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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적강해/주일설교

예수님께서 수난 받으신 것은 믿음 때문만이 아닙니다(요 15:1~12)

by 이서영 목사 2015. 7. 17.

예수님께서 수난 받으신 것은 믿음 때문만이 아닙니다  (요 15:1~12)

 

예수님께서 왜 수난을 받으셨을까요? 단순히 천국에 들어가는 믿음만을 위해 수난 받으신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보다 더 귀한 것을 위해 수난 받으셨는데 그것은 바로 사랑입니다.

 

우리가 천국에 들어가면 더 이상 들을 수 없는 말이 있습니다. “예수 천당, 불신 지옥”입니다. 믿음으로 이미 천국에 들어왔기 때문에 더 이상 이것을 말하는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천국에서는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사랑이 더 귀한 것입니다.

 

사랑은 이처럼 귀한 것이기에 예수님은 사랑에 대해 많이 강조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강조하신 것은 믿음 자체가 최종 목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수난 받으신 것은 사랑을 나누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수난 받으신 보다 더 숭고한 목적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수난 때문에 믿는 성도들은 사랑의 나라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천국에서는 성도끼리 서로 더 이상 다투지 않습니다. 죄에서 완벽하게 구원받았기 때문입니다. 천국에는 미움이란 죄가 없기에 완벽하게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땅에 사는 동안에는 사랑하면서 살아야 하는데 자꾸만 방해를 받습니다. 미움이란 죄가 우리 마음속에 아직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이 미움이 예수님과 우리 사이를 나쁘게 만듭니다. 그리고 우리 서로 간의 사이도 나쁘게 만듭니다. 우리가 정답게 살아가야 하는데 이 미움이 얼마나 훼방하는지 모릅니다.  

 

이러한 것을 예수님께서 해결하시기 위해 포도나무와 가지 비유를 말씀해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참 포도나무이시고 포도나무 가지는 우리들이라고 했습니다. 포도나무 가지는 포도나무에 붙어있어야 살고 열매 맺게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가지가 스스로 열매 맺지 못하므로 포도나무에 꼭 붙어 있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이 비유를 통해 예수님은 가지가 포도나무에 꼭 붙어있어야 하듯이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9절)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 사랑 안에 거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 사랑 안에 거하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될까요?

 

예수님은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10절)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 바로 예수님 사랑 안에 거하는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의 계명을 지켜서 예수님 사랑 안에 거하시길 바랍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계명은 무엇일까요? 12절에 있습니다.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아멘. 서로 사랑하는 것이 예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서로 사랑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것을 알려면 우리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을  먼저 살펴봐야 합니다. 이웃을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다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고르반’을 예로 들어 보겠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은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드려야 할 몫을 ‘고르반’ 곧 하나님께 드리면 부모님께 드리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부모님께 드릴 것은 부모님께 드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만 섬기는 것은 온전한 사랑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마음 중심을 하나님께 두되 이웃을 돌아본 후에 예배를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예배를 드리고 헌물 드리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생각나면 먼저 가서 풀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 사랑은 이웃 사랑과 동떨어진 사랑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요일 4:20). 그러므로 우리는 이웃끼리 서로 사랑해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된다는 점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이렇게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알고 보면 별개가 아니고 분리되어 있는 것도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이웃을 제쳐놓고 하나님께만 잘 하는 것은 온전하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에 이웃을 사랑할 때 비로소 사랑이 완성되기 때문입니다.

 

진실로 그렇습니다. 형제끼리 서로 사랑하는 것이 곧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서로 사랑하라”(12절)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되므로 이웃 사이뿐만 아니라 하는 일까지도 잘 됩니다. 하나님께서 사랑의 열매를 맺으면 더 많이 잘 맺도록 하시기 때문입니다(2절).

 

그런데 우리는 서로 사랑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서로 힘들게 살아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은 화목하라고 한 하나님의 명령을 어겼기 때문입니다. 서로 사랑하라고 했는데 이것을 지키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서로 사랑하지 못해서 사랑이 떨어진 만큼 모든 것도 뚝뚝 떨어집니다. 경제도 떨어지고, 건강도 떨어지고, 성적도 떨어지고, 신앙도 떨어집니다. 모든 것이 비참하게 떨어집니다. 일이 잘 풀리지 않고 자꾸 꼬이고 묶입니다. 답답하고 괴롭습니다. 이것은 사랑이 식고 사랑이 떨어졌기 때문입니다.

 

서로 사랑하지 못하고 서로 미워하고 다투고 화내고 서로에 대해 헌신하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직장일도, 가정일도, 학교일도, 그 어떤 일도 떨어지는 배후에는 사랑이 아닌 미움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원망이 도사리고 있고 한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기에 경제 회복을 위해 더 열심히 뛰고, 건강 회복을 위해 더 열심히 운동해도 서로 사랑하지 않았기에 생각한 만큼 회복이 잘 되지 않습니다. 사랑하지 않음으로 하나님의 축복과 은혜와 기쁨의 통로를 틀어막고 있기 때문입니다. 형제 사랑을 잃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축복과 은혜와 기쁨의 촛대를 옮겨버린 것입니다.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이 더 많이 사랑의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열매 맺지 못하고 영양분만 축내는 가지는 제거하시기 때문입니다(2절). 예수님 사랑 안에, 즉 예수님의 계명인 사랑을 지키지 아니하면 버려져 마르기 때문입니다(6절).

