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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적강해/기타설교

(마 20:17-19) [부활절] 죽어도 삽니다

by 이서영 목사 2020. 4. 16.

(마 20:17-19) [부활절] 죽어도 삽니다 [성경강해 2020.04.09. 참좋은제자들교회 이서영 목사]

 

● 파워포인트를 사용해 성경강해한 영상입니다.

● 유튜브: 은혜의 동산  https://youtu.be/7caIa_NdoAM

 

 

[부활절] 죽어도 삽니다 (마 20:17-19)

 

17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려 하실 때에 열두 제자를 따로 데리시고 길에서 이르시되
18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매 그들이 죽이기로 결의하고
19 이방인들에게 넘겨 주어 그를 조롱하며 채찍질하며 십자가에 못 박게 할 것이나 제삼일에 살아나리라.

 

대부분의 사람들은 죽으면 끝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죽음 이후에 어떻게 되는지에 대해 크게 신경을 쓰지 않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예수님은 어떻게 되셨습니까? 이러한 것을 죽음과 연관하여 성경구절을 중심으로 세 가지 주제로 나누어 말씀드리겠습니다.

 

첫번째 주제는 죽이기로 결의한 것에 대한 것입니다.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하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시선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좁은 시야로 바라보고 판단한다는 것입니다.
두번째 주제는 십자가에 못 박는 것에 대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을 박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죽인다고 해서 모든 것이 끝이 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역전이 된다는 것입니다.
세번째 주제는 제삼일에 살아나시는 것에 대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삼일에 예고하신 대로 실제로 살아나게 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성도는 죽어도 살아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또한 자신의 시각이 아니라 하나님의 시선으로 살아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은 부활절을 맞이하여 죽음과 연관하여 성경구절을 중심으로 해서 세 가지 주제로 나누어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먼저 첫번째 주제로 죽이기로 결의함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질문부터 드립니다. 죽으면 끝입니까? 아니지요?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죽으면 끝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과연 그렇습니까?
죽으면 끝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기에 자기 자신도 죽으면 끝이라고 생각하게 되지만 다른 사람도 죽이면 끝이라고 생각합니다. 죽이기만 하면 모든 것이 끝이 난다는 생각을 하기에 죽이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죽이는 일이 인류 최초의 살인사건을 통해 볼 수 있습니다. 창세기 4장 8절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가인이 아우를 죽이면 모든 것이 다 끝날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습니다. 결국은 하나님께서 아시고 심판하셔서 저주를 자초하여 저주받은 인생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불순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상대방을 죽이는 일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경우가 있습니다. 죽여버리면 자신의 목적이 성취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의 좁은 시야로 볼 때는 지금 눈에 보이는 정적을 죽여서 장애물을 치워버리면 마치 자기 세상이 될 것 같지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들만 사는 세상이라면 그렇게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모든 것을 보시고 아시는 하나님의 눈은 피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가인이 아우를 죽이면 만사가 형통하게 될 줄로 알았지만 하나님의 시선은 피할 수 없었습니다. 동서고금의 모든 사람과 모든 것을 훤하게 아시고 모든 것을 명백하게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눈은 그 누구도 벗어날 수 없습니다.
노아 당시에 홍수 심판을 받기 전의 상황이 어떠했습니까? 사람들은 자기 멋대로 악을 행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것을 누가 보고 계셨습니까? 하나님께서 바라보시고 계셨습니다.
창세기 6장 5절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하나님께서는 창조하신 전 우주를 바라보고 계시고 전 세계를 바라보고 계십니다. 영원부터 영원까지 끝도 없는 세계를 바라보시고 모든 것을 아십니다.
그렇다면 사람은 어떻습니까? 영원부터 영원은 제쳐 놓고 그 누가 새 하늘 새 땅을 자세하게 모두 바라볼 수 있고 알 수가 있겠습니까?
이것조차도 제쳐 놓고 현재의 전 세계만 하더라도 누가 한꺼번에 바라볼 수 있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창조하신 이후로 아담과 하와를 비롯해 지금까지 고대와 중세와 현대의 모든 사람들을 바라보시고 계십니다. 거기에다가 마음과 생각까지도 훤하게 바라보시고 아십니다.
