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눈에 보는 갈라디아서 (재개정판) 6장 이성성율(以聖成律)의 실행
6장 개요
✙✙✙ 6장 구절
갈라디아서 6장에서 대표적인 구절을 선정한다면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게 된다는 것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8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6:8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 6장 주제
갈라디아서 5-6장은 이성성율(以聖成律)이 주는 자유에 대한 관점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것을 통해 율법으로부터 자유를 주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가운데 6장은 성령(聖靈)의 인도로 율법(律法)을 성취(成就)하게 해주는 이성성율(以聖成律)에 대한 실천과제를 제시해주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율법으로부터 속량해주셔서 자유롭게 해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내주신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실제로 행하여서 율법 아래에 있지 않도록 해주고 있습니다.
6장은 이러한 흐름이 있으므로 이와 관련된 주제를 도출해 본다면 이성성율의 실행이 됩니다.
✙✙✙ 6장 구조
갈라디아서 6장은 성령(聖靈)의 인도로 율법(律法)을 성취(成就)하게 해주는 이성성율(以聖成律)의 실행에 관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갈라디아서를 보면 그리스도께서 속량해주셔서 자유를 주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3:13, 4:5, 5:1).
이신칭의(以信稱義)와(2:16) 이기속율(以基贖律)과(3:13) 이성성율(以聖成律)입니다(5:18).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信)으로 말미암아 의(義)롭다고 칭(稱)함을 얻게 해주는 이신칭의(以信稱義)의 자유가 있고,
그리스도(基督)께서 율법(律法)으로부터 속량(贖良)해주는 이기속율(以基贖律)의 자유가 있고,
그리스도께서 보내주신 성령(聖靈)의 인도로 율법(律法)을 성취(成就)하게 해주는 이성성율(以聖成律)의 자유가 있습니다.
이 가운데 6장은 이성성율에 대한 논증이 아니라 이성성율의 실행에 초점을 두고 집중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주신 자유를 실제로 누릴 수 있도록 이성성율을 실제로 실행할 수 있는 실천과제를 제시해주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6장은 모두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1-5절의 그리스도의 법의 성취와 6-10절의 심음과 거둠의 법칙과 11-18절의 새로 지으심을 받음입니다.
1-5절은 온유한 심령으로 바로 잡아주고 짐을 서로 져서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는 것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6-10절은 가르치는 자와 좋은 것을 함께 하고 성령을 위하여 심고 믿음의 가정들에게 선을 행하는 것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11-18절은 큰 글자로 쓴 것과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과 마지막 인사를 하면서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다는 것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6장 개관
단락 | 단락별 개요 |
1-5 | 그리스도의 법의 성취 |
6-10 | 심음과 거둠의 법칙 |
11-18 | 새로 지으심을 받음 |
6:1-5 그리스도의 법의 성취
1-5절에서는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는 것에 대한 것을 언급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율법을 이루게 되는 이성성율을 실행할 수 있도록 실천과제를 제시해주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범죄한 사람이 있으면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바로잡아주고 짐을 서로 져서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고 하는 것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법은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큰 계명과 새 계명과 내 계명인 사랑으로 성취하는 사랑의 법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것은 사랑으로 종노릇 하는 것 가운데 하나로 볼 수 있고 이성성율(以聖成律)을 실행하는 것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 6:1 온유한 심령으로 바로잡음
6:1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너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1절에서는 온유한 심령으로 바로 잡아주라는 것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1a절을 보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 잡으라고 하였습니다.
범죄한 일이의 원어원형은 παράπτωμα(파랍토마)인데 “죄, 범죄, 실수”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드러나거든의 원어원형은 προλαμβάνω(프롤람바노)인데 “미리 취하다, 예기하다, 앞질러 처리하다”라는 뜻입니다.
과거 수동태이므로 어떤 사람이 지은 범죄가 처벌받기 전에 미리 알려지게 되었다는 의미로 볼 수 있고 지은 범죄가 발각되었다는 의미로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렇게 알게 되었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입니다. 즉각 처벌하는 것이 아니라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 잡아주라는 것입니다.
신령한의 원어원형은 πνευματικός(프뉴마티코스)인데 “영적인, 영에 속하는”이라는 뜻입니다.
신령한 사람은 영적인 사람인데 성령께 사로잡힌 성령께 속한 사람을 의미합니다.
육체의 욕망에 따라 사는 사람이 아니라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성령으로 살아가는 사람을(5:16, 18, 25)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은 그리스도께서 보내주신 성령(聖靈)의 인도로 율법(律法)을 성취(成就)하게 해주는 이성성율(以聖成律)의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사람은 육체의 일들을(5:19-21) 행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되고(5:22-23) 성령의 은사로(고전 12:4-11) 일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비록 범죄한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온유한 심령으로 바로잡아주게 되는 것입니다.
온유한의 원어원형은 πραύτης(프라위테스)인데 “온유, 온화, 겸손, 동정심”이라는 뜻으로 5장 23절에 나오는 성령의 열매 가운데 하나인 온유와 동일한 어원입니다.
바로잡고의 원어원형은 καταρτίζω(카타르티조)인데 “준비하다, 회복하다, 완전하게 하다”라는 뜻입니다.
이러한 것을 보면 성령의 인도를 받고 성령의 열매를 가진 신령한 사람으로서 온유한 심령으로 처리하라는 것입니다.
범죄를 하였다고 즉시 끝장을 내버리는 것이 아니라 권고하면서 신중하게 처리해주고(마 18:15-17) 때론 용서해주어야(마 6:14-15) 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주시는 온유한 심령에 따라 이러한 방식으로 하여 범죄에 빠진 자를 회복시켜 온전해질 수 있도록 해주라는 것입니다.
1b절을 보면 그렇게 하면서 너 자신을 살펴보아 너희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고 하였습니다.
살펴보아의 원어원형은 σκοπέω(스코페오)인데 “주시하다, 관찰하다”라는 뜻입니다.
시험을 받을까의 원어원형은 πειράζω(페이라조)인데 “시련하다, 시험하다, 유혹하다”라는 뜻입니다.
두려워하라의 원어원형은 μή(메)인데 “아니, -하지 않도록, -하지 않을까 하여”라는 뜻입니다.
자칫하면 자신의 눈 속에 있는 들보는 못 보고 다른 사람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게 되는(마 7:3) 것처럼 되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러하므로 범죄에 빠진 그러한 자들을 교훈으로 삼고 자기 자신을 살펴보아서 그러한 유혹에 빠지게 되지 않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남 탓하기를 좋아하는 육에 속한 상태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오직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영에 속한 영적으로 신령한 상태가 되어야 해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으므로 사도 바울이 신령한 너희는이라고 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일은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성령으로 행하여 율법을 성취하게 되어 영적으로 신령하게 된 이성성율(以聖成律)을 실행하는 사람이 할 수 있게 되기에 그렇게 권면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 6:2-5 서로 짐을 짐
6:2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6:3 만일 누가 아무 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라
6:4 각각 자기의 일을 살피라 그리하면 자랑할 것이 자기에게는 있어도 남에게는 있지 아니하리니
6:5 각각 자기의 짐을 질 것이라
2-5절에서는 서로 짐을 지라는 것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앞서 살펴본 1절을 보면 신령한 너희는 범죄한 자를 온유한 심령으로 회복시켜주라고 하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2절에서도 1절처럼 잘못하였을 때도 도와준 것처럼 답답하고 괴로운 짐을 서로 져주어서 서로 도와주어서 서로 회복시켜주라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온유한 심령으로 회복시켜주고 고통에 처해 있는 사람들의 짐을 내려놓게 해주는 것이 사랑을 베푸는 것이 될 것입니다.
2절을 보면 짐을 서로 지라고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고 하였습니다.
