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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적강해/주일설교

(욘 1:1~17) 당신은 무엇을 두려워하고 있습니까?

by 이서영 목사 2019. 8. 12.

[수정] (욘 1:1~17) 당신은 무엇을 두려워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삶 가운데 두려워하는 것이 많이 있습니다. 사업, 학업, 경제, 건강, 앞날 등에 있어 두려움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이러한 두려움이 닥쳐올 때 어떻게 대처하십니까? 본문에 나오는 다시스행 배에서 일어난 일을 통해 교훈 받을 수 있습니다. 다시스행 배를 타고 가던 뱃사람들이 두려워한 것은 세 가지입니다. 자연과 신(神)과 여호와입니다. 
  4절과 5절에 “큰 폭풍이 일어나 배가 거의 깨지게 된지라 사공들이 두려워하여”는 자연을 두려워하는 모습입니다. 5절에 “사공들이 두려워하여 각각 자기의 신을 부르고”는 신을 두려워하는 모습입니다. 16절에 “그 사람들이 여호와를 크게 두려워하여”는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모습입니다. 이 세 가지 두려움과 관련해서 하나씩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다시스행 뱃사공들은 자연을 두려워하였습니다.


  자연재해는 과소평가할 것이 못됩니다. 만만하게 볼 것이 아닙니다. 무서운 것이 사실입니다. 쓰나미가 갑자기 덮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아니면 혜성이 지구와 충돌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아니면 땅이 갑자기 푹 꺼져버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 현상은 싱크홀(sink hole)이라 합니다. 이 싱크홀이 생겨서 길을 가다가, 차를 타고 가다가, 집에서 잠을 자다가 통째로 땅속으로 가라앉아 흙더미에 파묻혀버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실제로 지구 곳곳에 그런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서울과 인천 등에서 발생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자연재해가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신종전염병이 돌기도 합니다. 지진이 나기도 합니다. 갑자기 폭설이 내리고 폭우가 내리기도 합니다. 폭염과 한파가 닥치기도 합니다. 자연재해는 두려운 것이 맞긴 맞습니다. 그대로 눈뜨고 당할 수밖에 없어 두려워합니다. 하지만 자연재해에 신경이 쓰이면 마음 졸이고 살아가야 합니다. 늘 불안해하고 마음대로 다니지도 못해 자유를 누리지 못합니다.
  배를 타고 다니는 사람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큰 폭풍입니다. 해상날씨는 수시로 변하기 때문에 언제 무슨 일을 당할지 모릅니다. 그래서 바다를 두려워합니다. 다시스행 뱃사람들도 힘써 보았지만 극복할 수 없는 폭풍 앞에 두려워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본문 4-5절이 그 모습을 보여줍니다. “바다 가운데 큰 폭풍이 일어나 배가 거의 깨지게 된지라 사공들이 두려워하여.” 큰 폭풍이 일어나 배가 거의 깨지게 되었습니다. 배가 침몰하면 끝입니다. 두려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살려고 배를 가볍게 하기 위해 배에 실은 아까운 물건도 바다에 버렸습니다. 본문 5절이 그 당시 절박한 상황을 전해줍니다. “배를 가볍게 하려고 그 가운데 물건들을 바다에 던지니라.”
