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눈에 보는 요한복음 (재개정판) 10장 예수님께서 영생을 주시나 신성모독 규정으로 배척받으심
양에게 있어야 할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마실 물도 있어야 하고 먹을 풀도 있어야 합니다. 잠을 잘 수 있는 양우리도 필요합니다. 그 무엇보다 이 모든 것과 함께 생명을 지켜주고 이끌어줄 목자가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러한 선한 목자가 되셔서 목숨을 다해 영원한 생명을 주시고 영원히 지켜주시고 보호해주시고 인도해주십니다.
10장 개요
✙✙✙ 10장 구절
요한복음 10장에서 대표적인 구절을 선정한다면 예수님께서 영생을 주신다는 28절과 배척자들이 예수님께서 신성을 모독하였다는 33절입니다.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유대인들이 대답하되 선한 일로 말미암아 우리가 너를 돌로 치려는 것이 아니라 신성모독으로 인함이니 네가 사람이 되어 자칭 하나님이라 함이로라.
✙✙✙ 10장 주제
요한복음 7-12장을 전체적으로 본다면 아버지로부터 세상에 오신 예수님께서 배척받으시는 관점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 가운데 10장은 예수님께서 영생을 주시나 신성모독 규정으로 말미암아 배척받으신다는 관점에서 이러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8-12장의 구조를 보면 먼저 어떤 일이 일어나고 이후에 그러한 것에 대한 의미나 결과에 대한 것을 나타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10장에서는 예수님께서 목자와 양에 관한 비유에 대해 말씀하시는 장면이 먼저 나오는 것을 볼 수 있으며 이후로는 예수님께서 비유의 의미에 대해 가르쳐주시는 장면이 나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목자와 양에 대한 비유를 배경으로 삼고 있는 10장을 보면 양의 문이시자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께서 영생을 주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배척자들은 예수님께서 신성을 모독하였다고 배척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10장을 보면 이러한 흐름이 있으므로 이와 관련된 주제를 도출해 본다면 예수님께서 영생을 주시나 신성모독 규정으로 배척받으심이 됩니다.
✙✙✙ 10장 구조
10장에서는 예수님께서 목자와 양에 대한 비유를 말씀하시고 비유의 의미에 대해 가르쳐주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것을 두 부분으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습니다. 전반부는 1-6절인데 예수님께서 목자와 양에 관한 비유를 말씀하시는 장면이고 후반부는 7-42절인데 예수님께서 비유에 대한 의미를 가르쳐주시자 이에 대해 반응하는 장면입니다.
이러한 반응을 네 장면으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부정적인 반응 세 가지와 긍정적인 반응 한 가지입니다. 부정적인 반응은 유대인들 가운데 분쟁이 일어나는 것과 유대인들이 돌을 들어 치려는 것과 유대인들이 신성을 모독하였다고 하는 장면이고 긍정적인 반응은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는 장면입니다.
이러한 구분을 통해 선한 목자와 삯꾼에 대한 것과 선한 목자의 음성을 듣는 양과 듣지 않은 양에 대한 것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비유의 의미를 가르쳐주시는 장면에서는 모두 네 편의 장면을 볼 수 있는데 부정적으로 반응하는 세 장면과 마지막으로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한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부정적인 반응을 보인 배척자들은 자신들이 생각하기에는 신성을 모독한 것으로 보는 등으로 하나님을 잘 믿고 있는 줄로 알고 있지만 예수님의 양이 아닌 상태로 있으므로 선한 목자의 인도를 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에 비해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많은 사람들은 긍정적인 반응을 보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배척을 당하시는 심각한 상황에서도 예수님을 믿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배척하는 분위기 속에서도 믿는 귀한 믿음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10장에서도 9장에 이어 예수님을 배척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특별히 10장은 배척자들이 예수님을 에워싸거나 잡으려고 하거나 예수님께서 신성을 모독하였다고 돌로 치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양의 문이시자 선한 목자로서 목숨을 다해 양들에게 영생을 주시고 양들의 생명을 지켜주시고 돌보아 주셔서 멸망하지 않게 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은 힘들고 위험하고 불리하면 자기 혼자만 살겠다고 양을 버리고 도망치는 삯꾼이 아니라 양들이 믿고 음성을 듣고 따르는 분이신 것입니다. 유일한 양의 문이 되셔서 양의 우리 안에 들어가게 해주시는 분이신 것입니다.
