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성경적개관/갈라디아서

한눈에 보는 갈라디아서 (재개정판) 3장 이기속율(以基贖律)의 자유

by 이서영 목사 2020. 5. 29.

한눈에 보는 갈라디아서 (재개정판) 3장 이기속율(以基贖律)의 자유

 

 

[제3부] 이기속율(以基贖律)이 주는 자유

 

갈라디아서 3-4장은 자유를 이기속율(以基贖律)의 관점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율법으로부터 속량해주셔서 자유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갈라디아서 3-4장은 그리스도(基督)께서 율법(律法)에서 속량(贖良)해주셔서 율법으로부터 자유를 얻게 해주셨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율법에서 속량해주신 것과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아들로 말미암아 속량해주셔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해주시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장별 주제
3 이기속율의 자유
4 이기속율의 명분

 

  

3장 이기속율(以基贖律)의 자유

 

 

3장 개요

 

 

✙✙✙ 3장 구절

 

갈라디아서 3장에서 대표적인 구절을 선정한다면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해주셨다는 것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13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3: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 3장 주제

 

갈라디아서 3-4장은 이기속율(以基贖律)이 주는 자유에 대한 관점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것을 통해 율법으로부터 자유를 주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가운데 3장은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자유 가운데 그리스도(基督)께서 율법(律法)으로부터 속량(贖良)해주신 이기속율(以基贖律)과 이기속율을 이루신 그리스도에 대해 논증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해주셔서 율법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주시고 약속을 받게 해주셨다는 것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3장은 이러한 흐름이 있으므로 이와 관련된 주제를 도출해 본다면 이기속율의 자유가 됩니다.

 

 

✙✙✙ 3장 구조

 

갈라디아서 3장은 그리스도(基督)께서 율법(律法)으로부터 속량(贖良)해주신 이기속율(以基贖律)의 자유에 관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하므로 3장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해주신 것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것을 아브라함을 통해 설명하고 있으며 믿음과 약속과 율법에 대한 개념을 중요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구약성경과 신약성경 가운데 관련된 구절을 많이 사용한 회수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믿음은 로마서가 33구절, 히브리서가 30구절, 갈라디아서가 19구절이고, 나머지는 그 이하입니다. 이 가운데 3장이 13구절이나 됩니다.

약속은 히브리서 17, 사도행전 10, 갈라디아서가 10구절이고 나머지는 그 이하인데 3장이 8구절입니다.

율법은 로마서 40, 신명기 22, 느헤미야 21, 갈라디아서가 23구절, 나머지는 그 이하인데 3장이 12구절입니다.

아울러 아브라함은 창세기 120, 누가복음 14, 로마서와 히브리서가 11구절, 출애굽기와 요한복음과 사도행전과 갈라디아서가 9구절, 나머지는 그 이하인데 3장이 8구절입니다.

이러한 3장은 모두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1-14절의 이기속율의 정의와 15-29절의 이기속율을 이루신 그리스도입니다.

1-14절은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해주셨다는 이기속율에 관한 것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갈라디아 사람들에게 율법의 행위와 믿음에 대해 질문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런 이후에 아브라함을 예로 들면서 이기속율에 대한 정의를 언급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15-29절은 이기속율을 이루신 그리스도에 대한 것입니다. 약속하신 그리스도와 율법의 역할을 통해 알게 해주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3장 개관

 

단락 단락별 개요
1-14 이기속율의 정의
15-29 이기속율을 이루신 그리스도

 

 

3:1-14 이기속율의 정의

 

1-14절은 그리스도(基督)께서 율법(律法)의 저주로부터 속량(贖良)해주신 이기속율(以基贖律)의 정의에 대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율법의 행위로는 의로워지지 못하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속량해주셔서 율법의 저주에서 자유하게 해주셨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1-14절은 바울이 갈라디아 사람들에게 율법의 행위와 믿음에 대해 질문을 강력하게 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의로워지게 된 아브라함을 통해 언급하고 있으며 이기속율에 대한 정의를 언급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이기속율이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자유 가운데 하나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율법의 행위로는 의로워지지 못하나 예수 그리스도의 속량으로 말미암아 율법의 저주에서 벗어나 자유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3:1-5 율법의 행위와 믿음

 

3:1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3:2 내가 너희에게서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혹은 듣고 믿음으로냐

3:3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3:4 너희가 이같이 많은 괴로움을 헛되이 받았느냐 과연 헛되냐

3:5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혹은 듣고 믿음에서냐

 

3장을 시작하면서 1-5절은 갈라디아서의 중요한 주제인 율법의 행위와 믿음에 대해 먼저 언급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갈라디아 사람들이 꾀임에 빠져 되돌아가서 율법의 행위로 의롭게 되려고 하기에 믿음으로 의로워진다는 것을 강력한 어조로 논증하고 있습니다.

