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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적자료/성경적교회교육

[성경적 교회교육] 제4부 그리스도 중심의 성경적 교회교육의 목표

by 이서영 목사 2023. 12. 14.

[성경적 교회교육] 제4부 그리스도 중심의 성경적 교회교육의 목표

 

(※ 논문 원본의 원어 폰트가 깨지고 각주도 올리지 못하게 된 것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 중심의 성경적 교회교육의 목표를 골로새서 128절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를(o}n;) 전파하여 얻고자 한 것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다. 이때 함이니히나(i{na)인데 목적을 나타내는 접속사이므로 교회교육의 목표를 나타낸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교회교육을 함에 있어 그러한 목표를 가지고 교육해야 한다는 것이다.

리로이 아임스(Leroy Eims)는 그리스도인의 성장에 대해 목표가 있어야 함을 강조하면서 각 단계별 성장 프로그램이 필요하고 각 단계마다 도달해야 할 목표가 있어야 한다고 촉구하였다. 옥한흠은 많이 아는 것을 목적으로 할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닮는데 목표를 두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그는 성경을 제대로, 그야말로 성경적으로 가르치면 절대 머리에 뿔이 나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 가는 데에 훈련의 포커스를 맞추면, 삶이 변한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올바른 교회교육의 목표를 가지고 교회교육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교회교육을 함에 있어 세 번씩이나 각 사람(pavnta a[nqrwpon)을 강조하고 있다. 이것은 구원의 개별성이란 특징이 있기 때문에 각각 개개인(個個人)별로 적용이 되어야 그리스도 중심의 성경적인 교회교육이 되기 때문이다. 옥한흠은 하나님께서 제자훈련의 모델을 주셨다고 하면서 각 사람을 가르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는 것인데 한 사람을 완전한 자로 세우려는 비전을 품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골로새 교회를 예로 들었는데 바울은 위대한 선교사로 전 세계를 복음화하겠다는 원대한 꿈을 가진 사람이었지만 골로새를 복음화하는 것도 아니고, 3,000명 모이는 교회를 세우는 것도 아니었다는 것을 언급한 다음에 그의 목회 철학은 한 사람을 완전한 자로 세우는 것이었다. 이것이 바울이 보여 준 목회의 원형이라는 것을 밝혀주었다.

그러므로 올바른 목표를 가지고 그리스도 중심의 성경적인 교회교육을 해야 할 것이다. 맥스 앤더스(Max Anders)는 영적인 체험의 목표는 유행을 따라가거나 새로운 종교적 흐름을 따라잡는 것이 아니라면서 그 목표는 영적 성숙이라고 언급하고 바울은 성도들에게 이 간단한 진리를 깨우쳐줌으로써 우리는 성숙함에서 벗어나게 하려는 미혹하는 소리를 피하는데 도움이 되기를 바라고 있다는 것을 밝혀주었다.

이와 같이 교회의 건강한 성장은 하나님의 역사와 더불어 변화된 그리스도인에 의하여 이루어지게 된다. 그 결과 성숙한 열매를 거두게 될 것이다. 정필도는 수영로 교회가 성장한 배경에는 하나님의 손에 들린 수많은 평신도들이 있었다. 그 사람들이 누구인가. 바로 복음으로 변화된 사람들이다. 변하되 확실하게 변한 사람들이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들을 찾으시고, 붙잡고 일하신다. 그리고 교회를 자라게 하신다라고 각 사람이 성숙하게 됨으로 말미암아 교회가 성장하게 된 것을 언급하였다. 그러므로 각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의 분량에 이를 수 있도록 다음과 같이 교회교육의 목표를 명확하게 세우고 교육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1. 각 사람

 

골로새서 128절에 각 사람(pavnta a[nqrwpon)이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사도 바울은 각 사람을무려 세 번씩이나 강조하고 있다.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가르침은 각 사람을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라고 하였다. 이렇게 각 사람을 세우는 것이 교회교육의 목표인데 각 사람의 중요성이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박윤선은 각 사람을 상대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바울의 전도와 목회 방법은 각 개인을 상대로 하여 각근[恪勤: 정성을 다해 부지런히 힘씀]한 접촉과 상담에 역점(力點)을 둔다는 것이다. 전도자가 영혼 구원운동에 있어서 대중 상대로 그들을 지도함은 물론이려니와 각 개인의 영혼을 위해 경성하기를 자기가 회계(會計)할 자인 것 같이해야 된다(13:17; 20:20).

 

이러한 각 사람에는 두 가지의 중요한 특성이 있다. 각 사람은 개별적인 특성과 시공간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다. 각 사람은 각각의 한 사람을 귀하게 여기므로 개별성이 있으며, 지역과 시대와 계층을 넘어 각각의 사람에게 적용되므로 시공간성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직접 대면하고 있는 각 사람뿐만 아니라 동서고금, 빈부귀천, 남녀노소 등과 상관없이 시공간을 초월하여 간접적으로 대면하게 되는 각각의 한 사람이라도 소중하게 여기고 교회교육을 해야 할 것이다.

 

(1) 각 사람의 개별성

 

각 사람은 개별적인 특성을 내포하고 있는 개념이다. “각 사람(pavnta a[nqrwpon)모든 사람으로도 볼 수도 있으므로 바른성경과 표준새번역은 모든 사람으로 번역하고 있다. 하지만 영어성경에서는 “all” 번역하지 않고 있다. NKJV·NASB·YLT 영어성경은 “every man”으로, NIV·NRSV 영어성경은 “everyone”으로 번역하고 있다. 개역개정 성경은 각 사람으로 번역하여 단순히 모든 사람이 아니라 각 개개인의 특성을 반영하여 번역하고 있다.

(pavnta)의 원형은 pa'"”(파스)인데, “모든”(all)을 의미하고 있지만 각각의 모든”(every)도 의미하고 있다. 모든 사람을 말하고 있지만 한 사람도 빠짐없이 각각 개별적인 대상으로서의 집합체인 모든 사람을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영어성경에서도 “all”이 아닌 “every”를 사용하였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각 사람이 그야말로 각각의 개인을 가리킨다고 한다면 파스(pa'") 사용하지 않고 골로새서 46절에 사용한 (e{kasto", 헤카스토스)을 사용하였을 것이다. 이 단어는 각각의, 각자의”(each)라는 의미가 있다. 그러므로 각 사람NASB 영어성경에서는 “each person”으로, NKJV 영어성경에서는 “each one”으로 번역하고 있다. 이것은 명확하게 각각의 사람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골로새서 128절에서 이 단어를 사용하지 않고 파스(pa'")를 사용하였다. 이것은 단순히 ”(each) 사람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고 모든”(all) 사람을 뜻하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개개인 모두”(each and every)라는 의미를 나타내기 위해 사용하였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형용사로 관사가 없는 단수 명사와 함께 사용할 때는 그 명사가 지시하는 종류의 개개의 대상을 하나하나 강조하는 것으로 본다. 128절의 각 사람도 이에 해당하므로 개별적인 한 사람 한 사람 모두를 강조하기에 각 사람으로 번역하였을 것이다. 이처럼 각 사람은 단순히 모든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또한 각 사람은 복수(plural)가 아니라 단수(singular)이다. 전체를 마치 한 사람 대하듯이 대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각 사람을 개별적으로 귀하게 여겨야 한다는 것이다. 루카스(Dick Lucas)“28절은 바울이 얼마나 광범위하게 애쓰고 노력했는지 보게 해준다. 그는 그저 공개설교자의 일을 할 뿐 아니라 또한 개인교사로서 개인들에게 시간과 생각을 들인다(참고. 20:20에 주목하라)”고 이러한 사실을 밝혀주고 있다.

