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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적강해/주일설교

[어린이주일] 천국에서 큰 사람 (마 18:1-4)

by 이서영 목사 2015. 7. 17.

[어린이주일] 천국에서 큰 사람 (마 18:1-4)

 

  예로부터 논공행상(論功行賞)을 중요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논공행상이란 말은 공적(功績)이 크고 작은 것을 의논하여 그것에 알맞은 상(賞)을 주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을 잘못하면 섭섭하게 생각합니다. 더 나아가 공을 세운 사람끼리 다투거나 어떤 때는 반역까지 합니다.

 

  2011년 4월 7일자 강원도민일보를 보면 김상수 논설실장이 이런 글을 실어 놓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국가의 대사(大事)를 치르고 난 뒤 그 공을 따지고 경중에 따라 상을 내리는 것이 논공행상입니다. 그러나 기여도를 넘치거나 모자람이 없이 공평하게 평가하는 것은 간단치 않습니다. 더욱이 공에 맞는 적절한 포상을 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논공행상을 잘못하면 어려운 일을 잘 치르고도 오히려 혼란이 생기고, 더 큰 낭패를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엊그제 한나라당과 민주당의 양강구도가 형성된 가운데 목하 4·27 강원도지사 보궐선거가 점입가경입니다. 각 진영에서는 때 이른 논공행상 이야기도 흘러나온다고 합니다. 누구는 공기업 사장, 누구는 입각, 누구는 공천 하는 식의 설이 분분합니다. 잘못된 논공행상이 엄청난 화(禍)를 초래할 수 있다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사람이 사는 사회에서 이 문제는 늘 있었습니다. 제자들의 질문도 바로 이러한 문제가 바탕이 되어 있습니다. 본문을 보면 예수님의 제자들의 질문과 예수님의 대답이 나옵니다. 가버나움의 한 집에 도착했을 때 제자들이 예수님께 여쭈었습니다. “천국에서는 누가 큽니까?” 이 질문을 한 배경은 제자들이 집으로 오는 길에서 “누가 크냐?”라고 서로 쟁론하고(막 9:34) 변론했기(눅 9:46) 때문입니다. 쟁론은 다투면서 말하는 것을 뜻하고 변론은 야심을 품고 말하는 것을 뜻합니다. 이 단어를 보면 제자들끼리 서로 열띤 논쟁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끝내 누가 더 큰지 결정하지 못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순서를 가려주시기를 바라고 질문한 것입니다.

 

  제자들은 질문을 드리고 나서 예수님께서 발표하시는 것을 숨을 죽이고 기다렸습니다. 마음속으로 서로 ‘내가 제일 큰 자라고 하실거야’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누가 큰 자인지는 발표하지 않으시고 한 어린아이를 불러서 제자들 가운데 세우셨습니다. 제자들은 어리둥절해졌습니다. “무엇하시려고 어린아이를 데려오셨나?” 제자들은 수군거렸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그 어린아이를 가리키면서 대답하셨습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않으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질문에 천국에서 큰 사람은 어린아이와 같이 자신을 낮추는 사람이라고 대답해주신 것입니다.

 

  마태복음은 18장은 네 번째 강화, 즉 네 번째 큰 가르침에 해당됩니다. 18장은 천국 공동체 생활에 대한 강화입니다. 이때 천국은 천상의 천국을 말하기도 하지만 지상의 천국도 말하고 있습니다. 18장은 주로 천국 공동체인 교회 공동체를 대상으로 하는 가르침입니다. 그래서 18장은 천국의 대표적인 기관인 교회 공동체 안에서 성도들이 지켜야 할 덕목인 겸손과 권징과 용서를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본문은 겸손에 관한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천국 공동체의 덕목은 세속의 가치를 뒤집어엎는 혁명적 가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아무 것도 모르고 아무 것도 없고 연약해 보이는 어린아이와 같이 겸손한 사람이 천국 공동체에 들어가서 진귀한 축복을 누릴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때 ‘어린아이(파이디온)’는 약 7세 이하의 어린아이를 말합니다. 그런 어린아이는 지위와 재산과 외모와 학벌과 나이와 지식과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어른은 중요하게 여기지만 어린아이에게 있어서는 크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마태복음 5장 3절을 보면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라고 했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 바로 어린아이와 같은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많든 적든 높든 낮든 눈에 보이는 것에 따라 좌우되지 않습니다. 지위가 높아야 되고 재산이 많아야 되고 학벌이 좋아야 되고 지식이 많아야 되고 나이가 많아야 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은 어린아이처럼 겸손해서 천국의 진귀한 축복을 누리게 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어린아이처럼 될 수 있을까요? 본문 3절과 4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돌이켜” 어린아이와 같이 자신을 낮추는 사람이 되라고 했습니다. 그럴 때 천국이 오고 천국을 보다 더 많이 누릴 수 있다고 했습니다.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크고 작은 다툼을 들여다보면 대부분 “누가 크냐?”의 문제로 다툽니다. 국가간, 여야간, 상사와 부하간, 동료간, 부부간, 심지어 교회안의 갈등을 보면 “누가 크냐?”라는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누가 크냐?”라는 문제를 해결하면 천국을 누릴 수 있습니다.

