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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적 교회교육] 제3부 그리스도 중심의 성경적 교회교육의 방법

by 이서영 목사 2023. 12. 14.

[성경적 교회교육] 제3부 그리스도 중심의 성경적 교회교육의 방법

 

(※ 논문 원본의 원어 폰트가 깨지고 각주도 올리지 못하게 된 것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성경 본문에 기초한 그리스도 중심의 성경적 교회교육의 방법을 제시하기 위해 먼저 교회교육에 대한 동기부여부터 탐구하고자 한다. 경공부를 해야 하는 필수적인 이유와 그에 따른 유익을 깊이 인식할수록 교회교육의 효과도 극대화되므로 이를 먼저 탐구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렇게 성경공부의 중요성과 효과를 인식시켜 교회교육에 대한 동기를 부여하는 것도 교회교육의 방법 가운데 하나가 될 수 있을 것이다.

 

1. 교회교육에 대한 동기부여

 

그리스도 중심의 성경적 교회교육의 핵심요소는 그리스도이시며, 그리스도의 말씀인 성경이다. 골로새서 316절에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라고 하였는데 그리스도의 말씀이 교회교육을 통해 그리스도인의 마음에 풍성해지도록 할 때 그리스도인의 믿음도 굳건하게 되고 건강하게 성장하게 된다. 이처럼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리스도인의 생명의 양식이며 성장의 촉진제이다. 이러한 성경의 중요성에 대해 존 맥아더(John MacArthur)는 다음과 같이 밝혀주고 있다.

 

성경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중심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주신 오류가 없고, 완전하며, 권위가 있으며, 충분한 하나님의 말씀이다. 성경은 진리, 행복, 승리, 성장, 권능, 인도하심을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자원이다. 성경은 영적으로 성장하는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핵심이다.

 

이처럼 그리스도인은 성경과 분리될 수 없으며 그리스도인의 생애에 있어 성경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성경을 공부하는 것은 그리스도 중심의 성경적인 교회교육에 있어 없어서는 안 될 필수적인 요소이다.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성경공부가 교회에 꼭 필요하다는 것을 딕 루카스(Dick Lucas)는 골로새서 127절을 강해하면서 이를 밝히고 있다.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것은 온전한 진리를 전파하는 것이며, 27절은 이 복음이 얼마나 영적 보물과 영광으로 가득 차 있는지 웅변적으로 묘사한다. 하지만 우리가 전파하는 그리스도는 사도들이 전한 온전한 그리스도가 되어야 한다(예를 들어, 1:15-20). 이것은 사람들이 성경을 더 잘 알지 못하면 그리스도를 더 잘 알 수 없다는 말이다. 오로지 강해 사역을 통해서만 하나님의 말씀은 온전히 알려질 수 있다.그런 성경 가르침과 성경 공부가 오늘날 교회에 꼭 필요하다.

 

이와 같은 성경공부는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는 날까지 자손 대대로 시대를 넘어 반드시 실천해야 하는 교회의 필수적인 사명 가운데 하나이다. 그러므로 성경공부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적으로 감당해야 하는 교회교육의 명령(6:1-9; 28:19-20)을 수행하는 것이 된다. 이에 대해 네비게이토 선교회의 리로이 아임스(Leroy Eims)는 성장하기를 원한다면 그리스도를 알게 하는 성경공부를 해야 한다는 것을 조언하였다.

 

성경공부를 위한 최상의 동기는 예수님 자신의 말씀 가운데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성경에 대해 언급하시면서, 예수님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5:39)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이면 누구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서 성장하기를 원해야 합니. 우리는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서 어떻게 성장합니까? 성경공부를 통해서입니다. 왜냐하면 성경 말씀이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계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춘기는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도록 양성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요소들이 필요한데 그 가운데 첫째 요소는 성경교육의 강화로 보고 한국교회가 성장하기 위해서는 먼저 성경교육을 강조하여야 한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만이 사람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이러한 성경공부의 필수성에 대해 강용원은 성경공부는 그리스도인에게 필수적인 일이며 풍성한 유익을 가져다준다는 것을 밝혔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을 알게 하는 성경에 대해 언급하면서 성경공부가 필수적인 요소라는 것을 강조하였다.

 

성경은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가르쳐준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사람과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확립하게 하고 이 세상 속에서 영적인 싸움을 수행하기 위한 장비를 갖추어 준다.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된 것으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길을 알려주는 책이다. 성경을 공부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으로 성장하는데 필수적인 요소이다.

 

이처럼 그리스도인이라면 성경공부는 반드시 해야 하는 필수 과정이다. 이러한 성경공부를 하면 할수록 성경 말씀이 그리스도인의 안에 풍성히 거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에베소서 518절에서의 성령님 충만의 내용이다. 무디(D. L. Moody)와 오랫동안 동역하였으며 무디성서대학 학장을 역임하고 무디기념 교회 담임목사였던 토레이(R. A. Torrey)아무리 성령에 충만하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끊임없이 공부하는 일이 이어지지 않으면, 곧바로 사라지고 마는 법이라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역설하였다.

 

바울이 성령 충만의 결과로 나타나는 현상(5:18-22)을 다른 곳에서는 그리스도의 말씀이 풍성히 거하는결과로 생겨나는 것으로 말씀하고 있다(3:16-18)는 사실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사도 바울이 알았던 성령 충만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깊고도 끊임없는 묵상과 필연적인 연관을 갖고 있는 것이었다. 이 모든 사실들을 한 마디로 정리하자면, 그리스도인의 삶과 봉사에 있어서 충만한 능력을 얻고 유지하기를 바라면,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을 끊임없이 섭취해야 한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섭취하려면 끊임없이 성경공부를 해야 한다. 그리할 때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섭취하게 된다. 그 결과로 영적 영양소를 섭취하게 되어 성장하게 된다. 제임스 몽고메리 보이스(James Montgomery Boice)는 성경공부가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인도를 받기 위한 것이라고 하였다.