예수님께서 인간의 눈으로는 도저히 볼 수 없는 곳에 있는 나다나엘을 보시고 찾아왔을 때 하신 말씀입니다.
요한복음 1장 48절 “나다나엘이 이르되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
이것 뿐만이 아닙니다. 생각도 아셨습니다. 수많은 사례가 있지만 그 가운데 한 가지만 살펴보겠습니다. 마태복음 9장 4절 “예수께서 그 생각을 아시고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마음에 악한 생각을 하느냐.”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고쳐 주신 것과 관련하여 말씀하신 것입니다.
마태복음 9장 2-3절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데리고 오거늘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어떤 서기관들이 속으로 이르되 이 사람이 신성을 모독하도다.”
사람들은 자기 수준에서 생각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그러한 것은 아는 만큼만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실재로 존재하고 있는 또다른 것들을 볼 수 없는 것입니다.
이와 같으므로 자기가 생각하는 그게 모든 것이라고 여기기에 때론 실수하거나 때론 악을 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모를 것이라고 생각하기에 속이거나 제거해버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능력에는 한계가 있으므로 그럴 수 있을 것입니다. 속이면 속을 수도 있습니다. 제거하면 제거당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눈은 결코 속일 수 없습니다. 피할 수 없습니다. 나의 모든 생각과 말과 행동을 다 보시고 다 아시기 때문입니다. 시편 139편 2절 “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능력이. 그런데 누가 이렇게 할 수 있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 사람의 눈으로는 우리 주위에 있는 것을 겨우 볼 정도입니다. 수십 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곳은 볼 수 없습니다. 심지어 바로 코앞에 있는 사람의 마음과 생각도 잘 볼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속이고 눈에만 안 보이면 다 끝나는 줄로 알고 제거해버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자기 눈에 안 보인다고 모두 해결된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여기는 것은 자신의 좁은 시야로 바라보았기 때문에 그렇게 본 것입니다.
이렇다 보니 어떤 생각을 하게 됩니까? 악한 목적을 가지고 눈에 가시 같이 거슬리는 사람을 없애려고 하지 않습니까? 요셉의 형들이 요셉을 죽이려는 것도 볼 수 있습니다. 창세기 37장 18절 “요셉이 그들에게 가까이 오기 전에 그들이 요셉을 멀리서 보고 죽이기를 꾀하여.”
이러한 일들이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죽이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사울이 죽이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무엘상 20장 33절 ”사울이 요나단에게 단창을 던져 죽이려 한지라 요나단이 그의 아버지가 다윗을 죽이기로 결심한 줄 알고.”
자신의 부당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 자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압살롬도 그러합니다. 사무엘하 13장 30절 “그들이 길에 있을 때에 압살롬이 왕의 모든 아들들을 죽이고 하나도 남기지 아니하였다는 소문이 다윗에게 이르매.”
다니엘의 경우에도 그러한 피해를 입을 뻔하였습니다. 다니엘 2장 13절 “왕의 명령이 내리매 지혜자들은 죽게 되었고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도 죽이려고 찾았더라.”
이처럼 사람들은 자기 눈에만 안 보이도록 처리해버리면 자신의 뜻을 이루게 되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죽이려는 시도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가운데 20장 18절을 보면 역시 그러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매 그들이 죽이기로 결의하고.”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어떻게 하려고 하였습니까? 죽이기로 결의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때 “결의하고”의 헬라어 원어원형은 “κατακρίνω(카타크리노)”인데 “유죄 선고하다, 정죄하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죽이기로 결의한다는 것은 사형을 선고한다는 것입니다.
과연 실제로 그렇게 하였습니까? 그렇게 하였습니다.
마가복음 15장 1절 “새벽에 대제사장들이 즉시 장로들과 서기관들 곧 온 공회와 더불어 의논하고 예수를 결박하여 끌고 가서 빌라도에게 넘겨 주니.”
의논하였다는 것은 회의하였다는 것인데 회의를 열어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하고는 빌라도에게 넘겨주었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들이 예수님을 제대로 보았다면 죽이려고 하였겠습니까? 자신들의 눈으로 보기에는 제거해버려야 할 대상으로 보였던 것입니다. 자신들의 가려진 눈으로 판단하고는 옳다고 여긴 것입니다.
그런데 죽인다고 끝이 나겠습니까? 사람은 자기 입맛에 맞춰 정적을 제거하려고 하지만 그렇게 된다고 소원이 성취되겠습니까? 사람의 좁은 시야로 볼 때는 일순간에는 목적을 달성한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죽인다고 끝이 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죽은 이후에 일어나는 일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죽음 이후에 어떤 결과가 주어지게 되는지 아시기 바랍니다.

