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눈에 보는 갈라디아서 (재개정판) 4장 이기속율(以基贖律)의 명분
4장 개요
✙✙✙ 4장 구절
갈라디아서 4장에서 대표적인 구절을 선정한다면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해주시고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해주시는 것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5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4:5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 4장 주제
갈라디아서 3-4장은 이기속율(以基贖律)이 주는 자유에 대한 관점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것을 통해 율법으로부터 자유를 주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가운데 4장은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자유 가운데 이기속율(以基贖律)의 자유로 얻게 되는 아들의 명분에 대해 논증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셔서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해주셔서 율법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주시고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해주시는 것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4장은 이러한 흐름이 있으므로 이와 관련된 주제를 도출해 본다면 이기속율의 명분이 됩니다.
✙✙✙ 4장 구조
갈라디아서 4장은 그리스도(基督)께서 율법(律法)으로부터 속량(贖良)해주신 이기속율(以基贖律)의 명분에 관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하므로 4장에서는 하나님께서 아들을 보내셔서 그 아들로 말미암아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해주시고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해주시는 것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것을 사라와 하갈을 통해 설명하고 있으며 여종의 아들과 자유 있는 여자의 아들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하므로 4장에서는 아들에 대한 구절이 많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를 보면 모두 9구절인데 4장에 6구절이나 등장합니다.
아울러 두 아들과 관련된 하갈에 대한 구절이 신약성경에서는 갈라디아서만 2구절인데 4장에 2구절입니다. 이러한 것을 보면 4장에서 아들에 대한 개념을 중요하게 다루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종과 자유에 대한 개념도 4장에서는 중요하게 여기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종이 들어간 구절이 갈라디아서가 18구절인데 4장에 11구절이나 됩니다. 자유가 들어간 구절은 갈라디아서가 구약성경과 신약성경 가운데 가장 많은 9구절인데 4장에 5구절이나 됩니다.
이러한 4장은 모두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1-7절의 이기속율에 의한 아들의 명분과 8-20절의 다시 종노릇 하려는 것에 대한 권고와 21-31절의 종의 아들과 자유 있는 여자의 아들입니다.
1-7절은 하나님께서 아들을 통해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해주시는 이기속율에 관한 것과 아들의 명분에 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8-20절은 다시 종노릇 하려는 것에 대해 돌이키도록 권고하는 것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21-31절은 하갈과 사라를 예로 들면서 두 아들과 두 언약을 언급하면서 약속의 자녀인 자유 있는 여자의 자녀에 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4장 개관
단락 | 단락별 개요 |
1-7 | 이기속율에 의한 아들의 명분 |
8-20 | 다시 종노릇 하려는 것에 대한 권고 |
21-31 | 여종의 아들과 자유 있는 여자의 아들 |
4:1-7 이기속율에 의한 아들의 명분
1-7절은 그리스도(基督)께서 율법(律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贖良)해주신 이기속율(以基贖律)에 의한 아들의 명분에 대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율법의 행위로는 의로워지지 못하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속량해주셔서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자유하게 해주셨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1-7절은 종과 아들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데 어렸을 때에는 초등학문 아래에서 종노릇 하였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보내주셔서 율법 아래에서 나게 하셔서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해주셨다는 것입니다.
● 4:1-3 초등학문들 아래에서 종노릇 하였음
4:1 내가 또 말하노니 유업을 이을 자가 모든 것의 주인이나 어렸을 동안에는 종과 다름이 없어서
4:2 그 아버지가 정한 때까지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에 있나니
4:3 이와 같이 우리도 어렸을 때에 이 세상의 초등학문 아래에 있어서 종 노릇 하였더니
4장을 시작하면서 3장 마지막에 언급한 유업을 이을 자를 연결해서 언급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1절을 보면 유업을 이을 상속자는 모든 것을 이어받게 되는 주인임에도 불구하고 어렸을 때는 주인 행세를 하지 못해서 종의 신세와 다름이 없다는 것입니다.
약속을 이어받게 된 자이나 마치 어린아이와 같이 믿음이 약할 때는 율법 아래에서 종노릇을 하였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비유에 대한 해석을 3절에서 볼 수 있습니다. 어렸을 때는 세상의 초등학문 아래에 있어서 종노릇 하였다는 것입니다.