 

삶의 방향을 정하고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 하나님의 인도가 필요하다. 우리의 생각이 인도를 구하는데 중요한 이유는 우리를 인도하는 믿음의 원리가 성경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신비한 계시로 우리를 인도하지 않으신다. 하나님께서는 만사를 섭리하시지만 우리는 사건과 상황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에만 의존할 수는 없다. 하나님은 대부분 성경을 통해 우리를 인도하신다. 하나님은 많은 경우 성경을 우리를 인도하는 유일한 방편으로 사용하신다. 하나님의 인도를 받으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열심히 연구해 이해한 다음 그 원리를 적용해야 한다. 사람들이 구원 신앙을 갖고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여 그대로 지켜 행하려면 그들에게 성경의 가르침과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를 전해야 한다.사람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믿는지를 알아야 한다. 무엇을 믿고 있는지 알지 못하면 단지 감정적으로 반응하는데 그치고 만다. 그런 믿음은 참 믿음이나 참 회심(回心)과는 거리가 멀다.

 

이렇게 성경공부를 하게 되면 큰 유익이 있게 되는데 성도들과 교회가 꾸준히 성장하게 되는 효과가 있게 된다. 성경말씀의 회복을 통해 부흥이 일어나기도 하는데 김남준은 한 책인 성경 말씀의 회복을 통해 부흥이 일어나게 되는 것으로 보고 있다.

 

신앙 부흥이 일어날 때마다 공통된 특징이 한 가지 있었는데 그것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고전적인 신앙고백이 실제의 삶의 실천을 통해 나타난 것입니다. 존 웨슬리와 조지 윗필드, 그리고 조나단 에드워즈 같은 신앙 부흥의 도구로 쓰여졌던 사람들은 성경을 당시 신앙에 있어서 바른 자리에 회복시켜놓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한결같이 한 책을 사랑했으며, 한 책을 가르치는 일에 생애를 바쳤으며, 그들의 꿈은 온 세상이 그 한 책에 기록된 대로 변화되는 것이었습니다. ‘한 책안에 기록된 약속들을 굳게 붙들고 모험적인 생애를 산 사람들이었으며, 무엇보다도 그 한 책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이었습니다. 위대한 영적인 각성과 신앙 부흥 한 가운데에는 언제나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권위를 회복하게 되는 일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부흥 가운데에는 성경이 곧 자유케 하는 위대한 능력을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임을 성경 속에서 체험한 설교자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회복하게 되면 개인의 삶에 있어서도 부흥이 일어난다. 성경말씀이 회복된 그리스도인의 실제 효과에 대해 임영효는 말씀을 사랑하는 자에게 약속되어진 축복에 대해 말하면서 미국의 백화점 왕 존 와나메이커(John Wanamaker)의 예를 들어 제시하고 있다.

 

와나메이커가 나중에 베다니 교회 외에 3개의 교회를 직접 세웠을 뿐만 아니라 다른 개척교회들을 돕는 일들에 자신의 물질을 아낌없이 드렸고, 놀라운 것은 세계 곳곳에 선교목적으로 YMCA 건물들을 지어주는 가운데, 우리 한국 땅에도 1908년에 서울 종로에 약 600평 규모의 웅장한 현대식의 YMCA 건물을 그가 보내온 거액의 기부금으로 짓게 되어지므로 국경을 초월해서 우리 한국 사람들에게까지 귀한 봉사를 했던 장본인이었다. 그가 지어준 서울의 YMCA 건물에서 김규식, 윤치호, 이상재, 이승만, 이승훈, 조만식 등의 애국지사들이 선교사업과 금주금연운동, 물산장려운동, 농촌계몽운동, 청소년운동, 독서운동과 야학과 장애인 사역 등 사회계몽운동을 활발하게 펼쳐 나가므로 한국의 선교운동과 민족의 독립운동을 위한 산파역할을 하는 이런 공헌을 하였던 것이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여 이 말씀을 늘 가까이 하고 이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삶을 살았기에 하나님의 말씀의 약속 그대로 놀라운 축복을 삶 속에서 누리고 체험하고 간증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오늘 이 시대에도 하나님은 이런 말씀의 사람을 찾고 계신다.

 

성경공부의 효과는 개인의 성장과 부흥뿐만 아니라 파급효과로 인해 지역교회도 성장하고 부흥하게 된다. 배굉호는 성경공부의 결과로 교회가 계속 성장하게 된다는 것을 언급하였다.

 

결국 성경공부는 교회성장을 가져온다. 말씀공부를 통해 은혜를 받으며 성장한 성도들의 삶이 변화되고, 헌신적으로 교회를 섬기며 열심히 복음을 전하고, 새 신자를 양육하며 이웃을 사랑하는 일을 통해 교회가 성장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 할 수 있다. 성경은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이다. 동시에 우리 성도들의 신앙과 생활의 표준이다. 하나님의 교회는 그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체계적으로 열정을 가지고 바르게 가르쳐야 한다. 말씀공부가 뜨겁게 불타오르는 한 주님의 교회는 생명을 유지하며 새로운 생명을 탄생시킬 것이다. 그리고 성경공부를 인도하는 인도자가 많은 교회는 계속 성장할 것이며 주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다. 훌륭한 성경공부 인도자가 많은 교회일수록 주의 영광을 더욱 더 나타나게 될 것이며 풍성한 주의 은혜가 계속 임할 것이다.

성경공부의 유익은 이와 같은 변화와 성장과 부흥을 가져오게 한다. 그러므로 성경공부는 필수적이다. 아울러 성경공부 그 자체만 하는 것이 아니라 적용이 있는 실천적인 성경공부도 필요하다. 배굉호는 성경 연구의 목적은 성경의 지식을 습득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교제하는데 있다. 내용이나 방법보다 중요한 것은 사람이라고 강조하면서 말씀을 적용하라고 촉구하였다. 이러한 실천적인 성경공부에 대해 강용원은 다음과 같이 적용에 힘쓸 것을 당부하고 있다.

 

성경공부에 있어서 부단히 강조되어야 할 사항은 적용이다. 적용되지 않는 성경공부는 의미가 없다. 성경은 연구 자체를 위한 책이 아니라 순종을 위한 책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른 순종을 위해서는 바른 해석이 필요하다. 언제나 성경의 본래 뜻을 찾기에 집중해야 하며 동시에 그 뜻에 순종하기를 더욱 추구해야 한다. 성경은 단순히 우리의 지식을 풍성하게 해주는 책이 아니라 우리의 행동을 요구하는 책이다. 우리의 문제는 많이 모르기 때문이 아니라 행동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경공부에 있어서도 적용부분은 가장 중요한 부분이 아닐 수 없으며 적용이 없는 성경공부는 미완성일 뿐이다. 만일 우리가 작은 부분이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적용하기 위해서 노력한다면 우리에게는 놀라운 변화가 생길 것이다.