 

두번째 주제로 십자가에 못 박음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악한 사람들은 자신의 눈에 보이는 가시거리를 제거해버리면 끝나는 줄로 압니다. 그래서 악한 목적을 가지고 죽여서 없애 버리려고 합니다. 때론 최고의 극형으로 처단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처단하면 모든 것이 끝이 나고 편안하게 자신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한다고 해서 끝이 나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옳고 그름에 대한 역사를 사람들이 결국은 알아채기 때문입니다. 짧은 시야로 볼 때 짧은 삶을 잘 지내는 것처럼 보이지만 긴 역사의 평가는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 무엇보다 모든 것을 바라보시고 아시는 하나님의 시선은 피할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을 감찰하시는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악한 마음과 생각과 행동을 모두 보시고 아시고 그대로 되갚아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시선은 전혀 의식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의식하지 못하게 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대담하게 악을 행하지 않겠습니까? 사람의 눈으로 보이는 시각으로 보니까 사람의 기준에서 판단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악을 행하는 자들은 바로 이러합니다. 하나님의 시선에서 못 보고 사람의 왜곡된 짧은 시야로 보게 되는 자들이 악을 행하는 자들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악을 행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시선, 즉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세워놓은 스스로 생각하기에 그럴듯한 판단기준에 따라 비추어 본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 기준이 올바르겠습니까? 잘못된 기준을 세우게 되면 생사람 잡는 일이 생기는 것입니다. 사람의 시선은 정확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편향된 시각으로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영적으로는 더더욱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눈에 안보이는 하나님을 의식할 수 있겠습니까? 이러한 상태에서 세상의 모든 판단 기준이 되시는 하나님의 생각과 어떻게 일치시켜 나갈 수가 있겠습니까?
기독교인과 기독국가와 기독교의 가치를 정책에 반영하고 있는 나라와 민족과 가정과 사회가 잘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시선이 올바르겠습니까? 아니면 잘못되었겠습니까? 당연히 올바릅니다. 영원부터 영원까지 지탱해주는 주는 기준이 됩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시선대로 행하니까 잘 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제쳐 놓고, 즉 하나님의 말씀을 저버리고 악한 영들이 주는 생각대로 살아가게 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악한 영들의 속성은 죽이고 빼앗아가는 속성이 있기 때문에 결국은 모든 것이 죽게 되고 빼앗기게 됩니다. 나라든 개인이든 그 어느 분야든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게 되면 생명을 얻되 더 풍성하게 얻게 됩니다. 하지만 악한 영을 따라가게 되면 도둑질 당하게 되고 죽임을 당하게 되고 멸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0장 7-10절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예수님을 믿고 따라가게 되면 결국에는 그 좋은 천국에 들어가 영생복락을 누리게 되지만 악한 영을 믿고 따라가게 되면 영혼을 비롯해 모든 것을 빼앗겨서 비참한 지옥에 들어가 영원히 고통을 받으면서 살게 됩니다. 내세 뿐만 아니라 현세에서도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께서 하라고 하신 말씀대로 따라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생명을 얻게 되고 더 풍성한 삶을 얻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 무엇보다 지옥이 아니라 천국에서 영원히 살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악한 자들은 예수님에게서 눈을 돌려 악한 영을 바라보고 더 좋게 여깁니다. 자신과 옳다고 철썩 같이 믿고서 끌어들인 다른 많은 사람들이 죽는 줄도 모르고 하나님의 말씀이 반영된 기준과 정책과 사상을 따르지 않고 악한 영이 주는 것에 따라 바라보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어떤 결과가 오겠습니까? 근시안적으로 보면 마치 승리한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에는 패망하게 되는 길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나라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고 개인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잘못된 기준을 세워놓고 살아가는데 잘 될 리가 없습니다. 자신들은 잘하고 있고 잘 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보는 시각이 잘못되어 있기에 잘못된 결과가 오는 줄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오히려 신봉하고 힘을 다해 추진하게 됩니다.
악한 자들은 어떠한 자들입니까? 하나님이 없는 자들이고 하나님의 말씀이 없는 자들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있으나 마나 하고 하나님의 말씀도 있으나 마나 한 자들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는 자들인 것입니다.
시편 10편 4절 “악인은 그의 교만한 얼굴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이를 감찰하지 아니하신다 하며 그의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 하나이다.”
시편 14편 1절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 그들은 부패하고 그 행실이 가증하니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시편 36편 1절 “악인의 죄가 그의 마음속으로 이르기를 그의 눈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빛이 없다 하니.”
