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눈에 보는 요한복음 (재개정판) 11장 예수님께서 부활하게 하시나 신고 명령으로 배척받으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쉽겠습니까? 어렵겠습니까? 거의 모든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당연히 그런 생각이 들 것입니다. 누가 죽었다는 말은 매우 흔하게 듣게 되지만 다시 살아났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별로 없기 때문입니다.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날 수 있다는 것이 이렇게 어려운데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한 사람만 살아나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모든 사람들이 다시 살아나게 되었으니 이 얼마나 놀랍고 엄청난 일입니까?
11장 개요
✙✙✙ 11장 구절
요한복음 11장의 구절은 예수님께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하신 25-26절과 배척자들이 신고하도록 명령한 57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이는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누구든지 예수 있는 곳을 알거든 신고하여 잡게 하라 명령하였음이러라.
✙✙✙ 11장 주제
요한복음 7-12장을 전체적으로 본다면 아버지로부터 세상에 오신 예수님께서 배척받으시는 관점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 가운데 11장은 예수님께서 부활하게 하시나 신고 명령으로 말미암아 배척받으신다는 관점에서 이러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8-12장의 구조를 보면 먼저 어떤 일이 일어나고 이후에 그러한 것에 대한 의미나 결과에 대한 것을 나타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11장에서는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다시 살려주시는 장면이 먼저 나오는 것을 볼 수 있으며 이후의 반응하는 장면을 보면 믿는 것을 볼 수 있는가 하면 신고하여 잡으려는 것도 볼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죽은 나사로가 다시 살아나는 것을 배경으로 삼고 있는 11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부활하게 해주신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배척자들은 예수님을 잡으려고 신고하라고 명령하여 그와 같으신 예수님을 배척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11장을 보면 이러한 주제가 흐르고 있으므로 이와 관련된 주제를 도출해 본다면 예수님께서 부활하게 하시나 신고 명령으로 배척받으심이 됩니다.
✙✙✙ 11장 구조
11장에서는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다시 살리시는 것과 이에 대해 반응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것을 두 부분으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습니다. 전반부는 1-44절인데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다시 살리시는 장면이고 후반부는 45-57절인데 예수님께서 하신 일에 대해 반응하는 장면입니다.
이와 같은 구분을 통해 병이 든 나사로가 죽었지만 부활이시요 생명이신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게 해주시는 것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행하신 이러한 일에 대해 긍정적으로 반응하는 것과 부정적으로 반응하는 것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긍정적으로 반응하는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보고 예수님을 믿지만 부정적인 반응을 보인 배척자들은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알리고 예수님을 죽이려고 모의하고 예수님을 잡으려고 신고하라는 명령을 내린 것을 볼 수 있습니다.
11장에서도 10장에 이어 예수님을 배척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11장은 배척자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모의하고 잡으려고 신고하라는 명령을 내린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부활이시자 생명이신 예수님께서는 죽은 나사로를 다시 살리시는 일을 통해 영광을 나타내셨습니다.
이러한 것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는 가운데 보내신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영광을 받으셨으며 아울러 믿게 해주셔서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해주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믿게 해주시고 생명을 주셔서 부활하게 하시는 예수님은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분이십니다. 모든 믿는 자들이 영원히 죽지 않도록 해주시는 분이신 것입니다.
이러한 11장에서는 나사로와 부활하게 하시는 예수님을 볼 수 있습니다. 나사로가 병이 들어 죽었지만 부활이시요 생명이신(25)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게 해주시는 것을(44)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일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해주시는 것을(4, 40)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는 가운데 보내신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영광을 받으시고(4) 주위 사람들에게도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해주시는 것을(40) 볼 수 있습니다.
아울러 제자들로 하여금 믿게 하시고(15) 둘러선 무리들로 하여금 아버지께서 보내신 것을 믿게 해주시는 것도(42)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것에 대해 반응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본 많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믿는 모습을(45) 볼 수 있습니다.
