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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적개관/갈라디아서

한눈에 보는 갈라디아서 (재개정판) 2장 이신칭의(以信稱義)의 자유

by 이서영 목사 2020. 5. 29.

한눈에 보는 갈라디아서 (재개정판) 2장 이신칭의(以信稱義)의 자유

 

 

2장 개요

 

 

✙✙✙ 2장 구절

 

갈라디아서 2장에서 대표적인 구절을 선정한다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게 된다는 것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16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16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 2장 주제

 

갈라디아서 1-2장은 이신칭의(以信稱義)가 주는 자유에 대한 관점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이를 통해 율법으로부터 자유를 주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게 해주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가운데 2장은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자유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고 칭()함을 얻게 해주는 이신칭의(以信稱義) 대해 논증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하므로 할례자든 무할례자든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게 된다는 것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2장은 이러한 흐름이 있으므로 이와 관련된 주제를 도출해 본다면 이신칭의의 자유가 됩니다.

 

 

✙✙✙ 2장 구조

 

갈라디아서 2장은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자유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고 칭()함을 얻게 해주는 이신칭의(以信稱義) 자유에 관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하므로 2장에서는 다른 복음인 율법의 행위와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자유인 이신칭의에 대해 논증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2장 전반부는 1장에 이어 갈라디아서의 서론에 해당하는 부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할례자의 사도와 무할례자의 사도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2장 전반부는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자유를 본격적으로 전하기 이전에 복음을 전해주는 사도에 대해 변증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사도에 대한 신뢰도를 높여서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자유를 보다 확증적으로 보다 효과적으로 전하려고 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2장 후반부에서는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 함을 얻으려는 이른바 다른 복음으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사람은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러한 율법의 행위라는 종의 멍에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자유로 벗겨주셔서 자유를 주신 것입니다.

이처럼 2장에서는 이신칭의(以信稱義)로 자유를 얻게 해주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2장은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1-10절의 할례자의 사도와 무할례자의 사도, 11-21절의 이신칭의의 정의와 효력입니다.

1-10절은 할례자든 무할례자든 모든 사람에게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자유를 전해주려고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11-21절은 율법의 행위로는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게 된다는 이신칭의에 관한 것을 논증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2장 개관

 

단락 단락별 개요
1-10 할례자의 사도와 무할례자의 사도
11-21 이신칭의의 정의와 효력

 

 

2:1-10 할례자의 사도와 무할례자의 사도

 

1-10절은 갈라디아서의 서론 부분에 해당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자유를 본격적으로 전하는 2장 후반부에 들어가기 전에 1장에 이어 사도의 내력에 대한 것을 언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로서의 역할을 피력하여 사도로서의 신뢰성을 높이고 그로 말미암아 전하게 되는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자유에 대한 신뢰도를 높여서 보다 확증적으로 전하려고 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서론 부분이 2장 전반부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자유가 그만큼 매우 크고도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1-10절을 보면 할례자의 사도와 무할례자의 사도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할례자든 무할례자든 모든 사람에게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자유를 전해주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것을 보면 율법의 행위를 중시하는 할례자든 그렇지 않은 무할례자든 그러한 율법의 행위보다는 앞으로 전해주게 될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자유가 중요하다는 것을 미리 보여주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2:1-2 복음을 유력한 자들에게 사사로이 전함

 

2:1 십사 년 후에 내가 바나바와 함께 디도를 데리고 다시 예루살렘에 올라갔나니

2:2 계시를 따라 올라가 내가 이방 가운데서 전파하는 복음을 그들에게 제시하되 유력한 자들에게 사사로이 한 것은 내가 달음질하는 것이나 달음질한 것이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1-2절에서는 복음을 유력한 자들에게 사사로이 전하였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십사 년이나 지난 후에 바나바와 함께 디도를 데리고 다시 예루살렘으로 올라갔습니다.

