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의 참 자유] 제2장 이신성화(以神聖化)의 자유
[제2부] 성화의 자유
제2장 이신성화(以神聖化)의 자유
제2장 개요
그리스도인답게 살아갈 수가 없습니까? 어떻게 좋은 해결책이 없습니까? 있습니다! 그동안 우리는 안 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하려고 해도 잘 안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그동안 우리의 노력으로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우리를 자유하게 하는 진리에 의해서, 자유하게 하시는 주님의 영에 의해서 살아가면 벗어날 수가 있게 됩니다.
이신칭의는 의롭다고 인정을 받고 천국에 간다는 것이지 의로운 성품으로 변화된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구원 얻은 그리스도인은 이신성화(以神聖化), 즉 성령님으로 성화를 이룬다는 것도 함께 믿어야 합니다. 내주하신 성령님을 모시고 성령님을 따라 행하게 될 때 거룩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즉 이신성화를 하려면 가장 먼저 우리는 성령님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 다음에 내주하시는 성령님으로 충만하게 되어 장성한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안 계시고 성경이 없어서 무능력한 것이 아닙니다. 있어도 행할 능력이 없기에 무능력하게 지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행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간절히 기도드리고 성령님을 따라서 행합시다. 그러면 더 이상 죄와 사망의 법에 묶여 있지 않고 생명의 성령님의 법으로 자유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를 받게 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않게 되고 영의 일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힘으로가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살면 자유하게 됩니다. 그러면 이신성화의 자유함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제2장 내용
1. 경건의 능력을 회복하려면!
우리는 신앙생활이 잘 안 되는 이유를 우리 나름대로 생각하면서 해결해보려고 노력해 왔습니다. 그러나 여지없이 실패하고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도 기쁨도 없는 상태로 신앙생활을 해 왔던 것입니다. 교회나 우리들의 모습이 세상과 다를 바가 없게 된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갈수록 냉랭해져서 신앙의 즐거움을 잘 모르고 지내왔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때는 세상의 쾌락과 정욕에 기웃거리기도 했습니다.
그리스도인답게 살아갈 수가 없습니까? 어떻게 좋은 해결책이 없습니까? 있습니다! 이러한 모습에서 벗어날 방법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서 성령님의 내적 깨우침을 통해서 이것을 분명하게 계시하여 주고 있습니다. 그동안 우리는 안 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하려고 해도 잘 안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그동안 우리의 노력으로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우리를 자유하게 하는 진리에 의해서, 자유하게 하시는 주님의 영에 의해서 살아가면 벗어날 수가 있게 됩니다.
그동안 우리는 우리 자신의 기준을 세워놓고 신앙생활을 해 왔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교만은 큰 죄입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고 반역하고 불순종하고 멸시하고 무시하는 것은 교만입니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수없이 이렇게 하나님을 대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고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다고 했습니다.
“사무엘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는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하니”(삼상 15:22-23).
이제는 이러한 잘못되고 교만한 마음을 버려야 합니다. 우리의 기준을 내려놓고 이제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기준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항상 기억하고 섬기고 따라야 합니다. 그래야 예수님을 믿는 재미를 알게 되고 교회당에 다니는 재미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 어디에 우리가 모든 노력을 끊임없이 해서 구원을 얻으라고 했습니까? 신구약 성경 여기저기에 보면 “이렇게 섬기고 살아라. 저렇게 섬기고 살아라”고 하는 것이 많은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것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동안 우리는 명령이행의 무거운 짐만을 바라보고 잘못된 순종을 함으로써 눌려 지내왔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짓눌릴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롬 1:17)고 했습니다. 믿음으로 구원을 이루게 된 것을 분명하게 믿으면 됩니다. “이신칭의(以信稱義)” 즉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아서 구원을 얻게 된 것을 먼저 믿으면 됩니다.
그러나 이신칭의만으로는 전인적인 구원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이신칭의는 의롭다고 인정을 받고 천국에 간다는 것이지 의로운 성품으로 변화된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구원 얻은 그리스도인은 “이신성화(以神聖化)” 즉 성령님으로 성화를 이룬다는 것도 함께 믿어야 합니다.
