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서 친히 써주신 십계명(재개정판) [제6계명 살인금지] 살인하지 말라
제6계명의 개요
✙✙✙ 제6계명의 구절
제6계명의 구절은 하나님께서 살인하지 말라고 명령하신 출애굽기 20장 13절입니다. 병행구절은 신명기 5장 17절입니다.
13 살인하지 말라
✙✙✙ 제6계명의 주제
두 번째 돌판은 이웃 사랑에 대한 것으로 이웃에 대한 본분으로 볼 수 있는데 올바른 삶의 관점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이 가운데 제6계명은 올바른 생명의 삶에 대한 것으로 살인하지 말도록 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웃에 대한 본분으로 이웃 사랑을 실현하기 위해 살인하지 말고 생명을 귀하게 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제6계명은 이러한 흐름이 있으므로 이와 관련된 주제를 도출해 본다면 [살인금지] 살인하지 말라가 되겠습니다.
제6계명의 내용
십계명은 딱딱한 법이 아닙니다. 사랑입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셔서 십계명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사랑에 겨워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이웃에게 사랑을 베푸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이 빠지면 십계명이 성립할 수 없습니다.
제6계명은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입니다. 이것 또한 사랑입니다. 살인하지 않고 생명을 존중하는 것은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생명을 존중할 수 있겠습니까?
● 첫째, 생명을 존중하려면 미워하지 않으면 됩니다.
제6계명은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이므로 나는 살인하지 않았으므로 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계명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과연 그렇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큰 계명과 새 계명에 대해 말씀해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큰 계명은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입니다. 마가복음 12장 31절입니다.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그리고 새 계명은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입니다. 요한복음 13장 34절입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서로 사랑하지 못하고 서로 미워하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이웃을 미워하면 거짓말이라고 했습니다(요일 4:20).
이러한 미움은 살인을 불러일으킵니다. 자신을 해치기도 하고 다른 사람을 해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미워하는 것은 살인이라고 했습니다.
요한일서 3장 15절입니다.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그러므로 서로 미워하지 말고 서로 사랑하여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움을 품고 살면 살인까지 가거나 아니면 지독하게 깨어져버린 관계로 몰아갑니다. 이 미움은 자기 자신의 건강과 정신과 마음까지도 갉아먹고 상하게 합니다. 미워하게 되면 재물에도 손실을 가져오게 하고 자신의 이미지도 나쁘게 만듭니다.
독이 가득한 곳에는 독가스가 나옵니다. 마음에 독기를 품으면 그 마음에서 미움의 독가스가 나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미움의 독가스가 가득 찬 곳에 살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자신과 다른 사람을 상하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를 향해 “미워하지 말라”(레 19:17), “용서하라”(막 11:25, 눅 6:37, 17:3-4), “불쌍히 여기라”(잠 14:21, 31, 엡 4:32, 벧전 3:8)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처럼 살인을 금하는 제6계명은 우리 자신과 이웃의 생명에 관련된 계명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려고 제6계명을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생명을 주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생명을 주시되 더 풍성하게 주십니다. 그러나 원수 마귀는 이와 반대입니다. 오히려 죽이고 빼앗습니다.
요한복음 10장 10절입니다.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마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이므로 처음부터 끝없이 죽이고 빼앗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8장 44절입니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
그러므로 마귀와 함께 하는 개인이나 나라는 생명을 파리목숨처럼 여깁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끝없이 살려주십니다. 죽은 생명을 살려주십니다. 죽은 신앙도 살려주시고 죽은 가정과 학업과 사업과 건강과 관계도 살려주십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모신 개인이나 나라는 생명을 존중하고 살려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모셔 들이셔서 생명과 아울러 그 모든 것이 살아나야 하겠습니다.
독이 몸에 들어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독은 무서운 물질입니다. 독이 몸에 들어오면 온 몸이 상해서 죽습니다.