계시로 말미암아 올라가서 이방인들 가운데 선포하는 복음을 그들에게 제시하되 유력한 자들에게 개인적으로 한 것은 달음질하는 것이나 달음질한 것이 헛되지 않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2절에 나오는 제시하되의 원어원형은 νατίθεμαι(아나티데미)인데 위에 두다, 전하다, 제시하다라는 뜻입니다. 상세하게 설명하는 의미로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2절에 나오는 유력한 자들의 원어원형은 δοκέω(도케오)인데 생각하다, -인 듯 같다, 가장 좋은 것 같다라는 뜻입니다. 호평받는 사람, 평판이 좋은 사람, 명성이 있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사도 바울이 그러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개인적으로 보다 자세하게 설명하면서 전해준 것을 의미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영향력 있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제시한 것은 자신의 사역이 헛수고하지 않기 위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2:3-5 억지로 할례를 받게 하지 않음

 

2:3 그러나 나와 함께 있는 헬라인 디도까지도 억지로 할례를 받게 하지 아니하였으니

2:4 이는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들 때문이라 그들이 가만히 들어온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가 가진 자유를 엿보고 우리를 종으로 삼고자 함이로되

2:5 그들에게 우리가 한시도 복종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복음의 진리가 항상 너희 가운데 있게 하려 함이라

 

3-5절에서는 헬라인 디도를 억지로 할례를 받게 하지 아니하였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것은 할례를 받는 율법의 행위로 의로워지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입니다.

4절에 몰래 들어온 거짓 형제들 때문이라고 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들이 몰래 들어온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자유로 율법의 행위에서 벗어나서 가지게 된 자유를 엿보고는 다시 율법의 행위 아래에 있는 종으로 삼으려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들에게 한시도 복종도 하지 아니하고 굴복도 하지 아니하였습니다. 왜냐하면 복음의 진리가 항상 함께 있게 하려고 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5절에 나오는 복종의 원어원형은 ποταγή(휘포타게)인데 복종, 종속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5절의 하지의 원어원형은 εκω(에이코)인데 굴복하다, 복종하다라는 뜻입니다.

이러하므로 복종하지 아니하였으니는 복종에게 굴복하지 않았다는 의미가 됩니다.

다른 복음인 율법의 행위라는 종에게 복종시키려고 하였으나 거기에 굴복하지 않았다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17절에 언급하고 있는 어떤 사람들과 24절에 언급하고 있는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들이 교란하여 다른 복음으로 끌어들이려고 하였으나 거기에 말려들지 않았다는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한 것은 그들에게 미혹되지 않으므로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자유가 변질되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25절을 보면 복음의 진리가 항상 있게 하려고 하였다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5절에 나오는 항상있게의 원어원형은 διαμένω(디아메노)인데 남아 있다, 계속 머무르다라는 뜻입니다.

다른 복음이 끼어들 틈을 주지 않고 다른 복음의 종이 되지 않도록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자유가 계속 머물러 있게 하려고 하였기에 복종하지 않았다는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으므로 할례를 해야 하는 율법의 행위에 복종하지 않고 헬라인 디도를 억지로 할례를 받게 하지 아니하였을 것입니다.

 

2:6-9 할례자의 사도와 무할례자의 사도로 삼으심

 

2:6 유력하다는 이들 중에 (본래 어떤 이들이든지 내게 상관이 없으며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아니하시나니) 저 유력한 이들은 내게 의무를 더하여 준 것이 없고

2:7 도리어 그들은 내가 무할례자에게 복음 전함을 맡은 것이 베드로가 할례자에게 맡음과 같은 것을 보았고

2:8 베드로에게 역사하사 그를 할례자의 사도로 삼으신 이가 또한 내게 역사하사 나를 이방인의 사도로 삼으셨느니라

2:9 또 기둥 같이 여기는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도 내게 주신 은혜를 알므로 나와 바나바에게 친교의 악수를 하였으니 우리는 이방인에게로, 그들은 할례자에게로 가게 하려 함이라

 

6-9절에서는 하나님께서 할례자의 사도와 무할례자의 사도로 삼으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할례자와 무할례자 모두에게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자유가 전해져야 하기에 할례자의 사도와 무할례자의 사도로 삼아주셨을 것입니다.

할례자든 무할례자든 그 누구든 할례와 같은 율법의 행위로 자유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자유로 자유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사도를 어떤 유력한 자들이 보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택하셔서 보내셨다는 것을 밝히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하므로 6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아니하시므로 유력한 자들이라고 해서 어떤 자이든지 사도 바울과 상관이 없고 그러한 유력한 자들이 의무를 더하여 준 것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6절에 나오는 의무를 더하여 준의 원어원형은 προσανατίθημι(프로사나티데미)인데 추가로 올려놓다, 더하다, 상의하다, 기여하다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에 의해서 사도가 된 것이지 그들이 사도직에 대해 상의했다거나 기여해서 사도직을 준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것을 7-8절에서 볼 수 있습니다. 7절을 보면 도리어 그들이 베드로가 할례자에게 복음 전하는 일을 맡은 것과 같이 바울이 무할례자에게 복음 전하는 일을 맡은 것을 알았다고 하였습니다.

