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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적강해/강해설교

[성경강해] 룻기 강해

by 이서영 목사 2021. 12. 30.

[성경강해] 룻기 강해

 

● 파워포인트를 사용해 룻기를 강해한 것입니다.

 

● 룻기 강해 무녹화 PPT 원본:

룻기 강해-무녹화.ppt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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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 룻기 강해

 

  룻기를 강해하기 위하여 전체적으로 개관하면서 강해하는 방식으로 진행하려고 합니다. 룻기를 보면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룻기를 세 가지 주제로 나누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번째 주제는 베들레헴의 의미에 대한 것입니다.

생명의 떡집인 베들레헴에 있어야 생명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두번째 주제는 나오미의 기업에 대한 것입니다.

나오미가 가지고 있던 기업을 보아스가 무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세번째 주제는 여호와의 섭리에 대한 것입니다.

여호와의 섭리는 기이하다는 것입니다. 사람으로서는 알 수 없으므로 여호와를 인정하고 경외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룻기를 강해하기 위하여 룻기 1-4장 전체를 세 가지 주제로 나누어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첫번째 주제는 베들레헴의 의미에 대한 것입니다.

 

  생명의 떡집인 베들레헴에 있어야 생명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룻기 11절 말씀을 보면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에 그 땅에 흉년이 들었다고 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흉년이 들자 유다 베들레헴에 살던 엘리멜렉이라는 사람이 그의 아내인 나오미와 두 아들인 말론과 기룐을 데리고 모압 지방에 들어가서 거기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살려고 갔는데 그만 엘리멜렉이 죽고 말았습니다. 남겨진 두 아들은 각각 아내를 맞이하였는데 오르바와 룻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것도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거기서 거주한 지 십 년쯤에 두 아들마저 다 죽고 여자만 세 명이 남게 되었습니다.

  흉년이 들었기에 떠나면 잘 살지 싶었는데 오히려 죽을 지경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조금 살기 어렵다고 머리를 굴려서 여호와께서 주신 언약의 땅을 떠난 결과는 이처럼 비참해지는 것입니다. 이처럼 인간이 꾀를 내면 일시적으로는 효과를 보게 될지는 몰라도 결국은 가면 갈수록 찌그러 들고 괴로움만 더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119-21절 말씀에서 볼 수 있습니다. 나오미가 룻과 함께 베들레헴으로 다시 돌아오게 되자 온 성읍의 사람들이 떠들면서 이르기를 “이이가 나오미냐”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나오미는 “나를 나오미라 부르지 말고 마라라 부르라”고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나오미(נָעֳמִי)”의 뜻은 “나의 기쁨”입니다. 나갈 때는 풍족하게 나가서 이름처럼 기뻤는데 그런데 지금은 전혀 기쁘지 않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괴롭기에 “마라(מָרָא)”, 즉 “괴로움”으로 불러달라고 하였습니다.

  왜 이렇게 기쁨에서 괴로움으로 전락하게 되었습니까? “베들레헴(בֵּית לֶחֶם, 레헴-, 베트-)”, 곧 “떡집”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생명의 양식이 있는 곳에 있어야 굶주리지 않고 생명을 얻게 되는데 잠시 흉년이 든 것을 참지 못해 떠났다가 죽을 지경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 잠깐 베들레헴에 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베들레헴에 있어야 진정으로 양식을 얻게 됩니다. 그곳으로 가야 생명을 얻게 됩니다. 영원한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께서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셨을 때 있었던 일입니다. 마태복음 21-6절 말씀입니다.

  헤롯 왕 때에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시매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말하되,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냐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하니, 헤롯 왕과 온 예루살렘이 듣고 소동한지라.

