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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적개관/갈라디아서

한눈에 보는 갈라디아서 (재개정판) 5장 이성성율(以聖成律)의 자유

by 이서영 목사 2020. 5. 29.

한눈에 보는 갈라디아서 (재개정판) 5장 이성성율(以聖成律)의 자유

 

[제3부] 이성성율(以聖成律)이 주는 자유

 

갈라디아서 5-6장은 자유를 이성성율(以聖成)의 관점에서 볼 수 있습니다. 성령에 의해 율법을 성취하게 됨으로써 자유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갈라디아서 5-6장은 그리스도께서 보내주신 성령(聖靈)의 인도하심에 의해 율법(律法)을 성취(成就)하게 해주시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성령으로 율법을 성취하게 해주는 이성성율의 자유와 그러한 자유를 실제로 행할 수 있는 실천과제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장별 주제
5 이성성율의 자유
6 이성성율의 실행

 

 

5장 이성성율(以聖成律)의 자유 

 

 

5장 개요

 

 

✙✙✙ 5장 구절

 

갈라디아서 5장에서 대표적인 구절을 선정한다면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게 된다는 것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18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5:18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리라

 

 

✙✙✙ 5장 주제

 

갈라디아서 5-6장은 이성성율(以聖成律)이 주는 자유에 대한 관점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것을 통해 율법으로부터 자유를 주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가운데 5장은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자유 가운데 성령(聖靈)의 인도로 율법(律法)을 성취(成就)하게 해주는 이성성율(以聖成律)에 대해 논증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율법으로부터 속량해주셔서 자유롭게 해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내주신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행하게 하셔서 율법 아래에 있지 않게 해주신 것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5장은 이러한 흐름이 있으므로 이와 관련된 주제를 도출해 본다면 이성성율의 자유가 됩니다.

 

 

✙✙✙ 5장 구조

 

갈라디아서 5장은 성령(聖靈)의 인도로 율법(律法)을 성취(成就)하게 해주는 이성성율(以聖成律)의 자유에 관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하므로 5장에서는 율법으로부터 속량해주신 그리스도께서 자유를 주셔서 자유롭게 해주신 것과 그러한 자유를 누릴 수 있도록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게 해주시는 것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것을 할례를 통해 설명하고 있으며 성령의 인도하심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하므로 5장에서는 성령에 대한 구절이 많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구약성경과 신약성경 가운데 사도행전 50, 누가복음 16, 고린도전서 14, 요한계시록 13, 로마서 12, 갈라디아서 12 등의 순서로 나옵니다.

이러한 갈라디아서를 보면 모두 12구절인데 5장에 6구절이나 등장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특히 성령을 따르는 것에 대해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울러 율법을 대표적으로 상징하고 있는 할례에 대한 구절도 갈라디아서에 의외로 많이 나오는 편입니다.

에스겔 14, 창세기 12, 로마서 12, 갈라디아서 12 등의 순서로 나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가운데 갈라디아서 5장은 4구절입니다.

이러한 것을 보면 5장에서는 성령에 대한 개념을 중요하게 여기고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것을 율법의 대표적인 성격을 띠고 있는 할례를 통해 반증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5장은 모두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1-15절의 그리스도께서 주신 자유와 16-26절의 이성성율의 정의입니다.

1-15절은 그리스도께서 자유를 주셨으므로 율법이라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아야 하는 것을 할례를 통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16-26절은 이성성율의 정의에 관한 것인데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율법을 성취하여 율법 아래에 있지 않게 되는 것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5장 개관

 

단락 단락별 개요
1-15 그리스도께서 주신 자유
16-26 이성성율의 정의

 

 

5:1-15 그리스도께서 주신 자유

 

1-15절은 그리스도께서 주신 자유에 관한 내용인데 율법의 대표격인 할례를 예로 들면서 언급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종과 자유에 대한 개념을 대비하면서 언급하고 있는데 그리스도께서 자유롭게 해주셨으므로 더 이상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종의 멍에로는 율법이 있는데 율법을 대표하고 있는 할례를 예로 들어서 언급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미 자유롭게 해주셨으므로 다시는 할례와 같은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는 것입니다.

 

5:1 그리스도께서 자유롭게 해주셨음

 

5:1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5장을 시작하면서 그리스도께서 자유를 주셔서 자유롭게 하셨다는 것에 대해 먼저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것은 5장뿐만 아니라 갈라디아서 전체의 주제에 해당하는 것으로 매우 중요한 주제입니다.

율법으로부터 속량해주신 그리스도께서(3:13, 4:5) 율법으로부터 자유를 주셨다는 것입니다.

1절에 나오는 자유롭게 하려고(ἠλευθέρωσεν, 엘류데로센)λευθερόω(엘류데로오: 자유롭게 하다, 해방하다)의 과거 능동형입니다.

이러한 1절을 보면 그리스도께서 이미 율법에서 벗어나게 해주셔서 자유롭게 해주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하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율법이 주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종의 멍에를 벗겨주시기 위해 다른 복음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자유를 주신 것입니다.

이신칭의(以信稱義)와 이기속율(以基贖律)과 이성성율(以聖成律)입니다.

이러한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자유로 말미암아 율법의 멍에를 벗겨주시고 자유를 주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고 칭()함을 얻게 해주는 이신칭의(以信稱義)가 주는 자유와

그리스도(基督)께서 율법(律法)으로부터 속량(贖良)해주는 이기속율(以基贖律)이 주는 자유와

그리스도께서 보내주신 성령(聖靈)의 인도로 율법(律法)을 성취(成就)하게 해주는 이성성율(以聖成律)이 주는 자유를 주신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그동안 집중적으로 살펴보았는데 1-2장에서는 이신칭의가 주는 자유에 대한 것을, 3-4장에서는 이기속율이 주는 자유에 대한 것을 살펴보았으며 이성성율이 주는 자유는 앞으로 5-6장에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1절은 그리스도께서 이러한 자유를 주셔서 자유롭게 해주셨으므로 다시는 율법 아래에서 율법이라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1절에 나오는 메지의 원어원형은 νέχω(에네코)인데 붙잡히다, 얽매이다, 원한을 품다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얽히다, 말려들다, 올가미에 걸리거나 함정에 빠지다라는 뜻도 있는데 1절에서는 이러한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들이 다른 복음으로 이렇게 하려고 열심을 내고 있는데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걸려들지 않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5:2-4 할례를 받으면 아무 유익이 없게 됨

 

5:2 보라 나 바울은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가 만일 할례를 받으면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아무 유익이 없으리라

5:3 내가 할례를 받는 각 사람에게 다시 증언하노니 그는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 자라

5:4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

 

2-4절에서는 할례를 받게 되면 아무 유익이 없게 되는데 그리스도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게 되어버리는 것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것 가운데 2절을 보면 만일 할례를 받게 되면 그리스도께서 아무 유익이 없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2절의 유익이의 원어원형은 φελέω(오펠레오)인데 유용하다, 유익하다라는 뜻입니다.

