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눈에 보는 요한복음 (재개정판) 16장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가심에 대해 이르심
마무리를 잘해야 하는데 인생을 어떻게 마무리하려고 하십니까? 13-17장은 예수님께서 붙잡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는 사명의 완수를 앞두고 마무리하시는 것에 관한 말씀인데 그 가운데 16장은 예수님께서 가심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16장 개요
✙✙✙ 16장 구절
요한복음 16장에서 대표적인 구절을 선정한다면 예수님께서 가시는 것에 대해 말씀하시는 28절입니다.
내가 아버지에게서 나와 세상에 왔고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노라 하시니.
✙✙✙ 16장 주제
요한복음 13-17장을 전체적으로 본다면 예수님께서 붙잡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는 사명의 완수를 앞두고 마무리하시는 관점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 가운데 16장은 예수님께서 아버지께로 가신다고 하시는 것에 대해 이르시는 관점에서 이러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16장은 예수님께서 사명의 완수를 앞두고 마무리하시면서 제자들을 대상으로 마무리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가심에 대한 예수님의 강화말씀을 배경으로 삼고 있는 16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아버지께로 가신다는 것에 대해 말씀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가시면서 예수님께서 계시지 않는 동안에도 제자들이 기뻐하고 평안할 수 있도록 보혜사 성령님에 대한 약속과 다시 오심에 대해 약속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것은 아버지께서 보내셔서 오신 예수님께서 아버지께로 가실 때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16장을 보면 이러한 흐름이 있으므로 이와 관련된 주제를 도출해 본다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가심에 대해 이르심이 됩니다.
✙✙✙ 16장 구조
16장에서는 예수님께서 아버지께로 가신다고 말씀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것을 두 부분으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습니다. 전반부는 1-15절인데 예수님께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떠나가시는 것이 유익하다고 하시면서 가시면 보혜사 성령님을 제자들에게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하시는 장면이고, 후반부는 16-33절인데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다시 오심을 약속하시는 가운데 제자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면 아버지께서 응답해주신다는 약속을 하시는 장면입니다.
이처럼 16장은 예수님께서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주신다고 하시는 장면과 예수님께서 다시 오신다고 하시는 장면으로 살펴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것을 통해 예수님께서 가신다는 것은 근심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유익이 된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떠나가시므로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주시게 되고 예수님께서 친히 다시 오시게 되므로 크게 기뻐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세상에서 환난을 당하지만 진리의 영이신 보혜사 성령님과 세상을 이기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담대하게 세상을 이기고 평안을 누리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러한 소망 가운데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간절히 구하여 응답 받게 하셔서 기쁨이 충만하도록 하게 해주시는 것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약속을 주신 것은 세상에 남겨진 제자들이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 근심하지 않고 기뻐하는 가운데 주어진 사역과 삶을 잘 감당해나갈 수 있도록 해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떠나가시기 전에 마지막으로 말씀하시면서 이러한 약속을 통해 위로의 말씀을 해주시고 해결책을 마련해주신 것입니다.
이러한 16장에서는 예수님께서 아버지께로 가신다고 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에게서 나오셔서 세상에 오셨다가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신다고 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아버지께로 가신다고(5, 7, 10, 17, 28) 하시면서 두 가지의 약속을 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주시겠다는(7) 것이고 하나는 다시 오겠다는(16, 22) 약속입니다.
이러한 것의 궁극적인 목적은 예수님께서 떠나가시고 남겨진 제자들이 실족하지 않고(1) 평안한 가운데(33) 주어진 사역과 삶을 잘 감당해나가도록 해주기 위한 것입니다. 닥쳐오는 핍박과(2) 환난과(33) 근심을(20, 22) 극복하게 하셔서 그러한 가운데서도 기뻐하고(20, 22, 24) 평안을 누리도록(33) 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처럼 16장을 통해 예수님께서 떠나가시므로 보혜사 성령님이 오시므로 오히려 유익이 된다는 것과(7) 다시 보게 되므로 기뻐하게 되고(22) 기도응답으로 말미암아 기쁨이 충만하게 되고(24) 예수님께서 아버지와 함께 계신다는 것과(32) 세상을 이기셨다는 것을 알게 해주셔서(33) 예수님께서 아버지께로 가신 이후에도 담대하게(33) 살아갈 수 있도록 해주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16장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아버지께로 가시는 것에 대해 강화해주신 말씀입니다.