이에 비해 어떤 사람들은 바리새인들에게 가서 알리는 모습을(46) 볼 수 있습니다. 그러자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모의하는 모습을(53) 볼 수 있으며 예수님을 잡으려고 신고하라는 명령을 내린 것을(57)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11장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특별한 이야기이므로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에서 드물게(시 1, 요 3, 행 1, 롬 3, 고전 1, 고후 1, 빌 1, 딤전 1, 히 1, 계 3) 사용하고 있는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용어를 11장에 2구절(4, 40) 사용하여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구약성경에서는 볼 수 없고 신약성경에서 드물게(마 9, 막 4, 눅 6, 요 8, 행 1, 롬 1, 고후 1, 갈 1, 엡 1, 히 4, 요일 7, 계 1) 사용하고 있는 예수님과 연관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용어도 2구절(4, 27) 사용하여 강조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구약성경에는 없고 신약성경에서 드물게(마 5, 막 2, 눅 5, 요 3, 행 11, 롬 2, 고전 4, 빌 2, 딤후 1, 히 2, 벧전 2, 계 2) 사용하고 있는 “부활”이라는 용어도 2구절(24, 25) 사용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고 있으며 이러한 일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보내신 아들이 행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하신 부활이시요 생명이신(25) 예수님을 믿는 자는 죽어도 살고(25) 영원히 죽지 않는(26)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러한 일을 통해 보내신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도록 하셨으며(4, 40) 믿도록 해주신(15, 42)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님께서 친히 자기 자신에 대해 선언하셨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25)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러한 “ἐγώ εἰμί(에고 에이미: 나는 나이다)”라는 자기선언방식을 통해 말씀하셨다는 것은 부활과 생명이신 예수님이시므로 예수님을 믿으면 확실하게 살아나게 된다는 것을 매우 강력하게 강조하고 있으시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11장 개관
단락 | 단락별 개요 | |
1-44 |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심 | |
45-57 | 예수님께서 하신 일에 다르게 반응함 |
11:1-44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심
● 11:1-16 나사로가 병으로 죽음
1 어떤 병자가 있으니 이는 마리아와 그 자매 마르다의 마을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라 2 이 마리아는 향유를 주께 붓고 머리털로 주의 발을 닦던 자요 병든 나사로는 그의 오라버니더라 3 이에 그 누이들이 예수께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하니 4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시더라 5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 6 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들으시고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시고 7 그 후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유대로 다시 가자 하시니 8 제자들이 말하되 랍비여 방금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 하였는데 또 그리로 가시려 하나이까 9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낮이 열두 시간이 아니냐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하고 10 밤에 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는 고로 실족하느니라 11 이 말씀을 하신 후에 또 이르시되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 12 제자들이 이르되 주여 잠들었으면 낫겠나이다 하더라 13 예수는 그의 죽음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나 그들은 잠들어 쉬는 것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생각하는지라 14 이에 예수께서 밝히 이르시되 나사로가 죽었느니라 15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그에게로 가자 하시니 16 디두모라고도 하는 도마가 다른 제자들에게 말하되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하니라.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는 전반부 장면은 모두 세 장면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그 가운데 첫 장면은 1-16절인데 나사로가 병이 들어 죽었다는 장면입니다.
베다니 마을에 어떤 병자가 있는데 그는 마리아와 마르다 자매의 오빠인 나사로였습니다.
나사로에 대한 이야기를 진행하면서 언니인 마르다보다 동생인 마리아를 앞에 언급하면서(1) 먼저 마리아부터 소개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만큼 마리아가 특별하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마리아는 향유를 예수님께 붓고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닦았던 여자라고(2)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장면을 11장 이전에는 발견할 수 없고 11장 이후에 나오는 12장 3절에 언급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닦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
이렇게 기록한 순서가 바뀐 것을 보면 연대순이라기보다는 주제별로 구성한 요한복음의 특성상 일이 일어난 순서로 언급한 것이 아니라 기록하는 시점에서 볼 때 마리아를 소개함에 있어 특별하게 소개하려고 앞당겨 가리킨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과 아울러 연대순으로 기록한 누가복음을 살펴보면 초기의 사역을 기록한 7장 37-38절에 언급하고 있는 어떤 여자를 가리키는 것으로 착각할 정도로 비슷한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그 동네에 죄를 지은 한 여자가 있어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앉아 계심을 알고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닦고 그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부으니.”