2절에 나오는 짐을의 원어원형은 βάρος(바로스)인데 “무게, 짐”이라는 뜻입니다. 무게가 나가는 무거운 짐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짐에는 괴롭게 하고 답답하게 하고 이러지도 못하고 저리지도 못하게 하고 심지어 죽고 싶을 정도가 되게 하는 여러 가지의 무거운 짐들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보는 것과는 상관이 없이 크든 작든 각자 자신이 보기에 해결할 수 없는 무거운 짐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짐을 도무지 해결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면 어떤 행동을 하게 되겠습니까? 이러한 것을 막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짐을 해결할 수 있도록 도와주면 됩니다.
이와 같은 무거운 짐에는 건강의 짐, 경제의 짐, 슬픔과 낙심의 짐, 미움과 속상함의 짐, 사업과 학업과 직업의 짐, 폭압의 짐, 전쟁과 재난의 짐 등이 있습니다.
이러한 짐보다 더 무거운 영적인 짐도 있습니다. 저주와 사망의 짐, 영벌의 짐, 악한 영의 짐, 거짓 선지자의 짐 등이 있습니다.
열거되지 않은 짐까지 모두 합하면 얼마나 많은 짐이 있겠습니까? 이러한 무거운 짐은 쉽게 해결할 수 없는 짐들입니다.
이러한 짐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져주실 때 근본적으로 해결 받을 수 있습니다. 이러하므로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자들을 향하여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를 쉬게 하리라고(마 11:28)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신령한 우리 모두가 이러한 무거운 짐을 서로 나누어 가져서 서로 도움을 주고 받을 때 해결될 수 있습니다.
신령한 영적인 상태가 되면 그리스도의 심정이 되어 가난한 자들을 도와주게 되고 마음이 아파하는 자들을 위로해 주게 됩니다.
병든 자를 고쳐주거나 방문하게 되고 약한 자들을 존중하면서 일으켜주게 되는 등의 일을 하게 됩니다.
말과 혀로만이 아니라 실제로 필요한 것을 공급해 주는 사랑을 실천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최고봉인 사랑을 실천하여 율법을 완성하여 최고의 법(약 2:8)이요 사랑의 법인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자유를 주셨으므로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5:1) 하였는데 왜 짐을 져야 합니까?
그리스도로부터 받은 자유로 육체의 기회로 삼지 않고 율법의 완성인(5:14)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 하라는 것을(5:13) 실천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하셨는데 그러한 이유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볍기 때문이라고(마 11:29-30) 하셨습니다.
이러한 멍에와 짐은 어떻게 보면 쉽고 가벼운 좋은 멍에와 짐입니다. 그러한 멍에와 짐은 질수록 좋은 것입니다. 그러한 이유는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 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서로 짐을 져주는 것이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 하는 것이 됩니다. 그리하면 그리스도의 법이 성취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법은 사랑의 법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장 대표적으로 주신 그리스도의 법은 무엇이겠습니까? 사랑의 법입니다.
가장 큰 계명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고(막 12:30-31) 새 계명도 서로 사랑하라는(요 13:34-35) 것이고 내 계명이라고 하신 것도 서로 사랑하라는(요 15:12, 17)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하므로 너희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고전 16:14)고 하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2절의 성취하라의 원어원형은 ἀναπληρόω(아나플레로오)인데 “채우다, 보충하다, 완전히 이행하다, 성취하다”라는 뜻입니다.
성령께서 인도해주시는 영적으로 신령한 사람은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 하는 사람이고 서로 사랑으로 짐을 지는 사람입니다.
서로의 무거운 짐을 지는 그러한 사랑을 통해 그리스도의 법을 온전히 성취해 나가는 사람인 것입니다.
이렇게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그러한 사랑의 실천으로 율법을 온전히 이행하여 율법을 성취해 나가는 사람을 이성성율(以聖成律)을 실행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하므로 무거운 짐을 서로 져서 도와주고 해결해주어서 최고의 법(약 2:8)이요 사랑의 법인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이후에 나오는 3절을 보면 누가 아무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인다고 하였습니다.
3절의 속임의 원어원형은 φρεναπατάω(프레나파타오)인데 “마음을 속이다”라는 뜻입니다.
스스로의 원어원형은 ἑαυτοῦ(헤아우투)인데 “그 자신의, 그 스스로의, 그 자체의”라는 뜻입니다.
누가 아무것도 되지 못하고서도 무엇이 된 줄로 생각한다면 자기가 자기 자신을 속이는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한 것과(고전 10:12)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한다고 한 것과(고전 8:2) 같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의 법인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기 위해 사랑으로 종노릇을 하려면 아는 체하고 잘난 체하고 대단한 체하고 있는 체하고 교만해서는 종노릇을 할 수 없게 되고 겸손해야 종의 자세로 섬길 수 있게 되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러하므로 자기 자신을 대단하게 여기고 잘하고 있다고 여기지 않도록 3절에서는 스스로 속인다고 하였고 7절에서는 스스로 속이지 말라고 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6장은 이성성율(以聖成律)을 실행하는데 초점을 두고 있으므로 이러한 실천과제를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하므로 자기 자신을 돌아보도록 하고 있습니다. 1절에 너 자신을 살펴보라고 하였는데 4절에서도 각각 자기의 일을 살펴보라고 하였습니다.
일을의 원어원형은 ἔργον(에르곤)인데 “일, 행위”라는 뜻입니다.
살피라의 원어원형은 δοκιμάζω(도키마조)인데 “시험하다”라는 뜻입니다.
각각 자기의 일을 살펴보라는 것은 시험해서 통과하게 될 정도로 그만큼 세밀하게 자기 자신의 행위를 살펴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4절의 자기에게는의 는의 원어원형은 μόνος(모노스)인데 “혼자, 홀로, 단지”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있어도의 원어원형은 ἔχω(에코)인데 “가지다, 소유하다”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하게 되면 자랑거리를 자기만 홀로 가지게 되고 다른 사람에게는 그러하지 아니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은 알아줄지 몰라도 다른 사람에게는 내세울 만한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3절처럼 겸손하게 아무것도 되지 못한 줄로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스스로 속이지 않고(6:3) 자기의 행위를 살피는(6:4) 사람은 자기 자신을 돌아보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다른 사람을 더 낫게 여기고 겸허하게 섬길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 사람은 사랑의 법인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여 이성성율을 실행하게 되는 신령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후에 나오는 5절을 보면 각각 자기의 짐을 지라고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짐을 지는 것도 사랑의 실천이나 다른 사람에게 짐을 지우지 않는 것도 사랑의 실천으로 볼 수 있습니다.
5절의 짐을의 원어원형은 φορτίον(포르티온)인데 “짐, 화물”이라는 뜻입니다.
이러한 것을 보면 자기 자신이 질 수 있는 짐을 다른 사람에게 떠넘기지 말고 자기 자신이 책임지고 져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와 같으므로 도둑질하는 사람은 다시 도둑질하지 말고 돌이켜서 가난한 사람에게 구제할 수 있도록 자기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고(엡 4:28) 하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고(살후 3:10) 하였을 것입니다.
또한 조용히 자기 일을 하고 자기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라고 하였는데 이러한 것은 다른 사람에 대하여 단정히 행하고 아무 궁핍함이 없게 하려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것을 보면 열심히 일해서 자신을 위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까지도 도와줄 수 있을 정도가 되라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짐이 되는 사람이 아니라 짐을 덜어주는 사람이 되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할 때 최고의 법이요 사랑의 법인 그리스도의 법이 성취될 수 있고 이성성율(以聖成律)이 실행될 수 있는 것입니다.