시편 53편 1절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그들은 부패하며 가증한 악을 행함이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오늘 본문 가운데서도 그러한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그들이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게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20장 19절입니다. “이방인들에게 넘겨 주어 그를 조롱하며 채찍질하며 십자가에 못 박게 할 것이나 제삼일에 살아나리라.”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은 아무리 뛰어난 종교지도자라 할지라도 시선이 잘못되어 있으면 그렇게 된다는 것이 아닙니까?
시선이 올바르게 되어 올바르게 볼 수 있었다면 조롱하고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을 박겠습니까? 절대로 그렇지 않겠지요?
그렇다면 지금 예수님께서 눈 앞에 계시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나는 결코 그렇게 하지 않는다.’ ‘내가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느냐.’
그렇다면 과연 그 말에 진정성이 있습니까? 그 말을 어떻게 해야 인정받을 수 있겠습니까? 판단기준은 하나님의 시선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지금 여러분은 무슨 기준으로 판단하고 계십니까?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언론 교육 등을 바라볼 때 무슨 기준으로 판단하고 있으십니까?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지 않고 있다고 내세우는 자부하는 근거가 무엇입니까? 자신의 지역입니까? 감정입니까? 사상입니까? 이익입니까? 아니면 그 무엇입니까?
여러분께서 바라보고 판단하는 근거는 무엇입니까? 무엇을 통해 바라보고 계십니까? 하나님의 시선을 통해 바라보고 계십니까? 아니면 인간적인 눈에서 바라보고 계십니까?
만약 하나님의 시선이 아니라 사람이 보는 편향되고 좁은 시각으로 보고 있다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 당시 종교지도자와 종교인들이 하나님의 시선이 아니라 자신들의 시선으로 바라보았기 때문에 양심의 가책을 조금도 느끼지 못하고 과감하게 예수님을 십자가라는 극형에 처단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이라도 돌이키시길 바랍니다. 자신의 근거로 삼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냉철하게 되돌아보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가 아니면 인간적인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가를 점검해보시길 바랍니다.
그리하셔서 하나님의 시선인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해서 일상 가운데 모든 것을 선택하시고 평가하시고 판단하시고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이렇게 하려면 하나님의 시선이 어떠하신지를 잘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시선을 알려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말씀에 무엇이라고 기록되어 있는가를 살펴야 하는 것입니다.
그 당시 눈이 가려진 종교인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결의하고 십자가에 못 박는 것으로 끝이 나는 줄로 알았지만 그렇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것으로 끝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다고 해결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서 역전현상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죽이려는 악한 영이 주는 생각대로 그들이 예수님을 죽였지만 결과는 그 반대 현상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십자가 처형으로 흉악범으로 몰아 사형에 처했지만 자기 자신이 자신을 죽이는 어리석은 짓을 하게 된 것입니다.
육안으로 볼 때는 죽은 사람이 예수님이셨지만 결과적으로는 죽은 사람은 그들이었고 그 뿌리를 보면 악한 영인 마귀가 죽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마귀의 죽음이고 예수님은 그 시간 이후로 생명의 시작이 된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 무덤에서 살아난 성도들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사망과 무덤이 더 이상 성도들을 붙잡지 못하게 된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27장 50-52절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니라,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되.”
이와 반대로 마귀가 처하게 되는 운명은 어떠합니까? 히브리서 2장 14절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요한일서 3장 8절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
마귀의 생각을 따르는 마귀에게 속한 종교인들의 운명은 어떻게 됩니까? 그들이 어떤 존재인지부터 보겠습니다.
요한복음 8장 44절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
그들이 처하게 되는 운명입니다. 마태복음 25장 41절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
마귀와 마귀에게 속한 종교인들이 일망타진 당하게 되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20장 10절 “또 그들을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져지니 거기는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
예수님 당시 종교인들이 이러한 운명에 처하게 되는 줄도 모르고 하나님의 시선을 따르지 않고 마귀 사상을 따라갔습니다.
당장 눈에 보이는 것에 급급해서 자신에게 유리하게 돌아가는 줄로 알았지만 그 결과는 정반대였던 것입니다. 영원히 멸망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을 죽인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죽인 것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당시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도 자행되어 오고 있습니다. 예수님 뿐만 아니라 의인을 죽이거나 성도를 죽이는 일들을 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잘못을 행하지 않기 위해 자신의 좁은 눈이 아니라 하나님의 시선으로 바라보게 되시길 바랍니다.

