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의 참 자유] 제6장 고난으로부터의 자유
제6장 고난으로부터의 자유
제6장 개요
고난은 우리의 주인이 될 수도 있고 고난이 우리의 종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고난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고 사느냐 모르고 사느냐의 차이입니다. 고난의 의미를 알게 됨으로써 자유하게 됩니다. 고난은 그리스도인답게 사는 필수 코스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염려와 고난에서 벗어나서 자유하게 됩니까? 짐을 맡길 줄 알게 되면 자유하게 됩니다. 고난에서 자유하게 되려면 가난한 마음으로 죄인임을 알고 나약하고 무능하고 무익한 것을 알면 됩니다. 고난에서 자유하게 되려면 고난에 처해 있을 때에 기도하고 찬미하면 됩니다. 그러면 열려지고 풀려져서 자유하게 됩니다.
또한 그리스도인이 됨으로써 받는 고난이 있을 때 오히려 감사하면 자유하게 됩니다. 우리가 멀리 바라보는 눈을 가진다면 현실의 욱여쌈도 거뜬히 평안한 가운데 자유하게 됩니다. 현재의 고난은 장래에 있을 영광과 비교할 때 아무 것도 아닌 것입니다.
우리의 주가 되신 예수님은 우리가 고난을 받으실 줄을 아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시험을 받으시고 고난을 당하셨으므로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와주실 수 있으신 것입니다(히 2:18). 이러한 것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우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을 이기셨기 때문입니다(요 16:33).
그리하여 이제 우리도 예수님을 따라 시험과 고난을 잘 이겨내고 정금 같이 쓰임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참으로 고난으로부터 자유하게 된 것입니다.
제6장 내용
1. 고난은 필수 코스입니다!
고난은 우리의 주인이 될 수도 있고 고난이 우리의 종이 될 수도 있습니다. 고난이 주인이 되면 우리는 혹독한 종살이를 해야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고난을 종으로 삼으면 큰 유익을 얻게 됩니다. 이것은 고난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고 사느냐 모르고 사느냐의 차이입니다. 고난의 의미를 알게 됨으로써 자유하게 됩시다.
고난은 그리스도인답게 사는 필수 코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고난이 없어도 잘되기를 바라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고난이 없으면 교만하게 되므로 고난을 통해서 낮아지고 섬길 줄 알고 기다릴 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고난 당한 것이 내게는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시 119:67, 71).
이러한 사람들은 고난을 당해도 감사하며 기뻐하게 됩니다.
신앙이 좋은지 어떤지를 알려면 평상시에는 분별이 잘 안 됩니다. 그러나 어려움이 오면 알곡과 가라지의 정체를 알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의 시험에는 여러 가지 종류가 있고 여러 단계가 있습니다. 시험의 성격과 수준에 따라 그에 알맞은 자격과 자리가 주어집니다. 하나님께서도 시험을 하시고 마침내 복을 주십니다.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광야에서 네게 먹이셨나니 이는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신 8:16).
시험을 통과해야 맡은 일을 감당해 낼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무턱대고 우리를 시험하시는 것이 아니라 감당할 은혜와 사명을 주시려고 감당할만한 시험을 주십니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 10:13).
우리는 고난과 연단의 골짜기를 지나갈 때 눈앞이 캄캄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능히 감당할 시험만을 주시고 피할 길도 주셔서 이기게 하십니다. 고난이란 시험을 통해 우리를 온전하게 하시고 굳건하게 하시고 강하게 하시고 터를 견고하게 해주시는 것입니다(벧전 5:10).
우리는 대부분 모든 일에 있어서 평안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함께 해주신 사람마다 형통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배부르고 등이 따뜻할 때입니다.
“그들은 번성할수록 내게 범죄하니 내가 그들의 영화를 변하여 욕이 되게 하리라”(호 4:7).
“그들이 먹여준 대로 배가 불렀고 배가 부르니 그들의 마음이 교만하여 이로 말미암아 나를 잊었느니라”(호 13:6).
그렇게 보살펴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을 배반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수룬이 기름지매 발로 찼도다 네가 살찌고 비대하고 윤택하매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을 버리고 자기를 구원하신 반석을 업신여겼도다”(신 32:15, 참고. 신 8:12-14, 31:20).