뱀과 같은 맹독이 있는 동물이나 곤충에게 물리면 즉사합니다. 이처럼 맹독이 몸 안에 들어오면 치명상을 입고 죽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맹독을 품고 살 때가 많습니다. 그러다가 몸에 치명상을 입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그 맹독의 정체는 무엇입니까? 우리는 맹독성 곤충이나 동물에 물린 적도 없으니까 안심하고 있습니까?
아닙니다. 맹독은 바로 분노입니다. 분노란 독을 품고 살면 자신의 몸과 마음이 급격하게 또는 서서히 상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이 간곡하게 말했습니다. 에베소서 4장 26절과 27절입니다.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
분을 가득 품고 있다가 마귀에게 틈을 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마귀의 밥이 됩니다. 틈을의 원어원형은 “τόπος(토포스)”인데 거주하는 “장소”를 뜻하는데 행동할 기회를 주는 것도 의미합니다.
분을 품고 있으면 그 분노 때문에 마귀가 맹활약할 장소와 기회를 제공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분노 때문에 결국 자기 자신을 망치고 다른 사람까지 해칩니다.
그러므로 내 안에서 분노를 비워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의 생명이 서로 존귀하게 될 것입니다. 제6계명은 이러한 것을 지켜주려고 존재하고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십계명은 이처럼 강요의 법이 아닙니다. 우리의 행복을 위한 사랑의 법입니다. 그러므로 십계명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면서 십계명을 잘 지켜야 하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6계명을 잘 따르지 않고 분을 그냥 둔다면 점점 자라납니다. 그러면 분이 점점 커집니다. 그러면 마귀가 점점 더 많이 활동하게 됩니다.
그러면 상황이 점점 더 심해집니다. 서로 죽이거나 다투거나 초죽음까지 몰고 갑니다. 서로의 관계를 무자비하게 깨고 죽은 관계로 만듭니다.
이렇게 되면 사는 맛이 나지 않고 죽는 맛이 됩니다. 살아도 산 것이 아닙니다. 생기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관계 속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찾아오시면 평화롭고 화목하고 사는 맛이 나고 생기가 돌게 됩니다.
그러므로 평강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사 9:6)께서 마음 속에 찾아오셔서 이러한 분노가 사라지고 서로 사랑하여야 하겠습니다.
● 둘째, 생명을 존중하려면 자신을 잘 보존하면 됩니다.
생명은 누구의 생명이든 귀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서로의 생명을 해치지 말고 자신의 생명까지도 해치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살인하지 말라”는 말씀 속에 자신을 사랑하라는 뜻도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자신의 생명도 귀하게 여기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웃 사랑하기를 “자기 자신같이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2장 39절입니다.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자신을 돌보고 사랑하는 것처럼 이웃도 자기 자신으로 여기고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이와 같으므로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은 자기 자신도 사랑하라는 말씀도 포함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자기의 생명을 존중해야 하는 것입니다.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난다고 생각을 하는데 아닙니다. 죽은 후에는 심판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죽으면 영원히 끔찍한 지옥의 고통이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함부로 죽지 않아야 합니다.
때로는 사는 것이 힘들고 견디기 어려운 순간이 닥쳐올 때도 있습니다. 더 이상 길이 없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럴 때 포기하지 않고 절망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절망적인 것보다는 더 좋은 것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무엇을 더 크게 보느냐에 따라 그것을 선택하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으므로 좋은 길이 있다는 생각이 들면 극단적인 선택을 하지 않습니다. 더 좋은 것을 소망하게 되기에 그러한 것을 선택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더 큰 의미가 있다고 여겨지면 포기하지 않게 됩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더 크게 보면 되겠습니까? 간략하게 살펴보면 자기가 받고 있는 사랑과 존귀를 더 크게 보면 될 것입니다.
그리고 낙심하게 하고 절망하게 하는 것을 자꾸만 되새길 것이 아니라 희망을 주는 일과 그런 것에 집중하고 그러한 것을 더 크게 보면 될 것입니다. 또한 없는 것을 크게 보고 원망하고 섭섭해 하는 것이 아니라 가지고 있는 것을 더 크게 보고 감사하면 됩니다.