 

그러므로 보다 강화된 그리스도 중심의 성경적인 교회교육을 하려면 성경공부의 필요성과 유익에 대한 것을 먼저 깊이 인식시켜줌으로써 교회교육에 대한 동기를 부여하여야 한다. 또한 지적인 만족을 채워주는 성경공부가 아니라 적용하고 순종하는 단계까지 도달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리하면 변화와 성장과 부흥이 일어나는 그러한 교회교육이 될 것이다.

 

2. 그리스도를 전파함

 

그리스도 중심의 성경적 교회교육의 방법은 예수 그리스도(!Ihsou'" Cristov")를 전파하는 방법을 통해 이루어지게 된다. 그러므로 교회교육의 사역자는 성경에 능통한 아볼로(18:24)성경으로써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증언하여믿는 자들에게 많은 유익을 준 것처럼(18:27, 28) 성경의 예수 그리스도를 가르쳐야 한다. 워렌 위어스비(Warren W. Wiersbe)는 골로새서를 강해하면서 전하는 대상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시다라고 하면서 거짓 선생들과 대비하여 다음과 같이 밝혀주고 있다.

 

거짓 선생들은 자기 자신을 높이며 자신의 위대한 영적업적을 찬양한다. 그들은 체계화된 가르침을 전파하나, 바울은 한 인격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한다. 영지주의자들은 인간의 철학과 허무한 유전을 전하나(2:8),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했다. 거짓 선생들은 율례와 규례들을 전하나(2:16-21), 바울은 그리스도를 전했다.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교회교육을 함에 있어 훈계하고 가르치면서 전파해야 한다. 단순히 전파만 하는 것이 아니라 훈계의 요소와 가르침의 요소를 내포시켜 전파해야 한다는 것이다. 골로새서 128절의 전파하는 행위는 엄숙하게 선포하는 중요한 행위이므로 주동사를 사용하고 있는데 전파가 주된 활동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128절의 전파하여(kataggevllomen)는 주동사이고 권하고(nouqetou'nte")가르침은(didavskonte")은 분사이다. 권하면서(admonishing) 가르치면서(teaching) 전파하는(proclaim) 상황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권하고훈계하고의 뜻이므로 그리스도를 전파함에 있어 전파만 하지 않고 훈계하고 가르치는 활동을 하면서 전파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전파하여(kataggevllomen)카탕겔로(kataggevllw)의 현재 능동형인 것을 볼 수 있다. 현재 능동형은 현재 계속해서 자발적으로 전파하는 것을 의미한다. 사도 바울이 현재적으로 자원해서 계속 전파하고 있는 상태를 말한다. 교회교육에서도 이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를 현재 계속해서 능동적으로 전파해야 하는 것이다. 그럴 때 각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각 사람으로 세워져(1:28) 가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교육의 사역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계속 능동적으로 전파해야 한다.

사도행전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를 능동적으로 전파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것은 성령님이 임하시면 나타나는 현상이 권능을 받고 예수님의 증인이 되기 때문이다(1:8). 성령님이 임하시면 예수님의 증인이 되므로 당연히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하게 된다. 예수님께서 전파하셨으므로(4:23, 9:35) 성령님이 임하시면 예수님처럼 전파하게 된다. 예수님께서도 누가복음 418-19절에서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고 말씀하신 그대로 예수님께 전파하시는 영이신 성령님이 임하시자 복음을 전파하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사도 바울에게도 성령님이 임하시자 즉시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전파하는 일이 일어났던 것을 사도행전이 이를 기록하고 있다(9:17-20).

이처럼 성령님은 전파하시는 영이신데 다른 그 무엇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하신다. 성령님은 성령님 자신을 드러내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역사하지 아니하신다. 성령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하신다. 성령님이 하시는 일 가운데 중요한 일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삼고(고전 12:3) 믿고 따르고 높이며 실제적인 구원을 받게 하신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나타내신다.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께서 뜻하신 바를 다 이루신 것을 성경대로 실제로 성취될 수 있도록 역사해주신다.

사도행전은 그 성령님께서 사도들을 사용하시고 도우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하신 것을 보여주고 있다. 오순절에 성령님이 임하시자 사도 베드로는 즉시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 증거하였다. 사도행전 214절을 보면 성령님으로 충만해진 베드로와 열한 사도가 함께 서서 소리를 높여 말하는 장면을 볼 수 있다. 그 설교 가운데 마지막을 보면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가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 다윗은 하늘에 올라가지 못하였으나 친히 말하여 이르되 주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하였으니,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2:32-36)고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한 것을 볼 수 있다.

이후 사도행전의 기록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하지 못하도록 막아도 계속 전파한 것을 볼 수 있다. 사도 베드로와 요한이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4:20)라고 하면서 위협을 받아도 계속 전파하였다. 이처럼 사도들의 전파는 장애물이 가로막아도 중단될 수 없었다. 예수님의 증인이 되었으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지 아니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들이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니라”(5:42)고 이를 증거해 주고 있다.

사도 바울도 예수님을 만난 이후 즉시 예수님의 증인이 되어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하였다. “음식을 먹으매 강건하여지니라 사울이 다메섹에 있는 제자들과 함께 며칠 있을새,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니, 듣는 사람이 다 놀라 말하되 이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이 이름을 부르는 사람을 멸하려던 자가 아니냐 여기 온 것도 그들을 결박하여 대제사장들에게 끌어가고자 함이 아니냐 하더라. 사울은 힘을 더 얻어 예수를 그리스도라 증언하여 다메섹에 사는 유대인들을 당혹하게 하니라”(9:19-22)고 이 사실을 설명하고 있다.

이후 가는 곳곳마다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하였다. 아무리 앞길을 가로막는 방해와 핍박이 있어도 그는 증거하는 일에 매진하였다. 이러한 모든 것은 예수님의 증인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일에 있어 목숨까지 내어놓고 나아간 것이다. 사도행전 마지막 28장 가운데 마지막 절인 30-31절을 보면 사도 바울의 전파 내용이 무엇인지를 볼 수 있다. “바울이 온 이태를 자기 셋집에 머물면서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담대하게 거침없이 가르치더라고 사도 바울이 마지막 순간을 보내면서까지 중점적으로 전파한 것은 하나님의 나라와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것이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예수님의 증인이 되면 자연스럽게 하나님 나라의 증인도 된다. 사도행전은 처음부터(1:3) 끝까지(28:31) 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것을 전해주고 있다. 예수님께서도 부활하신 이후 하나님 나라의 일에 관해 말씀하셨다(1:3).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님의 증인이 될 때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고 확장된다. 그러기에 제자들이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에 대한 질문을 하였을 때(1:6) 거기에 대해 예수님께서 대답하지 않으시고 성령님이 임하면 내 증인이 된다(1:8)는 말씀만 하신 것이다. 실제로 성령님이 임한 사도들은 예수님의 증인이 되었고 이들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가 전파되어졌으며, 이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바르게 전파되어질 때 하나님의 나라 역시 바르게 전파되어지는 것이다.

