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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적강해/주일설교

[사순주일] 예수님과 상관없이 사는 사람 (막 14:32~50)

by 이서영 목사 2015. 7. 17.

[사순주일] 예수님과 상관없이 사는 사람 (막 14:32~50)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 기도하러 가셨을 때 심히 놀라시며 슬퍼하셨습니다. 죽음에 이를 정도로 극에 달한 슬픔을 당하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성경대로 참혹한 십자가에서 죽으셔야 했기에 괴로워하고 비통하게 여기셨습니다. 그래서 할 수 만 있다면 이 때가 비켜갔으면 했습니다. 코앞에 다가온 십자가를 지지 않았으면 했습니다.

 

그런데 이것과 더불어 마음 아프고 슬픈 것이 또 있었습니다. 아무 잘못도 없는데 억울하게 죄인의 손에 팔린 것입니다. 죄인들에게 수난 당하신 것입니다. 본문 14장 43절.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에 곧 열둘 중의 하나인 유다가 왔는데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에게 파송된 무리가 검과 몽치를 가지고 그와 함께 하였더라.”

 

죄인 중에는 어이없는 죄인이 있었습니다. 바로 늘 함께 지내던 제자 열둘 중의 하나인 가룟 유다입니다. 그는 자신의 탐욕에 눈이 멀어 예수님을 헐값에 판 죄인입니다. 정말 어처구니 없는 죄인입니다.

 

그리고 대제사장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에게서 파송된 죄인의 무리가 있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흉악범이나 강도나 폭도로 취급하고 검과 몽치를 들고 잡으러 왔습니다. 예수님은 검과 몽치를 든 이 죄인들의 손에 붙잡혔습니다.  이들 모두는 예수님과 아무 상관없이 산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얼마에 팔리든, 잡혀서 어떻게 죽든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더욱 더 마음을 아프게 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본문 14장 50절.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 가룟 유다는 그렇다 치더라도 평소에 그렇게 믿고 지냈던 나머지 열한 제자들마저 모두 달아났습니다.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쳤습니다. 예수님이야 어떻게 되든 말든 나만 살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걸음아 날 살려라” 하고 뺑소니쳐버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만 살면 된다는 모습의 제자들을 보시고 어떤 생각이 들었겠습니까? 예수님은 세상을 위해 크고도 귀한 중대한 사명을 감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주위에 있던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과 상관없이 살았습니다. 사명도 체면도 없었습니다. 그저 자기 목숨 하나 살리려고 도망쳤습니다. 예수님과 아무 상관없이 산 사람들은 이렇게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식이었습니다.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예수님과 아무 상관없이 살고 있지는 않는지요. 예수님 때문에 한 자리하고, 예수님 때문에 병고치고, 예수님 때문에 잘 살면, 예수님 뒤를 졸졸졸 뒤따라 다니다가 불리하다 싶으면 슬그머니 사라지지는 않는지요.

 

오늘은 수난절이 시작되는 첫째 주일입니다. 오늘부터 4월 4일 부활절 전날까지 수난절로 지킵니다. 사순절은 초대교회로부터 지켜온 귀한 교회 절기입니다. 사순절은 초대 교회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겪으신 수난에 동참한다는 의미로 금식했던 것으로부터 유래하였습니다. 이렇게 전해져 내려오던 사순절은 AD 325년 니케아공의회에서 결정되어 현재까지 지켜오게 되었습니다.

 

사순절은 40일을 지킨다는 의미인데, 이때 40이란 숫자는 예수님의 40일 광야 금식 기도, 모세의 시내산 40일 금식기도, 예수님의 부활에서 승천까지의 40일 등의 숫자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사순절은 부활절을 앞둔 40일간을 말합니다. 2월 17일 재의 수요일로부터 시작해서 3월 28일 종려주일, 3월 29일부터 4월 3일간의 고난주간을 거쳐, 부활절인 4월 4일 전날까지 주일을 제외한 총 40일간입니다.

 

이러한 사순절 기간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인의 구속을 위해 수난을 당하신 의미를 깊이 생각하면서 자신의 신앙을 되돌아보는 기간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사순절을 보내야 하겠습니까? 예수님과 아무런 상관없이 사는 사람들처럼 그렇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아니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우리는 이 기간을 어떻게 보내야 할까요?

 

이 기간 동안에는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지 못한 죄를 통회자복하고, 현실적인 성공주의 신앙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성공주의를 목표로 삼고 좇아가면 신앙이 변질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상관없이 살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면 자신의 이익에 따라 도망친 제자처럼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공주의 신앙이 아니라 수난의 신앙을 회복해야 합니다.

 

그런데 수난의 신앙을 가지자고 하면 무거운 짐을 지는 것 같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수난의 신앙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면 짐이 아니라, 도리어 복이요 은혜임을 알게 됩니다.