이러한 16장은 예수님께서 떠나가신다고 하시므로 제자들이 근심하게(6, 20, 22) 되자 예수님께서 떠나가신 이후에 맞이하게 되는 상황을 극복할 수 있도록 해주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16장 가운데 처음에 나오는 말씀과 마지막에 나오는 말씀을 살펴보면 그러한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처음에 나오는 1절에서는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실족하지 않게 하려 함이니”라고 하셨으며 마지막에 나오는 33절에서는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고 하신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러한 것을 해결해주는 대책을 마련해주셨는데 보혜사이신 성령님을 약속해주시고 다시 오겠다고 약속해주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세상을 책망하시고(8)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는(13)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주셔서(7) 해결해주시고 예수님께서 아버지께로 가셨다가 다시 오심으로(16, 22) 해결해주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와 같으므로 16장에서는 아버지께 가신다고 언급하시는 말씀이 많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가는데”(5) “나더러 어디로 가는지”(5) “내가 떠나가는 것이”(7)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7) “가면 내가”(7)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10)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10) “조금 있으면 나를 보지 못하겠고”(17)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17) “내 말이 조금 있으면 나를 보지 못하겠고”(19)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노라”(28).
늘 함께 계시던 예수님께서 가신다고 하시니 제자들은 눈앞이 캄캄하고 마음이 아팠을 것입니다. 언제나 함께 하실 줄 알았는데 이별해야 한다고 하니 충격이 컸을 것입니다.
이와 같으므로 16장에는 근심에 대한 말씀도 많이 사용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내가 이 말을 하므로 너희 마음에 근심이 가득하였도다”(6) “너희는 근심하겠으나 너희 근심이”(20) “그 때가 이르렀으므로 근심하나”(21)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22).
예수님께서 이러한 근심을 해결해주시므로 16장은 기쁨과 관련된 말씀도 많이 사용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20) “아기를 낳으면 세상에 사람 난 기쁨으로 말미암아”(21)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22)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으리라”(22)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24).
이와 같으므로 이러한 해결과 연관하여 사용된 말씀도 볼 수 있는데 “너희로 실족하지 않게 하려 함이니”(1)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7)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16, 17, 19)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22) “너희로 내 안에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33)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33)는 말씀을 볼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후반부를 보면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16, 17, 19)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22)라고 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그 날에는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무 것도 내게 묻지 아니하리라”(23a)라고 하신 것을 보면 다시 오시는 것에 대해 말씀하신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다시 오심의 약속에 이어 곧바로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23)라고 하시면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는 것에 대해(23, 24, 26) 말씀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재회하는 것은 언제인지 모르므로 이 세상에 사는 동안 다시 오심을 소망하는 가운데 기도를 통해 응답 받으면서 살아가라는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16장 개관
단락 | 단락별 개요 | |
1-15 | 예수님께서 보혜사 성령님을 약속하심 | |
16-33 | 예수님께서 다시 오심을 약속하심 |
16:1-15 예수님께서 보혜사 성령님을 약속하심
● 16:1-3 예수님께서 실족하지 않도록 해주심
1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실족하지 않게 하려 함이니 2 사람들이 너희를 출교할 뿐 아니라 때가 이르면 무릇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 하리라 3 그들이 이런 일을 할 것은 아버지와 나를 알지 못함이라.
1-15절은 16장 가운데 전반부에 해당되는 말씀인데 예수님께서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하시는 장면입니다.