거의 같은 장면인 것 같지만 누가복음에 나오는 어떤 여자는 베다니 마을에 사는 마리아로 볼 수 없으므로 11장에 가리키는 마리아는 12장 3절에 나오는 마리아를 가리키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마리아가 예수님께 향유를 붓고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씻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그만큼 예수님을 남다르게 섬긴 마리아였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으므로 예수님께서 마리아가 내 장례를 위하여 미리 준비하였다고 하시면서 온 세상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것도 기억하도록 말하게 될 것이라고(마 26:6-13, 막 14:3-9) 하셨습니다.
그러한 마리아의 오빠인 나사로가 병이 들자 누이들이 예수님께 사람을 보내어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다고(3)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들으시고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4)고 하셨습니다.
나사로가 비록 병이 들어 위급하다고 할지라도 죽지 않는다는 것을 강하게 암시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것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아들의 영광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말씀 후에 나오는 5절을 보면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라고 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마르다 자매가 나사로를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자”(3)라고 하였을 때 인간적인 친밀감으로 사랑하시는 것으로 보고 말했지만 5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사랑하시는 것은 그 이상의 사랑을 하신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3절과 5절에 나오는 사랑이 같은 말인 것 같지만 각각 다른 뜻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3절에 나오는 “사랑하시는”의 원어원형을 보면 “φιλέω(필레오)”인데 “좋아하다, 사랑하다”라는 뜻으로 우애와 같은 친밀한 사랑을 의미합니다.
이에 비해 5절에 나오는 “사랑하시더니”의 원어원형은 “ἀγαπάω(아가파오)”인데 “사랑하다”라는 뜻으로 아가페의 사랑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의 눈으로 볼 때는 인간적인 친밀감에서 나오는 사랑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게 되지만 예수님은 그러한 사랑을 포함한 그보다 더 고귀한 사랑을 하고 계신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소식을 들으시고는 계시던 그곳에서 이틀을 더 머무신 후에 제자들에게 “유대로 다시 가자”(7)라고 하셨습니다.
아가페의 사랑을 하신다면서 왜 이렇게 늦장을 부리는 것처럼 머무셨습니까? 사랑하면 재빨리 가셔서 고쳐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의도적으로 이틀을 지체하시고 머무신 것은 4절에 나오는 “영광을” 나타내고 15절에 나오는 “믿게 하려”는 것입니다.
나사로가 병이 들어 죽은 시점만 잘라내어 보면 이해가 되지 않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전체 장면을 보면 합하여 선을 이룬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나사로가 병만 고침을 받았다면 그것으로 끝이지만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게 됨으로써 병을 치료 받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알려지게 되었고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유명한 사람이 된 것입니다. 또한 많은 사람들이 믿게 하는데 쓰임 받게 된 것입니다.
성도들도 이와 같습니다. 삶의 전체를 보아야 하나님의 섭리를 어느 정도 알 수 있는데 어느 한 부분을 보고 평가하고 절망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응답이 잘 되지 않거나 병을 고침 받지 못해 답답해 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때에 해결 받게 됨으로써 하나님께 더 큰 영광을 돌리게 되고 그러한 영광을 보게 되고 누리게 되며 더 큰 믿음과 더 굳센 믿음을 가지게 되고 더 좋은 결과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틀을 더 머무신 후에 제자들에게 유대로 다시 가자고 하시니까 제자들이 “방금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고 하였는데 또 그리로 가시려고 하십니까”라고 하였습니다.