 

이 수난의 신앙은 수난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사순절 직후에 이어지는 절기가 무엇입니까? 부활절입니다. 이것은 수난의 마지막이 수난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부활의 영광이 기다리고 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지신 십자가는 결코 수난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수난의 과정을 통해 부활의 영광을 얻으셨습니다. 십자가가 목표가 아니라 십자가를 통한 부활이 최종목표였습니다. 죽기 위해 죽으신 것이 아니라 살리기 위해 죽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지신 십자가의 무게는 엄청나게 무거웠습니다. 너무 무거워서 예수님은 골고다 언덕에서 더 이상 메지 못하고 쓰러졌습니다. 그러자 로마 군인들이 지나가던 구레네 사람 시몬이 대신 지고 가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시몬은 나무 십자가의 무게만큼만 느꼈습니다. 예수님께서 느끼시는 무게는 알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지신 십자가의 무게는 영적으로 보면 다른 사형수가 진 십자가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훨씬 더 무거웠습니다. 예수님께서 지고 가신 십자가의 무게는 온 인류의 죄 짐만큼 무거웠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죽을 때까지 지을 수밖에 없는 크고도 작은 죄 짐의 무게도 당연히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잘 믿지 못한 죄, 하나님 말씀을 따르지 못한 죄, 사명을 잘 감당하지 못한 죄, 등등 하나하나 따져보면 엄청나게 많습니다. 나 한 사람의 죄의 무게만 해도 엄청나게 큰데, 오고 가는 수많은 사람들의 크고도 무거운 죄 짐을 졌으니 그 십자가의 무게는 얼마나 무거웠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은 이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극에 달한 슬픔에 빠졌습니다. 너무나 참혹하고 무거워서 질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기 뜻대로 하지 않고, 하나님 아버지 뜻대로 그 무시무시하고 무거운 십자가를 지기로 결단하셨습니다. 본문 14장 36절.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그리하여 예수님은 결단한 이후에는 기쁜 마음으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왜 기쁜 마음으로 지셨습니까? 먼저 아버지께 순종할 수 있었기에 기뻤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시기에 기쁘게 지셨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이유는 삼일 후에 일어날 부활의 영광을 보셨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백성들의 죄를 청산하고, 사단에게 승리를 거두고, 만유를 구원하고 받을 놀라운 영광을 보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십자가를 기꺼이 지셨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수난 받으신 만큼 영원토록 큰 영광도 받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수난은 유익이 있습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위하여 수난을 당할 때가 많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포기해야 할 것이 많습니다. 때론 좋은 소리를 못들을 때도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사는 것처럼 인간다운 생활을 못할 때도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수난을 통해 우리 역시 큰 유익을 받습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더불어 수난을 당하면서 살아가면, 때가 되면 영광을 받게 됩니다. 수난은 이렇게 수난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십자가를 지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수난이 주는 유익을 받게 됩니다.

 

그렇다면 수난을 통해 받는 유익은 무엇일까요? 먼저, 큰 수난을 체험한 사람은 하나님께서 진정 살아계시는 것을 깨닫습니다. 힘겨운 수난을 통해 무엇이 가치가 있는지를 알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알게 됩니다. 이 과정을 통해 잘 제련된 정금 같은 고귀한 신앙을 가지게 됩니다. 오직 의지할 분은 하나님이심을 알고 의지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을 가집니다.

 

또한 수난은 수난으로 끝나지 않고 또 다른 유익을 줍니다. 수난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임을 깨닫습니다.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시 119:71)라는 다윗 왕의 신앙고백을 똑같이 고백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 성경이 절대 기준임을 알고 그 말씀을 따라 기쁘게 살아갑니다.

 

뿐만 아니라 수난을 통해 자기 자신을 부정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게 됩니다. 그리하여 자신의 유익을 위해 살지 않고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 살게 됩니다. 더 나아가 복음과 예수님을 위해 살게 됩니다. 이 모든 것이 수난을 통해 주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수난은 수난으로 끝나지 않고 매우 고귀한 유익과 기쁨을 가져다줍니다.

 

그리고 수난은 어떤 유익을 가져다줍니까? 시험을 이기도록 해줍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앞서 시험을 당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모든 시험을 잘 이기도록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히브리서 2장 18절을 보면, “그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과 상관없이 사는 사람은 이 도움을 받지 못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더불어 사는 사람은 예수님의 도움을 힘입어 여러 가지 수난을 이깁니다. 우리가 극한 시험을 당할지라도 이미 극한 상황의 시험을 이기신 예수님께서 함께 해주셔서 이기게 해주십니다. 이것이 수난이 주는 영광이요 유익입니다.

 

이처럼 수난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예수님 안에는 생명이 있고 구원이 있습니다. 그 예수님께서 나의 인생을 결정짓고, 나의 인생에 큰 유익과 기쁨을 가져다주십니다. 그러므로 나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기억하면서 사순절을 지킵시다. 예수님과 상관없이 사는 사람이 아니, 예수님과 더불어 살아가는 성도가 되십시다. 그리하여 수난을 통해 주어지는 여러 가지 큰 유익과 기쁨을 예수님과 더불어 풍성하게 누리시길 간절히 기원 드립니다.

 

 

[2010 참좋은제자들교회 https://cafe.daum.net/truegooddisciples/IPZB/5 담임목사 이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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