16장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강화의 말씀을 마치시면서 세상에 남아있는 제자들이 근심하지 않고 평안을 누리도록 해주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16장 가운데 나오는 전반부의 장면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주시겠다는 약속을 통해(7) 그러한 것을 해결해주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먼저 언급하신 것은 실족에 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실족하지 않게 하려 함이니”(1)라고 하신 말씀을 보면 강화의 말씀을 하시는 이유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제자들이 실족하지 않도록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실족하지”의 원어원형은 “σκανδαλίζω(스칸달리조)”인데 덫에 걸려 넘어지는 것을 의미하는데 “실족하다, 넘어지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용어가 수동태로 사용될 경우에는 믿음을 저버리거나 믿음에서 떨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실족하지”의 원어를 보면 “σκανδαλισθῆτε(스칸달리스데테)”로 수동태이므로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믿음이 그러한 상태에 놓이지 않도록 해주시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으로부터 실족하지 않도록 해주셨습니까? 1절 가운데 나오는 “이름은”의 시제를 보면 완료형이므로 앞에서 말씀하신 것을 의미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와 같으므로 세상과 연관하여 언급하신 문맥으로 보면 16장 1절 바로 앞에 나오는 15장 18-27절 말씀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세상이 미워하고(15:18, 19, 23, 24, 25) 박해하는(15:20) 세상에서 실족하지 않도록 해주시려고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말씀 다음에 이어서 나오는 2-3절은 앞에서 하신 말씀에 부연해서 말씀하시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출교하고(2) 죽이는(2) 상황에 처하게 되지만 그러한 가운데서도 실족하지 않도록 해주시려고 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일을 행하는 사람들은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일을 행하는 것은 “아버지와 나를 알지 못함이라”(3)고 하셨습니다.
15장 21절에 이미 말씀하신 것처럼 세상이 미워하고 박해하는 이유는 보내심을 받으신 예수님과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있어서도 알고 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으므로 하나님을 알되 힘써 하나님을 알아야(호 6:3, 6) 하는 것입니다.
● 16:4-6 예수님께서 근심에 대해 말씀하심
4 오직 너희에게 이 말을 한 것은 너희로 그 때를 당하면 내가 너희에게 말한 이것을 기억나게 하려 함이요 처음부터 이 말을 하지 아니한 것은 내가 너희와 함께 있었음이라 5 지금 내가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가는데 너희 중에서 나더러 어디로 가는지 묻는 자가 없고 6 도리어 내가 이 말을 하므로 너희 마음에 근심이 가득하였도다.
4-6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근심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앞에서와 같은 말씀을 하신 것은 그때를 당하면 제자들에게 말한 것을 기억나게 하려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또한 처음부터 이러한 말씀을 하지 않으신 것은 제자들과 함께 있었기 때문이라고도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떠나가시므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지금 내가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가는데”(5) 아무도 어디로 가는지 묻는 사람이 없다고 하시면서 이 말을 하므로 “너희 마음에 근심이 가득하였도다”(6)라고 하셨습니다.
“근심”의 원어원형은 “λύπη(뤼페)”인데 “슬픔, 고통”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제자들이 이러한 근심이 가득한 상태에 놓이자 예수님께서 위로해주시고 해결책을 주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16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떠나가시면서 앞으로 일어날 예언적인 말씀을 하신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궁극적으로는 위로의 말씀과 해결책을 주신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비록 제자들이 알아듣지도 못하고(5, 17-19) 근심하기도 하고(6, 20-22) 예수님을 혼자 내버려두고 흩어지기까지도 하는(32) 상태이지만 결국은 보혜사 성령님을 통해 알게 해주시고(13-15) 예수님께서 다시 오심으로 근심을 기쁨으로 바꾸어주시고(20-22) 기도응답으로 기쁨이 충만하게 해주시고(23, 24) 환난을 이기게 하셔서 평안을 누리게 해주시는 것을(33)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보내신 이에게로 가시므로 제자들이 근심이 가득하게 되고(6) 세상은 기뻐하지만 제자들은 근심하게 되나(20-22) 예수님께서 기쁨을 주시므로(20-22) 평안을 누리게 된다는(33)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보면 예수님께서 아버지께로 떠나가신 이후의 대책을 제자들에게 마련해주신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 16:7-15 예수님께서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주심
7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8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9 죄에 대하여라 함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10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11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라 12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리라 13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14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겠음이라 15 무릇 아버지께 있는 것은 다 내 것이라 그러므로 내가 말하기를 그가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하였노라.
16장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강화의 말씀을 마치시면서 세상에 남아있는 제자들이 근심하지 않고 평안을 누리도록 해주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16장 가운데 나오는 전반부의 장면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주시겠다는 약속을 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본 단락에서 그러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주시겠다는 약속과 관련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주신다는 약속은 엄청난 약속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들이신 예수님께서만 오신 것이 아니라 또 다른 보혜사이신 성령님까지 오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구약성경에 보내주시기로 이미 약속되어 있는 말씀을(욜 2:28-29, 겔 36:26-27) 이루어주셔서 아버지로부터 성령님을 보내주셔서 제자들과 함께 하게 해주신다는 것입니다.