2절에서는 οὐδὲν(우덴: 하나도 아닌, 아무도 아닌, 어떤 것도 아닌) 함께 사용되었으므로 그리스도께서 아무 유익이 없게 되어버린다는 뜻으로 아무 쓸데가 없어진다는 것입니다.

이러하므로 4절에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고 하는 자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라고 하였습니다.

4절의 끊어지고의 원어원형은 καταργέω(카타르게오)인데 활동하지 못하게 하다, 못쓰게 만들다, 폐지하다, 무효로 하다, 치워버리다라는 뜻입니다.

할례를 받게 되면 율법에서 속량해주신 그리스도와는 상관이 없어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는 것은 3절에 언급한 것처럼 할례를 받으려고 하는 자는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지는 자가 되기 때문입니다.

3절에 나오는 의무를 가진 자의 원어는 φειλέτης(오페일레테스)인데 빚진 자, 의무를 지고 있는 자, 채무자라는 뜻입니다.

율법 전체를 모두 행하여야 하는 빚을 지고 있는 채무자라는 것인데 그러한 빚을 반드시 갚아야 하는 의무를 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율법 전체를 행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이러하므로 그리스도께서 율법에서 속량해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것을 거부하므로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진 자가 되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가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5:5-6 할례는 효력이 없고 믿음뿐임

 

5:5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따라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

5:6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효력이 없으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

 

5-6절에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가 효력이 없고 믿음뿐이라는 것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율법의 행위인 할례로 의롭다 함을 받게 되는 것이 아니라 믿음뿐이라는 것입니다.

6절의 효력이의 원어원형은 σχύω(이스퀴오)인데 강하다, 능력이 있다, 할 수 있다라는 뜻이며 법률적 영역에서는 유효하다, 효력 있다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든 무할례든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힘을 쓸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러하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힘을 발휘하고 효력이 있으려면 믿음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믿음은 6절과 같이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에베소서 24-8절을 보면 이와 같은 사랑과 믿음에 대한 것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함께 일으켜 함께 하늘에 앉혀주셨습니다.

이러한 것은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우리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어떤 행위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시므로 속량해주시고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역사를 통해 받게 된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으므로 5절처럼 성령으로 믿음에 의해서 의롭게 되는 소망을 기다리게 되는 것입니다.

할례에 대한 것을 보충적으로 살펴본다면 할례를 받아 의로워지려고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5:2-4, 6:12-15).

그러나 예루살렘회의에서 할례의 의무를 이방인들에게 지우지 말아야 한다고 결정하였습니다(15:1, 5, 10-11, 19-20, 28-29).

어떤 사람들이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바리새파 가운데 어떤 믿는 사람들이 이방인에게 할례를 행하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고 명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할례에 의해 구원을 받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러하므로 할례와 같은 짐을 지우지 않는 것이 옳다고 한 것입니다.

 

5:7-12 할례를 전했다면 박해를 받지 않았음

 

5:7 너희가 달음질을 잘 하더니 누가 너희를 막아 진리를 순종하지 못하게 하더냐

5:8 그 권면은 너희를 부르신 이에게서 난 것이 아니니라

5:9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느니라

5:10 나는 너희가 아무 다른 마음을 품지 아니할 줄을 주 안에서 확신하노라 그러나 너희를 요동하게 하는 자는 누구든지 심판을 받으리라

5:11 형제들아 내가 지금까지 할례를 전한다면 어찌하여 지금까지 박해를 받으리요 그리하였으면 십자가의 걸림돌이 제거되었으리니

5:12 너희를 어지럽게 하는 자들은 스스로 베어 버리기를 원하노라

 

7-12절에서는 할례를 전했다면 박해를 받지 않았을 것이라고 하는 것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것 가운데 7절을 보면 달음질을 잘하고 있었는데 누가 막아서 진리를 순종하지 못하게 하느냐고 하였습니다.

7절에 나오는 순종하지의 원어원형은 πειθώ(페이도)인데 확신시키다, 설득하다, 설득을 받다, 확신하다, 신뢰하다, 복종하다라는 뜻이 됩니다.

7절에서는 복종하다라는 뜻이므로 진리에게 복종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만큼 잘 순종하고 잘 달려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경주하지 못하도록 누가 막았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진리에 복종하지 못하도록 하였다는 것입니다.

7절에 나오는 막아의 원어원형은 γκόπτω(엥콮토)인데 방해하다, 막다라는 뜻입니다.

누가 이렇게 방해하였느냐고 하였는데 8절을 보면 그러한 권면은 부르신 이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부르신 이에게서(1:6) 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9절을 보면 그들은 적은 누룩에 해당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한 누룩이 결국은 온 덩이에 퍼지게 한다는 것입니다.

9절의 퍼지느니라의 원어원형은 ζυμόω(쥐모오)인데 발효시키다라는 뜻입니다.

그대로 두면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들이 퍼뜨리는 다른 복음이 전체적으로 확산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10절을 보면 아무 다른 마음을 품지 아니할 줄을 주 안에서 확신한다고 하였습니다.

10절의 마음을 품지의 원어원형은 φρονέω(프로네오)인데 생각하다, 판단하다, -에 마음을 두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거짓 형제들에게 마음을 두지 않고 그들이 퍼뜨리는 다른 복음에도 마음을 두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한다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10절의 확신하노라의 원어원형은 앞서 57절에서 살펴본 순종하지 원어원형인 πειθώ(페이도)와 동일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요동하게 하는 자는 누구든지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10절의 요동하게의 원어원형은 17절에서 살펴본 교란하여의 원어원형과 동일합니다. ταράσσω(타랏소)인데 뒤흔들다, 교란하다, 혼란하게 하다, 선동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받으리라의 원어원형은 βαστάζω(바스타조)인데 운반하다, 지다, 지니다라는 뜻입니다.

