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의 참 자유] 제4장 회개의 자유
제4장 회개의 자유
제4장 개요
회개는 죄인인 것을 아는 데서부터 출발합니다. 그렇게 할 때 죄에서 돌이키게 됩니다. 그런데 가장 먼저 돌이켜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이 회개는 곧 부흥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오늘날과 같은 깊은 암흑기에는 부흥이 절실히 요구되고 있습니다. 부흥은 하나님을 만나는 행위인 예배의 회복을 통해서 일어날 수 있습니다.
예배가 회복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찾고 만나야 하고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하고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관심을 가지고 동참해야 합니다.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용서해야 합니다. 용서는 이웃에 대한 사랑의 표현입니다. 이 세상에 살면서 이웃과 좋은 관계를 가져야 되기 때문에 계속적인 회개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회개는 언제 해야 됩니까? 회개는 아낄 필요가 없습니다. 빠를수록 좋습니다. 회개하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회개하지 않으면 징계를 받습니다. 그렇다면 진정한 회개란 무엇입니까? 회개하고 나서 어떻게 하느냐 입니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렇게 돌이키면 회개의 자유를 누리게 됩니다. 관계의 회복이 그것입니다. 세상과 사탄과의 관계를 끊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것입니다. 이 관계의 회복은 자신과의 관계를 회복시키며, 가족간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 환경과의 관계를 회복하게 합니다.
이처럼 돌이킨다는 것은 얼마나 복된 것인지 모릅니다. 부흥은 회개의 역사를 통해서 일어납니다. 어떤 시대나 어떤 교회나 어떤 일이나 누구에게나 참된 회개는 참된 부흥을 가져다줍니다. 하나님께서 임하셔서 친히 역사하시기 때문에 달라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제4장 내용
1. 너는 오직 네 죄를 자복하라!
“너는 오직 네 죄를 자복하라….”
예레미야 3장 13절에 나오는 말인데 마치 “네 죄를 네가 알렸다!”고 호통치는 포도대장을 연상하게 됩니다. 서릿발 같은 엄명이 떨어지면 죄인들은 그 앞에서 벌벌 떨면서 이실직고하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언행심사를 낱낱이 아시는 하나님께서 “자복하라”고 하시는데도 두려워하거나 놀라지도 않고 태연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이러한 우리의 모습과는 달리 요나서 3장에 나오는 니느웨 사람들은 크게 자복하였습니다. 이들은 요나가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진다”고 외치자 하나님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 높고 낮은 자를 막론하고 굵은 베 옷을 입고 회개하였습니다. 이 소문이 니느웨 왕에게 들리자 왕이 보좌에서 일어나 왕복을 벗고 굵은 베 옷을 입고 재 위에 앉아 회개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조서를 내려 니느웨에 선포하였습니다.
“왕과 그의 대신들이 조서를 내려 니느웨에 선포하여 이르되 사람이나 짐승이나 소 떼나 양 떼나 아무것도 입에 대지 말지니 곧 먹지도 말고 물도 마시지 말 것이며, 사람이든지 짐승이든지 다 굵은 베 옷을 입을 것이요 힘써 하나님께 부르짖을 것이며 각기 악한 길과 손으로 행한 강포에서 떠날 것이라,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시고 그 진노를 그치사 우리가 멸망하지 않게 하시리라 그렇지 않을 줄을 누가 알겠느냐 한지라”(욘 3:7-9).
이들은 듣는 귀가 있었기에 회개를 함으로써 왕과 모든 백성들과 짐승들조차도 임박한 진노를 피하게 된 것입니다.
자복한 사례를 더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하나님이 세례 요한을 통해서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였습니다. 그러자 온 유대 지방과 예루살렘 사람이 다 나아가 자기 죄를 자복하고 요단 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았습니다(막 1:4-5). 죄인임을 인정하고 겸비해진 아름다운 의인들도 있었습니다. 의로운 척하는 바리새인과는 달리 죄인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하였습니다(눅 18:13).
시몬 베드로가 밤이 새도록 수고를 하였지만 잡은 것이 없었지만 예수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렸습니다. 그러자 고기가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잡혔습니다. 그때 예수님의 무릎 아래에 엎드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하였습니다(눅 5:8).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고 나서 예수님 말씀대로 닭이 울자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한 적도 있습니다(마 26:75).
이렇게 회개한 심령이 되었으므로 성령님으로 충만하여져서 담대하게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라고 선포하였습니다(행 2:38). 이 말을 받은 사람들이 세례를 받았는데 이 날에 신도의 수가 삼천 명이나 더하였던 것입니다. 이들은 마음이 찔려서 “우리가 어찌할꼬”라고 자복한 사람들이었습니다(행 2:37).
그러나 마음이 찔려도 다른 방향으로의 찔림이 있습니다. 스데반이 증거한 말씀을 백성과 장로와 서기관들과 대제사장이 듣고 마음에 찔렸습니다. 이들은 듣고 찔리긴 했지만 회개하지 않고 도리어 귀를 막고 이를 갈면서 일제히 달려들어 성 밖에 내치고 돌로 쳤습니다. 바울이 되기 전의 사울도 이 현장에서 바라보고는 이들처럼 스데반의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겼습니다. 바울은 한 술 더 떠서 교회를 잔멸하려고 각 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겼습니다(행 7:54-8:3).
우리는 마음에 찔렸을 때 대적하지 않고 회개해야 됩니다. 우리는 충고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럴 때 바울처럼 돌이키게 되는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핍박자에서 증거자로 바뀔 것입니다. 회개의 축복과 은혜와 능력을 누릴 것입니다. 그러나 귀를 계속 막으면 선지자를 돌로 치는 행위이요 결국은 자기 자신을 돌로 쳐서 멸망하게 하는 것입니다.
회개는 죄인임을 아는 데서부터 출발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죄인임을 자복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행 19:18). 죄를 알고 죄 용서함을 받기 위해 겸비하게 하나님께로 돌이키게 되기 때문입니다.