6:6-10 심음과 거둠의 법칙
6-10절에서는 심음과 거둠의 법칙에 대한 것을 언급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는 것과 성령을 위하여 심으라는 것과 믿음의 가정들에게 착한 일을 하라는 것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여 심게 되면 심은 대로 거두게 된다는(7, 8, 9) 것입니다. 때가 되면 약속된 대로 반드시 좋은 것을 거두게 될 것입니다.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나눈 대로 거두게 되고(6-7), 성령을 위하여 심은 대로 거두게 되고(8), 믿음의 가정들에게 착한 일을 행한 대로 거두게 되는 것입니다(9-10).
이러한 것도 사랑으로 종노릇 하는 것 가운데 하나로 볼 수 있고 이성성율(以聖成律)을 실행하는 것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실행하기 위하여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율법을 성취할 수 있는 실천과제를 제시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심고 거두는 불변의 법칙에 대한 것을 알려주고 법칙대로 실행할 수 있도록 해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것을 잘 대해주라는 측면으로 본다면 가르치는 자를 잘 대해주고 성령께 잘 대해드려야 하고 믿음의 가정들에게 잘 대해주라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 6:6-7 가르치는 자와 좋은 것을 함께 함
6:6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
6:7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6-7절에서는 가르치는 자와 좋은 것을 함께 하라는 것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심은 대로 거두게 된다는 심고 거두는 법칙에 따른 실천과제를 제시해주고 있습니다.
이 가운데 6절은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고 하였습니다.
수학 선생이 싫으면 수학이 싫어지고 영어 선생이 싫어지면 영어가 싫어진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러하므로 가르침을 받는 사람은 가르치는 사람과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말씀을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여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말씀을 가르치는 사람이므로 자신에게 유리하게 하려고 이러한 것을 언급한 것이 아닙니다.
또한 가제는 게편이라는 말처럼 말씀을 가르치는 동역자를 위해서 그렇게 언급한 것도 아닐 것입니다.
구약성경에서 전해져온 것과 예수 그리스도께서 생전에 하신 말씀을 보면 그렇게 하라고 하고 있기에 언급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성령으로 이성성율을 실행하는 신령한 사람은 이러한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거나 거부하지 않고 오히려 이러한 것을 잘 알고 힘써 자원해서 사랑으로 실천하게 되어 있습니다.
열왕기하 4장 8-17절을 보면 수넴의 한 귀한 여인이 엘리사를 세심하게 배려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음식을 대접해드리고 작은 방까지 마련해서 침상과 책상과 의자와 촛대를 둘 정도로 섬기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생각하지도 않았던 아들을 낳게 되는 복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말씀을 가르치는 자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는 사람이므로(행 6:4) 대부분 일반적인 직업을 가지고 있지 않아서 의식주에 대한 것을 자력으로 해결하지 못합니다.
이러하므로 말씀을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이 너무도 중요하기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생전에 신신당부하시고 명령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10장을 보면 제자들을 내보내시면서 하신 파송설교를 볼 수 있습니다.
그 가운데 10-15절입니다. 일꾼이 자기가 먹을 것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셨고 합당한 자를 찾아내어 머물라고 하시고 평안하기를 빌어주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영접하지도 아니하고 말도 듣지 아니하면 집이나 성에서 나가서 발의 먼지를 떨어버리라고 하셨는데 심판 날에 소돔과 고모라 땅이 그 성보다 견디기 쉽다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파송설교하시고 마지막에 또다시 영접하는 것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40-42절인데 이번에는 화를 받게 된다는 것이 아니라 상을 받게 된다는 것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고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는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제자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결단코 상을 잃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그만큼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 되어 전념해서 사역하는 제자들의 생계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생계를 제자들이 자체적으로 해결하기 어려우므로 누군가는 해결해주어야 합니다.
이와 같으므로 제자들을 섬기면 상을 받게 되고 섬기지 않으면 화를 당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마태복음 25장 35-45절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셔서 심판하실 때에 심판하시는 내용을 볼 수 있습니다.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내가 주릴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다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언제 그렇게 하였는지 반문하였습니다. 그럴 때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왼편에 있는 자들은 이러한 것과는 정반대였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작은 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를 가리키고(마 10:42) 그러한 제자들 가운데 큰 어려움에 처해 있는 제자를 지극히 작은 자로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땅에 남아서 자신의 일을 감당해야 하는 제자들의 생계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시고 해결받을 수 있도록 해주신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사도 바울이 모를 리가 없기에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고 하였을 것입니다.
6절의 함께 하라의 원어원형은 κοινωνέω(코이노네오)인데 “참여하다, 나누어 주다”라는 뜻입니다.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에게 모든 좋은 것을 나누어 주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사이가 나빠져서 말씀이 막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이가 좋아져서 말씀이 막히지 않고 은혜가 더 크게 임하게 됩니다.
그리고 말씀의 사역자들이 가족과 생계에 대한 부담을 줄이게 되고 말씀을 가르치는 일에 더 전념하고 집중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보면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나누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함께 나누어서 심은 것은 약속 대로 반드시 거두게 된다는 것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것이 사랑으로 종노릇 하는 것이고 사랑으로 짐을 져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최고의 법(약 2:8)이요 사랑의 법인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게 되고 이성성율(以聖成律)을 실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후에 나오는 7절을 보면 스스로 속이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신다고 하면서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둘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것을 보면 심은 대로 거두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나눈 대로 거두게 되고(6-7), 성령을 위하여 심은 대로 거두게 되고(8), 믿음의 가정들에게 착한 일을 행한 대로 거두게 된다는 것입니다(9-10).
심은 대로 거두게 된다는 것은 법칙인데 그렇지 않다고 여길 수도 있을 것입니다.
심지 않고 거두려고 한다거나 심어도 거두지 않게 된다고 여기는 것이 바로 그러한 것입니다.
7절의 스스로 속이지의 원어원형은 πλανάω(플라나오)인데 “길을 잃게 하다, 미혹하다, 빗나가다, 방황하다”라는 뜻입니다.
현재 수동태이므로 “길을 잃다, 잘못된 길로 이끌리다, 잘못되다, 미혹되다, 속다, 정도에서 벗어나다”라는 의미가 됩니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는 것은 잘못된 길을 선택하여서 길을 잃게 되고 방황하게 되고 길에서 빗나가게 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심고 거두는 법칙의 길을 무시하고 그렇지 않다고 하는 길로 갔다가 그렇게 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3장 18절을 보면 아무도 자신을 속이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지혜 있는 줄로 생각하거든 어리석은 자가 되라고 하였습니다. 그리하여야 지혜로운 자가 된다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하지 않고 스스로 지혜가 있다고 한다면 자기 꾀에 자기가 빠지게 됩니다.
아무리 똑똑한 척해도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심고 거두는 법칙과 같은 것을 무시하면 길을 잃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결국은 좋은 것을 거두지 못하고 좋지 않은 것을 거두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하므로 스스로 지혜가 있는 것처럼 자만하여 자기 자신에게 속지 말라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속이지 말라는 것을 야고보서 1장 22절에 볼 수 있습니다.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26절에는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물리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스스로 속인다는 것을 요한일서 1장 8절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심고 거두는 법칙을 대아(자신)관계와 대신(하나님)관계를 통해 언급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먼저 자신에 대해서는 스스로 속이지 말라고 한 다음에 그 다음에는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에 대해 언급해주고 있습니다.
7절의 업신여김을 받지의 원어원형은 μυκτηρίζω(뮉테리조)인데 “코웃음 치다, 비웃다, 조롱하다”라는 뜻입니다.
현재 수동태이므로 하나님은 비웃음을 받게 되시는 분도 아니시고 조롱을 받게 되시는 분도 아니시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사람으로부터 경멸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성령으로 살아가는(5:16, 18, 25) 신령한 사람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경외하게 됩니다.
