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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적강해/주일설교

가졌노라, 읽었노라, 알렸노라 (계 10:1-11)

by 이서영 목사 2015. 7. 17.

가졌노라, 읽었노라, 알렸노라 (계 10:1-11)

 

  “주사위는 던져졌다”는 말은 누가 한 말일까요? 이 말은 로마 공화정 말기인 기원전 49년에 줄리어스 시저(율리우스 카이사르) 장군이 원로원에 맞서 루비콘 강을 건너 진격하면서 했던 말입니다. 그런데 이 말은 시저가 좋아하는 그리스 희극작가 메난드로스의 작품에서 이 구절을 인용한 것입니다. 시저의 유명한 말이 또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일까요?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Veni, vidi, vici)”입니다. 이 말은 시저가 루비콘 강을 건너 진격한 2년 후인 기원전 47년에 폰투스 왕국(터키 북부지역)의 파르나케스 2세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직후에 로마 시민과 원로원에 보낸 전투결과보고서에 쓴 말입니다.

 

  본문 8절에 “두루마리를 가지라”, 9절에 “먹어 버리라”, 11절에 “예언하여야 하리라”는 말씀을 요약하면 “가져라, 먹어라, 알려라”입니다. 한 번 따라 해보세요. “가지라, 먹어라, 알려라.” 본문에 들어가기에 앞서 이런 질문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보았으면 합니다. ‘성경책은 나와 어떤 관계가 있을까?’, ‘성경책은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성경책이 왜 나에게 필요할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경책은 도대체 나와 무슨 관계가 있겠습니까? 본문은 성경책이 나를 관통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단순히 성경책을 가지고 있는 것에서 머문 것이 아닙니다. 가지고 있는 성경책을 읽고 묵상하고 소화시키고 적용하여 그것이 나를 관통해서 다른 사람에게 전해주는 데까지 나아가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러기 위해 본문은 “가져라, 먹어라, 알려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에 대해 하나씩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의 첫 번째 명령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져라”는 것입니다. 시저가 전쟁에서 이긴 것은 폰투스 왕국에 갔기 때문입니다. “왔노라.” 다시 말해 갔기 때문에 적을 볼 수 있었고 싸울 수 있었고 싸워서 이기고 정복할 수 있었고 승전보를 전해줄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첫 단계는 가는 단계입니다. 이렇게 가는 단계를 성경책과 연관시켜보면 무엇을 말할까요? 성경책을 가지는 것을 말합니다. 성경책을 읽고 묵상하고 소화시키고 적용하여 나를 관통해서 다른 사람에게 전하려고 하면 가장 먼저 성경책부터 소유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져라.” 그러므로 성경책이 없는 분은 성경책부터 먼저 꼭 구입하시길 바랍니다.

 

  도서관에 가면 수많은 책들이 꽂혀 있습니다. 그 많은 책 가운데 한 권을 골라야 한다면 여러분은 어떤 책을 고르시겠습니까? 우리는 성경책을 뽑을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변화시키고 살리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향해 말씀하셨습니다. “나사로야 나오너라!” 그러자 죽은 지 사흘이나 지난 나사로가 두말 하지 않고 무덤 속에서 뚜벅뚜벅 걸어 나왔습니다. 예수님께서 폭풍우를 향해 말씀하셨습니다. “잠잠하라!” 바다가 그만 조용해졌습니다. 과학이 자랑을 많이 합니다. 풍랑을 잠재울 수 있다면 큰 배에다가 장착했을 것입니다. 과학은 별 한개도 만들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능력이 있어 별이 아니라 우주까지 창조하십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말씀의 종교라고 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한 권의 책을 선택하라고 하면 성경책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미국의 백화점 왕이자 체신부장관이었던 존 워너메이커가 84세가 되었을 때 사업가로서 60주년 기념행사에서 한 기자가 물었습니다. “회장님, 지금까지 투자한 것 가운데 가장 성공적인 투자는 무엇이었습니까?” “내가 10살 때 최고의 투자를 한 적이 있지요. 그때 나는 2달러 75센트를 주고 예쁜 가죽 성경 한 권을 구입했어요. 이것이 내 인생에 있어서 가장 위대한 투자였습니다. 왜냐하면 그 성경이 오늘의 나를 만들었으니까요.”  