8절을 보면 그러한 이유를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베드로에게 역사하셔서 할례자의 사도로 삼으신 분께서 바울에게도 역사하셔서 이방인들의 사도로 삼으셨기 때문입니다.

9절에서는 역할 분담과 관련하여 기둥과 같이 여기는 다른 사도들에 대해 언급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은 바울이 받게 된 은혜를 알고서 바울과 바나바는 이방인들에게로 가고 그들은 할례자에게로 가기 위해 바울과 바나바와 교제의 악수를 하였습니다.

이러한 것을 보면 앞으로 전개될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자유를 미리 보여주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율법의 행위를 중시하는 할례자든 그렇지 않은 무할례자든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자유로 자유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2:10 가난한 자들을 기억함

 

2:10 다만 우리에게 가난한 자들을 기억하도록 부탁하였으니 이것은 나도 본래부터 힘써 행하여 왔노라

 

10절은 가난한 자들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이 바울 일행에게 가난한 자들을 기억하도록 하였습니다. 이러한 것은 바울 자신도 힘써 행하였던 것입니다.

10절에 나오는 힘써의 원어원형은 σπουδάζω(스푸다조)인데 열심히 노력하다, 애써서 -하다라는 뜻입니다.

가난한 자를 돕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할 때 필수적으로 행하여야 하는 사역이므로 기억하도록 하였고 바울은 이미 그렇게 열심히 하였던 것입니다.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면 나타나는 현상 가운데 하나가 가난한 자를 돕게 된다는 것입니다.

성령 충만해진 이후의 모습을 생각해 보면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거룩해진다거나 권능을 행하거나 증인이 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런데 또 다른 현상이 나타나는데 가난한 자를 돕는 일입니다.

사도행전 2장과 4장에 그러한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그 가운데 4 34-35절을 보면 그 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그들이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줌이라고 하였습니다.

성령이 충만하게 되면 어렵고 힘든 사람을 돌보는 이러한 일들이 자연스럽게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무시하거나 군림하지 않고 겸손한 자세로 자발적으로 돕게 되는 것입니다.

 

2:11-21 이신칭의의 정의와 효력

 

이후로는 서론에 대한 설명을 마치고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자유에 대해 본격적으로 전해주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11-21절에서는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고 칭()함을 얻게 해주는 이신칭의(以信稱義)에 관한 것을 논증해주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율법의 행위로는 의로워지지 못하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해주셨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논증하기 위해 바울이 게바를 책망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서 이신칭의에 대한 정의를 언급하고 그러한 이신칭의에 대한 효력을 언급해주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이신칭의가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자유 가운데 하나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율법의 행위로 의로워지지 못하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로워지기 때문입니다.

 

2:11-14 바울이 게바를 책망함

 

2:11 게바가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에 책망 받을 일이 있기로 내가 그를 대면하여 책망하였노라

2:12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이들이 이르기 전에 게바가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 그들이 오매 그가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떠나 물러가매

2:13 남은 유대인들도 그와 같이 외식하므로 바나바도 그들의 외식에 유혹되었느니라

2:14 그러므로 나는 그들이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르게 행하지 아니함을 보고 모든 자 앞에서 게바에게 이르되 네가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을 따르고 유대인답게 살지 아니하면서 어찌하여 억지로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살게 하려느냐 하였노라

 

11-14절에서는 바울이 외식하는 것과 관련하여 게바를 책망하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한 것은 율법의 행위를 중시하는 할례자를 두려워하여 외식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방인들과 함께 먹다가 그들이 오자 이방인들을 떠나서 물러갔다는 것입니다.

이방인과 함께 먹지 말도록 한 규정이 생각났기에 얼른 먹는 것을 중단하고 나가버렸다고 볼 수 있습니다.

215절을 보면 이방인들을 죄인으로 여기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죄인과 음식을 같이 먹는 것을 정죄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15:2).

이러한 것을 보면 죄인인 이방인과 함께 식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러하므로 이방인들과 함께 계속 식사하지 않고 나왔을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자유 가운데 하나인 이신칭의의 관점에서 보면 율법의 행위로 의로워지지 않으므로 계속해서 자연스럽게 이방인들과 함께 식사해도 되는데 그렇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410-11절을 보면 복음이 아니라 규정에 얽매여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는 것은 바울의 입장에서 보면 헛수고한 것이 되어버린다고 하였습니다.