“살아 있는 사람은 자기 죄들 때문에 벌을 받나니 어찌 원망하랴, 우리가 스스로 우리의 행위들을 조사하고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우리의 마음과 손을 아울러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들자”(애 3:39-41).
지금 이 시간 마음을 다하고 손을 들어 자복하면서 다윗처럼 간절히 부르짖읍시다.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따라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주의 많은 긍휼을 따라 내 죄악을 지워 주소서,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으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 무릇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주의 얼굴을 내 죄에서 돌이키시고 내 모든 죄악을 지워 주소서,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켜 주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시 51:1-3, 9-12).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요일 4:8). 하나님께서 우리를 회개시켜주시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옛적에 여호와께서 나에게 나타나사 내가 영원한 사랑으로 너를 사랑하기에 인자함으로 너를 이끌었다 하였노라”(렘 31:3).
우리가 멸망당하는 것을 절대로 원하지 않으시고 구원 받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회개하여 죄에서 벗어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시기를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 10:10)고 하셨습니다.
우리를 공의로 심판하시는 것조차도 우리에게 구원의 유익을 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요 3:17).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렘 29:11).
심판이 목적이 아니라 구원하여 평안이 넘치고 죄가 없는 거룩한 나라로 인도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이렇게 자복하고 회개하는 길은 오직 주 예수님 이외 다른 길이 없습니다. 어떠한 수행이나 명상이나 고행으로는 이를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교인 중에서조차도 인간의 선행을 앞세우는 종교적 의식행위가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자기의 이름으로, 공로로는 회개의 길이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 이름 이외에 다른 구원의 길이 없음을 알고 현혹되지 않아야 합니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행 4:12).
예수님께서 오실 때에만 죄 사함이 있고 풀려지는 역사가 있게 됩니다. 주님의 영이 임하실 때 죄를 깨닫게 되고 회개함으로써 자유하게 되는 것입니다(요 16:7-8).
예수님은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눅 5:32)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가장 처음으로 전파하신 말씀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 4:17)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회개해야 천국이 오는 것입니다. 돌이켜 회개해야 하나님의 나라가 회복되기 때문입니다. 이제 죄악을 회개하는 우리에게 천국이 임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잘못했다하더라도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면 “내가 노하여 너를 쳤으나 이제는 나의 은혜로 너를 불쌍히 여겼은즉…”(사 60:10)이라고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마음을 돌이키시고 긍휼을 베풀어 주십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9).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하나님은 기뻐 받아주시고(시 51:17) 죄를 용서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를 경외하는 자에게 얼마나 인자하신지 모릅니다. 부모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같이 불쌍히 여기십니다. 항상 경책하지 않으시고 노를 영원히 품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돌이키기만 하면 죄악을 사해 주십니다. 생명을 주십니다. 좋은 것으로 우리의 소원을 만족시켜 주십니다. 할렐루야! 여호와를 송축합시다.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그의 거룩한 이름을 송축하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의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 그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네 생명을 파멸에서 속량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하게 하사 네 청춘으로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 여호와께서 공의로운 일을 행하시며 억압 당하는 모든 자를 위하여 심판하시는도다, 그의 행위를 모세에게, 그의 행사를 이스라엘 자손에게 알리셨도다, 여호와는 긍휼이 많으시고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 자주 경책하지 아니하시며 노를 영원히 품지 아니하시리로다, 우리의 죄를 따라 우리를 처벌하지는 아니하시며 우리의 죄악을 따라 우리에게 그대로 갚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하늘이 땅에서 높음 같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그의 인자하심이 크심이로다,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의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 아버지가 자식을 긍휼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나니, 이는 그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단지 먼지뿐임을 기억하심이로다”(시 103:1-14).
2. 회개와 부흥
이제 돌이키면 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가장 먼저 돌이켜야 할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이 회개는 곧 부흥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오늘날과 같은 깊은 암흑기에는 부흥이 절실히 요구되고 있습니다.
“여호와여 내가 주께 대한 소문을 듣고 놀랐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하게 하옵소서 이 수년 내에 나타내시옵소서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합 3:2).
부흥은 하나님을 만나는 행위인 예배의 회복을 통해서 일어날 수 있다고 봅니다. 예배는 너무도 중요합니다.
“내게 토단을 쌓고 그 위에 네 양과 소로 네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라 내가 내 이름을 기념하게 하는 모든 곳에서 네게 임하여 복을 주리라”(출 20:24).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 18:20).
형식적인 예배가 아니라 하나님과 실제적으로 만남이 있는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를 통해서 치유되고 회복될 수 있는 것입니다.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요 4:23).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
지금 아버지가 찾으시는 예배자가 바로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예배의 중심인 하나님을 어떻게 만나야 하는가에 따라 부흥은 결정됩니다. 예수님 당시의 때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 드리는 예배가 회복되어야 합니다. 책을 읽기만 하면 우리가 기대하는 삶의 변화가 더디게 올 것입니다. 즉시 순종해야 됩니다.
예배가 회복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세 가지를 행하고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용서를 해야 합니다. 먼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첫째, 하나님을 찾고 만나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권자이시고 중심이기 때문입니다. 만날 때 회복되기 때문입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나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암 5:4).
그러나 우리의 지난날을 되돌아보면 하나님의 존재보다 우리 자신을 인식하면서 산 적이 훨씬 더 많았습니다. 모든 결정과 판단의 기준은 우리가 중심이었습니다. 우리 편의대로 살아가기 때문에 하나님을 하루에 5분도 생각하지 못한 적도 많았습니다.