외톨이가 되려고 하지 않고 함께 해주고 격려해주는 사람을 더 크게 더 좋게 보면 됩니다. 한 사람은 넘어지기 쉽지만 함께 하면 넘어져도 옆에서 붙들어 일으켜주고 같이 있어 쓸쓸하거나 추운 것이 아니라 따뜻하게 되고 세 겹줄처럼 쉽게 끊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전 4:9-12).
이러한 것과 아울러 무엇보다 예수님과 천국에 소망을 두고 살면 됩니다. 아무리 고통이 커도 눈앞이 캄캄한 것처럼 보여도 이 세상은 잠시 있다가 지나가게 되어 있습니다.
이러하므로 잠시 머무는 이 세상보다 온갖 괴로움과 슬픔과 답답함과 병이 없고 모든 것이 아름답고 건강하고 풍족하고 행복한 천국에서 영원히 살게 되는 것을 더 크게 보면 됩니다.
또한 좋고 나쁜 여러 가지 형편에서도 예수님 안에 있으므로 모든 것을 극복하고 오히려 기뻐하게 되고(빌 4:10-13),
무겁게 누르는 것이 있더라도 피곤하지 않고 낙심하지 않도록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바라보고(히 12:1-3),
여러 가지 시험으로 근심하게 되고 고난과 핍박이 닥쳐도 이상한 일을 당하는 것처럼 여기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즐거워하게 하시고 기뻐하게 하시고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시는 것을(벧전 1:3-7, 4:12-14) 더 크게 보고 이겨내면 됩니다.
이렇게 제6계명은 생명을 자기 마음대로 해치는 권리를 사람에게 주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으므로 어떤 입장과 처지가 되어도 자신과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지 않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잘 보존하여야 하겠습니다. 그러기 위해 크게 볼 것을 더 크게 보고 좋게 볼 것을 더 좋게 보아야 하겠습니다. 그 무엇보다 천국에서 영원히 살게 되는 자신의 진정한 생명을 얻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꼭 믿어야 하겠습니다.
이미 믿어 영생을 얻게 되었다면 믿음의 주요 온전하게 하시는 분이신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영원히 살게 될 진정한 내 집인 천국에 소망을 두는 가운데 예수님과 함께 그리고 이웃과 함께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 셋째, 생명을 존중하려면 말을 잘 사용하면 됩니다.
사람을 죽이는 무기를 보면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총도 있고 폭탄도 있고 기타 가공할 최신 무기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무기 외에 우리가 너무나 자주 사용하는 무기가 있습니다.
그 가운데 빈번하게 사용하는 무기는 “말”입니다. 말로 가슴에 깊이 상처를 줘서 자신도 모르게 언어로 살인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인격적인 살인으로는 폭언, 욕설, 명예를 훼손시키는 악의에 찬 말, 비난하거나 멸시하는 말, 악플(악성리플, 악성댓글) 등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5장 22절에는 라가(Ῥακά, 라카), 즉 “멍텅구리, 바보”라고 하는 것도 해당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형제에 대하여 노하거나 라가라고 하거나 미련한 놈이라고 하면 화를 당하게 되므로 이런 유형의 말을 하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할 때 조심해야 합니다. 상처가 나면 재빨리 치료합니다. 그러면 마음의 상처는 어떻게 치료해야 합니까? 치료법은 무엇입니까?
서로 용서하고 축복해주는 것입니다. 가까운 사람이 잘 되어야 결국 자기 자신도 잘 되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이 무거운 미움의 짐과 한에서 벗어나게 되기 때문입니다.
잠언 4장 23절을 보면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부정적인 생각과 말과 글로 낙서하면서 자신을 하찮게 여기고 자기의 마음을 서서히 죽이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기를 존중하지 못하고 자기를 깎아먹는 사람이 있습니다. 말을 잘못 사용해서 자신의 고귀한 생명을 무너뜨립니다.