골로새서 216절을 보면 이러한 것을 확인할 수 있는데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초하루나 안식일을 이유로 누구든지 너희를 비판하지 못하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사도행전 1519-20절을 보면 그러므로 내 의견에는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들을 괴롭게 하지 말고, 다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라고 편지하는 것이 옳으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결정된 것을 편지로 써서 성령과 우리는 이 요긴한 것들 외에는 아무 짐도 너희에게 지우지 아니하는 것이 옳은 줄 알았노니,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멀리할지니라 이에 스스로 삼가면 잘되리라 평안함을 원하노라 하였더라(15:28-29)고 한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보면 음식 때문에 비판받을 일이 아닌데도 법조문을 지키는 할례자의 눈치를 보다가 책망을 받게 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11절에 나오는 책망 받을 일이의 원어원형은 καταγινώσκω(카타기노스코)인데 정죄하다, 유죄를 선고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죄 있는 것으로 인정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11절의 책망하였노라의 원어원형은 νθίστημι(안디스테미)인데 대적하다, 대항하다, 저항하다, 반대하다라는 뜻입니다.

정죄를 받을 일이 아님에도 외식하게 됨으로써 정죄를 받게 되고 면전에서 바울의 반대에 부딪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13절에 나오는 같이 외식하의 원어원형은 συνυποκρίνομαι(쉬뉘포크리노마이)인데 함께 가장하다, 함께 위선하다라는 뜻입니다.

13절의 외식에의 원어원형은 πόκρισις(휘포크리시스)인데 가장, 위선이라는 뜻입니다.

13절의 유혹되었느니라의 원어원형은 συναπάγω(쉬나파고)인데 함께 데리고 가다, 함께 끌려가다라는 뜻입니다.

게바로 말미암아 남은 유대인들도 외식하게 되었고 바나바도 이러한 일에 함께 끌려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장면은 사소한 것처럼 보이나 그렇지 않습니다.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로워진다는 이신칭의의 관점에서 보면 중요하게 다루어야 하는 장면입니다.

이러한 장면은 이신칭의를 여는 중요한 열쇠의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하므로 이신칭의에 대해 언급하기 이전에 이신칭의에 대한 것을 보다 분명하게 논증하기 위해 이러한 장면을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2:15-16 이신칭의의 정의

 

2:15 우리는 본래 유대인이요 이방 죄인이 아니로되

2:16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15-16절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자유 가운데 하나인 이신칭의(以信稱義)의 정의에 관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16절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고 칭()함을 얻게 해주는 이신칭의에 대한 정의로 볼 수 있습니다.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15절을 보면 본래 유대인들이지 이방인들 출신의 죄인들이 아니라고 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것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이방인들을 비하하거나 유대인들이 우월하다는 것을 말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일반적으로 이방인들을 죄인으로 여기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시대적 상황으로 보면 할례와 같은 율법을 행하는 유대인들은 의인으로 여기고 그와 같은 율법을 행하지 않는 이방인들은 죄인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16절 첫 부분에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라고 한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강조하려고 한 것은 율법을 행하는 유대인이든 행하지 않는 이방인이든 구분하지 않고 모든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율법을 행하든 행하지 않든 이신칭의의 입장에서 보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으면 모두가 의롭게 되지 못한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이와 같으므로 16절 끝부분에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이신칭의가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자유가 될 수 있는 것은 이러한 절망적인 상태에 있는 모든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되기 때문입니다.

16절에 두 번째 나오는 의롭게 되는 것은(δικαιοῦται, 디카이우타이) 원어원형은 δικαιόω(디카이오오: 의롭다 하다)의 현재 수동태이므로 의롭게 되다라는 뜻이 됩니다.

16절에 나오는 이러한 어원을 가지는 의롭게 되는 것은의롭다 함을 얻으의롭다 함을 얻을은 모두 수동태입니다.

의로워지는 것은 수동적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스스로 의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로워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하므로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자유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행위라는 종의 멍에에서 벗어나게 해주셔서 자유하게 해주신 것입니다.

이처럼 의롭게 되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16) 바울 일행은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다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한 것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16)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3장에서도 이러한 이신칭의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3: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3: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3:26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

3:28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3:30 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또한 무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

이러한 이신칭의는 획기적인 놀라운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습니다. 율법의 행위로 구원을 얻으려고 하는 것에서 벗어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율법의 행위로 의로워지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로워지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2:17-18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지 않게 하심

 

2:17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려 하다가 죄인으로 드러나면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게 하는 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2:18 만일 내가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면 내가 나를 범법한 자로 만드는 것이라

 

17-18절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자유인 이신칭의의 효력에 대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는 것은 결코 변함이 없이 유효하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려고 하였는데 죄인으로 나타난다면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게 하는 자냐는 것입니다.

