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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적자료/신앙간증

[김창인 목사] 세상의 부귀는 모두 헛된 것이지요

by 이서영 목사 2018. 12. 7.

1917년 음력 10월에 평안북도 의주군 의주읍에서 출생한 김창인 목사는 고려신학교를 11회로 졸업했다. 부친 김택연 씨와 모친 김택신 씨 사이의 5형제 중 3남으로 태어난 김 목사는 양친의 신앙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부모와 같이 신사참배를 반대하다가 많은 옥고를 치른 김 목사는 이북에서 사역하다가 1948년 월남해 고려파와 관계를 맺게 되었다. 김 목사는 어려서부터 부친의 신앙 인격을 배우고 이기선 목사로부터 목회자의 굳은 신앙의 절개를 배워 한국 교회에 큰 목회를 감당하는 사역자가 되었다. 그는 교회 건축이 끝난 만 70살을 맞은 해에 정년 제도가 없었음에도 자의로 사임하고, 퇴직금과 재산 일체를 교회에 헌금했다. 올해 96살이 된 김 목사의 과거 목회 회상과 말씀은 좋은 가르침이 되었다. 세상의 모든 부귀는 헛된 것이니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라는 그의 권면은 언제나 강조되어야 할 목회자의 윤리일 것이다. 현재 김 목사가 설립한 충현교회는 1960년 합동 이후 환원하지 않아 예장(합동)에 속해 있다. 고신역사연구소 연구원 김흥식.

 

김흥식 연구원: 먼저 목사님의 가정 배경에 대해 말씀해 주십시오.

김창인 목사: 35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제 부친은 말로 다할 수 없이 훌륭한 분이셨습니다. 그분은 독신 시절부터 예수님을 믿었고, 가문의 배척을 받았습니다.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기까지 이른 새벽부터 일어나 기도하며, 구제에 힘쓰셨습니다. 부친은 신사참배하다가 옥고를 치르고 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나셨지요. 그분은 평생에 원수가 없었어요. 저는 오 형제 중에 셋째였습니다. 첫째 형님은 신앙을 지키다가 공산당에게 총살을 당했습니다. 둘째 형님은 이북에 남았는데 그후 소식을 모릅니다. 넷째는 김창명 목사입니다. 그리고 막내는 수술하다가 병이나서 세상을 떠났지요.

 

김 연구원: 이 목사님이 목회 생활 전반에 많은 가르침을 주셨겠습니다.

김 목사: 이기선 목사님은 정말 훌륭한 분이십니다. '세상부귀 여분토 하면 상제능력 자연부'(世上富貴 如墳土 上帝能力 自然富)라는 글을 쓰셨어요. 세상의 부귀를 분토처럼 여기면 하나님의 능력이 너도 모르는 사이에 영육 간에 부자로 만들어주신다는 말이지요. 이 목사님이 써 주신 글을 잊을 수 없습니다. 이 글이 지금도 제 방에 걸려 있어요. 이 목사님의 가르침을 받고 저는 평생에 저금통장 하나 없이 살았습니다. 은행에 가본 적도 없어요.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돈이 많이 들어오면, 이 사람 저 사람 다 주었지요. 그러고 나면 돈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김 연구원: 이기선 목사님은 당시 평북지방에서 신사참배 거부운동을 전개한 대표적인 인물이지요.

김 목사: 그렇지요. 이기선 목사님은 신사참배를 가결한 노회를 탈퇴하고, 신사참배를 하지 않은 교인들과 예배드렸습니다. 당시 이 목사님과 함께 신사참배 거부운동을 전개한 인물로는 김형략, 박의흠, 계성수, 김성심, 오영은, 김화준, 심을철이 있습니다. 이 목사님은 신사참배 거부운동을 하시다가 결국 만주로 가게 되셨지요. 그곳에서 헌트(Bruce Hunt, 한부선) 선교사와 함께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계속하였습니다.

 

김 연구원: 김 목사님도 신사참배를 반대하시고 감옥에도 갇히셨지요?