그렇게 해놓고도 하나님께서 돌아오라고 목이 터져라 외쳐도 돌이키지 않습니다.
“네가 평안할 때에 내가 네게 말하였으나 네 말이 나는 듣지 아니하리라 하였나니 네가 어려서부터 내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함이 네 습관이라”(렘 22:21).
그래서 결국은 우리 스스로가 하나님으로 하여금 어쩔 수 없이 사랑의 채찍을 들 수밖에 없게 합니다. 그럴 때에야 비로소 허둥거리면서 부르짖게 되는 것입니다(사 26:16).
하나님은 사랑하고 아끼는 자녀를 그냥 내버려 두시지 않으십니다. 잘 키우고 싶어 하십니다. 잘 자라서 훌륭하게 쓰임받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철저하게 깨뜨리실 때도 있는 것입니다.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하였으니,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히 12:5-6, 8, 11).
귀한 그릇이 되라고 고난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기 자녀가 잘되기를 바라는 사랑하는 아버지 하나님의 심정인 것입니다.
2. 염려와 고난에서 벗어나려면!
우리는 어떻게 하면 염려와 고난에서 벗어나서 자유하게 되겠습니까? 우리가 어떠한 문제일지라도 그 짐을 맡길 줄 알게 되면 염려에서 자유하게 됩니다. 우리를 보시고 문제 앞에서 염려 걱정하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염려한다고 키를 1센티미터라도 늘일 수 없고 흰 머리카락 한 개도 까맣게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염려는 목적을 달성시키지도 못하면서 마음만 상하게 합니다(잠 15:13). 염려는 덫에 걸리게 하고 말씀을 가로막게 합니다.
“가시떨기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마 13:22).
그러므로 염려를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눅 21:34).
밤새도록 염려하고 걱정만 한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된다면 얼마든지 염려하고 걱정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염려하고 걱정해도 안 됩니다. 그래서 염려를 아끼지 말고 주저하지 말고 즉시 버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염려는 주님께 맡겨달라고 권고하시는 것입니다(벧전 5:7).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감사함으로 아뢰라고 하시는 것입니다(빌 4:6-7).
염려를 해결하고 자유하게 되려면 세상 일로 염려하지 말고 하나님의 일에 먼저 관심을 가지고 동참하면 됩니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1-33).
하나님의 일을 하게 되니까 하나님께서 그 모든 것을 책임져 주시는 것입니다.
무거운 짐과 넘을 수 없는 장벽 때문에 걱정하는 그 시간에 하나님께 부르짖고 맡겨 버리면 자유하게 됩니다.
역대하 20장 1-30절을 보면 여호사밧은 “…이 환난 가운데에서 주께 부르짖은즉 들으시고 구원하시리라…”(20:9)는 말씀을 믿고 근거하여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우리를 치러 오는 이 큰 무리를 우리가 대적할 능력이 없고 어떻게 할 줄도 알지 못하옵고 오직 주만 바라보나이다…”(20:12).
그러자 하나님께서 “이 전쟁에는 너희가 싸울 것이 없나니 대열을 이루고 서서 너희와 함께 한 여호와가 구원하는 것을 보라 유다와 예루살렘아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고 내일 그들을 맞서 나가라 여호와가 너희와 함께 하리라…”(20:17)고 하셨습니다.
그들은 이를 믿고 여호와께 경배를 드리고 “…여호와께 감사하세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도다…”(20:21)라고 찬송하였습니다. 그 노래와 찬송이 시작될 때에 여호와께서 복병을 두셔서 적들이 한 사람도 피한 자가 없을 정도로 이기게 해주셨습니다. 탈취한 물건도 너무 많아서 사흘 동안에 걸쳐 거두어들일 정도로 대승을 거두게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방에서 평강을 주셨으므로 나라가 태평하게 해주셨습니다.