10장에서 유대인들이 신성을 모독하였다고 해서 예수님을 돌로 치려는 것을(31, 33) 볼 수 있었습니다. 이들이 얼마나 그렇게 하려고 하였는지 11장 8절에 제자들이 말한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제자들이 돌로 치려고 하였다고 말할 때 “하였는데”(8)의 원어원형을 보면 “ζητέω(제테오)”인데 “찾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찾고 탐구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만큼 돌로 쳐서 죽이고 싶어 한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으므로 일반적으로 원하는 수준이 아니라 찾고 탐구할 정도로 애쓰고 갈망하는 상태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분위기인데 다시 간다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지만 예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낮이 열두 시간이 아니냐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하고, 밤에 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는 고로 실족하느니라”(9-10)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하신 후에 또 말씀하시기를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11)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잠들었으면 낫겠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나사로의 죽음을 가리켜 말씀하셨으나 제자들은 잠들어 쉬는 것을 가리켜 말씀하시는 것으로 생각하였기에(13) 잠을 자면 회복하게 되니까 잠을 푹 자서 쉬면 쉴수록 좋다고 여긴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12절에 나오는 “낫겠나이다”의 원어원형은 “σώζω(소조)”인데 “구원하다, 지키다, 보존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이익을 주다, 건강이 좋다”라는 뜻도 가지고 있으므로 이러한 뜻으로 사용된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분명하게 말씀하시기를 “나사로가 죽었느니라.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그에게로 가자”(14-15)라고 하셨습니다.
잠이 들었기에 깨운다는 것은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신다는 의미인데 제자들이 알아듣지 못하자 확실하게 알아들을 수 있도록 “나사로가 죽었느니라”(14)고 말씀하셨습니다.
병이 들었을 때 가지 않고 죽은 다음에 가게 된 것은 너희로 믿게 하려고 하였다는 것입니다. 죽은 자를 다시 살리는 일을 통해 믿도록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디두모라고 하는 도마가 동료 제자들에게 “우리도 예수님과 함께 죽으러 가자”라고 하였습니다.
죽은 사람을 살린다는 것은 꿈같은 이야기이므로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고 유대인들이 죽이려고 하는 그곳으로 우리도 죽으러 가자고 한 것입니다. 도망치지 않고 죽음을 무릅쓰는 용기는 매우 감동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것은 육신의 입장에서 죽자는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부활하기 위해서는 먼저 죽어야 부활하게 됩니다. 마지막 날에 부활하게 되는 것도 죽었기 때문에 부활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 날 뿐만 아닙니다.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도 죽어야 삽니다. 죽어야 열매를 맺게(요 12:24) 됩니다.
이렇게 죽어야 진짜 죽는 것입니다. 자기가 죽어야 자기를 부인하게 되고 그렇게 될 때 하나님을 우선하게 되고 하나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아울러 이웃도 우선하게 되고 이웃을 진심으로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 11:17-37 예수님께서 부활에 대해 말씀하심
17 예수께서 와서 보시니 나사로가 무덤에 있은 지 이미 나흘이라 18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가깝기가 한 오 리쯤 되매 19 많은 유대인이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그 오라비의 일로 위문하러 왔더니 20 마르다는 예수께서 오신다는 말을 듣고 곧 나가 맞이하되 마리아는 집에 앉았더라 21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22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 23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 24 마르다가 이르되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 2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26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27 이르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28 이 말을 하고 돌아가서 가만히 그 자매 마리아를 불러 말하되 선생님이 오셔서 너를 부르신다 하니 29 마리아가 이 말을 듣고 급히 일어나 예수께 나아가매 30 예수는 아직 마을로 들어오지 아니하시고 마르다가 맞이했던 곳에 그대로 계시더라 31 마리아와 함께 집에 있어 위로하던 유대인들은 그가 급히 일어나 나가는 것을 보고 곡하러 무덤에 가는 줄로 생각하고 따라가더니 32 마리아가 예수 계신 곳에 가서 뵈옵고 그 발 앞에 엎드리어 이르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하더라 33 예수께서 그가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사 34 이르시되 그를 어디 두었느냐 이르되 주여 와서 보옵소서 하니 35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36 이에 유대인들이 말하되 보라 그를 얼마나 사랑하셨는가 하며 37 그 중 어떤 이는 말하되 맹인의 눈을 뜨게 한 이 사람이 그 사람은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더냐 하더라.
17-37절은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는 전반부의 세 장면 가운데 두 번째 장면인데 예수님께서 나사로의 여동생인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찾아가신 장면입니다.
