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눈에 보는 요한복음 (재개정판) 5장 예수님께서 아버지로부터 오심
신뢰와 권위는 어디서 옵니까? 누구로부터 왔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믿을 수 없는 사람으로부터 왔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아니면 믿을 수 있는 사람으로부터 온 사람이라면 그 사람을 어떻게 대하게 되겠습니까? 그렇다면 예수님은 누구로부터 오셨습니까?
5장 개요
✙✙✙ 5장 구절
요한복음 5장에서 대표적인 구절을 선정한다면 예수님께서 아버지로부터 오셨다는 24절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 5장 주제
요한복음 1-6장을 전체적으로 본다면 아버지로부터 세상에 오신 예수님의 관점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는 어떤 예수님이신가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가운데 5장은 예수님께서 아버지로부터 오셨다는 관점에서 이러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5장에서는 믿음의 대상이신 예수님께서 보내신 아버지로부터 오셔서 영생을 얻게 해주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5장을 보면 이러한 흐름이 있으므로 이와 관련된 주제를 도출해 본다면 예수님께서 아버지로부터 오심이 됩니다.
✙✙✙ 5장 구조
5장에서는 예루살렘에 있는 양의 문 곁에 있는 베데스다 못에서 일어난 장면에 대해 기록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것을 두 부분으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습니다. 전반부는 1-18절인데 베데스다 못에서 일어난 일이고 후반부는 19-47절인데 베데스다 못에서 일어난 일 이후에 예수님께서 강화(講話)하시는 말씀으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전반부 장면은 삼십 팔년 된 병자가 고침을 받게 되자 유대인들이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고치신 것과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하신 것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는 장면입니다.
후반부 장면은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 강화형식으로 대답해주시는 장면인데 심판과 증언에 대하여 언급하시면서 예수님께서 아버지께서 보내주셔서 오신 것과 믿음과 영생에 대한 것을 말씀하시는 장면입니다.
이러한 5장에서는 아버지로부터 오신(24, 30, 36, 37, 38) 예수님께서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일을 행하시고(17, 19, 20) 자신의 뜻이 아니라 보내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시려는 것을(30)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보내신 아버지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다는 것을 말씀하시고(24) 성경이 자신에 대하여 증언하고 기록하고 있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을(39, 46)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구조 속에서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오신 것과 관련된 말씀을 전반부에서 살펴보면 17-18절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 유대인들이 이로 말미암아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을 범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 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
후반부에서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버지께서 보내셔서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오신 것과 관련된 말씀을 살펴보면 24절과 30절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내가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듣는 대로 심판하노니 나는 나의 뜻대로 하려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뜻대로 하려 하므로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
이를 통해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버지께서 보내셔서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오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36-37절과 43절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내게는 요한의 증거보다 더 큰 증거가 있으니 아버지께서 내게 주사 이루게 하시는 역사 곧 내가 하는 그 역사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나를 위하여 증언하는 것이요, 또한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친히 나를 위하여 증언하셨느니라 너희는 아무 때에도 그 음성을 듣지 못하였고 그 형상을 보지 못하였으며. 나는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으매 너희가 영접하지 아니하나 만일 다른 사람이 자기 이름으로 오면 영접하리라.”
5장 개관
단락 | 단락별 개요 | |
1-18 | 예수님께서 보내심을 받은 자로서 고치심 | |
19-47 | 예수님께서 보내심을 받은 자로서 강화하심 |
5:1-18 예수님께서 보내심을 받은 자로서 고치심
● 5:1-9a 예수님께서 삼십 팔년 된 병자를 고치심
1 그 후에 유대인의 명절이 되어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니라 2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 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 거기 행각 다섯이 있고 3 그 안에 많은 병자, 맹인, 다리 저는 사람, 혈기 마른 사람들이 누워 [물의 움직임을 기다리니 4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움직이게 하는데 움직인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 5 거기 서른여덟 해 된 병자가 있더라 6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래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7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8 예수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9a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
베데스다 못에서 일어난 일은 1-9a절에 나오는 베데스다 못에서 삼십 팔년 된 병자가 고침을 받게 되는 장면과 9b-18절에 나오는 병자가 고침을 받게 된 이후의 장면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9a절의 장면입니다. 유대인들의 명절이 되어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셨습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양의 문 곁에는 다섯 행각이 있는 히브리말로 베데스다라고 하는 못이 있습니다. 그 행각들 안에 수많은 병든 사람들, 맹인들, 다리 저는 사람들, 혈기 마른 사람들이 누워있었습니다.