  자연은 인간에게 유익을 주도록 창조되었습니다. 하지만 인류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범죄한 이후로는 때때로 재해가 되어 두려움의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본문에서도 그 사실을 엿볼 수 있습니다. 요나가 불순종함으로 큰 폭풍을 만난 경우를 볼 수 있습니다. 요나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니느웨로 가야하는데 반대방향인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탔습니다. 그러자 큰 폭풍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연을 효과적으로 잘 통제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육지와 바다를 만드신 여호와 하나님은 자연을 통제하십니다. 필요하다면 큰 폭풍을 일으키기도 하시고 그치게도 하십니다. 4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큰 바람을 바다 위에 내리시매 바다 가운데에 큰 폭풍이 일어나”라고 하였습니다. 15절에는 “요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매 바다가 노는 것이 곧 그친지라”고 하고 있습니다. 요나의 발걸음을 돌이키기 위해 하나님께서 자연을 사용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장면을 통해 폭풍이 일어나기도 하고 그치기도 하는데 바다와 육지를 만드신 하나님께서는 능히 그렇게 하실 수 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심지어 물고기까지 통제하시는 것을 본문 17절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이미 큰 물고기를 예비하사 요나를 삼키게 하셨으므로 요나가 밤낮 삼 일을 물고기 뱃속에 있으니라.” 하나님께서 큰 물고기에게 명령하셔서 요나를 삼켜 물고기 배속에 안전하게 지켜주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자연의 모든 것을 다스리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 성도는 회복됩니다. 예수님께서도 자연을 다스리십니다. 그러므로 더 이상 자연은 성도를 두렵게 하는 대상이 아니라 생육번성하게 만드는 터전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도 물고기를 통제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밤새 수고하였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허탕 친 그런 베드로의 빈 배에 가득 채워주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폭풍도 다스리십니다. 잠잠하게 하십니다. 자연을 다스리십니다. 제자들이 풍랑을 만났을 때 예수님께서 오셔서 잔잔하게 해주셨습니다. 마태복음 8장 23-27절입니다. “배에 오르시매 제자들이 따랐더니, 바다에 큰 놀이 일어나 배가 물결에 덮이게 되었으되 예수께서는 주무시는지라. 그 제자들이 나아와 깨우며 이르되 주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하시고 곧 일어나사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시니 아주 잔잔하게 되거늘, 그 사람들이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이가 어떠한 사람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하더라.”
  노아 홍수 이후에 노아와 그 가족이 복을 받고 자연이 회복된 모습을 창세기 9장 2절에 볼 수 있습니다. “땅의 모든 짐승과 공중의 모든 새와 땅에 기는 모든 것과 바다의 모든 물고기가 너희를 두려워하며 너희를 무서워하리니 이것들은 너희의 손에 붙였음이니라.”
  사람이 자연을 두려워하지 않고 자연이 사람을 두려워하게 된 것입니다. 자연을 다스리시는 예수님 안에 있으면 얼마든지 이러한 일이 일어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인간이 저주받아 이마에 땀 흘리고 스트레스 받으면서 수고해야 겨우 먹고 살고, 땅은 저주받아 가시를 내지만 자연을 다스리시는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을 의지하고 따르면 그러한 것들이 사라집니다.
  예수님 안에 있으면 이따금 우리를 지치게 만드는 자연이 오히려 유익을 가져다주는 도구로 바뀝니다. 예수님께서 물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한 베드로의 빈 배에 가득 채워주셨듯이 우리의 빈 배에도 가득 채워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면서 역사해주시면 자연은 더 이상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생육번성하는 터전이 됩니다.