예수님께서 와서 보시니 나사로가 무덤에 있은 지 이미 나흘이나 되었습니다.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가까워 약 오리쯤이어서 많은 유대인들이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오빠의 일로 위문하러 왔습니다.
마르다는 예수님께서 오신다는 말을 듣고는 곧바로 나가서 맞이하였으나 마리아는 집에 앉아 있었습니다.
마르다가 예수님께 말씀드리시기를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라고 하면서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22)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23)고 하셨습니다.
이에 마르다가 말씀드리시기를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24)라고 하였습니다.
비록 나사로가 죽었지만 마지막 날에는 부활할 것을 믿고 고백한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 살아난다는 것은 까마득하게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25-26)라고 하셨습니다.
누가 자신 있게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거짓말을 하지 않고서는 그 누구도 나는 부활과 생명이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ἐγώ εἰμί(에고 에이미: 나는 나이다)”라고 하실 수 있으신데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자기선언하실 수 있으신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부활과 생명이시므로 영원히 죽지 않고 부활하게 된(고전 15:17-22)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동안 부활의 소망을 가지고 살게 된 것입니다.
25절과 26절에 예수님께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고 산다고 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믿지 않는 자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믿는 자만 부활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믿지 않아도 부활하게 되어 있고 영원히 죽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죽지 않고 영원히 산다고 해서 무조건 좋은 것은 아닙니다. 부활한 이후에 각각 다른 삶이 영원히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는 천국에서 영원히 기쁘게 편안하게 살게 되고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는 지옥에서 영원히 괴로움을 겪으면서 슬프게 살게 되기 때문입니다.
부활하긴 부활했는데 예수님을 믿지 않아 불행한 지옥에 가서 영원히 비참하게 살아야 한다면 이 얼마나 끔찍하겠습니까?
이와는 다르게 예수님을 믿어서 행복한 천국에서 영원히 편안하게 살게 된다면 이 얼마나 기쁘고 즐거운 일입니까?
이러하므로 살아 있을 때 예수님을 믿어서 부활한 이후에 지옥에 가지 않고 천국에 가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마르다에게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자기선언하시고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 것을 네가 믿느냐라고 하시자 마르다가 예수님께 말씀드리기를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27)라고 하였습니다.
참으로 매우 귀한 믿음의 고백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마치 요한복음의 기록 목적이(20:31) 이루어진 하나의 사례로 볼 수 있을 정도입니다.
마르다는 예수님께 이러한 말씀을 드리고 나서 돌아가 가만히 마리아를 불러 말하기를 “선생님이 오셔서 너를 부르신다”라고 하니 마리아가 이 말을 듣고는 급히 일어나 예수님께 나아갔습니다.
예수님은 아직 마을로 들어오지 아니하시고 마르다가 맞이했던 곳에 그대로 계셨습니다.
마리아와 함께 집에 있으면서 위로하던 유대인들이 마리아가 급히 일어나 나가는 것을 보고 울려고 무덤에 가는 것으로 생각하고 따라갔습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이 계신 곳에 가서 뵈옵고 그 발 앞에 엎드려 말씀드리시기를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오빠가 죽지 아니하였겠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장면에서도 21절에 마르다가 말한 것과 동일하게 말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얼마든지 병을 고쳐주실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만 예수님께서 의도적으로 지체하신 뜻을 알지 못했기에 빨리 오셔서 고쳐주셨으면 죽지 않았을 것이라고 하였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마리아가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사”(33) 말씀하시기를 “그를 어디 두었느냐”(34)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주님 오셔서 보옵소서”라고 하니 예수님께서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이에 유대인들이 말하기를 “보라 그를 얼마나 사랑하셨는가”라고 하였으며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은 “맹인의 눈을 뜨게 한 이 사람이 그 사람은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더냐”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도 사람의 입장에서 바라본 인간적인 친밀감에서 나오는 사랑을 말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그를 얼마나 사랑하셨는가”(36)라고 하였을 때 “사랑하셨는가”의 원어원형이 “φιλέω(필레오)”인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러한 사랑을 포함한 그 이상으로 더 큰 사랑을 하시고 눈물을 흘리기까지 하신 것인데 유대인들은 이러한 것을 잘 몰랐던 것입니다.
