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눈에 보는 요한복음 (재개정판) 20장 예수님께서 무덤에서 부활하심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서 다른 사람을 부활하게 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부활하게 해주셔서 영원히 살게 해주십니다. 18-21장은 예수님께서 붙잡혀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시는 사명을 완수하시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그 가운데 20장은 예수님께서 무덤에서 부활하시고 나타나시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20장 개요
✙✙✙ 20장 구절
요한복음 20장에서 대표적인 구절을 선정한다면 예수님께서 무덤에서 부활하셨다는 1-2절입니다.
안식 후 첫날 일찍이 아직 어두울 때에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와서 돌이 무덤에서 옮겨진 것을 보고, 시몬 베드로와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그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되 사람들이 주님을 무덤에서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겠다 하니.
✙✙✙ 20장 주제
요한복음 18-21장을 전체적으로 본다면 예수님께서 붙잡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는 사명을 완수하시고 세상을 떠나 다시 아버지께로 가게 되시는 관점에서 볼 수 있습니다.
20장은 예수님의 그러한 사명 가운데 무덤에서 부활하시고 막달라 마리아와 제자들에게 나타나시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20장을 보면 이러한 흐름이 있으므로 이와 관련된 주제를 도출해 본다면 예수님께서 무덤에서 부활하심이 됩니다.
✙✙✙ 20장 구조
20장에서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것을 두 부분으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습니다. 전반부는 1-18절인데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무덤에 찾아온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신 장면이고, 후반부는 19-31절인데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문을 닫고 있던 제자들에게 나타나시고 이후에 제자들과 함께 있던 도마에게도 나타나신 장면입니다.
이처럼 20장은 예수님께서 무덤에서 부활하셔서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시는 장면과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두 번 나타나시는 장면으로 살펴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아버지께로 가게 되셨고 남아 있는 제자들을 보내게 되셨고 성령님을 부어주게 되신 것입니다.
이러한 20장에서는 예수님께서 사명을 완수하시는 과정 가운데 무덤에서 부활하시고 나타나시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고별강화하시고(13-16장) 아버지께 고별기도를 드리신(17장) 다음에 붙잡혀 심문을 받으시고(18장)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돌아가신(19장) 이후에 부활하시고 나타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장면 가운데 막달아 마리아에게 나타나시는 장면에서는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고 하라고 하시는 것을(17) 볼 수 있습니다.
제자들에게 나타나시는 장면에서는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낸다고 하시는 것과(21) 나를 보았으므로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은 자들이 복되다고 하시는 것을(29)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20장에서 보다 고유하게 사용하고 있는 용어를 살펴보면 “성경에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신 말씀을”(9)이라는 말씀입니다.
이와 같은 말씀은 앞서 살펴본 “응하게”라는 18장의 2구절과(18:9, 32) 19장의 3구절과(19:24, 28, 36) 그리고 19장 37절의 “또 다른 성경에 그들이 그 찌른 자를 보리라 하였느니라”고 한 것처럼 언급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0장 9절과 관련된 장면을 보면 막달라 마리아로부터 무덤의 돌이 옮겨졌다는 말을 듣고는 무덤에 찾아간 시몬 베드로와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제자는(2) 성경에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신 말씀을 아직 알지 못하는 것을(9)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것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말씀의 중요성과 사명완수에 대한 중요성을 알 수 있습니다.