이처럼 각 사람이라고 해서 소수의 사람만을 대상으로 한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모든 사람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 수많은 사람을 상대하지만 규모와 상관없이 대중 속의 한 사람 한 사람씩을 모두 바라보고 교회교육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128절의 각 사람에 대한 의미는 각각의 모든 사람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렌스키(R. C. H. Lenski)는 각 사람을 가르친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구원의 진리를 각자에게 가르치고 알리는 것을 뜻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므로 한 사람의 중요성을 가지고 각 사람을 가르쳐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한 사람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계신다(18:12-14). 예수님의 마음과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은 한 사람에게 향해 있으시다. 그러므로 한 사람도 빠짐없이 소홀함이 없이 양육해야 하고 또한 양육을 받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월터 헨릭슨(Walter A. Henrichsen)은 한 사람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처음부터 양적으로 규모를 키우는데 집중하여 결국 용두사미로 끝나 버리는 것이 아니라, 소규모로 시작하여 한 사람 한 사람을 질적으로 견고하게 세워 가야 한다는 것을 밝혀주었다. 김남준은 하나님께서 한 사람을 준비시키시고 들어 사용하시는 것을 언급하면서 한 사람의 중요성을 피력하였다.

 

사람들은 방법을 찾아다니지만 하나님은 한 사람을 찾으십니다. 하나님은 방법을 사용하셔서 역사를 움직이시는 것이 아니라, 준비된 사람을 사용하시어 역사를 움직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움직일 야망에 사로잡힌 사람들을 통해 역사를 바꾸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에 의하여 사로잡힌 바 된 사람들을 통해서 당신의 일들을 성취하십니다. 잠들어 있는 교회를 먼저 깨우실 때에는 항상 하나님이 먼저 깨우신 각성한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당신의 생명 싸게 안에 감추사 보호하시고 예비하셨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요구되지 않는 더욱더 철저하고 엄격한 기준으로 훈련시키시고 연단시키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를 거대한 불길을 일으키기 위한 한 불씨로 삼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 오시는 앞길을 예비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이었습니다.

 

옥한흠은 하나님의 관점에서 사람을 보는 패러다임, 이것이 제자훈련의 핵심이다. 하나님의 패러다임은 가장 작은 자에 주목하는 것이다. 한 사람에 주목하는 것이다라고 밝혔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한 사람에 주목하신 것처럼 우리도 한 사람에 주목하고 헌신해야 한다라고 강조하였다. 이렇게 한 사람의 중요성을 알고 교회교육을 하게 될 때 보다 그리스도 중심의 성경적인 교회교육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교회교육은 단 시간에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도 고려하고 교육해야 한다. 리로이 아임스(Leroy Eims)는 제자 삼는 일이 단시간에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제자는 대량 생산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밝히면서 개인적이고 개별적인 관심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규명해주고 있다.

또한 각 사람에 대한 교회교육의 의미는 일대일로 교육하는 방식만 의미하지 않는다. 설교, 집회, 세미나, 강의 등과 같이 집단적인 교육에서도 적용된다. 그렇다고 해서 전체적으로 지나가듯이 교육하는 것이 아니라 개개인(個個人)에 대한 세심한 배려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이 몇 명이 모였든지 각 개인에 관심과 각 개인의 성장 목표에 힘써야 한다는 것이다. 집합체로서의 각 개인을 의미하고 있으므로 공동체 속의 개인을 세우는 교회교육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각 사람은 다양한 규모에서도 교회교육이 가능하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와 같으므로 교회교육을 함에 있어 한 사람 한 사람의 건강한 성장과 성숙에 주목할 수 있어야 한다. 다수가 있다고 해서 한 사람을 소홀히 대하거나 소수가 있다고 해서 한 사람을 하잖게 여기는 일이 없어야 할 것이다.

 

(2) 각 사람의 시공간성

 

각 사람(pavnta a[nqrwpon)은 직접 대면하고 있는 각 사람만 의미하지 않는다. 시공간을 초월한 모든 각 사람을 대상으로 한다. 이것은 각 사람의 시공간성을 말한다. 지금 대면하고 있는 사람만이 교회교육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눈앞에 대면하지 않고 있지만 시공간을 초월하여 어느 시대나 전 세계 어느 곳곳에나 간접적으로 대면할 수 있는 사람을 뜻한다. 지금 서로 얼굴을 못 보는 사람에게도 교회교육이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만큼 영향력이 매우 크다는 것을 알 수 있으므로 교회교육에 대해 새로운 관점을 가져야 할 필요가 있다.

골로새서는 사도 바울이 로마 감옥에서 쓴 서신서이다. 골로새서 마지막 418절에 나 바울은 친필로 문안하노니 내가 매인 것을 생각하라고 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바로 앞에 나오는 416절에 이 편지를 너희에게서 읽은 후에 라오디게아인의 교회에서도 읽게 하고 또 라오디게아로부터 오는 편지를 너희도 읽으라고 한 것을 보면 편지를 회람하도록 한 것도 알 수 있다. 사도 바울이 회람 서신을 통해 감옥에서도 간접적으로 대면하여 자유롭게 교회교육을 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된다.

사도 바울은 로마 감옥에 갇혀 있었으므로(4:3, 18) 그곳에서 몸으로 골로새 교회의 성도들을 직접 대면할 수 없었다(2:1). 하지만 서신으로 교회교육을 하였다(4:16). 몸은 감옥에 가둘 수 있었지만 그의 심령은 가둘 수 없었다(2:5). 복음도 가둘 수 없었고, 교회교육도 가두어놓을 수 없었다. 사도 바울은 감옥에서 사람들과의 분주함에서 벗어나서 차분하게 더 깊이 연구하면서 서신을 통해 시공간을 초월하여 모든 각계각층의 사람들에게 더 많은 교회교육을 하게 되었고 또한 성과도 거두게 된 것이다(1:4-6, 2:5). 사도 바울의 서신 자체가 설교원고이기도 하고 교리교육의 강의안이 되기도 한 것이다.

이러한 문서 형태의 교회교육은 시공간을 초월하여 그 당시 그리스도인들뿐만 아니라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에게도 계속 교회교육을 하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생전의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만나지 못하였다. 하지만 예수님의 교회교육은 중단되지 않고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에게도 교육되어지고 있다.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와 함께 하셨지만 전파를 통해 그 당시 각 지역의 수많은 각 사람에게 널리 알려졌다. 그뿐만 아니라 먼 미래의 각 사람인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이미 전파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을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이 보고 듣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문서로 대면하시면서 교회교육을 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하여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을 직접 대면하거나 육성으로 듣고 있지는 않지만 문서인 성경을 통해 교회교육을 받고 있는 것이다.

골로새서만 보더라도 사도 바울이 주후 약 62년경에 기록하였다고 보면 약 1953년 전에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을 향해서도 써준 것으로도 볼 수 있다. 골로새서는 그 당시 수신자들에게 쓴 것이지만(1:2) 성경책이 되어 오늘날에도 계속 수신 중이고 앞으로도 계속 수신될 것이다. 회람하는 것도(4:16) 그 당시에 회람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성경책이 되어 어느 누구에게나 계속 회람되고 있으며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이 그것을 보고 있는 것이다. 이를 볼 때 바울 서신은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을 향해서도 써주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존 칼빈(John Calvin)1536년에 기독교 강요(초판)(Institution of the Christian Religion)을 썼지만 479년이 지난 지금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은 한 번도 그를 직접 만나본 적이 없다. 다만 전해준 저서로 대하고 있을 뿐이다. 무디(D. L. Moody)도 직접 만나기는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무디의 성경 연구등과 같은 저서를 통해 무디의 교회교육은 중단되지 않고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전해지고 있으며 앞으로도 계속 전해질 것이다. 저서를 통해 대대로 교회교육을 받고 있는 것이다. 정용희는 칼빈이 저서를 통해 교회교육을 하였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칼빈은 입으로 묘사되는 설교를 제네바 교회 목회사역의 중심에다 세웠으며, 모든 교회회원들로 하여금 주일의 정규적인 예배뿐 아니라 가능한 자주 설교예배에 참여하도록 가르쳤다. 저서를 통한 교육 - 칼빈은 교회를 위해 <교회의 조직과 예배를 위한 조례>, <교회헌법>, <신앙고백서>, <요리문답> 등 많은 문서를 작성했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가장 위대한 교육적 공헌은 기독교 강요(Institutio Religionis Christianae)를 기록한 사실이다.