그러나 길을 잃게 하는 육체의 욕망대로 이끌려 사는(5:19-21) 신령하지 못한 사람들은 경멸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러한 대우를 받게 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오락가락하지 않으시고 흔들림 없이 말씀하신 그대로 이루어주시는 분이십니다.
이사야 55장 10절을 보면 비와 눈이 하늘로부터 내려서 그리로 되돌아가지 아니하고 땅을 적셔 소출이 나게 하고 싹이 나게 하여 파종하는 자에게는 종자를 주고 먹는 자에게는 양식을 주는 것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55장 11절을 보면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이와 같이 헛되이 내게로 되돌아오지 아니하고 내가 기뻐하는 뜻을 이루고 내가 보낸 일에 형통하다고 하였습니다.
그러한 것을 민수기 23장 19절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므로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고 인생이 아니시므로 후회가 없으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하지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하지 않으시랴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것을 보면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은 헛되이 되돌아가지 않고 그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신 바를 행하시고 하신 말씀을 실행하신다는 것도 알 수 있습니다.
정리하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말씀하신 그대로 실행하셔서 성취시켜주신다는 것입니다.
이러하므로 하나님께서 심은 대로 거두게 해주겠다고 말씀하셨으면 말씀하신 그대로 거두게 해주십니다.
이와 같으므로 7b절에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둘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7절에 나오는 심든지의 심의 원어원형은 σπείρω(스페이로)인데 “(씨를) 뿌리다”라는 뜻입니다.
그 누구든 그 무엇이든 뿌린 대로 거두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어디에나 적용된다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9장 6절에는 연보에 대해 그렇게 언급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고 하였습니다.
9장 10절에는 심는 자에게 씨와 먹을 양식을 주시는 분께서 심을 것을 풍성하게 주셔서 풍성하게 하시고 의의 열매를 더하게 하시리라고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것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이성성율을 실행하는 신령한 사람은 심고 거두는 법칙을 잘 알고 그대로 실천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가운데 하나로 가르침을 받는 자는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자원해서 기쁘게 함께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 6:8 성령을 위하여 심음
6:8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8절에서는 성령을 위하여 심는 것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심고 거두는 법칙은 언제나 그 누구든 그 무엇이든 적용이 됩니다. 말씀하신 그대로 이루어주시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8절에는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둘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8절의 심는과 심는의 원어원형은 σπείρω(스페이로)인데 “(씨를) 뿌리다”라는 뜻으로 7절에 나오는 심든지의 심과 동일한 어원입니다.
육체에다가 씨를 뿌리면 육의 것을 거두게 되고 성령께 씨를 뿌리면 영의 것을 거두게 된다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8절의 거두고와 거두리라의 원어원형은 θερίζω(데리조)인데 “거두다, 추수하다, 수확하다”라는 뜻입니다. 추수하거나 수확하듯이 거두게 된다는 의미로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것을 보면 뿌린 대로 반드시 추수하게 되어 있고 뿌린 대로 반드시 수확하게 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하므로 육체의 욕망에 따라 살면 육체의 일들을 수확하게 되고 성령에 따라 살면 영적인 일들을 수확하게 되는 것입니다.
8절에서는 이성성율(以聖成律)에 대해 변증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성성율(以聖成律)을 실제로 실행하게 될 때 일어나게 되는 것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성령(聖靈)의 인도로 율법(律法)을 성취(成就)하게 해주는 이성성율(以聖成律)에 대한 실천과제를 제시해주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육체를 위하여 심지 말고 성령을 위하여 심으라는 것인데 육체의 욕망에 따라 살지 말고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길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육체의 길과 성령의 길로 볼 수 있습니다.
어느 길을 선택하고 가느냐에 따라 얻게 되는 그 결과는 현저하게 다른 결과를 거두게 됩니다.
육체의 길로 가게 되면 길을 잃고 방황하면서 살다가 결국에는 영원히 멸망하게 됩니다. 지옥에 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길로 가게 되면 올바른 길로 가면서 살다가 영원히 영생복락을 누리게 됩니다. 천국에 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8절의 썩어질 것을의 원어원형은 φθορά(프도라)인데 “파멸, 파괴, 멸망, 부패”라는 뜻입니다.
잘못되어서 없어지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파멸되어서 없어지고 파괴되어서 없어지고 멸망해서 없어지고 부패해서 없어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육체의 길로 가게 되면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영생을의 영의 원어원형은 αἰώνιος(아이오니오스)인데 “시작이나 끝이 없는, 영원한, 세세의”라는 뜻입니다.
영생을의 생을의 원어원형은 ζωή(조에)인데 “생명”이라는 뜻입니다.
성령의 길로 가게 되면 이러한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고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영생은 내생의 천국에서만 영원히 누리게 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성령으로 거듭난 이후부터 영원히 사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것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반드시 멸망한다는 필멸(必滅)과 반드시 멸망하지 않는다는 불멸(不滅)을 알 수 있습니다. 영원한 멸망과 영원한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하므로 육체의 길로 가면 육체의 일들을(5:19-21) 거두게 되고 성령의 길로 가면 성령의 열매를(5:22-23) 거두게 됩니다.
육체의 길로 가면 속아서 육적인 것을 거두게 되고 성령의 길로 가면 속지 않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 영적인 것을 거두게 됩니다.
그리하여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영원한 멸망인 영멸(永滅)을 거두게 됩니다.
그러나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원한 생명인 영생(永生)을 거두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임하시게 되면 영에 속한 것을 거두게 되는데 능력이 임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어떤 능력이 임하겠습니까? 여러 가지 능력이 임하게 됩니다. 그 가운데 가장 필수적이고도 가장 중요한 능력은 말씀에 순종하는 능력입니다.
사람의 본분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전 12:13).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이러하므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영을 부어주셔서(사 11:2) 잘 경외할 수 있게 해주시고 말씀에 순종하는 영을 부어주셔서(겔 36:27) 말씀에 잘 순종할 수 있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말씀에 순종하는 능력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능력입니다.
그렇다면 이웃을 어떻게 사랑하면 됩니까? 말과 혀로만이 아니라 지갑이 회개해야 진짜 회개하였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실제로 지갑을 열어 도와주어야 합니다.
요한일서 3장 17-18절을 보면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랴고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와 같으므로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고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야고보서 2장 14-17절에서도 그러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도 행하지 않으면 아무 유익이 없다는 것입니다.
형제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말로는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고 하면서도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않으면 무슨 유익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성성율(以聖成律)을 이처럼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말씀대로 실제로 실행해야 복음이 실제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임하시면 어떤 현상이 나타나게 됩니까? 여러 가지 많은 현상이 나타납니다.
여러 가지 능력이 나타나게 되는데 그 어떤 능력보다 중요한 말씀에 순종하는 능력이 나타나게 됩니다.
그러한 것 가운데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지나칠 수 있는 일이 일어나게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2장 43-45절을 보면 성령으로 충만하게 된 이후에 나타나게 되는 현상을 볼 수 있습니다.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는 일이 발생한 것입니다.
열심히 벌어서 모아둔 개인의 사유재산이 있었는데 그러한 것을 아낌없이 이웃의 어려운 자들을 위해 팔아서 베풀어준 것입니다.
그리고 이후에 사도행전 4장 32-35절에서도 그러한 현상이 나타나게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믿는 무리가 한마음과 한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 가운데 가난한 사람이 없는 이유는 밭과 집 있는 자가 팔아서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자 사도들이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주었기 때문이었다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것이 말씀에 순종하는 능력으로 볼 수 있습니다. 쉬운 일이 아니므로 성령께서 인도해주시므로 가능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일에 대한 예를 볼 수 있는데 사도행전 4장 36-37절과 5장 1-2절입니다.
성령을 위하여 심은 바나바를 볼 수 있는데 바나바가 밭이 있으므로 팔아서 그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와 반대로 성령을 위하여 심지 않고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은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를 볼 수 있습니다. 이들도 소유를 팔았으나 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었습니다.