그들은 물이 움직이기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왜냐하면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움직이게 하는데 움직인 후에 맨 먼저 들어가는 사람은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곳에 “서른여덟 해 된 병자”(5)가 있었습니다.
6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그 사람이 누워 있는 것을 보시고 이미 오래된 줄 아시고 “네가 낫고자 하느냐”라고 하시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병이 들어 삼십 팔년 동안이나 누워서 지냈으니 오랜 세월동안 얼마나 아프고 고생했겠습니까? 그렇게 힘들게 살아온 것을 예수님께서 보시고 아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처럼 겪고 있는 아파하는 질병을 아시고 계십니다. 그리고 친히 감당하셔서 해결해주십니다(사 53:3-4, 10). 이러한 질병을 예수님께서 채찍에 맞으심으로 나음을 받게 되었습니다(사 53:5, 벧전 2:24). 그리하여 내세에서는 완전히 낫게 되므로 아픈 사람이 한 사람도 없게 되는 것입니다.
6절 가운데 “하느냐”라는 말씀의 원어원형은 “θέλω(델로)”인데 “바라다, 원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건강하기를 바라느냐 원하느냐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이와 같으므로 “주여 그러하오이다”(9:28)라는 식으로 말했으면 좋았을 것인데 그 병자는 다소 엇박자로 보이는 대답을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7)라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말은 어쩌면 자기를 못에 넣어주는 사람이 없다는 원망하는 투로 말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이번에도 또 틀렸구나 하면서 자포자기하는 말인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못에 맨 먼저 들어가야 낫는데 이런 상황에서 무슨 수로 들어가서 나을 수 있느냐는 말인지도 모릅니다.
이와 같으므로 낫기를 원하느냐라는 말씀에 그렇게 되기를 원합니다라고 대답하지 않은지도 모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예수님께서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8)고 하셨습니다. “걸어가라”의 원어원형은 “περιπατέω(페리파테오)”인데 “돌아다니다”라는 뜻입니다.
일어나서 그동안 누워있던 자리를 들고 겨우 걷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이리저리 마음껏 돌아다니고 싶은 곳으로 다녀보라는 것입니다. 그러자 그 사람이 즉시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갔습니다(9).
이러한 것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예수님께서 큰 권능을 보여주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떻게 알 수 있는가하면 먼저 병자의 영적인 상태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은 구주가 되신 예수님을 몰랐습니다. 그리고 낫기를 원하느냐라는 말씀에 다소 엉뚱한 대답을 하는 것으로 볼 때 믿음이 별로 없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말씀이 떨어지자 그대로 벌떡 일어나서 자리를 들고 걸어간 것을 보면 예수님의 크신 권능으로 고침을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삼십 팔년 동안이나 누워서 지내던 세월에 종지부를 찍고 즉시 일어나게 해주신 것을 볼 때도 예수님께서 큰 권능을 행하여주셨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사랑을 베풀어주셨다는 것도 알 수 있습니다. 믿음의 고백을 할 줄도 모르고 고쳐주는 사람이 누구인지도 모르는 병자이지만 병이 오래된 줄 아시고 고쳐주신 것을 볼 때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삼십 팔년 된 병자가 예수님으로부터 고침을 받기 전에는 이 사람이 처한 인간적인 입장에서는 모든 것이 절망적이어서 희망을 가질 수가 없었습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가운데 처해 있다가 무모하다고 할 정도의 황당한 말씀을 듣게 되었습니다. 못에 들어가게 해서 낫게 해주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자리에서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나고 말았습니다(9:6-8).