심판을 지닌다는 것은 그 누구라 할지라도 심판을 피하지 못하고 그에 해당하는 심판을 반드시 받는다는 것입니다. 요동하게 하는 자는 그러한 심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11절을 보면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 할례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할례를 전한다면 어찌하여 지금까지 박해를 받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였다면 십자가의 걸림돌이 제거되었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거짓 형제들이 원하는 대로 할례를 전했다면 박해를 받지 않았을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신 십자가도 걸림돌이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11절에 나오는 제거되었으리니의 원어원형은 54절의 끊어지고의 원어원형과 동일합니다. καταργέω(카타르게오)인데 활동하지 못하게 하다, 못쓰게 만들다, 폐지하다, 무효로 하다, 치워버리다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걸림돌이의 원어원형은 σκάνδαλον(스칸달론)인데 걸려 넘어지게 하는 장애물, 함정, 죄로 이끄는 유혹이라는 뜻입니다.

다른 복음에 해당하는 할례를 전한다면 십자가를 무효로 하거나 치워버리는 결과가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거짓 형제들의 입장에서 보면 걸림돌이 제거되어서 십자가가 더 이상 장애물이 되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고린도전서 118절과 23-24절을 보면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나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 된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므로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고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나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지혜라고 하였습니다.

로마서 930-33절을 보면 의를 따르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으니 곧 믿음에서 난 의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의의 법을 따라간 이스라엘은 율법에 이르지 못하였는데 그들이 믿음을 의지하지 않고 행위를 의지하였기 때문입니다. 부딪칠 돌에 부딪쳤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것은 걸림돌과 거치는 바위를 시온에 두었는데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할 것이라고 한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로마서 1617절에 너희가 배운 교훈을 거슬러 분쟁을 일으키거나 거치게 하는 자들을 살피고 그들에게서 떠나라고 하였습니다.

이러하므로 갈라디아서 512절을 보면 어지럽게 하는 자들은 스스로 베어버리기를 원한다고 하였습니다.

12절의 어지럽게의 원어원형은 ναστατόω(아나스타토오)인데 선동하다, 어지럽히다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베어 버리기를의 원어원형은 ποκόπτω(아포콥토)인데 잘라버리다, 베어버리다, 잘라내다, 끊어버리다라는 뜻입니다.

할례는 잘라버리는 것을 의미하는데 할례를 전하는 거짓 형제들이 자신의 육체만 할례를 하지 말고 할례를 하듯이 스스로 잘라져서 떨어져나가기를 원한다는 의미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52절의 할례를 받으면3절에 나오는 할례를 받는의 원어원형은 περιτέμνω(페리템노)인데 할례를 행하다, 잘라내다라는 뜻입니다.

이러한 것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베어버려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할례를 해야 할 것은 육체가 아니라 의식적이고 종교적인 율법의 행위를 베어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할례로 얽어매려는 거짓 형제들을 베어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베어 던져버려서 더 이상 상대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5:13-15 자유로 서로 종노릇 함

 

5:13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

5:14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서 이루어졌나니

5:15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

 

13-15절에서는 자유로 서로 종노릇 하라고 하는 것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1절을 시작하면서 그리스도께서 자유를 주셔서 자유롭게 해주셨으므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13절에서는 종노릇 하라고 하였습니다.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게 되었으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히려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 하라는 것입니다.

13절의 기회를의 원어원형은 φορμή(아포르메)인데 구실, 기회, 출발점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육체의(σαρκί, 사르키)σάρξ(사르크스: 육체)의 여격이므로 육체에게라는 뜻입니다.

이러하므로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라고 한 것은 자유를 육체에게 방종하라고 주는 기회나 구실이나 출발점으로 삼지 말도록 하라는 의미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자유가 있으나 자발적으로 그 자유로 종노릇 해야 하는 경우도 있는데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종노릇은 율법의 종이 되어 율법 아래에서 율법에게 종노릇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율법에서 벗어나게 된 자유로 사랑으로 종노릇 하여 율법을 성취하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종노릇 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실제로는 주인노릇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을 14절에서 볼 수 있습니다. 사랑으로 율법이 성취된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하라고(19:18) 하신 한 말씀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것은 로마서 138절에서도 볼 수 있고 1310절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는 것이 되고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 하게 되면 율법의 종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율법의 주인노릇 하게 되어 율법을 완성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하지 않고 15절처럼 서로 물어뜯고 잡아먹으면 서로 멸망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하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서로 사랑한다는 것은 실제로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서로 물고 먹는 경우가 더 많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여야 이러한 자유를 사용해서 서로 종노릇 할 수 있겠습니까?

인간적인 율법의 행위로는 이미 어렵다는 결론이 났습니다. 해결책은 이기속율로 말미암은 이성성율입니다.

율법에서 속량해주신 그리스도께서 보내주신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게 되면 서로 사랑할 수가 있게 되고 율법이 성취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성성율에 대한 것을 516-26절에 언급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5:16-26 이성성율의 정의

 

16-26절에서는 이성성율(以聖成律)의 정의에 대한 것을 언급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갈라디아서에는 세 가지 유형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자유를 볼 수 있습니다.

이신칭의(以信稱義)와 이기속율(以基贖律)과 이성성율(以聖成律)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고 칭()함을 얻게 해주는 이신칭의(以信稱義)의 자유와

그리스도(基督)께서 율법(律法)으로부터 속량(贖良)해주는 이기속율(以基贖律)의 자유와

그리스도께서 보내주신 성령(聖靈)의 인도로 율법(律法)을 성취(成就)하게 해주는 이성성율(以聖成律)의 자유입니다.

16-26절에서는 이러한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자유 가운데 이성성율의 자유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성령을 따라 행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않게 되고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에 있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하므로 성령으로 산다면 성령으로 행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러한 예를 들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육체의 일과 성령의 열매를 통해 보여주고 있습니다.

 

5:16-18 이성성율의 정의

 

5:16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5:17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5:18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리라

 

16-18절에서는 이성성율(以聖成律)의 정의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으셔서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해주시고(3:13) 아들께서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해주셨습니다(4:5). 그리하여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해주셨습니다(3:14).