  왕이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서기관들을 모아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느냐 물으니, 이르되 유대 베들레헴이오니 이는 선지자로 이렇게 기록된 바, 또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서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하였음이니이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떡집인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셨습니다. 이러한 뜻깊은 곳에서 탄생하신 예수님께서 친히 자신에 대해 자기 선언하시기를 나는 생명의 떡이라고 하셨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신 이후 이튿날(6:22) 하신 말씀 가운데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632-35절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모세가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떡을 준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참 떡을 주시나니,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 그들이 이르되 주여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이어서 말씀하셨는데 36-40절 말씀입니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나를 보고도 믿지 아니하는도다 하였느니라.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이와 같이 예수님께서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라고 하자 유대인들이 수군거렸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647-51절 말씀입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라.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이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하시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생명의 떡집인 베들레헴을 떠나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을 떠나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주(3:15)로서 우리의 길과 진리와 생명이(14:6) 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생명을 얻는 다른 길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오미는 이러한 떡집을 떠났기에 괴로움을 당하게 된 것입니다. 뒤늦게 돌이켜서 베들레헴으로 다시 돌아왔지만 이미 가져간 재산은 다 까먹고 있는 것은 괴로움만 잔뜩 남게 되었습니다.

  나오미가 일일이 말은 하지 않았지만 얼마나 괴로웠겠습니까? 풍족하게 나갈 때는 기대에 차서 나갔을 것입니다. 그런데 남편이 죽고 두 아들마저 죽자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을 것입니다. 먹고 사는 게 막막했을 것입니다.

  가지고 있던 재산을 솔솔 까먹다가 바닥이 났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젠 외로운 것은 고사하고 남아 있는 두 며느리와 함께 당장 먹고 살 일이 태산과 같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살기 위해 닥치는 대로 이일 저일 하느라 고생을 무지무지하게 했을 것입니다.

  이러한 상태에 놓이자 나오미는 “여호와께서” 징벌하셔서 비어 돌아오게 하셨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니 더 이상 나를 나오미로 부르지 말라는 것입니다. 나오미가 한 말에서 그러한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120-21절 말씀입니다.

  나오미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를 나오미라 부르지 말고 나를 마라라 부르라 이는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음이니라. 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여호와께서 내게 비어 돌아오게 하셨느니라 여호와께서 나를 징벌하셨고 전능자가 나를 괴롭게 하셨거늘 너희가 어찌 나를 나오미라 부르느냐 하니라.”

  이러한 처지에 있던 나오미가 베들레헴으로 다시 돌아오게 된 것은(1:19) 모압 지방에 있을 때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양식을 주셔서 돌보아주셨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온갖 고생을 하던 나오미에게 반가운 소식이 들린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인 16절 말씀 가운데 상반절 말씀입니다. “그 여인이 모압 지방에서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시사 그들에게 양식을 주셨다 함을 듣고.”

  이처럼 여호와께서는 자기 백성을 돌보아주시는 분이십니다. 나오미는 그러한 소식을 듣고는 춤을 추면서 기뻐했을 것입니다. 이젠 살았다는 것입니다. 베들레헴으로 가기만 하면 살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호와께서 돌보아주시는 생명의 떡집인 베들레헴을 떠나지 마시고 베들레헴에 있으시기 바랍니다.

  이제 다음 주제로 넘어가겠습니다.

 

  두번째 주제는 나오미의 기업에 대한 것입니다.

 

  나오미가 가지고 있던 기업을 보아스가 무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나오미의 재산 상태를 보면 재산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모압 지방에서 베들레헴으로 돌아왔을 때 가지고 갔던 재산이 없는 것은 맞지만 고향 땅에는 약간의 부동산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보아스가 기업을 무르는 장면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41-4절 말씀입니다.