이들을 시간적으로 보면, 이신칭의가 먼저 일어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신분의 변화가 생김으로써 즉각적인 구원이 완성됩니다. 그 다음에 이신성화가 시작되는데 이 땅에 사는 동안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을 살게 됨으로써 점진적인 구원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영화인데 부활하여 천국의 삶을 살게 됨으로써 영원한 구원이 완성되는 것입니다. 칭의와 성화와 영화의 구원, 셋 다 우리가 할 수 없는 것을 삼위일체가 되신 하나님께서 모두 이루어 주신 것입니다.
칭의와 영화의 구원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인간 편에서 인간이 어떻게 해볼 수 없는 구원입니다. 그러나 성화의 구원은 조금 다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고 의지하는 가운데 우리가 힘써야 합니다.
이제 경건의 능력을 회복하기 위해서 이 세 가지 중에서 이신성화에 대한 것을 보다 자세하게 살펴보겠습니다.
2. 이신성화(以神聖化)란?
먼저 “이신성화(以神聖化)”라는 용어를 사용하게 된 이유를 설명하려고 합니다.
“이신성화”는 성령님으로 성화를 이룬다는 것입니다. 이신칭의와 함께 그리스도인은 성령님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성령님은 이론적인 성화가 아니라 성화를 실제로 이루어 주십니다. 실제로 “새로운 피조물로 새 것이 되어”(고후 5:17) 새 삶을 살아가게 해주십니다. 이신칭의(以信稱義)와 함께 이신성화(以神聖化)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이러한 이신성화는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실제로 성화의 삶을 사는 것을(겔 36:27) 말합니다. 신분의 구원에 머물지 않고 말씀대로 살도록 하심으로 삶의 구원까지 이루어 주시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것을 본 장에 자세히 설명해 놓았습니다.
일반적으로 흔히 쓰고 있는 “성화”라는 용어는 거룩하게 되기 위해서 스스로 노력한다는 의미로 사용되는 것 같아 보다 성경적인 용어로 사용하고자 합니다. 이신칭의와 이신성화는 각각 “신”으로 이루어지는데 이신칭의는 “믿을 신(信)”을 의미하고 이신성화는 “신 신(神)”을 의미합니다. 이신성화는 이신칭의라는 용어와 함께 사용할 수 있도록 한 것인데 신이신 성령님으로 성화를 이룬다는 것입니다. 내주하신 성령님을 모시고 성령님을 따라 행하게 될 때 거룩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성경적 근거로는 로마서 2장 13절에서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누구도 행함으로 의로워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3장 28절에서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이신칭의”인 것입니다.
이신칭의에 있어서 율법은 우리를 의롭게 하지 못하고 다만 죄를 깨닫게 할 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율법의 죄를 무시해버리고 의롭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율법을 아무 쓸모가 없는 것으로 만든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오히려 율법을 완성하시고 율법을 마쳤다고 하셨습니다. 율법을 폐한 것이 아니라 도리어 굳게 세웠다고 하신 것입니다.
로마서 3장 31절에서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파기하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고 했습니다. 율법을 행할 수가 없어서 “이신칭의”를 받았는데 어떻게 율법을 굳게 세울 수가 있단 말입니까? 여기에서 “이신성화”라는 용어를 만든 배경이 시작됩니다.
율법으로 불가능한 것을 로마서 8장 1-4절에서 가능하도록 했습니다. 얼마든지 행함으로도 율법을 이룰 수가 있게 된 것입니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가 있는 것입니다(마 19:26). 로마서 8장 1절에서 4절을 읽어봅시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렇습니다. 우리가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셔서 육신에 죄를 정하여(롬 8:3)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여 주신 것입니다(갈 3:13). 성령님을 따라 행하므로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해주신 것입니다(롬 8:4).
갈라디아서 5장 16절과 18절에서도 성령님을 따라 행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않게 되고 율법 아래 있지 않게 된다고 했습니다. 고린도후서 3장 17절에서는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갈라디아서 5장 1절에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려고 우리에게 그 자유를 주셨으므로 다시는 율법과 같은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5장 4절에서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고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라고 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령님을 주셔서(롬 5:5)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모시고 사랑하고 순종하며 살 수 있게 하십니다. 우리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가능하게 된 것입니다.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듣고 믿음에서냐”(갈 3:5).