이러한 방식을 하나님은 기뻐하셨겠습니까? 아니면 슬퍼하셨겠습니까? 예레미야 2장 19절에 “네 악이 너를 징계하겠고 네 반역이 너를 책망할 것이라 그런즉 네 하나님 여호와를 버림과 네 속에 나를 경외함이 없는 것이 악이요 고통인 줄 알라 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격적으로 무시를 당해서 기분이 좋지 않기에 이런 말씀을 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에 상처를 받으신 하나님이심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먼저 우리에게 돌아오라고 부르십니다.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가 너그럽게 용서하시리라”(사 55:6-7).
우리가 하나님께 잘못을 인정하고 회개하면 언제 그랬느냐는 식으로 기쁘게 만나 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부르짖으면서 돌아가게 되면 들어주시고 받아주시는 것입니다.
“너희가 내게 부르짖으며 내게 와서 기도하면 내가 너희들의 기도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 이것은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나는 너희들을 만날 것이며 너희를 포로 된 중에서 다시 돌아오게 하되 내가 쫓아 보내었던 나라들과 모든 곳에서 모아 사로잡혀 떠났던 그 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 이것은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 29:12-14).
기도가 뚫리고 예배가 회복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으로 부흥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또 여호와와 연합하여 그를 섬기며 여호와의 이름을 사랑하며 그의 종이 되며 안식일을 지켜 더럽히지 아니하며 나의 언약을 굳게 지키는 이방인마다, 내가 곧 그들을 나의 성산으로 인도하여 기도하는 내 집에서 그들을 기쁘게 할 것이며 그들의 번제와 희생을 나의 제단에서 기꺼이 받게 되리니 이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이 될 것임이라”(사 56:6-7).
하나님의 그 인자하심은 크시고도 크신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예배를 통해 만나주신 하나님은 예배 가운데 우리에게 설교를 통해서 말씀해 주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요 생명이요 능력이 됩니다.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로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의 영혼이 살리라…”(사 55:3).
믿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음에서 납니다(롬 10:17).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이 말씀하시는데도 딴전을 피운 적이 너무도 많았던 것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들이 내 말을 듣지 않았기 때문이니라 내가 내 종 선지자들을 너희들에게 꾸준히 보내었으나 너희는 그들의 말을 듣지 않았느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 29:19).
다른 사람들이 우리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았을 때 그 심정이 어떠했습니까? 반대로 그 사람이 우리의 말을 주의 깊게 듣고 나서 그 말대로 가서 순종할 때 사랑스럽고 예쁘지 않았습니까?
하나님도 끝없이 내 말을 하고 내 주장을 하는 것보다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에 겸허하게 진지하게 경청하는 것을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말씀을 먼저 잘 들어야 무엇을 해야 할지를 알게 됩니다. 말씀하시는 분의 마음과 뜻을 알고 행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또 듣고 순종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면 목이 곧아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아니하여 받게 된 모든 재앙(렘 19:15)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즉 너희는 너희 길과 행위를 고치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하라 그리하면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선언하신 재앙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시리라”(렘 26:13).
셋째,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관심을 가지고 동참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주권자로서 모든 우주 만물을 운행하시고 전 역사를 성취하시고 계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무엇에 역점을 두시고 있는지를 잘 모른다면 이미 그 사람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한 관심이 자기의 관심 밖에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가장 우선하시는 일은 무엇입니까? 요한복음 6장 28절과 29절을 살펴봅시다. 무리가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하고 물었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대답하시되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영생을 얻고 이를 믿도록 전하는 것이 우리의 일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수행하는 것이 우리의 일인 것입니다. 4복음서를 통해 전인적 구원을 명령하신 것을 관심을 가지고 동참해야 하는 것입니다.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고(마 28:19),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고(막 16:15), 이 모든 일의 증인이 되고(눅 24:48), 예수님을 따르고 예수님의 양을 치고 먹이는(요 21:15-22) 일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두루 다니시면서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에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는(마 4:23) 사역에 관심을 가지고 참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양을 치고(벧전 5:2-4) 말씀을 먹이는(신 8:3, 마 4:4) 것에 열심을 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일에 관심이 없는 사람일수록 자기 자신을 위한 자기 일에는 매우 헌신적으로 일을 합니다. 이런 사람을 향하여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는 그에게 이르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보라 나는 내가 세운 것을 헐기도 하며 내가 심은 것을 뽑기도 하나니 온 땅에 그리하거늘, 네가 너를 위하여 큰 일을 찾느냐 그것을 찾지 말라 보라 내가 모든 육체에 재난을 내리리라…”(렘 45:4-5).
“여호와의 일을 게을리 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요 자기 칼을 금하여 피를 흘리지 아니하는 자도 저주를 받을 것이로다”(렘 48:10).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돌이키사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어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막 8:33).
우리가 하는 일에 다른 사람들이 관심을 가져주고 동참해주면 큰 힘이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는 일에 상대방이 무관심하면 큰 좌절감을 느끼고 힘이 빠지게 됩니다.
이처럼 우리도 하나님을 지치게 한 적이 있었을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을 만났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다면 하나님의 일에 관심을 가지고 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회개한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참된 예배의 회복이요 부흥이라고 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면 하나님을 생각만 해도 기쁘고 행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건이 좋지 않아도 하나님 한 분만으로도 만족해하는 것입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 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합 3:17-18).
이러한 사랑의 고백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 사랑을 받게 되는 하나님은 얼마나 기뻐하시겠습니까?
또한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면 항상 함께 있고 싶어 합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에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빠져들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하게 된다면 죄를 짓지 않게 됩니다. 마음을 다른 데에 주지도 않습니다. 사랑하는 하나님을 위해 그 분이 원하시는 일을 가장 최우선적으로 힘써 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그의 양들도 사랑하게 됩니다. 사랑하게 되면 모든 것이 사랑스러워 보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마음에도 이러한 사랑이 있습니까? 우리는 무엇을 사랑하고 있습니까? 우리 자신입니까? 아니면 우리 이외의 어떤 사람입니까? 우리의 일거리나 소유물 등입니까? 하나님 이외에 이러한 것을 더 우선하고 있다면 하나님을 입으로만 사랑하는 것이 됩니다. 더 나아가 우상을 섬기는 죄를 짓고 있다는 것이 됩니다.