본 단락의 7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라고 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보혜사 성령님에 대한 말씀은 앞 장에서도 이미 언급하신 적이 있으신데 14장 16절입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14장 26절에서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15장 26절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
“보혜사”의 원어원형은 “παράκλητος(파라클레토스)”인데 “돕는 자, 변호자, 위로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돕기 위해 부름을 받은 자라는 의미로 사용되던 용어입니다.
이 용어는 “παρά(파라)”와 “κλητός(클레토스)”의 합성어로 각각의 뜻은 “~의 곁에”와 “부름 받은”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와 같으므로 곁에서 도와주는 돕는 자(“the Helper”, NASB NKJV)의 의미가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볼 때 성령님께서 가르쳐주시고 증언하게 해주시는 등의 여러 가지 다양한 사역을 하실 때 보호자로서 돕는 역할을 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본 단락에서도 그러한 역할을 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7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떠나가시는 것이 유익하다고 하시면서 가시면 보혜사를 제자들에게 보내주시겠다고 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신다고 하자 제자들이 근심이 가득하였는데 해결책을 주신 것입니다.
보혜사이신 성령님께서 오시면 성령님께서 세상을 책망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책망하시리라”(8)의 원어원형은 “ἐλέγχω(엘렝코)”인데 “드러내다, 폭로하다”라는 뜻입니다. 잘못을 드러내어 꾸짖거나 유죄를 선고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세상이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께서 세상을 그렇게 하실 수 있으시고 또한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오셔서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해 책망을 하신다고 하셨는데(8) 죄에 대하여는 예수님을 믿지 아니하는 것이고(9) 의에 대하여는 예수님께서 아버지께로 가시므로 제자들이 다시 보지 못하는 것이고(10) 심판에 대하여는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은 것이라고(11) 하셨습니다.
세상이 기준으로 삼고 있는 죄는 죄를 지었을 때 죄에 대한 형벌을 받게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지 않는다고 해서 죄를 지었다고 하지는 않고 있습니다. 불신의 죄는 죄로 여기지도 않고 그러한 죄에 대한 형벌도 치르게 하지 않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한 것을 성령님께서 책망해주시는 것입니다.
이곳에서 말씀하시는 “의”(8, 10)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아버지께로 가시므로 의를 이루시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세상은 이 역시 의롭다고 하지 않고 있습니다.
세상은 이처럼 예수님을 믿지 아니하므로 죄를 짓게 되고 의를 거부하므로 구원을 받지 못하게 되고 결국은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러한 것에 대해 말씀하실 것이 많지만 제자들이 아직은 감당하지 못하므로 보혜사이신 진리의 성령님을 보내셔서 해결해주신다고 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리라.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12-13).
진리의 성령님이 오시면 도와주셔서 진리를 알게 해주시고 장래 일도 알게 해주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연속해서 강조하시는 것을 볼 수 있는데 13절에는 “알리시리라” 14절에는 “알리시겠음이라” 15절에는 “알리시리라”고 하신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용어의 원어원형은 “ἀναγγέλλω(아낭겔로)”인데 “선포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들으신 것을 분명하게 확실하게 권위 있게 선포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도와주시는 보혜사 성령님께서 알려주시는데 무엇을 알려주신다고 하셨습니까? 성령님께서 자신의 것을 알려주시지 않으시고 예수님의 것을 알려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진리의 성령님께서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13) 알려주시는데 “내 것을”(14, 15) 즉 아버지께 있는 것은 모두 예수님의 것인데(15) 그러한 것을 가지고 알려주신다는 것입니다.
16:16-33 예수님께서 다시 오심을 약속하심
● 16:16-23a 예수님께서 다시 오신다고 하심
16 조금 있으면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시니 17 제자 중에서 서로 말하되 우리에게 말씀하신 바 조금 있으면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시며 또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하신 것이 무슨 말씀이냐 하고 18 또 말하되 조금 있으면이라 하신 말씀이 무슨 말씀이냐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알지 못하노라 하거늘 19 예수께서 그 묻고자 함을 아시고 이르시되 내 말이 조금 있으면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므로 서로 문의하느냐 20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는 곡하고 애통하겠으나 세상은 기뻐하리라 너희는 근심하겠으나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 21 여자가 해산하게 되면 그 때가 이르렀으므로 근심하나 아기를 낳으면 세상에 사람 난 기쁨으로 말미암아 그 고통을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느니라 22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으리라 23a 그 날에는 너희가 아무 것도 내게 묻지 아니하리라.