 

이처럼 칼빈은 직접적인 대면 설교와 간접적인 저서로 교회교육의 시대적 사명을 잘 감당하였다. 그리고 그가 한 말은 사라졌지만 그의 글은 남겨져서 거의 500년이 지났지만 오늘날에도 보게 되고 교회교육은 계속 진행이 되고 있다. 그만큼 문서를 통한 교회교육도 중요하다는 것이다. 각 사람의 시공간성은 이처럼 전 시대, 전 부류의 사람들에게 해당된다. 각계각층, 동서고금, 남녀노소, 빈부귀천 등과 아무런 관계가 없이 전해지고 교육된다. 처해 있는 현실의 조건과 상황도 초월해버린다. 그러므로 교회교육은 이처럼 전 시대의 모든 각 사람들을 그 대상으로 하고 있다. 이와 같이 각 사람이란 시공간을 초월한 모든 각 사람을 의미하는 것임을 유의하고 이러한 모든 각 사람을 세우려는 의지를 가지고 그러한 목표를 세울 필요가 있는 것이다. 더 나아가 이러한 가치를 존중하고 보다 이러한 일에 적극 협력해나가고 다른 많은 사람에게 이 사실을 깨우쳐 주기도 해야 한다.

존 파이퍼(John Stephen Piper)는 자신의 체험을 언급하기를 조나단 에드워즈는 1758년에 죽었지만 그와 나의 우정은 해가 갈수록 깊어졌다. 나는 그의 말과 행동에서 수없이 많은 것을 배웠다. 그로 인해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한다라고 하였으며 문서로 된 전기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규명해주고 있다.

 

그리스도인의 전기를 읽을 때 우리는 평생 기쁨을 위해 싸우는 사람을 만난다. 이것은 엄청난 도움이 된다. 이렇게 하면 전투에서 지휘관을 얻을 수 있고 그가 거둔 은혜의 승리로 인해 영감을 얻을 수 있다. 그리고 그의 실패와 회복으로 인해 겸손해지고 소망을 가질 수 있으며, 때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무엇이 가능한지 어렴풋이 알고 그 어느 때 보다도 열심히 기도하며 갈망할 수 있다. 마르틴 루터는 성경에서 그리스도의 충만을 보며, 충만한 기쁨을 아는 일에서 고난이 담당하는 본질적인 역할을 내게 가르쳐 주었다.

 

사도 바울은 서신뿐만 아니라 사람을 통해서도 이루어나갔다. 골로새 교회의 에바브라와 같은 사역자들을 파송하는 방식으로 교회교육을 하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또 네가 많은 증인 앞에서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그들이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딤후 2:2)는 부탁을 하였을 것이다. 로새서 128절을 보면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이라고 한 것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우리가(hJmei'")라고 하였는데 다른 사역자와 교회교육을 동역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사도 바울은 골로새 교회에 직접 가지 않았지만 사람을 통해 시공간을 초월하여 교회교육을 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동역을 골로새서 마지막 4장에서 발견할 수 있다. 골로새서는 4개의 장으로 되어 있는데 4장의 18개의 구절 가운데 7절부터 14절까지 무려 8개의 구절을 사용하여 언급하고 있다. 사도 바울은 8명의 동역자 이름을 열거하고 있는데 두기고, 오네시모, 아리스다고, , 예수, 에바브라, 누가, 데마이다. 바울 서신 가운데 로마서 16 이외에 이처럼 긴 동역자에 관한 언급을 찾아볼 수 없다. 그런데 이 짧은 골로새서에서 이렇게 길게 언급한 것을 볼 때 골로새 교회는 사도 바울과 그의 동역자에 의해 세워진 교회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교회교육의 대상에 있어 각 사람이란 이처럼 직접 대면하는 사람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 당시의 그리스도인들뿐만 아니라 미래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까지 교회교육하게 되기 때문이다. 문서와 사역자, 그리고 인터넷과 방송 등의 매스 미디어를 통해 24시간 전 세계에 전달받는 각 사람과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는 날까지 모든 각 사람을 포함하고 있다. 이처럼 모든 각 사람은 시공간을 초월하여 현 시대나 다음 시대의 모든 각 사람을 뜻하므로 이에 대한 교회교육도 염두에 두고 교육할 필요가 있다. 몸으로는 함께 하지 못하지만 간접적으로 문서와 사역자 등을 통해 얼마든지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시공간을 초월하여 멀리 넓게 바라보는 관점으로 교회교육을 해야 할 것이다. 시공간을 통틀어 대비하는 통전적인 교회교육의 목표를 세울 필요도 있다. 이처럼 각 사람의 시공간성의 개념은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나 어느 시대, 어느 곳, 어떤 사람에게도 들어가서 교회교육을 하도록 만들어준다.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는 세상 끝나는 날까지 마지막 남은 그 한 사람을 위한 교회교육도 감당해나가게 될 것이다. 이러한 교회교육의 목표를 정하고 교회교육을 할 때 보다 강화된 그리스도 중심의 성경적인 교회교육을 하게 되는 것이다.

 

2. 그리스도 안에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ejn Cristw'/) 완전한 각 사람으로 세우려고 하였다(1:28). 교회교육을 함에 있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교육해야 하는데 각 사람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세우려고 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의미는 내주하시고(1:27) 역사하시는(1:29)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에 따라 힘써 수고한다(1:29)는 의미이다. 그리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속량으로 주어진 구원의 충만한 은혜를 실제적으로 사용하는 가운데 교회교육을 함으로써 각 사람을 완전한 자로 세우려는 목표를 달성해나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은 포도나무이시고 교회교육의 사역자는 가지이다. 그러므로 교회교육의 사역자가 예수님 안에 거하고 또한 예수님께서 교회교육의 사역자 안에 거하게 되면 효과적인 교회교육의 결과를 거두게 된다(15:1-8). 하나님께서 가꾸어주시므로 머리되신 예수님께 붙어 있으면 공급하심을 받게 되는 것이다(2:19).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127:1)라고 하였듯이 하나님께서 세워주셔야 한다. 교회교육을 할 때도 세워주셔야 하고 완전한 각 사람으로 세워주는 것도 하나님께서 세워주셔야 가능하게 된다. 힘써 수고하는 것은 교회교육의 사역자이지만 하나님께서 세워주실 때 세워지게 된다. 그러므로 교회교육을 함에 있어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완전한 자로 세워주실 것을 믿고 의지하는 가운데 힘써 수고해야 하는 것이다.

골로새서 128절의 문맥을 보면 사도 바울이 교회의 일꾼(1:25)으로 힘을 다해 수고한 것은(1:24, 29, 2:1)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1:25)고 하였는데 그 일은 비밀(1:26, 27, 2:2)이신 그리스도(Cristov")를 전파하여 알게 하려는(1:28, 2:2) 것을 볼 수 있다. 이처럼 교회교육의 사역자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을 동원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뜻하시고 행하시는 그 일에 교회교육의 사역자가 동원되는 것이다. 교회교육의 활동에 있어서도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내주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인정하고 의지하는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를 따를 때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 성취되는 실제적인 효과가 나타나게 된다. 강준민은 하나님을 위해 일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것임을 밝히고 F. B. 마이어가 나님을 위해 일하는 것과 하나님께서 그들을 통해 일하시도록 하는 것의 차이점을 전혀 배워 본 일이 없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이것이 많은 목사와 그리스도인 사역자들이 실패하는 이유이다라고 언급한 것을 소개해주었다.