3절의 초등학문의 원어원형은 στοιχεῖον(스토이케이온)인데 “기본 요소, 기본 원리”라는 뜻입니다. 복수이므로 기본원리들이 됩니다.
세상의 초등학문들이 가리키는 것은 문자 그대로 세상의 기본적인 원리들 아래에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골로새서 2장 8절과 같이 철학이나 교묘한 말로 속이는 헛된 속임수와 같은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2절을 보면 이러한 상태에 있는 동안에는 아버지께서 정하신 때까지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에 있다고 하였습니다.
2절의 정한 때의 원어원형은 προθέσμιος(프로데스미오스)인데 “미리 정한”이라는 뜻입니다.
미리 정해놓은 때까지는 모든 것의 주인인 상속자였으나 세상의 초등학문 아래에서 종으로 살아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상속자로서 약속을 이어받게 되었으나 미리 정해놓으신 때까지는 율법 아래에서 종살이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 4:4-5 아들을 보내심
4:4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4:5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4-5절에서는 때가 차자 하나님께서 아들을 보내주신 것을 언급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앞서 4장 2절에 언급한 것처럼 하나님 아버지께서 미리 정하신 때까지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에 있었고 3절처럼 세상의 초등학문 아래에서 종노릇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4절을 보면 그러나 때가 차자 하나님 아버지께서 자기의 아들을 보내주셔서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도록 하셨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신 것은 5절처럼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려는 것이고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基督)께서 율법(律法)으로부터 속량(贖良)해주신 이기속율(以基贖律)을 3장 13절에 이어 다시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5절의 얻게의 원어원형은 ἀπολαμβάνω(아폴람바노)인데 “받다, 도로 받다”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아버지께서 보내신 아들께서 속량해주셔서 받은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아들의 명분입니다. 5절의 아들의 명분의 원어원형은 υἱοθεσία(휘오데시아)인데 “양자 삼기”라는 뜻입니다.
미리 정하신 때가 차자 하나님 아버지께서 자기 아들을 보내주셔서 율법 아래에 나게 해주셔서 율법 아래에 있던 우리를 속량해주시고 우리를 양자로 삼아주셨다는 것입니다.
● 4:6-7 종이 아니라 아들임
4:6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4:7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받을 자니라
6-7절에서는 종이 아니라 아들이라는 것을 언급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6절을 보면 아들들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아들의 영을 마음 가운데 보내주셔서 아빠 아버지로 부르게 해주셨다고 하였습니다.
이러하므로 7절에서는 그러므로 이제는 종이 아니라 아들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받을 자라고 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속량해주셔서 종이 아니라 아들이 되었다는 것이고 아들이므로 하나님 아버지께서 아들의 영이신 성령을 보내주셔서 아빠 아버지로 부르게 해주시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상속자가 되게 해주셨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종에서 아들이 되게 해주시는 삼위일체의 하나님의 역사를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역사 가운데 하나님 아버지께서 보내주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4절과 6절의 보내사의 원어원형은 ἐξαποστέλλω(엑사포스텔로)인데 “보내다, 파송하다”라는 뜻입니다.
단순하게 보내는 것은 주로 πέμπω(펨포: 보내다)를 사용하고 임무를 주어서 보내는 것은 주로 ἀποστέλλω(아포스텔로: 보내다, 파송하다)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4절과 6절에 사용된 ἐξαποστέλλω(엑사포스텔로)는 ἐξ(엑스: -에서부터, -때문에, -에 의하여)와 ἀποστέλλω(아포스텔로: 보내다, 파송하다)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이러하므로 4절에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보내시고 6절에 그 아들의 영을 보내셨다는 것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아들과 성령께 각각 임무를 주셔서 보내셨다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아들께는 5절처럼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고 아들의 명분을 얻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아들의 영이신 성령께는 6절처럼 실제적인 아들로서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게 하신(롬 8:15) 것입니다.