이러한 것을 보면 그리스도의 속량으로 말미암아 율법의 저주와 율법 아래에서 벗어나게 되어 율법으로부터 자유하게 되었고 약속하신 성령을 받게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16절처럼 성령에 따라 행하게 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않게 되고 18절처럼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행하게 되면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령(聖靈)의 인도로 율법(律法)을 성취(成就)하게 되는 것을 이성성율(以聖成律)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이성성율은 우리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삼위일체의 하나님의 역사와 은혜로 말미암아 이루어지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보내주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께서(4:4, 12:49) 약속하신 성령을(3:14, 2:33)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보내주셔서(15:26, 14:26) 가능하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인간적인 율법의 행위로는 율법을 이룰 수 없으나 성령에 의해서 율법을 성취할 수 있게 되었으므로 이성성율을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자유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들은 구약성경에 이미 약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에스겔 36 26-27절이 그러합니다.

36:26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36:27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내 영인 성령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할 수 있게 해주겠으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하라고 하셨습니다.

이러한 일이 때가 차자 하나님께서 아들을 통해 약속하신 대로 성령을 보내주셔서 실제로 이루어지도록 해주신 것입니다.

이신칭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게 해주고 이기속율은 그리스도께서 율법으로부터 속량해주고 이성성율은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율법을 실제로 성취해 나가게 해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이성성율이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자유라고 하여도 현세에서는 아무도 완전하게 이룰 수 없습니다.

죽는 순간까지 죄를 짓지 않고 율법을 온전히 지킬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있을 수 없습니다. 모두가 죄인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고 인정해주시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고 칭함을 얻게 되어(이신칭의) 천국에 들어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율법으로부터 속량해주셔서 율법 아래에 있지 않도록 해주셔서(이기속율) 율법을 성취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신칭의와 이기속율을 바탕으로 성령(聖靈)의 인도로 율법(律法)을 성취(成就)하게 해주는 이성성율(以聖成律)을 이루어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비록 이 땅에서는 완전한 이성성율을 이룰 수 없어도 최선을 다해 이루어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힘써도 역부족인 것은 사실입니다. 천국이 아닌 이상 죄를 짓지 않을 수 없고 율법을 완벽하게 행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러하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고 칭해주는 이신칭의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그렇게 되어야 비록 이성성율을 온전히 이루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한 사람도 빠짐없이 모두가 천국에 들어가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모두가 천국에 들어가게 되어 있는데 굳이 왜 이성성율을 이루어나가야 합니까?

이러한 것이 지상과제요 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성성율은 이신칭의와 이기속율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된 이후의 삶에 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복음이 그림의 떡이 아니라 말 그대로 복음이 될 수 있으려면 실제로 우리의 현실 가운데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모든 것을 아시고(요일 3:20, 16:30, 21;17) 우리의 모든 말과 행동과 마음과 생각을 아시고(139:2, 5:22)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해주시는(12:14) 하나님께서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아 주시기(22:12, 고전 3:8, 14, 11:6) 때문입니다.

순종에 대한 복과 불순종에 대한 화가 있기(28:1-68) 때문입니다. 우리의 생사화복이 달려 있고(30:11-20) 우리의 행복이 달려 있기(10:13) 때문입니다.

그 무엇보다 사람의 본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22:37-40)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키는 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기(12:13)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리스도인답게 사느냐 그렇지 않느냐가 걸린 중요한 과제이기 때문입니다. 삶 속에서 전도가 되고 우리를 통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느냐도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말씀이 근본이기에 말씀에 순종해서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게 되면 근본적으로 좋아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모든 관계가 좋아지게 되는데 대신(하나님)관계와 대인(이웃)관계와 대아(자신)관계와 대환(환경)관계가 좋아집니다.

그런데 이신칭의와 이기속율에는 우리가 참여할 수 있는 부분은 거의 없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신칭의(以信稱義)만 보더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고 칭함을 얻게 되는데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주셔서 속죄해주시므로 이루어지게 되었는데 이러한 것을 우리가 할 수 있습니까?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믿게 된 것도 알고 보면 우리가 믿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셔서 선물로 주셔서 때가 되자 믿게 된 것입니다.

이러하므로 이신칭의에 있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범사에 감사와 찬송과 영광을 올려드리는 일입니다.

그리고 복음을 듣고 믿게 되었으므로 다른 사람에게도 복음을 전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이기속율(以基贖律)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속량해주셔서 율법 아래에 있지 않게 해주셨는데 우리가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할 수 없습니다.

이 또한 이신칭의와 마찬가지입니다. 속량으로 말미암아 율법에서 벗어나게 해주시고 아브라함의 복을 받게 해주시고 성령을 받게 해주시고 양자로 삼아주신 것에 대해 범사에 감사와 찬양과 영광을 올려드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성성율(以聖成律)은 다릅니다. 속량해주시고 성령을 보내주시는 일에 우리가 참여할 일이 없는 것은 이신칭의와 이기속율과 동일합니다.

그러나 약속하시고 보내주신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행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행하셔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렇게 행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이 우리의 지상 최대의 과제가 되고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의 꽃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의 진수는 바로 이러한 이성성율이 성취되는 여부와 성취도에 의해 결판이 난다고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율법을 행해야 구원을 받을 수 있게 된다면 아무도 구원을 받지 못하게 됩니다. 율법을 하나도 남김없이 지킨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친히 저주를 받으셔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주심으로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해주셔서 구원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연약해서 율법을 이룰 수 없으나 성령으로 말미암아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게 해주시고 율법을 성취해 나가게 해주신 것입니다.

이러한 이성성율에 관한 것을 로마서 81-4절에 명확하게 잘 정리해주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8: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8: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8:3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8:4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우리의 남은 과제가 바로 이것입니다. 이신칭의와 이기속율을 주신 것에 대해 감사드리는 가운데 힘써야 할 부분이 바로 이러한 이성성율입니다.

이렇게 해야 하는 이유는 앞서 살펴본 왜 이성성율을 이루어나가야 하는가에 대한 것과 같습니다.

이러한 이성성율이 이루어지게 되면 모든 것이 좋아지게 된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아도 몸이 잘 따라주지 않는 것이 현실입니다.

이러하므로 우리의 행위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 된 것에 머물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속량해주셔서 보내주신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행하므로 실제로 의로워지는 역사가 크게 일어나야 하겠습니다.

물론 흠도 없고 티도 없이 완벽하게 성취하게 되는 것은 천국에서 이루어지게 됩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동안 완전하지는 못하나 지상천국을 이루어나갈 수 있고 사명을 감당해 나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령이 임하시게 되면 나타나게 되는 현상은 무엇입니까?

