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성경적강해/주일설교

(시 23:1~6) 하늘 위에서 내려오는 평안

by 이서영 목사 2019. 12. 13.

하늘 위에서 내려오는 평안 (시 23:1~6)

 

  우리가 가장 평안한 때는 어떤 때였을까요? 여러분은 어떤 상태에 있었을 때 가장 평안함을 느꼈습니까? 남녀노소 빈부귀천 동서양 관계없이 그 누구든 모두가 가장 평안했던 때는 엄마 뱃속에 있었을 때입니다. 이때가 인생에 있어서 가장 평안했던 때입니다.

 

  태어난 지 백일이 안 된 아기를 보면 잠을 쌔근쌔근 잡니다. 아기 얼굴을 보면 그렇게 평안해 보일 수가 없습니다. 아기는 잠을 못자서 이리저리 뒤척이지 않습니다. 악몽을 꾸고 식은 땀을 흘리지도 않습니다. 그저 양팔을 위로 올리고 걱정 근심 없이 세상 편하게 잡니다.

 

  그런데 이것보다 더 평안한 상태는 엄마 뱃속에 있을 때입니다. 어떻게 알 수 있어요? 오늘날 의학적으로 태아의 얼굴을 생생하게 확인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런데 그때의 얼굴 모습을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바로 배냇짓입니다. 엄마 뱃속에서 짓던 얼굴 모습을 배냇짓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태어난 지 일주일도 안 된 아기가 배냇짓을 하는 것을 보면 귀엽게 예쁘게 씽긋이 웃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만큼 평안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평안해지기 위해서 엄마 뱃속으로 다시 들어가면 될까요? 불가능한 일입니다. 이제 두 번 다시 그런 평안함은 느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배냇짓보다 더 참된 평안함을 느낄 수가 있다고 했습니다. 세상에서는 불가능한 일이 가능해졌습니다. 성경은 우리 영혼의 평안함을 느낄 수 있다고 했습니다.

 

  이 평안은 위로부터 내려오는 평안함입니다. 이 평안은 땅이 주지 못합니다. 이 평안은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평안입니다. 태아가 엄마 뱃속에 있을 때 엄마로부터 모든 것을 공급받고 평안하게 지냈습니다.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평안은 이와 같습니다. 하늘의 하나님께서 우리를 품어주시고 우리와 함께 하시면 그런 참된 평안을 공급받을 수 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우리는 이 찬양을 많이 부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목자가 되시는 하나님께서 몸소 돌보아주시는 하나님의 양입니다. 그래서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가 누울만한 푸른 풀밭으로 데려가주십니다. 쉴만한 물가로 인도해주십니다. 주님의 지팡이와 막대기로 우리를 지켜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품안에 있으면 참된 평안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내 영혼의 참된 평안은 하나님께서 함께 해주실 때 누리게 됩니다.

 

  시편 23편은 유명한 시편입니다. 그래서 각 지방 사투리로 나온 것도 많습니다. 그 가운데 전라도 사투리로 읽어보겠습니다. “아따! 여호와가 시방 나의 목자신디/ 나가 부족함이 있겄냐?/ 그분이 나를 저 푸르딩딩한 초장으로 뉘어 불고/ 내 삐친 다리 쪼매 쉬어 불게 할라고/ 물 가새로 인도해 뿌네!/ 내 영혼을 겁나게 끌어 댕겨 불고/ 그분의 이름을 위할라고/ 올바러븐 길가새로 인도해 뿌네!/ 나가 산꼬랑과 끔찍한 곳에 있어도 겁나불지 않는 것은/ 주의 몽댕이랑 짝대기가 쪼매만한 일에도 나를 지켜준다 이거여!/ 아따! 주께서 저 싸가지 없는 놈들 앞에서/ 내게 밥상 챙겨줘 불고/ 내 대그빡에 지름칠해 주신께로/ 참말로 나가 기뻐 불그마이/ 나가 사는 동안에/ 그분의 착하심과 넓어부른 맴씨가 나를 징하게 따라 댕깅께로/ 나가 어찌 그분 댁에서 묵고 자고 안하것냐?”

 

  어느 지방 어떤 사람이든지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해주시면 우리는 평안해집니다. 우리의 형편과 처지가 어떠하든지 평안해집니다. 이 모든 것은 평화의 왕이신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므로 그 하늘의 평화가 우리에게도 임하는 것입니다. 새찬송 412장(통일 469장)은 바로 이 평안을 찬송하고 있습니다.

 

  “내 영혼의 그윽히 깊은데서 맑은 가락이 울려나네. 하늘 곡조가 언제나 흘러나와 내 영혼을 고이 싸네. 평화 평화로다. 하늘 위에서 내려오네. 그 사랑의 물결이 영원토록 내 영혼을 덮으소서.” 마치 엄마 품속에 고이 싸인 아기와 같은 평안을 찬송하고 있습니다. 하늘 위에서 내려오는 그 평화가, 그 사랑이 내 영혼을 고이 감싸주는 것을 찬송한 것입니다.

 

  다함께 불러봅니다. “1절. 내 영혼의 그윽히 깊은데서 맑은 가락이 울려나네. 하늘 곡조가 언제나 흘러나와 내 영혼을 고이 싸네. 평화 평화로다. 하늘 위에서 내려오네. 그 사랑의 물결이 영원토록 내 영혼을 덮으소서. 4절. 이 땅위의 험한 길 가는 동안 참된 평화가 어디 있나. 우리 모두 다 예수를 친구삼아 참 평화를 누리겠네. 평화 평화로다. 하늘 위에서 내려오네. 그 사랑의 물결이 영원토록 내 영혼을 덮으소서.”    