이렇게 심은 결과가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그들이 뿌린 대로 무엇을 거두게 되었겠습니까?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므로 큰 무리가 주께 더하여지더라고 하였습니다(행 11:24).
이에 비해 성령을 속이고 육체를 따라간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는 그 자리에서 부부가 순차적으로 즉사하고 말았습니다(행 5:5, 10).
이러한 것을 보면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지 않아야 멸망하지 않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성령을 위하여 심어서 영원한 생명과 연관된 영적인 것을 거두면서 살아가야 하겠다는 것도 알게 됩니다.
이러하므로 8절에서는 성령(聖靈)의 인도로 율법(律法)을 성취(成就)하게 해주는 이성성율(以聖成律)에 대한 실천과제를 제시해주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심고 거두는 법칙에 따라 육체를 위하여 심다가 멸망하게 되는 것을 거두게 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위하여 심어서 영원한 영생과 관련된 것을 거두게 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 6:9-10 믿음의 가정들에게 선을 행함
6:9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6:10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
9-10절에서는 믿음의 가정들에게 선을 행하라고 하는 것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곳에서도 이성성율(以聖成律)에 대한 실천과제를 제시해주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한 실천과제로 심고 거두는 법칙에 대한 것을 언급하고 있는데
이 가운데 9절에서는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포기하지 않으면 때가 이르매 거둘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9절의 선을의 원어원형은 καλός(칼로스)인데 “선한, 좋은, 아름다운, 고상한”이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선한 것은 무엇을 가리키겠습니까? 선한 것이라고 하면 너무 추상적이므로 선한 것을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무엇이겠습니까?
미가서 6장 8절을 보면 선한 것에 대한 정의를 볼 수 있습니다. 정의를 행하고 인자를 사랑하고 겸손하게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선한 것이란 정의를 행하는 것이고 인자를 사랑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육체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겸손하게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르는 것이 선한 것으로 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성령으로 살고 성령에 따라 행하는 것이 선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르게 되면 악한 것을 행하지 않고 선한 것을 행하게 되어 있습니다.
악한 육체의 일들은(5:19-21) 하지 않게 되고 선한 성령의 열매는(5:22-23) 맺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육체는 선한 것을 잘할 수 없고 성령께 속한 신령한 사람이 되어야 비로소 선을 잘 행할 수 있게 됩니다.
성령과 함께 동행하는 것이 선한 것이라고 하였는데 육체에 속한 사람은 동행하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선을 행하다가 보면 낙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낙심하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9절의 낙심하지의 원어원형은 ἐγκακέω(엥카케오)인데 “용기를 잃다, 낙심하다”라는 뜻입니다.
용기를 잃게 되거나 낙심하게 되면 의욕을 상실하게 되고 중단하거나 포기하게 됩니다.
심지어 좋은 일인 선을 행하다가도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낙심하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그렇게 해야 계속 선한 것을 행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기이하게도 육체의 일들은 지루하다거나 피곤하다거나 낙심하는 일이 별로 없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신이 나서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권한다는 것입니다. 육체를 위하여 살아가는 사람은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을 위하여 살아가는 사람은 그렇지 않습니다. 선한 것을 행하려고 애씁니다. 그런데 쉽게 지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육체의 본능 때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본능대로 살면 육체의 일들을 자연스럽게 즐거운 마음으로 악을 행하게 됩니다.
하지만 선을 행하는 것은 육체의 본능을 거슬러서 행하여야 하기 때문에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그러한 것을 고백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로마서 7장 15-20절을 보면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한다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것을 행하는 것은 자기가 아니라 자기 속에 거하는 죄라고 하였습니다. 자기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않는 것을 안다고 하면서 원함은 자기에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다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육체의 본능대로 자연스럽게 살면 갈등이 없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고 선하게 살면 육체와 성령께서 서로 대적하게 되므로(5:17) 갈등이 일어나게 되고 때론 지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하므로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계속해서 육체의 욕망은 거슬리고 성령의 인도를 받으면서 선한 것을 심어야 합니다.
이러한 것은 믿음으로 인내하면서 이겨내야 합니다. 아브라함이 오래 참아 약속을 받게 된 것처럼(히 6:15) 오래 참는 가운데 심으면 반드시 거두게 해주신다는 것을 굳게 믿고 극복해야 하는 것입니다.
9절의 포기하지의 원어원형은 ἐκλύω(에클뤼오)인데 “풀어지다, 지치다, 연약해지다”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르매의 원어원형은 ἴδιος(이디오스)인데 “자기 자신의, 자기 자신에 속한, 개별적으로”라는 뜻입니다.
이처럼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포기하지 않게 되면 자기 자신의 때가 오면 반드시 거두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심고 거두는 법칙은 변함없는 불변의 법칙이므로 때가 되면 언젠가는 반드시 심은 대로 거두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으므로 10절에서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10절의 착한의 원어원형은 ἀγαθός(아가도스)인데 “선한”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기회의 원어원형은 καιρός(카이로스)인데 “시간, 시점, 순간, 때)”라는 뜻입니다.
있는의 원어원형은 ἔχω(에코)인데 “가지다, 소유하다”라는 뜻입니다.
시간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선한 일을 실행할 수 있는 때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10절의 더욱의 원어원형은 μάλιστα(말리스타)인데 “매우, 특별히”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가정들의 원어원형은 οἰκεῖος(오이케이오스)인데 “집(가족)에 속하는, 가족의”이라는 뜻입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선한 일을 하되 특별히 믿음의 가족들에게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디모데전서 5장 8절을 보면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라고 하였습니다.
이러하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가족인 경우에는 더 특별하게 대해야 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가족은 영적으로 보면 하나님의 가족입니다. 앞으로 영원히 함께 살아가야 할 가족입니다.
이러한 가족이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 못 본척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랑으로 종노릇 하여 도와주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섬겨서 심은 것은 허공으로 사라지지 않습니다. 포기하지 않으면 때가 되면 반드시 거두게 됩니다.
그러므로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고 계속해서 선한 일을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외부적으로 이웃을 구제하는 일도 중요하나 그보다 먼저 교회 안의 어려운 가족을 돌아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원리를 확장해보면 이웃에 있는 어려운 미자립교회와 교역자를 도와주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행정적인 편의상 이웃의 교회와 교역자로 나누어져 있으나 영적으로 보면 모두가 한 가족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심게 되면 반드시 때가 되면 거두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심고 거두는 법칙은 불변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람과 교회는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사랑으로 종노릇 하여 짐을 덜어주는 영적으로 신령한 사람과 교회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할 때 최고의 법(약 2:8)이요 사랑의 법인 그리스도의 법이 성취되고 이성성율(以聖成律)이 실제로 실행된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6:11-18 새로 지으심을 받음
11-18절에서는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에 대한 것을 언급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손으로 쓴 큰 글자를 보라고 하는 것과 할례나 무할례는 아무 것도 아니고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과 마지막 인사를 하면서 사도 바울이 자신의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것도 사랑으로 종노릇 하는 것 가운데 하나로 볼 수 있고 이성성율(以聖成律)을 실행하는 것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실행하기 위하여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율법을 성취할 수 있는 실천과제를 제시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새로워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 6:11 큰 글자로 씀
6:11 내 손으로 너희에게 이렇게 큰 글자로 쓴 것을 보라
11절에서는 큰 글자로 쓴 것을 보라고 하는 것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곳에서도 이성성율(以聖成律)에 대한 실천과제를 제시해주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보라는 것입니다. 무엇을 보라고 하였는가 하면 자신의 손으로 이렇게 큰 글자로 쓴 것을 보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큰의 원어원형은 πηλίκος(펠리코스)인데 “얼마나 큰, 얼마나 위대한”라는 뜻입니다.