가장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납니다. 거듭나게 되고(3:5-8, 3:5)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게 되고(고전 12:3)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게 됩니다(8:14-16).

그리고 사람의 본분을 다하게 되는데 하나님을 경외하게 되고(11:2) 그의 말씀에 순종하게(36:27, 5:16, 18) 됩니다.

이러한 것은 구원과 사람의 본분에 해당하는 것이므로 성령 충만한 모습의 가장 큰 특징이고 가장 중요한 능력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 될 수 있고(15:26, 1:8) 전도를 할 수 있게 되고(고전 2:4) 말씀을 깨닫고 가르칠 수 있게 되고(12:12, 14:26) 말씀을 전할 수 있게 됩니다(4:31).

지혜가 임해서 일을 잘하게 되고(35:31, 5:14, 11:2) 능력이 있게 됩니다(4:6, 고전 12:10).

열매를 맺게 되고(5:22-23) 여러 가지 은사도 받게 됩니다(고전 12:4-11). 가난한 자를 돕게 되기도(2:43-45, 4:32-37) 합니다.

거룩하게 되고(벧전 1:2) 악한 영을 쫓아내게 되고(12:28, 10:38) 선한 일을 하게 됩니다(10:38).

이외에도 열거하지 않은 것이 무수히 많이 있습니다. 이러한 것을 보면 한 마디로 말씀드리면 성령에 의하지 아니하고는 역사가 일어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야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이 속량해주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루어지게 되었는데 그러하신 그리스도께서 보내주신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야만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것이 성취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모든 것을 이루어놓으셨기에(19:30, 21:6) 오늘날에는 이루어놓으신 것을 성령에 의하여 실제로 성취해 나가는 일이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하므로 우리는 성령으로 충만해져야 합니다. 그리하면 모든 분야에서 모든 것이 좋아지게 되는 것입니다. 인격에 변화가 있게 되어 성품이 좋아지게 되고 거룩하게 됩니다.

그 무엇보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서로 사랑하게 되고 예배자로 살게 되고 영혼을 구원하고 제자를 삼는 사명도 잘 감당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든 일들은 인간적인 힘으로는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속량해주셨고 성령을 보내주셔서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게 해주신 것입니다.

이러하므로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고(5:18) 한 것입니다. 성령을 충만하게 받을수록 충만하게 성취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충만하게 받는 비결은 간구하면 받게 되고(11:13) 회개할 때 받게 되고(2:38) 말씀에 순종할 때 받게 되고(5:32) 안수할 때 받게(8:17, 9:17, 19:6) 됩니다.

앞에서 살펴본 513-15절을 보면 그리스도의 속량으로 얻게 된 자유로 서로 사랑으로 종노릇 하면 되는데(5:13) 서로 물고 먹으면 서로 멸망하게 될 수도 있다는(5:15)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서로 사랑하기보다는 서로 다투고 서로 잡아먹으려고 하다가 서로 멸망하는 경우가 더 많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여야 육체를 따라 살다가 서로 멸망하지 않고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 할 수 있겠습니까?

율법의 완성인 사랑에 대해 언급한 이후에 그러한 사랑을 성취할 수 있는 비결을 16-18절에 언급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성령(聖靈)의 인도로 율법(律法)을 성취(成就)하게 되는 이성성율(以聖成律)을 말해주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고 성령은 율법을 성취시켜주시므로 성령에 따라 행하도록 해주셔서 육체의 욕심이나(5:16) 육체의 소욕이나(5:17) 육체의 일이(5:19) 아니라 성령의 열매인 사랑을 맺도록(5:22) 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16절을 보면 성령을 따라 행하라고 하였고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한다고 하였습니다.

16절의 성령을 따라(πνεμ́ατι, 프뉴마티)πνεμα(프뉴마: 성령)여격이므로 성령으로, 성령에 의하여라는 뜻이 됩니다.

그리고 행하라의 원어원형은 περιπατέω(페리파테오)인데 돌아다니다, 걷다, 행하다라는 뜻입니다.

성령을 따라 행하라는 것은 성령으로 행하라는 것인데 육신에 의해서가(고전 3:3) 아니라 성령에 의하여 행하라는 것입니다.

16절의 욕심을의 원어원형은 πιθυμία(에피뒤미아)인데 욕망, 갈망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루지의 원어원형은 τελέω(텔레오)인데 끝내다, 끝나다, 완성하다, 성취하다, 수행하다라는 뜻입니다.

16절의 아니하리라의 원어원형은 ομή(우 메)인데 결코 아니다, 확실히 조금도 -않다라는 뜻입니다.

이러한 것을 보면 성령으로 행하면 육체의 욕망이 결코 성취되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85절을 보면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생각하고 성령을 따르는 자는 성령의 일을 생각한다고 하였습니다.

이러하므로 성령으로 행하는 자는 육체의 일이 이루어지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17a절을 보면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른다고 하였습니다.

17절의 소욕은의 원어원형은 πιθυμέω(에피뒤메오)인데 욕구하다, 갈망하다, 원하다, 탐내다라는 뜻입니다.

육체가 욕망하는 것은 성령께서 거스리시고 성령께서는 육체를 거스리신다는 것입니다.

17b절을 보면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들을 하지 못하게 하려고 하였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17절의 대적함으로의 원어원형은 ντίκειμαι(안티케이마이)인데 반대하다, 대적하다라는 뜻입니다.

육체의 욕망과 성령께서 서로 대적함으로 우리가 원하는 것들을 하지 못하도록 하려고 하였다는 것입니다.

성령을 따라 행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게 않게 된다고 하고서는 왜 서로 대적함으로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도록 하였겠습니까?

우리가 원하는 대로 했다가는 서로 간에 많은 혼선과 충돌이 생길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마음을 먹은 대로 행하여서 모든 것이 이루어지게 된다면 부작용이 클 것입니다.

이러하므로 서로 반대편에 서도록 하게 해주셔서 우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된 것이 오히려 감사한 일입니다.

우리에게 가시와 같은 것이 있고 우리가 마음을 먹은 대로 할 수도 없고 뜻대로 되지도 않게 되므로 오히려 겸손하게 성령을 더욱 더 의지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도록 우리가 원하는 육체의 욕망을 이루지 못하도록 해주셨다는 의미도 있을 수 있고 다른 의미도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성령을 따라 행하기만 하면 무조건 육체의 욕망을 이루지 않게 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렇게 되면 될수록 자신이 마치 주인인 것으로 착각하고 주인 행세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성령을 꼬박꼬박 말을 잘 듣는 종처럼 여기고 자신이 원하는 대로 따라 해야 하는 종처럼 대하게 될 것입니다.