이처럼 예수님은 삼십 팔년이란 오랜 세월 동안 병이 든 사람을 아시고 고쳐주신 것입니다.
● 5:9b-15 예수님께서 고침을 받은 병자에게 경고하심
9b 이 날은 안식일이니 10 유대인들이 병 나은 사람에게 이르되 안식일인데 네가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이 옳지 아니하니라 11 대답하되 나를 낫게 한 그가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더라 하니 12 그들이 묻되 너에게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한 사람이 누구냐 하되 13 고침을 받은 사람은 그가 누구인지 알지 못하니 이는 거기 사람이 많으므로 예수께서 이미 피하셨음이라 14 그 후에 예수께서 성전에서 그 사람을 만나 이르시되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 15 그 사람이 유대인들에게 가서 자기를 고친 이는 예수라 하니라.
9b-18절은 삼십 팔년 된 병자가 고침을 받게 된 이후의 장면입니다. 이곳에서는 안식일에 대해 언급하면서 하나님 아버지와 연관하여 언급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9b절을 보면 “이 날은 안식일이니”라고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원어성경 9b절의 우위접속사 “δὲ(데)”는 “그러나, 게다가, 더구나” 등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접속사의 의미를 살펴보면 이 일로 말미암아 이후로 무언가 심상찮은 일이 일어나게 된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병자를 고친 날이 안식일이었는데 “δὲ(데)”라고 한 것은 안식일에 병자가 낫게 된 것은 잘 된 일이긴 하지만 그런데 그 때문에 무엇인가 큰 일이 일어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10절 이후를 보면 곧바로 그러한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10-15절을 보면 주로 고침을 받은 삼십 팔년 된 병자와 안식일 규정을 따지는 유대인들에 대한 내용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삼십 팔년이나 된 병이 낫게 되면 축하할 일인데 그 사람에게 오히려 캐묻고 따지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안식일에는 자리를 들고 다니지 않아야 하는데 들고 갔다는 것입니다.
이 일은 오늘날 입장에서 보면 사소한 일 같아 보이지만 그 당시로 봐서는 어마어마한 사건이 터진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안식일에 일하는 자는 모두 죽여야 하기(출 31:14, 15, 35:2) 때문입니다.
이와 같으므로 유대인들이 따지자 무슨 봉변을 당할지 몰라 겁이 덜컥 났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변명하는 것처럼 말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나를 낫게 한 그가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해서(11) 자리를 들고 갔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말은 책임을 면하기 위해 핑계를 대는 말로 볼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자 그들이 “너에게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한 사람이 누구냐”라고 물었습니다. 그러나 고침을 받은 사람은 그가 누구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그곳에 사람들의 무리가 많으므로 예수님께서 이미 피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제는 알고 싶어도 알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그 후에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그 사람을 “만나”(14) 말씀하셨습니다. “만나”라는 용어를 살펴보면 원어원형이 “εὑρίσκω(휴리스코)”인데 “찾다, 발견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것을 대부분의 영어성경은 “found”라고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것은 예수님께서 그 사람을 우연히 만난 것이 아니라 찾아서 만났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미 피하셨다는데(13) 그런데 이제 와서 왜 나타나셨겠습니까? 만나게 되었다고 해도 고침을 받은 자가 일러바쳐서 잡혀 죽을 수도 있는데 왜 그렇게 찾으셨겠습니까?