이러한 10장에서는 목자와 양에 관한 것과 영생을 주시는 예수님을 볼 수 있습니다.
양의 문이시자(7, 9) 선한 목자이신(11, 14) 예수님께서 양들이 구원을 받게 하시고(9) 생명을 얻게 하시고(10) 양들을 위해 목숨을 버리시고(11, 15, 17) 양들에게 영생을 주셔서 영원히 멸망하지 않도록 해주신다는 것을(28) 볼 수 있습니다.
이와는 반대로 자기 혼자 살겠다고 양을 버리고 달아나는 삯꾼의 모습을(12, 13) 볼 수 있으며 또한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도둑의 모습도(1, 8, 10)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양들에 대한 이야기도 볼 수 있는데 목자의 음성을 듣고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고(3, 4, 16, 27) 믿는 모습을(42) 볼 수 있으며 목자의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고(26) 오히려 신성을 모독하였다고 배척하는(33)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것을 통해 선한 목자가 누구이며 삯꾼이 누구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것을 판가름하게 되는 것은 자기의 “목숨을”(11, 15, 17) 버리면서까지 지켜주느냐 아니면 자기만 살겠다고 버리고 “달아나”(12, 13)느냐 입니다.
또한 양들이 예수님께 속한 양이 있는가하면 그렇지 않은 양도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것을 판가름하게 되는 것은 선한 목자의 “음성을” 듣느냐(3, 4, 16, 27) 듣지 않느냐 입니다.
음성을 듣지 않는다는 것은 선한 목자와의 올바른 관계가 형성되지 않았다는 것이고 듣는다는 것은 올바른 관계가 형성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10장이므로 선한 목자와 삯꾼이 대비되는 것을 볼 수 있으며 음성을 듣는 양과 듣지 않는 양이 대비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10장은 목자의 음성에 대해 반응하는 양들에 관한 이야기이므로 “음성”이라는 독특한 용어를 전반부와(3, 4, 5, 16) 후반부에(27) 모두 사용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음성이란 용어를 검색해보면 사도 요한이 쓴 요한계시록의 34구절을 제외한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에는 거의 나오지 않는(창 1, 출 1, 신 10, 수 2, 삿 1, 삼상 2, 삼하 1, 욥 4, 시 7, 애 1, 겔 6, 단 1, 욘 1, 눅 1, 행 2, 히 3) 용어입니다.
이와는 다르게 요한복음에는 10구절이 나오는데 이 가운데 10장에 5구절이 나옵니다. 그만큼 선한 목자의 음성에 대한 의미가 크다는 것입니다. 선한 목자의 양이라면 선한 목자의 음성을 듣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양 우리의 문을 통해 들어가게(1, 2, 3, 7, 9) 되어있다는 것입니다.
10장은 이처럼 선한 목자와 양에 관한 이야기이므로 선한 목자와 양이라는 독특한 용어도 사용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선한 목자”는 구약성경과 신약성경 가운데 요한복음 10장에만 2구절 나오는 독특한 용어입니다.
그리고 신약성경에서 “양”을 검색해 보면 주로 어린 양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요한계시록을 제외하면 요한복음이 22구절로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많이 나옵니다. 그 가운데 10장에 무려 15구절이나 나옵니다.
이처럼 선한 목자와 양에 대한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는 것은 의미가 그만큼 크다는 것이며 그만큼 매우 강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영혼뿐만 아니라 삶을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도둑과(1, 8, 10) 강도와(1, 8) 이리(12)로부터 위험이 닥치면 달아나는 삯꾼이(12, 13) 아니라 목숨(11, 15, 17) 다해 지켜주셔서 멸망하지 않게 해주시고 빼앗기지 아니하시고 영생을 주시는(28) 분은 누구이십니까?