 

  그런데 성경책을 구입하려면 문제가 한 가지 있습니다. 한글로 되어 있지 않으면 안 됩니다. 종교개혁은 무엇을 개혁했습니까? 성경을 개혁했습니다. 제롬이 라틴 시대에 그리스어로 된 성경을 라틴어로 번역하였습니다. 이것이 제롬의 70인역입니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 이제는 영어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럴 때 위클리프가 영어로 번역하였습니다. 이후로 킹 제임스 왕이 번역하여 널리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나라에도 한글로 성경이 번역되어 우리가 읽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만약 번역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돈이 많아서 그리스어 성경을 사고 라틴어 성경을 사고 영어 성경을 사면 뭐하겠습니까? 번역되었기에 우리가 소유하고 읽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경책을 번역하고 보급하는 것은 바로 본문 8절의 “하나님의 말씀을 가져라”는 명령에 잘 순응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성경을 구입해야 하지만 또한 다른 사람, 다른 민족이 구입할 수 있도록 북한 등에 성경을 보내는 모퉁이돌 등에 작은 정성이지만 힘을 더해주시길 바랍니다.   

 

  성경책은 2절을 보면 “작은 두루마리”로 표현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다른 종교의 경전은 분량이 매우 많습니다. 그러나 성경책은 분량이 매우 작습니다. 그래서 작은 책일까요? 작지만 위대하다는 것을 돋보이기 위해 작다고 한 것 같습니다. 성경책은 작은 책이지만 실제로는 세계에서 가장 큰 책입니다. 우주를 담은 책이기 때문입니다. 아니, 내 모든 죄를 용서해주시고 구원해주신 크신 예수님을 담은 책이기 때문입니다.

 

  이 성경책은 한 사람의 운명을 바꾸는 말이 들어있는 위대한 책입니다. 그래서 신명기 17장 18-20절을 보면 왕들 옆에 성경책을 갖다 놓으라고 했습니다. “그가 왕위에 오르거든 이 율법서의 등사본을 레위 사람 제사장 앞에서 책에 기록하여, 평생에 자기 옆에 두고 읽어 그의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배우며 이 율법의 모든 말과 이 규례를 지켜 행할 것이라. 그리하면 그의 마음이 그의 형제 위에 교만하지 아니하고 이 명령에서 떠나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리니 이스라엘 중에서 그와 그의 자손이 왕위에 있는 날이 장구하리라.” 그러므로 성경책을 가정에서도 직장에서도 학교에서도 늘 가까이에 두시길 바랍니다.

 

  여기서 한 가지 주의할 점을 살펴보겠습니다. 본문 4절을 보면 “기록하지 말라”고 한 말씀이 있습니다. 신비는 신비입니다. 자꾸 알려고 하면 안 됩니다. 호기심을 가지고 연구심을 가지는 것은 좋은데 알고 있는 것부터 잘 지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모르게 해 놓은 것을 알려고 하다보면 이단에 빠집니다. 윌리엄 핸드릭슨은 비밀을 이렇게 주석했습니다. “전혀 알려지지 않기 때문에 비밀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계시하지 않으시면 알 도리가 없기 때문에 비밀입니다.” 그러므로 “교회 바깥에 성경에 나오는 비유 등을 잘 가르치는 사람이 있다. 모임이 있다”라고 하면 거의 잘못된 집단일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미혹에 빠지지 마시고 검증된 모임에 허락받고 가시거나 교회 안에서 실시하는 ‘신약의 파노라마’와 같은 성경공부에 적극 참여하시길 바랍니다. 

 

  본문의 두 번째 명령은 “하나님의 말씀을 먹어라”는 것입니다. 시저가 전쟁에서 이긴 것은 폰투스 왕국에 갔고 거기서 적군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보았노라, 이겼노라.” 만약 가기만 하고 가만히 있었으면 결코 승리할 수 없었고 정복할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가서 보았고 싸웠기 때문에 이길 수 있었고 정복할 수 있었고 승전보를 전해줄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보는 단계를 성경책과 연관시켜보면 무엇을 말할까요? 성경책을 먹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기 위해 소유하고 있는 성경책을 읽고 묵상하고 소화시키고 적용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먹어라.” 그러므로 성경책을 가지고만 있지 마시고 성경책을 꼭 읽으시고 묵상하셔서 소화시키시길 바랍니다.