잠언 18장 21절은 혀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죽고 사는 것이 혀의 힘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혀의 열매를 먹으리라.
자신과 다른 사람이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가 자기 자신의 혀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혀를 잘 사용해야 합니다.
말에는 창조적인 능력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실 때 말씀으로 창조하셨습니다.
말에는 이처럼 창조적인 능력이 있어서 내가 한 말이 나의 온 몸과 삶을 좌우합니다. 작은 키가 큰 배를 좌우로 움직이듯이 내 몸의 작은 혀가 나의 온 몸과 마음과 앞길을 좌우합니다.
야고보서 3장 4-6절입니다. 또 배를 보라 그렇게 크고 광풍에 밀려가는 것들을 지극히 작은 키로써 사공의 뜻대로 운행하나니 이와 같이 혀도 작은 지체로되 큰 것을 자랑하도다 보라 얼마나 작은 불이 얼마나 많은 나무를 태우는가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삶의 수레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
부정적인 말을 하는 사람은 부정적인 결과를 얻게 됩니다. 부정적인 말은 그 말이 씨가 되어 자라서 그 말대로 됩니다. 부정적인 결과가 계속 들이닥쳐서 파괴하고 죽입니다. 지혜도, 재능도, 용기도, 재산도, 사람도, 신앙도 무너지게 만듭니다. 작은 불씨가 다 태워 버립니다.
이러하므로 말을 잘 사용해야 합니다.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창조적으로 말해서 생산적이고 창조적인 결과를 거두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말 그대로 총명이 생기고 힘과 용기가 생기고 하는 일이 말 그대로 잘 됩니다. 창조적이고 긍정적이고 생산적인 말을 하기 때문에 좋은 일이 자꾸 생기고 만들어지고 일어나게 됩니다.
그러므로 살리는 말, 선플(선리플, 선댓글), 긍정적이고 창조적인 말, 생산적인 말, 축복과 승리와 위로의 말을 하여 자신도 살고 다른 사람도 살리는 생명의 말을 해야 합니다.
룻기를 보면 이런 아름다운 관계를 볼 수 있습니다. 생산적이고 창조적인 생명의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것이 룻기 2장 4절에 있습니다. 마침 보아스가 베들레헴에서부터 와서 베는 자들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니 그들이 대답하되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복 주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니라.
룻기를 보면 이렇게 복을 빌어주고 화답하는 장면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보아스가 룻에게(2:12, 3:10), 룻이 보아스에게(2:13), 나오미가 보아스에게(2:19-20), 장로들과 백성들이 보아스에게(4:11-12), 여인들이 나오미에게(4:14-15)입니다.
그러므로 룻기는 해피 엔딩으로 끝나고 있습니다. 창조적인 말로 창조적인 결과를 거둔 것입니다.
밭에서 곡식을 추수한 것뿐만 아니라 말로 심은 대로 축복을 거두어 예수 그리스도의 가문이 되었고 그 자손 가운데 다윗이 태어난 것입니다.
이처럼 그 당시 힘들고 어려웠던 암흑기였던 사사시대였지만 생산적이고 창조적인 언어를 사용한 가문은 크게 쓰임을 받았습니다. 말로 복을 빌어주고 위로한 대로 거두게 되었습니다.
잠언 11장 9절과 11절은 이러한 구원에 대해 말합니다. 악인은 입으로 그의 이웃을 망하게 하여도 의인은 그의 지식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느니라 성읍은 정직한 자의 축복으로 인하여 진흥하고 악한 자의 입으로 말미암아 무너지느니라.
작은 혀가 흥하게 하기도 하고 망하게 하기도 합니다. 세치 혀로 기를 죽이기도 하고 기를 살리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고 실족시키고 죽이는 말이 아니라 나와 다른 사람을 살려내는 생명의 말을 하여야 하겠습니다.
● 넷째, 생명을 존중하려면 이웃을 잘 돌보면 됩니다.