 

  천국의 진귀한 것 가운데 한 가지만 소개해드리면 평강(平康)을 누리게 됩니다. ‘평강(에이레네)’은 평화와 안녕과 복지와 번영을 말합니다. 누가 크냐의 문제가 해결되면 이 평강의 문제를 해결 받습니다. 다투고 시끄럽고 편안하지 못하고 행복하지 못하고 번성하지 못하는 문제가 해결됩니다. “누가 크냐?”의 문제가 해결되면 평화롭게 지내고 평안하게 지내고 잘 되고 번성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누가 크냐?”의 문제를 꼭 해결 받으셔서 이 평강을 충만하게 누리시길 바랍니다.

 

  사울과 다윗의 경우를 보면 이 문제를 해결하느냐 못하느냐에 따라 인생이 크게 달라진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울 왕은 높아지려고 다윗이 왕이 되지못하도록 끝까지 추적해서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런 가운데서도 사울 왕을 “이 원수 놈아!”라고 하지 않고 “아버지여!”라고 하면서 높여드렸습니다. 그런데 결과는 사울 왕은 늘 마음이 편하지 못했습니다. 평강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왕가가 되지 못하고 집안이 몰락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평강해서 집안이 왕가로 일어섰습니다. 지금도 앞으로도 영원토록 유명하게 되었습니다. “누가 크냐?”의 문제를 해결하니까 천국의 진귀한 축복인 평강의 축복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크냐?”의 문제를 어떻게 하면 해결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께서 본문 3절에 해답을 주셨습니다. “돌이켜” 어린아이와 같이 되라고 하셨습니다. 돌이키면 됩니다. 그동안 살아온 세상의 방식을 버리고 돌이켜서 천국 공동체의 방식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그러나 계속해서 고집을 피우고 옛날 방식대로 살면 여전히 평화를 누리지 못하고 안녕하지 못하고 복지도 번영도 누리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돌이켜서 “누가 크냐?”의 문제를 해결 받으셔서 진귀한 평강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본문의 지역 배경을 보면 마가복음 9장 33절을 통해 보면 가버나움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가버나움은 특별한 곳입니다. 갈릴리 사역의 중심지로 예수님께서 전도를 많이 하시고 기적도 많이 베푼 곳입니다. 백부장의 하인을 고치시고, 베드로의 장모도 고치시고, 침상에 누인 중풍병자도 고치시고, 야이로의 죽은 딸도 살려주신 곳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버나움은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심판의 표본인 소돔과 고모라보다 더 큰 심판을 받게 될 것(마 11:20-24)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기적과 사랑을 체험하고서도 올바르게 응답하지 않고 거부했기 때문입니다. 돌이켜야 하는데 돌이키지 못했던 것입니다. 돌이킨다는 것은 이처럼 중요합니다. 돌이키지 않으면 다툼이 끊이지 않고 망하게 됩니다. 그러나 돌이키면 문제가 해결되어 평강을 누리게 됩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돌이켜야 할까요? 지위와 힘의 크기나 재산의 크기에 따라 판단하는 것에서 돌이켜야 합니다. 가졌다고 배웠다고 높다고 힘을 주는 것이 아니라 있든 없든 높든 낮든 자신을 낮추어야 합니다. 천국 시민인 성도는 세상의 기준에 따라 위대함을 추구하는 사람이 아니라 천국 공동체의 기준에 따라 품위 있는 위대한 삶을 추구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성숙한 신앙은 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어린아이와 같은 겸손한 신앙입니다.

 

  성경을 보면 겸손할 때 은혜를 받는다(벧전 5:5-6)고 했습니다. 그래서 겸손하면 평강의 은혜를 더 크게 받습니다. 그런데 어린아이와 같이 겸손하라고 했는데 어린아이가 어떻게 했을까요? 본문 2절을 보면 어린아이를 불러 세우는 장면이 나옵니다. “예수께서 한 어린아이를 불러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어린아이는 예수님께서 부르실 때 신속하게 왔습니다. 서 있으라는 곳에 서 있었습니다. 자기 생각대로 판단하지 않았습니다. “왜 불러요? 나는 바빠요. 왜 거기 서 있어야 되지요?” 이런 저런 것을 따지지도 묻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예수님께서 시키는 대로 따라했습니다. 국제적인 복음전도자인 마이클 그린(Michael Green)은 “예수님이 부르시는 곳으로 따르고 예수님이 세우시는 곳에서 머물러 서 있다. 이것이 겸손이다”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런 신앙이 필요합니다. 그럴 때 평강의 축복과 은혜를 누릴 수 있습니다.