 

세번째 주제로 제삼일에 살아나심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그 어떤 사람이 죽으면서 내가 다시 살아난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속이려고 하지 않는 한 불가능한 일입니다. 자신의 힘으로 다시 살아나겠다는 것은 희망사항이지만 희망으로 끝나고 말게 됩니다.
그 어떤 세계적인 재벌도 자신의 그 많은 돈으로 목숨을 다시 살릴 수 없습니다. 지금 아직도 죽지 않고 생존해 있는 세계적인 거부가 있습니까?
훌륭한 거부들도 마침내 모두 죽었습니다. 동방의 거부였던 욥도 죽었고 그 유명한 록 펠러도 죽었습니다.
권력을 가진 사람도 죽었고 미모를 가진 사람도 건강하다고 끄덕 없다고 자부하던 사람도 모두 죽었습니다. 자신의 무덤을 호화롭게 꾸미도록 준비할 수는 있지만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서 지금도 생존하게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기적적으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났던 나사로도 결국은 죽었고 앞서 두번째 주제에서 살펴보았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을 때 다시 살아난 성도들도 모두 죽었습니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기도 어렵지만 극적으로 다시 살아나게 되어도 결국은 모두 죽게 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살아나서 아직도 생존하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아무도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유일하게 예수님은 살아 계십니다. 죽어도 죽지 않으시고 다시 살아나셔서 지금도 여전히 살아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살아 계시는 것을 사람의 시각으로 볼 때는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의 시선으로 바라보면 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시선 가운데 하나로써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바라보겠습니다. 로마서 6장 9절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
예수님은 이처럼 사망이 다시 주장하지 못하므로 지금도 계속해서 살아 계시는 것입니다. 살아 계셔서 하나님 우편에서 우리를 위하여 간구해주시고 계십니다.
로마서 8장 34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히브리서 7장 25절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 계셔서 그들을 위하여 간구하심이라.”
이러한 부활사건은 예수님 혼자 만의 사건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우리 성도의 사건이 되게 해주셨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 20절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로마서 4장 25절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로마서 5장 10절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로마서 6장 11절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그리하여 우리 성도는 죽어도 죽지 않고 다시 살아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는 죽어도 죽지 않고 다시 살아나게 된다는 것을 잘 인식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살아 있는 동안에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시선으로 살아가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부활의 신앙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에 대해 잠깐 살펴보겠습니다. 주를 위해 살아가게 됩니다. 로마서 14장 8절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그렇다면 주를 위하여 산다는 부활의 신앙은 어떤 신앙생활을 가리키겠습니까? 다소 특이한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부활의 복음을 전하게 되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겠습니까? 뜻밖의 일들이 일어납니다.
사도들이 부활을 증언하였습니다. 사도행전 4장 33절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받아”
그러자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이어서 나오는 4장 34-35절입니다. “그 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그들이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줌이라.”