사도 바울은 교회의 일꾼이 된 것은 하나님께서 골로새 교회의 성도를 위해 자신에게 직분을 주셨다는 것을 밝히고 그렇게 한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는 것임을 밝혔다(1:25). 사도 바울이 하나님을 동원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을 동원하셔서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어나가신 것이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것을 잘 알고 자신의 어떤 목적을 위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의 인도에 따라 모든 힘을 다해 수고한 것이다. 그리하여 골로새 교회의 교회교육을 위해 멀리 떨어져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도 생면부지의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친필을 써 가면서까지(4:18) 수고하였으며, 골로새 교회와 골로새 교회 성도들의 보호와 성장과 성숙을 위해 견디기 어려운 고난이라 할지라도 기쁘게 받아들인 것이다(1:24).

여기서 이 시대의 교회교육의 사역자도 사도 바울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어나가야 하며, 그러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에 따라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교회교육의 사역자에게 주어진 직분은 교회교육의 사역자가 어떤 일을 시도하기에 도움이 되라고 주신 직분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작정하신 일을 행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직분을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에 따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나가는데 교회교육 사역자의 직분을 사용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 교회교육의 사역자가 더욱 기도하고 성령님으로 충만해지고 말씀으로 충만해져야 할 것이다. 그럴 때 보다 더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고 나에게 맞추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나를 맞추어 나가게 될 것이다. 그리하면 내주하시고 역사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능력과 자원으로 교회교육의 목표를 더 잘 달성하게 될 것이다.

 

(1) 그리스도의 함께 하심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도들 안에 내주(內住)하고 계신다(1:27). 성도들 안에는 몸인 교회의 머리이시며 만물의 으뜸이시고(1:18), 모든 것이 충만”(1:19; 2:9)하시고, “모든 통치자와 권세의 머리”(2:10)이시고, 하나님의 비밀”(1:27, 2:2)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주하고 계신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는 그때나 지금이나 언제나 성도들 안에 함께”(with) 계신다. 골로새서를 보면 그리스도와 함께라는 말씀이 많이 나온다. “(suvn, 함께)을 접두어로 사용하는 경우에는 함께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고 함께 일으키심(2:12),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3:1)이 있으며, “(suvn)을 단독으로 사용하는 경우에는 그와 함께 살리심(2:13),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음(20),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3:3),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남(3:4)이 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살고 다시 살아나고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함께 하신다는 것은 매우 실제적인 그리스도시라는 것을 잘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해주시는 곳이 천국이 된다. 그것을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해 단장한 것 같더라.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21:2-4)는 말씀에서 알 수 있다. “함께의 원형은 메타(metav)인데 속격과 함께 사용될 때는 와 함께”(with)라는 뜻이다. 213절 안에 각각 속격(meta;, met j, met j)의 형태로 무려 세 번씩이나 반복해서 나온다. 그만큼 성도들과 함께 하신다는 의미가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은 성도들과 함께 하시는 분이시다. 그러기에 하나님으로서의 의미가 있는 것이다. 하늘에만 계신다면 의미가 없게 되지만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와서 하나님의 장막이 성도들과 함께 하고 하나님께서 성도들과 영원토록 함께 하시기에 성도들의 실제적인 하나님이 되실 수 있는 것이다. 팔머 로벗슨(O. Palmer Robertson)은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하나님의 계약 시행에 대한 성경의 기록을 통해 볼 때, 계약 관계의 최종 결론으로서 한 구절이 되풀이 된다. 나는 너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된다라는 것이다. 이 구절이나 또는 이와 비슷한 구절의 끊임없는 반복은 하나님 계약의 통일성을 나타낸다. 이 구절은 계약의 임마누엘 원리라고 부를 수 있다. 계약의 핵심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그들 가운데 거하신다는 사실은 성경을 통해 그 의미가 점점 중요하게 표현된다. 그래서 그것은 장막의 모양이 성전의 모양으로 또 하나님의 나라의 모양으로 옮겨진다. 또 그것은 성육화된 그리스도, 그리스도의 교회, 성도의 최후의 영광을 포함한다. 어느 경우든지 하나님의 거하심은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는 계약 개념의 핵심과 직접 연관된다. 그들 가운데 거하심으로, 하나님은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그의 백성이 되는 실제적 사실을 보증하는 것이다.신정(Theocracy)의 핵심은 하나님이 백성과 함께 거하신다는 원리이다.

예수님의 탄생과 이름의 뜻을 보아도 함께 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그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그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이 모든 일이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이르시되,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1:18-23)고 기록된 말씀과 같이 예수님은 성도들과 함께 하시는 그리스도이신 것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가운데 살아가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 안이란 예수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인이 밀접한 관계 속에 살아가는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골로새서 210절에 너희도 그 안에서 충만하여졌으니라고 하였으며,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살아나고(2:12),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고(3:4), 그리스도와 함께 연합하여 자라나고(2:19) 있다고 한 것이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다른 서신인 로마서 89-10절에서도 내주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언급하였는데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말미암아 죽은 것이나 영은 의로 말미암아 살아 있는 것이니라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리스도인의 안에 거하신다는 사실을 밝혀주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이 사실이 너무나 분명하므로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 받은 자니라”(고후 13:5)라고까지 하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주하고 계시는 것을 스스로 확증해 보라고까지 하였다.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내주를 위해 기도도 해주었는데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3:17)라고 기도하였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리스도인의 안에 계신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본체는 하나님 우편에 계시지만(16:19; 7:55, 56; 8:34; 3:1; 1:3, 10:12; 벧전 3:22) 그의 영으로 그리스도인의 안에 계시는 것이다.

이러하므로 사도 바울이 고백하기를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1:21)고 한 것이다. 사도 바울의 삶 자체가 예수 그리스도의 내주의 삶이었는데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해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2:20)고 고백하였다.

예수님께서도 요한복음 1420절에 말씀하시기를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고 말씀하셨는데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인 안에 내주하신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 안에 있으면 열매를 맺게 되는데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고 말씀하시면서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15:4, 5)라고 하셨다. 생명이신(14:6)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리스도인의 안에 내주하시므로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 열매가 맺히게 되는 것이다.

앤드류 머레이(Andrew Murray)그 이름은 살아 있는 능력을 뜻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고 그분은 우리 안에 계십니다. 우리의 전() 생명은 우리 안에 감추어 있고 묶여 있으며, 그분의 전() 생명은 우리 안에 감추어 있고 역사하고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안토니 후크마(Anthony A. Hoekema)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리스도인 안에 언제나 영원히 살아계시는 것을 밝혀주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영원 전부터 계획되어졌었고 또한 영원토록 계속되어진다. 그러므로 이 연합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우리의 삶을 의미 있게 하며 즐겁게 하고, 또한 승리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우리는 이 땅에 순례자요, 나그네들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영원토록 살아 계시는 것이다. 우리는 항상 그리스도 사역의 이 두 가지 측면들을 간직해야만 한다: 법적 측면과 역동적 측면, 우리를 위한 그리스도와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이다. 마치 어떤 사람이 지나간 외상을 갚아 주기라도 하듯이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값을 지불하려고만 이 땅에 오신 것은 아니다. 우리를 그와 살아있는 연합 속으로 이끌어 항상 함께 하시기 위함도 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 우리는 각종 영적 축복들을 갖는다. 그리스도께서는 갈보리 십자가에서 오래 전에 우리를 위해 죽으셨을 뿐만 아니라 지금부터 영원히 우리의 마음속에 살아 계신다.