그렇게 해주시는 분은 양의 문이시자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자기 자신에 대해 선언하셨습니다. “나는 양의 문이라”(7)고 하시고 “나는 선한 목자라”(11, 14)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러한 “ἐγώ εἰμί(에고 에이미: 나는 나이다. 7, 9, 11, 14)”라는 자기선언방식을 통해 말씀하셨다는 것은 그 누구도 양의 문과 선한 목자가 될 수 없고 오직 예수님만이 양의 문이시고 선한 목자시라는 것을 매우 강력하게 강조하고 있으시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10장 개관
단락 | 단락별 개요 | |
1-6 | 예수님께서 목자와 양의 비유를 말씀하심 | |
7-42 | 예수님께서 비유에 대한 의미를 가르쳐주심 |
10:1-6 예수님께서 목자와 양의 비유를 말씀하심
● 10:1-6 예수님께서 목자와 양의 비유를 말씀하심
1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문을 통하여 양의 우리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 2 문으로 들어가는 이는 양의 목자라 3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4 자기 양을 다 내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 5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 6 예수께서 이 비유로 그들에게 말씀하셨으나 그들은 그가 하신 말씀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니라.
10장은 목자와 양의 비유와 비유의 의미에 대한 가르치심인데 이 가운데 전반부는 1-6절로 예수님께서 “목자”(2)와 “양”(3)에 관한 비유를 말씀하시는 장면입니다.
전반부에 나오는 이러한 비유는 9장 마지막에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맹인과 죄에 대한 것을 말씀하시고(9:41) 이어서 하신 비유입니다.
이와 같으므로 9장은 맹인과 죄에 대한 이야기였다면 10장은 목자와 양에 대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맹인과 죄에 대한 판가름은 “세상의 빛”(9:5)이신 예수님이셨다면 목자와 양에 대한 판가름은 “양의 문”(7)이시자 “선한 목자”(11, 14)이신 예수님이시라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에게 목자와 양에 대한 비유를 말씀하셨으나 그들은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6)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먼저 목자와 문에 관해 말씀해주셨습니다. 문을 통해 양의 우리에 들어가지 않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이고 강도라고(1) 하시면서 문으로 들어가는 자가 양의 목자라고(2) 하시고 문지기는 양의 목자를 위해 문을 연다고(3) 하셨습니다.
그 다음으로 목자와 양에 관해 말씀해주셨는데 음성을 연결고리로 하여 이루어지는 것에 관해 말씀해주셨습니다. 양은 목자의 음성을 들으며 목자는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낸다고(3) 하셨습니다.
자기 양을 다 내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알므로 따라오지만(4)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므로 타인을 따르지 않고 도리어 도망한다고(5) 하셨습니다.
이러한 비유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오직 문은 예수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외의 길은 있을 수가 없으므로 이외의 것은 거짓이며 속여서 빼앗는 절도며 강도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목자의 양은 기이하게도 이러한 타인인 절도와 강도에게 속지 않고 따르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들에게서 도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러한 비유를 바리새인들에게 말씀하시자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였습니다(6).
이처럼 비유는 감추기도 하고 감추어진 것을 드러내기도 하는 역할을 합니다(마 13:9-17, 신 29:29). 그들에게는 감추어져 있고 듣는 귀가 없으므로 말씀이 말씀으로 들리지도 않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10:7-42 예수님께서 비유에 대한 의미를 가르쳐주심
● 10:7-21 예수님은 양의 문이시자 선한 목자이심
7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8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9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10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11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12 삯꾼은 목자가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물어 가고 또 헤치느니라 13 달아나는 것은 그가 삯꾼인 까닭에 양을 돌보지 아니함이나 14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15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16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그들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 17 내가 내 목숨을 버리는 것은 그것을 내가 다시 얻기 위함이니 이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느니라 18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 19 이 말씀으로 말미암아 유대인 중에 다시 분쟁이 일어나니 20 그 중에 많은 사람이 말하되 그가 귀신 들려 미쳤거늘 어찌하여 그 말을 듣느냐 하며 21 어떤 사람은 말하되 이 말은 귀신 들린 자의 말이 아니라 귀신이 맹인의 눈을 뜨게 할 수 있느냐 하더라.