  보아스가 성문으로 올라가서 거기 앉아 있더니 마침 보아스가 말하던 기업 무를 자가 지나가는지라 보아스가 그에게 이르되 아무개여 이리로 와서 앉으라 하니 그가 와서 앉으매, 보아스가 그 성읍 장로 열 명을 청하여 이르되 당신들은 여기 앉으라 하니 그들이 앉으매, 보아스가 그 기업 무를 자에게 이르되 모압 지방에서 돌아온 나오미가 우리 형제 엘리멜렉의 소유지를 팔려 하므로, 내가 여기 앉은 이들과 내 백성의 장로들 앞에서 그것을 사라고 네게 말하여 알게 하려 하였노라 만일 네가 무르려면 무르려니와 만일 네가 무르지 아니하려거든 내게 고하여 알게 하라 네 다음은 나요 그 외에는 무를 자가 없느니라 하니 그가 이르되 내가 무르리라 하는지라.”

  나오미가 남편인 엘리멜렉의 소유지를 팔려고 한다는 말에서 물려받은 부동산이 아직 남아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부동산은 거의 쓸모가 없는 부동산인 것으로 추측됩니다. 사용할 수 있었다면 활용해서 사는 길을 마련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팔아서 먹고 사는 것을 해결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직도 팔리지 않고 남아 있고 룻이 다른 사람의 밭에 나가서 이삭을 주워 생계를 유지한 것을 보면 부동산이 있긴 하였지만 농사를 지을 수 있는 쓸만한 부동산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보아스보다 앞서 기업을 무를 수 있는 우선권이 있는 아무개라는 사람이 자기의 기업에 손해가 날까 하여 사지 않은 것을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목이 좋고 개발하기에 좋은 투자성이 있는 좋은 부동산이었다면 샀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포기한 것을 보면 그렇게 좋은 부동산이라고 볼 수 없을 것입니다.

  물론 보아스가 부동산만 아니라 죽은 자의 아내인 모압 여인 룻까지 책임져야 한다고 했으므로 거절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아무개라는 사람은 그런대로 잘 사는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굳이 이방 과부를 데려올 이유가 없었을 것입니다. 부동산도 여자도 두 가지 모두 마음에 들지 않았기에 거절했을 것입니다.

  45-6절 말씀입니다. “보아스가 이르되 네가 나오미의 손에서 그 밭을 사는 날에 곧 죽은 자의 아내 모압 여인 룻에게서 사서 그 죽은 자의 기업을 그의 이름으로 세워야 할지니라 하니, 그 기업 무를 자가 이르되 나는 내 기업에 손해가 있을까 하여 나를 위하여 무르지 못하노니 내가 무를 것을 네가 무르라 나는 무르지 못하겠노라 하는지라.”

  이에 비해 보아스는 엘리멜렉과 그의 두 아들의 부동산과 함께 룻까지도 사서 가문을 잇게 했습니다. 48-10절 말씀을 보면 이러한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에 그 기업 무를 자가 보아스에게 이르되 네가 너를 위하여 사라 하고 그의 신을 벗는지라. 보아스가 장로들과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내가 엘리멜렉과 기룐과 말론에게 있던 모든 것을 나오미의 손에서 산 일에 너희가 오늘 증인이 되었고, 말론의 아내 모압 여인 룻을 사서 나의 아내로 맞이하고 그 죽은 자의 기업을 그의 이름으로 세워 그의 이름이 그의 형제 중과 그 곳 성문에서 끊어지지 아니하게 함에 너희가 오늘 증인이 되었느니라 하니.”

  이렇게 보아스가 극적으로 사주긴 했지만 나오미는 돌아오기 전에 말 못할 고생을 많이 했을 것입니다. 숱한 일을 오랜 세월동안 겪었지 않았겠습니까? 이와 같으므로 심히 괴롭다고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라”라고 해야지나오미”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여호와의 섭리는 기이하다는 것입니다. 사람으로서는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합하여 선을 이루시지만 어떻게 그렇게 하시는지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다음 주제에서 이러한 것을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세번째 주제는 여호와의 섭리에 대한 것입니다.

 

  여호와의 섭리는 기이하다는 것입니다. 사람으로서는 알 수 없으므로 여호와를 인정하고 경외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섭리는 기이하므로 사람으로서는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합하여 선을 이루시지만 어떻게 그렇게 하시는지 알 수 없습니다.