“저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하게 되었나니 이로써 우리가 그의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요일 2:4-5).
참된 부흥을 원하십니까? 멀어진 관계의 회복은 사랑의 회복으로 가능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그동안 사랑하지 않고 하나님을 한쪽으로 밀쳐놓고 무시한 것에 대해서 회개하면 회복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계 2:4-5).
3. 회개와 용서
예배가 회복되기 위해서는 이웃을 사랑해야 하는데 그것으로는 용서가 있습니다. 하나님께 회개하는 수직적 회개도 있지만 이웃에게 하는 수평적 회개도 해야 됩니다. 용서는 이웃에 대한 사랑의 표현인 것입니다. 속건제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웃 관계에 있어서 정신적으로 피해를 입혔거나 물적 손해를 끼친 것이 있으면 보상하거나 용서받는 등의 회개가 필요합니다.
이것은 구원과 관련된 회개는 아닙니다. 구원과 관련된 회개는 속죄제로 예수님께서 단번에 자기를 드리셨으므로(히 7:27) 두 번 다시 희생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도록 완성시키셨습니다. 그러나 이웃과의 관계는 이 세상에 살면서 좋은 관계를 가져야 되기 때문에 계속적인 회개가 필요한 것입니다.
회개와 용서는 인간의 삶에 있어서 중요한 촉매제입니다. 서로 용서하면 용서받은 기쁨으로 감사하면서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나 서로 용서하지 않는다면 서로의 허물은 쌓여 갈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 죄악으로 인해 서로가 상처를 입으면서 살게 됩니다. 풀려지지 않으면 그 피해는 서로가 받게 됩니다. 가까운 사람이라면 그 피해는 더욱 생생하게 느껴지게 될 것입니다. 용서하지 않으면 미워하기 때문에 자기 심령이 괴로워지고 강퍅해지고 피곤해지고 기쁨과 평안이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서로 풀어줄 때 서로가 살기 좋은 천국이 됩니다. 이것이 사랑하게 되는 것이요 관계 회복의 부흥인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을 누구보다 잘 아시는 주님께서 용서와 회개가 중요하다고 많이 강조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서로 허물 많은 연약한 존재이므로 서로 용서하고 서로 용서받아야 살 수가 있습니다.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이 필요하듯이 용서도 날마다 필요한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하라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우리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소서 하라”(눅 11:2-4).
그리스도께서는 자꾸 풀어 놓으십니다. 십자가의 보혈로 죄와 사망에서 풀어 주셨고, 다른 모든 것도 주의 영과 주의 말씀으로 풀어 주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꾸만 또 묶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해주시지 않으셨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리가 용서 받았듯이 우리도 이웃을 용서해야 됩니다.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골 3:13-14).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해야 합니다(엡 4:32).
예레미야서 34장 9절을 보면 “그 계약은 사람마다 각기 히브리 남녀 노비를 놓아 자유롭게 하고 그의 동족 유다인을 종으로 삼지 못하게 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 형제자매를 종처럼 묶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묶어서 만든 노비를 자유롭게 하고 다시는 종으로 삼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풀어놓아 자유롭게 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 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하게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입니다(사 58:6).
서로 용서해야만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내가 다른 사람에게 잘못한 것이 있는데 그것을 그 사람이 용서해 주지 않고 저주를 하는 등으로 나를 묶는다면 내가 용서를 받지 못하게 됩니다. 그것은 그 사람이 풀어줘야 됩니다.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요 20:23).
그것은 내가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상대방이 나를 용서하고 풀어줄 때 하늘에서도 풀리게 됩니다. 뒤집어 이야기하면 내가 용서해줘야 상대방의 죄가 용서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상대방 또한 아무리 자신이 손해를 입었다 할지라도 용서해 주지 않으면 그 상대방 자신도 여전히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를 받지 못하게 됩니다.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않으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마 18:35).
뒤집어 말하면 상대방이 내게 지은 죄를 내가 용서해주지 않으면 내 자신이 용서를 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너희 아버지의 자비로우심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자가 되라, 비판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않을 것이요 정죄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요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요”(눅 6:36-37).
예수님은 주기도문에서 “용서해 주라”는 이야기를 하고 나서 곧바로 또 용서에 대해서 당부 말씀을 하셨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시옵고…”(눅 11:4, 마 6:12).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마 6:14-15).
그만큼 용서가 중요하고 필요하다는 것입니다(요 20:21-23).
그렇기 때문에 서로 용서를 해주지 않으면 피해를 입힌 측과 입은 측 모두가 묶여 있는 상태가 되어 버립니다. 그러므로 누구의 잘잘못을 따지기 전에 서로 용서해 줌으로써 서로를 풀어줘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서로 묶여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용서해 줘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손에는 용서의 천국열쇠가 들려져 있습니다.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마 16:19, 마 18:18).
매는데 쓰느냐 푸는데 쓰느냐는 우리에게 달려 있습니다.
항상 다투고 싸우는 집에 누가 있고 싶겠습니까?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집과 인간관계 사이에는 있기 싫어하십니다. 하나님 입장에서 보면 다 같은 형제자매이기 때문에 화목하게 사는 것을 원하시기 때문에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예배가 회복되려면 반드시 형제자매와 화목해야 합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마 5:22-24).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 하시니라”(막 11:25).
그러므로 예배와 기도가 회복되려면 비판하거나 욕하지 말고 용서해야 합니다.