이처럼 성령님이 충만해질수록 점점 더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게 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시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장성한 자가 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더 많이 세워지게 된다. 그러므로 성령님께서 역사하실수록 예수 그리스도가 더 널리 전파되고 이를 통해 하나님 나라가 더욱 확장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일은 사도행전 28장에서 끝나지 않았다. 지금도 성령님이 임하신 예수님의 증인을 통해 계속 진행되고 있다. 오늘 이 시대의 교회교육의 사역자들에게도 역시 그 일이 맡겨져 있는데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일이다.

 

3. 훈계하면서 전파함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함에 있어 훈계하면서 전파해야 한다. 골로새서 128절을 보면 권하고(nouqetou'nte")라고 하였는데, 동사 원형은 누데테오(nouqetevw)훈계하다라는 뜻이다. NKJV·NRSV·YLT 영어성경에서는 경고하다”(warn), NIV·NASB 영어성경에서는 훈계하다”(admonish)로 본다.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함에 있어 훈계하는 요소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존 맥아더(John MacArthur)는 바울의 전파(“Paul’s proclamation”)에는 두 가지 측면(“aspects”)을 포함하고 있는데, 하나는 부정적인 측면이고 하나는 긍정적인 면을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부정적인 측면은 훈계(“admonishing”)이고, 긍정적인 측면은 가르침(“teaching”)인데 교리상의 가르침(“doctrinal teaching”)은 변함없이 실제적인 훈계(“practical admonitions”)로 뒤이어지는 것으로 보고 있다. 교회의 표지라고 하는 권징의 요소가 담긴 균형 잡힌 이러한 교회교육은 세속화를 방지해주고 신앙의 약화도 방지해 줄 것이다. 딕 루카스(Dick Lucas) 역시 예수 그리스도를 효과적으로 전파하려면 훈계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모든 사람에게 그리스도를 선포하려는 목적을 이루기 위해, 바울은 자신의 사역을 두 가지 보완되는 방식으로 기술한다. 소극적으로는, 어린 신자들을 권하여 필요할 때면 그들을 바로잡고 훈계했다. 적극적으로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온전한 뜻을 가르쳤다. 이것은 바울이 사역에 대해 균형 잡힌 견해를 갖고 있다는 또 하나의 예다. 목회적 교훈의 둘 중 어느 한 측면이라도 소홀히 하면 손해를 입게 된다. 우리라면 물러나고 싶었겠지만, 바울은 잘못과 악을 책망하는 썩 내키지 않는 일에서도 물러서지 않았다. 사람들이 자연히 길을 잃고 타락하며, 특히 교회가 신실하지 못하게 되는 타락한 세상에서는, 그런 부정적인가르침-그것은 때로 그렇게 불린다-은 피할 수 없다. 바울은 사람들에게 더 완전한것을 제시하여 거짓된 복음에 대해 경고함으로써, 사실상 그들을 구원한 복음의 온전함을 재발견하게 한다. 그는 그들에게 가짜 영성에 대해 경고함으로써, 그들을 참된 성숙의 길로 인도한다. 그는 교회에 거짓 사역에 대해 경고함으로써, 그리스도인들이 참된 사역의 표지를 재발견하도록 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경고들은 의도에서나 결과에서나 본질적으로 긍정적이며, 균형 잡힌 가르침의 사역에 필수불가결하다.

 

훈계는 필수불가결하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함에 있어 훈계하면서 전파해야 한다. 이를 통해 보다 효과적으로 전파를 할 수 있고 보다 완전한 자로 세워줄 수 있기 때문이다. 피터 오브라이언(Peter T. O’Brien)은 훈계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전파가 수행되는 것으로 보고 있다.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공적으로 선포하는 일이 권고(nouqetou'nte"-누데툰테스)와 교훈(didavskonte"-디다스콘테스)에 관한 이어지는 문장에서 설명되고 발전되는데, 그 이유는 모든 사람의 가르침과 경고를 통해 그리스도에 대한 선포가 수행되기 때문이다.바울과 그의 동역자들에게는 분명히 복음 전파와 선교사역이 그리스도에 관한 구원 메시지를 피상적으로 세상에 제시함으로써 그 효과가 나타난 것은 아니었고, 오히려 목회적 상황에서 경고와 철저한 가르침을 통해 수행되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할 때 훈계하면서 전파해야 하므로 존 파이퍼(John Piper)는 성경이 주는 훈계를 받게 된다면 자아가 희생되어 기쁨을 회복하게 되므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달려가 훈계를 달게 받아야 할 것을 권면하였다.

 

우리는 자신이 취하려는 행동이 어리석다는 경고를 받아야 할 때가 많다. 성경의 경고에 주목한다면 기쁨을 죽이는 수많은 선택을 피할 수 있으리라! 자비로운 하나님은 우리에게 옳은 길을 제시하셨을 뿐 아니라 잘못된 길을 선택하려 할 때 경고해 주는 책까지 주셨다. 경고는 우리를 겸손하게 만든다. 경고는 우리 자아를 희생시켜 생명을 구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주는 경고는 매우 자비로운 것이다! 이러한 경고는 그 경고 가운데서 위대한 의사의 선한 마음을 보는 사람들에게 말할 수 없는 기쁨의 근원이다. 그분은 모든 슬픔의 예방법과 치료법을 알고 계신다. 세상이 줄 수 있는 것으로 채워지지 않는 더 깊고 오랜 갈망이 있는가? 그렇다면 하나님의 말씀으로 달려가 선한 경고를 받으라.

 

설교에 있어서도 훈계의 요소는 필요하다. 천국의 삶을 누리려면 회개해야 한다. 회개하려면 귀에 거슬리지만 책망과 경고를 들어야 한다. 다윗 왕이 나단 선지자의 경고를 들었을 때 회개하게 되었고 회복할 수 있게 되었다. 한진환은 구속사적인 설교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다음과 같이 역설하고 있다.

