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려주일 - 돌들이 소리 지르기 전에 (눅 19:28~48)
저희 집 뒷동산 언덕에 봄을 알리는 진달래꽃이 피어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언제나 보아도 아름다운 꽃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럴 때 시 한 수가 생각납니다. 김소월의 진달래꽃입니다.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오리다. 영변에 약산 진달래꽃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오리다. 가시는 걸음 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 밟고 가시옵소서.”
아픈 마음을 멀리하고 나의 마음 마음이 담긴 진달래 꽃길을 만들어 기꺼이 보내 드리겠다는 애틋한 사랑을 느낄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님을 위해서라면 나의 아름다운 모든 것을 다 내어놓아도 아깝지 않은 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종려주일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마지막으로 입성하실 때 많은 무리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길에 펴고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스라엘의 왕이시여”라고 크게 소리 높여 외친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이 영변에 약산 진달래꽃을 아름 따다 가시는 길에 뿌리는 심정과 같이 종려나무 가지를 아낌없이 고이 펴서 드린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그 종려나무 가지를 사뿐히 즈려 밟고 가시기를 원했습니다.
이들의 환호를 받으면서 예수님은 선지자를 통해 예언하신 대로 겸손하게 어린 나귀를 타고 입성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평소에는 걸어 다니셨습니다. 두루 걸어 다니시면서 선한 일을 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사람들을 고치셨습니다(행 10:38).
예수님은 말을 타거나 나귀를 타고 먼 산을 구경하듯이 다니지 않으셨습니다. 또한 건성건성 걸어 다니시지도 않으셨습니다. 동네마다 들러서 한 사람 한 사람을 세밀하게 돌보시고 치료하시고 천국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
그런데 오늘만큼은 특별히 걷지 않으시고 어린 나귀를 타셨습니다. 개선장군처럼 의기양양하게 호화롭게 꾸민 말을 타고 입장하지 않으셨습니다. 초라한 구유에서 태어나신 것처럼 초라한 어린 나귀를 타고 겸손하게 입성하셨습니다.
우리가 왜 예수님을 찬양합니까? 예수님은 참으로 좋으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눈에서 눈물을 씻어주십니다. 고통과 슬픔이 사라지게 하시고 기쁨을 주십니다. 죄에서 단순히 구원만 하신 것이 아니라 생명수 샘가로 인도하셔서 보다 더 큰 기쁨을 주시는 분이시기에 찬양 드리는 것입니다(계 7:15~17).
예수님은 이처럼 우리 위에 군림하러 오신 왕이 아니십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 기쁜 좋은 것을 주시고 진심으로 섬기기 위해 오신 겸손한 왕이십니다. 진정 자신의 백성을 사랑하시는 왕이십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시켜서라도 우리에게 모든 좋은 것을 주시는 분이신 것입니다.
그 왕이신 예수님께서 5일 후에 십자가를 지시러 어린 나귀를 타고 베다니에서 예루살렘에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입성하시던 그 때는 유월절 5일 전이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의 설날인 유월절을 지내기 위해 각처에서 흩어져 있던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매우 북적거렸습니다.
그럴 때 하루 전날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예수님께서 그 이튿날 오시자 온 성이 시끌시끌했습니다. 이때 예수님을 잘 알지 못하는 무리들은 “이 사람이 누구냐?”라고 물었습니다. 이에 예수님을 환호한 사람들은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온 선지자 예수님이시다”고 대답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신 것에 대한 반응이 이렇게 각각 다릅니다. 본문 37절을 보면, “제자의 온 무리가 자기들이 본 바 모든 일로 인하여 기뻐하며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여”라고 했습니다. 이 사람들은 죽은 나사로가 살아난 것을 본 사람들입니다. 병을 고치고 마귀에게 눌린 자를 고쳐주시는 것을 본 사람들이기에 예수님을 찬양했습니다.
그러나 그 반대 입장의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본문 39절을 보면, “무리 중 어떤 바리새인들이 말하되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라고 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인정하지 않고 거부한 무리입니다.
그럴 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본문 40절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 아멘.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만왕의 왕으로 임하시는 것을 환영하지 않으면 돌들이 그렇게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이 가만히 있으면 돌이 나서서 왕이심을 고백하고 큰 소리로 찬송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 얼마나 비극입니까? 돌이 아닌 인간들을 구원하러 오신 예수님을 몰라보고 있으니 말입니다. 돌이 먼저 알아보고 찬송해서야 되겠습니까?
