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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적강해/기타설교

(눅 8:7, 14) 염려와 재물과 향락의 가시덤불

by 이서영 목사 2020. 5. 14.

(눅 8:7, 14) 염려와 재물과 향락의 가시덤불 [성경강해 2020.10.11. 참좋은제자들교회 이서영 목사]

● 파워포인트를 사용해 성경강해한 영상입니다.
● 유튜브: 은혜의 동산  https://youtu.be/Yuq7hXO4qNg

 

 

 

 

염려와 재물과 향락의 가시덤불 (눅 8:7, 14)

 

8:7 더러는 가시떨기 속에 떨어지매 가시가 함께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8:14 가시떨기에 떨어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이나 지내는 중 이생의 염려와 재물과 향락에 기운이 막혀 온전히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

 

씨앗이 가시덤불 속에 떨어지면 잘 자라나지 못하게 됩니다. 말씀도 이와 같은 가시덤불 속에 떨어지면 온전하게 결실하지 못하게 됩니다. 이러한 가시덤불에는 세 가지 유형의 가시덤불이 있습니다. 염려의 가시덤불과 재물의 가시덤불과 향락의 가시덤불입니다. 이러한 것을 성경구절을 중심으로 해서 세 가지 주제로 나누어 말씀드리겠습니다.

 

