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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적강해/주일설교

침묵할 때와 말할 때 (마 27:35~46)

by 이서영 목사 2015. 7. 17.

침묵할 때와 말할 때 (마 27:35~46)

 

하나님은 주무시지도 졸지도 않으시고 세상 역사를 바라보십니다. 그리고 개입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직접 나타나셔서 처리하는 방식은 잘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최후 심판 때에는 누구나 볼 수 있도록 직접 나타나셔서 세상의 모든 역사와 사람의 모든 행실을 결산하십니다.

 

그 이전에는 보일 듯 안 보일 듯 하십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안 계시는 것은 아닙니다. 공기가 눈에 보입니까? 눈에 보이지 않아도 공기는 존재하고 있습니다. 공기를 손에 잡을 수가 있습니까? 안 잡혀도 공기는 존재합니다. 하나님도 그러하십니다.

 

인간은 인간의 이성과 감각으로 모든 것을 보고 들을 수가 없습니다. 소리도 들을 수 있는 주파수가 한정되어 있습니다. 돌고래가 보내는 주파수와 박쥐가 보내는 주파수를 듣지 못합니다. 보는 것도 태양빛이 광년의 속도로 달리고 있지만 볼 수 없습니다. 우주를 모두 볼 수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있는 것을 없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직접 잘 볼 수 없습니다. 그러면 볼 수 없다고 하나님이 안 계시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존재하시고 영원부터 영원까지 살아계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잘 볼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것을 바라보고 계십니다.

 

그 하나님께서 때로는 자신을 알려주시기도 하지만 때로는 철저히 비밀에 부치기도 하십니다. 요한계시록 10장 4절을 보면, “일곱 우레가 말을 할 때에 내가 기록하려고 하다가 곧 들으니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말하기를 일곱 우레가 말한 것을 인봉하고 기록하지 말라 하더라”  일곱 우레가 말한 것은 성경에 나와 있지 않습니다. 비밀에 부쳤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천지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비밀을 인간 세상에 모두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인간의 감각과 생각과 지식과 탐구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저 드러난 계시를 믿고 따를 뿐입니다.

 

 

신명기 29장 29절에서도 이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감추어진 일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속하였거니와 나타난 일은 영원히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속하였나니 이는 우리에게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행하게 하심이니라” 아멘.

  

감추어진 일이 하나님께 속하였다는 말씀은 하나님의 뜻이 아직도 숨겨진 것이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감추어진 것을 파고들려고 할 것이 아니라 나타난 일을 잘 행하는 것이 우리의 자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처럼 비밀에 부치기도 하시지만 무슨 일이 생길 때마다 즉각 모든 일에 개입하시지도 않습니다. 전쟁을 뜯어 말리지 않습니다. 지진과 같은 자연 재앙도 막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 침묵하는 것처럼 보일 때가 많습니다. 그렇다고 무심하게 가만히 계시는 것은 아닙니다.

 

‘정중동’이란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렇게 하십니다. 조용한 듯 하면서도 분주하게 활동하십니다. 일희일비하시거나 경거망동하시지 않으십니다. 찬찬히 바라보시고 움직이십니다. 그렇게 하시면서도 신속하게 행하십니다. 이것은 놀라운 신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들이 고초를 받는 현장에 곧바로 나서지도 않으십니다. 심지어 사랑하는 외아들 예수님일지라도 심문 받고 조롱하는 장소에 나타나서 “왜 내 사랑하는 아들을 못 살게 구느냐”는 등의 말씀도 하지 않으십니다. 억울한 일을 당해도 십자가에 처절하게 죽어가도 나타나시지 않으십니다. 침묵해야 할 땐 침묵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27장 46절입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애타게 부르짖어도 하나님은 침묵하셨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을 버리신 것은 아닙니다. 침묵해야 할 때 철저하게 침묵하셨을 뿐이십니다. 

 

그런데 하나님 아버지만 침묵하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도 사시는 동안 많이 침묵하셨습니다. 너무나 어처구니없는 일도 당하셨지만 침묵하셨습니다. 십자가 옆에 같이 매달린 강도가 욕을 해도 침묵하셨습니다. 또한 십자가 앞을 지나가는 사람들이 모욕을 해도,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이 함께 희롱을 해도 침묵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중에는 우레의 아들이란 별명을 가진 제자가 있습니다. 사도 요한입니다. 그는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루살렘을 향해 가는 예수님의 일행이 지나가는 것을 거부하자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부터 내려 저들을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그를 돌아보시고 오히려 꾸짖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참으시고 침묵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어린양 같이 침묵하셨습니다. 이사야 53장 7절입니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예수님께서는 곤욕을 당해도 괴로울 때도 입을 열지 않고 침묵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또한 목소리가 담이 넘지 않도록 했습니다. 마태복음 12장 19절입니다. “그는 다투지도 아니하며 들레지도 아니하리니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예수님은 또한 꺼져가는 심지도 끄지 않았습니다. 마태복음 12장 20절입니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 예수님은 감정에 따라 대하지 아니하시고 끝까지 돌보아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잔잔히 흐르는 사랑과 긍휼로 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잠잠히 사랑하시고 잠잠히 기뻐하십니다. 쓸데없이 소리를 크게 지르지도 않으셨습니다. 온유함으로 부드럽게 대해주셨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예수님을 본받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하시는 방식으로 우리도 다른 사람을 그렇게 대해야 합니다. 시끄럽게 대하지 않고 잠잠히 조용히 부드럽게 대해야 합니다. 하고 싶은 말을 다해버리는 것이 아니라 때론 침묵해야 합니다.

