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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적강해/주일설교

가시가 나에게 있는 이유 (계 14:14)

by 이서영 목사 2019. 8. 6.

가시가 나에게 있는 이유 (계 14:14)

 

나이가 들었다는 것을 발견하는 일은 점점 쉬워집니다. 수많은 노후징조 가운데 한 가지는 바늘에 실을 꿸 때 바늘귀가 잘 안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늙는다는 것은 조금도 잘못된 것도 아니고 속상해할 일도 아닙니다. 자연현상이기에 모든 것을 좋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더 바람직한 것은 ‘그토록 손꼽아 기다리던 주님을 만나 뵈올 날이 갈수록 가까워지니까 참 좋구나!’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추석 명절이기에 어릴 때 “바늘에 실을 꿰어 달라”는 어머님의 음성이 더욱 더 생생하게 들려오는 듯합니다. 어머님이 이불을 기울 때 옆에서 호기심을 가지고 재미있게 구경하던 저에게 종종 부탁하셨습니다. 저는 어머님의 그 부탁이 싫지 않았고 옆에 있는 동안 계속 신이 나서 실을 꿰어주곤 했습니다. 그때는 직접 손으로 바늘귀에 실을 꿰어주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머니처럼 저도 역시 잘 꿸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어떤 도구를 사용하면 잘 꿸 수 있습니다. 제가 들고 있는 이 물건은 어디에 쓰는 물건일까요? 바늘에 실을 꿰어주는 도구입니다. 이것이 있으면 손쉽게 바늘에 실을 꿸 수 있습니다. 얼마나 편리한지 모릅니다. 우리 인생에서도 실을 꿰어주는 도구가 참 많습니다. 우리 인생살이에서 만나는 가시도 그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런데 가시는 실을 꿰어주는 선한 도구가 아니라 오히려 우리를 괴롭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신자의 삶에 있어서는 의미가 없는 가시는 없습니다. 합하여 선을 이루시는 참 좋으신 하나님께서 모든 가시를 선하게 사용하십니다. 하나님은 가시라는 도구를 통해 우리가 잘 보이지도 않는 바늘귀에 실을 꿰느라 끙끙 거릴 때 손쉽게 실을 꿰도록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가시는 성경에 언제 처음 등장할까요? 창세기 3장 18절입니다. 인류의 조상인 아담이 교만하여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선악과를 먹었습니다. 그러자 어떤 일이 일어났지요?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아담은 이마에 땀을 흘리면서 가시덤불 속에서 괴로워하면서 살아가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 죄의 본성이 계속 이어져 내려옵니다. 그리하여 오늘날 우리에게까지 내려와서 가시덤불속의 가시 인생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도 그러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한 이후에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지켜야할 지침의 내용입니다. “너희가 만일 그 땅의 원주민을 너희 앞에서 몰아내지 아니하면 너희가 남겨둔 자들이 너희의 눈에 가시와 너희의 옆구리에 찌르는 것이 되어 너희가 거주하는 땅에서 너희를 괴롭게 할 것이요”(민 33:55). 그런데 그들은 이 지침을 무시하고 하나님 절대 신앙을 저버리고 우상과 그 지역민들과 적당하게 타협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러자 오히려 그것이 그들에게 가시가 되어서 괴롭힘을 당하였습니다.

그러나 복되시고 은혜로우신 하나님께서 이들이 괴롭힘을 당하도록 그냥 두시지 않으셨습니다. 우리 또한 가시덤불 속에서 살지 않도록 해주셨습니다. “땅의 선물과 거기 충만한 것과 가시떨기나무 가운데에 계시던 이의 은혜로 말미암아 복이 요셉의 머리에, 그의 형제 중 구별한 자의 정수리에 임할지로다”(신 33:16). 가시떨기나무 가운데에 계시던 분은 어떤 분이시지요? 모세를 만나주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셔서 고통의 상징인 가시떨기나무에서 모세를 만나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많고 많은 나무 가운데 하필이면 왜 가시나무였을까요? 불순종의 결과로 거둔 가시 인생을 변화시켜주시기 위해서입니다. 가시나무를 쓰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가시 인생을 바꾸어 축복의 인생으로 만드시고, 가시 인생을 바꾸어 사명자로 만드시고, 가시 인생을 바꾸어 도망자에서 택함을 받고 부르심을 받은 자로 만드시기 위해 가시나무에서 만나주신 것입니다.