고맙다는 말을 하지 않아 섭섭하다는 말씀을 하려고 찾으셨습니까? 아닙니다. 지금은 비록 고침을 받았지만 또다시 언제 더 심한 병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것을 아시기에 그 사람을 사랑하므로 예방차원에서 미리 말씀해주시기 위해 찾으신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말씀을 해주시기 위해서 입니까? 14절 가운데 보면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삼십 팔년 동안 실컷 고생했으면 이젠 그만 고생해야 되는데 이보다 더 나쁜 병이 생겨서 더 큰 고생을 어떻게 감당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고침을 받고 나서 잊어버리고 죄지을 수 있는 연약함이 있을 수 있으므로 이러한 일들이 생기지 않도록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진심어린 경고를 해주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후에 일어난 일을 보면 뉘우친 사실을 발견할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자기 혼자만 살겠다고 핑계를 대더니(11) 이제는 일러바치기까지 하는 모습을(15) 볼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이 유대인들에게 가서 “자기를 고친 이는 예수님이십니다”라고 하였습니다(15). “하니라”(15)의 원어원형은 “ἀναγγέλλω(아낭겔로)”인데 “보고하다”라는 뜻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의미가 있으므로 좋게 이야기하면 보고이고 다르게 이야기하면 일러바치는 것으로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으므로 예수님께서 그 사람에게 더 나쁜 더 심한 병이 생기지 않도록 죄를 더 이상 짓지 말라고 하셨는데 죄를 짓고 있다고 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고쳐준 자가 누구인지도 몰랐고 감사드리지는 못할지언정 일러바친 것을 보면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 그렇게 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은 삼십 팔년 동안이나 병으로 누워서 지긋지긋하게 고생하던 나를 고쳐주신 분이십니다”라고 유대인들을 포함해서 만나는 사람마다 증언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 일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안식일 규정만 따지는 유대인들에게는 사랑은 없고 메마른 규정만 살아 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죽을 지경에 빠진 아픈 사람이 나아도 축하는 할 줄 모르고 안식일을 어긴 규정만 눈에 보였다는 것입니다.
또한 고침을 받은 병자는 고쳐주신 예수님을 몰랐으며 예수님께 감사하지도 않고 고쳐주신 예수님을 증언하지도 않고 오히려 일러바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 5:16-18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이려함
16 그러므로 안식일에 이러한 일을 행하신다 하여 유대인들이 예수를 박해하게 된지라 17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 18 유대인들이 이로 말미암아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을 범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 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
16-18절은 안식일과 하나님 아버지에 관한 것인데 예수님과 이에 대해 따지는 유대인들에 대한 내용입니다.
고침을 받은 병자가 유대인들에게 가서 자기를 고친 사람은 예수님이라고 하자 유대인들이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이 일을 행하시기 때문에 예수님을 박해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시길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17)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내 아버지”라고 하시면서 내 아버지께서 지금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로 말미암아 유대인들이 더욱 더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18절 가운데 “고자 하니”라는 말씀을 살펴보면 원어원형이 “ζητέω(제테오)”로 요구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찾다, 갈망하다, 애쓰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것을 영어 성경에서는 “tried”(NIV)나 “were seeking”(NASB), “sought”(NKJV)라고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하므로 단순하게 그저 죽여도 되고 안 죽여도 되는 상황이 아니라 예수님을 꼭 죽여야겠다는 것을 갈망하고 있는 상황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죽이려고 하였습니까? 죽이려고 하는 이유는 “안식일을 범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 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기 때문입니다(18).
18절 가운데 나오는 “범할”의 원어원형은 “λύω(뤼오)”인데 “풀다, 풀어주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깨뜨리다, 폐지하다” 등의 뜻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것을 영어 성경에서는 “was breaking”(NASB), “was he breaking”(NIV), “broke”(NKJV)라고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유대인들이 보는 입장에서는 예수님은 안식일을 지키지 않고 마구 허물어뜨리고 깨뜨리고 폐지하는 것처럼 보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죽이려고 한 것입니다.
거기에다가 더욱 더 죽이려고 안달이 난 것은 하나님을 “내 아버지”(17)라고 하면서 하나님을 자기 자신의 아버지라고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18) 삼았기 때문입니다.