 

  우리 몸은 음식을 먹으면 삽니다. 그러나 우리 영혼은 하나님의 말씀을 먹어야 삽니다. 육체만 있다면 음식만 먹으면 됩니다. 그러나 사람은 영혼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늘에서 내려오는 만나를 먹어야 삽니다. 하나님이 백성이 광야에서 살아갈 때 필요한 양식은 만나였습니다. 이처럼 오늘날도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먹어야 영혼이 삽니다. 이 세상 지나갈 때 말씀을 먹어야 삽니다. 영혼이 살아나면 모든 것이 살아납니다. 우리가 날마다 숨을 쉬는 순간마다 결정할 일이 많은데 우리 몸 어디에서 결정합니까? 영혼이 결정합니다. 영혼에서 나오기 때문에 영혼이 인생을 좌우합니다. 그러므로 영혼이 건강해야 하고 영혼이 바로 서야 합니다. 그럴 때 자신도, 가정도, 사회도, 국가도, 심지어 교회도 건강하게 바르게 세워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40일 동안 금식하신 다음에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그럴 때 먼저 찾고 먼저 먹어야 할 것은 떡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셨습니다.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고(마 4:4) 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영을 살린다고(요 6:63)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영혼이 살 길은 하나님의 말씀을 먹는 것입니다. 이 중요한 것을 제쳐놓고 다른 것 가지고 사니까 힘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하루가 시작되기 전에 먼저 꼭 먹고 시작하셔서 하루가 건강하고 바르게 세우시길 바랍니다. 오늘 오신 성도님은 한 주간이 시작되기 전에 주일에 와서 말씀을 듣고 시작하기 때문에 한 주간이 잘 될 줄로 믿습니다.

 

  먹는다는 것은 성경책을 삼키거나 수술해서 배 속으로 직접 집어넣는다는 말이 아니라 받아들인다는 말입니다. 음식을 냉장고에 보관만 하면 소용없습니다. 내 것이 되지 않습니다. 성경책도 소유한다고 해서 진정으로 내 소유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책을 읽고 묵상하고 소화시킬 때 진정으로 내 것이 됩니다. 이때 ‘묵상하다(하가)’라는 말은 사자가 으르렁거리면서 맛있게 다 먹어치우는 모습을 뜻합니다. 주위의 사자가 덤벼들지 못하도록 으르렁거리면서 뼈도 내장도 가죽도 살도 남기지 않고 “우두둑 우두둑” 씹고 “싹싹” 핥으면서 깨끗이 먹어치우는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도 이처럼 맛있게 남김없이 먹어야 합니다. 설교시간에 꾸벅 꾸벅 졸고 집에가서는 아예 읽지도 않으면 언제 먹고 묵상할 수 있겠습니까? 마귀는 바쁘게 만들고 피곤하게 만들고 의심하게 만들고 실망하게 만들고 설교자와 교회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등의 전략으로 성경으로부터 멀어지도록 훼방합니다. 어쩌다 읽고 들은 것마저 까맣게 잊어버리도록 합니다. 그러나 이것을 이기고 정신을 바짝 차려서 성경책을 부지런히 읽고 듣고 묵상하고 소화시키면 앞 길이 활짝 열립니다. 살 길이 마련됩니다. 여호수아 1장 8절을 보면 형통하게 된다고 했습니다.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 아멘.