남을 묶는 것은 결국 자기를 묶는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서로 용서하게 되면 사탄에게 속지 않고 그 궤계를 깨뜨려 버린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너희가 무슨 일에든지 누구를 용서하면 나도 그리하고 내가 만일 용서한 일이 있으면 용서한 그것은 너희를 위하여 그리스도 앞에서 한 것이니, 이는 우리로 사탄에게 속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그 계책을 알지 못하는 바가 아니로라”(고후 2:10-11)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용서는 어느 정도 하면 되겠습니까? 회개하면 무조건 서로 용서해야 합니다. 상대방이 나에게 어떤 잘못을 했더라도 말입니다. 일만 달란트의 빚을 탕감받고서도 백 데나리온의 빚은 탕감하지 않은 사람처럼 용서가 부족하면 관계를 잠그는 사람이 됩니다(마 18:23-35).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고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눅 17:3).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마 18:22).
용서를 수없이 해주되 거역하는 사람조차도 온유함으로 훈계해야 합니다(딤후 2:25).
용서란 잘못이 있다는 전제가 없다면 용서가 있을 수 없습니다. 용서할 허물이 없는데 무엇을 용서하겠습니까? 그러기에 용서란 허물이 있지만 탕감해주는 행위인 것입니다. 억울하고 속상하고 섭섭하지만 없는 것으로 하겠다는 것입니다. 일일이 맞대응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방인보다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용서하는 것입니다. 용서할만한 사람만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눅 11:4)하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주님의 사랑과 긍휼을 베푸는 것입니다.
“그러나 너희 듣는 자에게 내가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너희가 만일 너희를 사랑하는 자만을 사랑하면 칭찬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사랑하는 자는 사랑하느니라”(눅 6:27-28, 32).
우리가 우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겠습니까? 죄인들도 이같이 합니다. 또 우리가 우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이방인들도 이같이 하기 때문입니다(마 5:46-47).
그렇지만 서로 용서를 해주지 않는다면 서로에게 악을 행하는 것입니다. 용서하지 않으면 서로 묶여 있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즉 무엇이든 잘 안 풀리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서로 사랑하지 않는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고전 13:5).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롬 13:10).
우리 손에 들려 있는 용서의 천국 열쇠로 우리의 이웃을 풀어놓아 자유롭게 하면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풀어놓아 자유롭게 해주십니다. 서로가 풀려지게 되는 것입니다. 서로가 천국이 되는 것입니다. 서로가 풀려지고 사랑하여 합심하게 되면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게 됩니다. 막혔던 하나님과의 관계가 풀려져서 기도가 되기 시작합니다. 사랑이신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게 됩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 18:18-20).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요 14:23).
4. 회개하려면!
회개는 축복의 열쇠이자 강력한 무기입니다. 견고한 원수 마귀의 진까지도 파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더럽고 어둡고 짓눌리고 종 되었던 삶에서 거룩하고 밝고 해방되어 자유하게 된 삶을 살게 되기 때문입니다. 거룩한 하나님과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들이 사는 하나님의 거룩한 나라를 이루기 때문인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됨으로써 자신과 이웃과 환경과의 관계가 회복되기 때문입니다.
또한 회개는 사랑의 행위입니다. 사랑은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고전 13:5). 회개는 먼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을 표시하는 것이 됩니다. 하나님은 죄를 굉장히 미워하십니다. 그러나 용서하고 자복하는 것을 매우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것을 하지 않고 기뻐하시는 것을 하기에 사랑하는 것이 됩니다.
그리고 이웃에 대한 사랑을 표시하는 것이 됩니다. 타인에게 입힌 손해를 배상하고 서로 용서하는 행위는 악을 행하지 않고(롬 13:10) 자신보다 다른 사람에게 유익을 주기에 사랑하는 것이 됩니다.
그렇다면 회개는 언제 해야 됩니까?
회개는 아낄 필요가 없습니다. 빠를수록 좋습니다. 없앨수록 좋은 것입니다. 히브리서 12장 17절을 보면, 에서가 후회하고 축복을 이어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하였으나 버린 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회개의 기회가 왔을 때 즉시 해야 합니다. 회개의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됩니다.
오늘 지금 이 순간에도 손을 펴서 우리를 기다리시는 하나님께로 곧바로 돌아가야 합니다(사 65:2). 회개에 있어서는 신중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생각해 볼 것도 없이 즉각적으로 해야 합니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계 2:7).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계 1:3).
때가 가까우므로 빠를수록 좋은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빨리 회복됩니다. 지금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으면 곧바로 순종하여 회개해야 할 것입니다.
세상에 사는 동안 즉각적인 회개를 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직고하게 됩니다.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비판하느냐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냐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기록되었으되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살았노니 모든 무릎이 내게 꿇을 것이요 모든 혀가 하나님께 자백하리라 하였느니라, 이러므로 우리 각 사람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하리라”(롬 14:10-12).
뿐만 아니라 이 땅에 사는 동안에도 선악 간에 심판을 받게 되므로 그 행위의 열매를 먹게 됩니다. 그러므로 회개를 신속하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회개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회개하지 않으면 징계를 받습니다.
“유다인과 예루살렘 주민들아 너희는 스스로 할례를 행하여 너희 마음 가죽을 베고 나 여호와께 속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너희 악행으로 말미암아 나의 분노가 불 같이 일어나 사르리니 그것을 끌 자가 없으리라”(렘 4:4).
거룩하게 살려면 회개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먹고 사는 문제에만 열심을 내는 것이 아니라 회개에 있어서도 열심을 내어야 하는 것입니다(계 3:19).
예수님도 죄를 매우 미워하셨으므로 죄를 짓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장애인이 되더라도 손과 발이 범죄하면 찍어버리고 눈이 범죄하면 빼버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멀쩡한 상태로 지옥에 가는 것보다는 장애인이 되더라도 천국에 가는 것이 훨씬 낫다고 여기신 것입니다(막 9:43-47). 왜냐하면 지옥에는 절대로 갈 곳이 못되더라는 것을 너무나 생생하게 아시기 때문입니다.
“거기에서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사람마다 불로써 소금 치듯 함을 받으리라”(막 9:48-49).