4:8-20 다시 종노릇 하려는 것에 대한 권고
8-20절에서는 사도 바울이 간곡한 심정으로 다시 종노릇 하려는 것들에 대해 권고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힘써 수고하였으나 수고한 것이 헛되지 않을까 두려워하게 될 정도로 좋지 않은 열악한 상황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다시 초등학문들로 돌아가서 그러한 것들에게 종노릇 하려고 하고 좋았던 사이가 원수처럼 되었고 거짓 형제들이 열심을 내는 상황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곤혹스러운 상황이므로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해산하는 수고를 한다고 하였습니다.
● 4:8-11 다시 초등학문들에게 종노릇 하려고 함
4:8 그러나 너희가 그 때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 노릇 하였더니
4:9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 뿐 아니라 더욱이 하나님이 아신 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박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그들에게 종 노릇 하려 하느냐
4:10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4:11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
8-11절에서는 다시 돌아가서 초등학문들에게 종노릇 하려고 하는 것을 언급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8절을 보면 그 때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노릇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8절의 자들에게의 원어원형은 ὁ(호)인데 “이것, 이 사람, 저것, 저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8절의 종 노릇 하였더니의 원어원형은 δουλεύω(둘류오)인데 “종이 되다, 종노릇 하다”라는 뜻입니다.
이러한 것을 보면 하나님을 알지 못하던 때에는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것들에게 종이 되어 종노릇 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9절에 언급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알 뿐만 아니라 더욱이 하나님이 아신 바 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9절의 아신 바 되었거늘(γνωσθέντες, 그노스덴테스)은 γινώσκω(기노스코: 알다)의 과거 수동태이므로 알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에서 이의 원어원형은 ὑπό(휘포)인데 속격인 경우에는 “-에 의하여, -로 말미암아”라는 뜻이고 대격인 경우에는 “-아래”라는 뜻입니다.
9절은 속격이므로 “-에 의하여”라는 뜻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것을 보면 하나님에 의하여 알게 되었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박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종노릇 하려고 하느냐고 하였습니다.
9절의 천박한의 원어원형은 πτωχός(프토코스)인데 “가난한, 빈곤한, 비천한, 하찮은”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초등학문은 앞서 4장 3절에 언급한 것처럼 복수로 기본적인 원리들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것을 원어성경에 있는 ἄνωθεν(아노덴: 처음부터, 다시, 새로이)을 감안해서 보면 어떻게 다시 약하고 하찮은 기본적인 원리들로 돌아가서 다시 처음부터 그것들에게 종이 되려고 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들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지를 10절에 언급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10절에 언급하고 있는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는 것이었습니다.
삼가 지키니(10)의 원어원형은 παρατηρέω(파라테레오)인데 παρά(파라: 곁에, 가까이)와 τηρέω(테레오: 지키다, 보존하다)에서 유래하였으므로 “가까이서 지켜보다, 준수하다, 면밀하게 지키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종교적인 의식을 면밀하게 지키려는 것은 의로운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의식으로는 의로워지지 못하는데 자꾸만 되돌아가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하므로 11절을 보면 사도 바울이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한다고 하였습니다.
11절의 헛될까에서 까의 원어는 μή(메: 아니, -하지 않도록 )와 πως(포스: 어떻게 해서든지, 어쨌든, 혹시나)입니다.
이러한 것을 보면 사도 바울이 그동안 수고한 것이 혹시나 헛되지 아니할까 두려워한다는 의미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종노릇 하지 않도록 힘써 왔는데 헛수고하게 되는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 4:12-16 참된 말을 하므로 원수가 됨
4:12 형제들아 내가 너희와 같이 되었은즉 너희도 나와 같이 되기를 구하노라 너희가 내게 해롭게 하지 아니하였느니라
4:13 내가 처음에 육체의 약함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복음을 전한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4:14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으되 이것을 너희가 업신여기지도 아니하며 버리지도 아니하고 오직 나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하였도다
4:15 너희의 복이 지금 어디 있느냐 내가 너희에게 증언하노니 너희가 할 수만 있었더라면 너희의 눈이라도 빼어 나에게 주었으리라
4:16 그런즉 내가 너희에게 참된 말을 하므로 원수가 되었느냐
12-16절에서는 참된 말을 하므로 원수가 되었느냐고 하는 것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매우 좋은 사이였으나 어떠한 일로 말미암아 매우 나빠졌다는 것입니다.