김 목사: 하지만 계속 있지는 않았어요. 들어갔다가 나왔다가 했지요. 제가 한국 교회는 신사참배로 다 무너졌으니 다시 하자고 했어요. 그리고 이 운동을 '재건'(再建)이라고 하자고 했지요. 그래서 재건교회가 된 것입니다.

 

김 연구원: 당시 이북에서 공산정권이 들어서는 등 혼란스러웠는데, 이때 상황은 어떠셨나요?

김 목사: 1946년에 들어선 공산당은 교회를 핍박했어요. 그들은 기독교연맹을 만들어 기독교를 정치세력으로 이용하려고 했습니다. 저는 공산당원에게 대항하다가 자주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리고 1948년에 월남하게 되었지요. 아직까지 살아있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지요.

 

김 연구원: 고려신학교 재학시절이 교사가 광복동에 있을 때였는데, 그때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김 목사: 예, 그때는 광복동시절이었지요. 부산 광복동 고려신학교와 서울을 왕래했습니다. 그때 충현교회를 개척했지요. 제가 스무 살에 전도사가 된 후에 예배와 부흥회를 계속 인도했어요. 지금 돌아보면 부끄럽지요. 당시 고려신학교의 교수는 한상동 목사님이 교장이었고, 이상근, 오종덕 등이 가르쳤습니다. 그 중에서도 박윤선 박사님의 가르침은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말할 것도 없지요. 제가 그분께 많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김 연구원: 거실에 걸린 민족복음화성회 사진을 보니까 목사님이 활동하시던 모습을 알 수 있습니다. 아주 좋은 사진이군요.

김 목사: 이 대회에서 약 200만 명 정도 모였습니다. 1988년도 당시 제가 대회장이었지요. 1992년 대회에는 조용기 목사가 회장이었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참 이상한 일입니다. 제가 중 3때 폐병을 앓아 학교를 그만두었는데 96살을 살았고, 이런 무식쟁이가 수많은 사람이 모인 대회를 인도하다니요. 생각할수록 하나님의 은혜이지요. 저는 정말 아무 것도 아닙니다. 설교하다가 피가 나오면 피를 받아가면서 설교했습니다. 당시 저의 폐병은 고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어요. 몇 년 전만하더라도 설교할 때, 피가 나와서 한참 토하고, 피를 받아가며 설교했어요. 그런데도 살았어요. 죽는 것은 염두에 두지 않으니까 하는 거예요.

 

김 연구원: 목사님께서 그런 확신으로 사셨기 때문에 오늘 충현교회 같은 큰 교회를 세우게 된 것으로 봅니다.

김 목사: 저는 그런 꿈도 꾸지 않았는데, 자꾸 모이고 헌금내고 하니 그렇게 되었지요. 제가 대형교회를 원한 건 아니예요. 저는 구경만 한 것이지요. 체계적으로 준비하고 계획해서 교회당을 세우고 한 것은 아닙니다. 필요에 따라 교회당을 세우다 보니 큰 교회가 된 것입니다.

 

김 연구원: 고신의 후배들에게 좋은 말씀 부탁드립니다.

김 목사: 이기선 목사님이 이렇게 가르친 적이 있습니다. "하루 밥 세끼 먹지? 하루 성경 석장 이상 봐!" 이기선 목사님이 저를 많이 사랑하셨어요 이 목사님이 가르치던 말씀이 생각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밥을 먹는 것보다 중요하지요. 바로 그겁니다. 고신의 후배들은 이기선 목사님이 가르친 말씀을 잘 배웠으면 좋겠어요. 실제로 밥을 먹기 전에 말씀을 봐야지요. 그리고 삶에서 말씀을 우선순위에 두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교회에서 말씀을 가르치는 일이 가장 중요하지요. 그리고 신학교에서도 말씀을 배우는 일이 중요합니다. 돈이나 명예가 아니예요. 세상 부귀는 모두 헛된 것입니다.

 

 

출처: 기독교보 2012년 4월 28일 15면. 기획특집. 원로와의 대화.  

출처 : 참좋은제자들교회
글쓴이 : 참좋은 제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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