첫번째 주제는 염려라는 가시덤불에 대한 것입니다. 염려라는 가시덤불의 기운에 막혀 말씀이 온전히 결실하지 못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두번째 주제는 재물이라는 가시덤불에 대한 것입니다. 재물이라는 가시덤불의 기운에 막혀 말씀이 온전히 결실하지 못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세번째 주제는 향락이라는 가시덤불에 대한 것입니다. 향락이라는 가시덤불의 기운에 막혀 말씀이 온전히 결실하지 못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은 말씀이 결실하는 것을 막는 가시덤불에 대한 것을 성경구절을 중심으로 해서 세 가지 주제로 나누어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첫번째 주제는 염려의 가시덤불에 막혀 말씀이 온전히 결실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네 가지 땅에 떨어진 씨에 대한 비유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길 가에 떨어진 씨는 밟히고 공중의 새들이 먹어버렸고 바위 위에 떨어진 씨는 싹이 났다가 습기가 없으므로 말랐다고 하셨습니다.
가시덤불 속에 떨어진 씨는 가시가 함께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그러나 좋은 땅에 떨어진 씨는 백 배의 결실을 하였다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이 비유의 뜻을 알아듣지 못하자 예수님께 여쭈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비유를 해석해 주셨습니다.
씨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러하므로 길가에 있었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이나 마귀가 가서 그들이 믿고 구원을 얻지 못하게 하려고 말씀을 그 마음에서 빼앗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바위 위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들을 때에 기쁨으로 받으나 뿌리가 없어 잠깐 믿다가 시련을 당할 때에 배반하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가시덤불에 떨어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이나 지내는 중 이생의 염려와 재물과 향락에 기운이 막혀 온전히 결실하지 못하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인 7절의 가시떨기와 가시와 14절의 가시떨기의 헬라어 원어원형은 ἄκανθα(아칸다)인데 “가시, 가시나무, 가시덤불”이라는 뜻입니다.
가시떨기에 떨어졌다는 것은 가시덤불에 떨어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가시덤불에 떨어진 씨에 대한 비유를 이해하기 쉽도록 세 가지 종류의 가시덤불에 떨어진 것으로 보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늘 본문 가운데 14절에 나오는 이생의 헬라어 원어원형은 βίος(비오스)인데 “생명, 생활, 삶, 생애”라는 뜻입니다.
지상의 생활에 관한 것으로 생의 기간이나 과정을 의미하므로 “인생”이란 의미로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하므로 세 가지 유형의 가시덤불은 살아가는 동안에 겪는 인생의 염려와 인생의 재물과 인생의 향락을 의미합니다.
오늘 본문의 의미에서 보면 인생이란 일생동안 겪게 되는 것들을 의미하는데 거룩하고 영적인 것들이 아니라 의식주와 육체적인 것들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가시덤불에 떨어진 사람은 말씀을 듣기는 들어도 이러한 가시덤불에 기운이 막혀 온전히 결실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기운이 막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14절에 나오는 기운이 막혀의 헬라어 원어원형은 συμπνίγω(쉼프니고)인데 “질식 시키다, 숨이 막히게 하다“라는 뜻입니다.
14절에서는 현재 수동형으로 사용되었으므로 가시덤불에 의해 질식하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계속해서 숨이 막히게 된다는 것인데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온전히 결실하지 못하게 됩니다.
14절에 나오는 온전히 결실하지의 헬라어 원어원형은 τελεσφορέω (텔레스포레오)인데 “완전한 열매를 내다, 성숙한 열매를 내다“라는 뜻입니다.
이러하므로 가시덤불로 말미암아 질식하게 되면 온전한 성숙한 열매를 내지 못하게 됩니다. 말씀이 가시덤불에 막혀서 작동이 잘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가시덤불 가운데 인생의 염려라는 가시덤불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 염려는 끝까지 따라 붙는다고 봐도 좋을 것입니다. 죽는 순간까지도 자녀나 경제적인 것이나 기타 다른 것으로 염려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염려는 인생살에 도움이 되지 않고 오히려 절망하게 만듭니다. 심지어 말씀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도록 합니다.
14절에 나오는 염려의 헬라어 원어원형은 μέριμνα(메림나)인데 “염려, 걱정“이라는 뜻입니다.
이러한 염려가 되기 시작하면 어떻게 됩니까? 염려가 점점 많아지면 염려에 질식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염려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무거워져서 숨도 못 쉴 만큼 염려에 깔려버리게 됩니다.
염려에 눌려서 발버둥만 칠 뿐 해결책이 별로 없는 무거운 짐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이러한 염려가 원망불평으로 터져 나오게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말씀이 막히게 됩니다. 결국은 말씀이 결실하지 못하고 질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피해는 누가 보게 되겠습니까? 염려 때문에 말씀이 막혀버리면 그렇게 한 자기 자신이 피해를 입게 됩니다. 말씀이 근본이고 길인데 말씀을 저버리면 인생살이를 근본적으로 올바르게 제대로 살아낼 수가 없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염려의 가시덤불이 덮치자 음식 때문에 얼마나 크게 염려하였던지 하나님과 하나님의 종인 모세를 향해 크게 원망하고 불평하였습니다. 출애굽기 16장 7-9절입니다.
16:7 아침에는 너희가 여호와의 영광을 보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희가 자기를 향하여 원망함을 들으셨음이라 우리가 누구이기에 너희가 우리에게 대하여 원망하느냐