 

뒤끝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은 자신은 뒤끝이 없을지 몰라도 듣는 사람은 뒤끝이 생깁니다. 할 말 안할 말 다 해버리면 상대방은 상처 받습니다. 그러므로 나서야 할 때와 말할 때를 잘 분별해야 합니다. 장독대 이야기가 있습니다. 먹구름이 끼면 장독을 덮고 해가 “쨍쨍” 나면 장독을 열어야 합니다. 상대방 기분이 먹구름이면 입을 다물었다가 기분이 쨍하고 좋을 때 말하라는 교훈입니다. 이것을 잘 분별해야 관계가 악화되지 않고 호전됩니다.

 

옳고 그름은 하나님께서 알아서 하십니다. 그러므로 너무 따지지 마시길 바랍니다. 일일이 따지는 사람은 인기가 없습니다. 넉넉한 사람이 인기가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을 보면  성도를 보호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때가 되면 하늘에서 불을 내려 심판해주시고 마음의 원통함을 풀어주십니다. 요한계시록 8장 5절입니다. “천사가 향로를 가지고 제단의 불을 담아다가 땅에 쏟으매 우레와 음성과 번개와 지진이 나더라”

 

사도 요한이 불을 명하여 내려달라고 하지 않아도 때가 되면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서 모든 것을 갚아주십니다. 때론 성도들이 당하는 고통이 클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보호받습니다. 요한계시록 20장 9절을 보면 “그들이 지면에 널리 퍼져 성도들의 진과 사랑하시는 성을 두르매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그들을 태워버리고” 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성도들이 결코 억울하게 살지 않도록 모든 것에 대해 위로해주시고 갚아주십니다. 당장 불을 내려달라고 하지 않아도 됩니다. 때가 되면 침묵을 깨고 불로서 응징하셔서 모든 것을 갚아주십니다. 가장 많이 우리를 괴롭히던 마귀와 귀신과 거짓 선지자들은 유황불못에 던져 넣어 세세토록 괴롭게 해서 갚아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침묵해야 할 때 침묵해야 합니다.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갚아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나설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할 일은 따로 있습니다. 서로 사랑하고 불쌍히 여기는 일입니다. 마귀가 주는 시험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대적하고 사람이 주는 시험은 참아야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을 대할 때 마귀처럼 대적하면 안 됩니다. 원수 갚는 것이 아니라 용서하고 참는 것입니다.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있습니까? 그들이 괴롭히는 것은 잘 몰라서 그렇습니다. 알면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실제로 까마득하게 잘 모릅니다. 심지어 죽어도 모릅니다. 영의 눈이 열려야 보고 영의 귀가 열려야 들을 수 있고 깨달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깨닫는 것이 중요한데 깨닫지 못하기에 괴롭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저들의 눈을 열어주소서” “저들의 귀를 열어주소서” “저들의 죄를 사하여 주소서”라고 간절히 기도해주어야 합니다. 그럴 때 깨닫게 됩니다. 돌이키게 됩니다. 그 이전에는 결코 모릅니다. 자신이 옳다고 빡빡 우깁니다. 그러므로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대하고 그들의 눈이 열리고 귀가 열리도록 간절히 기도해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를 바라보시고 계십니다. 우리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지, 그 모든 것을 바라보시고 계십니다. 그렇다고 해서 즉각적으로 나타나셔서 “왜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느냐”라고 따지고 윽박지르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기다려주십니다. 참고 침묵해주십니다. 즉각 대응하지 않으십니다. 만약 침묵하지 않으시고 즉각 나타나셔서 우리가 행한 대로 곧바로 응징하신다면 우리 죄 때문에 우리는 기합 받고 벌을 받느라 정신을 못 차릴 것입니다. 그런데 참고 기다려주시므로 우리가 살아남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침묵해주시고 기다려주시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시고 기다려주시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우리가 변화될 때까지 오랫동안 “꾹꾹” 오래 참고 침묵하시면서 기다려주시니 참으로 감사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때가 되면 침묵을 깨십니다. 계속 침묵만 하시지 않으십니다. 때가 되면 말씀하십니다. 듣고만 계시지 않습니다. 보고만 계시지도 않습니다. 때가 되면 말씀하십니다.

 

욥의 경우를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욥이 이루 말할 수 없는 극심한 고난을 당했습니다. 그럴 때에라도 하나님은 침묵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오묘한 일을 이루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결국 때가 되자 침묵을 깨고 나타나셔서 갑절로 갚아주시고 축복해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힘든 상황에 처해 있습니까? 답답하고 괴롭고 외롭습니까? 하나님은 그런 우리의 모습을 바라보고 계십니다. 다 아십니다. 그런 우리를 그냥 버려두지 않으십니다. 지금은 침묵하고 계시지만 우리가 우리에게 맡겨진 사명에 충성하면서 참고 기다리면 침묵을 깨고 말씀해주실 날이 올 것입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해결해 주실 것입니다. 모든 것 아시고 모든 것 하실 수 있는 하나님께서 갚아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고 참고 기다리면 됩니다. 하나님의 손길이 침묵을 깨고 해결해주실 때까지 고통스럽지만 참고 침묵하면서 기다리십시다. 힘들게 하는 주위 사람에 대해서도 참고 침묵하면서 기다려주십시다.

 

예수님께서 이러한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만왕의 왕으로서 얼마든지 말할 수 있었지만 침묵하셨습니다. 또한 일희일비도 경거망동하시지도 않으셨습니다. 그 예수님을 따라 우리도 그렇게 살았으면 참 좋겠습니다. 그리하여 때가 차매 침묵을 깨고 해결해주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을 입으시길 바랍니다.

 

 

[2010 참좋은제자들교회 https://cafe.daum.net/truegooddisciples/IPZB/13 담임목사 이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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