 

  그런데 10절을 보면 “작은 두루마리를 갖다 먹어 버리니 내 입에는 꿀같이 다나 먹은 후에는 내 배에서 쓰게 되더라”고 했습니다. 성경을 읽기는 쉽지만 실천하기는 어렵다는 말입니다. 말씀대로 살려고 하면 쓴 것이 사실입니다. 말씀대로 살기가 쉽지 않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려면 희생이 따르고 고통이 따릅니다. 어려운 형편에 십일조하려면 역시 희생과 고통이 따릅니다. 직장일과 학교일에 바쁜데 주일을 지키려면 이 역시 희생과 고통이 따릅니다. 그러나 잘 소화시키면 영혼이 건강해지고 힘이 생깁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고통에 빠뜨리고 착취하기 위해서 말씀을 주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건강하게 잘 살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먹으면 어떤 변화가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먹었는데 아무렇지도 않을 리가 없습니다. 말씀대로 살지 못한 것 때문에 창자가 뒤틀리고 아파옵니다. 통회하고 자복하게 됩니다. 속에서 북받쳐 오릅니다. 눈물 콧물이 뒤범벅이 됩니다. 말씀이 들어오면 거꾸러집니다. 입으로만 아니라 마음 속 깊이 절실하게 깨닫고 깊이 뉘우칩니다. ‘하나님의 말씀 밖에 없구나’라고 깨닫습니다. 말씀이 힘이 되고 말씀이 막힌 문제를 해결해줍니다. 그리하여 말씀이 유일한 진리인 것을 깨닫고 오직 말씀대로 살아갑니다. 영혼의 양식으로 알고 먹지 않으면 죽는 줄 알고 부지런히 말씀을 먹습니다. 그렇게 살다보면 어느새 달라져 있는 모습을 보게 되고 성숙하고 성공한 모습을 보게 될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미국의 백화점 왕이자 체신부장관이었던 존 워너메이커가 최고의 투자는 10살 때 성경책을 산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기자는 다시 질문했습니다. “그렇다면 성경만 구입하면 성공할 수 있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먼저 하나님을 믿고, 말씀을 실천해야지요. 하나님을 신뢰하고 즐겁고 기쁘게 일하다 보면 성공은 어느새 자신의 옆에 다가와 있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소유하고 실천했을 때 형통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잘 읽으시고 묵상하시고 소화시키시고 잘 적용하셔서 형통하시길 바랍니다.    

 

  본문의 세 번째 명령은 “하나님의 말씀을 알려라”는 것입니다. 시저가 전쟁에서 이긴 다음에 한 일은 폰투스 왕국과 싸워 이기고 정복한 것을 본국에 전한 것입니다. 가서 보고 싸워서 이기고 정복했지만 아무런 소식이 없으면 본국의 수많은 사람들이 얼마나 답답해하겠습니까? 승리의 기쁜 소식을 빨리 전해주어야 하는데 자기들만 알고 본국에 있는 원로원과 시민들에게 알리지 않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런데 시저는 멋있는 말로 전해주었습니다.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 이렇게 전해주는 단계를 성경책과 연관시켜보면 무엇을 말할까요? 성경 말씀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주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알려라.” 그러므로 성경책을 읽고 소화시키기만 할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전해주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으면 꿀같이 답니다. 그래서 다윗은 시편 19편 10절과 같이 고백했습니다. “금 곧 순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도다.” 시편 119편 103절에도 고백했습니다.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 다니이다.” 구약의 에스겔 선지자 역시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달다고 했습니다.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내가 네게 주는 이 두루마리를 네 배에 넣으며 네 창자에 채우라 하시기에 내가 먹으니 그것이 내 입에서 달기가 꿀 같더라”(겔 3:3).

 

  그러나 그 말씀이 우리를 관통할 때는 쓴 맛이 납니다. 그리고 우리를 관통하여 다른 사람에게 전해질 때도 쓴 맛이 납니다. 사람마다 상황마다 쓴 맛의 종류가 많이 있습니다. 저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을 때 꿀보다 더 달고 정금보다 더 귀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저를 관통할 때 부족한 모습을 발견하고는 쓴 맛이 났고, 저를 관통해서 다른 사람에게 전할 때 잘 전하지 못해 쓴 맛이 났고, 전했을 때 잘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을 보면 쓴 맛이 났습니다. 그러나 달고 오묘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기에 쓴 맛을 보면서도 전하고 있습니다.