16:8 모세가 또 이르되 여호와께서 저녁에는 너희에게 고기를 주어 먹이시고 아침에는 떡으로 배불리시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자기를 향하여 너희가 원망하는 그 말을 들으셨음이라 우리가 누구냐 너희의 원망은 우리를 향하여 함이 아니요 여호와를 향하여 함이로다
16:9 모세가 또 아론에게 이르되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기를 여호와께 가까이 나아오라 여호와께서 너희의 원망함을 들으셨느니라 하라
뒤이어 나오는 17장을 보면 이번에는 물 때문에 원망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17:2 백성이 모세와 다투어 이르되 우리에게 물을 주어 마시게 하라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나와 다투느냐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를 시험하느냐
17:3 거기서 백성이 목이 말라 물을 찾으매 그들이 모세에게 대하여 원망하여 이르되 당신이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서 우리와 우리 자녀와 우리 가축이 목말라 죽게 하느냐
이렇게 사사건건 염려하다가 원망한 결과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말씀이 막히자 결국에는 그러한 염려의 가시덤불에 질식해서 모두 죽게 되었지 않았습니까?
이러하므로 염려의 가시덤불은 속히 거두어 내야 합니다. 그냥 두면 안 됩니다. 계속 염려의 가시덤불이 자라도록 놔두면 안 됩니다. 염려의 가시덤불을 잘라내야 합니다.
그리하여 염려 때문에 내가 질식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나로 말미암아 염려의 가시덤불이 잘려 나가 말라 죽도록 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여야 염려의 가시덤불이 잘려 나가게 되겠습니까? 다시 말씀드리면 어떻게 하여야 염려하지 않게 되겠습니까?
간혹 긍정적인 의미의 좋은 염려도 있긴 합니다. 고린도후서 11장 28절입니다.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아직도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그러나 대부분의 염려는 생활에 대한 염려이기 때문에 하루 속히 버려야 하는 염려입니다.
이러하므로 예수님께서 가시덤불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오늘 본문 말씀인 8장 14절입니다. “가시떨기에 떨어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이나 지내는 중 이생의 염려와 재물과 향락에 기운이 막혀 온전히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
이렇게 염려를 가시덤불에 비유하셨다는 것은 염려는 말씀을 결실하지 못하게 할 만큼 해롭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됩니까? 베드로전서 5장 7절을 보면 염려를 맡기라고 하였습니다.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
이렇게 맡기면 되는데 잘 맡기지 못합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돌보시니까 맡기라고 하는데 잘 못 맡긴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맡기면 됩니다.
이러한 것을 구약성경에서 찾아보면 시편 55편 22절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네 짐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가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원히 허락하지 아니하시리로다.”
맡기면 된다는 원리를 잠언 16장 3절에서 말해주고 있습니다.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네가 경영하는 것이 이루어지리라.”
이러하므로 염려를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염려한다고 해서 해결이 되겠습니까? 눌려 있을 뿐입니다. 해결책은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이렇게 맡길 때 평안을 누리게 됩니다. 원망 불평하지 않게 됩니다. 그리고 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믿게 되고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을 믿게 되고 따르게 됩니다.
염려를 맡기는 것 자체가 이미 염려의 가시덤불이 제거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염려를 맡기기 시작하면 염려의 가시덤불은 사라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말씀이 내 삶 가운데 이미 결실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결실하기 시작하면 그만큼 내 삶이 염려에 눌려 지내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베드로전서 5장 7절 말씀을 읽어드리겠습니다.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거짓말을 하시는 분이십니까? 그렇지 않으십니다. 반드시 말씀하신 대로 성취해 주십니다. 염려를 맡기면 맡아 주신다고 하셨으면 맡아 주십니다.
민수기 23장 19절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고 인생이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하지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하지 않으시랴.”
이처럼 우리의 염려를 맡아 주시겠다고 말씀하시고 우리를 돌보아 주시는 하나님께 우리의 염려를 맡기면 그러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염려를 맡아 주십니다.
이러하므로 마음이 속상하고 골치가 아픈 것들이 있을 때 하나님께 이런 저런 일을 맡아 달라고 간절히 기도 드리면 됩니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처리해 주시므로 일이 오히려 더 잘 풀리게 됩니다. 염려의 가시덤불이 잘라져 나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생활의 염려라는 가시덤불 속에서 눌려 지내지 마시고 염려를 하나님께 기도 드리셔서 맡기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셔서 염려의 가시덤불이 잘려져 나가버려서 원망 불평하지 않게 되시고 평안을 누리게 되시고 일이 더 잘 풀려나가게 되셔서 말씀이 더욱 더 풍성하게 결실하게 되시길 바랍니다.

