신 것입니다.
한눈에 보는 요한복음 (재개정판)
재개정일 2024년 1월 12일
개 정 일 2020년 9월 17일
발 행 일 2018년 9월 5일
지 은 이 이서영
출 판 사 퍼플
출판등록 제300-2012-167호 (2012년 9월 7일)
주 소 서울시 종로구 종로1가 1번지
대표전화 1544-1900
홈페이지 www.kyobobook.co.kr.
ISBN 978-89-24-12034-9
ⓒ 이서영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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