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것을 인정하되 예수님 안에서 하나 되어야함
다른 모습, 다른 기질, 이것은 못 고친다. 고쳐서도 안 된다. 그런데 다른 것 때문에 시험든다. 올바른 시험이 아니다. 다른 것을 인정해야 한다. 시험들고 상처받을 일이 아니다. 다른 것이 당연하다.
고신대학교 문헌정보관에서 잠시 쉴 때이다. 위에서 보면 운동장이 한 눈에 보인다. 한쪽에서는 축구를 열심히 하고 있고 다른 한쪽에서는 농구가 한창이었다. 때론 고함소리치면서 때론 우습다고 낄낄 거리면서 재미있게 운동하고 있었다. 그런데 축구와 농구는 엄연히 다르다. 구기운동이라는 공통점이 있지만 너무 다르다. 달라도 너~무 다르다. 축구는 발로 공을 다루고 농구는 손으로 공을 다루기 때문이다. 그런데 축구든 농구든 운동방식은 달라도 각자 취미에 따라 운동한다.
그런데 서로 비난하기 시작하면 어떻게 되겠나? 축구하는 학생은 농구하는 학생더러 "그것도 운동이냐?"라고 핀잔주고 농구하는 학생은 축구하는 학생보고 "손으로 공을 다루어야지, 발로 차면 되냐?"라고 하면 끝없이 다투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서로 인정해야 할 문제를 가지고 쓸데없이 서로 힘을 낭비하고 결국 서로 감정까지 상하게 된다. 이 얼마나 부질 없는 일인가!
우리는 서로 달라도 하나다. 무조건 똑같이 생각하고, 똑같이 옷 입고, 똑같은 음식을 먹고, 똑같은 집에서 살고, 똑같은 차를 타고 다니고, 똑같은 신발을 신고 다니는 획일적인 로봇과 같은 존재가 아니다. 똑같이 대량으로 찍어내는 과자만 해도 다양하다. 사탕, 빵, 아이스크림, 껌, 초코렛 등 얼마나 많은가! 사탕 종류 가운데서만 해도 수없이 많다. 그런데 똑같은 과자만 있어야 한다면 어떻게 되겠나? 과자의 모습과 종류가 달라도 너~무 다르다. 그러나 과자라는 공통점에서 보면 하나이다. 과자라는 것이다.
우리는 절대 똑같지 않다. 이것을 확실하게 인정해야 한다. 이 점을 인식하게 되면 충돌이 적어진다. 신앙생활, 가정생활, 사회생황에서 다르다는 것을, 다른 방식으로 산다는 것을 인정할 때 다툼은 줄어들고 속이 상한 것도 줄어든다. 다르다고 해서 나쁜 것도 아니고 틀린 것도 아니다. 그저 다를 뿐이다. 다른 것을 인정하자!
'왜 저렇지?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지? 그렇게 하면 안 되는데.' 아니다. 당연히 그렇게 한다. 그렇게 한다고 해서 잘못된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것을 잘못된 것으로 여긴다. 아니다. 똑같지 않다. 그러므로 서로 인정하고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지? 참 잘하네.'라는 방식으로 우리의 생각과 시각을 바꿔야 한다.
다른 점을 서로 불쌍히 여겨야 하고 감싸줄 수 있어야 한다. 무너지게 하는 자가 아니라 세워주는 자가 되어야 한다. 다른 것을 흠잡지 말아야 한다. 흠 잡으면 스스로 붕괴된다. 다르다고 치고받으면 함께 무너진다. 그러므로 다르더라도 함께 갈 수 있어야 한다. 약점은 감싸주고 강점으로 서로 힘이 되어줘야 한다. 서로 불쌍히 여기고 감싸줄 때 그 조직은 살아난다. 가정도, 학교도, 사회도, 국가도, 교회도 살아난다.
'왜 나처럼 하지 않지? 왜 똑같지 않지?'라는 생각을 버리자. 다른 것 자체 때문에 마음 아파하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다. 남자와 여자가 다르다. 모습도 다르고 생각도 다르고 사는 방식도 다르다. 똑같이 만들려고 하지 말자. 어림없는 일이다. 그러다보면 다툼만 일어날 뿐이다. 다른 것 자체를 가지고 문제삼으면 안 된다. 다른 것을 인정할 줄 알아야 한다.