 

  특히 앞장서서 가르치는 사람의 아픔이 많습니다. 학교에서, 교회에서, 가정에서 앞에서 인도하는 사람은 말 못할 아픔을 가지고 있습니다. 잘 가르치고 인도하려고 하지만 뜻대로 안 되는 자기에 대한 아픔, 가르침을 받는 사람들이 성숙하길 바라는데 잘 안 되는 아픔 등이 있습니다. 이것은 알기 때문에 생기는 아픔입니다. 배웠고 알기 때문에 인도하고 가르쳐야하기 때문에 겪는 아픔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3장 17절은 인도자를 잘 따름으로서 기쁘게 하라고 합니다.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그들은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신들이 청산할 자인 것 같이 하느니라 그들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하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 오늘은 스승의 날입니다. 그러므로 각 분야의 스승을 잘 따르셔서 스승이 즐거움으로 잘 감당하게 하셔서 많은 유익이 있기를 바랍니다.

 

  에스겔 선지자가 말씀을 전하는 과정을 보면 참으로 힘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에스겔은 온 몸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벙어리가 될 때도 있었고(겔 3:22-27), 머리카락과 수염을 깎을 때도 있었고(겔 5:1-4), 아내를 잃고도 울거나 슬퍼하지 못할 때도(겔 24:15-27) 있었습니다. 사도 요한도 작은 두루마리를 갖다 먹었을 때 입에서는 꿀처럼 달았지만 먹은 후에는 배에서 쓰게 되었습니다. 복음을 충실하게 전하려고 하면 십자가를 져야했기 때문입니다. 사도 요한은 밧모섬에 추방을 당해 있는 형편이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소유하고 소화시킨 사람은 단 맛도 있지만 쓴 맛도 있습니다.

 

  말씀을 받은 선지자의 삶은 어떻게 보면 고통스럽기가 이루 말할 수 없어 보입니다. 히브리서 11장 36-38절을 보면 더 큰 괴로움을 당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또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그들이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자신도 죽을 고생을 하고 가족도 죽을 고생을 시켰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고생이 헛된 개고생이 되고 말았을까요? 39-40절을 보면 그렇지 않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된 것을 받지 못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그 당시로서는 약속된 것을 받지 못한 것처럼 보였지만 결국은 예비하신 더 좋은 것을 받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어떠했습니까? 세상을 구원하라는 말씀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세상에 기쁘게 내려오셨습니다. 그런데 막상 내려와 보니 분위기가 어떠했습니까? 대환영했습니까? 멸시천대하고 십자가에 못을 박아 죽였습니다. 세상이란 조직의 쓴 맛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는 달지만 배에 들어가면 이처럼 쓴 맛이 납니다. 오늘날도 예수님을 어떻게 대합니까? 핍박하고 욕하고 거부하고 거짓이라고 하면서 여전히 멸시천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이 끝내 쓴 맛만 보고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 이름보다 더 존귀하고 큰 이름이 어디에 있습니까? 예수님보다 더 사랑받는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이처럼 쓴 맛이 변하여 단 맛이 나게 됩니다. ‘인내는 쓰나 그 열매는 달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나를 관통할 때 단 맛을 내고 쓴 맛을 보게 하지만 결국은 승리의 단 맛을 영원토록 보게 하는 것입니다. 러시아의 시인 푸쉬킨이 이런 시를 썼습니다. “생활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 고통의 나날을 참고 견디면 언젠가는 기쁨의 날이 오리니, 현재는 언제나 슬픈 것, 마음은 미래에 사는 것, 모든 것은 일순간에 지나고, 지나고 나면 그리워지리라.” 시편 126편 5-6절도 말합니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아멘.   

 

  배에 쓰다고 해서 끝까지 쓴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약을 먹었는데 그 약이 끝까지 쓴 상태로 남아서 몸을 끝까지 괴롭히겠습니까? 아닙니다. 아무리 쓴 약이라고 해도 결국은 병든 몸을 치료해서 몸을 건강하게 만들어 줍니다. 그래서 ‘좋은 약은 입에는 쓰나 병에는 좋다’는 말이 있는 것입니다. 영적인 병도 치료받으려면 신구약 말씀을 먹어야 합니다. 비록 쓴 맛이 나더라도 먹고 행해야 합니다. 단 맛만 있으면 치료가 잘 안 됩니다. 부담이 되는 지옥과 심판론과 같은 교리와 십일조와 주일성수와 같이 지키기 힘든 쓴 맛이 나는 성경 구절은 빼고 단 맛만 나는 성경 구절로는 영적인 질병을 치료받기 힘듭니다.