요한계시록 2장 5절에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고 예수님이 에베소 교회에 말씀하셨습니다. 회개하지 않으면 교회를 옮기시겠다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이 실로암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것을 예로 들면서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눅 13:5)고 하신 것입니다.
끝까지 회개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을 대적하는 멸망의 사람도 있습니다.
“아픈 것과 종기로 말미암아 하늘의 하나님을 비방하고 그들의 행위를 회개하지 아니하더라”(계 16:11).
또한 예수님께서 권능을 가장 많이 베푼 고을들도 회개하지 않으므로 책망을 들었습니다(마 11:20). 이렇게 완악하게 회개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칼과 활이 예비 되어 있다고 했습니다.
“사람이 회개하지 아니하면 그가 그의 칼을 가심이여 그의 활을 이미 당기어 예비하셨도다, 죽일 도구를 또한 예비하심이여 그가 만든 화살은 불화살들이로다”(시 7:12-13).
악인은 죄악을 낳아서 재앙을 자초하게 되고 자기가 판 함정에 자기가 빠지게 되어 모든 재앙이 자기에게 돌아오게 되는 것입니다(시 7:14-16).
두아디라 교회에도 요한계시록 2장 21절에서 23절에 말씀하시기를 “또 내가 그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었으되 자기의 음행을 회개하고자 하지 아니하는도다. 볼지어다 내가 그를 침상에 던질 터이요 또 그와 더불어 간음하는 자들도 만일 그의 행위를 회개하지 아니하면 큰 환난 가운데에 던지고, 또 내가 사망으로 그의 자녀를 죽이리니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 줄 알리라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 주리라”고 하셨습니다.
버가모 교회에도 이르시기를, “이와 같이 네게도 니골라 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그러므로 회개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속히 가서 내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리라”(계 2:15-16)고 하셨습니다.
요한계시록 22장 14절에서 “자기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그들이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받으려 함이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마태복음 22장 2절에서 14절을 보면, 임금이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풀 때 예복을 입지 않고 참석한 사람을 발견하고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은 아무 대답이 없었기에 임금이 사환들에게 명령을 하셨습니다. “그 손발을 묶어 바깥 어두운 데에 내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두루마기를 빨지 않으면 낭패를 당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회개하지 않고 돌이키지 않은 사람은 있는 것도 빼앗기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사울 왕이 그렇습니다. 다윗에게 왕위를 옮겨버렸기에 왕의 직분과 가족의 몰락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계보에 들 수 있는 영광까지도 옮겨 가버린 것입니다(행 13:21-23). 잘못하여 책망을 들을 때 겸허하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좋은 본이 됩니다.
이렇게 거역하는 사람을 향해서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불렀으나 너희가 듣기 싫어하였고 내가 손을 폈으나 돌아보는 자가 없었고, 도리어 나의 모든 교훈을 멸시하며 나의 책망을 받지 아니하였은즉, 너희가 재앙을 만날 때에 내가 웃을 것이며 너희에게 두려움이 임할 때에 내가 비웃으리라, 너희의 두려움이 광풍 같이 임하였고 너희의 재앙이 폭풍 같이 이르겠고 너희에게는 근심과 슬픔이 임하리니, 그 때에 너희가 나를 부르리라 그래도 내가 대답하지 아니하겠고 부지런히 나를 찾으리라 그래도 나를 만나지 못하리라”(잠 1:24-28).
하나님은 구약시대에 이스라엘 백성에게 선지자를 부지런히 보내어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목이 곧고 마음이 강팍하여 하나님의 사랑이 담긴 경고를 무시해버렸습니다. 그리하여 북이스라엘과 남유다가 차례로 멸망당하고 이방나라의 포로로 끌려가게 되었습니다. 경고한 재앙이 그대로 미친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너희 악행과 가증한 행위를 더 참으실 수 없으셨으므로 너희 땅이 오늘과 같이 황폐하며 놀램과 저줏거리가 되어 주민이 없게 되었나니, 너희가 분향하여 여호와께 범죄하였으며 여호와의 목소리를 순종하지 아니하고 여호와의 율법과 법규와 여러 증거대로 행하지 아니하였으므로 이 재난이 오늘과 같이 너희에게 일어났느니라”(렘 44:22-23).
신약시대에 와서도 예수님이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을 만큼 성전이 부수어지는 등 이스라엘이 멸망당하게 된다고 경고하였습니다. 이들도 역시 무시함으로써 예수님이 미리 말씀하신 그대로 정복당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이르시되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둔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네가 보살핌 받는 날을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하시니라”(눅 19:41-44).
성경 역사뿐만 아니라 현대 역사를 살펴볼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적 암흑기마다 영적 대각성 부흥운동을 통하여 회개를 촉구하였지만 일부 사람들만 호응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를 무시해버렸습니다. 그래서 그 이후에는 전쟁이나 전염병 등에 의해서 진노를 자초하게 되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문제는 오늘날 역시 위기에 처해 있어도 영적으로 둔감하다는 것입니다. 위기 때에 평안하다고 말한 이스라엘의 거짓 선지자들과 그 말에 동조한 백성들처럼 우리의 형편이 그러합니다. 지금은 영적 총체적으로 심각한 위기임에도 불구하고 둔감한 것입니다.
어느 때보다도 통회와 자복이 절실한 때입니다. 닫혀있어 들어도 듣지 못하는 귀와 보아도 보지 못하는 눈을 주님께서 열어주시도록 기도드려야 합니다. 그래서 황무지 같은 마음이 기경 되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원하지 않는 결과를 피하기 위해서는 회개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은 웃을 때가 아니라 울 때라고 봅니다.