1절에 나오는 꾀더냐의 원어원형은 βασκαίνω(바스카이노)인데 매혹하다, 유혹하다라는 뜻입니다.

이러하므로 시작하면서 곧바로 어리석도다(3:1)라는 말을 하였으며 곧이어 어리석으냐(3:3)라는 말을 할 정도였습니다.

또한 4절에서는 헛되이 받았느냐 과연 헛되냐라고 할 정도로 율법의 행위로 왜 돌아가려고 하는 거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괴로움을의 원어원형은 πάσχω(파스코)인데 고난을 당하다, 경험하다라는 뜻입니다.

당하는 어떤 것을 경험하다는 뜻으로도 사용되므로 4절의 의미로 보면 여러 가지로 그렇게 많은 경험들을 하였는데 그러한 것들이 과연 헛되냐는 것입니다.

바꾸어 생각해보면 율법의 행위와 믿음 가운데 어느 것이 헛되고 어느 것이 옳으냐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에 대해 경험해보고서도 알지 못하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들 가운데 하나가 삼위일체의 하나님에 대한 경험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3:1) 성령과(3:2-3) 하나님 아버지에(3:5) 대해 언급하면서 강력하게 변증하고 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을 눈앞에 밝히 보이는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1절에 나오는 밝히보이거늘(προεγράφη, 프로에그라페)προγράφω(프로그라포: 미리 쓰다, 공표하다)의 과거 수동태입니다.

1절의 의미로 보면 이미 기록된 것을 의미하고 이미 공표된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하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공개적인 기록을 통해 명명백백하게 공적으로 선포되었으므로 잘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속량해주신 은혜를 저버리고 믿음이 아니라 율법의 행위로 되돌아갈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성령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라고 하였습니다. 2-3절을 보면 율법의 행위로 성령을 받았느냐 아니면 듣고 믿음으로 받았느냐라고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라고 하는 것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것을 보면 믿음으로 성령을 받고 성령에 의해 살기 시작했다가 지금은 율법의 행위로 마치겠느냐는 것입니다.

3절에 나오는 마치겠느냐의 원어원형은 πιτελέω(에피텔레오)인데 성취하다, 끝내다, 완성하다, 실행하다라는 뜻입니다.

성령에 의해 행하지 아니하고 율법의 행위로 완성하려는 것이냐는 것입니다.

5절에서는 성령을 주시고 능력을 행하여주시는 하나님 아버지에 대서도 언급하였는데 이러한 일도 율법의 행위냐 아니면 믿음이냐는 것입니다.

5절에 나오는 주시고의 원어원형은 πιχορηγέω(에피코레게오)인데 공급하다, 주다라는 뜻입니다. 합창대의 비용을 지불하는 의미에서 유래하였으므로 계속 공급해 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성령을 구하는 자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계속해서 부어주시는 것을 의미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율법의 행위와 믿음에 대한 것을 삼위일체의 하나님을 통해 변증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자유에 대한 것을 볼 수 있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고 칭()함을 얻게 해주는 이신칭의(以信稱義)의 자유와

그리고 그리스도(基督)께서 율법(律法)으로부터 속량(贖良)해주는 이기속율(以基贖律)의 자유와

또한 그리스도께서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성령을 보내주셔서 그러하신 성령(聖靈)의 인도로 율법(律法)을 성취(成就)하게 해주는 이성성율(以聖成律)의 자유를 볼 수 있게 됩니다.

이러한 것과 함께 앞서 언급한 3장 구조에서 살펴본 대로 믿음이 나오는 구절 수를 살펴보면 갈라디아서가 19구절입니다. 이 가운데 3장이 무려 13구절이나 됩니다. 그만큼 믿음은 3장의 중요한 주제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3장을 시작하면서 믿음을 강조하고 있는데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된다는 것을 피력하고 있는 것입니다.