12절을 보면 사도 바울을 해롭게 하지 아니하였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후에 나오는 13-14절을 보면 해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극진하게 대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전에는 육체의 연약함으로 말미암아 복음을 전한 것을 알았으나 업신여기지도 아니하고 버리지도 아니하고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하였다는 것입니다.
14절의 영접하였도다의 원어원형은 δέχομαι(데코마이)인데 “받아들이다, 환영하다, 환대하다, 영접하다”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업신여기지도의 원어원형은 ἐξουθενέω(엑수데네오)인데 “멸시하다, 업신여기다, 경멸적으로 대우하다”라는 뜻입니다.
버리지의 원어원형은 ἐκπτύω(에크프튀오)인데 “침을 내뱉다, 거부하다”라는 뜻입니다.
육체의 연약함으로 말미암아 시험을 받을 만함에도 불구하고 멸시하지도 않고 불결하다고 침을 내뱉거나 거부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환대하였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지극하게 환대하였던지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환대하였고 마치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환대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떻게 되었느냐는 것입니다. 15절을 보면 할 수만 있다면 눈이라도 빼내 주었으리라고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전과 같으면 얼마든지 그럴 정도가 되나 지금은 그런 분위기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15절에서 너희의 복이 지금 어디 있느냐라고 한 것은 그동안 잘 영접하였으므로 선지자와 제자를 영접하여 상을 받게 되는 그러한 복을 받아왔으나(마 10:41-42) 지금은 그러한 복이 없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그만큼 이전에는 영접을 잘하였으나 지금은 영접을 잘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된 이유를 16절에 언급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너희에게 참된 말을 하므로 원수가 되었느냐라고 하였습니다.
질문한 것을 보면 그동안 그렇게 좋았던 사이가 지금은 상황이 급변하게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지금은 마치 원수로 여길 정도로 급격하게 나빠지게 된 것은 참된 말을 하였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참된 말을 전해서 자유를 얻을 수 있도록 힘을 다해 수고하였습니다.
그런데 고마워하기는커녕 오히려 원수처럼 여기게 되는 상황이 되지 않았느냐는 것입니다.
16절의 원수가의 원어원형은 ἐχθρός(에크드로스)인데 “적의 있는, 적개심이 있는, 미워하는”이라는 뜻입니다.
적개심을 가지고 미워할 정도로 상황이 돌변하게 된 것을 의미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것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참된 말을 말하므로 이전에 좋았던 사이가 더 좋아져야 하는데 오히려 나빠져서 적개심을 가지고 미워하게 될 정도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 4:17-18 거짓 형제들이 열심을 내게 함
4:17 그들이 너희에게 대하여 열심 내는 것은 좋은 뜻이 아니요 오직 너희를 이간시켜 너희로 그들에게 대하여 열심을 내게 하려 함이라
4:18 좋은 일에 대하여 열심으로 사모함을 받음은 내가 너희를 대하였을 때뿐 아니라 언제든지 좋으니라
17-18절에서는 거짓 형제들이 자기들에게 열심을 내게 하려는 것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열심에 대한 용어를 많이 볼 수 있는데(열심 내는, 열심을 내게, 열심으로 사모함을) 그만큼 열심에 대한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열심을 낸다고 해서 다 올바르고 좋은 것이 아닙니다. 좋지 않은 일에 열심을 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열심을 내서 섬기고 따라야 할 열심의 대상을 잘 분별해야 합니다.
이러하므로 다른 복음을 전하는 거짓 형제들과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자유를 전하는 사도 바울 가운데 누가 참된 열심을 내는지 잘 분별해서 섬기고 따라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7절을 보면 거짓 형제들이 열심을 내는 것은 좋은 뜻이 아니라 다만 이간시켜 그들에게 열심을 내게 하려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17절의 좋은 뜻이의 원어원형은 부사인 καλῶς(칼로스)인데 “훌륭하게, 잘, 올바르게, 선하게, 좋게”라는 의미입니다.
거짓 형제들이 올바르게 좋게 하기 위하여 열심을 내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간시켜의 원어원형은 ἐκκλείω(엑클레이오)인데 “들이지 않다, 쫓아내다”라는 뜻입니다.