7-42절은 예수님께서 비유에 대한 의미를 가르쳐주시는 장면에 관한 것입니다.
10장에서는 예수님께서 선한 목자로서(11, 14) 양들의 생명을 위해(10, 28) 목숨까지 버리시면서(11, 15, 17) 사명을 다하시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양의 문”(7)이시자 “선한 목자”(11, 14)이신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양들을 위해(11, 15) 목숨까지도 버리신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자기희생을 통해 양들에게 영생을 주셔서 영원히 멸망하지 않도록 해주신(28) 것입니다.
이러한 양들은 목자의 음성을 듣고 알기에 따르게 되므로(3, 4) 예수님께서 내 양은 내 음성을 듣고 나를 따른다고 하시는 것을(27) 볼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음에도 불구하고 배척자들은 그러한 양이 아니므로 이러하신 예수님을 믿지 아니하고(25-26) 예수님께서 나와 아버지는 하나라고 하신 것과(30)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신 것으로 말미암아(36) 예수님께서 신성을 모독하였다고(33, 36) 돌로 치려하고(31, 32, 33) 잡으려는 것을(39)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10장은 목자와 양에 관한 말씀인데 후반부는 비유의 의미에 대한 가르치심에 관한 말씀으로 7-42절입니다. 후반부는 예수님께서 비유에 대한 의미를 가르쳐주시자 여기에 반응하는 장면입니다.
이러한 반응을 네 장면으로 나눌 수 있는데 부정적인 반응 세 가지와 긍정적인 반응 한 가지입니다. 유대인들 가운데 분쟁이 일어나는 것과 유대인들이 돌을 들어 치려는 것과 유대인들이 신성을 모독하였다는 장면과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는 장면입니다.
첫 번째 반응의 장면은 7-21절인데 이 장면은 주로 예수님께서 비유의 의미를 가르쳐주시는 장면입니다. 이러한 말씀에 대해 유대인들이 서로 분쟁이 일어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비유의 의미에 대해 가르쳐주시기를 “나는 양의 문이라”(7)고 하시면서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모두 절도이고 강도이므로 양들이 듣지 아니한다고(8)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7-8).
예수님은 “내가 문이니”(9)라고 하시면서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을 것이라고(9) 하셨습니다.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9).
이와는 반대로 도둑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라고(10) 하시면서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하게 얻게 하려는 것이라고(10) 하셨습니다.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10).
예수님께서 양의 문으로 말씀하신 다음에 “나는 선한 목자라”(11)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먼저 선한 목자와 그 반대인 삯꾼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삯꾼은 목자가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물어 가고 또 헤치느니라. 달아나는 것은 그가 삯꾼인 까닭에 양을 돌보지 아니함이나”(11-13).
이어서 다시 “나는 선한 목자라”(14)고 하시면서 내가 양들을 알고 양들도 나를 아는 것 같이(14)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과 같다고(15) 하셨습니다.
그러시면서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15)고 하셨습니다.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신다는 말씀을 11절에 이어 다시 말씀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14-15).
예수님께서 이러한 말씀을 하신 이후에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도 있으므로 인도하여야 할 것이라고(16) 하시면서 그들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을 것이라고(16) 하셨습니다.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그들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16).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은 이방인들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에베소서 2장을 보면 이러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에 있는 사람이었지만(12) 예수님께 해결하여 주셔서(13-18) 이제부터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라 동일한 시민과 하나님의 권속인 것을(19) 볼 수 있습니다.