 

형제를 미워하는 것은 살인하는 것입니다. 사람 다 죽여 놓고 잘 되기를 바란다고 해서 잘 될까요? 사람이 죽었고 분위기가 죽었는데 잘 될 리가 없습니다. 죽은 사람이 어떻게 자기를 사랑해주며 죽은 사람이 어떻게 자기를 위해 헌신해 줄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살려줘야 합니다. 살려줘야 살아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 살리는 사랑을 서로 나누어야 합니다. 서로 사랑하면 사랑지수가 올라갑니다. 그러면 다른 모든 지수도 쑥쑥 올라갑니다. 경제지수, 성적지수, 건강지수, 행복지수, 기쁨지수, 신앙지수가 기분 좋게 올라갑니다.

 

우리는 이것을 회복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떨어진 원인을 곰곰이 생각해봐야 합니다. 무슨 사건 때문에 지금 당하고 있는 이 어려움이 시작되었는지 되돌아봐야합니다. 언제 서로 다투었는지 서로 미워했는지 서로 섭섭해 했는지를 되돌아봐야 합니다.

 

이것이 무엇인지를 발견했으면 즉시 회개하고 풀어야 합니다. 회개하고 풀어야 다른 모든 것도 풀리기 때문입니다. 회개할 때 묶인 것에서 풀려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 사랑하지 못하고 서로 다투고 싸우고 미워한 것을 회개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회개하고 형제에게 잘못한 것을 인정하고 사과해야 합니다.

 

그런데 형제끼리 여전히 서로 미워하면 땅에서 서로 꽁꽁 묶는 것이 됩니다. 그러면 하늘의 통로도 꽁꽁 묶여버립니다. 이렇게 축복과 은혜와 기쁨의 통로를 묶어 놓고 잘 되기를 바라고 잘 풀리기를 바란다면 그것은 큰 착각입니다. 땅에서 풀어야 하늘에서도 풀리기 때문입니다.

 

가지가 살아나려면 포도나무로부터 영양소를 공급받아야 삽니다. 열매를 맺습니다. 그러므로 통로를 막으면 안 됩니다. 땅에서 먼저 풀어야 합니다. 서로 사랑하지 못한 것을 회개로 풀어야 합니다. 서로 사랑함으로 풀어야 합니다.

 

이런 사람, 이런 가정, 이런 학교, 이런 직장, 이런 교회, 이런 나라와 민족에게는 큰 부흥이 옵니다. 그러나 서로 사랑하지 못하고 계속 서로 미워하고, 서로 섭섭해 하면 거의 틀림없이 부흥하지 않습니다. 묶여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큰 부흥을 원하십니까? 그러면 서로 사랑하시길 바랍니다. 마음을 풀기바랍니다. 그렇게 하면 기도가 잘 응답됩니다(7절). 관계도 좋아집니다(10절). 기쁨도 충만해집니다(11절). 더 나아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합니다(8절). 그 결과 큰 부흥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이 더 나아지려면 지금 보내고 있는 이 사순절 기간에 사랑을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서로 사랑하는 것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입니다. 마땅히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땅히 해야 할 필수적인 것을 제쳐놓고는 잘 되지 않습니다. 전공 필수과목을 빼고 열심히 공부해도 성적이 오르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을 점검하고 회개하고 풀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잘 되는 것이 좋지 않습니까? 똑같은 인생을 살면서 힘들고 괴롭게 살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서로 미워하다가 점점 떨어지는 인생이 아니라 서로 사랑함으로 점점 올라가는 인생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제 처음에 드린 질문을 다시 드리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왜 수난을 받으셨을까요? 예수님께서 수난 받으신 것은 사랑 때문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를 사랑하고 우리를 사랑하셨기에 수난 받으셨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수난 받으신 것은 일 중심이 아니라 사랑의 동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사랑을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혹독한 수난을 받으신 것은 이 모두가 숭고한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먼저 하나님 아버지와의 사랑을 서로 나누셨습니다. 아버지를 사랑하므로 아버지의 계명이 무엇이든 잘 지켰습니다(10절). 아버지의 뜻대로 수난을 받으시고 자신의 목숨을 희생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와의 사랑을 위해서도 역시 희생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의 영혼을 사랑하셨기에 그냥 두고만 볼 수 없어서 수난을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 형제의 영혼도 역시 사랑하셨기에 수난을 받으셨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내 영혼도 형제의 영혼도 모두 다 귀하기에 “서로 사랑하라”고 당부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순절에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내 영혼을 사랑하신 예수님께 감사드리며 사랑해야 합니다. 그런데 눈으로 볼 수 없고 손으로 만질 수 없는 예수님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습니까? 그렇게 하려면 예수님께서 주신 계명대로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됩니다. 사랑의 눈길과 마음으로 형제를 대하면 됩니다.

 

이웃 형제의 영혼을 구원하고, 미워하던 형제를 용서하고, 연약한 형제를 일으켜주는데 사랑을 베풀면 됩니다. 이러한 사랑의 열매가 풍성하게 맺혀서 우리 서로에게 큰 기쁨이 되고, 우리가 하는 일들이 잘 풀리고, 우릴 통해 하나님께 큰 영광이 되길 간절히 기원 드립니다.

 

 

[2010 참좋은제자들교회 https://cafe.daum.net/truegooddisciples/IPZB/8 담임목사 이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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