 

3:6-9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로워지게 됨

 

3:6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

3:7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알지어다

3:8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인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

3:9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

 

3장을 시작하면서 1-5절에서 율법의 행위와 믿음에 대해 강력하게 피력한 이후에 6-9절에서는 믿음에 대한 예로 아브라함을 들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으므로 의로 정하셨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창세기 156절에 볼 수 있습니다.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6절의 정하셨다(ἐλογίσθη, 에로기스데)λογίζομαι(로기조마이: 간주하다, -라고 생각하다, 여기다)의 과거 수동태입니다.

이러하므로 6절에서는 여겨졌다는 의미로 볼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으므로 의로 여겨졌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동일한 어원을 가진 로마서 43절에서는 여겨진으로, 49절에서는 여겨졌다, 422절에서는 여겨졌느니라, 야고보서 223절에서는 여기셨다는으로 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것을 로마서 328(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에서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인정하노라6절의 정하셨다와 동일한 어원이므로 인정한다는 것은 여긴다는 것입니다.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다고 여겨진다는 것입니다.

이러하므로 7절에서는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것을 알아야 한다고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었다는 것은 아브라함처럼 믿음으로 의로워지게 되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8절의 의로 정하실의 원어원형은 δικαιόω(디카이오오)인데 의롭다 하다라는 뜻입니다.

성경이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고 하시는 것을 미리 알고는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했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내용은 창세기 123절과 같이 모든 이방인들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하므로 9절에서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복을 받게 된 것처럼 믿음으로 말미암는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어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의로워지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의로워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사도 바울이 아브라함을 예로 들어서 논증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3:10-12 율법의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음

 

3:10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3:11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도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라

3:12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니 율법을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하였느니라

 

10-12절에서는 아브라함의 복을 받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저주 아래에 있다고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곳에서도 율법의 행위로는 의로워지지 못하게 된다는 것을 저주라는 강력한 용어를 쓰면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10절을 보면 율법의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다고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한 것을 신명기 2726a절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이 율법의 말씀을 실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10절의 항상 행하지의 원어원형은 μμένω(엠메노)인데 “-에 머무르다, 남아 있다, -를 지키다라는 뜻입니다.

율법에 머무르거나 율법을 지킨다는 의미이므로 율법을 항상 행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10절 끝부분의 저주 아래에 있는의 원어원형은 πικατάρατος(에피카타라토스)인데 저주 받은이라는 뜻입니다.

이처럼 율법을 항상 행하지 않으므로 율법의 행위에 속하는 자들은 저주를 받은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보면 율법의 행위로는 결코 해결하지 못한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러하므로 11절에서는 하나님 앞에서 아무도 율법으로는 의롭게 되지 못하는 것이 분명하다고 하였습니다.

11절의 분명한의 원어원형은 δλος(델로스)인데 확실한, 분명한, 명백한이라는 뜻입니다.

이러한 것을 보면 명백하게 아무도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11절에 나오는 하나님 앞에서라고 하였을 때 앞에서의 원어원형은 παρά(파라)인데 “-의 곁에라는 뜻입니다.

하나님 앞이라는 의미보다는 하나님의 곁이라는 의미로 보게 된다면 하나님과의 사이가 훨씬 더 가깝게 느껴지게 됩니다.

곁에서 모든 것을 훤하게 낱낱이 바라보시고 아시는 하나님께 율법을 빠짐없이 모두 행하였다고 자신 있게 말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이러한 것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그만큼 율법으로는 의롭게 되지 못한다는 것이 명백하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11절에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고 하였습니다. 그러한 것을 하박국 24절 후반부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12절에서도 반복해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율법을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것을 레위기 185절 후반부에서 볼 수 있습니다. 사람이 이를 행하면 그로 말미암아 살리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율법의 행위로 사는 자는 의인처럼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행하는 것으로 말미암아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들은 율법 아래에 있게 되고 그리하여 저주 아래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3:13-14 이기속율의 정의

 

3: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3:14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

 

13-14절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해주셨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그리스도(基督)께서 율법(律法)으로부터 속량(贖良)해주는 것을 이기속율(以基贖律)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이기속율(以基贖律)이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자유 가운데 하나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해주시려고 자유를 주셨는데(5:1) 러한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자유로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13절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으셔서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해주셔서 그러한 자유를 주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13절에 나오는 속량하셨으니의 원어원형은 ξαγοράζω(엑사고라조)인데 구속하다, 속량하다라는 뜻입니다. 속전을 주고 노예를 구해내는 것에 적용이 가능한 말이었습니다.