살인하지 말라는 제6계명은 “이웃의 생명을 지켜라, 이웃을 사랑하라, 이웃을 공경하라”는 계명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이와 같으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과 이웃의 생명을 지키는 생명지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생명을 해치지 않는 것에 머물지 않고 더 나아가 생명을 지키는 일에도 힘써야 하겠습니다.
그러기 위해 이웃의 삶도 돌아보아야 합니다. 전 세계인 가운데 굶어죽는 사람이 없도록 힘써야 합니다. 도와주지 않아서 죽을 지경이 되도록 내버려두거나 삶을 포기할 정도로 방치하지 않아야 합니다.
야고보서 2장 15-17절입니다.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요한일서 3장 17절과 18절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누가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냐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무엇보다 다른 사람의 영원한 생명에 관심을 가져야 하며 구하려고 힘써야 합니다.
유다서 1장 23절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 어떤 자를 불에서 끌어내어 구원하라 또 어떤 자를 그 육체로 더럽힌 옷까지도 미워하되 두려움으로 긍휼히 여기라.
그러므로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전파해서 구원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딤후 4:2, 약 5:20).
또한 이웃이 죽음의 길로 가는데 경고하거나 붙잡지 않으면 간접적으로 죽게 만든 범죄에 해당되므로 말씀의 나팔을 불어 깨우쳐주는 파수꾼의 역할도 충실하게 해야 합니다(겔 3:11, 17-21).
그러므로 이웃의 삶을 돌보고 열심히 전도도 하여서 자신과 이웃의 생명을 지켜내는 생명지킴이의 역할을 잘 감당하여야 하겠습니다.
● 다섯째, 생명을 존중하려면 함부로 정죄하지 않으면 됩니다.
우리가 흔히 잘못하는 실수 가운데 하나가 하나님을 대신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판단해 놓고는 하나님께서 판단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판단하는 일에 있어서 공적으로 심사하고 판단하는 이외에 사적으로 함부로 판단하는 것을 삼가해야 합니다.
불필요하게 너무 강한 사람은 자기 잘못은 잘 안 보이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잘못은 잘 보입니다.
자기 눈 안에 있는 들보는 잘 안 보이고 다른 사람 눈에 있는 티끌은 잘 보입니다. 자신에게는 관대하나 다른 사람에게는 엄격하게 적용합니다. 자기에게는 약하나 다른 사람에게는 강합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살면 모든 사람에게 독이 됩니다. 판단하는 자기 마음이 먼저 편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도 편하지 못하게 합니다. 모두에게 해가 됩니다.
그러므로 감정을 가지고 불건한 판단을 하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형제를 판단하고 비판하고 섭섭해 하면 미움이 들어오고 분노가 생기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면 형제를 직간접적으로 해치게 됩니다.
그러므로 형제를 판단하는 습관을 버려야 합니다. 그것이 자신의 생명을 살리고 다른 사람의 생명도 살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는 서로가 불완전한 존재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서로가 불쌍히 여겨주어야 할 존재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 다 약점도 많고 단점도 많은 존재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들추어내면 살아남을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함부로 판단하고 정죄하지 말아야 합니다.
요셉을 보면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라고 하면서 형제를 판단하고 정죄하지 않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오히려 용서해주었습니다(창 50:15-21).
요셉은 형제들로부터 억울한 일을 당했고 심지어 목숨을 잃을 뻔했습니다. 형제가 아니라 원수지간이었습니다.
복수는 복수를 부릅니다. 복수는 끝이 없습니다. 그러나 용서는 복수를 멈추게 합니다. 어느 한쪽이 과감하게 일어나서 용서하면 복수는 멈추게 됩니다.
요셉은 복수하기를 멈추고 용서를 택했습니다. 그래서 형제들의 생명을 살리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형제들이 이스라엘 지파의 족장이 될 수 있었습니다.
만약 요셉이 형제를 정죄하고 자기가 당한 대로 복수했더라면 이스라엘 지파의 맥은 끊어지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정죄하지 않고 용서하므로 생명을 살리게 된 것입니다.