 

두번째 주제는 재물의 가시덤불에 막혀 말씀이 온전히 결실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재물을 싫어할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재물은 있을수록 좋은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 재물은 인생의 가시덤불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재물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인 8장 14절입니다. “가시떨기에 떨어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이나 지내는 중 이생의 염려와 재물과 향락에 기운이 막혀 온전히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
재물이 찌르고 괴롭히고 자라나지 못하게 하는 가시덤불이라고 하신 것을 보면 재물이 해롭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보면 재물을 좋아하는 것하고 재물이 좋은 것이라는 것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재물을 좋아 한다고 해서 그 재물이 좋다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재물이 좋은 것이라면 굳이 가시덤불이라고 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재물은 말씀이 온전히 결실하는 것을 질식하게 만드는 것이므로 많은 사람들이 재물을 좋아하지만 재물이 좋은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인 가운데 나오는 재물의 헬라어 원어원형은 πλοῦτος(플루토스)인데 “부유함, 부, 풍성“라는 뜻입니다.
오늘 본문이 주는 문맥에서 보면 소유물이 풍부한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의미는 외적으로 재물이 풍부하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재산이 많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러한 많은 재산을 누가 과연 싫어하겠습니까? 못 벌고 못 가져서 그렇지 동서고금 남녀노소 빈부귀천 어떤 사상이나 어떤 나라나 어떤 민족이라도 다 좋아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많은 재산이 가시덤불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많은 재산이 좋은 것이라면 왜 가시덤불이라고 하였겠습니까?
많은 재산이 재물의 가시덤불이 되어 뒤덮이게 되면 말씀이 온전히 결실하지 못하게 되기에 마냥 좋은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재물과 동일한 헬라어 어원은 아니지만 재물로 언급하고 있는 성경구절을 인용해보겠습니다.
마태복음 6장 24절입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이곳에 나오는 재물의 헬라어 원어원형은 μαμωνᾶς(맘노나스)인데 “맘몬, 부, 재산, 재물, 소유“라는 뜻입니다.
이러한 재물을 귀하게 여기고 사랑하게 되면 하나님은 경히 여기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보면 어느 한 쪽을 좋아하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하므로 재물을 좋아하게 되면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을 막게 되는 결과가 되는 것입니다.
재물의 가시덤불이 하나님의 말씀을 질식 시켜 온전히 결실하지 못하도록 막아버린다는 것입니다.
결국은 말씀에서 멀어지게 하고 말씀이 주는 생명과 복에서 점점 멀어지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재물이 많은 사람과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마가복음 10장 17-25절에 나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10:17 예수께서 길에 나가실새 한 사람이 달려와서 꿇어 앉아 묻자오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10:1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10:19 네가 계명을 아나니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 하지 말라, 속여 빼앗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
10:20 그가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켰나이다
10:21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이르시되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10:22 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 고로 이 말씀으로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
10:23 예수께서 둘러 보시고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도다 하시니
10:24 제자들이 그 말씀에 놀라는지라 예수께서 다시 대답하여 이르시되 얘들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10:25 낙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니
여기에 나오는 재물의 헬라어 원어원형은 κτῆμα(크테마)인데 “재산, 소유, 토지 재산“이라는 뜻입니다. 이제까지 언급된 재물에 대한 것을 보면 오늘 본문의 재물과 일맥상통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앞으로 살펴볼 재물에 대한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러한 재물이 많은 사람이 어렸을 때부터 계명을 잘 지켜왔으나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는 재물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은 지키지 못했습니다.
이러한 말씀이 그만 재물의 가시덤불에 질식해서 작동이 되지 않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장면이 그 당시의 그 사람에게만 해당이 되겠습니까? 지금도 그렇지 않다고 볼 수가 있겠습니까?