믿음으로 가능하게 된 것입니다. 생명의 성령님의 법(롬 8:2)과 성령님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벧전 1:2)으로 가능하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것이 이신성화인 것입니다. 성령님으로 거룩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이 이신성화의 삶을 산 경우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바울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기 위해서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골 1:29)고 했습니다. 디모데에게는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네게 부탁한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딤후 1:14)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마음으로 믿어 시인하는 그리스도인인 우리 안에는 예수님이 주님의 영으로 친히 들어와 계십니다. 우리 안에 거처를 정하시고 계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요 14:17).
이러한 사실은 믿음으로 알게 됩니다. 성령님이 오실 때 믿게 하십니다.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요일 4:13).
우리에게 주신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알게 되는 것입니다(요일 3:24). 이것은 하나의 이론이 아니라 실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몸은 하나님의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의 성전이므로(고전 3:16-17) 우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하는 것입니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 6:19-20).
그런즉 이신성화를 하려면 가장 먼저 우리는 성령님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님으로 거듭 태어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 다음에 내주하시는 성령님으로 충만하게 되어 장성한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달리 표현하면 믿음에 의해 의로워져서(이신칭의), 성령님으로 그리스도인답게(이신성화) 살자고 하는 것입니다.
디도서 3장 4절에서 8절에서도 알 수가 있습니다. 우리의 의로운 행위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하심으로 말미암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님의 새롭게 하심과 성령님을 풍성히 부어주심으로 은혜로 의롭다 하심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고린도후서 3장 18절에서도 알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후 3:18).
주님의 영으로 말미암아 주님과 같은 형상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이신성화를 이루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종합해볼 때 “성화”는 “성령님으로”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신성화”를 사용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실제로 내 안에 주님의 영이 계신 것을 믿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실생활 가운데 주님의 영이 행하시도록 내어 드리고 따르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성령님이 맡아서 우리로 하여금 율례를 행하도록 하십니다.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겔 36:27).
그럴 때 우리는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3. 이신성화를 하려면!
“이신성화”를 하지 않으면 우리의 노력과 열심과 의를 앞세우게 되므로 자유하게 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의와 영광을 가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답지 못한 이유가 됩니다. 종교적인 열심과 수고로 인해 쉽게 지치고 낙심하게 되는 것입니다. 말만 시끄럽고 되는 일은 별로 없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구원을 얻은 그리스도인의 남은 과제가 바로 이것인 것입니다. 어떻게 새롭게 됩니까? 어떻게 해방되어 자유를 누립니까? 즉 “이신성화”를 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우리 스스로는 완전히 순종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죄악과 처절한 싸움의 상태에 있습니다. 로마서 7장 21절에서 24절을 보면, 바울은 선을 행하기를 원하는데 원하지 않는 악을 행하였으며, 악과 선이 함께 자기 속에 거하는 것을 깨닫고는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24)고 탄식을 하였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죄와 율법의 저주를 친히 받으시고 우리를 속량해주셨는데 왜 여전히 하나님께 순종하기가 어렵습니까? 성경은 싸움이 없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피할 수 없는 싸움이 있으므로 끝까지 싸워서 구원을 이루라고 하였습니다. 이 구원은 이신성화의 구원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전투는 우리가 죽기 전까지 끝나지 않고 계속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힘으로 불순종을 제어할 수 없습니다. 우리 자신의 힘으로는 이 원수를 정복하지 못합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고백을 할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주 예수님은 이렇게 마음이 상한 자를 찾기 때문입니다. 깊은 흑암과 절망 속에 있는 사람에게 다가와서 구원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죄인을 부르러 오셨기 때문입니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을 때 하나님의 빛이 임하여 질서를 찾게 하시는 것입니다(창 1:2). 그래서 우리의 비통함이, 우리 교회의 비통함이, 우리 가정의 비통함이, 오히려 기적적인 하나님의 구원이 임하는 순간이 됩니다. 우리는 날마다 새로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고후 4:16).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골 3:10).
그러기에 탄식하는 사람이 행복하다고 한 것입니다.
이러한 성화를 이루기 위해 먼저 남아 있는 악한 세력들과의 싸움을 세부적으로 어떻게 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행히도 우리에게 이길 수 있는 비결을 주셨습니다. 내 이름으로가 아니라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면 됩니다. 발꿈치라 할지라도 물리면 치명적인 독이 있으므로(창 3:15) 즉시 빼내어야 합니다. 이것은 “예수님 이름으로 회개를 속히 하면 된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고 파리처럼 끝까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고 달려드는(요 10:10) 악한 영들을 계속해서 쫓아내야 합니다. 이것은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약 4:7)는 말씀처럼 “예수님 이름으로” 꾸짖어 쫓아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로 하여금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시려고(요 10:10)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시고 오셨으며 우리와 세상 끝날까지 항상 함께 계시고 그러한 권세를 주셨습니다.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 28:18, 20).