16장의 후반부 장면은 16-33절인데 예수님께서 가신 이후에 다시 오신다고 하시는 장면입니다.
이 가운데 다시 오신다고 하시는 장면부터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조금 있으면 보지 못하고 조금 있으면 보게 된다고 하시자 제자들이 무슨 말씀인지 알아듣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조금 있으면”이라는 말씀이 16-20절에 연속해서(16, 16, 17, 17, 18, 19, 20) 언급되고 있으며 이와 연관된 말씀인 조금 있으면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는 말씀도 반복해서(16, 17, 19) 언급되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이러한 “조금 있으면”이라는 말씀과 또한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17)고 하시는 말씀이 무슨 말씀이며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알지 못하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물으려고 하는 것을 아시고 “내 말이 조금 있으면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므로 서로 문의하느냐”(19)라고 하셨습니다.
“문의하느냐”의 원어원형은 “ζητέω(제테오)”로 “찾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단순히 찾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갈망하고 연구하고 탐구하는 자세로 찾는 것을 의미합니다.
제자들이 이와 같이 말씀의 뜻을 찾아내기 위해 서로 탐문하고 논의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예수님께서 그러한 제자들에게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는 곡하고 애통하겠으나 세상은 기뻐하리라 너희는 근심하겠으나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20)고 말씀해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께로 떠나가시면 제자들은 크게 울고 몹시 슬퍼하겠지만 세상은 기뻐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제자들이 근심하겠지만 그 근심이 오히려 기쁨이 된다고 하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죽게 되시면 제자들은 근심하게 되고 세상은 기뻐하겠으나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다시 오시게 되면 제자들의 근심은 기쁨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여자가 해산하는 것을 예화로 들어서 말씀해주셨습니다. 여자가 아기를 낳을 때가 되면 산통으로 근심하게 되지만 아기를 낳고 나면 아기가 태어난 기쁨으로 말미암아 그 고통을 다시 기억하지 않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으므로 예수님께서 떠나가시면 제자들이 근심하게 되지만 다시 보게 되면 기쁘게 되고 그러한 기쁨을 빼앗을 자가 아무도 없다고 하셨습니다.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으리라”(22).
다시 보게 되는 날이 있는데 그렇게 되는 날에는 기뻐하게 되는데 그러한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을 정도라는 것입니다.
“자가 없으리라”의 원어원형은 “οὐδείς(우데이스)”인데 “아무도 아닌, 하나도 아닌, 어떤 것도 아닌”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므로 아무도 없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이렇게 되는 날에는 제자들이 아무 것도 묻지 않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23a절에서 그렇게 말씀하셨는데 “그 날에는 너희가 아무 것도 내게 묻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아무 것도”의 원어원형도 “οὐδείς(우데이스)”인데 그 어떤 것도 묻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만나 뵈옵고 체험적으로 알게 되므로 물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23절을 원어를 보면 마침표가 23a절 끝부분에 찍혀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와 같으므로 문맥상 16절부터 시작된 “조금 있으면”에 대한 말씀이 23a절까지 이어지고 있으므로 의미상으로는 한 단락으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이후에 다시 오시게 되면 그러한 일들이 일어나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조금 있으면 다시 오신다고 하셨는데 어느 때를 의미하겠습니까? 예수님의 시간은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다는 것을(벧후 3:8, 시 90:4) 알아야 알 수 있게 됩니다.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22)라고 하신 말씀은 놀라운 말씀입니다. 세상에 남겨진 제자들에게 큰 위로의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다시 오신다고 하신 약속은 엄청난 약속이 아닐 수 없습니다. 구약성경에서는 오시는 예수님을 가리키고 신약성경에서는 오신 예수님과 다시 오시는 예수님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다시 오신다는 약속은 험난한 세상에서 살아가야 하는 제자들에게 매우 기쁜 소식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느 때에 다시 오시겠습니까? 예수님의 시간표에 따라 필요한 경우에 오십니다.