이방인이 구원을 받게 되어 천국 안으로 들어가게 된 것은 양의 문이시자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께서 자신의 목숨을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이루어지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비유에 대한 의미를 마치시면서 다시 “목숨을 버리는”(17) 것을 말씀하시고 아버지와의 관계 속에서(17, 18) 이러한 일에 대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내 목숨을 버리는 것은 그것을 내가 다시 얻기 위함이니 이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느니라.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17-18).
이러한 비유에 대한 가르치심이 끝나자 유대인들 가운데 다시 분쟁이 일어났습니다(19). 그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말하기를 “귀신들려 미쳤는데 어찌하여 그 말을 듣느냐”라고 하였습니다. 어떤 사람은 “귀신 들린 자의 말이 아니다. 귀신이 맹인의 눈을 뜨게 할 수 있느냐”라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것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아직까지도 입장정리가 되지 않고 있다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이 아직까지도 분명하게 들리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선한 목자의 음성을 듣고 따르는 양에 이르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 10:22-31 예수님의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함
22 예루살렘에 수전절이 이르니 때는 겨울이라 23 예수께서 성전 안 솔로몬 행각에서 거니시니 24 유대인들이 에워싸고 이르되 당신이 언제까지나 우리 마음을 의혹하게 하려 하나이까 그리스도이면 밝히 말씀하소서 하니 2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였으되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나를 증거하는 것이거늘 26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 27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 28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29 그들을 주신 내 아버지는 만물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30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신대 31 유대인들이 다시 돌을 들어 치려 하거늘.
22-31절은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두 번째 장면에 대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믿지 아니”(26)하고 “에워싸고”(24) 말하고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듣고는 “돌을 들어 치려”(31)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는데 음성을 듣게 되는 양과 그 양에게 영생을 주신다는 것과 아버지와 하나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수전절에 예수님께서 성전 안 솔로몬 행각에서 거니시자 유대인들이 에워싸고 말했습니다. “언제까지 우리 마음을 의혹하게 하려느냐. 그리스도라면 밝히 말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를 눈앞에 두고도 모르고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셔도 분명하게 알 수 있도록 말해 달라고 하는 것을 보면 예수님의 양이 아니므로 듣지 못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대답해주셨는데 너희에게 말하였으나 믿지 아니하고(25)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한다고(26) 하셨습니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듣고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고(27)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였으되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나를 증거하는 것이거늘,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25-27).
예수님께서 이어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신다고 하셨으며(28) 그들이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라고(28) 하셨습니다.
또한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다고도(28) 하시고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고(29) 나와 아버지는 하나라고(30)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그들을 주신 내 아버지는 만물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신대”(28-30).
영원히 멸망해서 지옥에서 영원히 살아야 한다면 얼마나 끔찍하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께서 영생을 주셔서 영원히 멸망하지 않게 해주신 것입니다.
또한 만물보다 크신 아버지와 예수님의 손에서 그 누구도 빼앗을 수 없다는 것은 그 어떤 도둑도 결코 도둑질해서 빼앗아 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생명을 확고하게 보장 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으므로 이러한 말씀은 요한복음 10장과 요한복음 가운데 매우 귀중하고도 핵심적인 말씀 가운데 하나라고 하지 아니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처럼 엄청나게 놀라운 말씀을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다시 돌을 들어 치려고(31) 하였습니다.
이들은 선한 목자의 양이 아니므로 선한 목자의 음성을 듣지 못하고 믿지 아니하고 따르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배척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 10:32-39 예수님이 신성을 모독하였다고 함
32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여러 가지 선한 일로 너희에게 보였거늘 그 중에 어떤 일로 나를 돌로 치려 하느냐 33 유대인들이 대답하되 선한 일로 말미암아 우리가 너를 돌로 치려는 것이 아니라 신성모독으로 인함이니 네가 사람이 되어 자칭 하나님이라 함이로라 34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 율법에 기록된 바 내가 너희를 신이라 하였노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35 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이라 하셨거든 36 하물며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사 세상에 보내신 자가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는 것으로 너희가 어찌 신성모독이라 하느냐 37 만일 내가 내 아버지의 일을 행하지 아니하거든 나를 믿지 말려니와 38 내가 행하거든 나를 믿지 아니할지라도 그 일은 믿으라 그러면 너희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 깨달아 알리라 하시니 39 그들이 다시 예수를 잡고자 하였으나 그 손에서 벗어나 나가시니라.