야곱이 죽자 요셉의 형들은 지레 겁을 잔뜩 집어먹었습니다. 아버지 야곱이 죽었으니 이제 보복 당할 것이 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 형들이 악을 행하였다 할지라도 그들의 허물과 죄를 용서하라고 한 유언대로 자기들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했습니다.
지금 애굽의 총리가 된 요셉이 어마어마한 권세가 있으니 말 한마디면 자기들의 목이 모두 다 달아날 지경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요셉은 그들이 하는 말을 듣고는 울었습니다. 요셉은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했습니다.
창세기 50장 19-21절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당신들은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고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더라.
놀라운 것은 형제들뿐만 아니라 형제들의 자녀들까지도 길러주겠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용서는 사랑을 낳고 생명을 낳습니다.
그런데 만일 요셉이 흥분해서 형제를 죽였다면 이스라엘 열두 족속은 존재하지 않았고, 오늘날 이스라엘 민족도 없었을 것입니다.
아니면 다른 가문을 세워서 이스라엘 민족을 일으켰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밉고 섭섭한 것이 많아도, 억울한 것이 많아도 판단하지 않고 정죄하지 않았기에 야곱 가문의 열두 지파가 쓰임을 받게 된 것입니다.
오늘날 갈등과 분열이 극심해진 것 같습니다. 어디든 다툼이 많아졌습니다. 그러다가 서로 헤어지고 서로 무너지고 있습니다. 온통 깨지는 소리가 곳곳에서 들리고 있습니다.
이것은 서로 상대방을 인정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다르면 모두 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다른 것은 다를 뿐이지 틀린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끝까지 다른 것을 틀린 것으로 여기고 나쁜 것으로 여기면 분열이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잘못된 이해로 야기되는 분열은 생명을 해치고 공동체를 해칩니다.
“나처럼 해야 된다, 나 같아야 된다”라는 식으로 너무 강하면 탈이 납니다. 화합이 잘 안 됩니다. 여기서 서로 섭섭한 것이 많이 발생합니다.
이와 같으므로 다른 것과 틀린 것을 잘 구분해야 합니다. 서로의 장점과 강점을 가지고 서로 도우면서 살아야 합니다.
자물쇠가 있고 열쇠가 있습니다. 톱니바퀴도 서로 다릅니다. 그런데 오히려 더 잘 돌아갑니다. 합해서 선을 이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것을 악으로 여기고 극한 투쟁을 하고 다투지 말아야 합니다. 이러한 방식은 해결책이 없고 결과적으로는 서로 죽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서로 살기 위해 서로 너그럽게 관용해야 합니다. 그 무엇보다 정죄하지 않아야 합니다.
앞서 살펴본 요셉이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대신하지 않는 것입니다. 진리에 벗어나고 법에 벗어난 것 이외에는 함부로 판단하고 정죄하는 것을 조심해야 하겠습니다.
잠언 20장 22절을 보면 너는 악을 갚겠다 말하지 말고 여호와를 기다리라 그가 너를 구원하시리라고 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야고보서 4장 11절과 12절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형제들아 서로 비방하지 말라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네가 만일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요 재판관이로다 입법자와 재판관은 오직 한 분이시니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느니라 너는 누구이기에 이웃을 판단하느냐. 요셉은 이러한 것을 잘 알았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라고 하였을 것입니다.
요셉은 미워하고 판단하고 정죄하는 대신에 용서하여 화목을 택했습니다. 형제에게 보복하기보다 형제의 생명과 형제의 자녀들까지의 생명도 택하였습니다.
요셉은 울기까지 불쌍히 여기면서 용서하고 형제를 사랑했습니다. 요셉은 권력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남용하지 않고 생명을 살리는데 사용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요셉처럼 하나님을 대신하는 것이 아니라 형제를 정죄하지 않고 형제의 생명을 택하고 형제를 용서하고 사랑해야 하겠습니다.