 

구속사적 설교를 한다고 해서 매 설교마다 그리스도와 그의 구원을 기계적이고 습관적으로 언급해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그렇게 하면 교인들은 곧 식상하고 말 것이다.구속사적 설교라고 해서 늘 위로하고 축복하는 말로 채워져야 하는 것으로 오해해서도 안 된다. 인간은 본래 죄의 세력 아래 갇혀 있다. 따라서 구원 받기 위해서는 죄 아래서 사는 생활에 대해 당연히 책망과 경고가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메시지가 선포되어야 한다. 구원과 심판은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으로서 구원의 복을 누리기 위해서는 심판의 메시지를 받아야 한다. 그러므로 성령의 엄중한 책망도 구속사적 설교에서는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사도 바울이 밀레도에서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을 청하여 이르기를 그러므로 여러분이 일깨어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20:31)고 하였다. 윌리엄 헨드릭슨(William Handriksen)은 사도 바울이 가르칠 때 훈계하였다는 것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바울에게 있어서, 권면한다는 것은 경고하고, 자극시켜 주고, 그리고 격려해 주는 것을 의미했다.바울의 권면함과 가르침 사이에는 결코 넓은 간격이 없었다는 사실이 강조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 추상적인 교리란 존재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그에게 있어서 기독교적 윤리란 결단코 허공에 매달려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와는 정반대로, 바울의 가르침은 권면을 목적으로 행해졌으며, 그의 권면함이란 가르침에 뿌리를 박고 있었다.참으로 바울에게 있어서, 기독교란 하나의 삶, 오직 교리에 기초를 둔 하나의 삶 그 자체이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함에 있어 경고하여 깨우쳐주는 훈계의 요소도 포함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렇게 훈계하면서 전파하게 되면 보다 강화된 그리스도 중심의 성경적 교회교육을 할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훈계하면서 전파하여 보다 효과적인 그리스도 중심의 성경적인 교회교육을 수행해나갈 수 있어야 할 것이다.

 

4. 가르치면서 전파함

 

그리스도 중심의 성경적 교회교육은 예수 그리스도(!Ihsou'" Cristov")를 전파하게 되어 있다. 이렇게 전파함에 있어 가르치면서(didavskonte") 전파해야 하는데 가르치는 방법은 모든 지혜로 가르쳐야 한다. 골로새서 128절에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이라고 하였다. 사도 바울은 지혜를 2장에서 밝혀주고 있는데 먼저 23절에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느니라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지혜가 감추어져 있는 것을 밝혀주고 있다. 그러므로 모든 지혜로 가르친다는 것은 모든 지혜가 감추어진 예수 그리스도를 가르쳐야 한다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것을 가르치므로 아무도 교묘한 말로 속이지 못하게 하려고 하였다(2:4).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지혜가 있게 되면 그리스도를 따르지 않고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따르는 철학과 헛된 속임수”(2:8)에 사로잡히지 않게 된다. 장래의 그리스도의 그림자인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초하루나 안식일”(2:16, 17)을 이유로 비판받지 않게 된다. 육신의 생각에 따라 헛되이 과장하고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붙들지 아니하는 꾸며낸 겸손과 천사 숭배”(2:18, 19)를 이유로 정죄를 받지도 않게 된다. 세상의 초등학문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므로 세상에 사는 것과 같이 사람의 명령과 가르침에 따르지도 않게 된다.

이러한 왜곡된 것들은 자의적 숭배와 겸손과 몸을 괴롭게 하는 데는 지혜 있는 모양이나 오직 육체를 따르는 것을 금하는 데는 조금도 유익이없다는 것을 사도 바울은 밝히고 있다(2:20-23). 이러한 가르침은 지혜 있는 모양으로 보이지만 그리스도를 따르는 지혜가 아니므로 유익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무조건 열심히 많이 가르친다고 그리스도 중심의 성경적인 교회교육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벗어나면 헛되고 유익이 없는 가르침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 감추어져 있는 지혜로 교회교육하면 모든 신령한 지혜”(1:9)로 채워지게 되는 것이다. 이 지혜로 가르칠 때 비성경적인 교묘한 말에 속지 않게 되고(2:4) “그리스도를 믿는믿음이 굳건”(2:5)해지게 된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된다(10:17). 그러나 잘못된 들음은 잘못된 믿음을 가져오게 만든다. 그 믿음은 잘못된 지혜를 가져다주고 잘못된 행동을 하게 만든다.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지 않았기 때문이다. 올바른 믿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음으로 생기게 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음으로 풍성하게 마음속에 거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3:16)거하여(ejnoikeivtw)에노이케오(ejnoikevw)의 현재명령형으로 계속 거하라는 뜻이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풍성하게 계속 거하게 하라는 것이다. 거하게 하는 방법은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3:16)이다. “거하여는 주동사이고 가르치며(didavskonte")권면하고(nouqetou'nte")는 골로새서 128절과 동일한 단어로써 분사이다. 거하게 된 결과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게 되고 권면하게 된다는 것이 아니라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고 권면하면서 거하게 하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풍성하게 거하게 될 때 올바른 믿음이 생기게 되고 올바른 행동을 하게 된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풍성하게 거하게 됨으로써 분별력이 생기게 되기 때문이다. 분별력이 있으면 성경 말씀에 어긋난 행위를 용납하지 않게 된다. 허용하게 되는 것은 그리스도의 말씀이 풍성하게 거하지 못한 결과이다. 이러한 사실을 볼 때 모든 지혜로 그리스도의 말씀을 가르쳐 그리스도의 말씀이 풍성하게 거하도록 하는 그리스도 중심의 성경적인 교회교육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분별력이 점점 흐려지고 떨어져가고 있는 이 시대일수록 모든 지혜로 가르치는 그리스도 중심의 성경적인 교회교육을 강화시켜나가야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그리스도인들 속에 풍성하게 거해야 된다는 필수성을 창세기에 기록된 인류의 조상에서 그 예를 볼 수 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2:17)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이고,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3:5)는 사탄이 한 말이다. 이것을 분별하는 것이 중요한데 하와는 사탄이 하는 말에 현혹되어 그 나무를 보니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로 보였으므로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 남편에게도 줘서 먹게 하였다(3:6). 그리하여 인류의 파탄이 시작되어 부부갈등이 생기고(3:16), 고역하게 되었다(3:17). 더 심각한 것은 모든 면에서 좋은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것이다(3:24).