32-39절은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세 번째 장면에 대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께서 “신성”(33)을 모독하였다고 하면서 다시 예수님을 잡으려고 하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시는 것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대답하시기를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여러 가지 선한 일로 너희에게 보였거늘 그 중에 어떤 일로 나를 돌로 치려 하느냐”(32)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이 대답하기를 “선한 일로 말미암아 돌로 치려는 것이 아니라 신성모독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네가 사람이 되어 자칭 하나님이라 하였기 때문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아버지로부터 세상에 보내심을 받은 자가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36)고 하는 것으로 어떻게 신성모독이라고 하느냐고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 율법에 기록된 바 내가 너희를 신이라 하였노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이라 하셨거든, 하물며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사 세상에 보내신 자가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는 것으로 너희가 어찌 신성모독이라 하느냐”(34-36).
예수님께서 전혀 신성을 모독하신 일이 없지 않으십니까? 아버지와 하나라는 것과(30) 아버지께서 보내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은(36) 모두 사실이 아닙니까?
이와 같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신성을 모독하였다고 하는 것은 예수님을 사람으로 보았다는 것이며(33) 예수님의 양이 아니므로 예수님의 말씀이 들리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어서 말씀하시기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을 깨달아 알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만일 내가 내 아버지의 일을 행하지 아니하거든 나를 믿지 말려니와, 내가 행하거든 나를 믿지 아니할지라도 그 일은 믿으라 그러면 너희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 깨달아 알리라 하시니”(37-38).
그러자 유대인들이 다시 예수님을 잡고자 하였지만(39) 예수님께서는 그 손에서 벗어나 나가셨습니다.
● 10:40-42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음
40 다시 요단 강 저편 요한이 처음으로 세례 베풀던 곳에 가사 거기 거하시니 41 많은 사람이 왔다가 말하되 요한은 아무 표적도 행하지 아니하였으나 요한이 이 사람을 가리켜 말한 것은 다 참이라 하더라 42 그리하여 거기서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으니라.
40-42절의 장면은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장면에 대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이 처음으로 세례를 베풀던 곳으로 가셔서 거하셨는데 그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예수”(42)님을 믿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요단 강 저편에 있는 세례 요한이 처음으로 세례를 베풀던 곳으로 가셔서 그곳에서 거하셨습니다(40).
그러자 많은 사람들이 왔다가 말하기를 “세례 요한은 아무 표적도 행하지 아니하였으나 세례 요한이 이 사람을 가리켜 말한 것은 모두 참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비유에 대한 의미를 들은 유대인들 가운데 똑같이 “많은 사람”(20)들이 있었지만 그들은 예수님이 귀신들려 미쳤는데 그의 말을 듣느냐고(20)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양이 아니므로 예수님의 음성이 들리지도 않고 듣지도 않은 것입니다.
이에 비해 세례 요한이 세례를 베풀던 곳에 있던 “많은 사람”(42)들은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따르는 양들의 사례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양이라는 것입니다.
한눈에 보는 요한복음 (재개정판)
재개정일 2024년 1월 12일
개 정 일 2020년 9월 17일
발 행 일 2018년 9월 5일
지 은 이 이서영
출 판 사 퍼플
출판등록 제300-2012-167호 (2012년 9월 7일)
주 소 서울시 종로구 종로1가 1번지
대표전화 1544-1900
홈페이지 www.kyobobook.co.kr.
ISBN 978-89-24-12034-9
ⓒ 이서영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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