 

그러므로 골로새서 127절은 우리 안에 풍성한 영광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 영광의 비밀은 다름 아닌 성도들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시라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들의 안에는 그리스도의 영이 없다(8:9). 그들에게 있어서는 비밀을 알 수 없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인 그리스도인 안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있다. 믿는 그리스도인은 그 놀라운 비밀을 알게 되고 누리게 된다. 이와 같이 길과 진리와 생명이신(14:6)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도들 안에 항상 내주하신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모시고(2:6) 의지하고 따라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할 때 내주하셔서 함께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 되는 것이다.

 

(2) 그리스도의 역사하심

 

사도 바울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완전한 자로 세우려고 하였는데(1:28) “이를 위하여”(eij" o}, To this end) 자신 안에 내주하시는 이의 역사에 따라 힘을 다해 수고하는 것을 밝히고 있다(1:29). 내주하셔서 역사하시는 ”(aujtou, His)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127절에서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밝히고 있으며, 28절은 그를 전파하여라고 하였는데 그는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곧이어 29절에 역사하시는 이라고 하였는데 가 가리키는 것은 앞서 27절과 28절에 언급하고 있는 그리스도이신 것이다. 이후 21절과 2절을 보면 사도 바울이 얼마나 힘쓰고 있는가를 알기 원한다고 하면서 그렇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문맥으로 볼 때 역사하시는 이는 예수 그리스도로 볼 수 있는 것이다.

교회교육의 내용을 알게 하고 교회교육의 방법을 사용하고 교회교육의 목표에 도달하려면 보다 효과적이고 실제적인 교회교육을 할 수 있도록 하게 하는 실천의 원동력이 되는 원천이 필요하다. 사도 바울은 이의 중요성을 인식하였으며 실제로 그렇게 하였다. 126-27절에서 언급한 교회교육의 내용과 128절에서 언급한 교회교육의 방법과 목표를 보다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획기적인 원천이 있어야 했는데 129절에서 그 원천을 밝혀주었는데 그것은 자신 안에서 역사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여 힘써 수고하는 것이었다. 오늘날의 교회교육의 사역자도 이 원천을 사용하게 되면 교회교육의 내용을 잘 알게 하게 되고 교회교육의 방법을 능력 있게 사용하게 되고 교회교육의 목표에도 잘 도달할 수 있도록 하게 된다. 이렇게 하려면 하나님의 은혜와 더불어 교회교육의 사역자도 책임을 다해야 한다. 이에 대해 안토니 후크마(Anthony A. Hoekema)는 다음과 같이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성이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사람은 피조물이기 때문에 그는 은혜(grace)를 통해서만, 즉 전적으로 하나님의 긍휼을 의지해서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사람이 동시에 인격체라는 사실은 그가 구속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다는 점을 지적해 준다. 사람은 천국의 컴퓨터로 입력을 받은 로봇처럼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요 한 인격체로서 구원을 받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자신들의 구속과정에 대한 어떤 책임이 있는 것이다. 인간은 성령의 힘을 입어 자발적으로 자기의 죄를 회개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을 선택해야 하는 것이다.그리고 한 인격체로서 이런 선택을 하고 난 후에 그는 하나님과 계속적으로 교제하고 믿음으로 순종하는 생활을 지속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런 삶을 사는 것이 하나님께 의지하여서만 가능하다는 사실이 이런 삶을 살기 위한 우리의 인간적 책임을 면제해 주지는 않는다. 우리 안에서 성화 전체의 과정을 이루시는 분은 다름 아닌 하나님이시다. 우리가 이를 위해 힘써 일하면 일할수록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 안에 역사하신다는 것을 더욱 확신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이렇게 성화를 통해 우리를 인격체인 동시에 피조물로 대하고 계신다. 인간이 피조물인 동시에 인격체라는 역설적 사실을 늘 기억하는 것이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의무를 동시에 잘 드러나게 하는 길이다. 즉 개혁주의 전통을 따르는 학자들은 인간의 책임성을 소홀히 다루어서는 안 될 것이며 반면에 알미니안 계통의 학자들은 궁극적인 하나님의 주권을 소홀히 다루어서는 안 될 것이다.

 

또한 그는 결론적으로 우리는 성화란 성도의 노력을 포함한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역사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거룩해지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우리는 더욱 우리에게 노력할 수 있게끔 해주는 강력한 능력이 하나님의 능력임을 확신하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윌리암슨(G. I. Williamson)도 하나님과 협력해서 작업하는 것임을 규명해주고 있다.

 

성화의 작업은 협력적이라는 점을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력적이란 말은 인간이 하나님과 협력해서 하는 작업임을 말한다. 그것은 인간과 하나님 양편 모두가 행동하는 작업이다. 이것은 인간의 사역이 하나님의 사역과 동등함을 뜻하지 않는다. 동등할 수 없다. 하나님의 사역은 인간 성화에 있어서 모든 찬양을 하나님 자신이 받으신다. 인간의 사역은 인간을 결코 무익한 종이상의 아무 것도 만들지 못한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하나님과 사람이 동시에 일하지 아니하는 성화란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의 기쁘신 뜻을 따라 우리 안에서 소원을 가지며 행하도록 역사하신다. 그리고 우리는 두려움과 떨림으로 우리 자신의 구원을 이루어 나간다(2:12, 13).

 

윌리암슨(G. I. Williamson)은 또한 우리 스스로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다. 우리는 우리에게 힘을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모든 일들을 할 수가 있다라고 하였다. 이러한 원리는 설교할 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강준민은 설교자도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에 따라야 한다는 것을 피력하였다.

 

설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설교의 은사를 가진 분들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노력과 훈련을 통해서 어느 정도의 수준에는 이를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은혜를 전적으로 의지하는 것과 우리가 해야 할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과의 적절한 균형이 필요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해 수고하노라”(1:29)고 말씀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해서 그가 해야 할 수고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설교자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직접적인 영감과 함께 다른 사람이 하나님께로 받은 영감 있는 설교집과 설교 테이프를 들으면서 내면이 저수지같이 충만해지는 것입니다. 설교자가 최선을 다하고 있다면 하나님도 성도들도 만족스러워할 것입니다. 그러나 최선을 다하지 않을 때 성도들은 굶주리게 되고 설교자를 원망하게 될 것입니다. 저는 성도들이 말씀으로 배가 부르면 목회자의 허다한 허물을 용서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만큼 성도들의 관심은 말씀에 있습니다. 쥐어짜도 나오지 않던 설교가 말씀 묵상과 독서로 내면이 충만해지면서 입을 벌리면 하나님의 말씀이 나오는 축복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말씀을 통해서 치료받은 많은 성도들과 사역자들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특별히 제가 영적 침체를 통과하고 극복한 까닭에, 영적 침체나 우울증으로 고생하던 사역자들이나 성도들이 말씀을 들으면서 상한 감정이 치유되고 침체의 늪에서 빠져 나와 자유케 되는 것을 목도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교회의 일꾼으로 많은 고난 속에서도 힘써 수고한 것을 볼 수 있다. 124절을 보면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위해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자신의 육체에 채운다고 하였다. 자기를 부인하고 예수님께서 사명으로 주신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간 것이다. 고난인 것은 사실이지만 받는 괴로움을 오히려 기뻐한다고 하였다. 21절을 보면 사도 바울이 골로새와 라오디게아에 있는 사람들을 직접 대면하지 못하고 있지만 그 사람들을 위해 얼마나 힘쓰고 있는지를 알기를 원한다고 하였다. 사도 바울이 쓴 다른 서신에서도 교회를 위해 받는 고난과 수고를 간증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고후 6:4, 5, 11:23-28; 4:19).