그러한 실제적인 사례를 곧이어 보여주고 있는데 4장 36-37절입니다.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 사람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라(번역하면 위로의 아들이라) 하니, 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그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 .”
신기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부활의 복음의 결과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지 않습니까? 그 어떤 거룩한 모습이거나 능력을 행하는 모습이 아니라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주는 모습이 말입니다.
부활의 신앙을 가질 때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죽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의 것을 주장하지 않고 주를 위해 사니까 가능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하게 되는 경우에는 부활의 신앙생활을 하지 못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시선이 아닌 자신의 좁은 시각으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례가 곧바로 이어서 나오는데 아나니아와 십비라 부부 사건인데 먼저 5장 1-2절을 보겠습니다.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그의 아내 삽비라와 더불어 소유를 팔아, 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매 그 아내도 알더라 얼마만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
사람의 눈을 속일 수 있지만 하나님의 시선은 피할 수 없었습니다. 곧이어 나오는 3-4절입니다. “베드로가 이르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마음대로 할 수가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
그렇게 한 결과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죽음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5장 5-6절 “아나니아가 이 말을 듣고 엎드러져 혼이 떠나니 이 일을 듣는 사람이 다 크게 두려워하더라, 젊은 사람들이 일어나 시신을 싸서 메고 나가 장사하니라.”
잠시 후 들어온 아내 역시 그렇게 되고 말았습니다. 똑같이 속이는 장면입니다. 5장 7-8절 “세 시간쯤 지나 그의 아내가 그 일어난 일을 알지 못하고 들어오니, 베드로가 이르되 그 땅 판 값이 이것뿐이냐 내게 말하라 하니 이르되 예 이것뿐이라 하더라.”
그러자 어떻게 되었습니까? 똑같이 죽게 되고 말았습니다. 5장 9-11절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어찌 함께 꾀하여 주의 영을 시험하려 하느냐 보라 네 남편을 장사하고 오는 사람들의 발이 문 앞에 이르렀으니 또 너를 메어 내가리라 하니, 곧 그가 베드로의 발 앞에 엎드러져 혼이 떠나는지라 젊은 사람들이 들어와 죽은 것을 보고 메어다가 그의 남편 곁에 장사하니, 온 교회와 이 일을 듣는 사람들이 다 크게 두려워하니라.”
이러한 것이 부활의 신앙생활 여부에 대한 것입니다. 좀 색다르지 않습니까? 그동안 들어온 부활절에 대한 이야기와는 다른 시각을 보여주고 있지 않습니까?
이러한 것도 하나님의 말씀에 따른 하나님의 시선으로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또다른 측면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따른 부활의 신앙생활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으므로 예수님께서 재림하셔서 부활하게 되면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게 되고 그렇게 다시 살아나게 되면 어떤 모습으로 영원히 살아가게 되겠습니까?
가난하게 살겠습니까? 그렇지 않지 않겠습니까? 영원히 풍성하게 살아가게 됩니다. 천국이 그러하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 부활하였는데도 여전히 가난하고 아프고 괴로워하고 서로 다투고 힘들게 산다면 부활하는 의미가 없지 않게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부활한 이후로는 새 하늘과 새 땅이 마련되고 이전 것은 모두 싹 지나가버리고 새로운 삶이 시작되니까 얼마나 좋습니까?
그러한 부활을 어떻게 하게 되었습니까?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게 되셔서 가능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기 전에 제삼일에 살아난다고 세 차례나 당당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가 이렇게 자신 있게 다시 살아난다고 확언할 수 있겠습니까?