늘날에도 어떤 것을 기초로 해서 가르치고 배우느냐에 따라 명암이 좌우된다. 무엇을 들려주고 듣느냐에 따라 흥망성쇠가 갈리게 된다. 지혜롭게 보여도 아닌 것이 있으므로 분별해 내야 한다. 이러한 분별력은 그리스도의 말씀이 마음속에 풍성하게 거하게 할 때 생긴다. 하와가 하나님의 말씀을 가득 채우고 있었으면 그 믿음이 더 커서 사탄이 하는 말에 속지 않았을 것이다. 오늘날에도 그리스도의 말씀이 풍성하게 담겨 있으면 다수나 유명한 사람이 하는 발언과 사상과 신학이라고 해서 속아서 따라가지 않게 될 것이다. 성경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므로 속이는 자들이 속이려고 해도 속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딤후 3:13-15).

 

(1) 설교를 통한 가르침

 

교회교육은 설교를 통해 가르치는 것도 포함하고 있으므로 모든 지혜로 가르침에 있어 설교는 교회교육의 방법 가운데 하나이며 중요한 사역에 해당된다. 열두 사도가 모든 제자들을 불러 우리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리라”(6:4)고 한 것에서 볼 수 있다. 이러한 말씀 사역의 중요성을 볼 때 교회교육에 있어 말씀 사역에 우선권을 둘 필요가 있다는 것을 존 스토트(John R. W. Stott)는 다음과 같이 밝혀주고 있다.

 

설교란 기독교에 있어서 필수불가결한 것이다. 나는 설교가 있어야 됨을 믿으며, 더 나아가 참되고 성경적인 설교의 회복 외에는 다른 어떤 것도 교회에 건강과 활기를 되찾아 주지 못하며, 성도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성숙케 해주지 못한다는 것을 믿는다.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에 사도들이 설교 사역에 우선권을 두었던 사실은 특별히 사도행전 6장에 기술되어 있다. 그들은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4)에 전념하기 위해 다른 형태의 봉사에 빠져 들려는 유혹을 물리쳤다. 예수와 사도들의 사역에 있어서 설교와 가르침이 차지하는 위치는 그처럼 두드러진 것이었다. 그러므로 초기 교회 교부들 모두가 설교를 한결같이 강조한 것은 그다지 놀랄만한 일이 아니다.

 

설교의 요소 가운데는 교육의 요소가 내포되어 있으므로 설교할 때 교육도 하게 되는 것이다. 루터의 설교는 교육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을 임군학은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는데 설교는 교육을 떠나 생각할 수 없는 것으로 보고 있다.

 

루터에게 설교와 교육은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으로 설교는 교육의 효과를 높이는 교육의 한 기능이기도 했다. 루터의 교리문답에 관한 설교들은 단순히 선포하는 설교의 방법이 아니라, 교육적인 설교로서 신앙의 성숙에 그 초점을 맞추고 있다. , 이미 구원받은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신앙이 성숙하도록 하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이다. 오늘날 설교학에 있어서 강조되고 있는 설교는 성경본문 강해중심의 설교인데 이것은 설교의 방법론과 형태의 다양성 속에서 이해되어야 할 문제이다. 중요한 것은 어떤 형태의 설교를 하든지 간에 모두가 하나님의 백성을 가르치고 깨우치며 신앙을 양육시킨다는 교육과의 관계를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설교를 통해 교육의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는 방법론을 모색하고, 어떻게 하면 더 효과적으로 설교를 통해 교육할 수 있는가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끊임없이 연구하고 개발해야 할 것이다.

 

설교가 설교다워지려면 예수 그리스도를 설교해야 하는데, 말틴 루(Martin Luther)말틴 루터의 종교개혁 3대 논문(Martin Luther’ Three Treatises) 보면 예수 그리스도가 설교되어져야 한다는 것을 다음과 같이 피력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마치 그리스도의 업적과 삶과 말씀에 대한 지식이 처세(處世) 위해 충족스러운 것인양 이것들을 역사적인 사실로만 설교하는 것은, 충분치 못하거나 혹은 어떤 의미에서 보아 크리스천적인 것이 아니라는 점이 이제 명백해졌다는 것을 나는 확신한다. 그러나 이런 견해는 오늘날 우리의 훌륭한 설교자로 여김을 받아야 할 사람들 가운데도 유행되고 있다. 그리스도에 대해서는 전혀 아무 것도 말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인간의 율법과 교부들의 교령(敎令)을 가르치는 것은, 매우 불충분하거나 혹은 전혀 기독교적인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사람들의 감정을 움직여 그리스도를 동정하고 유대인들에 대해서 격분하도록 그리스도에 관해 설교하고 해석하는 것 같은 어리석고 나약한 헛소리를 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도리어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이 수립되어, 그리스도께서 그리스도 될 뿐만 아니라 당신과 나를 위한 그리스도가 되며 또한 그에게 대해서 말해진 것과 그의 이름으로 표시된 것이 우리 가운데서 효과가 있게 되기 위해, 그리스도가 설교되어져야 한다.

 

마틴 로이드 존스(Martyn Lloyd-Jones)는 무엇을 설교해야 하는지를 언급하면서 다음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풍성하심에 대해 설교하고 복음의 진수를 설교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어떤 특별한 문제에 대한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전파하고 가르치는 것까지도 기독교 목사의 주된 임무는 아닙니다.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요를 평화주의 정도로 격하시키려는 자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그것을 매 주일 설교합니다. 전쟁은 절대적인 죄악이고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친절하게 대하고 어떠한 것에 대해 싸우기를 거절한다면 우리는 훨씬 더 행복해질 것이라고 그들은 가르칩니다. 그들에게 있어서는 그것이야말로 기독교의 전부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사도가 여기에서 가르치고 있는 복음의 크고 놀라운 정의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들입니다. 매주일 목사들이 말하고 있는 국제정세에 대한 화려한 모든 의견 발표에 대해 생각해 보십시오.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요에 대해서는 그 어느 곳에서 말할 틈이 있겠습니까? 모든 윤리적 도덕적 호소와 국가의 이름으로 규칙적으로 반복하고 있는 호소를 생각해 보십시오. 어느 곳에서 그리스도와 그의 측량할 수 없는 풍요에 대해서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복음을 우스꽝스러운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며 시간의 낭비일 뿐입니다. 그것은 주어진 의무와 임무를 거절해 버리는 일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바울은 무엇을 전파하고 있는 것입니까? 우리는 무엇을 전파해야 합니까? 필수적이고 우선적인 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 자신을 전파하는 일입니다. 풍요는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요입니다. 그리스도와 그가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 복음의 정수입니다. 복음의 정수는 우리가 할 일과 주께서 우리에게 하라고 요구하시는 것이 복음의 정수가 아닙니다. 그것은 그 다음의 문제입니다. 분명히 복음의 시작과 본질은 주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 즉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받는 그것입니다.

