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도도 매달린 십자가 (마 27:35~38)
우리나라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것이 많이 있습니다. 그 중에는 십자가도 있습니다. 교회마다 십자가가 있습니다. 사람들의 목에도 귀에도 있습니다. 열쇠고리나 핸드폰 고리에도 있습니다. 이렇게 십자가는 어디를 가도 흔하게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면 이 십자가는 흉악범들을 처형하는 사형대입니다. 이 십자가는 최악의 형벌입니다. 이 십자가는 오늘날로 말하면 끔찍한 교수대나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이 무엇이 좋겠습니까? 생각만 해도 몸서리쳐지는 이 사형대를 어떻게 매달고 장식하고 다니겠습니까?
우리가 현재 사용하고 있는 십자가를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이 본다면 기겁할 것입니다. 그들은 십자가가 높이 달린 교회를 보고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저것 좀 봐, 사형장이 수두룩해” 십자가로 장식한 사람들을 보고도 말할 것입니다. “저런 쯧쯧 얼굴은 예쁘게 생겼는데, 참 안 됐네.” 이들을 사형수로 보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십자가의 의미를 올바르게 깊이 알아야 합니다. 십자가를 바라보고 십자가를 대할 때 우리는 두 가지 의미를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이것에 관해 알기 전에 먼저 십자가의 역사부터 잠깐 알아보겠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는 기록은 ‘헤로도투스의 역사’ 가운데 나타나고 있는데, 페르시아인들 가운데 처음 그런 일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이 후에 그리스에 의해서, 특히 알렉산더 대왕에 의해서 시행되었습니다.
이 풍습이 카르타고로 전래되어 로마에까지 전달되었습니다. 로마는 이 십자가를 로마인이 아닌 사람들에게 사용했습니다. 탈주하여 강도질한 노예, 내란선동죄, 살인자 등에게 사용했습니다. 로마시민인 경우에는 반역죄에 대해서만 형벌을 사용했습니다. 이러한 십자가 형태의 형벌은 서기 337년 콘스탄틴 황제에 의해서 철폐되었습니다.
십자가의 모양도 시대에 따라 변했습니다. 원래는 단순한 하나의 기둥으로 범죄자를 묶거나 그곳에 고정시켰습니다. 그 후 로마에 의해서 수평의 기둥이 생겨서 십자가의 형태가 되었습니다. 성 안토니의 십자가로 불리는 ┳자 형, 전통적인 라틴 십자가인 ✞자형, 그릭 십자가인 ✚형 십자가, 성 안드레의 십자가인 ✖형이 있습니다.
십자가에 처형하는 방법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될 죄수를 채찍질부터 합니다. 이 채찍은 가죽 끈으로 만들었는데 끝부분에 금속조각이 달려있습니다. 그래서 이 채찍에 맞으면 살이 찢어져서 너덜거리고 피가 줄줄 흐르게 됩니다.
이렇게 채찍질한 후에 형장으로 데려갑니다. 십자가의 수직 기둥은 형장에 박아두고 수평 막대를 그 처형장소로 옮겨가게 하였습니다. 형장에 도착하면 사형수의 옷을 벗긴 다음 팔을 벌려 수평 대에 몸을 고정시켰습니다. 이때 끈으로 묶기도 하고 손목에 못을 박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십자가에 예수님께서 매달리셨고 돌아가셨습니다. 그런데 이 십자가형틀에 죽은 사람이 한 두 사람이 아님을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수많은 흉악범들이 십자가 형틀에서 죽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 나오는 두 강도도 십자가에 매달려 죽었습니다.
그렇다면 십자가 그 자체가 대단한 것이 아님을 잘 알 수 있습니다. 흉악한 죄인이 죽는 사형대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서 수많은 죄인이 죽었고 오늘 나오는 두 강도도 죽었습니다. 그런 사형대에 예수님께서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그 자체로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저 흉악한 죄인이 죽는 곳일 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지신 십자가가 특별한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이 십자가의 의미를 잘 알아야 합니다. 수많은 죄인들이 죽어간 사형대가 우리에게 어떤 큰 의미를 던져주고 있는지 그 의미를 깊이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지신 십자가는 십자가 그 자체로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 십자가는 그저 사형을 집행한 사형대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두 강도도 죽은 십자가인데 무슨 특별한 의미가 있겠습니까? 강도는 자기 죄를 지고 죽었습니다. 그냥 그렇게 죽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만이 특별한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죄가 하나도 없는 분이 처형당했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은 옆에 있던 강도도 인정했습니다. 누가복음 23장 41절을 나옵니다.