 

  그러므로 쓰더라도 먹어야 합니다. 부담이 되더라도 달게 받고 행하고 전해야 합니다. 그래야 영혼의 건강을 찾을 수 있고 영혼이 잘 됨으로 몸도 강건해지고 하는 일도 잘 됩니다. 많은 사람이 함께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처럼 말씀을 체험하여 말씀이 나를 관통하면 다른 사람에게 잘 전해집니다. 그러나 전할 때 고통이 따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것은 달고 기쁩니다. 말씀을 받을 때 감격과 기쁨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섭취한 다음에 제대로 말씀을 지키고 전하려면 희생과 고난이 뒤따릅니다. “세상 기준대로 살지 말고 성경기준대로 바꾸어 살고 세상 사람과 거꾸로 살아라”고 하면 분위기가 좋지 않습니다. “예수 천국, 불신 지옥!”이라고 하면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오늘날은 시끄러우니까 좀 부드럽게 말하라고 합니다.

 

  이처럼 생명의 복음을 전할 때 고통이 있습니다. 지혜롭게 전하는 것과 무능력하게 전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우리는 복음을 지혜롭게 전하기도 해야 하지만 능력도 있게 전해야 합니다. 세상이 잘못된 것을 꾸짖고 회개를 촉구하면 듣기 좋아할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말씀을 전하는 자는 영광을 받게 됩니다. 우리 믿는 성도에게는 먹구름이 끼어있는 것처럼 보여도 쨍하고 해가 떠 있습니다. 쓴 맛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결국 합하여 선을 이루어 단맛을 냅니다. 

 

  앞서 말씀드린 워너메이커가 세계주일학교 연합회 총재로 선출된 다음에 세계 주일학교 대회에서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남겼습니다. “저는 다른데서는 얻을 수 없는 지식을 성경을 통해 배웠습니다. 또한 성경으로 제 인생의 확고한 삶의 원칙과 기초를 세웠고, 성경의 바탕 위에 저의 인격과 사업을 건설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저는 성경에서 구세주 되신 예수님을 만났으며, 주님 안에서 제 인생의 변화를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연약하고 보잘 것 없는 인생이었지만 저의 힘과 능력이 되신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분과 동행했을 때, 모든 두려움은 사라졌고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용기와 확신을 얻게 되었습니다. 성경을 읽을 때마다 새로운 아이디어와 비전을 주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책을 가지고 읽고 알리면 어떻게 될까요? 시저는 루비콘 강을 건넌 다음에 “주사위는 던져졌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 역시 이미 강을 건너버렸고 우리의 주사위도 이미 던져졌습니다. 성도는 홍해 바다를 건넜고 요단강을 건넜습니다. 그렇다면 강을 건넌 다음에 어떻게 해야 할까요? 시저는 어떻게 했습니까?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고 승리의 기쁜 소식을 전했습니다. 우리도 우리가 전해주는 승리의 소식을 기다리고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가졌노라, 읽었노라, 알렸노라”고 외치지 않으시겠습니까?

 

  워너메이커는 성경을 10살 때 구입하여 “가졌노라”를 이루었고, 그 성경책을 읽고 묵상하고 실천함으로써 “읽었노라”를 이루었고, 그가 체험한 성경 말씀을 전해주어서 “알렸노라”를 이루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성경책을 사서 읽으시고, 쓴 맛과 단 맛을 가리지 마시고 말씀대로 살아서 쓴 맛이 나는 가운데서도 단 맛이 나는 삶과 가정이 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그 체험적인 신앙이 우리를 관통하여 이웃에게도 전해져서 승리의 기쁜 소식을 함께 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2011 참좋은제자들교회 https://cafe.daum.net/truegooddisciples/IPZB/69 담임목사 이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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