완벽한 최후 승리를 거두게 해 놓으신 하나님께서 앞으로 남아 있는 부분적인 전투까지도 승리하게 하시려고 우리를 끝까지 지켜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지키시므로 악한 자가 우리를 만지지도 못하는 것입니다(요일 5:18, 5:4-5, 계 17:14).
“그들이 어린 양과 더불어 싸우려니와 어린 양은 만주의 주시요 만왕의 왕이시므로 그들을 이기실 터이요 또 그와 함께 있는 자들 곧 부르심을 받고 택하심을 받은 진실한 자들도 이기리로다”(계 17:14).
성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우리가 사는 동안 우리 마음속에 있는 영적인 삶과 육적인 삶이 여러 분야에서 싸움을 벌이게 됩니다. 어떻게 영의 삶이 이길 수 있게 되는지를 알아보기로 합니다.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도록 하면 됩니다. 우리가 나서면 안 됩니다. 우리는 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하나님께 드리고 맡겨야 됩니다. 우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께서 하나님 자신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우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십니다(빌 2:13, 대하 30:12, 사 63:14).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게 됩니다(롬 8:5). 영을 따라 행하는 사람은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 16절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18절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리라.” 25절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라고 했습니다. 즉 성령님을 따라 살면 된다는 것입니다.
“이신성화”는 우리가 이루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님으로 되는 것입니다. 은혜로 되는 것입니다. 선물로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우리를 택하셨고 선한 일을 위해 행하도록 해주십니다.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엡 2:10).
일을 행하시고 일을 만드시고 성취하시는 하나님께서(렘 33:2) 이렇게 확실하게 이루시고 계십니다.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빌 1:6).
우리를 부르시는 이는 미쁘시므로 그가 또한 이루시는 것입니다(살전 5:23-24). 여호와께서 우리 앞에서 행하시며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우리 뒤에서 호위하셔서 행하게 하시는 것입니다(사 52:12).
“두 사도가 오래 있어 주를 힘입어 담대히 말하니 주께서 그들의 손으로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여 주사 자기 은혜의 말씀을 증언하시니”(행 14:3).
우리는 천국열쇠를 가졌습니다. 천국열쇠 중에서 이신성화의 삶을 여는 열쇠는 성령님을 인정하고, 성령님의 역사에 우리 자신을 맡기고, 그 성령님의 역사에 힘써 동참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님의 일에 거역하면 여지없이 패배하게 됩니다. 그러나 성령님과 함께 힘써 노력하게 되면 자유를 누리게 됩니다. 로마서 8장 2절에 나오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님의 법은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셨다는 것입니다. 앞으로도 얼마든지 하신다는 것입니다.
못 하실 일이 없으시고 무슨 계획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욥 42:2) 하나님이시지만 우리의 협력을 요청하고 계십니다. 성령님은 돕는 자로서 도와주기 위해 우리 안에 계십니다. 도우러 오셨는데 “가만히 계세요. 내가 할께요”라고 하는 것은 겸손이 아니라 교만입니다. 항상 성령님 안에서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모든 기도와 간구를 하되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라”(엡 6:18).
우리 자신을 스스로 속이지 말아야 합니다(약 1:22).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 하십니다.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게 됩니다(갈 6:7).
심고 거두는 법칙이 있는데 믿음대로(마 8:13, 살전 2:13), 생각대로(엡 3:20), 말대로(막 11:23, 민 14:28), 행하는대로(약 1:25, 눅 11:28) 거두게 됩니다.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님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님으로부터 영생을 거두게 되는 것입니다(갈 6:7-8). 우리는 영의 일을 생각하고, 성령님을 위하여 심고, 성령님 안에서 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불의의 무기에서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롬 6:13-14).