 

  한국 초창기의 유명한 신학교수인 박윤선 박사는 겸손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겸손은 남을 나보다 우월하게 여기는 것인데 그렇게 하기 어렵다. 그러나 진리를 아는 자에게는 쉽게 행해진다.” 하나님을 나보다 더 낫게 여겨야 하나님을 따르게 되고 다른 사람을 나보다 더 낫게 여길 때 다른 사람을 따르게 됩니다. 그러나 세상의 가치를 가지고는 지키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깨닫게 되면 지킬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과 다른 사람을 나보다 낫게 여길 수 있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게 되고 사람으로부터도 인정받게 됩니다. 잠언 18장 12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의 마음의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요 겸손은 존귀의 길잡이니라.” 잠언 29장 23절에서도 말합니다. “사람이 교만하면 낮아지게 되겠고 마음이 겸손하면 영예를 얻으리라.” 겸손하면 존귀하게 되지만 교만하면 멸망하게 됩니다.

 

  마귀는 하나님보다 더 높아지려는 지위를 다투다가(유 1:6) 아름다운 천사장이 악마로 변해버렸습니다. 그래서 모든 죄의 뿌리는 교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특별히 교만을 미워하십니다. 잠언 16장 5절에서 말했습니다. “무릇 마음이 교만한 자를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나니.” 교만하면 하나님도 싫어하지만 사람들도 싫어합니다. 성경을 처음으로 일독한 다음에 강하게 남는 단어 가운데 하나가 ‘교만’이었습니다. 교만해서 인생의 불행이 시작된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숨을 거두는 마지막 순간까지 일평생 교만하지 않고 겸손하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드렸습니다. 지금도 매사에 조심하고 있습니다.

 

  마귀가 왜 마귀가 됐다고 했지요? 교만해서 마귀가 됐습니다. 하나님께 안 질려고 하고 안 굽히려고 하다가 악마로 변한 것입니다. 그래서 마귀는 교만한 사람을 좋아합니다. 그러므로 다투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마귀의 밥이 될 확률이 높습니다. 다툼은 마귀의 것입니다(약 3:15). 그래서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혼란과 모든 악한 일이 생깁니다(약 3:16). 무당이 왜 잘 안 됩니까? 귀신끼리 싸움을 붙여서 해결하려고 하니까 집안에 분쟁이 생겨서 잘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마귀는 우는 사자처럼 두루 다니면서 삼킬 자를 찾습니다(벧전 5:8). 그러다가 교만한 사람을 보면 잡아먹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깨어 있어야 합니다. 교만하지 않고 겸손해야 합니다.

 

  교만의 종류를 보면 지식 교만이 있습니다. 이단이 왜 이단입니까? 지식 교만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지식을 거부하고 자기의 지식을 더 우월하게 여기고 더 좋게 여기니까 이단이 된 것입니다. 우리도 우리 자신을 더 믿으면 이단처럼 됩니다. 그러므로 모든 판단의 근거와 기준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어야 합니다. 이 외에도 교만의 종류는 많습니다. 재산 교만, 지위 교만, 학벌 교만, 외모 교만 등이 많습니다. 이렇게 머리가 되려고 하는 사람은 조심해야 합니다. 안 지려고 하고 안 굽히려고 하는 사람도 조심해야 합니다.

 

  자칫하면 마귀가 자꾸 부추기기 때문입니다. “네가 맞다. 네가 하는 것이 맞다. 네 말이 맞다. 네가 옳다. 네 식대로 해라.” 마귀는 속이는데 왕입니다. 별명이 거짓의 아비(요 8:44)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으로 무장해야 합니다. 성령님의 인도를 받아야 합니다. 그러면 분별력이 생겨서 마귀가 속삭여도 잘 속지 않게 됩니다. 잠시 속았더라도 금방 잘못한 것을 깨닫고 회개하고 다시 그런 실수를 하지 않으려고 애씁니다. 그런데 “누가 크냐?”라고 할 때 세상이 가르치는 것은 다툼을 가져다주고 천국을 잃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성경 말씀대로 어린아이와 같은 성도가 되셔서 천국의 놀라운 평강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이 “누가 크냐?”라는 교만의 문제를 해결해주셨습니다. 하나님과 동등하시고 하나님의 아들이시면서도 자신을 낮추셔서 친히 겸손하게 묵묵히 온갖 모욕과 수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매달려 피 흘려 죽으심으로 해결해주셨습니다. 그리하여 마귀가 가져온 교만의 문제를 해결해주신 것입니다. 마태복음 20장 25-28절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아야 하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예수님께서 영원토록 높임을 받으시는 이유는 모든 사람을 섬기신 데 있습니다. 누가복음 22장 27절에서 말했습니다. “앉아서 먹는 자가 크냐 섬기는 자가 크냐 앉아서 먹는 자가 아니냐 그러나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