거짓 형제들이 열심을 내는 것은 사도 바울을 받아들이지 않고 쫓아내서 자기들에게 열심을 내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보면 거짓 형제들이 열심을 내서 자기들을 위해 열심을 내게 하려는 좋지 않은 상황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18절을 보면 사도 바울이 좋은 일에 열심히 사모함을 받음은 대하였을 때뿐만 아니라 언제든지 좋다고 하였습니다.
18절의 좋은 일에의 원어원형은 형용사인 καλός(칼로스)인데 “좋은, 선한, 옳은”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17절의 열심을 내는 것은과 열심을 내게와 18절의 열심히 사모함을 받음은의 원어원형은 ζηλόω(젤로오)인데 “열심이다, 열정적이다”라는 뜻입니다.
똑같이 열심을 내도 악한 목적으로 열심을 내는 것과 선한 목적으로 열심을 내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러한 것을 보면 열심을 내더라도 무턱대고 열심을 내는 것이 아니라 올바르게 열심을 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열심을 내서 섬기고 따라야 할 대상을 분명하게 잘 분별해야 한다는 것도 알게 됩니다.
다른 복음을 전하는 거짓 형제들을 따르지 않고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자유를 전하는 사도 바울을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하므로 올바르고 선한 일에 열심을 내는 것은 사도 바울과 함께 있을 때뿐만 아니라 언제나 항상 좋다는 것입니다.
● 4:19-20 다시 해산하는 수고를 함
4:19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4:20 내가 이제라도 너희와 함께 있어 내 언성을 높이려 함은 너희에 대하여 의혹이 있음이라
19-20절에서는 다시 해산하는 수고를 하는 것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19절을 보면 사도 바울이 처해 있는 상황이 좋지 않으므로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해산하는 수고를 한다고 하였습니다.
초등학문들로 돌아가서 다시 종노릇 하려고 하고 사도 바울은 멀리하고 거짓 형제들이 열심을 내고 있는 열악한 상태였습니다.
이러하므로 이러한 상황을 극복하고 되돌리기 위해 특별히 자녀에 대한 개념을 사용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자녀가 들어간 구절은 갈라디아서에 5구절인데 모두 4장에 나옵니다. 이 가운데 19절에 1구절, 마지막 부분인 21-31절에 4구절 나옵니다.
이러한 것을 보면 4장 19절 이후에는 자녀에 대한 개념을 중요하게 여기고 다루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9절에서는 나의 자녀들아라고 부르면서 해산하는 수고를 한다고 하는 것을 보면 부모의 입장이 되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복음으로 낳고(고전 4:15) 아버지가 자기 자녀에게 대하듯이 권면하고(살전 2:11)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9절의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의 원어원형은 ὠδίνω(오디노)인데 “해산의 진통을 겪다”라는 뜻입니다.
좋지 않은 상황을 다시 돌이키려고 하는 것은 마치 해산의 진통을 겪는 것과 같다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해산의 수고를 다시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게 하려는 것이고 수고를 하는 기간은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기까지 그러한 수고를 한다는 것입니다.
20절을 보면 이제라도 함께 있어 언성을 높이려 하는 것은 의혹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언성을(20)의 원어원형은 φωνή(포네)인데 “음성, 소리”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높이려(20)의 원어원형은 ἀλλάσσω(알랏소)인데 “변경하다, 바꾸다, 변하다”라는 뜻입니다.
지금까지 강경한 어조로 말해왔는데 이제는 말하는 방식을 바꾸려고 하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동안은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으라고 하였고(1:9) 어리석다고 하였고(3:1) 원수가 되었느냐라고 하였습니다(4:16).
그런데 이제는 부모의 입장에서 자녀를 대하듯이 대하고 자녀에 대한 것을 말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렇게 음성을 바꾸어 말하는 이유는 너희에 대하여 의혹이 있다는 것입니다.
20절의 의혹이 있음의 원어원형은 ἀπορέω(아포레오)인데 “당황하다, 어쩔줄 몰라하다, 어리둥절하다, 의심하다”라는 뜻입니다.
사도 바울이 좋지 않은 상황에 놓이게 되자 어떤 방식으로 대하여야 할지 곤혹스러워하였습니다.