● 여섯째, 생명을 존중하려면 자신이 죽으면 됩니다.
생명을 사랑하고 존중해야 하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생육하고 번성하도록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다른 사람의 피를 흘리면 자신도 피를 흘리게 되기 때문입니다(창 9:6-7).
성경은 이처럼 생명존중의 책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생명을 살리시는 것을 기록한 책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요 생명을 살리는 종교입니다. 그러기에 사람을 살리는 것이 교회의 사명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도 사람을 살리는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사람을 살릴 수 있겠습니까? 자신이 죽으면 됩니다. 기독교는 살리는 종교요 교회도 살리는 사명이 있고 그리스도인은 사람을 살리는 사람이라고 해놓고 왜 죽어야 한다고 합니까?
그것은 자기를 부인하라는 것입니다. 자기가 살기 위해 다른 사람을 희생시키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살리기 위해 자기 자신을 희생시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2장 24절에 이 사실을 잘 말씀해주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이 말씀이 얼마나 중요한 말씀인지 진실로 진실로라고 거듭 말씀하셨습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죽지 않으려고 버티셨다면 우리의 생명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동서고금의 수많은 성도의 목숨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예수님께서 한 목숨을 던지셨기 때문에 우리는 생명을 얻고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예수님처럼 사람을 살리는 일에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앞의 24절에 이어서 25절에도 계속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
자기를 부인하고 희생하는 사람은 자신의 생명과 삶을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영원히 보전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 잘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땅에 떨어져 죽은 한 알의 밀알이 되어서 많은 사람의 생명을 살리신 예수 그리스도처럼 우리도 우리 자신이 죽음으로써 많은 사람을 살릴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 일곱째, 생명을 존중하려면 죄를 다스리면 됩니다.
정치든 교육이든 어느 분야든 잘 다스려야 합니다. 잘 다스리지 못하면 잘못된 것이 더 기승을 부려서 좋지 못한 결과가 옵니다.
평화 대신에 혼란이 옵니다. 선 대신에 악이 횡횡합니다. 살기 좋은 세상 대신에 살기 어려운 세상이 옵니다. 잘 다스린다는 것은 이처럼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그런데 자기 자신을 잘 다스리지 못해 비극적인 결말을 맞은 사람이 있습니다. 가인입니다.
가인은 동생인 아벨을 그만 죽였습니다. 죽인 이유는 죄를 다스리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가인은 하나님께서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창 4:7)고 말씀하신 것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이 말씀을 하십니다.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그런데 우리가 어떻게 죄를 다스릴 수 있습니까? 그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할 때 가능합니다. 하나님께 그 능력을 구하고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일하시게 해드리므로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노력과 의지는 한계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한계가 없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하나님 안에서 죄를 다스릴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19장 26절입니다. 예수께서 그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정말 그렇습니다. 우리가 모든 것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죄를 다스리는 것도 그 무엇을 하는 것도 하나님 안에서 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죄가 없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다시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완벽하게 영화로워져서 내생의 천국에 들어가지 않는 이상 이 땅에는 죄가 살아있고 남아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는 동안에는 죄와의 끈질긴 싸움이 남아 있습니다. 그러기에 죄를 다스려야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정말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을 도저히 따라갈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롬 7:19-21)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 안에 죄도 함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고 탄식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구원자가 되십니다. 우리를 사망의 몸에서 건져내어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면 되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롬 7:25)라고 찬양을 드렸습니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이 어떻게 해결 받을 수 있기에 찬양을 드릴 수 있습니까?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롬 8:2)시켜주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사실을 로마서 8장 3절과 4절에 명백하게 밝혀주고 있습니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라.
갈라디아서 5장 16절과 18절도 그러한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리라.
그런 사람이 있습니까? 사도 바울이 그런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은 성령님의 인도를 받아 살아간 사람입니다. 그의 놀라운 사명도 성령님의 인도를 받아 이루었습니다.