 

  미국 시카고의 변호사이자 시카고 의과대학교 법리학 교수이며, 무디(D. L. Moody)의 절친한 친구였으며, 무디 교회의 회계 집사였던 호레이시오 스패포드(Horatio G. Spafford, 1828-1888)는 부동산 투자로도 많은 돈을 벌었습니다. 그러나 1871년 10월 시카고에 대화재가 발생했습니다. 약 250명이 죽고, 인구의 3분의 1인 10만 명의 사람들이 집을 잃었습니다.

 

  스패포드 역시 많은 재산을 잃었습니다. 그리고 1남 4녀 가운데 사랑하는 외아들도 잃었습니다. 가족은 큰 슬픔에 잠겼습니다. 그래서 스패포드 가족은 2년이 지난 1873년에 휴식을 취하러 유럽여행을 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스패포드는 무디와 생키의 전도여행을 돕기 위해 며칠 뒤에 떠나기로 약속하고 아내와 네 딸만 먼저 유럽으로 보냈습니다. 그러나 이 배는 다른 배와 충돌해서 226명이 죽는 사고가 일어났습니다. 이때 아내만 구조되고 네 딸은 모두 목숨을 잃었습니다.

 

  스패포드는 네 딸을 삼킨 그 바다를 지나갈 때 가슴이 찢어졌습니다. 스패포드는 배 아래에 있는 선실에서 밤새 절규했습니다. 그러다가 새벽 3시경에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큰 평안을 체험했습니다. 그것을 시로 지었습니다. “내 평생에 가는 길 순탄하여 늘 잔잔한 강 같든지, 큰 풍파로 무섭고 어렵든지 나의 영혼은 늘 편하다. 내 영혼 평안해, 내 영혼, 내 영혼 평안해.”

 

  스패포드는 시카고로 돌아와서 생키에게 작곡을 부탁했습니다. 생키(I. Sankey)는 부흥사 무디를 도와 미국의 제3차 부흥운동과 선교운동 일으키도록 도와준 찬양사역자였습니다. 그 때문에 그 당시 “생키는 찬양하고, 무디는 설교한다!”라는 표어가 유행했습니다. 스패포드는 이 생키에게 작곡을 부탁한 것입니다.

 

  그러나 생키는 이렇게 훌륭한 찬송시를 자기가 작곡할 수 없으니 블리스(P. P. Bliss)에게 부탁하라고 했습니다. 블리스는 무디와 생키와 함께 그 당시 미국의 부흥운동을 주도하던 복음 찬송 가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1876년에 작곡을 완성했습니다. 이 찬송이 오늘날 우리가 은혜롭게 부르고 있는 새찬송 413장(통일 470장) “내 평생에 가는 길”입니다.

 

  우리 영혼의 평안함과 평화는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 영혼은 주님 안에 있을 때 누릴 수 있습니다. 세상에 있는 그 어떤 것도 참된 평안을 주지 못합니다. 재산도 이름도 권력도 재능도 건강도 가정도 주지 못합니다. 이것은 우리 몸에 일시적인 평안을 줄지 몰라도 우리 영혼에게는 평안을 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마음이 허전해서 성공을 해도 계속해서 무언가를 추구합니다. 그러다가 잘못된 것을 탐하고, 잘못된 방법으로 허전함을 달래려고 합니다. 그러나 땅의 것으로는 영혼의 갈급함을 채울 수가 없습니다.

 

  만약 땅이 주는 것으로 평안이 온다면 스패포드는 여생 동안 평안을 모르고 지냈을 것입니다. 재산을 잃고 자녀를 모두 잃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있어야 평안이 있다면 스패포드는 늘 불행한 삶을 보낼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하늘 위에서 내려오는 평화를 체험하자 그의 영혼은 평안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평화만이 우리의 영혼을 평안하게 해줍니다. 

 

  태아는 엄마 뱃속에 있을 때 엄마로부터 모든 것을 공급받고 평안하게 지냅니다. 그런데 세상 밖으로 나오자 살면 살수록 고된 삶을 살아갑니다. 근심 걱정 염려 속에서 살아갑니다. 그렇게도 평안하게 배냇짓을 하던 모습은 사라지고 우울한 모습으로 변해갑니다. 세상에 나오면 더 좋은 세상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리의 영적인 처지도 이와 같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면 더 좋은 세상을 만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계시지 않는 곳, 하나님을 떠난 곳은 평안이 없습니다. 오직 우리가 평안을 누릴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품속에 있을 때입니다. 마치 태아가 엄마 뱃속에 있을 때만이 참된 평안을 누릴 수 있었던 것처럼 우리 영혼도 하나님의 품속에 있을 때 참된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우리에게 평안을 주시기 위해 위로부터 아래를 향해 우리에게 찾아오십니다. 구약시대는 성부 하나님께서 몸소 찾아오셨습니다. 신약시대에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오늘날에는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앞으로 언젠가는 예수님께서 반드시 다시 찾아오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왜 찾아오셨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왜 다시 찾아오십니까? 우리에게 참된 평안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이 땅에 사는 동안에 이 평안을 누리고 영원한 천국에서도 이 참된 평안을 누리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오직 하늘 위에서 내려오는 신령한 평화만이 참된 평안을 가져다주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평화의 왕이신 하나님께서 내려오실 때 우리 마음이든, 가정이든, 교회든, 나라든, 그 어디든 참된 평화가 임하게 됩니다. 하늘 위에서 내려오는 평안이 임합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께서 내려주시는 이 하늘의 놀라운 평화를 일평생 동안 받아 누리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추석에 이 놀라운 영혼의 참된 평화를 친인척을 비롯해서 모든 사람들과 함께 나누시길 바랍니다.    

 

 

[ⓒ 2010 참좋은제자들교회 http://cafe.daum.net/truegooddisciples/IPZB/38 담임목사 이서영]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