그러다가 분위기를 바꾸어 말하는 방식에 변화를 주어서 자녀처럼 대하려고 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4:21-31 여종의 아들과 자유 있는 여자의 아들
21-31절에서는 아브라함의 두 아들과 그리고 하갈과 사라를 통해 두 언약과 자유에 대한 것을 언급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종의 아들과 자유 있는 여자의 아들을 통해 약속과 자유에 대한 것을 언급하고 약속의 자녀와 자유 있는 여자의 자녀인 것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아들께서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해주셨으므로 율법 아래에서 종노릇 하는 자들이 아니라 약속 아래에서 자유를 누리게 되는 아들들이 되게 해주셨다는 것입니다.
● 4:21-23 아브라함의 두 아들
4:21 내게 말하라 율법 아래에 있고자 하는 자들아 율법을 듣지 못하였느냐
4:22 기록된 바 아브라함에게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여종에게서, 하나는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며
4:23 여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21-23절에서는 아브라함의 두 아들인 여종에게서 난 아들과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 난 아들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21절에 율법 아래에 있고자 하는 자들아라고 한 것을 보면 앞 단락에서 살펴본 대로 율법 아래로 다시 돌아가서 종노릇 하려고 하므로 그러한 자들에게 말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에게 율법을 듣지 못하였느냐라고 하였습니다. 율법 아래에 있으려고 하였으면서도 정작 그 율법이 무엇을 말하는지를 알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하므로 22절을 보면 기록된 바라고 하면서 율법에 기록된 것을 예증으로 들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역설적으로 그들이 그렇게도 받들려고 하는 율법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를 알게 해주어서 율법에서 의미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율법에 기록된 것을 보면 아브라함에게 두 아들이 있었는데 하나는 여종에게서 났고 하나는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 났다고 하였습니다.
23절을 보면 이들에 대한 것을 보다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여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다는 것입니다.
23절의 났고(γεγέννηται, 게겐네타이)는 γεννάω(겐나오: 낳다, -의 아버지가 되다)의 완료 수동태이므로 태어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두 아들로 태어나게 되었는데 여종의 아들은 육체를 따라 태어나게 되었고 자유 있는 여자의 아들은 약속에 따라 태어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 4:24-28 약속의 자녀들임
4:24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 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갈이라
4:25 이 하갈은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 산으로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곳이니 그가 그 자녀들과 더불어 종 노릇 하고
4:26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4:27 기록된 바 잉태하지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산고를 모르는 자여 소리 질러 외치라 이는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 하였으니
4:28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24-28절에서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들인 것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두 여자들은 두 언약들에 대한 비유인데 24-25절은 하갈과 관련된 비유이고 26-27절은 사라와 관련된 비유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28절은 결론 부분인데 두 가지 가운데 사라에게서 태어나게 된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는 것입니다.
24절을 보면 율법에 기록된 것은 비유로 말한 것인데 두 여자들은 두 언약들이라고 하였습니다.
두 언약 가운데 하나는 시내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인데 곧 하갈이라고 하였습니다.
25절을 보면 이러한 하갈에 대한 것을 보다 자세하게 언급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갈은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산으로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곳인데 그 여자가 자기 자녀들과 함께 종노릇 한다고 하였습니다.
25절에 나오는 같은 곳이니의 원어원형은 συστοιχέω(쉬스토이케오)인데 “상응하다, 같은 계열에 속하다, 같은 줄에 서다”라는 뜻입니다.
하갈은 시내산을 의미하는데 그러한 시내산은 지금의 예루살렘과 같은 계열에 속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예루살렘은 예루살렘이기는 하나 육안에 보이는 외형적인 상태의 예루살렘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것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하갈이 의미하고 있는 시내산 즉 지금의 예루살렘이 궁극적으로 의미하고 있는 것은 율법이라는 것입니다.
하갈은 종을 낳게 되므로 하갈이 낳은 아들은 모두 종이 된다는 것인데 결국은 율법의 어머니가 낳은 율법의 종이 된다는 것입니다.
26절을 보면 이러한 하갈과는 반대되는 위에 있는 예루살렘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육적인 상태의 예루살렘과 대비하여 본다면 영적인 상태의 예루살렘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땅의 예루살렘은 율법을 상징하고 위의 예루살렘은 약속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하므로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라고 하였으며 곧 우리의 어머니라고 하였습니다.