  성경 말씀에 나타나지 않은 것도 얼마나 많겠습니까? 그러한 것은 당연히 알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말씀을 통해 나타내 보여주신 것도 제대로 알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저 알게 된 것을 묵묵히 순종할 뿐입니다.

  신명기 2929절 말씀을 보면 그러한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감추어진 일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속하였거니와 나타난 일은 영원히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속하였나니 이는 우리에게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행하게 하심이니라.”

  룻기에서만 보더라도 그렇습니다. 다윗 왕의 증조할머니가 되는 룻이란 이방 여인의 경우를 보면 매우 기이합니다. 룻이 없다면 다윗 왕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니면 여호와께서 다른 사람을 통해 얼마든지 역사하셨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룻을 택한 것을 보면 엘레멜렉 가정의 행적이 기이하다는 것입니다.

  , 보십시오. 엘리멜렉이 흉년이 들어도 역설적으로 모압으로 가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흉년이 들어도 베들레헴에서 참고 기다렸다면 룻을 만날 수 있었겠습니까?

  비록 가는 게 잘못됐기에 엘리멜렉도 죽고 두 아들까지 죽고 그 많던 재산도 다 까먹었게 되었지만 룻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남편과 두 아들을 먼저 보낸 나오미가 죽을 고생을 했지만 룻과 함께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만약 모압 지방에서 어려움을 당하지 않고 남편도 죽지 않고 두 아들도 죽지 않고 잘 먹고 잘 살았다면 굳이 베들레헴으로 돌아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보아스가 룻을 만날 일이 없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것이 기이하다는 것입니다. 이해가 잘 되지 않는 일입니다. 우리가 보기에 나오미의 일은 다른 사람의 일이고 또한 그 결말을 다 알고 있기에 먼 산의 불구경하듯이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막상 본인이 한치 앞을 모르는 나오미가 당했던 일을 당한다고 생각해보세요. 상상만 해도 얼마나 괴롭고 답답하겠습니까? 해석이 잘 되겠습니까?

  이러한 것이 여호와의 섭리요 주권이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여호와를 경외해야 할 이유가 아니겠습니까? 인간의 지성이나 과학이나 그 모든 것으로 알게 된다면 더 이상 신이 될 수 없을 것입니다. 인간을 월등하게 뛰어넘으시기에 유일신이 되실 수 있으신 것입니다.

  이사야 558-9절 말씀을 보면 그 차이를 명백하게 알 수 있습니다.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

  이처럼 여호와는 모든 것을 아시지만 사람은 알지 못합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여호와는 여호와이시고 사람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마치 모든 것을 다 아는 것처럼 여길 것이 아니라 어떤 상황에서도 전지하시고 전능하신 여호와를 겸손하게 순종하면서 경외하시길 바랍니다.

  이와 같으므로 이제, 어떤 상황에서도 “여호와께” 대한 신앙을 잃지 않은 것에 대해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여호와의 섭리를 우리는 잘 알 수 없습니다. 나오미도 당연히 자신에게 일어나는 일에 대해 잘 알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온갖 고생을 하는 가운데서도 여호와께 대한 신앙을 잃지 않았습니다. 남편과 아들과 재산을 잃었지만 여호와를 향한 경외심은 잃지 않았습니다.

  조금만 잘 되면 헤헤거리고 조금만 못되면 여호와께 원망불평하고 시험에 드는 얄팍한 신앙생활을 한 것이 아니라 흔들리지 않는 신앙생활을 하였습니다. 나오미는 이렇게 언제나 여호와를 잊지 않고 경외하였습니다.

  괴롭고 답답한 상황에서도 “여호와께서”라고 하면서 여호와를 인정하고 경외하기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나오미는 어렵고 힘든 처지에서도 “여호와께서”라고 하였습니다. 돌아오려고 길을 가다가 두 며느리에게 한 말 가운데 보면 알 수 있습니다. 18-9절 말씀입니다.