 

설교의 시작도 끝도 예수님이 되어야 한다고 하용조는 피력하고 있다. 목사는 지성이나 사상을 전하는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을 설교 속에 전하는 사람이므로 설교 속에 예수님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언급해주고 있다.

 

설교의 시작도 예수님이요 끝도 예수님이다. 설교 시간은 나의 위대한 웅변이나 논리나 지성을 보여 주며 사람들을 끄는 시간이 아니다. 어떤 사람의 설교를 들어 보면 이 시대를 꿰뚫어 보는 날카로운 눈 같은 것이 있다. 그러나 그 속에 예수님이 있는가 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목사는 위대한 사상가도 아니고 예리한 지성을 갖고 있지도 않다. 비록 소박해 보일지 몰라도 나를 용서하시고 나를 격려해 주시고 나를 구원하신 예수님이 항상 설교 속에 있어야 한다. 결국 예수님을 전해 주는 것이 설교이다.

 

사도 베드로의 설교를 보면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에 대해 임영효는 베드로의 설교는 모든 전도가 예수님의 근본적인 대속적 측면과 주와 그리스도로서의 역할을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 요소를 포함해야 한다는 것을 밝힌다라고 하였다. 이와 같으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설교를 보다 강화시켜 나가야 할 것이다. 그 결과 보다 그리스도 중심의 성경적인 교회교육이 되어 성도들의 신앙을 확립시켜주고 성장시켜줄 것이다. 그러한 이들을 통해 교회의 건강한 성장도 하게 될 것이며 세상 속의 소금과 빛의 역할도 감당해 나가게 될 것이다.

 

(2) 교리공부를 통한 가르침

 

모든 지혜로 가르침에 있어 교리공부를 통해서도 가르치게 된다. 그 결과 신앙의 성장이 있게 되며 이단에도 대처하게 되는 것이다. 로새서는 이단에 대처하여 예수 그리스도(!Ihsou'" Cristov")의 탁월하심을 강조하였다. 단에 대처하기 위한 효과적인 방법은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데 있다. 이에 대해 김의환은 바울의 때에도, 바울이 키워놓은 양떼들인데도 이리떼가 와서 그들을 이단으로 몰아가는 일을 경계하고 있습니다. 하물며 오늘날 일반 목회자들이 키운 양떼들이 이단으로 넘어가지 않는다고 누가 보장하겠습니까?”라고 질문하면서 그렇다면 어떻게 막아야 합니까? 말씀으로 가르쳐 말씀으로 무장할 때만 막을 수 있습니다라고 제언하였다. 권호는 교리설교를 통한 신앙교육의 필요성에 관해 언급하면서 교리에는 성경의 핵심 내용이 짧고 정확한 형태로 압축되어 있다는 것을 밝히고 그러므로 효과적 방식으로 교리를 설교해서 성도들을 교육함으로 단시간 내에 성도들에게 성경의 핵심 진리를 가르칠 수 있다는 것을 밝혔다. 맥아더(John MacArthur)는 교리교육을 통해 자라나게 되는 것을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교리교육을 통해 믿음이 자리를 잡게 되면 성장하게 된다는 것이다.

 

바울은 골로새 교회의 교인들에게 권면하였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아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2:6-7).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자라는가? 믿음, 곧 기독교의 내용과 성경의 교리 안에서 자리잡고 자라게 된다. 성경을 이해하면 할수록 보다 더 깊게 뿌리를 내리고 자라게 된다.

 

성희찬은 우리 시대의 특성을 생각할 때 교리공부는 더욱 필수불가결하다. 잘 아는 대로 우리 시대는 감성주의와 반지성주의, 그리고 상대주의가 영향을 끼치고 있으며 더욱이 이단의 거센 공격과 차세대 신앙 전수의 요청 앞에서 시대적 사명을 가지고 있다라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그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교리를 공부한다고 할 때 공부한다는 행위는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 이론적인 학습을 가리키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신앙에는 여러 영역이 있다. 신앙의 내용에 대한 지식의 측면 이외에도, 신앙은 주관적으로 확신되어야 하기에 확신의 측면, 또 신앙의 체험, 신앙의 결과(열매), 신앙의 윤리적 측면 등이 모두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교리를 공부할 때 머리는 물론이고 가슴과 손을 사용해야 할 것이다. 죽어 있는 문서를 공부하는 것이 우리의 목표가 아니다. 교리를 공부하는 우선 목표는 생활에서 나의 위로를 위해서이다. 이 점에서 교리공부는 실존적이다. 교리공부를 통해서 나의 비참과 죄를 더욱 알아가고, 내가 어떻게 구원을 받았는가를 알아가고, 구원 받은 이후 어떻게 감사하며 살 것인가를 알아가는 것이며, 이로써 주께서 주시는 위로를 내가 얻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날에 있어서도 교회교육에 있어 교리교육을 강화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러기 위해 주일학교의 교회교육에도 힘써야 한다. 전광은 존 와나메이커(John Wanamaker)가 세계 주일학교 연합회 총재로 선출된 후에 세계 주일학교 대회에서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전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저는 주일학교에서 배운 성경교육이 저의 일생에 기본적인 교육이 되었습니다. 여러분들도 알다시피 저는 세상적인 공교육은 거의 받지 못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주일학교에서 평생 성경을 공부했고, 그 시간은 제 인생에서 가장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다른 데서는 얻을 수 없는 지식을 성경을 통해 배웠습니다. 또한 성경으로 제 인생의 확고한 삶의 원칙과 기초를 세웠고, 성경의 바탕 위에 저의 인격과 사업을 건설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받았던 이 주일학교 교육이 너무나 귀했기에 이 사역을 위해 제 인생 전부를 투자했습니다. 저는 성경에서 구세주 되신 예수님을 만났으며, 제 인생의 변화를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연약하고 보잘 것 없는 인생이었지만 저의 힘과 능력이 되신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분과 동행했을 때, 모든 두려움은 사라졌고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용기와 확신을 얻게 되었습니다. 성경을 읽을 때마다 새로운 아이디어와 비전을 주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주일학교 학생들에게 교리교육을 실시하여 거둔 성과에 대해 제임스 몽고메리 보이스(James Montgomery Boice)는 다음과 같이 소개해주면서 성경을 가르치는 교리교육의 필요성을 피력하고 있다.