얼마나 큰 글자였기에 이러한 표현을 하게 되었겠습니까? 그만큼 각별하게 전하고 싶어했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손수 쓰기만 한 것이 아니라 엄청나게 큰 글자로 썼다는 것은 갈라디아서가 매우 특별하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관심을 가지고 보라는 것입니다.
4장 15절에 할 수만 있었다면 눈이라도 빼내 주었을 것이라고 하는 것을 보면 눈이 좋지 않아서 크게 썼다고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럴 수도 있으나 자기가 전해준 복음이(1:8, 11, 4:13) 엄청나게 중요한 내용이므로 수신자들이 그만큼 집중해서 읽으라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직접 쓴 복음의 내용은 사람의 뜻으로 된 것이 아니므로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이유는 다른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고 배운 것도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1:11-12).
이러한 갈라디아서는 그리스도께서 주신 자유를(5:1) 매우 중요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그러한 자유를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자유로 풀어나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세 가지의 유형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信)으로 말미암아 의(義)롭다고 칭(稱)함을 얻게 해주는 이신칭의(以信稱義)가 주는 자유가 있고,
그리스도(基督)께서 율법(律法)으로부터 속량(贖良)해주는 이기속율(以基贖律)이 주는 자유가 있고,
그리스도께서 보내주신 성령(聖靈)의 인도로 율법(律法)을 성취(成就)하게 해주는 이성성율(以聖成律)이 주는 자유가 있습니다.
이러한 자유는 엄청나게 중요하므로 1장을 시작하면서 강력하게 경고하면서 시작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자신이 전해주는 이러한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자유가 아닌 다른 복음을 전하면 누구든지 저주를 받으라고(1:8, 9) 할 정도입니다.
그리고 갈라디아 사람들을 어리석다고(3:1) 할 정도로 꼭 알아야 될 중요한 자유라는 것입니다.
이러하므로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한다고(4:19) 할 정도로 중요하게 다루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아무리 애를 쓰고 엄청나게 큰 글자로 손수 쓴다고 하더라도 안타까우나 육체로는 보아도 알 수 없게 됩니다.
그러한 이유는 성경은 사람이 연구하고 고안해서 만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사람의 뜻으로 쓰여진 것이 아니라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서 썼기(벧후 1:21) 때문입니다.
이러하므로 아무리 지식과 학벌이 많더라도 보아도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는 것은 성령께서 보게 해주셔야 볼 수 있고 알게 해주셔야 알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면에서 이성성율(以聖成律)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고 이성성율(以聖成律)이 실행되어져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모든 것을 가르쳐주시고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해주시고(요 14:26)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해주시기(요 16:13) 때문입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보여주시고(고전 2:10) 가르쳐주셔야(고전 2:13) 알게 되기(고전 2:12) 때문입니다.
이러하므로 손수 엄청나게 큰 글자로 써서 보여주기도 해야 하나 성령의 인도하심을 필수적으로 받을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는 것도 알 수 있습니다.
이후에 나오는 15절을 보면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만이 중요하다고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한 것을 이곳에 적용해보면 갈라디아서를 제대로 읽으려면 성령으로 새롭게 하심을 받아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1장 16-19절을 보면 사도 바울이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셔서 하나님을 알게 해주시고 마음의 눈을 밝혀주셔서 부르심의 소망과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과 능력의 지극히 크심을 알게 해주시기를 기도드리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와 같은 기도를 에베소의 교회뿐만 아니라 갈라디아의 교회를 향해서도 기도드리지 않았겠습니까?
바울이 회심하여 새로워지기 전에는 예수 그리스도도 모르고 성경도 몰라서 앞장서서 박해하고 다녔습니다.
그러다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었고(행 9:3-6) 성령으로 안수를 받게 되자(행 9:17-18) 깨닫게 되었고 오히려 증언자가 된 것입니다.
이와 같으므로 누구보다도 이러한 것을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성령으로 새로워져야 예수 그리스도도 제대로 알게 되고 성경도 제대로 알게 되므로 새로워져야 한다고 하였을 것입니다.
이러하므로 엄청나게 큰 글자로 쓴 것을 보라고 한 것은 이성성율의 실천과제로 제시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영적인 의미로 해석해본다면 육안의 눈으로도 잘 보아야 하나 성령께서 열어주시는 영의 눈으로 크게 보아야 한다는 의미로 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엄청나게 중요한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자유를 잘 보게 되고 깨닫게 되어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자유가 실제가 되도록 해주었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 6:12-15 새로 지으심을 받아야 함
6:12 무릇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 억지로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함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박해를 면하려 함뿐이라
6:13 할례를 받은 그들이라도 스스로 율법은 지키지 아니하고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하려 하는 것은 그들이 너희의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라
6: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6:15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만이 중요하니라
12-15절에서는 새로 지으심을 받아야 한다는 것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육체에 따라 사는 사람들과 성령에 따라 사는 사람에 대한 것을 언급해주고 있습니다.
이곳에서도 이성성율(以聖成律)에 대한 실천과제를 제시해주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한 과제로 육체에 모양을 내려고 할 것이 아니라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이 가운데 12-13절에서는 새로 지으심을 받지 못한 육체에 따라 사는 자들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이 할례를 받게 하려는 이유에 대한 것을 언급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는 박해를 받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할례받게 한 숫자를 자랑하려는 것입니다.
12절을 보면 육체의 모양을 내려는 자들이 억지로 할례를 받게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는 박해를 면하려고 할 뿐이라고 하였습니다.
모양을 내려의 원어원형은 εὐπροσωπέω(유프로소페오)인데 “외관을 좋게 하다”라는 뜻입니다.
억지로의 원어원형은 ἀναγκάζω(아낭카조)인데 “억지로나 강제로 시키다, 강제(요)하다”라는 뜻입니다.
육체에 외관을 좋게 하려는 자들이 할례를 강요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들은 육체의 겉모습을 중시하고 육체에 따라 사는 자들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박해를의 원어원형은 διώκω(디오코)인데 “뒤쫓다, 박해하다”라는 뜻입니다. 현재 수동태이므로 “박해받다”라는 뜻이 됩니다.
면의 원어원형은 μή(메)인데 “아니, -하지 않도록”이라는 뜻입니다.
그들이 할례를 받게 하려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받게 되는 박해를 받지 않으려는 것뿐입니다.
할례를 받게 하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부인하는 것이 되고 그리하면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해 받게 되는 박해를 받지 않고 오히려 피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13절을 보면 할례를 받은 그들이라도 율법은 지키지 아니하고 할례를 받게 하려는 것은 너희의 육체로 자랑하려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할례를 받게 하려는 것은 자신에 대해서는 박해를 받지 않으려는 것이고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자랑하려는 것입니다.
할례를 받았으나 자신은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서 할례를 받게 하려고 하는 것은 너희의 육체로 자랑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할례를 받게 한 숫자를 자랑하려고 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육체의 욕망에 따라 육체에 모양을 내려고 하는 자들은 육적인 것에 치중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후에 나오는 14-15절에서는 육체에 따라 사는 자들의 모습이 아니라 성령에 따라 새로 지으심을 받아 살아가는 사도 바울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14a절을 보면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자랑하는 내용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육체에 따라 사는 사람들은 사람의 숫자를 자랑하게 되고 성령에 따라 사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자랑하게 됩니다.
이처럼 육에 속한 사람과 영에 속한 사람은 추구하는 것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2장 14절을 보면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한다고 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그것들이 어리석게 보이고 또한 그것들을 알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성령으로 새로워진 신령한 자는 성령의 일들을 알게 되고 영적으로 분별할 수 있게 됩니다.
이러하므로 겉으로 보기에는 똑같아 보이나 영적으로 보면 살아가는 모습이 전혀 다른 것입니다.