가장 가까운 때는 부활하신 직후입니다. 요한복음을 기준으로 보면 예수님께서 안식 후 첫날에 부활하신 이후에(20:1) 그날 저녁 때에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문들을 닫고 있던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을(20:19-23)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부활하신 예수님을 다시 보게 되자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20:20)는 말씀처럼 기뻐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드레를 지나 제자들이 문들을 닫고 있었는데 이전에 없었던 도마도 함께 있었는데 그곳에 나타나신 것도(20:24-29) 볼 수 있습니다. 그 후에 디베랴 호수에서 제자들에게 세 번째 나타나신 것도(21:1-14) 볼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과 요한계시록을 기준으로 보면 승천하시기 직전에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을(행 1:6-8) 볼 수 있습니다. 이후로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다음에(행 1:9-11) 사도 요한이 밧모 섬에 있었는데 나타나신 것도(계 1:9-20)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계시를(계 1:1) 마치시면서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계 22:7, 12)라고 하신 것을 볼 수 있는데 이 말씀은 본 단락에 나오는 조금 있으면 다시 보게 된다는 말씀처럼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예수님의 시간에 맞춰서 이해해야 풀리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직접적인 제자는 아니었지만 사도 바울에게도 나타나신 것을 볼 수 있으며 아나니아에게도 나타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행 9:1-19, 18:9-10, 23:11, 22:5-21, 26:12-18).
이러한 그 무엇보다도 궁극적으로 다시 오시는 때는 세상 마지막 날에 재림하시는 때입니다.
세상 끝에 일어나게 되는 그 날에는 세상 임금과 세상의 모든 것이 분리되고 모든 것이 완성되어지므로 그야말로 기쁨을 빼앗기지 않게 될 것이고 예수님을 분명하게 보고 알게 되므로 아무 것도 물을 필요가 없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소망이 있기에 제자들이 환난 가운데 살아가게 되고 기쁘게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으므로 비록 세상에서 근심을 당하게 되지만 결국은 기쁨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하므로 16장에는 근심에 대한 구절이 많으나(6, 20, 21, 22) 예수님께서 이러한 근심을 해결해주시므로 기쁨과 관련된 구절도 많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20) “아기를 낳으면 세상에 사람 난 기쁨으로 말미암아”(21)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22)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으리라”(22)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24).
● 16:23b-27 예수님께서 기도응답을 약속하심
23b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 24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25 이것을 비유로 너희에게 일렀거니와 때가 이르면 다시는 비유로 너희에게 이르지 않고 아버지에 대한 것을 밝히 이르리라 26 그 날에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할 것이요 내가 너희를 위하여 아버지께 구하겠다 하는 말이 아니니 27 이는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온 줄 믿었으므로 아버지께서 친히 너희를 사랑하심이라.
예수님께서 다시 오겠다고 약속하신 이후에 기도응답에 대해 말씀해주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세상에 남겨진 제자들이 근심하게 되지만 다시 만날 때까지 기도로 해결해나가면 된다는 것을 말씀해주신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기도에 대한 것은 14-15장에서도(14:13-14, 15:7, 16) 이미 언급하신 말씀입니다. 요한복음에서는 공관복음에서 사용하고 있는 “기도”하다라는(προσεύχομαι, 프로슈코마이) 용어는 사용하지 않고 그 대신 독특하게도 “구하”다는(αἰτέω, 아이테오) 용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본 단락을 보면 예수님께서 구하는 것을 강조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기도응답이 되어 구하는 사람에게 기쁨이 충만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날에는 너희가 아무 것도 내게 묻지 아니하리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23-24).
예수님께서 구하는 것을 강조하신 것은 세상에 남겨지는 제자들에게 필수적으로 해야 할 일이 구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구하여 응답을 받을 때 세상을 이기고 근심을 극복하게 되고 사역을 감당할 수 있고 삶을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으므로 구하는 것에 대해 반복해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내 이름으로”(14:13, 14, 15:16, 16:23, 24, 26) 구하면 주신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구한다는 것은 제자들이 예수님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이고 예수님께서 보내신 아버지께로부터 오신 것을 믿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하기 때문에 아버지께서 친히 사랑해주신다는 것입니다.
27절에서 그러한 것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이는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온 줄 믿었으므로 아버지께서 친히 너희를 사랑하심이라.”