이와 같은 우려가 있으므로 긴장시키기 위하여 우리가 원하는 것들을 하지 못하게 하였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17절 이후에 나오는 18절을 보면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리라고 하였습니다.

16절에 이어 성령을 따르는 것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데 이렇게 따를 17절의 주의사항을 잘 지켜서 그러한 자세로 성령을 따라야 할 것입니다.

18절에 나오는 성령의16절의 성령을 따라(πνεμ́ατι, 프뉴마티)와 동일합니다. πνεμα(프뉴마: 성령)의 여격이므로 성령으로, 성령에 의하여라는 뜻이 됩니다.

그리고 인도하시는(γεσθε, 아게스데)γω(아고: 인도하다, 데리고 오다, 이끌다)의 현재 수동태이므로 인도받다, 인도받게 되다라는 뜻이 됩니다.

만일 성령에 의하여 인도받게 된다면 율법 아래에 있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해주시고(3:13)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해주신 것이(4:5) 성취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할 수 없는 것을 그리스도께서 속량해주시고 보내주신 성령의 인도하심에 의하여 율법 아래에 있지 않게 되고 오히려 율법을 성취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하므로 성령(聖靈)의 인도로 율법(律法)을 성취(成就)하게 되는 것을 이성성율(以聖成律)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성성율(以聖成律)이 이와 같으므로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자유 가운데 하나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이 탁상공론(卓上空論)에 그치거나 화중지병(畵中之餠)으로 존재하지 않고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자유가 우리의 현실 가운데 실제로 성취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5:19-21 육체의 일

 

5:19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5:20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5:21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19-21절에서는 육체의 일에 대한 것을 언급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앞서 17절에 성령께서는 육체를 거스리신다고 하였습니다. 성령께서 육체의 욕망을 대적하신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육체의 일들은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바가 아니므로 이러한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육체의 일들에 대한 여러 가지 유형을 19-21절에 제시해주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원어원형의 뜻을 살펴보겠습니다.

19절의 음행(πορνεία, 포르네이아)매음, 간음이라는 뜻입니다. 음탕한 행위를 의미합니다.

더러운 것(καθαρσία, 아카다르시아)불결이라는 뜻입니다. 육체적 도덕적 불결을 의미합니다.

호색(σέλγεια, 아셀게이아)방탕, 방종, 호색이라는 뜻입니다.

20절의 우상 숭배(εδωλολατρέια, 에이돌롤라트레이아)우상 숭배 뜻합니다.

주술(φαρμακεία, 파르마케이아)마술, 마법, 요술이라는 뜻입니다.

원수 맺는 것(χθρα, 에크드라)증오, 적의, 적대라는 뜻입니다.

분쟁(ρις, 에리스)다툼, 분쟁, 불화라는 뜻입니다.

시기(ζηλός, 젤로스)는 좋은 의미로는 열심, 열정이라는 뜻이고 나쁜 의미로는 경쟁, 다툼, 논쟁, 시기라는 뜻입니다.

분냄(θυμός, 뒤모스)격정, 분노, 진노, 격노라는 뜻입니다.

당 짓는 것(ριθεία, 에리데이아)비열한 본성, 이기주의, 이기심이라는 뜻입니다.

분열함(διχοστασία, 디코스타시아)불화, 분열, 분쟁이라는 뜻입니다.

이단(αρεσις, 하이레시스)종파, 학파, 당파라는 뜻입니다.

21절의 투기(φθόνος, 프도노스)질투라는 뜻입니다.

술 취함(μέθη, 메데)술 취함이라는 뜻입니다.

방탕함(κμος, 코모스)술잔치, 방탕이라는 뜻입니다.

19절의 호색(방탕)은 음란과 연결되어 나타나게 되는 방탕을 의미하고(13:13, 고후 12:21, 5:19) 위의 방탕함(방탕)은 술 취함과 연결되어 나타나게 되는 방탕을 의미하는 것으로(13:13, 5:21, 벧전 4:3) 볼 수 있을 것입니다.

21절을 보면 그와 같은 것들이라고 하였습니다. 구체적으로 밝혀주지 않았으나 그러한 것들이 더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전에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였는데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21절의 전에 경계한 것의 원어원형은 προέπω(프로에포)인데 앞서 말하다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경계하노니의 원어원형은 προλέγω(프롤레고)인데 미리 말하다, 예언하다라는 뜻입니다.

하는의 원어원형은 πράσσω(프랏소)인데 성취하다, 행하다라는 뜻입니다.

이러한 것을 보면 앞서 말하였듯이 미리 말하는데 그러한 일을 행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지 못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5:22-23 성령의 열매

 

5: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5:23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22-23절에서는 성령의 열매에 대한 것을 언급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성령의 은사는 주로 일과 관련된 것이라면 성령의 열매는 주로 관계적인 측면에서 성품과 관련된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하므로 성령께서 충만하게 임하게 되면 일을 잘하게 되고 성품이 좋아져서 사이가 좋아지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충만하게 임하실수록 이러한 성령의 열매는 더 풍성하게 열리게 됩니다.

하나님이신 성령께서 충만하게 임하게 되시므로 하나님의 성품이 더 충만하게 나타나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성령의 열매는 육체의 일들과는 상반되는 것입니다. 17절에서 육체의 욕망과 성령께서 서로 거스르고 서로 대적한다고 하였는데 그러한 것을 실감하게 됩니다.

22절의 오직(δὲ, )그러나, 그러나 오히려라는 뜻입니다. 육체의 일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게 되어도 그러나 성령의 열매는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열매의 유형을 각각 보면 모두 단수이고 22절의 열매(καρπὸς, 칼포스: 열매)를 보면 단수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열매가 단수라는 것은 여러 가지 유형의 열매가 있으나 별개가 아니라 마치 포도송이처럼 한 송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한 성령께서 행하셔서 여러 가지 은사를 각 사람에게 나누어주시는 것처럼(고전 12:11) 한 성령께서 여러 가지 열매를 맺게 해주신다는 의미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가 된다는 의미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열매를 주신 이유는 성령의 열매가 접착제와 같은 역할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과 사람 사이가 하나가 되고 사람 사이에도 상호 간에 하나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나가 되게 중보기도하신 것을(17:11, 21, 22, 23) 볼 수 있으며 성령께서도 하나가 되게 하신 것을(4:3) 볼 수 있습니다.