고난에서 자유하게 되려면 우리가 가난한 마음으로 죄인임을 알고 나약하고 무능하고 무익한 것을 알면 됩니다. 주님만이 하실 수가 있다고 하면서 “오직 주님이 아니고는 안 됩니다. 주님, 구원하여 주시옵소서!”라고 부르짖어 의뢰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가난한 마음을 가진 사람은 결코 연약하지 않고 가난하지도 않습니다. 주님으로 인해서 강하고 담대한 마음을 가지게 되고 모든 것을 갖춘 천국을 소유하게 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마 5:3).
우리의 연약함은 오히려 하나님의 도움을 더 강하게 받도록 하는 것이 됩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사 41:10).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시 27:1).
“그리하면 여호와 그가 네 앞에서 가시며 너와 함께 하사 너를 떠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 아니하시리니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놀라지 말라”(신 31:8).
우리 앞에 좋은 일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 사는 동안 문제는 항상 있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가 오히려 하나님을 의지하는 계기가 되고, 하나님과 함께 뛰어넘게 되는 체험적인 신앙의 계기가 되는 것입니다.
“여호와여 주는 나의 등불이시니 여호와께서 나의 어둠을 밝히시리이다, 내가 주를 의뢰하고 적진으로 달리며 내 하나님을 의지하고 성벽을 뛰어 넘나이다”(삼하 22:29-30, 참고. 시 18:29).
연약하여 가난한 마음을 가진 사람은 겸비한 사람이 되어 주님만을 의뢰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가졌고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하는 부자의 마음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을 의뢰하지 않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연약함으로 오히려 강하게 된 것입니다.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곧 강함이라”(고후 12:9-10).
바울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으로 말미암아 사형선고를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진 줄로 알 정도로 힘에 지나는 심한 고생을 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말미암아 자기를 의지하지 않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큰 사망에서 건지셨고 또 건지실 것이며 이 후에도 건지실 줄을 믿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바랐던 것입니다(고후 1:8-10).
바울은 또한 육체에 가시로 고생했습니다. 그것은 일평생 벗겨질 수 없는 자기 십자가로 여겼습니다. 세 번이나 기도한 후에 하나님의 뜻임을 깨닫고 받아들였습니다. 자만하지 않게 하려는 것임을 알고 약한 데서 온전하게 됨을 감사하게 생각했습니다(고후 12:7-9).
우리 역시도 고난의 사망골짜기를 통과할 때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고 바라보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은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고 원망불평하지 않고 오히려 겸손하게 감사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광야에서 오직 주 하나님과만 만나는 연단을 받지 않고서는 하나님의 은혜와 섭리와 능력과 구원을 잘 모르게 됩니다. 반대로 고난의 훈련과정을 거칠수록 전적으로 믿고 의지하고 겸손하게 헌신하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사나 죽으나 오직 주님의 것임을 믿고 오직 주님을 위하여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롬 14:8).
고난에서 자유하게 되려면 고난에 처해 있을 때 기도하고 찬미하면 됩니다.
“너희 중에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찬송할지니라”(약 5:13).
그러면 열려지고 풀려져서 자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과 실라가 옥에 갇혀 있었으나 잠을 자지 않고 한밤중에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였습니다. 그러자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다 열리고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지게 되었습니다(행 16:19-26). 베드로가 옥에 갇히자 교회는 베드로를 위해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베드로가 두 쇠사슬에 매여 누워 자는데 주의 사자가 나타났습니다. 베드로의 옆구리를 쳐서 깨우면서 일어나게 하였습니다. 그러자 쇠사슬이 벗겨지게 되었고 옥에서 벗어나게 되었습니다(행 12:5-12).
누군가가 기도해도 벗겨지고 열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가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백하며 병이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약 5:16).
중보기도의 위력인 것입니다. 기도할 수 없을 정도로 힘들어할 때 주위 사람들이 간절하게 기도를 해줘야 한다는 것입니다(엡 6:18).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행 2:47)고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찬미하며 중보기도와 같은 것을 통해 도와줌으로써 칭찬을 들을 때 하나님께서 날마다 구원받는 사람을 더하여 주실 것입니다. 우리도 구원하여 주셔서 자유하게 해 주실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됨으로써 받는 고난이 있을 때 오히려 감사하면 자유하게 됩니다. 요한계시록 2장 9절과 10절에서 예수님은 환난과 궁핍이 있지만 실상은 부요하다고 하였으며 죽도록 충성하면 생명의 관을 주겠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직 우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해야 합니다.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우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을 당하면 복 있는 사람입니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우리 위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가운데 누구든지 살인이나 도둑질이나 악행이나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로 고난을 받지 말려니와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으면 부끄러워하지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하는 것입니다(벧전 4:12-16).