에스겔 28장 24절은 가시가 없어지는 것을 말해줍니다. “이스라엘 족속에게는 그 사방에서 그들을 멸시하는 자 중에 찌르는 가시와 아프게 하는 가시가 다시는 없으리니 내가 주 여호와인 줄을 그들이 알리라.” 이처럼 가시가 사라지고 없어졌다는 것은 아름다운 작품이 다 만들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 마지막 날에는 예수님의 가시나무로 우리를 완벽한 하나님의 창조물과 형상으로 다듬어주셔서 영원토록 가시가 없는 세상에서 살아가게 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이 땅에 살아가는 동안에는 사람마다 이런저런 괴로운 가시가 있을 수 있습니다. 계속 아프게 찔러대는 가시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나에게 깊이 박혀 있는 이 가시를 빼내주시지 않는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를 아름다운 예술품으로 조각하시고 싶어 하십니다. 그 예술품을 다른 사람 앞에 내어놓고 자랑하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조각품은 쇠망치와 정을 가지고 하나씩 깨고 다듬을 때 작품이 만들어집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조각품을 만드시는 도구로 인생의 가시를 사용하셔서 나를 다듬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그러한 가시로 나의 무엇을 만드시고 계실까요?

첫째, 하나님께서 가시로 은혜의 그릇으로 만들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가시를 주신 것은 가시로 나를 은혜의 그릇으로 만들어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가시를 주신 것은 나 자신을 높이지 않고 겸손하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가시 때문에 더 낮아져서 하나님에게서나 사람에게서 은혜를 더 많이 받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나 사람이나 교만한 사람은 물리칩니다. 그러나 겸손한 사람에게는 그만큼 은혜를 베풀어줍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이 은혜를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이 받습니다.

베드로 전서 5장 5절과 6절을 합독하겠습니다.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종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그러므로 가시는 더 이상 가시가 아니라 은혜를 담는 은혜의 그릇입니다. 그러한 아름다운 은혜의 그릇이 되라고 하나님은 나에게 가시를 주신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그의 육체에 말 못할 지독한 가시가 있었습니다. 자신을 찌르는 가시가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가시의 선한 용도가 무엇이었습니까?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고린도후서 12장 7절을 합독하겠습니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사도 바울이 끝까지 겸손하여서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 받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사도 바울이 사탄이 주는 가시라고 할 정도로 지독한 가시를 주신 것입니다. 우리에게 있어서도 이러한 가시가 있습니까? 그런 가시가 있다면 우리가 교만하지 않아서 끝까지 겸손하여 사람들 앞에서나 하나님 앞에서 은혜를 많이 받아서 크게 귀하게 쓰임을 받도록 하기 위한 것이니 가시를 잘 참아내십시다.

둘째, 하나님께서 가시로 영광의 면류관으로 만들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가시를 주신 것은 가시로 나의 영광의 면류관을 만들어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가시 때문에 고통이 뒤따르지만 고통으로 끝내지 않고 오히려 영광을 더 많이 받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가시관을 쓰셨습니다. 요한복음 19장 2절을 합독하겠습니다. “군인들이 가시나무로 관을 엮어 그의 머리에 씌우고 자색 옷을 입히고.”

그러기에 금 면류관을 쓰실 수 있었습니다. 본문인 요한계시록 14장 14절을 합독하겠습니다. “또 내가 보니 흰 구름이 있고 구름 위에 인자와 같은 이가 앉으셨는데 그 머리에는 금 면류관이 있고 그 손에는 예리한 낫을 가졌더라.”