세례 요한도 도무지 회개하지 않는 사람들을 향해 돌에 빗대어 말했습니다. 누가복음 3장 8절입니다.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오죽하면 세례 요한이 사람보다 돌이 더 낫다고 말했겠습니까? 돌이 진짜로 사람보다 더 귀하고 낫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사람답지 못하고 사람 구실하지 못하면 돌보다 못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당시 사람들을 보면 이 돌보다 못한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형식적인 신앙을 가진 사람, 왕이신 예수님을 빼놓고 사람이 주인이 된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예수님을 환호하는 사람들을 비난하고 책망하고 어리석게 여겼습니다. 그러다가 나중엔 결국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하도록 부추겼습니다.
이들은 진정 돌보다 못합니다. 자신은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생각하고 있었지만 아니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성전에서 예배를 잘 드리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보실 때는 돌보다 못한 존재였습니다.
그들의 정체는 곧 탄로가 납니다. 왕이신 예수님을 철저히 외면하고 자신들만의 이익을 위해 산 것이 탄로 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성에 들어오셨을 때 사람들은 환호하고 떠들썩했지만 예수님은 우셨습니다. 42절에 보면,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이 곧 멸망당할 것을 바라보시고 마음이 찢어질듯 슬퍼하셨습니다. 자식들은 땅에 메어침을 당하고, 성벽과 성전의 돌은 돌 위에 하나도 남아있지 않을 정도로 철저하게 망할 것을 미리 보셨기 때문입니다. 왜 그렇게 철저하게 망했을까요? 돌보다 못한 사람들이 돌로 지은 성벽과 성전에서 돌보다 낫다고 착각하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실상은 그렇지 않은데도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이튿날 예루살렘에 들어가셔서 하신 일이 있습니다. 성전에 들어가셔서 장사하는 자들을 내어 쫓으신 것입니다. 본문 45절입니다. “성전에 들어가 장사하는 자들을 내어 쫓으시며” 성전은 하나님 아버지의 집으로 만민이 와서 기도하는 집입니다. 그런데 그곳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돈에 눈 먼 사람들이 성전을 이용해서 돈벌이를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이 때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따졌습니다. “너는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느냐? 또 누가 이 권위를 주었느냐?”라고 따졌습니다. 회개할 생각은 하지 않고 오히려 따졌습니다. 이들은 여전히 예수님이 왕이신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자신들의 권위가 최고인 줄 알았습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과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바리새인들은 환호하는 제자의 무리들을 보고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39절) 라고까지 했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돌들이 소리를 지르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오늘날은 어떻습니까? 우리의 권위를 내세우지는 않는지요? 내 중심 내 기준의 삶을 살고 있지는 않는지요? 모든 판단과 행동의 근거가 나에게 이익이 되느냐 안 되느냐로 판단하고 있지는 않는지요?
급할 땐 왕이신 예수님께서 오셔서 문제 해결해달라고 조르면서, 정작 주일 성수하고 십일조 드리고 전도하라는 왕의 명령을 들을 땐 왕으로 여기지 않고 무시하지는 않는지요? 그러면 돌들이 소리를 지를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의 왕이십니다.”라고 말입니다.
예수님은 진정한 우리의 왕이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예수님을 우리가 필요로 할 때 언제든지 부리는 하인처럼 여기면 우리는 돌보다 못한 존재가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돌들이 소리를 지르기 전에 예수님을 우리의 왕으로 모시고 따르며 찬송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종려나무 가지, 곧 우리가 가진 귀한 것을 예수님께 아름답게 드려야 할 것입니다. 영변에 약산 진달래꽃을 아름 따다가 사랑하는 님에게 드리는 그 마음으로 예수님께 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예수님께 존경심을 어떻게 표시할 것입니까? 입으로만 “호산나”라고 말하고 말 것입니까? 그 당시 제자의 온 무리들은 찬양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종려나무 가지도 기꺼이 드렸습니다. 우리 역시 우리가 가진 귀한 것을 그의 발 앞에 내어드리지 않으시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예수님께서 나의 왕으로 오셔서 나를 구원해주시러 예루살렘 성에 들어오신 날입니다. 예수님은 나의 영원한 생애를 아름답게 책임져주시고 나를 섬기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오늘은 그 예수님을 맞이하는 날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단 하루만이라도 돌들이 소리 지르기 전에 예수님을 나의 왕으로 인정하고 찬양하며, 예수님께서 사뿐히 즈려 밟고 가시도록 우리의 귀한 종려나무 가지를 예수님의 발 앞에 아름답게 펴드리시길 바랍니다.
[2010 참좋은제자들교회 https://cafe.daum.net/truegooddisciples/IPZB/11 담임목사 이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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