앞의 단락에서는 율법의 행위에 속한 자는 저주를 받은 자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도 예전에는 그러한 처지에 있었습니다.

그러했던 우리를 그리스도께서 친히 저주를 받으셔서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해주신 것입니다.

13b절은 신명기 2123b절에 기록된 것입니다.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

누가 이러한 끔찍한 저주를 받으려고 하겠습니까? 한 사람 분량의 저주만 하더라도 엄청나게 큰데 우리 모든 사람의 어마어마한 저주를 그 누가 자원해서 받으려고 나서겠습니까?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것저것 따지지 않으시고 우리를 위해 우리 대신 저주를 받으셔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입니다.

13절의 위하여의 원어원형은 πέρ(휘페르)인데 “-을 위하여, 대신하여라는 뜻입니다.

속격을 수반하게 되면 대표하거나 대리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대신에, 대신하여라는 뜻이 됩니다.

13절은 속격을 수반하므로 그리스도께서 온갖 여러 가지 저주를 우리를 대신하여 받으셨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갈라디아서 주제의 측면에서 보면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행위로부터 우리에게 자유를 주시려고 우리 대신 율법의 저주를 받으신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율법의 행위에서 자유하게 되었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모든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셨기(2:20) 때문입니다.

14절을 보면 이렇게 해주신 목적을 볼 수 있습니다. 14절 첫 부분에 나오는 이는(να, 히나: -하기 위해)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하기 위한 것입니까?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들에게 미치게 하려는 것입니다.

14절의 미치게 하고의 원어원형은 γίνομαι(기노마이)인데 생겨나다, 일어나다, 되다, 만들어지다라는 뜻입니다.

믿음으로 의로워지게 된 아브라함의 복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방인들에게도 일어나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방인들이 율법의 저주 아래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의로워지게 되는 복을 받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목적이 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14절 끝에 나오는 하려 함이라(να, 히나: -하기 위해)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고 그렇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14절의 약속의 원어원형은 παγγελία(에팡겔리아)인데 약속, 알림이라는 뜻입니다.

14절에 약속하신 것은 성령(2:33)이십니다. 이러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거듭나게(3:5-8) 되고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게(1:13) 됩니다.

이렇게 될 뿐만 아니라 갈라디아서의 중요한 주제인 성령으로 행하게(5:16-18)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로마서에서도 중요하게 다루고 있습니다(8:1-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하였다는 것입니다.

육신이 연약하여 율법의 행위를 온전히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께서 아들을 보내주셔서 아들의 육신에 죄를 정하여서 할 수 있도록 해주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성령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해주신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갈라디아서 5장에서 다루게 될 이성성율(以聖成律)을 미리 보여주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성령을 보내주셔서 그러하신 성령(聖靈)의 인도로 율법(律法)을 성취(成就)하게 된다는 이성성율(以聖成律) 미리 보여주고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이기속율(以基贖律)로 말미암아 이신칭의(以信稱義)와 이성성율(以聖成律)을 이루어주시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基督)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저주를 받으시고 율법(律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贖良)해주신 이기속율(以基贖律)로 말미암아 이루어지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알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저주로 말미암아 율법의 행위 아래에 있는 우리를 속량해주셔서(이기속율)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칭함을 얻게 해주시고(이신칭의) 그리스도께서 보내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성취할 수 있게 해주시기(이성성율) 때문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사도 바울을 통해 이처럼 놀랍고도 은혜로운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자유를 갈라디아서를 통해 그 당시뿐만 아니라 오늘날의 수신자인 우리에게도 전해주고 계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것을 볼 때 우리 모두가 삼위일체의 하나님께 영원무궁하도록 감사와 찬양과 영광을 올려드려야 할 것입니다.