“그 날에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명령하사 통곡하며 애곡하며 머리 털을 뜯으며 굵은 베를 띠라 하셨거늘, 너희가 기뻐하며 즐거워하여 소를 죽이고 양을 잡아 고기를 먹고 포도주를 마시면서 내일 죽으리니 먹고 마시자 하도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친히 내 귀에 들려 이르시되 진실로 이 죄악은 너희가 죽기까지 용서하지 못하리라 하셨느니라 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사 22:12-14).
울게 됨으로써 허물과 죄로부터 벗어나 자유를 누려야 되는 것입니다. “슬퍼하며 애통하며 울지어다 너희 웃음을 애통으로, 너희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꿀지어다”(약 4:9)라고 한 야고보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진정한 회개란 무엇입니까?
회개하고 나서 어떻게 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마 3:8).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것이 중요합니다. 마음과 생각과 행동에 있어서 주님 안에서의 변화가 없다면 그것은 회개가 아니라 후회가 될 것입니다. 회개를 하면 감사와 기쁨이 충만하게 되지만 후회를 하면 죄책감과 불안에 떨게 됩니다.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판 뒤에 뒤늦게 후회를 하게 되었지만 회개를 하지 못해서 결국 죽음을 선택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회개는 합당한 열매를 맺게 되어 있습니다.
진정한 회개는 동일한 범죄를 다시 범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 후에 예수께서 성전에서 그 사람을 만나 이르시되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요 5:14).
반복되는 죄를 짓지 않으려면 회개한 깨끗한 양심이 다시 더럽혀지지 않도록 말씀과 성령님으로 충만해져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다른 악한 것이 그 빈자리만큼 들어차기 때문입니다(마 12:45).
진정한 회개는 반드시 속량하시고 인도해 주신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를 드리게 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나 감사를 하지 않고 끝없이 원망불평을 하게 되면 미움이 들어오게 됩니다. 원망불평은 백해무익합니다. 문제 해결도 안 되면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파괴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감사를 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골 3:16-17).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 5:18).
감사할 때 마음에 평안과 기쁨이 넘치게 되고 관계가 좋아지기 때문입니다.
인간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은 잘해 준 것보다는 잘못해 준 것을 더 잘 기억하고는 섭섭하게 생각합니다. ‘나에게 잘 해준 게 뭐가 있다고!’라고 하다가 그만 미워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인간관계가 좋아질 리가 없습니다. 원망불평한 사람을 만났을 때 반가울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든 사람에게든 감사해야 됩니다. 그럴 때 더욱 더 귀하게 여겨지게 되고 사랑하게 됩니다. 그래서 감사하라고 한 것입니다.
그렇게 해야 천국이 임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원망불평하고 미워한 것을 회개하고 축복하고 칭찬하고 감사할 때 회개의 열매로서 천국이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진정한 회개는 회개하고 나서 회복되었을 때 교만하거나 방심하지 않고 끝까지 겸손하게 하나님을 의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진정한 회개란 매일의 삶 속에서 꾸준히 회개함으로써 점진적인 성장을 이루는 것입니다.
5. 회개를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회개의 유익은 크고도 깊은 기쁨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용서함의 그 은혜로 인하여 크고도 깊은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게 되는 것입니다. 마음으로 영으로 감사하면서 찬양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새롭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행 3:19).
“나 여호와가 시온의 모든 황폐한 곳들을 위로하여 그 사막을 에덴 같게, 그 광야를 여호와의 동산 같게 하였나니 그 가운데에 기뻐함과 즐거워함과 감사함과 창화하는 소리가 있으리라”(사 51:3).
“여호와께서 야곱을 구원하시되 그들보다 강한 자의 손에서 속량하셨으니, 그들이 와서 시온의 높은 곳에서 찬송하며 여호와의 복 곧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과 어린 양의 떼와 소의 떼를 얻고 크게 기뻐하리라 그 심령은 물 댄 동산 같겠고 다시는 근심이 없으리로다 할지어다, 그 때에 처녀는 춤추며 즐거워하겠고 청년과 노인은 함께 즐거워하리니 내가 그들의 슬픔을 돌려서 즐겁게 하며 그들을 위로하여 그들의 근심으로부터 기쁨을 얻게 할 것임이라, 내가 기름으로 제사장들의 마음을 흡족하게 하며 내 복으로 내 백성을 만족하게 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 31:11-14).
예수님도 의인을 부르러 오신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려 오셨기 때문에(눅 5:32) 기뻐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눅 15:7).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눅 15:32).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오셨기 때문에(눅 19:10)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다 회개하기를 원하시기에(벧후 3:9) 더욱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역시도 회개하기 전에는 죄인이었지만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얻어 의인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회개했던 그 순간에 하늘에서 큰 기쁨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이키면 회개의 자유를 누리게 됩니다. 관계의 회복이 그것입니다. 세상과 사탄과의 관계를 끊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것입니다. 이 관계의 회복은 자신과의 관계를 회복시키며, 가족간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 환경과의 관계를(롬 8:19-21) 회복하게 합니다. 관계의 회복은 엄청난 회개의 선물을 받게 합니다.
“보라 내가 노여움과 분함과 큰 분노로 그들을 쫓아 보내었던 모든 지방에서 그들을 모아들여 이 곳으로 돌아오게 하여 안전히 살게 할 것이라”(렘 32:37).
“그러므로 너는 그들에게 말하기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처럼 이르시되 너희는 내게로 돌아오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슥 1:3).
“그러나 보라 내가 이 성읍을 치료하며 고쳐 낫게 하고 평안과 진실이 풍성함을 그들에게 나타낼 것이며, 내가 유다의 포로와 이스라엘의 포로를 돌아오게 하여 그들을 처음과 같이 세울 것이며, 내가 그들을 내게 범한 그 모든 죄악에서 정하게 하며 그들이 내게 범하며 행한 모든 죄악을 사할 것이라, 이 성읍이 세계 열방 앞에서 나의 기쁜 이름이 될 것이며 찬송과 영광이 될 것이요 그들은 내가 이 백성에게 베푼 모든 복을 들을 것이요 내가 이 성읍에 베푼 모든 복과 모든 평안으로 말미암아 두려워하며 떨리라”(렘 33:6-9).