 

주일학교 교육 프로그램과 더불어 성경 암송 프로그램도 개발해 어린 학생들은 성경 구절의 일부를, 고학년들은 성경 구절 전체와 짧은 성경 단락을, 성경학교 3년생에게는 성경의 긴 장 전체를 몇 개씩 외우게 했다. 그 밖에도 우리는 어린아이들에게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을 토대로 간단한 요리문답을 외우게 하는 한편 교회가 옛날부터 애창해온 위대한 찬송가를 가르쳤다.이 방법이 과연 효과가 있을까? 성경의 진리를 가르치지 않으면 인간의 마음을 거듭나게 하시는 성령님의 사역도 불가능하다. 물론 중생(重生)과 성장은 인간의 사역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역이다. 하지만 성경에 기록된 구원의 계시를 통해서만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에 성경의 위대한 진리를 가르치는 일은 반드시 필요하다.

 

오늘날 기승을 부리는 이단에 대처하기 위해서도 교리교육을 강화해야 한다. 이단을 경계하고 이단에게 경고도 해야 하지만 교회 내에서 교리교육을 확산시켜 진리에 대한 분별력을 향상시키고 올바른 성경적 세계관을 확립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최정철은 교리를 효과적으로 가르치는 방법을 제시해주고 그에 대한 효과를 밝혀주고 있다.

 

오늘날 성도들은 교회에서 신조나 교리를 가르친다고 하면 거부반응을 보인다. 딱딱하고 지루하고 재미없다는 선입견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고 신조에 대한 가르침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신조를 정확하게 이해하게 되면 무엇보다 우리가 믿는 신앙의 진리를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고,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풍성한 사랑과 은혜를 더 깊이 깨닫게 된다. 그리고 이것을 통해 이단들의 거짓 주장들도 제대로 분별하고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있게 된다. 신조를 성도들에게 가장 효과적으로 가르치는 방법은 설교를 통해 교리를 강해하는 것이다. 특히 주일오후예배나 수요기도회의 설교 시간에 신조의 내용을 가지고 설교하는 것도 한 방법이 될 것이다. 그 밖에도 교회 안에 교리성경공부반을 운영하거나 신조와 관련 서적을 읽도록 권장할 수도 있다. 특히 요즈음에는 만화로 된 교리해설서도 있어서 어린이 교리 교육에 큰 도움이 되고 있다. 교회가 이러한 방법을 통해 교리교육에 힘쓴다면 사탄과 이단의 공격으로부터 한국교회와 성도들을 보호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어느 때보다 이단들의 미혹이 교묘해진 오늘날에 있어 성도들과 교회를 보호하기 위한 교리교육이 시급하게 되었다. 조영호는 기존 교회 안에서 성경적인 욕구를 채우지 못하면 헛된 가르침에 빠져들게 되므로 깊은 성경지식과 신학적인 가르침을 보다 더 철저하게 가르쳐야 한다는 것을 촉구하였다. 성경을 바르게 가르치는 것만이 최상의 예방책이 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교회교육을 해야 하는데 다음과 같이 교육해야 할 것을 제언하였다.

 

첫째, 성경을 잘 알도록 교육해야 한다.대다수의 이단들은 성경의 절대적인 권위를 부정하거나 성경 계시의 완전성을 부인한다. 따라서 성경에 나타나 있지 않은 주장들을 억지로 내세우기 일쑤이며 특히 개개인의 체험 등을 중요하게 여기기도 한다. 그러므로 성도들이 성경에 대한 올바른 지식이 없으면 이단들의 잘못된 가르침을 분별하지 못하고 속아 넘어갈 수밖에 없다. 따라서 올바른 성경에 대한 지식을 얻기 위해선 규칙적으로 성경을 정독해야 하며 정기적으로 교회에 출석하여 설교를 들어야 한다.

둘째, 정통 교리를 잘 알도록 교육해야 한다.정통 기독교 교리는 조직신학을 통해 연구되어 신앙 지도자들의 공인을 받아 정립되는 것으로 기독교 신앙과 신학의 중심 골격을 이루는 것이다. 기본적인 정통 교리는 삼위일체의 하나님에 대한 것과 신성과 인성을 가지신 분이며 우리의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것, 그리고 보혜사 성령에 관한 지식, 구원과 관계된 지식과 교회에 대한 지식, 인간에 관한 교리, 끝으로 종말에 관한 것들이다. 이런 것들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이 있다면 이단들의 유혹에 쉽게 넘어가지는 않을 것이다.

셋째, 이단에 대한 정보에 민감하도록 교육해야 한다. 오늘도 이단들은 끊임없이 활동하고 있고 교회에 침투해 들어오고 있다. 이단들의 활동에 대해 일거수일투족까지 다 알고 있다면 더 바랄 나위 없이 좋은 일이겠지만 바쁜 삶을 살아가는 현대의 성도들은 그럴 수 없을 것이다. 이단들 중에는 잘 알려진 이단들 외에도 저것이 이단인지 아닌지 구분할 수 없는 것들도 많다.

 

이단에 대해 국가가 권한을 가지고 대응할 수 없으므로 교회가 대책을 강구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 교리교육을 해야 하는데 이와 같은 교리교육은 이단에 강력하게 대처하는 도구가 될 뿐만 아니라 성도들과 교회의 보호와 성장에도 큰 유익을 주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보다 강화된 교리교육을 하기 위해 교회교육에 있어 교리교육을 필수과정으로 채택하고 철저하게 가르쳐야 할 것이다.

 

 

 

[ⓒ 2023 성경적 교회교육 신학석사학위논문 로고스성경연구소 소장 이서영 성경적 교회교육]

(논문명 "골로새서 1 24~28절에 나타난 그리스도 중심의 성경적 교회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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