17절의 짓게 하는 자냐의 원어원형은 διάκονος(디아코노스)인데 하인, 고용인, 집사라는 뜻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죄의 하인이나 죄의 고용인이 되어 죄가 시키는 대로 죄를 짓게 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믿으면 의롭게 된다는 것을 굳게 믿었는데 죽은 이후에 율법을 행하지 않아 의롭게 되지 못해 죄인으로 나타나게 되어 지옥에 가게 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러나 결코 그럴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일이 결코 일어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의롭게 해주시기 때문에 죄를 짓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죄에서 구원을 얻어 천국에 가게 되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이와는 반대로 율법의 행위로 의로워지려고 하던 자들은 그리스도를 믿지 않아서 그리스도께서 의롭게 해주시는 것을 거부하였으므로 지옥에 가게 되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이와 같으므로 18절에 언급하고 있는 의미를 살펴보면 율법의 행위로 의로워지려고 하는 것을 헐어버렸는데 그러한 것을 다시 세운다면 내가 나를 범법자로 만든다는 것입니다.

18절에 나오는 만드는 것이라의 원어원형은 συνστημι(쉬니스테미)인데 함께 서다, 추천하다, 입증하다라는 뜻입니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로워지게 되는 것이 아니라 율법의 행위로 의로워지게 된다면 내가 나를 범법자로 입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결코 그러한 일들이 일어나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2:19-20 율법에 대하여 죽고 믿음 안에서 살게 됨

 

2:19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에 대하여 살려 함이라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19-20절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자유인 이신칭의에 대한 또 하나의 효력을 볼 수 있습니다.

율법에 대하여는 죽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살아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아가게 됩니다(2:4, 1:15, 3:11, 10:38).

갈라디아서에서 말하는 믿음으로 사는 의인은 율법의 행위로 사는 자가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자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산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죽어야 삽니다. 이러하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셨듯이 의인도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살아나게 되는 것입니다.

19절에 의미하는 것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기 위하여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었다는 것입니다.

율법의 행위가 죽으니까 살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믿음으로 살아가게 되는데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20절에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3:13)라고 한 것처럼 속량 받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하므로 내가 율법의 행위로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게 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살게 되는 것입니다.

20절에 나오는 버리신의 원어원형은 παραδίδωμι(파라디도미)인데 전수하다, 전달하다, 전하다, 넘겨주다, 내주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자기 것을 소중하게 여기는데 그리스도께서는 나를 위하여 아낌없이 자기 자신을 내어주시고 넘겨주셨습니다. 그만큼 나를 자신보다 더 사랑해주셨다는 것입니다.

이러하므로 이신칭의는 율법의 행위로 의로워지려는 것을 방지해주고 자기 자신을 내어주시고 자신보다 더 사랑해주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살아가게 해주는 것입니다.

 

2:21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않게 됨

 

2:21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21절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자유인 이신칭의에 대한 또 다른 효력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즉 율법의 행위로 되돌아가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21절의 폐하지의 원어원형은 θετέω(아데테오)인데 놓여진 것을 제거하다, 무효로 하다, 폐기하다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무효로 하거나 폐기하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는 이유는 만일 의로움이 율법으로 말미암는다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신 것이 되어버리기 때문입니다.

21절의 헛되이의 원어원형은 δωρεάν(도레안)인데 선물로, 값없이, 이유없이, 쓸데없이, 헛되이라는 뜻입니다.

율법의 행위로 의로워지게 된다면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것이 이유 없이 죽으신 것이 되거나 쓸데없는 일이 되어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무효로 해서 무용지물로 만들고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것을 헛되게 해서 쓸데없는 일로 만들어버리지 않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하므로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3장을 보면 그러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3: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3:26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

이러하므로 이신칭의는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자유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해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율법의 행위라는 종의 멍에에서 벗어나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한눈에 보는 갈라디아서 (재개정판)

재개정일 2024년 1월 12일

개 정 일 2020년 9월 7

발 행 일 2020년 5월 12

지 은 이 이서영

출 판 사 퍼플

출판등록 300-2012-167 (2012 9 7)

주 소 서울시 종로구 종로1가 1번지

대표전화 1544-1900

홈페이지 www.kyobobook.co.kr.

ISBN 978-89-24-12227-5

ⓒ 이서영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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