이렇게 힘을 다해 수고한다고 할 때 인간적인 노력을 앞세우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교회교육에 임해야 한다. 내주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에 따라 힘써 수고해야 한다. 열심히 힘써 수고하여 심는 사람은 교회교육의 사역자이지만 자라나게 하고 결실하게 하는 것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이 그런즉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냐 그들은 주께서 각각 주신 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들이니라.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고전 3:5-7)고 그 사실을 증거해주고 있다. 고린도전서 1510절에서도 그 사실을 증언하고 있는데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 자신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감당한 것을 밝혔다. 이러한 것을 잘 아는 사도 바울이기에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1:29)고 한 것이다. 사도 바울 속에서 역사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에 따라 힘을 다해 수고한다는 것이다. 교회교육에 있어서도 이 원리를 적용할 때 보다 효과적이고 실제적인 교회교육의 목표를 달성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역사에 따라 힘써 수고하는 원리를 요나단이 다윗을 칭찬하는 장면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다윗의 절친한 친구였던 요나단이 사울 왕 앞에서 다윗을 칭찬하는 장면인데 요나단이 그의 아버지 사울에게 다윗을 칭찬하여 이르되 원하건대 왕은 신하 다윗에게 범죄하지 마옵소서 그는 왕께 득죄하지 아니하였고 그가 왕께 행한 일은 심히 선함이니이다. 그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고 블레셋 사람을 죽였고 여호와께서는 온 이스라엘을 위해 큰 구원을 이루셨으므로 왕이 이를 보고 기뻐하셨거늘 어찌 까닭 없이 다윗을 죽여 무죄한 피를 흘려 범죄하려 하시나이까. 사울이 요나단의 말을 듣고 맹세하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거니와 그가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리라”(삼상 19:4-6)라고 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요나단은 그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고라고 다윗을 칭찬하면서 여호와께서는 온 이스라엘을 위해 큰 구원을 이루셨으므로라고 하였다.

이때 말한 블레셋 사람은 골리앗을 가리킨다. 다윗이 골리앗에게 나아갈 때 외치기를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삼상 17:45)고 외쳤다. 이때 다윗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고 하였다.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는 가운데 어린 것과 그 모든 불리한 것조차도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하게 힘써 나아간 것을 볼 수 있다. 그런 다윗이기에 하나님께서 모든 대적의 손으로부터 구원해주신 날에 내가 주를 의뢰하고 적진으로 달리며 내 하나님을 의지하고 성벽을 뛰어넘나이다”(삼하 22:30)라는 승전가를 하나님께 불러드릴 수 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원리를 사도 바울에게서도 발견할 수 있는데 내주하셔서 역사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에 따라 힘을 다해 수고함(1:29)으로써 교회교육의 목표를 달성해나간 것을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능력이 교회교육의 사역자 안에도 있을 때 사도 바울처럼 놀라운 일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역설적으로 교회교육의 사역자가 약하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이 오히려 더 크게 나타나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하신 일들이 이루어져 나갈 수 있게 된다. 연약함을 아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을 의지하게 되고 사람의 지혜와 말로 가르치지 않게 된다. 모든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인 줄 알고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하심으로 배우고 가르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시대의 교회교육의 사역자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원리가 의미하는 대로 내주하셔서 함께 하시고 역사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에 따라 힘써 수고할 때 각 사람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는 교회교육의 목표를 보다 효과적으로 달성하게 될 것이다.

 

3. 완전한 자

 

완전한 자는 이미 완성된 자를 의미하지 않는다. 현재적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계속 성화되어 가는 자를 뜻한다. 사도 바울은 골로새서 128절에서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a[nqrwpon tevleion/)로 세우려고 한 것을 밝혔다.

완전한(tevleion)의 원형은 tevleio"(텔레이오스)인데 뜻은 완전한”(perfect, NIV·NKJV·YLT 영어성경), “완성한”(complete, NASB 영어성경), “성숙한(mature, NRSV 영어성경)이란 뜻이 있다. 에베소서 413절에는 온전한”(tevleion)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 현재 완전하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 땅에서는 성화의 과정을 통해 완전한(tevleion) 사람이라는 목표를 두고 점점 자라나게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마지막 날에는 예수 그리스도 앞에 완전한 자로 대면하게 될 것이다. 이 완전한 자는 영화의 단계에서 완성된다. 하지만 현재 성화의 단계에서는 완벽하다거나 완전해질 수 없다. 그렇게 되기까지 힘써 성장해 가라는 것이다. 렌스키(R. C. H. Lenski)는 성화가 현재와 관계되어 있다는 것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이러한 공적 사업의 한 가지 목적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tevleio"를 세우려는데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tevlo"(“목표”)에 도달하려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만 가능한 일이다. 서술 형용사는 흔히 완전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전체적인 성화곧 도덕적 완전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여기서 의미하는 것은 한 인간이 그리스도 안에서 그 목표에 도달할 수 있는 믿음의 완전성을 지칭한다. 또한 각 사람에게 나타낸다는 것은 여기서 파루시아(Parousia)와 관계되어 있는 표현이 아니다. 어디까지나 현재와 관계되어 있다.

 

이처럼 완전하다는 것은 종말과 관련된 개념이 아니라 현재와 관련된 개념이라는 것을 볼 수 있다. 안토니 후크마(Anthony A. Hoekema)는 최종적 상태가 아니라 종말론적 시대 속에 살고 있으므로 긴장관계 속에서 고려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신약이 가르치고 있는 바와 같이 신자는 이미 구약의 선지자들에 의해 예언되었던 종말론적 시대 속에 살고 있다. 그러나 아직 최종적 상태에 다다른 것은 아니다. 신자들은 이미 성령의 내주하심을 경험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아직도 그의 부활될 육체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그는 마지막 날들 속에 살고 있으나 아직도 마지막 날은 임하지 않았다. 교회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속된 사람들의 공동체이기 때문에 새사람들이면서도 불완전한 인격들인 사람들의 친교이다. 새로움과 불완전함을 항상 같이 생각해야 한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서 행해지는 모든 복음전파도 교육도 목회적 돌봄도 모든 훈련도 항상 이러한 긴장관계 속에서 고려되어야만 한다.

 

그러므로 에베소서 415절에서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고 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완전한 각 사람으로 세우려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미”(already)아직 아니”(not yet)의 긴장 가운데 지금 여기서”(now here) 성화의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분량까지 자라난 완전한 자를 목표로 꾸준히 성장해나가야 하는 것이다. 워렌 위어스비(Warren W. Wiersbe)는 완전의 의미를 밝히면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해진 자들로 살아가기를 기원하고 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하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가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가지고 있는 것 외의 무언가를 제공하겠다는 어떤 가르침도 경계해야만 한다. 모든 하나님의 충만함은 그리스도 안에 있고, 그분은 우리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 수 있도록 우리를 위해 온전히 구비해 놓으셨다. 우리는 이미 받은 것을 바르게 활용하여 살아가며 자라가는 것이요, 그에 무엇을 보탤 필요는 없는 것이다. 주님께서 우리를 도와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해진 자들로 살아가도록 해주시기를 기원한다.

 

이것은 이미 완전 성화를 이루었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모든 것에 충만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 분량이 되기까지 충만하게 채워지는 가운데 그리스도 안에서의 완전한 자’(그리스도 안에서의 생활에 성숙한 자 곧, 신앙에 성숙한 자)”로서 성장해가라는 의미로 보아야 하는 것이다. 이미 다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바르게 활용함으로써 보다 성숙하게 자라나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존 칼빈(John Calvin)은 다음과 같이 목표를 제시해주고 있는데 완전한 상태의 최종 목표로 설정해 놓고 그 상태를 향해 계속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촉구하였다.