땅의 예루살렘은 종이 되게 하고 위의 예루살렘은 자유인이 되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자유인이 된 아들의 입장에서 보면 위의 예루살렘이 어머니가 되는 것입니다.
27절에서는 이러한 어머니에 대한 것을 보다 자세하게 언급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사야 54장 1절을 인용한 것인데 홀로 사는 여자의 자녀들이 남편 있는 여자의 자녀들보다 더 많다는 것입니다.
27절의 홀로 사는 자의의 원어원형은 ἔρημος(에레모스)인데 “버림받은, 고독한, 황폐한”이라는 뜻입니다.
그러한 상태에 놓여 있었으나 결국에는 호전이 되고 역전이 된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28절을 보면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고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제까지 두 여자와 두 아들과 두 언약과 두 예루살렘에 대해 언급해왔는데 어느 계열에 속했는지를 밝혀주고 있는 것입니다.
두 언약은 두 약속을 의미하기보다는 두 계열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된 개념으로 볼 수 있으므로 율법과 약속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것은 하갈과 사라로 대표되고 있는데 하갈과 사라가 의미하고 있는 것은 율법과 약속입니다.
이러한 율법과 약속으로 말미암아 종과 자유인으로 각각 태어나게 되는데 율법의 종과 약속의 자유인이 태어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두 계열 가운데 어느 계열에 속해 있는가 어느 줄에 서 있는가가 매우 중요한데 이삭과 같은 사라의 계열에 속해서 약속의 자녀들이라는 것입니다.
● 4:29-31 자유 있는 여자의 자녀들임
4:29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박해한 것 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4:30 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으라 여종의 아들이 자유 있는 여자의 아들과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느니라
4:31 그런즉 형제들아 우리는 여종의 자녀가 아니요 자유 있는 여자의 자녀니라
29-31절에서는 여종의 자녀들이 아니라 자유 있는 여자의 자녀들이라는 것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들이나 29절을 보면 육체에 따라 태어나게 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박해한 것 같이 이제도 그러하다고 하였습니다.
육체에 따라 태어나게 된 하갈의 아들이 약속의 자녀인 사라의 아들인 이삭을 놀리는 것과(창 21:9) 같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들이 그때에도 있었고 사도 바울 때도 있었고 지금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습니다.
육체에 따라 태어나게 된 육에 속한 자들이 성령으로 거듭난 영에 속한 자들을 박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 놓여 있으나 30절을 보면 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고 있느냐라고 하였습니다.
21절에 이러한 것을 언급하기 시작하면서 율법을 듣지 못하였느냐라고 하였는데 마치면서 다시 상기시키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율법을 추종하면서도 그 율법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를 잘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하므로 율법이 가리키고 있는 의미를 올바르게 명확하게 해석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30절에 창세기 21장 10절을 인용하고 있는데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으라고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창세기 21장 10절에 있는 כִּי(키: 왜냐하면)와 갈라디아서 4장 30절에 있는 γὰρ(가르: 왜냐하면)를 감안해서 보면 왜냐하면 그러한 여종의 아들은 자유 있는 여자의 아들과 함께 유업을 얻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여종인 하갈의 아들은 자유 있는 여자인 사라의 아들과 함께 상속을 받지 못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궁극적으로는 천국을 상속받지 못하므로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고 천국에서 쫓겨난다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하므로 31절에서는 우리는 여종의 자녀가 아니라 자유 있는 여자의 자녀라고 하였습니다.
4장의 문맥에서 보면 여종인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주셔서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해주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율법 아래에서 벗어난 약속의 자녀들로서 자유하게 된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자유를 주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유 있는 여자의 자녀들은 이러한 것을 상속받게 되는 것입니다.
한눈에 보는 갈라디아서 (재개정판)
재개정일 2024년 1월 12일
개 정 일 2020년 9월 7일
발 행 일 2020년 5월 12일
지 은 이 이서영
출 판 사 퍼플
출판등록 제300-2012-167호 (2012년 9월 7일)
주 소 서울시 종로구 종로1가 1번지
대표전화 1544-1900
홈페이지 www.kyobobook.co.kr.
ISBN 978-89-24-12227-5
ⓒ 이서영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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