두 제자는 부활하신다는 말씀을 그때까지 알지 못하였지만 말씀대로 부활하게 되신 것입니다. 두 제자가 아직 알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말씀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이러하므로 말씀이 무엇이라고 하는지 그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말씀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 말씀대로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입니다. 아버지의 뜻대로 사명을 완수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20장에 자주 등장하는 용어는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19, 21, 26)라는 말씀입니다. 평강의 중요성도 크다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이 두려워서 문을 닫고 있던 제자들에게 오셔서 하신 말씀이고(19) 보내신다고 하실 때 두려워하지 않도록 또 다시 말씀하셨고(21) 여드레 지난 이후에 문을 닫고 있던 제자들과 도마에게 오셔서 말씀해주신 것을(26)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20장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사명을 완수하시고 아버지께로 가신다는 것과 제자들에게 보내시는 것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를 붙들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17)고 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지상에 계속 머무시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떠나 다시 아버지께로 가신다는 것입니다. 사명을 완수하시고 아버지께로 가시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아버지께로 가시면 남아 있는 제자들이 사명을 계속 감당해나가야 하므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21)고 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보내실 때 무턱대고 보내시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을 받게 해주셔서(22) 보내주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20장 개관
단락 | 단락별 개요 | |
1-18 | 예수님께서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심 | |
19-31 |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두 번 나타나심 |
20:1-18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심
● 20:1-10절 막달라 마리아가 두 제자에게 알림
1 안식 후 첫날 일찍이 아직 어두울 때에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와서 돌이 무덤에서 옮겨진 것을 보고 2 시몬 베드로와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그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되 사람들이 주님을 무덤에서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겠다 하니 3 베드로와 그 다른 제자가 나가서 무덤으로 갈새 4 둘이 같이 달음질하더니 그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더 빨리 달려가서 먼저 무덤에 이르러 5 구부려 세마포 놓인 것을 보았으나 들어가지는 아니하였더니 6 시몬 베드로는 따라와서 무덤에 들어가 보니 세마포가 놓였고 7 또 머리를 쌌던 수건은 세마포와 함께 놓이지 않고 딴 곳에 쌌던 대로 놓여 있더라 8 그 때에야 무덤에 먼저 갔던 그 다른 제자도 들어가 보고 믿더라 9 (그들은 성경에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신 말씀을 아직 알지 못하더라) 10 이에 두 제자가 자기들의 집으로 돌아가니라.
1-18절은 20장 가운데 전반부에 해당되는 말씀인데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시는 장면입니다.
이러한 장면을 막달라 마리아가 두 제자에게 알리는 장면과 예수님께서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시는 장면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이 가운데 1-10절의 장면에서는 막달라 마리아가 안식 후 첫날 아침 일찍 무덤에 갔다가 돌이 무덤에서 옮겨진 것을 보고 시몬 베드로와 다른 제자에게 알리자 제자들이 무덤에 달려와서 무덤 안을 들여다보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안식 후 첫날 아침 일찍 아직 어두울 때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와서 돌이 무덤에서 옮겨진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자 시몬 베드로와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사람들이 주님을 무덤에서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겠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부활하셨다고 하기보다는 없어졌다고 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동산지기로 착각하고 “당신이 옮겼거든 어디 두었는지 말해주면 가져가겠습니다”라고 한 말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에 베드로와 다른 제자가 나와서 무덤으로 갔습니다. 둘이 함께 달렸는데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더 빨리 앞서 달려가서 맨 먼저 무덤에 갔습니다. 몸을 굽혀 세마포가 놓인 것을 보았으나 들어가지는 아니하였습니다.
시몬 베드로도 따라와서 무덤에 들어가 보니 세마포가 놓였고 또 머리를 쌌던 수건은 세마포와 함께 놓이지 않고 따로 한 곳에 포개져 있었습니다.
그때에야 무덤에 먼저 갔던 다른 제자도 들어가 보고 믿었습니다. 그들은 성경에 그가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신 말씀을 아직까지도 알지 못하였습니다. 이에 제자들이 자기들의 집으로 다시 갔습니다.
“다시 살아나야”(9)의 원어원형은 “ἀνίστημι(아니스테미)”인데 “일어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일어난다는 것은 다시 살아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무덤의 돌이 옮겨지고 세마포가 놓여 있고 수건은 따로 다른 한 곳에 포개져 있는 것을 보았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보고 제자들이 어렴풋이 알고 믿었을 수도 있지만(8)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나 뵙지는 못하였으므로 아직까지는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9)고 하신 말씀을 분명하게 알지 못했기에(9) 각자 자기 집으로 간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그 된 일을 놀랍게 여기며 집으로 돌아가니라”(눅 24:12)고 한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아직까지는 놀랍게 여기긴 하였지만 확실하게 믿지는 않았다는 것입니다.