 

나는 복음 진리의 완전한 실천을 엄격하게 요구하는 것도 아니요 또한 그런 완전한 상태에 이르지 못했다고 해서 그 사람을 그리스도인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만일 그런 사람을 그리스도인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면, 교회에 한 사람도 남아 있을 수가 없을 것이다. 우리 모두가 그런 완전한 상태에 전혀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무슨 뜻인가? 그런 완전한 상태를 목표로 설정해 놓고 끊임없이 계속해서 그 상태를 향해서 나아가고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 상태를 최종의 목표로 놓고 계속해서 달려가야 한다.

 

이와 같은 목표를 가지고 실시하는 예수 그리스도 안의 교회교육은 모든 것에 충만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충만하심이 인격과 실력과 생활과 사명 가운데 충만하게 실현이 될 수 있도록 해준다. 그리하여 믿음으로 신전의식(神前意識)으로 살고, 여주동행(與主同行)하고 언행일치(言行一致)하는 삶을 살아가게 한다. 골로새서를 포함한 사도 바울이 쓴 그의 서신을 보면 대부분 전반부는 이론을, 후반부는 실천의 형식으로 썼다. 이론과 실제가 함께 가야 한다는 것이다. 참된 성경적인 삶은 적용까지 해야 비로소 완성이 된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성경을 석의할 때의 실천과 적용에 대해 송영목은 생사가 걸린 문제로 보고 있다.

성경 석의는 생사(生死)의 문제이다. 성경 석의를 시대마다 적용하며 실천하는 것도 생사의 문제이다. 적용은 우리가 말씀의 사람으로 살기 위해서 반드시 해야만 한다.적용은 하나님의 온전한 사람으로 자라나는 성화(sanctification)와 관련된 실제적인 삶의 문제이다.우리는 과연 말씀을 우리 삶에 적용하여 주님의 선하시고 온전하시고 기뻐하시는 뜻을 찾고 있는가? 우리에게 있어서 아직도 적용은 각자 알아서 하라고 방치된 영역이 아닌가? 실천과 적용 없는 성경해석과 설교는 성화의 최대 걸림돌이 될 수 있다.

 

설교도 적용에 목표를 두고 설교해야 한다. 한진환은 설교는 행동을 위한 연설의 범주에 속한다. 설교는 결코 청중들의 성경 지식을 고취시키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 본문에 대한 이해의 지평을 넓히는 것이 중요하지만 그렇게 하는 이유는 그것을 통해 삶의 변화를 이룰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설교는 단순히 설교를 위한 설교가 아니라 이처럼 삶의 변화를 가져오게 하고 행동을 하도록 하기 위해 설교하는 것이다. 이환봉은 적용 없는 설교와 적용 있는 설교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성경적 설교는 교리적 주해로부터 삶의 교훈에로 옮겨가서 간곡히 타이른다. 왜냐하면, 성경의 목적은 하나님에 관한 정보를 나누는 것이 아니라 자기 백성을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에 일치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적용 없는 설교는 지성을 섬길 수 있을 뿐이지만, 적용 있는 설교는 그리스도에 대한 순종과 봉사를 요구하기에 이른다.

이처럼 믿음과 행함, 이론과 실천이 함께 어우러진 교회교육이 살아 있는 교회교육이 될 수 있고 완전한 자의 분량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의 반응이 중요하고 필요하다. 바르게 믿게 되면 바르게 행하게 되어 있다. 강하게 믿어지면 더 잘 행하게 된다. 이러한 믿음을 가질 수 있도록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려주어야 할 필요가 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10:17) 생기므로 살아계시고 모든 것에 부족함이 없으시고 완전하시고 충만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함으로써 실천이 있는 믿음의 삶을 살도록 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지식과 신앙의 일치를 이루고 실천을 함으로써 아는 것과 믿는 것의 일치와 믿는 것과 행하는 것의 일치를 이루어 행함 있는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의 분량에 이르도록 하는 것이 그리스도 중심의 성경적인 교회교육이 될 것이다.

김의환은 우리가 말하는 교회의 성장은 교인들이 얼마만큼 그리스도를 닮아 가느냐 하는 영적인 성장에 척도를 두어야 할 줄 압니다. 누누이 강조하지만 수적 부흥도 물론 중요하지만 수적 부흥에 앞서 우리들이 변화되어야 합니다라고 권면하였다. 성경적인 목표가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에 대해 박영돈은 교회의 양적인 부흥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각 성도를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에 이르도록 자라나게 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우신 목적도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 새사람의 공동체를 이루어 가시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교회가 우선적으로 지향해야 할 목표는 양적인 부흥보다 교인들 각 사람을 그리스도 형상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자라게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하나님께서 복음 사역자와 목사를 교회에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목회 성공의 척도는 얼마나 교회를 외형적으로 팽창시키는가에 있지 않고 얼마나 교인들이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되게 하는가에 있다. 가장 성공적인 목회는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전 11:1)고 했던 바울처럼, 목회자 자신이 먼저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는 일에 앞장서서 교인들 앞에 그 선명한 모델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리스도 중심의 성경적인 교회교육을 통해 목표에 다가갈 때 주어지는 유익과 교회 성장에 대해 임영효는 초대교회의 예를 들어 제시해주고 있다. “사도들과 초대교회 성도들은 가는 곳마다 그들의 삶을 통해 예수님을 드러내고 예수님을 높이고 증거하는 삶을 살았던 것을 사도행전 전체를 통해 생생하게 나타내 보여주고 있다는 것을 소개하면서 삶 가운데 실천하였을 때 참으로 매력적인 삶을 살아갈 수가 있게 되었으며 그 결과 어떤 전도프로그램을 운영하지 않았지만 교회가 폭발적으로 성장하게 되었다는 것을 밝혀주었다.

이처럼 완전한 자에 이르게 되면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가게 되고 이들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성장하고 확장될 것이다. 그리하여 많은 열매를 거두게 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게 되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것이다. 그러므로 올바른 목표를 지향하는 그리스도 중심의 성경적인 교회교육을 통해 각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에 도달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4. 세우려 함

 

그리스도 중심의 성경적 교회교육의 목표는 각 사람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는 것이다. 이 목표를 달성할 때 각각의 모든 그리스도인이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은 성숙한 자로서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나타나게 될 것이다. 골로새서 128절에서 이러한 것을 세우려는 것을 볼 수 있다. 사도 바울이 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parasthvswmen) 함이니라고 하였는데 이렇게 세우려는 모습을 골로새서 122절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하게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parasth'sai) 하셨으니라고 하였는데, 거룩하고 흠이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모습으로 세우려는 것을 볼 수 있다.

128절의 세우려122절의 세우고자의 동사 원형은 모두 파리스테미(parivsthmi)이다. 이 동사가 능동태인 경우에는 “stand by, be present, stand, stand before” 등의 뜻이 된다. “대기하다, 출석하다, 세우다, 앞에 세우다라는 의미이다. 예수님 앞에 나타나 세워질 때의 모습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두 단어 모두 능동형이므로 그러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NIV 영어성경을 비롯한 대부분의 영어성경에서는 “present”로 번역하고 있다.

교회교육의 사역자들이 교회교육을 통해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숙해져가는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게 해야 한다는 것인데, 그런 모습을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자신 있게 발표해 드릴 수 있을 정도로 성장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사도 바울이 그렇게 세우려고 힘쓴 것을 볼 수 있는데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가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 너희는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니라”(살전 2:19, 20)고 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 앞에 세운다는 의미를 시간적으로 보면 종말에 행해지는 영화의 단계에서 세우는 것이 아니다. 개인 종말과 세상 종말에는 예수 그리스도 앞에 서는 것을 거부하여도 한 사람도 예외 없이 모두 서게 되어 있다. 이러한 사실을 히브리서 927절에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고 한 사실에서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죽은 이후에는 심판이 있을 뿐 성화가 더 이상 진행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 앞에 세운다는 것은 현재 성화의 단계에서 세운다는 것을 의미한다. 현재 내주하고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살아가게 한다는 뜻이다. 지금 곧바로 하늘로 가서 하나님 아버지 보좌 우편에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3:1) 앞에 나타내 보인다는 것이 아니라 성도들 안에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드러낼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현재적으로 이렇게 할 때 결과적으로는 하나님 아버지 우편에 계시는 예수님과 다시 오시는 예수님 앞에도 나타내 보이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현재도 예수 그리스도 앞에 서게 되고 종말에도 서게 된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경각심을 가질 필요가 있는 것이다. 박윤선은 예수 그리스도 앞에 서게 된다는 것은 두 가지 방식으로 하나님께 봉헌한다는 의미로 보고 있다.