내 모습만 해도 얼마나 다른가? 전체적으로 보면 나의 모습이지만 하나 하나 뜯어보면 모두가 다르다. 손과 발이 다르다. 손을 보면 손가락이 서로 다르다. 발가락도 마찬가지이다. 얼굴도 다르다. 얼굴에 있는 눈과 코와 입과 귀도 다르다. 몸 안의 장기도 서로 다르다. 온통 다른 것 뿐이다. 똑같이 생긴 것은 하나도 없다. 다르다고 해서 내가 잘못된 인간인가? 그렇지 않다. 지극히 정상이다.
인간사에 있어서 다른 점을 인정해야 하지만 신앙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기독교인으로서 똑같을 수 없다. 신앙생활이 다르다고 해서 지옥에 가는 것은 아니다. 다른 것은 악이 아니다. 나쁘거나 틀렸거나 잘못되었거나 죄가 아니다. 예수님을 유일한 구세주로 믿지 아니할 때 잘못되고 지옥에 가는 것이다. 그러나 신앙생활의 모습에 있어서는 다른 방식이 있을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신학에 있어서 다원주의를 인정하는 것은 아니다. 신앙생활의 다양성을 인정하자는 것이다.
성령이 충만하다고 해서 똑같아 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성령이 충만해 질 때 은사가 다르게 나타나고 9가지의 성품의 열매도 다르게 나타난다. 어느 한 부분 내지 여러 부분에서 뛰어나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성도가 똑같아 지는 것은 아니다. 서로 다른 은사로 섬기게 된다. 서로 다른 역사가 일어난다. 내가 생각하는 방식으로 나타나지 않는다고 해서 배척하는 것은 올바른 태도가 아니다. 진리 안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다양성이 있다고 해서 마냥 다른 것은 아니다.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 한 성령으로 한 은사를 받고 한 열매를 받기에 공통적으로 통일성을 유지하게 된다. 건물에는 기초가 있고 골조가 있고 기둥과 벽이 있다. 이것만 있으면 건물이 성립되지 않는다. 지붕과 벽을 만들고 인테리어를 해야 한다. 모두가 벽이고 모두가 기둥이면 건물이 될 수 없다. 성전이 그러하다. 그리스도의 몸이 그러하다. 우리 각자는 서로 다른 각각의 지체이지만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고 있다.
우리의 공통점은 무엇인가? 다양성을 인정하는 가운데 추구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각각 다른 재료들이 모여 아름답고 살기좋은 건물을 만드는 것처럼 우리의 모임을 통해 이루어야 할 아름다움은 무엇인가? 악기만 해도 얼마나 종류가 많은가? 현악기, 관악기, 타악기 등이 있다. 각각의 종류로 들어가 보면 더 많다. 합창단도 마찬가지이다. 테너와 바리톤, 소프라노와 알토가 있다. 그런데 모여서 아름다운 좌화를 이룬다. 그러면 각기 다른 우리는 무엇을 아름답게 조화롭게 이끌어내야 하는가?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의 하나 됨이다. 우리의 신앙모습이 달라도 우리의 모습을 통해 드러나야할 것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다른 예수는 안 된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이셔야 한다. 인위적인 예수, 지어낸 예수, 자신이 만든 예수, 자칭 예수, 예수 사칭하는 것은 예수가 아니다. 이름만 예수이지 실제로는 가짜 예수이다. 예수의 이름으로 모였다고 해서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는 구약성경에서 오신다고 하신 그 예수를 믿고, 신약성경을 통해 알 수 있는 오신 예수, 그리고 다시 오시겠다는 예수를 우리는 믿고 의지하고 따라야 한다. 그러므로 기독교를 교파의 이름으로, 기독교라는 이름을 내걸고 행사를 한다고 해서 모두 기독교가 아니다. 예수 흉내내고 예수 이름을 도용하는 가짜 기독교일 뿐이다.
우리는 분명 서로 다른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믿는 바에 있어서 다른 것을 인정하면 안 된다. 살아계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 이외에 다른 것을 인정하면 안 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유일한 구세주로 믿고 하나가 되어야 한다.
오늘날 이 신앙이 너무 흐려지고 있다. 서로 다른 것을 기준없이 인정하다보니 혼란이 온 것이다. 기독교인으로서의 서로 다른 신앙생활의 모습은 어느정도 인정할 수 있다. 하지만 삼위일체의 하나님은 유일하시고 예수 그리스도 이 외에는 구원이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해야 한다. 성경이 절대진리임을 믿고 가르치고 배우고 따라야 한다. 오직 삼위일체의 하나님! 오직 예수님! 오직 성경! 오직 믿음!
(이서영 로고스성경교육원 원장, 참좋은제자들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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