아무도 그렇게 말할 사람은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 만이 말씀하실 수 있으신 것입니다.
그러하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제삼일에 살아나셨습니다. 오늘 본문 가운데 20장 19절입니다. “이방인들에게 넘겨 주어 그를 조롱하며 채찍질하며 십자가에 못 박게 할 것이나 제삼일에 살아나리라.”
아무리 죽이려고 결의하고 십자가에 못을 박아도 결국에는 제삼일에 다시 살아나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때 “살아나리라”의 헬라어 원어원형은 “ἐγείρω(에게이로)”인데 “일어나다, 죽은 자를 일으키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죽은 자가 일어난다는 것은 곧 살아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요나의 표적(마 12:39-40)과 성전의 표적(마 26:61)과 세 차례에 걸쳐 예고하신 대로(마 16:21, 17:23, 20:19) 제삼일에 실제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이러한 것을 보면 죽인다고 끝이 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죽인 자나 죽게 된 자나 누구나 다시 살아나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역전현상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죽인 자들은 영벌의 부활에 처하게 되고 죽게 된 성도들은 영생의 부활에 처하게 되는 것입니다. 죽인 자나 죽은 자나 모두 다시 살아나지만 결과는 정반대가 되는 것입니다.
많은 성도들이 악한 자들에 의해 죽었지만 결국은 모두 살아나게 되어 있고 영생복락을 누리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부활의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죽어도 죽지 않고 살아난다는 것입니다. 살아나서 그 좋은 천국에서 영원히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죽이려고 하는 자들은 죽여도 아무런 소용이 없고 오히려 화를 당하게 되므로 죽이려고 하는 것에서 속히 돌이키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성도들은 죽지 않고 영생복락을 누리게 된다는 소망을 가지고 살아도 주를 위해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해 죽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오늘 세 가지 주제를 총정리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이제까지 죽는다고 끝이 아니라는 것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예수님을 죽이려고 결의하고 그리하여 십자가에 못을 박아 죽였지만 예수님께서 제삼일에 다시 살아나신 것을 통해 살펴보았습니다.
죽이면 모든 것이 끝이 나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또한 죽게 된다고 해서 모두 끝장나버리는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누구나 다시 살아나게 되어 있기 때문이고 역전현상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죽인 자들은 영벌에 처하게 되고 죽게 된 성도들은 영생복락을 누리게 되기 때문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악한 영을 따르는 악한 자들이 눈에 거슬리는 예수님과 성도를 죽여서 해치워버리면 목적을 달성하는 것처럼 보여도 그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악한 자들의 좁은 시야로 볼 때는 속이 시원하게 없어진 것처럼 보여도 영원부터 영원까지 훤하게 바라보시고 아시는 하나님의 시선으로 볼 때는 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을 수 있습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언론 교육 등의 전분야에 있어 하나님의 시선이 아니라 좁은 자신의 이기적인 생각과 감정과 이익과 사상에 따라 바라보고 판단하고 선택한다면 그러한 행위를 하는 것과 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시각이 아니라 하나님의 시선, 즉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바라보게 되시기 바랍니다. 이러한 부활의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 주님을 바라보시고 사나 죽으나 주님을 위해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 부활시켜 주시는 주님께 감사드리시고 헌신하시는 가운데 이웃에 있는 가난한 자들과 고통받는 이웃과 어려운 교회를 적극 도와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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