드리는 쪽의 종이 되기 때문입니다.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을(롬 7:21) 바울은 알았습니다. 그래서 죄가 지배하지 못하도록 선에게 드려서 복종하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도록 한 것입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이러한 것들이 행함의 비결이 됩니다. 율법의 마침을 이룰 수가 있게 됩니다. 물론 완벽한 행함은 이룰 수가 없겠지만 그리스도의 분량까지 계속하여 자라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을 얼마나 드리느냐, 성령님과 말씀이 얼마나 충만하게 되느냐(행 6:7, 17:11-12, 19:20), 얼마나 순종하고 간절하게 기도하느냐에 따라 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게 되었다면 즉각적인 행함으로 순종해야 합니다. 믿음이 있노라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그 믿음이 우리를 구원할 수가 있겠습니까? 행함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입니다(약 2:14, 17). 믿음의 결과로 반드시 행함이 따라 오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행함 없는 믿음은 죽은 상태와 같다고 하는 것입니다. 행할 때에 유익이 있는데 행하지 않으면 아무 열매가 없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행하는 그 순간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게 되지만, 불순종하는 순간마다 원수 마귀의 뜻을 이루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한 가지라도 순종하여 실행할 때 복이 되고, 진리로 자유하게 되는 순간이 되는 것입니다.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천하는 자니 이 사람은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약 1:22, 25).
그러나 항상 유의할 점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님을 따라서 행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안 계시고 성경이 없어서 무능력한 것이 아닙니다. 있어도 행할 능력이 없기에 무능력하게 지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행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간절히 기도드리고 성령님을 따라서 행합시다. 그러면 더 이상 죄와 사망의 법에 묶여 있지 않고 생명의 성령님의 법으로 자유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한 가지 유의할 것은 우리가 마치 하나님이라도 된 것처럼 우리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성령님을 따라 행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않게 되지만(갈 5:16) 그렇다고 해서 우리 마음대로 그렇게 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원한다고 다 된다면 우리가 하나님 행세를 하게 되기 때문으로 보이고 또한 마땅히 그러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탈하지 않도록 우리를 위해 의도적으로 아래와 같이 조치해주셨을 것입니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갈 5:17).
아무리 좋은 것이라 하더라도 우리가 주인 행세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하므로 하나님이 주권자이신 것을 알고 우리는 그저 감사한 마음으로 겸손하게 성령님을 따라 행하는 것입니다.
이신성화를 이루려면 성령님을 훼방하지 말아야 합니다.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도 너희 조상과 같이 항상 성령을 거스르는도다”(행 7:51).
성령님을 모독하지 말아야 합니다(눅 12:10).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에 대한 모든 죄와 모독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모독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도 사함심을 얻지 못하리라”(마 12:31-32).
성령님을 근심시키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원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엡 4:30).
“그들이 반역하여 주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였으므로 그가 돌이켜 그들의 대적이 되사 친히 그들을 치셨더니”(사 63:10).
성령님을 소멸시키지 않아야 합니다.
“성령을 소멸하지 말며”(살전 5:19).
또한 성령님을 노엽게 하지 말고 청종해야 합니다.
“너희는 삼가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고 그를 노엽게 하지 말라 그가 너희의 허물을 용서하지 아니할 것은 내 이름이 그에게 있음이니라, 네가 그의 목소리를 잘 청종하고 내 모든 말대로 행하면 내가 네 원수에게 원수가 되고 네 대적에게 대적이 될지라”(출 23:21-22).
이신성화를 하려면 무엇보다도 성령님을 받아야 합니다.
“이르되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이르되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계심도 듣지 못하였노라”(행 19:2).
성령님을 받아야 증인이 될 수 있습니다.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사 61:1).
성령님을 받아야 권능을 받고 예수님을 보고 들은 증인(행 2:32, 4:20)이 되는 것입니다.
성령님을 받으면 성령님의 열매(갈 5:22-23)와 은사(고전 12:4-11)도 얻게 됩니다.
가장 중요한 생명을 거듭남으로 얻게 됩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요 3:5-8).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닙니다. 즉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러하므로 그리스도인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롬 1:6),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있는 자(롬 8:9)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의 영이 없이 교회에만 다니는 사람은 “교인”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종교인”은 될지언정 “그리스도인”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자녀로 천국에 갈 수가 없고 천국의 삶을 살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님을 받는다는 것이 너무도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성령님을 부어 주겠으니(욜 2:28, 사 44:3) 구하라고 하신 것입니다(눅 11:10, 13).