● 20:11-18 예수님께서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심
11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더니 울면서 구부려 무덤 안을 들여다보니 12 흰 옷 입은 두 천사가 예수의 시체 뉘었던 곳에 하나는 머리 편에, 하나는 발 편에 앉았더라 13 천사들이 이르되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 이르되 사람들이 내 주님을 옮겨다가 어디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함이니이다 14 이 말을 하고 뒤로 돌이켜 예수께서 서 계신 것을 보았으나 예수이신 줄은 알지 못하더라 15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하시니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줄 알고 이르되 주여 당신이 옮겼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리이다 16 예수께서 마리아야 하시거늘 마리아가 돌이켜 히브리 말로 랍오니 하니 (이는 선생님이라는 말이라) 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붙들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시니 18 막달라 마리아가 가서 제자들에게 내가 주를 보았다 하고 또 주께서 자기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르니라.
11-18절의 장면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시는 장면입니다.
이 장면에서는 마리아가 두 천사를 만나게 되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나타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마리아가 무덤 밖에서 울면서 무덤 안을 보니 두 천사가 예수님의 시체가 놓여있던 곳에 머리 쪽과 발 쪽에 각각 앉은 것을 보았습니다.
천사가 왜 우느냐고 하자 마리아가 내 주님을 옮겨다가 어디에 두었는지 알지 못해서 그렇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을 하고는 뒤돌아서 예수님께서 서 계신 것을 보았으나 예수님이신 것은 알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15)라고 하시자 마리아는 동산지기인줄 알고 당신이 옮겼다면 어디에 두었는지 말해주면 가져가겠다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것을 보면 직접 만난다고 해서 무조건 해결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눈이 떠지지 않으면 예수님을 눈앞에 두고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은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동행을 하면서도 눈이 가려지니까 알지 못했습니다(눅 24:13-16).
그러다가 예수님께서 눈이 밝아지게 해주시자 알게 되는 것을(눅 24:30-31)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영의 눈을 떠지게 해주셔서 보이게 해주셔야 볼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마리아도 알지 못하다가 눈을 뜨게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마리아야”(16)라고 하시자 그때서야 알아보고는 “랍오니”(선생님)라고 하였습니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의 눈을 뜨게 해주시는 것처럼 마리아의 눈을 뜨게 해주셨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눈을 뜨게 된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 수 있습니다. 눈이 떠진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고 또한 큰 복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마리아가 선생님이라고 하자 예수님께서 “나를 붙들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17)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아버지는 우리 아버지이시고 예수님의 하나님은 우리 하나님이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모든 사명을 완수하시고 아버지께로 가시게 되시는 것도 알 수 있습니다.
성도들 또한 이 세상에서 떠날 때 예수님의 아버지 곧 우리 하나님 아버지께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 원수 마귀가 아비라면(8:38, 44) 그 아비가 있는 지옥으로 가서 영원히 살아야 하는데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천국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 가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자 막달라 마리아는 가서 제자들에게 내가 주님을 보았다고 하고 또 주님께서 자기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알렸습니다.
20:19-31 제자들에게 두 번 나타나심
● 20:19-23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심
19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20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21 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22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23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19-31절은 20장 가운데 후반부에 해당되는 말씀인데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두 번 나타나시는 장면입니다.
이러한 장면을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시는 장면과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도마에게 나타나시는 장면과 요한복음을 기록한 목적을 밝히는 장면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이 가운데 19-23절의 장면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이 두려워 문들을 닫고 있던 제자들에게 나타나시는 장면입니다.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이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모든 문들을 닫고 있었는데 예수님께서 오셔서 가운데 서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19)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제자들에게 못에 박히신 손과(19:18) 창에 찔리신 옆구리를(19:34) 보여주시자 제자들이 기뻐하게 되었습니다.
“보이시니”(20)의 원어원형은 “δεικνύω(데이크뉘오)”인데 “보여주다, 설명하다, 증명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단순하게 보이시는 정도가 아니라 마치 증명이라도 하듯이 자세하게 분명하게 보여주시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기뻐하게 된 것은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으나 이러하신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으리라”(16:22)고 하신 것처럼 다시 보게 되자 기뻐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말씀하시기를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21)고 하셨습니다.