천국은 어떤 곳입니까? 천국은 함께 하는 곳입니다. 그러나 육체의 일들은 분열하고 다툽니다. 그러한 곳이 천국이 될 수 있겠습니까? 될 수 없습니다.

사랑하면 나누어지겠습니까? 사랑하게 되면 다투지 않고 분열하지 않고 하나가 됩니다. 다른 열매도 마찬가지입니다. 열매가 풍성할수록 사이가 점점 좋아지게 하고 점점 하나가 되도록 만들어줍니다.

이러한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를 22-23절에 제시해주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원어원형의 뜻을 살펴보겠습니다.

22절의 사랑(γάπη, 아가페)사랑이라는 뜻입니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고(5:14, 13:8, 10)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므로(22:37-40) 가장 기본적이고 가장 중요한 열매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므로(요일 4:8, 16) 그러하신 하나님이신 성령께서 충만하게 임하시면 이러한 사랑의 열매가 풍성하게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희락(χαρά, 카라)기쁨, 즐거움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것이라기보다는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희락과 평강입니다(14:17).

슬프기만 하고 기쁘지 않으면 살 맛이 나지 않고 일할 맛이 나지 않게 됩니다. 이러하므로 기쁨은 삶과 사역의 필수요소인 것입니다.

성령께서 충만하게 임하시면 성령의 기쁨으로(살전 1:6) 잘 감당해나갈 수 있게 됩니다.

화평(ερήνη, 에이레네)평화, 복지, 번영이라는 뜻입니다.

히브리어 שָׁלוֹם(샬롬: 평화, 복지, 번영)의 역어로 단순히 좁은 의미의 평화만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안식, 안전, 건강, 안녕, 평온, 복지, 번영 등을 포함하는 의식주와 활동에 필요한 다양한 조건들이 잘 갖추어진 평강의 상태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하므로 문안 인사할 때 이러한 평강을 기원해주고 있습니다(1:3, 6:16). 평강을 꼭 받으라는 것이고 또한 꼭 받아야 한다는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충만하게 임하시게 되면 이러한 평강이 충만하게 임하게 되어 평강해지는 것입니다.

오래 참음(μακροθυμία, 마크로뒤미아)인내, 오래 참음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오래 참아주셔서 구원을 받게 되듯이(벧후 3:15) 오래 참아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오래 참아주지 않고 즉각적으로 맞대응하게 된다면 살아남을 사람이 몇 명이나 되겠습니까?

이러하므로 오래 참아주셔서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에 이르기를 원하시는(벧후 3:9) 것입니다

상호 간의 관계뿐만 아니라 사명도 오래 참을 수 있어야 잘 감당해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충만하게 임하시게 되면 이렇게 오래 참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자비(χρηστότης, 크레스토테스)친절함, 우정, 너그러움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자비를 베풀어주셔서 그 은혜로 우리가 구원을 받게 되고(3:4-5) 천국에서 영생복락을 누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러하므로 자비를 베풀어주지 않으시고 인정사정 봐주지 않으셨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사람 사이에도 이러한 자비가 있어야 합니다. 성령으로 충만하여 그렇게 할 때 좋은 사이가 될 수 있고 하나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양선(γαθωσύνη, 아가도쉬네)선함, 착함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악한 영들처럼 악하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악이 판을 치지 않겠습니까? 천국은 이루어지지 않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선하시고 사람들을 선하게 해주시므로 선하게 살아가는 천국이 이루어지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도 안심하고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하신 성령께서 충만하게 임하실수록 더욱 선하게 되고 선을 더 잘 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충성(πίστις, 피스티스)믿음, 신뢰, 확신, 신실성, 신뢰성이라는 뜻입니다.

성품과 관련된 측면에서 보면 믿음이라는 의미보다는 신실성이라는 의미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일하실 때 건성으로 하지 않으십니다. 그야말로 신실하십니다. 언약을 지키십니다. 언약하신 대로 아들을 주시고 성령을 보내주셨습니다. 아들은 아버지께 죽기까지 충성하셨습니다.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신(1:5, 3:14) 주님께서 충성되이 여겨 직분을 맡겨주셨습니다(딤전 1:12).

이러하므로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므로(고전 4:2)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과(24:45) 착하고 충성된 종처럼(25:21, 23) 죽도록 충성하여야 하는(2:10) 것입니다.

이러한 충성도 우리에 의해서가 아니라 성령께서 충만하게 임하시게 될 때 그러한 충성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언약을 신실하게 지키신다는 관점에서 본다면 하나님께서 끝까지 언약을 지켜주시므로 한 사람도 잃지 않고 모두 구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도 그러하신 하나님이신 성령께서 충만하게 임하시게 되면 약속을 쉽게 어기지 않고 약속을 신실하게 지킬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믿을 만한 사람이 됩니다. 서로 간에 믿지 못하게 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런데 서로 믿게 되므로 믿고 거래하고 믿고 함께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23절의 온유(πραύτης, 프라위테스)온유, 온화, 겸손, 동정심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온유하지 못하시고 걸핏하면 성을 내시고 분노하신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불안해서 어떻게 살 수 있겠습니까? 살아남을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우리도 그렇게 하면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렇게 된다면 일을 그르치게 되고 사람을 잃게 되고 말 것입니다.

이러하므로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면 서로 온유한 마음으로 대하게 되고 일을 할 때도 온유한 가운데 일하게 되는 것입니다.

절제(γκράτεια, 엥크라테이아)자제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무절제하시고 무질서의 하나님이십니까? 그렇지 않다고 하였습니다(고전 14:33).

사람도 성욕이나 돈이나 권력 등을 절제하지 못하게 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선한 곳에 사용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이러하므로 심지어 아무리 좋은 일이고 능력이라고 하더라도 관계가 깨어지지 않도록 주위 사람들과 교회의 덕을 위해 절제하고 질서 있게 하라고(15:2, 고전 10:23-24, 33, 14:12, 14:26-32, 40) 한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제어하고 자기를 조절할 수 있는 능력은 성령께서 충만하게 임하실 때 더 충만하게 임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더 잘 절제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성령의 열매를 언급하고 난 이후에 23b절에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23절에 나오는 금지할(κατὰ, 카타)κατά(카타)의 속격이므로 여러 가지 뜻 가운데 “-에 대항하여, -에 대적하여라는 뜻이 됩니다.