옆에 같이 매달린 두 강도 중에서 한 강도가 “네가 그리스도냐? 그렇다면 너와 우리를 구원해봐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다른 한 강도가 꾸짖으면서 말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예수님 옆에 있던 강도뿐만 아니라 빌라도의 아내 역시 이 점을 인정했습니다. 빌라도 총독이 예수님을 재판하려고 재판석에 앉아 있을 때에 아내가 사람을 보내어 말했습니다. “저 옳은 사람에게 아무 상관도 하지 마옵소서. 오늘 꿈에 내가 그 사람으로 인하여 애를 많이 태웠나이다”(마 27:19).
이러한 점이 예수님만이 특별하신 이유입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면서도 십자가에서 처형당한 점입니다. 강도는 자기 죄 짐을 지고 죽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기 죄 짐이 없었기에 죽으실 이유가 없었는데 죽으셨습니다.
왜 죽으셨을까요? 예수님께서 왜 죽으셔야만 했을까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면서 말씀하신 일곱 가지가 있습니다. 그 중에 한 가지는 “다 이루었다”(요 19:30) 입니다. 모든 죄인은 자기 죄로 인해 죽어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다 이루시고 돌아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다 이루시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사형에 해당하는 죄인이라면 모두가 진 십자가였지만 예수님께서 지신 십자가의 의미는 다 이루었기 때문에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무엇을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셨을까요? 그것은 내가 매달려야 할 십자가를 져주었다는 것입니다. 나를 포함해서 모든 사람이 져야할 십자가를 대신 져주는 일을 다 이루셨다는 말씀입니다.
다른 일반적인 죄인들이 진 십자가는 자기 죄 때문에 진 십자가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지신 십자가는 동일한 사형대였지만 다른 의미가 있는 것은 나와 우리 모두를 위한 십자가를 지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십자가를 장식용으로 볼 때가 있지는 않는지요? 그러나 그 십자가는 바로 내가 매달려야 했던 십자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십자가를 바라볼 때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지신 십자가로만 기억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 지신 십자가로만 생각하고 나와 아무 상관없는 십자가로 여겨서는 안 됩니다. 나의 십자가임을 함께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한편으론 내가 져야 할 십자가임을 기억하고 연약함과 죄에서 벗어난 자유와 기쁨을 누려야 할 것입니다.
다른 한편으론 나를 위해 나의 십자가를 대신 지신 예수님을 기억하고 감사와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이처럼 우리는 십자가를 바라볼 때 예수님의 십자가와 나의 십자가의 두 가지 의미를 모두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통해 예수님을 바라보고 십자가를 통해 나를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저 장식용으로 꾸미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예수님과만 관련된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나와 아주 밀접한 십자가인 것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다시 한 번 말씀 드립니다. 십자가 자체로는 능력이 없습니다. 장식한다고 해서 능력이 나오지 않습니다. 십자가는 강도들도 매달린 죄인의 사형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십자가의 의미를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그 의미를 잘 알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사순절을 마지막 주간으로 보내면서 묵상해야 할 십자가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강도가 매달린 십자가로는 아무런 의미를 주지 못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매달리신 십자가는 큰 의미가 있습니다.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이 져야 할 십자가를 대신해서 다 지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더! 십자가가 의미 있는 것은 나와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나의 옛사람이 십자가에서 “죽고” 처리되었습니다. 이제는 새사람이 되었습니다(롬 6:4~11). 그러므로 십자가는 단순히 예수님의 십자가로만 끝나지 않습니다. 나와 아무 상관이 없는 십자가가 아닙니다. 예수님만 지는 십자가도 아닙니다. 바로 나와 특별한 관계가 있는 십자가입니다. 관계가 없으면 나와 아무 상관이 없는 십자가가 되어 버립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바라거나 장식할 때 이러한 의미를 묵상해야 합니다. 의미를 잘 모르면 강도가 매달린 십자가와 다름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순절 마지막 주간인 이번 주간에 예수님의 십자가와 더불어 나의 십자가에 대해서도 깊이 묵상하시고 감사드리길 기원 드립니다.
[2010 참좋은제자들교회 https://cafe.daum.net/truegooddisciples/IPZB/10 담임목사 이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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