  둘째, 다시스행 뱃사공들은 신을 두려워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앞을 알 수 없는 인생살이와 우주만물을 대하면서 생사화복을 주관하는 신을 나름대로 만들어 위안을 받으려고 합니다. 자연신을 만들고 조상신을 만들어 섬깁니다.
  본문 5절을 보면 “사공들이 두려워하여 각각 자기의 신을 부르고”라고 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평소 자기들이 모시고 있는 신들이 있었습니다. 죽을 지경에 빠지자 자기 신들에게 살려달라고 부르짖었습니다. 그러나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계속 풍랑이 일자 모든 사람에게 자기 신에게 부르짖으라고 하였습니다. 선장이 배 밑층에서 누워 깊이 잠든 요나를 발견하고 깨워서 네 신께도 구하라고 하였습니다. 재앙이 어떻게 닥쳤는지 제비를 뽑으니 요나가 뽑혔습니다. 무리가 생업이 무엇이며 어디서 왔고 나라는 어디고 어느 민족인지를 물었습니다. 본문 9-10절에 그 대답이 나옵니다. “그가 대답하되 나는 히브리 사람이요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로라 하고, 자기가 여호와의 얼굴을 피함인 줄을 그들에게 말하였으므로 무리가 알고 심히 두려워하여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그렇게 행하였느냐 하니라.”
  무리가 이 사실을 알자 심히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들의 기준으로 보면 신을 노엽게 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하는 방식대로 하자면 신을 정성스럽게 모셔야 하는데 어떻게 신을 그렇게 대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신에게 잘 보이려고 각별하게 노력해도 부족한데 신을 거역했으니 큰 잘못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몹시 두려워하였던 것입니다.
  모르면 여러 가지 신이 두려워서 섬깁니다. 그래서 조상신이 두려워 조상신을 잘 모셔야 복을 받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은 죽으면 천국에 가거나 지옥에 갑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천국, 믿지 않으면 지옥에 갑니다. 떠돌아다니지 않습니다. 떠돌아다닐 수 없습니다. 천국 아니면 지옥에 가 있는데 어떻게 돌아다닙니까? 사람은 사람이고 귀신은 귀신입니다. 사람이 귀신이 될 수 없고 귀신이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조상신이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잘 속이므로 간혹 귀신들이 조상을 흉내내서 마치 조상이 살아서 돌아온 것처럼 속일 수는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귀신은 귀신이지 사람이 아닙니다. 귀신은 사람이 죽어서 귀신이 된 것이 아닙니다.
  이와 같으므로 조상신에게 정성을 다해 제사드리는 것은 무척 효도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아닌 것입니다. 속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모님과 증조할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고조할아버지와 할머니께서 살아 계실 때 예수님을 믿도록 해드리고 살아 계실 때 잘 섬겨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이 진정으로 복을 받게 해주는 것입니다. 
  또한 가는 곳곳마다 신을 만듭니다. 나무나 바위나 돌무더기로 우상을 만듭니다. 막연한 두려움과 복을 받기 위해 신을 만들어 섬기고 있습니다. 인간이 신을 만들어 놓고 그 앞에 떨고 그 신에게 잘 보이려고 합니다.
  이렇게 신이 많은 것은 사람의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없기에 신을 만들고 비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신은 참 신이 아닙니다. 그런 잘못된 신을 찾으면 찾을수록 망합니다. 그런 신을 불러들일수록 그런 신이 찾아올수록 손해입니다. 복을 가져다달라고 빌면 빌수록 손해입니다. 왜냐하면 마귀와 마귀의 하수인인 귀신은 죽이고 빼앗기 때문입니다. 생명을 도둑질하고 삶을 황폐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 정반대입니다. 생명을 주시되 풍성하게 주십니다. 요한복음 10장 9-10절입니다.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예수님은 이처럼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되 풍성한 복까지도 주십니다. 예수님은 생명이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오셔서 함께 계시면 생명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살아납니다. 죽어가는 자가 살아나고 죽어가는 삶도 살아납니다. 생명이신 예수님께서 생명을 주셔서 살려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예수님께서(마 28:18) 마귀를 멸하십니다(히 2:14). 마귀의 일도 멸하십니다. 요한일서 3장 8절입니다.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
  마귀가 교만해져서 하나님과 맞서려고 하다가 하늘에서 쫓겨났습니다. 요한계시록 12장 9절입니다 “큰 용이 내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탄이라고도 하며 온 천하를 꾀는 자라 그가 땅으로 내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그와 함께 내쫓기니라.” 쫓겨난 마귀와 마귀의 사자들인 귀신들이 이 세상에서 잠시 동안 임금 노릇합니다. 그래서 틈만 나면 유혹하고 속이고 두려움을 줘서 자기를 섬기게 하고 복종하도록 만듭니다.
  그러나 결국은 최후를 맞이합니다. 20장 2절과 10절입니다. “용을 잡으니 곧 옛 뱀이요 마귀요 사탄이라 잡아서 천 년 동안 결박하여.” “또 그들을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져지니 거기는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 예수님은 이처럼 마귀와 마귀의 하수인인 귀신을 결박하시고 마귀와 귀신이 하는 일을 멸해버리십니다. 죽이고 빼앗는 일을 중단시키시고 그 대신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풍성하게 하십니다. 
  이와 같으므로 마귀와 귀신은 경배해야 하는 대상이 아니라 물리쳐야 하고 오직 주 하나님을 경배하고 섬겨야 하는 것입니다(마 4:10). 마귀와 귀신은 경배하는 것이 아니라 대적해야 하는 것입니다(약 4:7, 벧전 5:7).
  그러므로 우리는 신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마귀와 귀신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마귀와 귀신을 이기시고 마귀와 귀신의 일을 멸해버리시고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예수님을 의지하면 마귀와 귀신의 속박에서 벗어나 살 길이 마련되기 때문입니다. 영원히 보호받기 때문입니다.