  나오미가 두 며느리에게 이르되 너희는 각기 너희 어머니의 집으로 돌아가라 너희가 죽은 자들과 나를 선대한 것 같이 여호와께서 너희를 선대하시기를 원하며,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허락하사 각기 남편의 집에서 위로를 받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고 그들에게 입 맞추매 그들이 소리를 높여 울며.”

  이렇게 “여호와께서”라고 말한다는 것은 그만큼 여호와를 경외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말씀 가운데서도 그렇게 말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베들레헴으로 돌아 온 나오미가 성읍 사람들이 하는 말에 대답할 때 한 말인데 121절 말씀입니다. “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여호와께서 내게 비어 돌아오게 하셨느니라 여호와께서 나를 징벌하셨고 전능자가 나를 괴롭게 하셨거늘 너희가 어찌 나를 나오미라 부르느냐 하니라.”

  나오미는 이렇게 어떤 여건에서든여호와께서”라고 하였습니다. 그만큼 여호와를 인정하고 경외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룻기에서는 이처럼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가 가문의 복을 받게 된다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와 같으므로 룻기에 나오는 사람들이 “여호와께서”라고 말하는 것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룻도 그렇게 말했습니다. 나오미가 두 며느리에게 돌아가라고 하였을 때 한 말에서 볼 수 있습니다. 116-17절 말씀입니다.

  룻이 이르되 내게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묻힐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를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는지라.”

  룻이 생각하는 여호와는 어떤 여호와이실까요? 시어머니 나오미를 통해 보았을 것입니다. 어렵고 힘든 처지에 빠진 시어머니, 남편도 두 아들도 재산도 없는 그 시어머니께서 뭐가 좋아서 여호와를 따르는지를 생생하게 보고 도전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적으로 보면 아무 것도 없는 시어머니를 따라나설 일이 없었겠지만 여호와를 믿었기에 따라나설 수 있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한 신앙으로 살아가니까 보아스를 만나게 되었고 가문이 끊어지지 않고 일어나게 되었고 결국은 다윗의 가문을 이루게 된 것입니다.

  룻을 만난 보아스 역시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이므로 “여호와께서”라고 말합니다. 보아스가 밭에서 일하는 사람들과 서로 축복하는 말에서 볼 수 있습니다. 24절 말씀입니다. “마침 보아스가 베들레헴에서부터 와서 베는 자들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니 그들이 대답하되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복 주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니라.”

  보아스가 그 밭에서 이삭을 줍던 룻에게 한 말 가운데서도 볼 수 있습니다. 211-12절 말씀입니다.

  보아스가 그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네 남편이 죽은 후로 네가 시어머니에게 행한 모든 것과 네 부모와 고국을 떠나 전에 알지 못하던 백성에게로 온 일이 내게 분명히 알려졌느니라. 여호와께서 네가 행한 일에 보답하시기를 원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날개 아래에 보호를 받으러 온 네게 온전한 상 주시기를 원하노라 하는지라.”

  룻이 나오미가 일러준 대로 보아스의 발치에 누워있을 때 보아스가 한 말 가운데서도 나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39-10절 말씀입니다.

  이르되 네가 누구냐 하니 대답하되 나는 당신의 여종 룻이오니 당신의 옷자락을 펴 당신의 여종을 덮으소서 이는 당신이 기업을 무를 자가 됨이니이다 하니. 그가 이르되 내 딸아 여호와께서 네게 복 주시기를 원하노라 네가 가난하건 부하건 젊은 자를 따르지 아니하였으니 네가 베푼 인애가 처음보다 나중이 더하도다.”

  이어서 나오는 13절 말씀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이 밤에 여기서 머무르라 아침에 그가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네게 이행하려 하면 좋으니 그가 그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행할 것이니라 만일 그가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네게 이행하기를 기뻐하지 아니하면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네게 이행하리라 아침까지 누워 있을지니라 하는지라.”