18절 가운데 나오는 “삼으심”의 원어원형은 “ποιέω(포이에오)”인데 “만들다, 창조하다, 행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것을 영어 성경에서는 대부분 “making”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볼 때 예수라는 사람이 자기 자신을 하나님과 동등한 것으로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으므로 유대인들의 입장에서는 발칵 뒤집어지고도 남는 어마어마한 사건이 터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자를 살려두면 안 된다고 한 것입니다.
이러한 일을 통해 예수님은 어떠하신 분이신지를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보내신 하나님의 아들이 확실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17절을 통해 드러내주시고 유대인들이 말한 18절을 통해 비록 예수님을 죽이려는 이유를 자신들의 입을 통해 한 말이지만 이 말을 통해 그러한 사실을 드러내주고 있는 것을 볼 때 알 수 있는 것입니다.
5:19-47 예수님께서 보내심을 받은 자로서 강화하심
● 5:19-30 예수님께서 심판에 대해 말씀하심
19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 20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자기가 행하시는 것을 다 아들에게 보이시고 또 그보다 더 큰 일을 보이사 너희로 놀랍게 여기게 하시리라 21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 같이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 22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23 이는 모든 사람으로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 같이 아들을 공경하게 하려 하심이라 아들을 공경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를 보내신 아버지도 공경하지 아니하느니라 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25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26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 27 또 인자됨으로 말미암아 심판하는 권한을 주셨느니라 28 이를 놀랍게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29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30 내가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듣는 대로 심판하노니 나는 나의 뜻대로 하려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뜻대로 하려 하므로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
베데스다 못에서 일어난 일 이후에 예수님께서 강화(講話)하신 말씀이 19-47절에 나오는데 강화하신 말씀만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강화의 말씀은 기를 쓰고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는 유대인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이러한 것을 두 부분으로 나눌 수가 있는데 19-30절과 31-47절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이러한 구조로 보면 19-30절은 심판에 대하여, 31-47절은 증언에 대하여 언급하시면서 예수님과 아버지와의 관계에 대해 말씀하시고 믿음과 영생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것을 통해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보내주셔서 오셨으며(24, 30, 36-38, 43)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것과(19-21, 36) 아버지의 뜻에 따라(30) 살아나게 해주시고(21, 25) 믿어 영생을 얻고(24)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을(34) 볼 수 있습니다.
19-30절 가운데 19a절을 보면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라고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자신을 죽이려는 유대인들에게 하신 말씀인데 예수님께서 강화의 말씀을 하시는 배경을 설명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일상적으로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원어성경 19a절의 “ ̓Απεκρίνατο(아페크리나토)”를 보면 유대인들의 말에 대답하시면서 말씀하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용어의 원어원형은 “ἀποκρίνομαι(아포크리노마이)”인데 “대답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배경에서 이후로 나오는 모든 말씀을 살펴보면 유대인을 향해 부정적인 측면에서 대답하신 말씀이지만 역설적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믿는 자들을 향해 긍정적인 측면에서 주신 말씀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9-30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심판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아버지와 어떤 관계인지에 대해 대답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먼저 말씀하신 것은 아버지와의 관계에 대한 직접적인 말씀인데 19b-21절입니다. 아들은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으므로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것을 아들도 행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아들이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자기가 행하시는 것을 다 아들에게 보이시고 또 그보다 더 큰 일을 보이사 너희로 놀랍게 여기게 하시리라.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 같이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것을 아들도 행하시므로 아버지께서 죽은 자를 일으켜 살리시는 것처럼 아들께서도 이러한 살리시는 일을(21, 25) 하신다는 것입니다. 살려주지 아니하신다면 영원히 죽은 그대로 있을 수밖에 없는데 살려주시는 것입니다.
그러한 일을 함에 있어 필요한 권세를 아버지께서 주시는 것을 22절에서 볼 수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보내신 아버지께서 모든 심판을 “아들에게”(22) 맡기셨습니다. 이렇게 하신 것은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처럼 아들도 공경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는 모든 사람으로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 같이 아들을 공경하게 하려 하심이라 아들을 공경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를 보내신 아버지도 공경하지 아니하느니라”(23).