 

  교만해진 심령으로는 천국에 들어갈 수도 없고 천국의 풍요로운 삶도 누릴 수 없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으로부터 배척받습니다. 그러나 천국에서 큰 사람은 돌이켜 어린아이와 같이 겸손하게 된 사람입니다. 로버트 레이튼(Robert Leiahton)은 “하나님의 가장 귀한 친구는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다”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천국에 들어가 천국을 누리려면 돌이켜야 합니다. “누가 크냐?”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동안의 생활방식을 바꾸어야 합니다. 굿 셰퍼드 교회(Good Shepherd Church)의 스튜어트 웨버(Stuart K. Weber) 담임목사는 “천국에서 가장 큰 사람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과 정 반대다”라고 말하면서 “하나님 나라에서 우리가 얼마나 큰 사람이 되느냐는 전적으로 우리가 어떻게 스스로 낮추느냐에 달려 있다(약 4:10)”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은 심각한 오해를 하고 있었습니다. 계급과 권력과 지위에 따라 결정되는 것인 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것을 바로 잡기 위해 가르쳐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말씀이 마치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너희들의 질문이 잘못되었다. 너희들의 개념을 바꾸어라.” 그러므로 우리도 “누가 크냐?”에 대한 개념을 바꾸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런데 섬길 때 힘든 점이 많이 있습니다. 잘 대해주는 사람에게 잘 대해주는 것은 쉽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잘 대해주는 사람만 잘 대해주는 것은 죄인도 그렇게 한다(눅 6:33)고 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까다로운 사람에게도 잘 대해주라고 했습니다(벧전 2:18). 다른 사람이 못하는 것을 잘 할 때 귀합니다. 성도는 세상과 구별된 사람입니다. 다르게 사는 사람입니다. 어떻게 구별되고 다르게 살까요? 명찰을 달고 마크를 새긴 유니폼을 입고 다니면 될까요? 아닙니다. 똑같이 안 질려고 하고 똑같이 안 굽히려고 하면 누가 성도로 보겠습니까?   

 

  세상은 “권력을 가져라, 눌러라, 지지 마라”고 가르칩니다. 이 방식으로는 “누가 크냐?”의 문제를 해결하기 어렵습니다. 서로 높아지려고 하면 둘 다 피해를 입습니다. 안 질려고 할수록 안 굽히려고 할수록 고통은 더 커집니다. 그럴수록 천국은 더욱 멀어집니다. 가장 먼저 타격을 받는 것은 자기 자신입니다. 마음이 편하지 못하고 일도 손에 잘 잡히지 않습니다. 평화도 안녕도 복지도 번영도 사라집니다. 나라든 직장이든 학교든 가정이든 교회든 마찬가지입니다. 계속 안 지고 계속 안 굽혀보세요. 그러면 어떤 결과가 올까요? 천국이 오지 않습니다. 평강이 함께 하지 않습니다. 

 

  사는 게 힘이 든다고 생각하십니까? 평강하지 못하다고 여기십니까? 그렇다면 왜 평강이 오지 않을까요? 어린아이와 같이 낮아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천국의 공동체 방식대로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대로 살아야 합니다. 질 줄 알고 굽힐 줄 알고 섬길 줄 알아야합니다. 그러면 어디에 가든지 천국이 옵니다. 본문을 다른 말로 표현한 공관복음인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모든 사람의 끝이 되고 모든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너희 모든 사람 가운데 가장 작은 그 사람이 큰 자이다.” 그러므로 돌이켜서 “누가 크냐?"라는 문제를 해결 받으셔서 천국이 주는 진귀한 축복인 평강, 즉 일이 잘 되시고 관계가 좋아지셔서 평화를 누리시고 평안하시고 복지와 번영을 충만하게 누리시길 바랍니다.

 

 

[2011 참좋은제자들교회 https://cafe.daum.net/truegooddisciples/IPZB/67 담임목사 이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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