육체에 따라 사는 육적인 사람들은 자신들의 명예와 재산과 학식과 권력과 친분을 자랑합니다.
하지만 성령에 따라 사는 영적인 사도 바울은 자랑할 것이 많이 있으나 배설물로 여기고(빌 3:5-9)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고 한 것입니다.
이러하므로 14b절에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에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고 내가 또한 세상에 대하여 그렇게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것을 보면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므로(2:16)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고 할례자와 무할례자로 구분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와 같으므로 15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것도 아니기에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만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지으심을 받는 것의 원어는 κτίσις(크티시스)인데 “창조, 피조물”이라는 뜻입니다.
할례를 받든 할례를 받지 않든 그런 것에는 신경을 쓰지 말고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새로 지으심을 받은 새로운 피조물이 되고 새로운 피조물답게 성령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거듭나야 새로운 피조물이 되고 성령으로 행할 때 새로운 피조물로서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육체에 따라 살아가지 않게 되고 성령의 인도를 받게 되는 영적으로 신령한 사람이 될 수 있고 그러한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새로 지으심을 받게 되면 이성성율(以聖成律)을 실행할 수 있게 됩니다.
이러하므로 성령으로 거듭나고 성령의 인도를 받게 되는 새로 지으심을 받은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 6:16-18 예수의 흔적을 지님
6:16 무릇 이 규례를 행하는 자에게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평강과 긍휼이 있을지어다
6:17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
6:18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지어다 아멘
16-18절에서는 마지막 인사를 하면서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다고 하는 것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곳에서도 이성성율(以聖成律)에 대한 실천과제를 제시해주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한 과제로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으므로 괴롭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마지막 문안 인사를 16절과 18절에 인사하면서 17절에 이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16절을 보면 문안 인사하는 대상이 독특한데 무릇 이 규례를 행하는 자에게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라고 하였습니다. 그들에게 평강과 긍휼이 있을지어다라고 하였습니다.
갈라디아서의 전체적인 흐름을 보면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자유에 대한 것입니다. 그러한 자유를 다른 복음과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자유를 통해 풀어나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다른 복음은 없다는 것이고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자유로 말미암아 율법에서 벗어나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하므로 종과 자유, 할례와 믿음, 육체와 성령 등의 개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율법과 그리스도, 율법과 성령도 중요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이러한 것을 통해 이신칭의와 이기속율과 이성성율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信)으로 말미암아 의(義)롭다고 칭(稱)함을 얻게 해주는 이신칭의(以信稱義)의 자유와
그리스도(基督)께서 율법(律法)으로부터 속량(贖良)해주는 이기속율(以基贖律)의 자유와
그리스도께서 보내주신 성령(聖靈)의 인도로 율법(律法)을 성취(成就)하게 해주는 이성성율(以聖成律)의 자유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자유와는 배치(背馳)되는 율법의 행위로 의로워지려는 이행성의(以行成義)의 다른 복음이 있습니다.
할례의 규례와 같은 다른 복음을 전하는 거짓 형제들에 대해서는 저주를 받으라고 할 정도로 매우 강력한 어조로 경고하였습니다(1:8, 9).
그러나 다른 복음이 아닌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자유인 이신칭의와 이기속율과 이행성의의 규례를 행하는 자에게는 저주가 아니라 축복해주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16절에 나오는 행하는의 원어원형은 στοιχέω(스토이케오)인데 “계열이나 계층에 속하다, 열을 지어 나가다, 줄에 들어서다”라는 뜻입니다. 5장 25절의 행할지니와 동일한 어원입니다.
이러하므로 이 규례를 행한다는 것은 이러한 규례에 따르는 것을 의미합니다.
16절에 언급하고 있는 이 규례를 전후 문맥에서 보면 15절에 나오는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성령으로 새롭게 거듭나도록 해주고 새로워진 새로운 피조물인 영적으로 신령해진 자들이 성령으로 행하면서 살아가도록 해주는 규례를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새로 지으심을 받게 되는 것에 대한 것을 잘 함축(含蓄)하고 있는 것이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자유입니다.
이러하므로 이 규례가 가리키고 있는 규례는 바로 이러한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자유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유를 실행하는 사람은 당연히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자유가 주는 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서를 마치면서 이러한 사람들에게 평강과 긍휼을 축복해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도 그러한 평강과 긍휼을 축복해주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육체에 속한 지금 있는 육적인 이스라엘이(4:25)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위에 있는 영적인 이스라엘에게(4:26) 축복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게 되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둔다고(6:8) 언급한 그대로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평강(εἰρήνη, 에이레네)은 “평화, 복지, 번영”이라는 뜻입니다. 5장 22절의 화평과 동일한 어원입니다.
히브리어 שָׁלוֹם(샬롬: 평화, 복지, 번영)의 역어로 단순히 좁은 의미의 평화만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안식, 안전, 건강, 안녕, 평온, 복지, 번영 등을 포함하는 의식주와 활동에 필요한 다양한 조건들이 잘 갖추어진 평강의 상태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긍휼(ἔλεος, 엘레오스)은 “불쌍히 여김, 동정, 자비”라는 뜻입니다.
이러한 평강과 긍휼을 이 규례에 따르는 자들에게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축복해준 것입니다.
이후에 나오는 17절을 보면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자기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흔적의 원어원형은 στίγμα(스티그마)인데 “찌른 자국, 표지”라는 뜻입니다.
괴롭게의 원어원형은 κόπος(코포스)인데 “치기, 매질, 고된 일, 수고, 고통”이라는 뜻입니다.
하지의 원어원형은 παρέχω(파레코)인데 “보여주다, 제공하다, 일으키다, 야기하다”라는 뜻입니다.
이제부터는 아무도 나에게 괴로움들을 가져다주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 몸에 예수의 흔적들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매를 맞은 자국이나 돌에 맞아 찍힌 자국과 같은 흔적들을 지니고 있으므로 더 이상 때리고 매질하는 것과 같은 괴로움을 가져다주지 말라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의 일꾼으로서 받게 된 그러한 흔적들에 대해 고백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11장 23-27절을 보면 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는 더욱 그러하다고 하면서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다고도 하였습니다.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기도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다고도 하였습니다.
이처럼 사도 바울은 온갖 괴로움을 당하였던 것입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의 일꾼이 되어 받게 된 이러한 흔적들은 예수의 흔적들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예수의 흔적들이 사도 바울의 몸에 남게 된 이유는 무엇입니까? 무엇 때문에 괴로움을 받게 되었습니까?
유대인들이 사도 바울이 할례와 같은 율법의 규례를 지키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전했기 때문입니다.
앞서 살펴본 6장 12절을 보면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받게 되는 박해를 받지 않으려고 할례를 받게 하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이러하므로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전하지 않고 할례를 전하였다면 박해를 받게 된 흔적들이 남지 않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마지막까지 할례가 아무것도 아니라고(6:15) 하였습니다.
오히려 6장 14절을 보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어떠한 일을 당하더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계속 전하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보면 사도 바울이 예수의 흔적들을 자청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새로 지으심을 받기 이전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 그러한 흔적들을 남기고 다녔습니다(행 8:1-3, 9:1-5, 22:4-8, 26:10-15).
그런 사도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고(행 9:5) 아나니아의 안수를 받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된(행 9:17) 이후에는 오히려 자신의 몸에 그러한 흔적들이 남기게 된 것입니다.