이러한 장면이 그때로 끝이 나고 더 이상 나타나지 말았으면 좋았을 텐데 그렇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재산을 팔아 드리기는 하였지만 재산이 아까워서 속이고 얼마를 몰래 감춘 사건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사도행전 5장 1-11절을 보면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가 그렇게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그날 순차적으로 모두 즉사하게 되었습니다.
5:1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그의 아내 삽비라와 더불어 소유를 팔아
5:2 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매 그 아내도 알더라 얼마만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
5:3 베드로가 이르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5:4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마음대로 할 수가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
5:5 아나니아가 이 말을 듣고 엎드러져 혼이 떠나니 이 일을 듣는 사람이 다 크게 두려워하더라
5:6 젊은 사람들이 일어나 시신을 싸서 메고 나가 장사하니라
5:7 세 시간쯤 지나 그의 아내가 그 일어난 일을 알지 못하고 들어오니
5:8 베드로가 이르되 그 땅 판 값이 이것뿐이냐 내게 말하라 하니 이르되 예 이것뿐이라 하더라
5:9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어찌 함께 꾀하여 주의 영을 시험하려 하느냐 보라 네 남편을 장사하고 오는 사람들의 발이 문 앞에 이르렀으니 또 너를 메어 내가리라 하니
5:10 곧 그가 베드로의 발 앞에 엎드러져 혼이 떠나는지라 젊은 사람들이 들어와 죽은 것을 보고 메어다가 그의 남편 곁에 장사하니
5:11 온 교회와 이 일을 듣는 사람들이 다 크게 두려워하니라
재물의 가시덤불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지를 알 수 있고 얼마나 크게 위력을 발휘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는 장면입니다.
이처럼 재물의 가시덤불이 덮으면 말씀이 막혀서 말씀이 작동하지 못해 결실하지 못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재산을 많이 모아둔 어떤 부자에 대해 말씀해주신 것도 있습니다. 누가복음 12장 15-21절입니다.
12:15 그들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하시고
12:16 또 비유로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시되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12:17 심중에 생각하여 이르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까 하고
12:18 또 이르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12:19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12:20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12:21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이 땅에 재물을 많이 쌓아 두면 안심이 될 것 같았지만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보장을 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땅에는 많이 쌓아 두었으나 하늘에는 쌓아 둔 것이 없어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이 역시 재물의 가시덤불이 말씀이 결실하는 것을 가로막아 질식 시켜 버려서 말씀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하나의 예로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하므로 그러한 잘못된 재물의 가시덤불을 잘라내 버려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여야 재물의 가시덤불을 잘라 내버릴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면 됩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재물을 이 땅에 쌓는 것보다 더 많이 더 좋은 재물을 하늘에 쌓으면 됩니다.
그러한 방법은 많이 있습니다. 십일조와 헌물이 있고 구제가 있습니다. 그 가운데 구제와 선한 사업에 대한 것을 살펴보겠습니다.
요한일서 3장 17절과 18절입니다. “누가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냐,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사도행전 4장 32-35절을 보면 놀라운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4:32 “믿는 무리가 한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4:33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받아
4:34 그 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4:35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그들이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줌이라
이러한 재물은 거룩한 재물, 하늘에 쌓아 두는 제대로 된 재물이라고 봐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재물에 대한 것을 사도 바울이 언급하고 있는 것을 디모데전서 6장 17-19절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6:17 네가 이 세대에서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6:18 선을 행하고 선한 사업을 많이 하고 나누어 주기를 좋아하며 너그러운 자가 되게 하라
6:19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
이러한 재물은 말씀을 질식 시키는 가시덤불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말씀이 잘 결실하도록 해주는 비료가 되어줄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재물이라는 가시덤불 속에서 눌려 지내지 마시고 재물을 하늘에 풍성하게 쌓아 두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셔서 재물의 가시덤불이 잘려져 나가버려서 선한 사업을 많이 하셔서 장래에 참된 생명을 취하게 되시고 모두가 함께 잘 사는 세상이 되게 하셔서 말씀이 더욱 더 풍성하게 결실하게 되시길 바랍니다.