 

3:15-29 이기속율을 이루신 그리스도

 

15-29절에서는 이기속율(以基贖律)을 이루신 그리스도(基督)에 대해 논증해주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것을 약속하신 그리스도와 율법의 역할을 통해 알게 해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15-18절은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은 예수 그리스도이신데 이 약속은 헛되게 하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19-25절은 율법의 역할은 죄 아래에 가두는 역할을 하기도 하고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까지 그리스도께로 인도해주어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해주려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26-29절은 믿음이 온 후로는 율법 아래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것이 되어 아브라함의 자손이 된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율법(律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贖良)해주신 이기속율(以基贖律)을 이루어주신 그리스도(基督)를 율법과 연관하여 중점적으로 언급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3:15-18 그리스도를 약속하심

 

3:15 형제들아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사람의 언약이라도 정한 후에는 아무도 폐하거나 더하거나 하지 못하느니라

3:16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한 사람을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3:17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하나님께서 미리 정하신 언약을 사백삼십 년 후에 생긴 율법이 폐기하지 못하고 그 약속을 헛되게 하지 못하리라

3:18 만일 그 유업이 율법에서 난 것이면 약속에서 난 것이 아니리라 그러나 하나님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에게 주신 것이라

 

15-18절에서는 약속에 대한 내용인데 그리스도를 약속하셨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앞서 314절에 약속하신 것은 성령이시고 16절에 약속하신 것은 그리스도이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5절에서 사람의 경우를 보면 언약을 정한 후에는 아무도 폐하거나 더하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15절의 언약의 원어원형은 διαθήκη(디아데케)인데 언약, 유언이라는 뜻입니다.

사람이 유언을 남겨도 불변한데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은 사람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불변하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17절을 보면 이러한 것처럼 하나님께서 미리 정하신 언약을 사백삼십 년 후에 생긴 율법이 폐기하여 약속을 헛되게 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17절의 폐기하지의 원어원형은 κυρόω(아퀴로오)인데 힘을 빼앗다, 폐지하다, 무효로 하다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17절의 헛되의 원어원형은 καταργέω(카타르게오)인데 활동하지 못하게 하다, 못쓰게 만들다, 폐지하다, 무효로 하다라는 뜻입니다.

뒤에 생긴 율법이 먼저 정하여진 언약을 폐지하여 약속을 무용지물이 되게 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16절에 그와 같은 약속을 하신 내용을 볼 수 있는데 그 약속은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약속하신 것인데 여러 사람을 가리켜 자손들이라고 하지 않고 오직 한 사람을 가리켜 네 자손이라고 하셨는데 그 한 사람은 바로 그리스도이시다는 것입니다.

18절에는 그러한 약속을 아브라함에게 주신 것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율법이 아니라 약속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에게 주셨다는 것입니다.

18절에 나오는 말미암아의 원어원형은 διά(디아)인데 “-을 통하여, -때문에라는 뜻입니다.

이러한 것을 보면 유업은 율법이 아니라 약속에 의해 주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8절의 유업이의 원어원형은 κληρονομία(클레로노미아)인데 상속재산, 유산이라는 뜻입니다.

이러한 유업을 뒤에 나온 율법의 행위로 받게 되는 것이 아니라 미리 정하여진 약속에 따라 받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18절 끝에 나오는 주신 것이라의 원어원형은 χαρίζομαι(카리조마이)인데 값없이 주다, 은혜를 베풀다라는 뜻입니다.

약속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에게 유업을 주셨는데 은혜로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러하므로 뒤에 나타난 율법이 아니라 미리 정하여진 약속에 따라 유업이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3:19-22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까지 율법을 주심

 

3:19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하므로 더하여진 것이라 천사들을 통하여 한 중보자의 손으로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

3:20 그 중보자는 한 편만 위한 자가 아니나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

3:21 그러면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들과 반대되는 것이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만일 능히 살게 하는 율법을 주셨더라면 의가 반드시 율법으로 말미암았으리라

3:22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에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라

 

19-22절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까지 율법을 주신 것에 대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19절을 보면 나중에 있게 된 율법이 먼저 정하여진 약속을 헛되게 하지 못하게 된다면 도대체 율법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약속만 있으면 되지 율법은 무용지물이므로 없어도 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율법은 율법대로 역할이 분명히 있다는 것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약속된 자손이 오실 때까지 율법은 범법들 때문에 더하여졌다고 하였습니다.

19절의 범법의 원어원형은 παράβασις(파라바시스)인데 침범, 범법, 법을 어김, 이탈, 위반이라는 뜻입니다.