구함에 있어 이렇게 사랑을 회복할 때 응답이 잘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과의 사랑, 아버지와의 사랑, 서로간의 사랑을 회복하게 될 때 기도응답이 보다 잘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구하는 것은 필수입니다. 이 세상에 살아가는 동안 주님과 함께 동행하기 위해서 필수이며 세상과 근심을 이기고 실족하지 않고 필요한 것을 공급 받으면서 살아가는데 필수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함께 계실 때는 예수님의 능력과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으로 말미암아 모든 것을 해결 받게 되었지만 예수님께서 떠나가신 이후에는 제자들이 해결해야 하기에 구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몸소 기도의 본을 보이신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기도의 중요성을 아시고 제자들에게 구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와 같으므로 필요한 것은 구하여야 하는 것입니다(대상 4:9-10, 잠 30:7-9, 눅 11:13, 약 1:5).
● 16:28-33 예수님께서 아버지께로 가신다고 하심
28 내가 아버지에게서 나와 세상에 왔고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노라 하시니 29 제자들이 말하되 지금은 밝히 말씀하시고 아무 비유로도 하지 아니하시니 30 우리가 지금에야 주께서 모든 것을 아시고 또 사람의 물음을 기다리시지 않는줄 아나이다 이로써 하나님께로서 나오심을 우리가 믿사옵나이다 31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제는 너희가 믿느냐 32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 33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 사명의 완수를 앞두시고 제자들에게 강화의 말씀을 마지막으로 하시는 장면입니다.
핵심적인 중요한 말씀은 “내가 아버지에게서 나와 세상에 왔고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노라”(28)는 말씀입니다.
이러한 말씀을 통해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이시라는 것을 알 수 있게 되며 아버지로부터 오신 예수님의 신성에 대한 것도 알 수 있게 되고 이러한 것을 통해 하나님 아버지의 존재도 알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가신다는 것은 오셨기 때문에 가신다는 의미가 있으며 보내신 아버지에게서 오셨기에 그 아버지께로 다시 가신다는 의미도 있는 것입니다.
성도들의 여정도 이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필연적으로 맞이하게 되는 종말의 날이 되면 어디로 가겠습니까? 아버지께로 가지 않겠습니까?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듣고는 예수님께 말씀드리기를 지금은 밝히 말씀하시므로 “우리가 지금에야 주께서 모든 것을 아시고 또 사람의 물음을 기다리시지 않는줄 아나이다 이로써 하나님께로서 나오심을 우리가 믿사옵나이다”(30)라고 하였습니다.
17절을 보면 제자들이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고 하신 것이 무슨 말씀인지 모르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안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아시는 예수님을 알게 되었으며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오신 것을 믿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이제는 너희가 믿느냐”(31)라고 하셨습니다. 이어서 말씀하셨는데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32a)라고 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제자들이 믿기에 완전히 실족하지는 않지만 일시적으로 흔들리게 된다는 것을 말씀해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상황이 오더라도 실족하지 않게 되시는 것을 32b절에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 혼자 계시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함께 계시기(8:16, 29)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이제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마치면서 말씀해주셨습니다. 이제까지 제자들에게 일러주신 목적에 대해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33).
“이르는 것은”의 시제는 완료형이므로 이제까지 일러주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렇게 하신 것은 제자들이 예수님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시면서 마지막으로 명령하시면서 세상에서 환난을 당하지만 “담대하라”(33)고 하셨고 예수님께서 세상을 이기셨다고 하셨습니다.
“이기었노라”의 시제는 완료형으로 예수님께서 세상을 결정적으로 이기셨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 임금을 비롯해 모든 세상의 것들과 죄와 사망과 화와 저주와 악한 영들과 같은 잘못된 것들을 온전히 이기셨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으므로 제자들이 그러하신 예수님 안에서 평안을 누릴 수 있게 되고 환난을 당하지만 담대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담대하라”의 원어원형은 “θαρσέω(다르세오)”인데 “용기를 가지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본 단락 이외에 이 용어가 사용된 곳을 보면(마 9:2, 22, 14:27, 막 10:49) 안심하라는 의미로 사용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용기를 가지고 대처해나가면 극복하게 되므로 안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한눈에 보는 요한복음 (재개정판)
재개정일 2024년 1월 12일
개 정 일 2020년 9월 17일
발 행 일 2018년 9월 5일
지 은 이 이서영
출 판 사 퍼플
출판등록 제300-2012-167호 (2012년 9월 7일)
주 소 서울시 종로구 종로1가 1번지
대표전화 1544-1900
홈페이지 www.kyobobook.co.kr.
ISBN 978-89-24-12034-9
ⓒ 이서영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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