본 단락의 문맥 안에서 본다면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보내신 것과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보내시는 것에는 차이가 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21절의 “보내신”의 원어원형은 “ἀποστέλλω(아포스텔로)”이고 “보내노라”의 원어원형은 “πέμπω(펨포)”이기 때문입니다.
뜻은 “보내다”로 동일하지만 아포스텔로는 임무를 주어서 보낸다는데 강조점이 있고 펨포는 보낸다는 것에 강조점이 있습니다.
이와 비슷한 말씀을 17장 18절에서 볼 수 있는데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그들을 세상에 보내었고”라고 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는 “보내신”과 “보내었고”의 원어원형은 모두 “ἀποστέλλω(아포스텔로)”입니다.
임무를 주어 보내신다는 의미에서 보면 17장 18절이 적정해보입니다. 그런데 살펴본 대로 20장 21절은 뜻은 같지만 각각 다른 원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무슨 이유가 있기에 다른 원어를 사용하였겠습니까? 그것은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17)고 하신 말씀처럼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아버지께로 가시기 전에 아버지를 높여드리는 가운데 아버지 중심의 사역을 강조하신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도 있지만 이유가 한 가지 더 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부활하신 이후에 제자들에게 아직 임무를 주지 아니하셨으므로 제자들에게는 “πέμπω(펨포)”를 사용하였을 것입니다. 임무를 주시는 것은 21장에 나오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아버지께서 아들을 보내주셨고 아들은 제자들을 보내주셨다는 것입니다. 보내시고 보내심을 받은 사실이 귀중하고 또한 그렇게 보내시고 보내심을 받을 때 받은 사명이 귀중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러한 말씀을 하시고 제자들을 향하여 숨을 내쉬며 말씀하시기를 “성령을 받으라”(22)고 하셨습니다.
곁에서 도와주시는 보혜사(14:16, 26, 15:26, 16:7)이시고 진리의 영이신(14:17, 15:26, 16:13) 성령님께서 영원히 함께 해주시고 진리를 더 잘 깨닫게 해주시고 예수님을 증언하게 해주시기 때문에 받게 해주셨을 것입니다.
이렇게 될 때 보내신 분과 보내심을 받아 만나게 되는 사람들을 존귀하게 여기고 사랑할 수 있게 되고 아버지와 아들을 믿게 하여 영생을 얻게 하는 등의 사역을 위해 받은 사명을 능력 있게 효과적으로 감당해 나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이어서 매우 중요한 말씀을 또 하셨는데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23)고 하셨습니다.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여주면 그들에게 죄가 사하여지게 되고(완료 수동형)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들에게 그대로 있게 된다는(완료 수동형) 것입니다.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23)의 원어원형은 “ἀφίημι(아피에미)”인데 “내보내다, 버려두다, 용서하다”라는 뜻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23)의 원어원형은 “κρατέω(크라테오)”인데 “붙잡다, 체포하다, 굳게 지키다”라는 뜻입니다.
잘못이나 죄들을(ἁμαρτίας, 하마르티아스) 마음에 담지 말고 내 보내버려서 용서해주면 그들이 용서 받게 되지만 마음에 꼭 붙잡고 굳게 지켜서 용서해주지 않으면 그들이 용서받지 못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풀면 풀리고 묶으면 묶인다는 법칙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 대해 행한 것이 그것으로 끝이 나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돌아온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으므로 특히 제자들이 사명을 감당하고 함께 동역하고 함께 삶을 나눌 때 이러한 일은 필수적이기에 말씀하신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 20:24-29 예수님께서 도마에게 나타나심
24 열두 제자 중의 하나로서 디두모라 불리는 도마는 예수께서 오셨을 때에 함께 있지 아니한지라 25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이르되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 26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고 27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28 도마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29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24-29절의 장면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있던 도마에게 나타나시는 장면입니다.