이어서 예수님께서 살리는 것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보내신 아버지에 대한 것을 말씀해주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24).
아들이 하는 말을 듣고 아들을 보내신 아버지를 믿는 자는 영생을 가지고 심판에 이르지 않는데 왜냐하면 사망에서 도리어 생명으로 옮겨졌기 때문입니다.
24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라고 하신 말씀을 보면 예수님과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를 얼마나 강조하고 있는가를 알 수 있으며 믿음과 영생을 얼마나 강조하고 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이어서 계속해서 살리는 것에 대해 말씀하셨는데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듣는 자들은 살아난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가운데 마지막 날에 들을 때가 오는데 그때에는 생명의 부활과 심판의 부활로 나오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 또 인자됨으로 말미암아 심판하는 권한을 주셨느니라. 이를 놀랍게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25-29).
22절과 같이 보내신 아버지께서 “심판하는 권한을”(27) 아들에게 주셨습니다. 이러하신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 심판의 부활로 살아난다면 얼마나 끔찍하겠습니까?
이와 같으므로 심판하시는 권세를 가지신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었을 때 생명의 부활로 살아나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러한 말씀을 하신 이후에 심판을 자신의 뜻대로 하지 않고 보내신 아버지의 뜻대로 하려고 하므로 심판이 의로운 것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듣는 대로 심판하노니 나는 나의 뜻대로 하려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뜻대로 하려 하므로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30).
이렇게 이번 단락을 마치면서(19-30) 강화를 시작하실 때 하신 말씀과 같이(19) 30절에 또다시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다는 것을 말씀하시고 보내신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신다는 것을 거듭 강조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 5:31-47 예수님께서 증언에 대해 말씀하심
31 내가 만일 나를 위하여 증언하면 내 증언은 참되지 아니하되 32 나를 위하여 증언하시는 이가 따로 있으니 나를 위하여 증언하시는 그 증언이 참인 줄 아노라 33 너희가 요한에게 사람을 보내매 요한이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였느니라 34 그러나 나는 사람에게서 증언을 취하지 아니하노라 다만 이 말을 하는 것은 너희로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 35 요한은 켜서 비추이는 등불이라 너희가 한때 그 빛에 즐거이 있기를 원하였거니와 36 내게는 요한의 증거보다 더 큰 증거가 있으니 아버지께서 내게 주사 이루게 하시는 역사 곧 내가 하는 그 역사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나를 위하여 증언하는 것이요 37 또한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친히 나를 위하여 증언하셨느니라 너희는 아무 때에도 그 음성을 듣지 못하였고 그 형상을 보지 못하였으며 38 그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지 아니하니 이는 그가 보내신 이를 믿지 아니함이라 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40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 41 나는 사람에게서 영광을 취하지 아니하노라 42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 속에 없음을 알았노라 43 나는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으매 너희가 영접하지 아니하나 만일 다른 사람이 자기 이름으로 오면 영접하리라 44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아니하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 45 내가 너희를 아버지께 고발할까 생각하지 말라 너희를 고발하는 이가 있으니 곧 너희가 바라는 자 모세니라 46 모세를 믿었더라면 또 나를 믿었으리니 이는 그가 내게 대하여 기록하였음이라 47 그러나 그의 글도 믿지 아니하거든 어찌 내 말을 믿겠느냐 하시니라.
후반부의 마지막 단락인 31-47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증언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아버지와 어떤 관계인지에 대해 대답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것을 통해 예수님께서 여러 가지 경로의 증언을 통해 구원을 받게 하려고 하시지만 이를 끝내 거부하는 유대인들의 안타까운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이와 같으므로 증언의 효력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내가 만일 나를 위하여 증언하면 내 증언은 참되지 아니하되, 나를 위하여 증언하시는 이가 따로 있으니 나를 위하여 증언하시는 그 증언이 참인 줄 아노라”(31-32).