예수님의 머리 위에 있던 가시관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금 면류관만 영광스럽게 빛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시는 더 이상 가시가 아니라 영광을 가져다주는 면류관입니다. 그러한 아름다운 영광의 면류관을 주시려고 하나님께서 나에게 가시를 주신 것입니다.

추석이 괴로울 때는 언제입니까? 만날 사람도 없고, 갈 곳도 없고, 추석지낼 용돈도 없을 때 입니까? 그런데 추석 때 만나는 사람마다 모두 좋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가시와 같은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환경도 그럴 수 있습니다. 고향에서 만난 친구나 동기간에 서로 비교하다가 힘들어할 수 있습니다. 서로 일을 안 하려다 마음고생도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추석명절동안 이런저런 가시가 많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큰 가시는 신앙의 차이입니다. 제사 문제와 교회 출석하는 문제 등으로 추석이면 어김없이 다투게 됩니다. 추석이 즐거운 명절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평소보다 더 큰 고통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가시는 알고 보면 모두 영광의 왕관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 때문에 수치와 괴로움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영광의 왕관을 머리에 쓰는 순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예수님처럼 가시관을 쓸 때 우리의 머리에 영광의 왕관도 쓰여 진다는 것을 잘 아시고 가시를 잘 참아내십시다.

셋째, 하나님께서 가시로 순금으로 만들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가시를 주신 것은 가시로 나를 순금으로 만들어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가시를 주신 것은 나 자신이 가시로 연단을 받아 순금같이 되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가시를 시련의 재료로 사용하셔서 우리의 모난 부분을 다듬어주시려는 것입니다.

내가 가는 길을 하나님께서 아시고 나를 단련하시고 나를 순금같이 사용해주십니다. 욥기 23장 10절을 합독하겠습니다.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

그러므로 가시는 더 이상 가시가 아니라 순금을 제련하는 용광로인 것입니다. 귀한 순금이 되라고 하나님은 나에게 가시를 주신 것입니다.

선인장에도 가시가 있고, 장미꽃에도 가시가 있습니다. 고슴도치 역시 가시가 무수하게 많습니다. 이들이 가지고 있는 가시를 자세히 보면 우리 눈에는 가시로 보입니다만 그들의 입장에서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가시가 물의 증발을 방지하는 잎사귀가 되기도 하고, 해충으로부터 보호하기도 하고, 다른 동물로부터 자기 자신을 보호하기도 합니다. 동식물의 입장에서 보면 가시는 가시가 아닙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우리에게 있는 인생의 가시는 가시로만 보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 편에서 보면 가시는 더 이상 가시가 아닙니다. 우리도 영안이 뜨여서 하나님 편에서 바라보면 우리를 괴롭게 만들던 가시는 더 이상 가시가 아니라 나를 단련하여 순금같이 사용하게 되는 것을 바라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가시는 우리를 괴롭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연단하는 것이니 가시를 잘 참아내십시다.

이제, 말씀을 다시 한 번 더 강조합니다.

가시는 조각품을 만드는 도구일 뿐 조각품 그 자체는 아닙니다. 그러므로 가시가 떠난 그 자리에는 아름다운 조각품만 남습니다. 그 조각품이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우리를 고통스럽게 쪼아대던 가시들이 우리를 이리저리 다듬어서 마침내 우리를 예술품으로 만든 것입니다. 그 가시 때문에 아름다운 조각품으로 탄생한 것입니다. 이 가시를 하나님께서 허용하시고 사용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가시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시다. 그리고 우리를 고통스럽게 찔러대는 가시를 잘 이겨내십시다.

그리하여 가시로 은혜의 그릇으로 만들어지고 가시로 영광의 면류관으로 만들어지고 가시로 순금으로 만들어져서 우리 모두가 아름다운 주님의 예술품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2014 참좋은제자들교회 https://cafe.daum.net/truegooddisciples/IPZB/86 담임목사 이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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