우리가 멀리 바라보는 눈을 가진다면 현실의 우겨쌈도 거뜬히 평안한 가운데 자유하게 됩니다. 현재의 고난은 장래에 있을 영광과 비교할 때 아무 것도 아닌 것입니다.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롬 8:17-18).
눈앞의 현실의 안락함과 유익에 현혹되지 않고 저 영원한 천국에서 살게 될 소망을 가지고 기뻐하면 되는 것입니다. 이 땅에 쌓기 위해서 계획하고 투자하는 것이 아니라 내 고향 천국에 쌓으려고 할 때에 마음도 천국으로 향하게 되는 것입니다.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마 6:19-21).
결국 세상에서 소망을 두기보다 천국에 소망을 둠으로써 세상을 이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히 11:16).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고후 5:1).
3. 예수님의 시험과 고난
예수님이 시험과 고난을 어떻게 이기셨는가를 살펴봄으로써 자유하게 되려고 합니다. 시험에 들지 않고 악에게 지지 않으려고 합니다. 예수님의 시험에 대해서 먼저 살펴보겠습니다.
태초에 창조해 놓은 아름다운 에덴동산이 있었고 아름다운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탄이 유혹하여 범죄하게 함으로써 사람과 만물에 죄와 허물과 사망과 고통이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 10:10).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을 죄인으로 만든 사탄의 시험을 몸소 받아 이기셔서 본이 되어 주셨습니다.
이제 이 사악한 마귀가 사용한 탐스러움의 세 가지와 이를 깨뜨려버리신 예수님의 말씀 세 가지를 대비하여 자유하려고 합니다.
먹음직(창 3:6)
마귀: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마 4:3, 참고. 눅 4:3).
예수님: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마 4:4, 참고. 눅 4:4).
예수님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라”고 하셨습니다(요 6:48).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라고도 하셨습니다(요 6:55).
요한은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 20:31)고 했습니다. 또한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 1:14)고 했습니다.
이를 종합해 보면, 마귀의 말대로 선악과를 먹으면 사망을 하게 되지만 예수님의 말대로 하면 생명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요 6:63).
마귀와 세상이 주는 것은 먹고 또 먹어도 배고파져서 결국 그 욕심 때문에 죄를 짓고 사망에 이르게 됩니다. 그러나 생명이신 예수님과 함께 하면 금생과 내생의 영생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보암직(창 3:6)
마귀: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이며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마 4:8-9, 참고. 눅 4:5-7).
예수님: “…사탄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마 4:10, 참고. 눅 4:8).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요 14:6) 예수님은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요 14:1)고 하셨으며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요 14:7)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님을 바라봅시다(히 12:2). 마음이 청결한 자가 복이 있어 하나님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마 5:8).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둠이 얼마나 더 하겠느냐,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 6:21-24).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요일 2:15-17).
이를 종합해보면 마귀의 말대로 마귀에게 경배하여 만국 영광을 얻어도 세상으로부터 온 물질일 뿐이고 예수님 말씀대로 하면 세상의 물질이 아니라 주 하나님 아버지를 경배하고 섬기게 하십니다.
마귀와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바라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을 바라보면 세상이 들어차게 되고 하나님을 바라보면 하나님이 들어차게 됩니다. 세상에 미련을 두고 뒤를 돌아본 롯이나 쟁기를 손에 잡고 뒤를 돌아보는 사람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지 못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주님을 바라보지 못하고 세상의 파도를 바라봄으로써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게 됩니다(마 14:28-33). 그러나 주님을 믿고 바라보고 앞으로 달려가면 물 위라도 걷게 되는 것입니다.