자기가 자기를 증언한다면 참되지 못하지만 다른 증언자가 증언해준다면 그 증언은 참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한 증언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나에 대하여 증언하시는 분이 따로 있는데 나에 대하여 증언하시는 그 증언이 참되다는 것입니다.
이후를 보면 이와 같은 증언으로 어떤 증언이 있는지에 대해 몇 가지 밝혀주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먼저 사도 요한이 증언하였던 것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요한에게 사람을 보내매 요한이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였느니라. 그러나 나는 사람에게서 증언을 취하지 아니하노라 다만 이 말을 하는 것은 너희로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 요한은 켜서 비추이는 등불이라 너희가 한때 그 빛에 즐거이 있기를 원하였거니와”(33-35).
이어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행하는 역사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증언한다고 하셨습니다.
“내게는 요한의 증거보다 더 큰 증거가 있으니 아버지께서 내게 주사 이루게 하시는 역사 곧 내가 하는 그 역사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나를 위하여 증언하는 것이요”(36).
그리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나를 증언하셨다고 하셨는데 유대인들은 그가 보내신 이를 믿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또한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친히 나를 위하여 증언하셨느니라 너희는 아무 때에도 그 음성을 듣지 못하였고 그 형상을 보지 못하였으며, 그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지 아니하니 이는 그가 보내신 이를 믿지 아니함이라”(37-38).
이어서 증언하는 것에 대해 말씀하시기를 성경이 증언하고 있다는 것을 말씀해주셨습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39-40).
유대인들은 성경에서 영생을 가질 줄로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는 하지만 정작 성경이 증언하고 있는 예수님에게 오는 것은 원하지 않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무리 성경이 예수님에 대하여 증언하고 있다고 해도 믿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와 같은 유대인들의 영적 상태가 어떠한지에 대해 이후로 말씀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없고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으나 영접하지도 않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도 구하지 않으므로 어떻게 믿을 수 있느냐고 하셨습니다.
“나는 사람에게서 영광을 취하지 아니하노라.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 속에 없음을 알았노라. 나는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으매 너희가 영접하지 아니하나 만일 다른 사람이 자기 이름으로 오면 영접하리라.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아니하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41-44).
예수님께서 너희 속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으시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일어나는 현상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와도 영접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영접하”(43)의 원어원형은 “λαμβάνω(람바노)”인데 “받다, 취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이름으로 오셔도 받지 아니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사람으로 보고(6:42, 10:33) 사람에게서 나온 예수님으로 기억할지는 몰라도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오신 예수님으로는 인정하지 않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서로 영광은 받지만 유일하신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영광은 찾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으므로 어떻게 믿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어떻게 믿을 수 있느냐고 하시면서 마지막으로 모세의 글에 관한 것을 언급하시고 마치시면서 어떻게 믿겠느냐고 하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아버지께 고발할까 생각하지 말라 너희를 고발하는 이가 있으니 곧 너희가 바라는 자 모세니라. 모세를 믿었더라면 또 나를 믿었으리니 이는 그가 내게 대하여 기록하였음이라. 그러나 그의 글도 믿지 아니하거든 어찌 내 말을 믿겠느냐 하시니라”(45-47).
성경이 내게 대하여 증언하고(39) 모세가 내게 대하여 기록하였으므로(46) 모세를 믿었다면 나를 믿었을 것이지만 모세의 글을 믿지 않는데 어떻게 나의 말들을 믿겠느냐는 것입니다.
이처럼 유대인들은 아무리 여러 가지 방식을 통해 증언하여도 아버지께서 보내신 아들을 믿지 않는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한눈에 보는 요한복음 (재개정판)
재개정일 2024년 1월 12일
개 정 일 2020년 9월 17일
발 행 일 2018년 9월 5일
지 은 이 이서영
출 판 사 퍼플
출판등록 제300-2012-167호 (2012년 9월 7일)
주 소 서울시 종로구 종로1가 1번지
대표전화 1544-1900
홈페이지 www.kyobobook.co.kr.
ISBN 978-89-24-12034-9
ⓒ 이서영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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