이러한 것을 로마서에서 살펴보면 513절에 죄가 율법이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었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였다고 하였습니다.

415절에서는 율법은 진노를 이룬다고 하였는데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법도 없다는 것입니다.

이러하므로 520절에서는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죄를 짓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죄를 죄로 여기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율법은 죄가 아닙니다.

77절을 보면 율법이 죄가 아니라고 하면서 율법이 아니고서는 죄를 알지 못하였다고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712절에 율법은 거룩하고 계명도 의로우며 선하다고 하였으며 713절에서는 계명으로 말미암아 죄로 심히 죄 되게 하려고 하였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19절에 나오는 이러한 율법은 천사들을 통하여 중보자인 모세의 손으로 베푸신 것입니다(7:35, 26:46, 31:9, 왕상 2:3).

19절의 베푸신의 원어원형은 διατάσσω(디아탓소)인데 명령하다, 지시하다, 제정하다라는 뜻입니다. διά(디아: -을 통하여)τάσσω(탓소: 배열하다, 정리하다)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보면 율법은 천사들을 통하여 중보자인 모세의 손으로 기록하여 정리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절차를 통해 율법을 주신 것은 약속된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죄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하려는 것입니다.

20절은 율법을 제정하는데 쓰임을 받게 된 중보자인 모세는 한 편만 위하지 못하고 율법을 주시는 하나님과 율법을 받는 양편을 위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한 분이시라고 하였는데 그것은 양편에서 제정하는 율법과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약속은 한 분이신 하나님께서 중재인이 없어도 한편에서 언약하시기 때문입니다.

21절에서는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들과 반대되는 것이냐고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과 반대가 아니냐는 것입니다.

21절의 반대되는 것이냐의 원어는 κατὰ(카타)인데 속격을 수반하는 경우에는 “-에 대하여, -와 마주 대하여, -의 맞은 편에, 정면으로라는 뜻입니다.

속격을 수반하고 있는 21절의 의미로 보면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과 반대 입장에서 마주 대하고 있는 상태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결코 그럴 수 없다는 것입니다.

21절의 살게 하는의 원어원형은 ζωοποιέω(조오포이에오)인데 살리다, 생명을 주다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반드시의 원어원형은 ντως(온토스)인데 실제로, 확실히, 참으로, 분명히라는 뜻입니다.

이러한 것을 보면 만일 생명을 주는 능력이 있는 율법이 주어졌다면 참으로 의로움이 율법으로 말미암았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22절을 보면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에 가두었다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한 목적이 있다는 것입니다.

22절의 말미암는의 원어는 κ(에크)인데 “-에서부터, -때문에, -에 의하여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약속을(παγγελία, 에팡겔리아)은 주격 단수입니다.

성경이 죄 아래에 가둔 것은 약속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의하여 믿는 자들에게 주어지도록 하기 위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된 것이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약속된 그리스도가(3:16) 주어지고 약속된 성령이(3:14) 주어지게 되고 아울러 약속된 의로움이(3:6-9) 주어지게 된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3:23-25 율법이 그리스도께로 인도해줌

 

3:23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는 율법 아래에 매인 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3:24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

3:25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초등교사 아래에 있지 아니하도다

 

23-25절에서는 초등교사의 역할을 하는 율법이 그리스도께로 인도해준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23절의 매인 바 되고의 원어원형은 φρουρέω(프루레오)인데 망보다, 감금하다, 보호하다라는 뜻입니다.

믿음이 오기 전에는 율법 아래에 감금되어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다는 것입니다.

율법에게 붙잡혀서 믿음이 오기 전까지는 의롭다 함을 받지 못하는 신세에 처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처지에 있었는데 24절을 보면 그래서 율법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고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초등교사가 되어 그리스도께로 인도해주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해준다는 것입니다.

24절의 초등교사가의 원어원형은 παιδαγωγός(파이다고고스)인데 관리자, 안내자, 몽학선생, 가정교사라는 등의 뜻이 있습니다. παίς(파이스: 아이)γω(아고: 인도하다)에서 유래하였습니다.

이러한 사람은 일반적으로 의미하는 교사(διδάσκαλος, 디다스칼로스)와는 다르기에 이 용어를 명확하게 설명하기 어려우나 율법이 자기 자신의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습니다.