● 11:38-44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다시 살리심
38 이에 예수께서 다시 속으로 비통히 여기시며 무덤에 가시니 무덤이 굴이라 돌로 막았거늘 39 예수께서 이르시되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이르되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40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시니 41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42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그들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 43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44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
38-44절은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는 전반부의 세 장면 가운데 마지막 장면인 세 번째 장면인데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다시 살아나게 하시는 장면입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속으로 비통히 여기시며”(38) 무덤에 가셨는데 무덤이 굴이라 돌로 막아 놓았기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돌을 옮겨 놓으라”(39)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죽은 나사로의 누이인 마르다가 말씀드리시기를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므로 벌써 냄새가 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40)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말씀하시기를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그들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41-42)라고 하셨습니다.
믿음대로 이루어지므로 예수님께서 믿음을 강조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네가 믿으면”(40)이라고 하시고 “그들로 믿게 하려”(42)는 말씀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을 하시고는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43)고 외치셨습니다.
43절에 나오는 “부르시니”의 원어원형은 “κραυγάζω(크라우가조)”인데 “소리 지르다, 크게 소리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사로에게 큰 소리로 외치셨다는 것입니다. 누가 죽은 사람을 향해 모두 들을 수 있도록 큰 소리로 외칠 수 있겠습니까? 과연 누가 그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사람의 능력으로는 아무도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불가능할 뿐입니다.
이렇게 하실 수 있는 능력을 가지신 예수님께서 크게 외치시자 죽은 나사로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여있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44)고 하셨습니다.
나사로가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 냄새가 날 정도였는데 어떻게 다시 살아날 수 있겠습니까? 오직 부활과 생명이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가능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과학적인 어떤 것을 동원해서 살려내신 것이 아니라 “보내신”(42) 아버지께 기도드리신 후에 “나오라”(43)고 큰 소리로 명령하셔서 나사로가 나오도록 하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죽은 자를 살려내십니다(눅 8:49-56). 또한 마른 손을 회복시키시기도(마 12:13) 하십니다.
나사로가 지금 간증하고 다닙니까? 아무리 다시 살아나도 모든 사람이 죽듯이 결국은 죽고 말았습니다. 진정한 부활은 마지막 날에 이루어집니다. 이러하므로 부활의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다만 이 땅에서 살고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있어야 하므로 마른 것이 살아나는 역사가 필요한 것입니다.
11:45-57 예수님께서 하신 일에 다르게 반응함
● 11:45-53 유대인들이 각각 다르게 반응함
45 마리아에게 와서 예수께서 하신 일을 본 많은 유대인이 그를 믿었으나 46 그 중에 어떤 자는 바리새인들에게 가서 예수께서 하신 일을 알리니라 47 이에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공회를 모으고 이르되 이 사람이 많은 표적을 행하니 우리가 어떻게 하겠느냐 48 만일 그를 이대로 두면 모든 사람이 그를 믿을 것이요 그리고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 땅과 민족을 빼앗아 가리라 하니 49 그 중의 한 사람 그 해의 대제사장인 가야바가 그들에게 말하되 너희가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도다 50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하지 아니하는도다 하였으니 51 이 말은 스스로 함이 아니요 그 해의 대제사장이므로 예수께서 그 민족을 위하시고 52 또 그 민족만 위할 뿐 아니라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를 모아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하여 죽으실 것을 미리 말함이러라 53 이 날부터는 그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하니라.
45-57절은 죽은 나사로를 다시 살리시는 전반부의 장면에 이어 이에 대해 각각 다른 반응을 나타내는 후반부의 장면인데 두 장면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 번째 나오는 장면은 45-53절인데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는 현장에 있었던 유대인들이 각각 다르게 반응하는 장면입니다.