“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욜 2:28).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눅 11:10, 13).
구하여 받으라고 명령하셨다는 것은 성령님을 받아도 되고 안 받아도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님을 반드시 받되 충만하게 받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요 20:22).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엡 5:18).
성령님이 언제 임하시게 되는지를 간단하게 살펴보기로 합니다. 안수 받을 때(행 8:17), 말씀 들을 때(행 10:44), 순종할 때(행 5:32, 요 8:29), 회개할 때(행 2:38), 기도할 때(행 8:15) 받게 됩니다. 특히 기도는 빌기를 다하매(행 4:31), 간절히 기도할 때(눅 11:13), 함께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쓸 때(행 1:14) 받게 됩니다. 간절히 사모하는 자가 좋은 것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시 107:9).
“우리를 너희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굳건하게 하시고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그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우리 마음에 성령을 주셨느니라”(고후 1:21-22).
성령님은 누구에게서 오십니까?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고 하셨는데 그것이 바로 성령님이셨습니다(행 1:4). 그 성령님이 오순절 날 임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한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가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행 2:33). 성령님께서 삼위 하나님의 영으로 오신 것입니다.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요 15:26).
즉 아버지의 성령(마 10:20), 그리스도의 영(롬 8:9, 갈 4:6), 또 다른 보혜사(요 14:16, 26)로서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도 세례 요한에게서 물세례를 받으신 후에 성령님으로 세례를 받으셨습니다(마 3:16). 그런 이후에 성령님의 충만함을 입어 성령님에게 이끌리어 광야로 가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고 이기셨던 것입니다(마 4:1, 눅 4:1). 이후 비로소 천국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예수님께 성령님과 능력을 기름 붓듯이 임하셨으므로 복음을 전파하시고 가르치시고 고치셔서 자유하게 하신 것입니다(마 4:23, 행 10:38).
우리는 이제 성령님과 함께 살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 자신과 우리의 모든 것과 삶을 전적으로 성령님께 맡겨야 합니다. 맡겨야 맡아서 이루어 주십니다. 맡기지 않으면 성령님은 맡은 일이 없어서 쉬고 계십니다. 맡길 때 기적이 일어납니다. 기적은 사람이 만드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의 몫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맡아달라고 하면 짜증을 내지만 하나님은 오히려 제발 맡겨만 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한 것을 성경에서 찾아보겠습니다.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네가 경영하는 것이 이루어지리라”(잠 16:3).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시고”(시 37:5).
“네 짐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가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원히 허락하지 아니하시리로다”(시 55:22).
이제까지는 우리가 감당해 오느라고 고생하고 실패한 적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 “하나님에 의해서” 승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신칭의의 구원과 이신성화의 구원과 영화의 구원을 모두 얻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우리의 생명도 구원해 주시고 우리의 금생과 내생의 삶까지도 맡아서 구원해 주시니 얼마나 놀랍고도 감사한 일입니까!
다만 이때까지는 우리가 제대로 잘 응답하지 못해서 복음의 능력을 스스로 제한시켜 온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참 자유를 누리고 복음의 능력을 누리려면 우리가 행하려고 하기 전에 먼저 성령님이 이끄시는 대로 따라야 합니다. 이제 이렇게 맡기면 자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님을 따라 이신성화의 생활을 영위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님으로” 살아가는 수많은 것들이 성경에 있습니다. 지면상 몇 가지만 소개하기로 합니다. “신, 망, 애” 즉 믿음, 소망, 사랑은 항상 있어야 합니다(고전 13:13). 신망애에 대한 것을 각각 성경에서 찾아보기로 하겠습니다. 먼저 믿음에 대한 것은 “성령으로 믿음을 따라”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갈 5:5), 소망에 대한 것은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롬 15:13), 사랑에 대한 것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롬 5:5, 15:30)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이루기 위해서 우리의 노력이 앞서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으로부터 하면 되는 것입니다.
신망애 가운데 제일은 사랑이라고 했으므로 사랑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사랑의 능력은 위대합니다. 사랑은 감동을 줌으로써 변화를 가져오게 합니다. 그런데 이 사랑을 성경이 “너희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고전 16:14)고 해서 행할 것입니까? 아니면 “성령의 사랑으로” 따라서 행할 것입니까? 이제까지는 우리의 사랑은 계란으로 바위치기였을 것입니다. 사랑의 능력이 미미했을 것입니다. 사랑하고 싶었지만 잘 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성령의 사랑으로” 사랑해 나가면 됩니다. 놀라우신 하나님의 사랑이 임하게 될 것입니다.