“이제 네게 지운 그의 멍에를 내가 깨뜨리고 네 결박을 끊으리라”(나 1:13).
“곡식 종자가 아직도 창고에 있느냐 포도나무, 무화과나무, 석류나무, 감람나무에 열매가 맺지 못하였느니라 그러나 오늘부터는 내가 너희에게 복을 주리라”(학 2:19).
“내가 환난 중에 다닐지라도 주께서 나를 살아나게 하시고 주의 손을 펴사 내 원수들의 분노를 막으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구원하시리이다, 여호와께서 나를 위하여 보상해 주시리이다…”(시 138:7-8).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이키면 하나님의 영을 우리에게 부어 주십니다.
“나의 책망을 듣고 돌이키라 보라 내가 나의 영을 너희에게 부어 주며 내 말을 너희에게 보이리라”(잠 1:23).
하나님의 영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보여주시고 우리가 행하도록 해 주십니다.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겔 36:26-27).
우리의 굳어진 마음도 부드럽게 만들어 주십니다. 회개하여 죄 사함을 얻으면 성령님을 선물로 얻게 되는 것입니다(행 2:38). 천하와도 바꿀 수 없는 귀한 선물을 얻게 하시는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과 찬미를 드립시다. 그러면 더 많은 은사도 받게 될 것입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롬 8:32).
하나님께로 돌이키면 사람들이 보고 황폐하던 땅이 이제는 에덴동산같이 되었다고 말할 정도로 회복됩니다.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내가 너희를 모든 죄악에서 정결하게 하는 날에 성읍들에 사람이 거주하게 하며 황폐한 것이 건축되게 할 것인즉, 전에는 지나가는 자의 눈에 황폐하게 보이던 그 황폐한 땅이 장차 경작이 될지라”(겔 36:33-34).
주의 말씀의 맛이 꿀보다 더 달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시 119:103). 말씀을 듣고 먹음으로 인해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는 은혜가 임하게 됩니다.
“말씀을 듣고 말씀을 지킨 것이 저의 소유입니다(시 119:56). 주님의 증거는 저의 즐거움이요 저의 충고자입니다(시 119:24). 제가 주님의 법을 어찌 그리 사랑하는지요 제가 그것을 종일 읊조립니다. 주님의 계명들이 항상 저와 함께 하므로 그것이 저로 원수보다 지혜롭게 합니다. 제가 주님의 증거를 늘 읊조리므로 저의 명철함이 저의 모든 스승보다 나으며, 주님의 법도를 지키므로 저의 명철함이 노인보다 났습니다”(시 119:97-100)라는 고백도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십계명과 율법 자체가 우선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그 은혜로 말씀을 묵상하고 순종하게 되는 것입니다(출 20:1-2).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로 낫게도 하십니다. 사람의 매와 인생의 채찍으로 우리를 치셨으나(삼하 7:14) 다시 싸매어 주십니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호 6:1).
왜냐하면 우리는 사생자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귀하게 여겨주시고 사랑해주시는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히 12:5-10).
돌이킨다는 것은 얼마나 복된 것인지 모릅니다. 부흥은 회개의 역사를 통해서 일어납니다. 통회하고 자복하는 만큼 영적 대각성의 강도가 다르게 나타납니다.
어떤 시대나 어떤 교회나 어떤 일이나 누구에게나 참된 회개는 참된 부흥을 가져다줍니다. 하나님께서 임하시고 하나님께서 친히 역사하시기 때문에 달라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백성은 복이 있나니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는 백성은 복이 있도다”(시 144:15).
회개하여 하나님께로 돌이켜서 하나님을 자기의 하나님으로 삼는 사람과 교회와 민족에는 하나님의 지혜와 성품과 능력이 나타나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예루살렘을 세우시며 흩어진 자를 모으시며 상심한 자를 고치시며 그들의 상처를 싸매십니다. 별들의 수효를 세시듯이 그들을 다 이름대로 부르십니다. 주님은 위대하시며 능력이 많으시며 그의 지혜가 무궁하십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는 붙드시고 악인은 땅에 엎드러뜨리십니다(시 147:1-6).
“지극히 존귀하며 영원히 거하시며 거룩하다 이름하는 이가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있으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있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생시키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생시키려 함이라, 내가 영원히 다투지 아니하며 내가 끊임없이 노하지 아니할 것은 내가 지은 그의 영과 혼이 내 앞에서 피곤할까 함이라”(사 57:15-16).
하나님은 가까이 하는 자에게 가까이 하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약 4:8).
하나님께로 나아갔을 때 용서를 받게 됩니다. 잠시 동안의 진노에서 벗어나 영원한 자비로 말미암아 긍휼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잠시 너를 버렸으나 큰 긍휼로 너를 모을 것이요, 내가 넘치는 진노로 내 얼굴을 네게서 잠시 가렸으나 영원한 자비로 너를 긍휼히 여기리라 네 구속자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느니라”(사 54:7-8).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사 43:25).
“내가 그들의 불의를 긍휼히 여기고 그들의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히 8:12).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되리라”(사 1:18).
할렐루야! 우리를 기뻐하시고 아끼셔서 우리의 죄악으로부터 구원해 주신 주 하나님께 감사와 찬미와 경배를 드립시다. 우리를 자유하게 해주신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 찬양을 드립시다.
“춤 추며 그의 이름을 찬양하며 소고와 수금으로 그를 찬양할지어다, 여호와께서는 자기 백성을 기뻐하시며 겸손한 자를 구원으로 아름답게 하심이로다”(시 149:3-4).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 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권능을 세세토록 돌릴지어다 하니”(계 5:13).
[ⓒ 2023 로고스성경연구소 https://logosbibleinstitute.tistory.com 소장 이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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