마리아에게 와서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본 많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믿었”(45)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45절에 나오는 “본”의 원어원형은 “θεάομαι(데아오마이)”인데 “지켜보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보는 상태가 아니라 주의 깊게 관찰하듯이 자세히 살펴보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도 요한은 이와 같은 용어를 믿음과 관련된 영적인 눈으로 분명하게 알고 바라보게 된 것을 언급할 때 사용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장 14절에서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라는 말씀과 요한일서 1장 1절에서 우리가 “자세히 보고”라는 말씀에 사용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눈으로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본 많은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믿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역사하시는 현장에 있었지만 이러한 눈이 열리지 못하였으므로 믿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배척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들이 바리새인들에게 가서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알리”(46)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46절에 나오는 “알리니라”의 원어원형은 “ἔπω(에포)”로 “말하다”라는 뜻입니다. 말하였다는 것은 알렸다는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자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공회를 모으고 말하기를 “이 사람이 많은 표적을 행하니 우리가 어떻게 하겠느냐. 만일 그를 이대로 두면 모든 사람이 그를 믿을 것이요. 그리고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 땅과 민족을 빼앗아 가리라”고 하였습니다.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인 그 해의 대제사장인 가야바가 그들에게 말하기를 “당신들은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있소.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해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당신들에게 유익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있소”라고(49, 50) 하였습니다.
이 말은 스스로 말한 것이 아니라 그 해의 대제사장이므로 예수님께서 그 민족을 위하시고 또 그 민족만 위하실 뿐만 아니라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들을 모아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하여 죽으실 것을 예언한(51, 52) 것입니다.
10장 16절에 나오는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과 같이 여기에서도 이방인에 대한 구원을 언급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자녀를 구원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자 이 날부터 그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모의”(53)하였습니다. 어이가 없는 일이 아닐 수 없지만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 모여서 의논하였다는 것입니다.
● 11:54-57 예수님을 잡으려고 신고하라고 명령함
54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유대인 가운데 드러나게 다니지 아니하시고 거기를 떠나 빈 들 가까운 곳인 에브라임이라는 동네에 가서 제자들과 함께 거기 머무르시니라 55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우매 많은 사람이 자기를 성결하게 하기 위하여 유월절 전에 시골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더니 56 그들이 예수를 찾으며 성전에 서서 서로 말하되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냐 그가 명절에 오지 아니하겠느냐 하니 57 이는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누구든지 예수 있는 곳을 알거든 신고하여 잡게 하라 명령하였음이러라.
54-57절은 예수님께서 하신 일에 대해 각각 다른 반응을 나타내는 후반부의 장면 가운데 두 번째 장면인데 예수님을 잡으려고 신고하라는 명령을 내린 장면입니다.
예수님을 죽이려고 모의하였으므로(53) 예수님께서 더 이상 유대인들 가운데 드러나게 다니지 아니하시고 그곳을 떠나 빈 들 가까운 곳인 에브라임이라는 동네에 가셔서 제자들과 함께 그곳에 머무셨습니다.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워지자 많은 사람들이 자기를 성결하게 하기 위하여 유월절 전에 시골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갔습니다.
거룩한 삶을 살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온 것은 잘한 일이지만 잘못된 목적으로 예수님을 찾으려고 한 것은 안타까울 뿐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찾으며 성전에 서서 서로 말하기를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냐 그가 명절에 오지 아니하겠느냐”라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말한 이유는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누구든지 예수가 있는 곳을 알거든 “신고하여”(57) 잡게 하라고 명령하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잡으려고 신고하라는 명령을 내렸다는 것입니다.
57절에 나오는 명령하였다는 말씀 가운데 “하였음이러라”의 원어원형은 “δίδωμι(디도미)”인데 “주다, 하사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잡게 하라”(57)는 말씀 앞에 나오는 종속접속사 “ὅπως(호포스: ~하기 위하여)”를 보면 잡기 위하여 신고하라고 명령을 내렸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한눈에 보는 요한복음 (재개정판)
재개정일 2024년 1월 12일
개 정 일 2020년 9월 17일
발 행 일 2018년 9월 5일
지 은 이 이서영
출 판 사 퍼플
출판등록 제300-2012-167호 (2012년 9월 7일)
주 소 서울시 종로구 종로1가 1번지
대표전화 1544-1900
홈페이지 www.kyobobook.co.kr.
ISBN 978-89-24-12034-9
ⓒ 이서영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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