참된 영광은 주님께로부터 받는 것이지 마귀로부터 받는 것이 아닙니다. 마귀는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지 못하게 함으로써 하나님과 이간을 시키려고 하나 예수님은 우리를 하나 되게 하시려고 경배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지혜로움직(창 3:6)
마귀: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마 4:5-6, 참고. 눅 4:9-11).
예수님: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마 4:7, 참고. 눅 4:12).
예수님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습니다(골 2:3).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입니다(잠 9:10).
그러나 마귀와 같은 부류는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으며 스스로 지혜 있다고 하나 어리석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는 것입니다(롬 1:21-23). 마귀도 하나님이 한 분이신 줄을 알고 믿고 떱니다(약 2:19, 눅 4:41, 행 19:15). 그러므로 예수님 이름으로 쫓아내면 떨면서 쫓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마귀는 하나님의 존재를 믿기는 했지만 자신의 주 하나님으로 믿고 섬기고 모시고 따르지 않는 것입니다.
이를 종합해보면, 마귀 말대로 하면 지혜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어리석게 되고, 시험하지 말라는 예수님 말씀대로 하면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참으로 알 것을 제대로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진실로 그렇습니다. 세상의 지식이나 지혜로움은 생명을 주지 못합니다.
의인은 불신하며 시험하는 자가 아닙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아가는 사람입니다(롬 1:17). 못 믿어서 의심하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을 굳게 믿는 사람인 것입니다. 우리는 시험하지 말고 무조건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사람의 예를 들자면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가 있습니다. 그들은 베드로에게 “…너희가 어찌 함께 꾀하여 주의 영을 시험하려 하느냐…”(행 5:9)라는 책망을 들은 후에 곧바로 연이어 부부가 죽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지혜가 말하기를 “대저 나를 얻는 자는 생명을 얻고 여호와께 은총을 얻을 것임이니라, 그러나 나를 잃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해하는 자라 나를 미워하는 자는 사망을 사랑하느니라”(잠 8:35-36).
이제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주님의 말씀으로 믿음으로 능히 마귀와 싸워서 이기게 되었습니다. 이길 수 있는 지혜가 부족하면 지혜를 구하면 됩니다. 성경은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약 1:5)고 약속한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두 마음을 품어 조금이라도 의심하지 말고 오직 믿음으로 구하면 얻게 되는 것입니다(약 1:6-8).
예수님은 온갖 시험과 유혹을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물리치셨습니다. 그리고 “사탄아 물러가라”고 단호하게 꾸짖으셨습니다. 그러자 마귀는 떠나고 천사들이 나아와서 수종을 들었던 것입니다(마 4:11, 눅 4:13).
예수님은 우리가 경배해야 할 대상은 하나님이심을 알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먹을 생명의 양식은 하나님의 말씀임을 알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수단은 지혜임을 알게 하셨습니다(마 10:16). 즉 하나님이신 예수님, 말씀이신 예수님, 지혜이신 예수님과 함께 살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럴 때에 시험을 이기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받으신 고난을 통해서 우리도 고난으로부터 자유하게 됩니다. 우리가 받는 고난을 통해 예수님의 생명이 나타나게 하면 자유하게 됩니다. 그 귀한 보배를 질그릇과 같은 우리에게 담게 해주십니다. 능력이 우리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 있음을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후 4:7-10).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님을 바라봅시다. 예수님은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하지 아니하셨으므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시게 된 것입니다. 우리도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기 위해서는 죄인들이 이같이 예수님께 거역한 일을 참으신 것을 생각해야 되는 것입니다(히 12:2-3). 우리의 주가 되신 예수님은 우리가 고난을 받으실 줄을 아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시험을 받으시고 고난을 당하셨으므로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와주실 수 있으신 것입니다(히 2:18).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셨은즉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히 5:8-9).
이러한 것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우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을 이기셨기 때문입니다(요 16:33).
이제 우리도 예수님을 따라 시험과 고난을 잘 이겨내고 순금 같이 쓰임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욥 23:10).
그리스도인으로서 참으로 고난으로부터 자유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 14:27).
고난에서 구원해 주신 주님께 찬양을 드립시다.
“여호와께서는 자기 백성을 기뻐하시며 겸손한 자를 구원으로 아름답게 하심이로다”(시 14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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