율법이 비록 의롭게 해주지는 못하나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게 해주기 위해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역할을 해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상태에 있었는데 25절을 보면 그러나 믿음이 온 이후로는 초등교사 아래에 있지 않다고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25절의 아니하도다의 원어원형은 οκέτι(우케티)인데 이제는 아니다, 더 이상 -아니다라는 뜻입니다.

믿음이 오기 전에는 율법 아래에 갇혀 있었고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 아래에 있었으나 믿음이 온 이후로는 더 이상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믿음으로 해결을 받을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율법 아래에서 율법의 행위로 얻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게 되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렇게 율법이 초등교사가 되어 그리스도께로 인도해주었기에 더 이상 율법이 그러한 초등교사의 역할을 해주지 않아도 된다는 것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율법이 인도해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보내주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르게 해주셨기에 이제는 초등교사의 역할을 받지 않아도 된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3:26-29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들

 

3:26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3:27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3:28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3:29 너희가 그리스도의 것이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26-29절에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들에 관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믿음이 온 이후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성취되는 것들을 제시해주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그리스도를 옷으로 입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고 그리스도의 것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된다는 것입니다.

26절에는 모두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한 사람도 빠짐없이 모두가 하나님의 아들들이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는 인간적인 좋은 방법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어떤 인간적인 수단으로 되거나 혈통으로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된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었으나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로 불러주심으로(9:26, 1:10) 이루어지게 된 것입니다.

27절에서는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를 옷으로 입었다고 하였습니다.

27절의 합하기 위하여의 원어는 ες(에이스)인데 “-안으로, -으로, - 향하여, -을 위하여라는 뜻입니다.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서 세례를 받게 되었다는 것인데 그리스도와 함께 세례를 받게 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함께 세례를 받게 되면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옷으로 입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게 되면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합하여 장사되었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과 합하여 다시 살아나게 되는 것입니다(6:3-7, 2:12).

28절에서는 유대인이든 헬라인이든 종이든 자유인이든 남자든 여자든 모두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라고 하였습니다.

원어성경에 나오는 οὐκ(우크: -아니다, -아닌) νι(에니: 있다, 있을 수 있다)οδὲ(우데: --도 아니다)를 감안해보면 유대인도 헬라인도 없고 종도 자유인도 없고 남자도 여자도 없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된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천국에 가면 이러한 구별이 없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면 장가도 시집도 가지 않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다고 하셨습니다(22:30). 마지막 나팔소리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를 받게 됩니다(고전 15:51-52).

이러한 부활이 있는 후에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가 될 것입니다.

이 땅에서는 편의상 성별이나 혈통이나 가족 단위 등으로 구분하게 됩니다. 하지만 영적으로 보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한 가족이고 한 신앙공동체이고 하나님 나라의 한 백성인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가 되는 것이 매우 중요하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아버지께 중보기도를 드린 내용을 보면 하나가 되게 해 달라고 여러 차례 간구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17:11, 21, 22, 23).

29절에서는 만일 그리스도의 것이라면 그러한 까닭에(ρα, 아라) 아브라함의 자손이고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라고 하였습니다.

29절의 유업을 이을 자의 원어원형은 κληρονόμος(클레로노모스)인데 상속자, 후계자, 후사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대로의 원어원형은 κατά(카타)인데 대격을 수반하는 경우이므로 “-의 이유로, -때문에, -로 인하여라는 뜻입니다.

그 어떤 신분과 혈통이든 차별이나 구별 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것이 되면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고 약속에 따라 상속자들이 되는 것입니다.

 

 

 

한눈에 보는 갈라디아서 (재개정판)

재개정일 2024년 1월 12일

개 정 일 2020년 9월 7

발 행 일 2020년 5월 12

지 은 이 이서영

출 판 사 퍼플

출판등록 300-2012-167 (2012 9 7)

주 소 서울시 종로구 종로1가 1번지

대표전화 1544-1900

홈페이지 www.kyobobook.co.kr.

ISBN 978-89-24-12227-5

ⓒ 이서영 2024

본 책 내용의 전부 또는 일부를 재사용하려면

반드시 저작권자의 동의를 받으셔야 합니다.

 

 

 

● 한눈에 보는 갈라디아서 (재개정판) 교보문고 주문

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211967213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