 

세번째 주제는 향락의 가시덤불에 막혀 말씀이 온전히 결실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향락의 가시덤불이 우거지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말씀이 가시덤불에 막혀서 기를 펴지 못하고 시들시들해질 것입니다.
이러한 향락에 대한 것을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인 8장 14절입니다. “가시떨기에 떨어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이나 지내는 중 이생의 염려와 재물과 향락에 기운이 막혀 온전히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
향락이 찌르고 괴롭히고 자라나지 못하게 하는 가시덤불이라고 하신 것을 보면 향락이 해롭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향락의 가시덤불이 기승을 부리게 되면 말씀이 질식해서 온전히 결실하지 못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향락의 헬라어 원어원형은 ἡδονή(헤도네)인데 “즐거운 것, 쾌락의 추구“라는 뜻입니다. 오감에 즐거운 것을 의미하는데 육욕적인 쾌락을 뜻합니다.
이러한 향락은 타락하고 변질된 육체의 본능이므로 시키지 않아도 잘하고 열심히 공부하거나 훈련을 강하게 받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잘하게 됩니다.
이러하므로 향락을 그대로 두면 무럭무럭 자라나서 가시덤불을 이루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말씀을 뒤덮어서 질식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디모데후서 3장 4절처럼 되어 버립니다.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말씀을 대입시켜 보면 말씀보다 쾌락을 더 사랑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향락의 가시덤불이 말씀보다 더 무성하게 되면 기도하는 내용도 변질되어 버립니다. 기도해도 향락을 위해 기도한다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4장 3절입니다.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
정욕의 헬라어 원어원형은 ἡδονή(헤도네: 즐거운 것, 쾌락의 추구)인데 앞서 살펴본 대로 오늘 본문 14절의 향락과 같은 어원입니다.
마음의 소원을 가지고 기도를 해도 육체의 쾌락을 추구하기 위하여 잘못 기도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쾌락의 추구는 말씀에서 벗어난 것이고 세상과는 잘 어울리는 친구가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4장 4절입니다. “간음한 여인들아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 됨을 알지 못하느냐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이니라.”
세상은 달콤함을 줍니다. 쉽게 빠져들게 만듭니다. 이렇게 사는 것이 세상 사는 즐거움이라고 착각하게 만듭니다.
세상이 주는 것은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닙니다. 말씀으로부터 오는 것도 아닙니다.
아래로부터 오는 것이고 땅으로 부터 오는 것입니다. 악한 영이 파멸시키기 위해 선악과로 유혹하고 있는 것입니다.
좋아 보이지도 않고 슬퍼 보이고 답답해 보이고 괴로워 보인다면 향락의 선악과를 따먹지 않을 것입니다.
창세기 3장 6절입니다.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보기에 너무나 탐스럽고 맛있어 보이고 보기에도 좋아 보이기에 선악과를 먹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향락이 뿌린 결과는 쓰디씁니다. 참혹하게 됩니다. 패망하게 되고 파멸하게 되고 지옥에 가게 됩니다.
창세기 3장 16-17절을 보면 아담과 하와가 심판을 받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3:16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3:17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3:18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3:19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이렇게 된 결과 우리 모두가 죽게 되었고 인생을 살아가면서 괴로워하게 된 것입니다.
여기에다가 육체의 쾌락까지 추구하다가 더 큰 심판을 받고 파멸하고 결국은 영원히 지옥으로 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1장 8절입니다.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점술가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거짓말하는 모든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이러한 것을 보면 향락의 가시덤불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잘 알 수 있습니다. 잠시 쾌락의 맛을 보다가 영원히 지옥의 뜨거운 맛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끔찍한 형벌은 지옥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땅에 사는 동안에도 불순종으로 말미암은 지옥의 형벌과 같은 뜨거운 맛을 보게 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여야 이러한 향락의 가시덤불에서 벗어날 수 있겠습니까? 다시 말씀드리면 향락을 잘라내 버릴 수가 있겠습니까?