  셋째, 다시스행 뱃사공들은 여호와를 두려워하였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두려워해야 하겠습니까? 자연을 두려워하고 신을 두려워해야 하겠습니까? 성도는 바다와 땅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여호와를 두려워해야 합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면 여호와의 도움을 받으면서 살아가게 됩니다.
  다시스행 뱃사람들은 자연을 두려워하고 신을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러다 마지막으로 여호와를 알고 크게 두려워하게 되었습니다. 본문 16절입니다. “그 사람들이 여호와를 크게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제물을 드리고 서원을 하였더라.”
  그들이 두려워하게 된 이유는 무엇입니까? 여호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제대로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요나가 자기 잘못이니까 자기를 바다에 던져 넣으라고 하자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산 사람을 어떻게 바다에 던져 죽게 만드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힘써 노를 저어 배를 육지에 대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점점 더 흉용해지므로 무리가 여호와께 불가피한 사정을 헤아려주시기를 부르짖어 기도한 다음에 요나를 바다에 던져넣었습니다. 그러자 그 집어삼킬만한 풍랑이 온데 간데 사라져버리고 조용해졌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여호와를 크게 두려워하게 되었고 제물을 드리고 서원하게 되었습니다.
  본문인 1장 10-16절입니다. “자기가 여호와의 얼굴을 피함인 줄을 그들에게 말하였으므로 무리가 알고 심히 두려워하여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그렇게 행하였느냐 하니라. 바다가 점점 흉용한지라 무리가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너를 어떻게 하여야 바다가 우리를 위하여 잔잔하겠느냐 하니, 그가 대답하되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 그리하면 바다가 너희를 위하여 잔잔하리라 너희가 이 큰 폭풍을 만난 것이 나 때문인 줄을 내가 아노라 하니라. 그러나 그 사람들이 힘써 노를 저어 배를 육지로 돌리고자 하다가 바다가 그들을 향하여 점점 더 흉용하므로 능히 못한지라. 무리가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여호와여 구하고 구하오니 이 사람의 생명 때문에 우리를 멸망시키지 마옵소서 무죄한 피를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주 여호와께서는 주의 뜻대로 행하심이니이다 하고, 요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매 바다가 뛰노는 것이 곧 그친지라. 그 사람들이 여호와를 크게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제물을 드리고 서원을 하였더라.”
  하나님이 육지와 바다를 지으신 분이시요 다스리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두려워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두려워하는 사람을 구원해주십니다. 히브리 산파가 그런 복을 받았습니다. 출애굽기 1장 15-21절에 그 사실이 나옵니다. “애굽 왕이 히브리 산파 십브라라 하는 사람과 부아라 하는 사람에게 말하여 이르되, 너희는 히브리 여인을 위하여 해산을 도울 때에 그 자리를 살펴서 아들이거든 그를 죽이고 딸이거든 살려두라. 그러나 산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애굽 왕의 명령을 어기고 남자 아기들을 살린지라. 애굽 왕이 산파를 불러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이같이 남자 아기들을 살렸느냐. 산파가 바로에게 대답하되 히브리 여인은 애굽 여인과 같지 아니하고 건장하여 산파가 그들에게 이르기 전에 해산하였더이다 하매, 하나님이 그 산파들에게 은혜를 베푸시니 그 백성은 번성하고 매우 강해지니라. 그 산파들은 하나님을 경외하였으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집안을 흥왕하게 하신지라.”