이 장면에서는 디두모라 불리는 도마가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 함께 있지 않았으므로 믿지 않자 8일 후에 예수님께서 문들이 닫혔던 집안에 제자들과 함께 있던 도마에게 나타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러한 도마에게 찾아오신 것은 하나도 잃지 아니하시려고(6:39, 17:12, 18:9) 찾아오신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의심하다가 믿음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나타내 보여주어 믿음을 가지도록 해주시려는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다른 제자들이 도마에게 우리가 주님을 보았다고 하자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고 내 손가락을 그의 손의 못 자국에 넣고 내 손을 그의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않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8일 후에 제자들이 다시 집안에 있을 때 도마도 함께 있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님께서 오셔서 한 가운데 서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26)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것을 다 보시고 아시고 시공간도 초월하시는 분이십니다. 제자들이 두려워서 아무리 모든 문을 꼭꼭 닫고 있어도 예수님께서는 거침없이 통과해버리시고 제자들 앞에 나타나신 것입니다.
이렇게 두 번씩이나 나타나신 예수님께서 두려워하는 제자들에게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19, 21, 26)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신 후에 예수님께서 도마에게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27)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도마로 하여금 손으로 직접 만져보고 확인해서 믿지 않는(ἄπιστος, 아피스토스) 자가 되지 말고 믿는(πιστός, 피스토스) 자가 되도록 해주신 것입니다.
이에 도마가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28)라고 하자 예수님께서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29)라고 하셨습니다.
인간적인 입장에서 생각하는 복도 있을 수 있지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믿음의 복이 더 큰 복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믿어서 영생을 얻는 것보다 더 큰 복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러한 복을 먼저 받고 그런 이후에 계속해서 주어지는 복을 받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러하므로 예수님을 육체적으로 직접 뵙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고 믿게 되었다는 것은 큰 복이 아닐 수가 없는 것입니다.
● 20:30-31 요한복음을 기록한 목적을 밝힘
30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31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30-31절의 장면은 요한복음을 기록한 목적을 밝혀주는 장면입니다.
이 장면에서는 예수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지만 오직 이것을 기록한 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신 것을 믿게 하여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라고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의 마지막 말씀인 21장 25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행하신 다른 많은 것도 있기에 만일 낱낱이 기록되었다면 이 세상이라도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25)할 것으로 생각한다고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기록을 하였다면 어마어마하게 많은 분량이 될 것이라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본 단락에서도 30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않은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다고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기록하였다면 엄청난 분량의 기록이 될 것입니다.
그러한 것들 가운데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31)이라고 한 것은 핵심적인 것을 정리해서 기록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간단히 요약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요한복음의 기록목적을 언급한 20장 31절에서 그러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신 것을 믿게 하여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 목적이라는 것입니다.
그 유명한 요한복음의 3장 16절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이러한 것은 아버지의 뜻이라는 것도 알 수 있는데 6장 38-40절입니다.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그리고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고별기도를 드리실 때 영생에 대해 말씀하신 것을 보면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17:3)라고 하셨습니다.
이와 같으므로 하나님 아버지를 알고 하나님 아버지께서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신 것을 믿어 영생을 얻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자 메시야(1:41, 4:25) 곧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스도께서 구해주시는 구주가(요 4:42, 눅 2:11, 딤후 1:10, 딛 3:6, 벧후 1:11, 3:18, 요일 4:14) 되시므로 구원하여 주십니다.
이러하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지 아니하는 사람을(9:22) 볼 수가 있는가 하면 믿는 사람들도(11:27) 볼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가르치는 것을(행 5:42, 9:22, 17:3, 18:5, 28) 볼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을 대하면서 이러한 것을 놓치면 아무리 훌륭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아무런 소용이 없게 됩니다. 구원을 얻지 못하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와 같으므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그리스도시라는 것을 믿고 영생을 얻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한눈에 보는 요한복음 (재개정판)
재개정일 2024년 1월 12일
개 정 일 2020년 9월 17일
발 행 일 2018년 9월 5일
지 은 이 이서영
출 판 사 퍼플
출판등록 제300-2012-167호 (2012년 9월 7일)
주 소 서울시 종로구 종로1가 1번지
대표전화 1544-1900
홈페이지 www.kyobobook.co.kr.
ISBN 978-89-24-12034-9
ⓒ 이서영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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