그 다음 주제로 전도를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전도는 주님께서 명령하신 것으로 이웃을 사랑하고 대접하는 것이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십니다(고전 1:21). 전도해야 되는 것은 믿음은 들음에서 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전파해야 듣고 들어야 믿게 되고(롬 10:17),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어야 살아나기 때문입니다(요 5:25)
그렇다면 전도를 해야 되는데 전도할 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늘로부터 보내신 “성령을 힘입어” 복음을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벧전 1:12). 우리의 말과 우리의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고전 2:3-4).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전도하는 것입니다(살전 1:5).
참고로 전도 요령을 마태복음 7장 7절과 8절에서 찾아본다면 다음과 같습니다. 먼저 구하라!(기도하라), 그 다음에 찾아라!(나가라), 마지막으로 두드려라!(전하라). 전도 대상자를 기도하면서 구하고, 전도 대상자를 나가서 찾고, 찾은 전도 대상자에게 복음을 전해 마음을 두드리는 것입니다.
성령님으로 함께 살아가야 하는 것에 관한 성경구절은 무수히 많습니다. 그 가운데 몇 가지만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살전 1: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롬 8:26-27).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너희의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신을 세우며 성령으로 기도하며”(유 20).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가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께서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영적인 일은 영적인 것으로 분별하느니라”(고전 2:10, 13).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요 16:13).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어떤 사람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니라”(고전 12:7-11).
우리가 성령님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에 있지 않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령님으로 살려고 하면 성령님으로 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성령님을 따라 행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않게 됩니다(갈 5:16, 18, 25).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속사람이 능력으로 강건하게 되는 것입니다(엡 3:16).
4. 하나님에 의해서!
삼위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셔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해 주셨고(창 1:26-27),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받게 하셨고(롬 1:6, 사 43:1),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게 하셨습니다(고전 6:11). 곧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이”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받은 사람들인 것입니다(벧전 1:2).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고(갈 4:6, 롬 8:15),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고(고전 12:3) 모시고 따르며, 성령님을 보혜사로 모시고(요 14:26, 15:26) 따라 행하며 살아가는 우리는 더 이상 무능력하게 살지 않게 됩니다. 우리 자신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지만 광대하시고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넉넉하게 감당하도록 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그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마 19:26).
“나는 여호와요 모든 육체의 하나님이라 내게 할 수 없는 일이 있겠느냐”(렘 32:27).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슥 4:6).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로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님으로 율법을 완성시키려고 도와주십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도 남김없이 모두 성취시키셨고 이것을 성령님께서 하나씩 우리에게 이루어 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에 의해서 전적으로 타락하고 무능한 우리이지만 넉넉하게 모든 것을 잘해 낼 수가 있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를 받게 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않게 되고(갈 5:16) 영의 일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롬 8:4-5).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롬 8:9-14).
예수님은 우리의 주님이 되셔서 주님의 영으로 항상 함께 계시면서(골 1:27) 우리의 모든 것을 다스려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우리의 노력으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되는 것입니다.
바울의 말을 들어봅시다.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골 1:29). 우리도 바울처럼 힘을 다하되 우리 각 사람 속에 살아계셔서 역사하시는 주님의 영의 능력으로 수고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신구약 성경 모두 하나님의 영으로 된다는 것을 알 수가 있었습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하라! 하지 말라!”는 식의 명령에만 신경을 써왔지 “누구에 의해서” 해야 된다는 것을 잘 의식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우리 “힘”으로, 우리 “의”로서가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살면 자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인정하고 우리의 모든 것을 맡깁시다.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리라”(잠 3:6).
그러면 “이신성화”의 자유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율법에 의해서가 아니라 은혜로 믿음으로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신칭의와 이신성화의 삶을 살게 됩니다. 누구에 의해서? “하나님에 의해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자유하게 하고, 영광으로 인도해 주시는, 선하시고 인자하신 하나님께 영원무궁하도록 찬송을 드림이 마땅할 것입니다.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신들 중에 뛰어난 하나님께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주들 중에 뛰어난 주께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홀로 큰 기이한 일들을 행하시는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시 13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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