  보아스가 약속한 대로 기업을 무르게 되자 성문에 있는 모든 백성과 장로들이 한 말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411-12절 말씀입니다.

  성문에 있는 모든 백성과 장로들이 이르되 우리가 증인이 되나니 여호와께서 네 집에 들어가는 여인으로 이스라엘의 집을 세운 라헬과 레아 두 사람과 같게 하시고 네가 에브랏에서 유력하고 베들레헴에서 유명하게 하시기를 원하며, 여호와께서 이 젊은 여자로 말미암아 네게 상속자를 주사 네 집이 다말이 유다에게 낳아준 베레스의 집과 같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니라.”

  이에 보아스가 룻을 아내로 맞이하게 되자 “여호와께서(4:13) 아들을 낳게 해주셨습니다. 그러자 여인들이 나오미에게 찬송하였습니다. 414절 말씀입니다. “여인들이 나오미에게 이르되 찬송할지로다 여호와께서 오늘 네게 기업 무를 자가 없게 하지 아니하셨도다 이 아이의 이름이 이스라엘 중에 유명하게 되기를 원하노라.”

  이처럼 룻기를 보면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이 범사에 “여호와께서”라고 고백하거나 복을 빌어주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경외하는 자가 받게 되는 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복은 무슨 복입니까? 가문의 복입니다. 룻기를 마지막으로 장식하고 있는 것은 다윗의 가문입니다(4:18-22). 룻기에 나오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이 알든 모르든 이를 향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이 우리의 구주가 되시는 예수님께서 탄생하시는 “다윗(4:22)의 가문을 이루는 일에 함께 참여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날 우리에게도 쓰임받게 되는 복이 주어질 수 있으므로 여호와를 더욱 더 잘 경외하시길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오늘 주제를 총정리하고 마치겠습니다.

 

  여호와에 대한 모든 것을 알 수는 없지만 분명한 것은 믿을 수 있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고 맡기고 따라갈 수 있습니다. 나오미를 보면 그러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나오미는 심히 괴로움을 당했습니다. 그래서 그저 코앞에 닥치는 일을 처리하기에 급급했습니다. 남편에 이어 두 아들마저 죽자 살날이 걱정이 되었습니다. 세 여자가 어떻게 살아가겠습니까? 눈앞이 캄캄했을 것입니다.

  이러한 일들이 어떻게 해서 자신에게 일어났는지 몰랐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죽을 지경에 빠졌어도여호와께서”라고 하였습니다. 남편도 두 아들도 재산도 없는 빈손이어도여호와께서”라고 하였습니다.

  나오미는 이러한 힘들고 어려운 처지에서도 여호와를 굳게 믿고 경외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룻과 함께 베들레헴으로 다시 돌아오게 되었고 결국은 보아스를 통해 가문이 다시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다윗의 가문을 이루는 큰 복을 받게 된 것입니다.

  우리도 나오미를 본받아 이렇게 경외하는 자세를 가져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형편에 따라 오락가락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알 수 없는 일을 만나게 되지만 그러한 가운데서도 잃지 않아야 하는 것은 여호와께 대한 믿음입니다.

  여호와께서 행하시는 섭리를 알 수는 없지만 결국은 합하여 선을 이루어주시는 신실하시고 참 좋으신 여호와이시라는 것을 굳게 믿고 그러하신 여호와께 경배를 드리고 따르게 된다면 모든 영역이 회복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나오미와 같이 어떠한 형편과 처지에 있더라도 변함없이 끝까지 여호와를 잘 경외하시길 바랍니다.

 

 

 

● 안녕하세요. 이서영 목사입니다. 본 룻기 강해는 참좋은제자들교회에서 2018년 1월에 강해설교한 것을 일부 수정하여 파워포인트로 만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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