고린도전서 2장 4절에서 볼 수 있습니다.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그리고 아들로 여길 정도로 아끼는 디모데에게 말한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디모데후서 1장 14절입니다.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네게 부탁한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
무조건 힘을 다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 속에 계시는 성령님의 역사를 따라 지키라고 한 것입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지키면 됩니다. 우리가 평화롭고 행복한 삶과 사랑의 삶을 살려면 죄를 다스려야 합니다.
로마서 8장 13절에 그러한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그렇습니다. 성령님으로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게 됩니다.
육체가 하는 대로 그냥 내버려두면 영혼이 망하게 됩니다. 살지 못하고 죽게 됩니다. 그러므로 죄를 다스려야 합니다.
다윗과 사울의 차이는 이 죄를 어떻게 처리했느냐에 따라 달라졌습니다. 사울은 죄에 대해 변명하였으나, 다윗은 죄를 깨닫고 회개했습니다. 죄를 다스렸습니다. 그리하여 사울은 역사에 오명을 남겼고, 다윗은 역사의 성군으로 오늘날까지 이름을 떨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마음 속에 조그마한 죄도 남겨두거나 침투를 허용해서는 안 됩니다. 죄가 유혹할 때 즉시 물리쳐야 합니다. 회개하여 죄가 내 마음 속에 들어와서 자리를 잡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시편 37편 8절을 보면 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며 불평하지 말라 오히려 악을 만들 뿐이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분노와 불평은 악을 만듭니다. 살리지 않고 오히려 죽입니다. 자신을 죽이고 다른 사람을 죽입니다. 그러므로 분노와 불평은 버려야 합니다.
최초의 가족인 아담과 하와 그리고 그의 아들인 가인과 아벨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분노를 처리하지 못한 가인에게 죄가 들어오자 가인은 악해져서 자기 동생을 해치게 만들었습니다.
이처럼 분노가 죄를 만들어 가족을 파괴했습니다. 그리고 분노가 만든 죄가 신앙도 파괴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마저 파괴했습니다.
그러므로 죄를 다스려야 합니다. 그래야 삽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창 4:6-7).
이처럼 죄는 우리 마음의 문 앞에서 엎드려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의 모든 것을 무너뜨리고 죽이기 위해 기회를 노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마음 속에서 요동치는 분노가 죄로 이어지지 않도록 분노를 풀어서 분노를 버려야 합니다. 분노가 죄로 이어져서 자신과 다른 사람을 해치지 않도록 분노를 성령님에 의해 다스려야 합니다.
분노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모든 죄도 마음에 담거나 마음에 담아둔 채로 내버려두는 것이 아니라 처리해야 합니다. 죄를 다스려야 합니다. 죄를 회개해서 내버려야 하고 더 이상 죄를 짓지 않아야 합니다.
그리하면 우리 마음 속에 생명과 사랑과 평화의 나라가 이루어지고, 가정에서도 학교와 직장에서도 교회에서도 그 어디에서도 생명과 사랑과 평화의 나라가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하겠습니까?
제6계명은 나와 이웃의 귀한 생명을 지켜주는 계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제6계명이므로 생명을 해치는 것을 방지해주어 생명을 존중하도록 해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생명을 어떻게 존중할 수가 있겠습니까? 미워하지 않고, 자신을 잘 보존하고, 말을 잘 사용하고, 이웃을 잘 돌보고, 함부로 정죄하지 않고, 자신이 죽고, 죄를 잘 다스리면 됩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실현하여 나와 이웃의 생명을 존중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써주신 십계명 (재개정판)
재개정일 2024년 2월 8일
개 정 일 2023년 12월 11일
발 행 일 2016년 6월 29일
지 은 이 이서영
출 판 사 퍼플
출판등록 제300-2012-167호 (2012년 9월 7일)
주 소 서울시 종로구 종로1가 1번지
대표전화 1544-1900
홈페이지 www.kyobobook.co.kr.
ISBN 978-89-24-12249-7
ⓒ 이서영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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