베드로전서 4장 3절을 보면 향락하여 이방인의 뜻을 따라 행하였던 지나간 때가 족하다고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4:3 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취함과 방탕과 향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따라 행한 것은 지나간 때로 족하도다
이제는 더 이상 향락에 빠지지 말라는 것입니다.
디도서 3장 3절을 보면 전에는 향락에 종노릇을 한 자였다고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3:3 우리도 전에는 어리석은 자요 순종하지 아니한 자요 속은 자요 여러 가지 정욕과 행락에 종 노릇 한 자요 악독과 투기를 일삼은 자요 가증스러운 자요 피차 미워한 자였으나
그렇다면 이렇게 이방인의 뜻에 따라 향락을 추구하고 향락에게 종노릇 하던 것에서 어떻게 하여야 벗어날 수 있겠습니까? 이러한 향락의 가시덤불을 잘라내 버리고 말씀이 온전히 결실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
디도서 3장 3절에 뒤이어 나오는 3장 4-7절을 보면 해결책을 볼 수 있습니다.
3:4 우리 구주 하나님의 자비와 사람 사랑하심이 나타날 때에
3:5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3:6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그 성령을 풍성히 부어 주사
3:7 우리로 그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상속자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향락의 가시덤불을 잘라내 버리는 방법은 성령의 능력으로 향락의 가시덤불을 해결 받을 수 있게 됩니다.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으시고 속량해 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성령님을 보내주셔서(갈 3:13-14, 행 2:33) 보내주신 성령님에 따라 행하여서 육체의 욕망이 이루어지지 않도록 해 주신 것입니다(갈 5:16).
특별한 방식으로는 성령의 불을 받게 되면 향락의 가시덤불이 불태워져 사라지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일반적인 방식으로는 성령에 따라 행하게 되면 육체의 욕심이 이루어지지 않게 됩니다.
육체는 본능적으로 향락을 추구하게 하나 성령은 육체의 욕망을 버리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 16절입니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향락이라는 가시덤불 속에서 눌려 지내지 마시고 성령으로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않게 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셔서 향락의 가시덤불이 잘려져 나가버려서 육체의 욕망을 추구하면서 살지 않게 되시고 육체의 쾌락보다 말씀을 더 사랑하게 되셔서 말씀이 더욱 더 풍성하게 결실하게 되시길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오늘 세 가지 주제를 총정리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이제까지 인생의 가시덤불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에 말씀이 결실하지 못하도록 질식 시켜버리는 세 가지 유형의 가시덤불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염려의 가시덤불과 재물의 가시덤불과 향락의 가시덤불이 그러합니다. 이러한 가시덤불을 그냥 두면 말씀이 막혀서 작동이 잘 되지 않게 됩니다. 이러하므로 이러한 가시덤불을 잘라내 버려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잘라내 버릴 수가 있겠습니까? 염려의 가시덤불은 염려를 하나님께 기도 드려 맡겨버리면 됩니다.
재물의 가시덤불은 재물을 이 땅에만 쌓으려고 할 것이 아니라 재물을 하늘에 쌓아 두면 됩니다.
향락의 가시덤불은 쾌락을 추구하는 것보다 말씀을 더 사랑하고 성령에 따라 행하면 됩니다.
이렇게 염려의 가시덤불과 재물의 가시덤불과 향락의 가시덤불을 잘라내 버리면 말씀이 질식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잘 작동이 되어 말씀이 잘 결실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러한 염려의 가시덤불과 재물의 가시덤불과 향락의 가시덤불을 잘라내 버리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셔서 염려의 가시덤불과 재물의 가시덤불과 향락의 가시덤불이 잘려져 나가버려서 염려하면서 살지 않게 되시고 재물을 하늘에 쌓으면서 살게 되시고 성령에 따라 살게 되셔서 말씀이 더욱 더 풍성하게 결실하게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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