 

어떤 학설에, 이것은 하나님의 검열과 판정을 받기 위해 심판대 앞에 서는 것을 의미한다고 한다. 그러나 그보다도 하나님(혹은 그리스도)의 소유인 신자들을 그 소유주이신 하나님께 봉헌(奉獻)함을 의미한다. 이 봉헌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 그들이 이 세상에 있을 동안에 전적으로 주님을 위해 헌신하는 삶이고(14:7-8), 둘째, 주님의 재림 때에는 그들이 완전히 주님의 것이 되어 영원히 주님과 함께 살게 됨이다. 21:36; 19:7, 21:2-4 참조.

 

내주하신 예수 그리스도 앞에 숨길 수 없으므로 그의 앞에서 살아가도록 하는 것이 세우는 것이 될 것이다. 모든 것이 드러나게 된다는 것을 히브리서 413절에서 증거하고 있는데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나느니라고 하였다. 이렇게 그리스도인의 모든 모습이 예수 그리스도 앞에 명백하게 드러나기에 그의 면전(面前)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면서 살아가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내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는 나의 모든 것을 가장 잘 바라보고 계시며 나를 가장 세밀하게 아신다(139:1-4 참고). 예수님께서 나의 모든 것을 아신다는 것을 마가복음 28절에서 알 수 있게 된다. “그들이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는 줄을 예수께서 곧 중심에 아시고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것을 마음에 생각하느냐라고 하셨는데 마음속까지 모두 아신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골로새서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데 사도 바울이 323절에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고 언급한 다음에 25절에 주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심이 없느니라고 언급한 것에서 볼 수 있다. 사람 눈은 속일 수 있어도 예수님의 눈은 속일 수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모든 것을 아시는 예수님이시므로 그의 앞에서 신전의식(神前意識)으로 살아가도록 하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 앞에 세우는 것이 된다.

이렇게 각 사람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는 것은 교회교육의 목표가 되고 그것은 또한 결과가 되기도 한다. 그런 목표를 두고 교육을 하게 되면 그런 결과가 주어지기 때문이다. 이러한 결과를 통해 삼위일체의 하나님과 그의 나라가 세워진다.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와 보혜사 성령님에 대해 더욱 깊이 알아가게 된다.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관계와 역사를 잘 알고 섬기고 의지하고 도우심을 받음으로 구원의 은혜를 누리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장성해진 것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각 교회와 각 삶의 영역 가운데 이루어지고 확장된다. 성숙해진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를 통해 많은 열매를 거두게 되어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되고 삼위일체의 하나님께서 영화롭게 되신다.

이 모든 것은 그리스도 중심의 성경적인 교회교육을 통해 삼위일체의 하나님 나라의 백성인 각 사람이 완전한 자에 이르기까지 회복하고 성장해나가도록 세워줄 때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면 옛 사람의 구습과 행위를 벗어버리고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새 사람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3:9, 10; 4:22-24). 안토니 후크마(Anthony A. Hoekema)는 성화의 궁극적인 목표가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이라는 것을 다음과 같이 규명해주고 있다.

 

신자들은 자신들을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로운 자아로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신자들이 입은 새로운 자아들은 아직 완전하지도 죄가 없는 존재도 아니다. 이러한 새로운 자아들은 아직도 계속해서 성령에 의해 새로워져야 하기 때문이다. 신자들은 아직 완전하지는 않지만 점차적으로 새로워져야 하기 때문에(23)[4:23], 새로워진다는 의미는 점점 하나님을 닮아 자라가는 것이다. 여기에서도 우리는 구속의 목적이 사람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스도와 하나님을 온전히 닮는 것이 우리의 성화의 궁극적 목표이다. 하나님의 형상은 하나님의 자녀들인 자들 안에서 지금 점진적으로 회복되고 있는 반면에, 장차 오는 세상에서는 이 형상은 전적으로 그리고 최종적으로 회복되게 될 것이다.

 

옥한흠은 신앙생활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밝혀주었는데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천국 가기 위해서인가?”라고 질문하고 그렇지 않다. 우리는 구원받았기 때문에 신앙생활을 한다라고 답하였다. 그는 두 기관을 비교하면서 각 사람을 세우는 것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강조하였다. WCC는 지성인들이 모인 단체였으며 파라처치(Para Church) 사역에는 평범한 사람들이 모였는데 초창기에는 비교할 대상조차 되지 않았지만 결국은 파라처치 단체들의 전략이 성공하게 되었다. 그것은 제자도였던 것이다. “사람부터 만들자는 전략을 세웠는데 사람을 만든 다음에 함께 일해 나가는 전략이었다. 이것은 예수님의 전략이었다는 것을 밝혀주었다. 그러면서 네비게이토 선교회의 창시자인 도슨 트로트맨 (Dawson Trotman)을 그 예로 제시해주고 있다.

 

도슨 트로트맨은 샌디에이고의 산에 올라 미국 50개 주의 지도를 펴놓고 매일 한 주씩 짚어가며 기도했다. ‘하나님, 이 주()에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벌떼와 같이 일어나게 하옵소서! 그 일을 위해 종이 쓰임받기 원합니다.’ 그는 50개 주의 기도가 끝나자 세계지도를 펴놓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각 나라마다 매일매일 손을 짚어 가며 기도했다. ‘하나님, 이 나라에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벌떼와 같이 일어나게 하옵소서! 그 일을 위해 종이 쓰임받기 원합니다.’ 누가 봤으면 미쳤다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하나님이 그의 기도를 들으셨다는 것이다. 네비게이토가 지금 127개 국에서 엄청난 사역들을 일으키고 있질 않은가. 선교단체라고는 아무 관심도 없었던 나 같은 사람조차 영향을 받았으니 말이다. 한 사람이 말씀에 눈을 뜨고, 성령이 주시는 음성을 들으니 세상이 바뀌었다. 제자로 세워서 사역을 시키라는 것이 주님의 방법이요, 주님이 우리에게 보여 주신 전략이다. 이 전략을 채택한 것이 파라처치 운동이 승리한 비결이었다. 반면 에큐메니컬 운동의 패인은 사람을 만들기 전에 참여부터 시킨 것이었다. 감투부터 씌워 준 것이다. 중생을 받은 사람인지, 부르심을 받은 사람인지 검증되지 않은 사람들이 교회 안에서 일하기 시작하니. 시간이 지난 후 결과는 뻔했다. 근본적으로 변화되지 않은 사람은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본색이 드러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아무런 방비 없이 세상에 들어갔을 때, 별 수 없이 동화되고 마는 것이었다.

 

이처럼 각 사람이 중요한 것을 알고 조직이나 기구나 시설보다 사람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 내주하셔서 역사하시고 모든 것을 아시는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신전의식으로 살아가도록 하여야 한다. 그리하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숙하게 된 각 사람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회복되고 확장되어나갈 것이다. 그러므로 각각의 성도들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는데 교회교육의 목표를 두고 교회교육을 하여야 할 것이다.

 

 

 

[ⓒ 2023 성경적 교회교육 신학석사학위논문 로고스성경연구소 소장 이서영 성경적 교회교육]

(논문명 "골로새서 1 24~28절에 나타난 그리스도 중심의 성경적 교회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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