 

  여러분은 무엇을 두려워하고 있습니까?


  자연입니까? 신입니까? 아니면 여호와 하나님이십니까? 요한계시록 21장 8절을 보면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점술가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거짓말하는 모든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고 하였습니다. 자연과 신을 두려워하는 자들은 지옥불에 들어가게 됩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믿는 우리의 미래는 어떻게 됩니까? 우리의 두려움의 대상은 자연이나 신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의지하게 됩니다. 이기고 벗어난 사람들이 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 어린 양의 노래를 부루는 것이 요한계시록 15장 3-4절에 나옵니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시여 하시는 일이 크고 놀라우시도다 만국의 왕이시여 주의 길이 의롭고 참되시도다. 주여 누가 주의 이름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오리이까 오직 주만 거룩하시니이다 주의 의로우신 일이 나타났으매 만국이 와서 주께 경배하리이다 하더라.”
  성도는 두려워할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입니다. “주여 누가 주의 이름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오리이까.”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섬기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두려워해야 할 대상과 두려워하지 말아야 하는 대상을 분명하게 해야 합니다. 거꾸로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것을 두려워하고 두려워해야 할 것은 두려워하지 않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우리는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것은 두려워하지 말고 두려워해야 할 것은 두려워해야 합니다.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것은 자연과 신입니다. 두려워해야 할 것을 두려워하십시오. 두려워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두려움의 대상이 많아지고 예수님을 믿으면 두려움의 대상이 줄어듭니다. 두려워해야 할 것을 두려워하게 됩니다. 예수님이 계시지 않으면 자연을 두려워하게 되고, 신을 두려워하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계시면 자연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고, 신을 두려워하지도 않게 되고, 오히려 여호와 하나님은 두려워하게 됩니다. 하늘과 바다와 육지를 만드시고 다스리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게 됩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두려워하면 그 결말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예수님을 믿고 의지하게 되면 인생의 풍랑과 신을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게 됩니다. 오히려 평온하게 됩니다. 보호받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요나가 니느웨행으로 가지 않고 다시스행으로 가므로 큰 풍랑을 일으켜서 발걸음을 돌이키게 해주셨습니다. 죽이려고 풍랑을 주신 것이 아닙니다. 사명을 감당하고 올바른 길로 가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도 때때로 그런 풍랑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풍랑은 알고보면 유익한 풍랑입니다. 하나님께서 본문 4절과 같이 “큰 바람”과 “큰 폭풍”만 준비하신 것이 아니라 본문 17절과 같이 “큰 물고기”도 준비하신 것처럼 우리 앞날에도 그런 준비를 해주십니다. 지옥길 가는 방향을 돌리게 만드십니다. 천국길로 가게 해주시고 천국의 삶 안에 머물도록 해주십니다. 우리가 감당해야 할 사명자의 길로 가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자연을 다스리시는 주 예수님을 믿고 의지하셔서 더 이상 자연에 지배당하는 사람이 아니라 자연을 지배하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자연이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잘 다스리게 되므로 생육번성하는 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또한 두렵게 만들어 자기를 섬기도록 만드는 마귀와 귀신도 이기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속고 도둑질 당하면서 살지 마시고 이기신 예수님을 믿으시고 예수님을 의지하셔서 생명을 얻되 더 풍성하게 얻게 되시기 바랍니다. 

 

 

[2014 참좋은제자들교회 https://cafe.daum.net/truegooddisciples/IPZB/292 담임목사 이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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