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은 외형에 감탄하셨는가?
수치는 우리로 하여금 병들게 만든다. 수치가 작으면 위축시키고 수치가 크면 으슥거리게 만든다. 수치가 작은 자와 수치가 작은 교회를 무시하고 업신여기게 된다. 그래서 서로 지지 않으려고 수치를 향상시키려고 혈안이 된다. 그러다 보면 인간적인 수단과 방법이 동원되기도 한다. 이처럼 수치는 우리가 빠른 속도로 세속화되도록 만드는 강력한 도구이다.
예수님은 외형의 크기에 감탄하셨고 추구하셨는가? 아니다. 바리새인의 경건해보이는 겉모습에 감동받지 않으셨다. 오히려 겉만 깨끗하게 회칠한 무덤으로 비유하시고 책망하셨다. 화려하고 웅장한 성전을 보시고는 어떠셨나? 탄복하시고 참 잘 지었다고 하셨는가? 호화로운 성전이 얼마가지 않아 무너진다고 하셨다. 그것도 돌 위에 돌 하나도 얹혀 있지 않을 정도로.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우리가 추구하는 힘이나 외형이나 수치는 그런 결과를 가져오게 만든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세속화되고 그 결과로 몰락을 맛보게 된다. 그래서 그런 방식을 추구하지 말라고 하신 것이다. 오히려 작은 자에게 관심을 가지라고 하셨다. 작은 자, 작은 것을 우습게 여기지 말고 무시하지 말고 힘써 겸손하게 섬기라고 하셨다. 외적인 것에 치중하지 말라고 하셨다. 외적인 종교, 외적인 성전, 외적인 모습에 현혹되지 말기를 바라셨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조차도 성전이 얼마나 잘 지었는가를 예수님께 은근히 자랑했다. 수치와 외형은 눈을 가린다. 마음을 가린다. 하나님 사이를 가로막고 하나님의 말씀이 먹히지 않도록 한다. 참으로 무서운 것이다.
우리는 현실을 무시할 수는 없다. 현실 속에 살지 않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다만 그곳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의 문제가 남아 있다. 크기를 추구하는 현실 속에서 거꾸로 산다는 것은 매우 힘든 선택이다. 자칫하면 현실 앞에 굴복당하고 무너지기 십상이다. 날마다 닥쳐오는 현실의 문제를 극복하기란 참으로 어려운 과제이다. 그러나 그렇더라도 이겨내야 한다.
야곱은 거부가 된 적도 있었지만 한평생을 험난한 세월을 보냈다고 했다. 하지만 다리를 절고 다니면서도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삶을 살았다. 사도 바울 역시 감옥에서 오랜 세월을 보냈다. 그럴지라도 하나님께 영광돌리면서 복음을 전했다. 흥망성쇄와 상관없이 살았다는 것이다. 영원토록 신실하신 하나님을 믿고 그 하나님의 말씀을 철썩같이 믿고 승리하는 삶을 살았다.
이러한 것이 우리에게도 요청된다. 우리는 현실의 흥망성쇄에 너무 민감해져 있다. 그것으로 모든 것을 평가하기도 한다. 육안으로 평가하면 제대로 볼 수 없다. 영안으로 봐야 제대로 평가할 수 있다. 현실 속에 흥망성쇄로 우리의 신앙과 교회를 평가하면 안 된다. 겉모습이 어떤지에 따라 판단하면 안 된다. 그러한 기준에 휩쓸리지 않아야 한다.
하나님 앞에 바로 서는 것이 중요하다.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의 역사에 동참하는 것이 참 모습일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수치의 유혹에서 벗어나 영적으로 성숙하는 것이 시급하다. 그래도 여전히 수치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가? 그렇다면 한 가지 제안을 하겠다. 영적인 일의 수치에 관심을 가져보는 것은 어떠하겠는가? 예를 들면 전도의 수치, 헌금의 수치, 구제의 수치, 사랑과 용서의 수치, 예배와 기도의 수치를 높일 생각은 없는가?
(이서영 로고스성경교육원 원장, 참좋은제자들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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