할례와 같은 다른 복음을 전하였다면 그러한 일이 일어나지 않겠으나 다른 복음이 아닌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자유를 전하므로 남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할례와 율법이 아니라 믿음과 약속을 변증하다가 보니 지금은 매질과 같은 괴로움을 당하지는 않고 있으나 그와 같은 괴로움을 받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이유는 교란하는 어떤 사람들과(1:7)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들의(2:4) 그릇된 가르침에 미혹되어(3:1) 참된 말을 하므로 마치 원수지간이 된 것처럼(4:16) 사이가 나빠지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자유에서 다른 복음으로 되돌아가서 율법의 종노릇을 하려고 하기 때문에(4:9) 지금까지 수고한 것이 헛수고로 돌아가게 되었으므로(4:11) 매질을 당하는 것보다 더 큰 아픔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하므로 그와 같은 예수의 흔적을 다시 자청하고 있는데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해산하는 수고를 한다고(4:19)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이 할례를 전하였다면 어찌하여 지금까지 박해를 받을 수 있느냐고(5:11) 하였습니다.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고(4:10) 할례를 받아 율법으로 의로워지려고 하므로(5:2-4) 박해를 각오하고 피력한 것입니다.
만일 할례를 받으면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아무 유익이 없다고 하였고(5:2), 할례를 받게 되면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지게 된다고 하였고(5:3),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으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라고 하였고(5:6),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만이 중요하다고 하였습니다(6:15).
이러한 예수의 흔적에 대한 언급은 갈라디아서의 중요한 주제인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자유에 대한 것을 결론적으로 다시 한번 상기시켜주고 마무리해주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예수의 흔적이 남게 된 이유는 유대인들의 율법에 대한 잘못된 인식 때문에 일어난 일입니다.
이러한 것을 통해 율법에 대한 것을 살펴보게 됨으로써 이미 살펴본 그리스도께서 율법에서 속량해주셔서 율법의 멍에를 벗겨주셨고 율법에서 자유롭게 해주셨다는 것을 상기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자유를 주시기 위해 그리스도께서 자유를 주셨는데 이신칭의와 이기속율과 이성성율이라는 것입니다.
율법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고 칭함을 얻게 해주는 이신칭의(以信稱義)의 자유와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저주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해주는 이기속율(以基贖律)의 자유와
그리스도께서 보내주신 성령으로 율법을 성취하게 해주는 이성성율(以聖成律)의 자유입니다.
이러한 것을 통해 그리스도께서 속량해주셔서 자유를 주셨으므로 율법의 종에서 벗어나 사랑으로 종노릇 하게 되었고 성령으로 율법을 성취하게 되었다는 것을 다시 한번 상기하게 되면서 마무리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러한 갈라디아서를 마치면서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고 한 의미는 더 이상 괴롭히지 말고 이전처럼 회복되기를 바랐다고 볼 수 있습니다.
시험하는 것이 자신의 육체에 있으나 업신여기지도 아니하고 버리지도 아니하고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할 정도로 좋았던 사이가(4:14) 회복하게 됨으로써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자유가 계속해서 잘 전해지기를 원하였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좋은 사이가 되어야 잘 전달되기에 말씀을 가르치는 자에게 모두 동일하게 적용이 되는 것이나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고(6:6) 하였을지도 모릅니다.
또 다른 의미는 율법에서 자유를 주는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자유를 제쳐놓고 되돌아가서 다른 복음인 율법 아래에서 종노릇 하려고 함으로써 나에게 괴로움을 가져다주려는 행위를 더 이상 하지 말라는 의미로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후에 나오는 갈라디아서의 마지막 절인 18절을 보면 형제들에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지어다 아멘이라고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18절을 시작하면서 형제들아라고 부른 이후에 마지막 인사를 하였습니다.
이러한 형제는 혈육의 형제가 아닙니다. 한 피를 받아 한 몸을 이루어 한 아버지를 둔 한 가족이 된 영적인 형제를 의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하나가 되고 한 성령으로 하나가 되고 한 하나님 아버지로 한 가족이 된 영적인 형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형제는 영원히 함께 하는 형제이므로 호칭해주었을 때 보다 친근하고 밀접한 사이라는 것을 나타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자유에 대한 것을 더 잘 전해질 수 있도록 하려고 형제 사이라는 것을 강조하였을 것입니다.
갈라디아서는 다른 복음과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자유에 관한 것이므로 마치면서 형제들에게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자유를 강조하기 위해 사용하였을지도 모릅니다.
다른 복음을 전하는 거짓 형제들과는(2:4) 구분하려고 호칭을 사용하였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18절에 나오는 심령에의 원어원형은 πνεῦμα(프뉴마)인데 “바람, 호흡, 성령, 영”이라는 뜻입니다. 18절은 사람의 영을 의미합니다.
에 있을지어다(18)의 원어원형은 μετά(메타)인데 “-와 함께”(with)라는 뜻입니다.
이러한 것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너희의 영과 함께 하기를”이라는 의미로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범위를 좁혀서 영과 함께 하기를 기원하였다는 것은 특별한 의미가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갈라디아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게 되는 이신칭의(以信稱義)에 그치지 않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율법에서 속량해주신 이기속율(以基贖律)이 실제가 되도록 해주고 있습니다.
이러하므로 그리스도께서 보내주신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율법을 성취해주는 이성성율(以聖成律)을 실제로 실행하는 데까지 나아가도록 해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율법으로부터의 자유를 율법과 성령이라는 개념으로 논증하고 성령으로 행하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러하므로 마지막 인사를 하면서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곳인 형제들의 속에 있는 영에 대해 언급하였을지도 모릅니다.
영과 함께 하기를 기원해주므로 성령을 떠올리게 되고 그리하여 성령에 따라 살아가게 되는 것을 상기시켜줄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의미로 접근해 볼 수도 있으나 근본적으로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영과 함께 하기를 기원해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영과 함께 하기를 기원해주었는데 그렇게 기원해준 내용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라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에서 말하는 그리스도의 은혜는 갈라디아서의 주제인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자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그리스도의 은혜와 연관된 것을 갈라디아서 전체에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부르신 분을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이상하게 여긴다고 하였습니다(1:6).
다른 복음은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1:7).
사도 바울이 전한 복음은 사람의 뜻으로 된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하였습니다(1:11-12).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다고 하였습니다(2:21).
그러나 그렇지 아니하므로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한다고 하였습니다(2:21).
그리스도께서 율법에서 속량해주셨고(3:13) 아들께서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해주셨다고 하였습니다(4:5).
그리스도께서 자유를 주셨다고 하였습니다(5:1).
만일 할례를 받으면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아무 유익이 없다고 하였습니다(5:2).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라고 하였습니다(5:4).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으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라고 하였습니다(5:6).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고 하였습니다(6:14).
이처럼 갈라디아서에서 보게 되는 은혜는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대속해주신 은혜로 의롭다 하심을 얻게 되고 자유하게 된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상관이 없어지게 되면 영적인 형제가 될 수 없고 거짓 형제가 되어버릴 것입니다. 이렇게 된다면 멸망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하므로 갈라디아서를 마치면서 마지막 인사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지어다라고 기원해주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은혜인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자유가 새로 지으심을 받은 영과 함께 하여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자유가 실제가 되기를 기원해주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확증하기라도 하듯이 마지막 끝에 아멘(ἀμήν: 진실로, 그러하도다, 그러할지어다, 그것이 이루어질지어다)이라고 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하므로 우리 모두에게도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이러한 이신칭의의 자유와 이기속율의 자유와 함께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율법을 성취하게 해주는 이성성율의 자유가 실제로 이루어지게 되기를 바랍니다.
한눈에 보는 갈라디아서 (재개정판)
재개정일 2024년 1월 12일
개 정 일 2020년 9월 7일
발 행 일 2020년 5월 12일
지 은 이 이서영
출 판 사 퍼플
출판등록 제300-2012-167호 (2012년 9월 7일)
주 소 서울시 종로구 종로1가 1번지
대표전화 1544-1900
홈페이지 www.kyobobook.co.kr.
ISBN 978-89-24-12227-5
ⓒ 이서영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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