성령의 열매를 대항할 법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므로 죄와 사망의 법이(8:1) 대항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해주시고(3:13)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해주신(4:4-5) 것을 통해 자유롭게 해주셨으므로(5:1) 더 이상 대항하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속량해주셔서 보내주신 성령(聖靈)의 인도하심으로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해주셔서 율법(律法)을 성취(成就)시켜주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5:24-26 성령으로 행함

 

5:24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5:25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5:26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노엽게 하거나 서로 투기하지 말지니라

 

24-26절에서는 성령으로 행함에 대한 것을 언급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5장을 시작하면서 1절에 그리스도께서 자유를 주셔서 자유롭게 해주셨으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13절을 보면 이러한 자유로 육체의 기회로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 하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서로 사랑으로 종노릇 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만일 서로 물고 먹게 되면 피차 멸망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멸망하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한 것입니다(15).

그렇다면 어떻게 하여야 서로 사랑으로 종노릇 할 수 있겠습니까? 성령으로 행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않게 되고(16)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으면 율법 아래에 있지 않게 됩니다(18).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지 않게 되면 서로 사랑으로 종노릇 하지 않고 원수를 맺게 되고 분쟁하게 되고 시기하게 되고 분내게 되고 당을 짓게 되고 분열하게 됩니다(20).

하지만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게 되면 서로 종노릇 하게 됩니다. 육체의 일들을 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사랑과 같은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되어(22-23) 서로 종노릇 하여 사이가 나빠지는 것이 아니라 점점 좋아지게 되고 그리하여 점점 하나가 되어갑니다.

이러한 것이 언급된 이후에 나오는 24절을 보면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하였습니다.

24절의 정욕과(παθήμασιν, 파데마신)는 복수이므로 고난들과, 정욕들과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탐심을(πιθυμίαις, 에피뒤미아이스)은 복수이므로 욕망들을, 갈망들을이라는 뜻입니다. 16절의 욕심을과 동일한 어원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 속하게 되었으므로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죽었기에 육체도 죽고 그 육체가 죽을 때 그 육체와 함께 정욕들과 욕망들도 죽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죽게 되었으므로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를 수 있게 되었고 그리하여 성령의 열매를 맺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죽지 않고 그대로 팔팔하게 살아 있다면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지 못해 성령의 열매를 맺지 못하게 되고 오히려 육체가 가져다주는 육체의 일들을 맺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이러한 육체를 십자가에 못을 박았고 그 육체에 깃든 정욕들과 욕망들도 십자가에 못을 박은 사람들인 것입니다.

로마서 74-6절을 보면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육신에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역사해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이렇게 얽매였던 것에서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기에 율법 조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하고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겨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영의 새로운 조문은 로마서 81절에 언급하고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새로운 법 아래에서는 새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로마서 810-13절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몸은 죄로 말미암아 죽은 것이나 영은 의로 말미암아 살아 있다고 하였습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죽을 몸도 살려주신다고 하였습니다.

이러하므로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게 되나 성령으로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보면 갈라디아서 524-25절에 언급한 것과 일맥상통(一脈相通)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24절에 육체와 함께 정욕들과 욕망들도 함께 십자가에 못을 박았다고 하였으므로 그러한 것이 죽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25절에 만일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하라고 하였으므로 성령으로 행하여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25절의 행할지니의 원어원형은 στοιχέω(스토이케오)인데 계열이나 계층에 속하다, 열을 지어 나가다, 줄에 들어서다라는 뜻입니다.

성령으로 행한다는 것은 성령께서 계시는 줄에 선다는 것인데 성령께서 이끄시는 대로 따라가면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령으로 행하게 되면 그리스도께서 속량해주셔서 보내주신 성령(聖靈)의 인도하심으로 율법(律法)을 성취(成就)하게 해주는 이성성율(以聖成律)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성령으로 행하지 않고 계속해서 육신대로 살아간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15절처럼 서로 물고 먹다가 피차 멸망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26절처럼 헛된 영광을 구하다가 서로 노엽게 하거나 서로 투기하게 될 것입니다.

26절의 헛된 영광을의 원어원형은 κενόδοξος(케노독소스)인데 자만하는, 허영심이 강한, 자랑하는, 허풍떠는, 잘난 체하는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구하여의 원어원형은 γίνομαι(기노마이)인데 생겨나다, 일어나다, -이 되다, 만들어지다, 행해지다라는 뜻입니다.

노엽게 하거나의 원어원형은 προκαλέομαι(프로칼레오마이)인데 도전하다, 격동시키다, 성나게 하다라는 뜻입니다.

투기하지의 원어원형은 φθονέω(프도네오)인데 질투하다라는 뜻입니다.

복수이므로 자만하는 자들이 되거나 허영심이 강한 자들이 되거나 잘난 체하는 자들이 되어 서로 화나게 하거나 서로 질투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성령의 열매를 맺는 것도 아니고 성령으로 사는 것도 아니라 육체의 일을 맺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은 서로 사랑으로 종노릇 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투고 분열하다가 콩가루가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상호 간의 사이가 점점 더 좋아지는 것이 아니라 갈수록 사이가 나빠지게 되고 멸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는 것을 원하십니까? 아무도 그렇게 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도 원하지 않으므로 13절에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 하라고 하였고 15절에는 조심하라고 하였습니다.

16절에는 성령을 따라 행하여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않게 하였고 18절에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율법 아래에 있지 않게 하였고 22절에서는 성령의 열매인 사랑을 맺도록 해주었습니다.

25절에서는 성령으로 살면 성령으로 행하라고 하였고 26절에서는 서로 노엽게 하거나 서로 투기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것을 요약하면 무엇입니까?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성령으로 행하라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육체의 욕망을 이루지 않게 되고 율법 아래에 있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육체의 일들을 맺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된다는 것입니다.

디모데후서 114절에서도 이와 같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네게 부탁한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고 한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한눈에 보는 갈라디아서 (재개정판)

재개정일 2024년 1월 12일

개 정 일 2020년 9월 7

발 행 일 2020년 5월 12

지 은 이 이서영

출 판 사 퍼플

출판등록 300-2012-167 (2012 9 7)

주 소 서울시 종로구 종로1가 1번지

대표전화 1544-1900

홈페이지 www.kyobobook.co.kr.

ISBN 978-89-24-12227-5

ⓒ 이서영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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